*오누르 에르두르: 1984년 디야르바키르 출생, 역사학자이자 문화학자.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세계 사상사에 관한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다.
사실 "프랑스 이론"은 오랫동안 가정되었던 것보다 덜 프랑스적이다. 이것이 오누르 에르두르의 책 『남쪽의 학교』(Schule des Südens, 혹은 ‘남쪽 학파’)에서 중심 주장이다. 이 인터뷰에서 역사학자이자 문화학자는 왜 푸코, 부르디외, 식수를 알제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지 설명한다.
Q: 에르두르 씨, 피에르 부르디외,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같이 서로 다른 사상가들을 프랑스 이론이라는 키워드 아래 어떻게 모을 수 있을까요?
A: 저는 연결고리를 이론들 자체에서 그렇게 많이 보지 않습니다. 실제로 내용면에서 매우 다르거든요. 오히려 사고방식에서 봅니다. 정체성에 반대하고 차이를 지지하며, 중심에 반대하고 주변부를 지지하며, 패권에 반대하고 소수자를 지지하는 사고방식 말입니다.
Q: 현재 “프랑스 이론”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두 방향에서 비판받고 있죠. 식민주의와 관련해 맹점이 있다는 비난을 받거나, “워크니스Wokeness”를 부추긴다며 매도당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이론을 이런 비판의 협공에서 어떻게 구출할 수 있을까요?
A: 제 생각에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가차 없는 역사화입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주의 깊은 관찰 역시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이론이 원래 스스로 제기했던 유럽중심주의 문제를 결코 진정으로 극복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탈식민주의 비판을 봅시다. 프랑스 철학자들은 이론적으로는 차이와 타자성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식민주의의 실제 부당함은 단순히 간과했다는 것이죠. 저는 이런 단순한 형태의 비판은 맞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사상가들은 식민주의와 진지하게 씨름했습니다. 다만 탈식민주의 연구 진영 일부가 바라는 방식은 아니었을 뿐이죠. 물론 그들이 유럽중심주의 문제를 극복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유럽의 관점에서 그것을 그렇게 쉽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Q: 다른 한편의 비판, 즉 정체성 정치적 담론이 프랑스 이론에 기인한다는 비판은 어떤가요?
A:여기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역사적 검증을 견뎌내지 못할 의도적 또는 비의도적 왜곡이 있습니다. 프랑스 이론은 특히나 고정된 정체성에 지속적으로 반대해 왔고, 강령적으로 정체성 범주를 폐기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다시 돌아왔을지 모르지만, 더 이상 같지는 않습니다. 탈식민주의 연구의 일부가 동원하고 있는 정치화되고 경직된 새로운 정체성 개념을 비판하고 싶다면, 프랑스 이론은 차라리 논외로 두는 것이 좋습니다.
Q: 그런데 탈식민주의 연구는 부분적으로 프랑스 이론에 기대고 있습니다.
A: 프랑스 이론은 탈식민주의 연구의 정립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푸코의 담론 개념 없이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은 자크 데리다의 이론에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명확한 수용 계보가 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에서 전지구적 탈식민주의로 가는 길은 길고 직선적이지 않습니다. 질문과 배경이 근본적으로 변화합니다. 그래서 이 수용 계보에 대한 역사화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어느 시점 이후로 거리두기 제스처가 있다는 것도 분명해집니다. 오래된 프랑스의 모범들은 정치적 비난에 직면합니다. “알제리 전쟁에서 정확히 무엇을 했나요?”, “식민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같은…
Q: 예를 들어 부르디외는 군인으로 알제리에 가서 복무 후 수년간 현장 연구를 위해 머물렀습니다. 여기서 그의 아비투스 이론이 싹튼다고 쓰셨는데요. 어떻게 그렇게 되었나요?
A: 사회학적, 민족지학적 연구의 일환으로 그는 뿌리 뽑힌 존재인 카빌 농민들을 만납니다. 전쟁 지역에서 도망쳐 정착촌에 사는 그들 말이죠. 그는 농민들이 프랑스 정부에 의해 강요된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 경제적으로 엄청난 적응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어떤 행동 성향이 그 기저에 있는지 자문합니다. 당시에는 아직 거대한 아비투스 이론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10-15년 후에야 발전됩니다. 그러나 카빌 농민들이 그 이론에 기여한 바가 있다는 점은 종종 간과됩니다.
Q: 그게 무슨 뜻인가요?
A: 아비투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매우 자주 “섬세한 차이”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세련된 음악 취향을 가진 파리 외교관 아들과 덜 뚜렷한 음악 레퍼런스를 가진 외곽 지역 노동자 자녀 사이의 계급 대립 같은 것 말이죠. 그러나 부르디외가 이 개념을 처음 사용한 것은 프랑스가 아니라 알제리였습니다. 그는 프랑스식 부르주아, 학자 또는 프롤레타리아 아비투스에 대한 언급 이전에, 카빌에서 농민적 아비투스를 탐구한 것입니다. 알제리 없이는 부르디외가 자신의 이론적 건축의 개념적 기초 중 하나인 “아비투스”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Q: 부르디외는 프랑스 군인으로 알제리에 왔고, 자크 데리다와 엘렌 식수는 유대계 알제리 출신이며, 푸코는 튀니지에서 헤도니즘적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들 각각의 식민지 배경은 꽤 다른 것 같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하나로 만드나요?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삶의 궤적과 정치적 태도를 형성하는 핵심 사건들과 (식민지) 체류를 연결합니다. 그리고 이는 그들의 이론적 작업에 영향을 미칩니다. 또한 그들 모두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지식인으로서 식민주의의 불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도덕적 질문에 직면합니다.
Q: 만남과 경험을 통해 각각의 이론 형성을 묘사하셨는데요. 이론은 전기와 어떤 관계가 있나요?
A: 이론은 우선 전기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합니다. 예를 들어 데리다는 알제리에서 파리로 유학을 왔다가, 전쟁 중에 다시 알제리에서 불가피하게 병역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1962년 알제리 독립을 계기로 자신의 이름을 재키에서 자크로 바꾸면서 파리에서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가 되었죠. 그는 30년 동안 자신의 알제리 출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냅니다.
Q: 그 전에 그는 항상 마르틴 하이데거의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유명한 말을 인용했죠. 그는 태어나서, 살다가, 죽었다.
A: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데리다는 이 문장에 담긴 태도를 비판합니다. 바로 이 지점이 하이데거에게서 나치즘에 대한 성찰이 결여되었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죠. 데리다에게 이 시기는 자신의 전기적 배경에 대한 공개적 논의가 시작되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전기로 이론이 사후적으로 입증되기도 합니다. 제 책에 나오는 많은 핵심 사건들은 사후적 연출입니다.
Q: 왜 많은 지식인들이 90년대에 자신의 식민지 배경에 대해 해명하기 시작했나요?
A: 중요한 점은 90년대 프랑스에서 비로소 식민 역사와 알제리 전쟁에 대한 일반적인 사회적 기억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소극적이긴 했지만요. 또한 “프랑스 이론”의 많은 프랑스 지식인들이 회고를 감행할 만한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들은 그 시점에 미국 대학에서 이론계의 스타로 자리잡습니다. 탈식민주의 연구와 젠더 연구가 생겨나는 학과에서 말이죠. 거기서 처음으로 탈식민주의의 핵심질문이 제기됩니다. 당신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나요? 어떤 면에서 프랑스 지식인들은 이렇게 주장하면서 조커를 꺼내는 셈입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무지한 백인 프랑스인들이 아닙니다. 우리에겐 알제리 전쟁이라는 경험의 공간이 있었거든요.
Q: 중요한 주인공 중 한 명은 일찍 세상을 떠나 90년대의 이 국면을 놓쳤습니다. 미셸 푸코입니다. 책에서는 그가 튀니스 북부의 목가적인 시디부사이드에서 보낸 시간 동안 "무화과와 민트차" 외에도 "섹스와 마약의 자유로운 이용”을 추구했다고 합니다. 그에게 식민지는 욕망의 놀이터로 남았을까요?
A: 많은 유럽인들이 튀니지에 대해 갖는 신화적 이미지라 할 수 있는 태양을 찾는 이 여정은 푸코에게 이미 아이러니한 굴절이 있으며, 진실의 절반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절반은, 그가 튀니지에서 정치적 세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처음으로 정치적 지식인의 실천을 연습합니다.
Q: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나요?
A: 그는 해변을 산책하고 햇볕을 쬐는 것만 하지 않습니다. 그는 튀니스 대학의 교수였고 66년에서 68년 사이에 파리의 68년 5월이 아니라 튀니스의 68년 3월을 경험합니다. 그는 학생들에 대한 국가의 억압적 조치를 목격하고 그들을 보호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파견된 교수로서 그는 튀니지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그의 정치적 관여는 브레이크가 걸린 채로 이루어집니다. 귀국 후 좌파 개혁 대학인 뱅센 대학의 교수가 된 그는 지속적으로 정치화됩니다. 그것도 매우 급진적으로, 마이크를 든 교수라는 우리의 푸코 이미지를 규정할 만큼 말이죠.
Q: 동시에 식민주의가 그의 작품에서 공백으로 남는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왜 푸코는 그렇게 자주 탈식민 이론의 참조로 선택되는 걸까요?
A: 그것은 푸코의 도구상자가 갖는 매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담론, 지식, 권력 같은 그의 개념들이 식민지 맥락의 분석을 포함해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점 말입니다. 유의할 점은 푸코에 대한 후대의 비판이 하필 자신들의 탈식민 이론을 푸코의 사상에 맞춰 정립한 작가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를 "탈식민주의적 부친 살해"라고 부릅니다.
Q: 탈식민주의 연구의 가장 중요한 공동 설립자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파리 체류를 묘사하셨는데요. 사이드는[프랑스 이론가들의]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지지 부족을 비판합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A: 1979년 1월 사이드는 장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에 의해 “중동 평화”를 다루는 모임에 초대됩니다. 보안상의 이유로 모임 장소는 즉석에서 푸코의 아파트로 변경되는데, 푸코는 주인으로서 도움을 주지만 토론에 참여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국립도서관으로 사라집니다. 사이드의 후일담은 자신의 프랑스 우상인 사르트르, 보부아르, 푸코가 팔레스타인 측을 더 강하게 고려해주기를 기대했던 실망한 사람의 이야기로 읽힙니다.
Q: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둘러싼 오늘날의 불화, 컬럼비아 대학이나 베를린 자유대학의 시위를 생각해 보면, 당시의 갈등 구도가 다시 불거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A: 1979년에서 2024년 사이에는 푸코 아파트에서의 일화보다 오늘날 대학에서의 불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다른 중요한 일들이 분명 있었습니다. 그런 연결고리가 어떤 단락(短絡)을 피하면서도, 건설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지 확신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구조적으로 지식인들을 자주 분열시켜 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셸 푸코와 질 들뢰즈의 우정도 70년대 말 중동 분쟁에 대한 입장 차이로 크게 식어버렸죠. 푸코는 이스라엘 편에 섰고 들뢰즈는 팔레스타인 대의를 지지했습니다. 본질적인 부분은 탈식민주의 자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푸코 아파트에서의 토론에서 사이드는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을 위해 애쓰는 정치적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단일한 흐름일 수 없는 오늘날의 이른바 탈식민주의에서 다시 한번 학술-이론적 갈래와 정치-행동주의적 갈래가 보입니다.
Q: 종종 겸직(Personalunion)의 형태로요.
A: 네, 얼마간 성공적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어떤 상황에서는 이 두 갈래가 손을 잡습니다. 하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정치-행동주의적 태도가 학계에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죠. 또, 학술-이론적 태도가 일부 활동가들에 의해 학문적 잡담이라고, 너무 추상적이고 정치적으로 비겁하다고 선언되기도 합니다.
Q" 데리다를 통해 알제리의 복잡한 상황을 묘사하셨습니다. 유대인 정체성 때문에 그는 비시 정권 시절 학교에서 쫓겨납니다. 그것을 그의 사유와 삶에 일어난 “지진”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데리다의 유대계 알제리으로서의 전기가 그의 사상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A: 시민권 박탈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학교에서 쫓겨난 것은 그에게 국가 정체성의 취약성에 대한 각성을 의미했습니다. 유대인 학교 진학도 비슷하게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는 1년 내내 그곳을 빼먹었죠. 모든 부여된 소속에 대한 그의 불쾌감은 나중에 지적으로도 두드러집니다. 차이를 강조하고 “사이”의 순간들을 강조하는 해체의 제스처에서 말이죠. 알제리 유대인들은 프랑스 식민 상황에서 항상 궁지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파르딕 유대인으로서 대부분 프랑스 식민지화 이전부터 알제리에 정착해 있었습니다. 일시적 시민권 획득으로 그들은 프랑스 시민이 되어 무슬림 알제리인들보다 우위에 서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제리 프랑스인들의 반유대주의를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것은 복합적인 상황입니다. 이것은 알제리에서도 결코 식민자과 피식민자의 단순 이분법적 관계가 없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알제리 유대인들의 사례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반드시 강조되어야 합니다. 특히 데리다와 식수의 프랑스 이론에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Q: 데리다와 비슷한 방식으로 엘렌 식수 또한 의자 사이에 있다고 느낍니다. 오스나브뤼크와 알제리의 오랑 사이에요.
A: 식수의 삶에는 많은 “두 세계”가 있습니다. “두 세계”는 사실 그녀의 할아버지가 오랑에서 소유했던 가게 이름이었죠. 그녀에게 두 세계는 모계로는 독일 아시케나지 가문의 역사, 부계로는 세파르딕 가문의 역사입니다. 또 다른 두 세계는 프랑스와 알제리일 것이고, 유대인 식수와 알제리 프랑스인 식수 사이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두 세계를 잊으면 안 되겠죠. 그것은 식수가 전기적으로, 지적으로, 문학적으로 매우 오래 가져가는 형상입니다.
Q: 당신 책에 등장하는 남성 주인공들과 달리 그녀는 아주 일찍 자신의 작품에서 각인된 것들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그녀의 "여성적 글쓰기"는 어떤 역할을 하나요?
A: 그녀의 페미니스트적 글쓰기에서는 임파워먼트가 수행됩니다. 주관적 경험과 욕망이 글쓰기의 행위에서 처음부터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강조에는 또한 알제리의 사례를 주제화할 수 있는 무언가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그녀를 남성 동료들과 구분 짓습니다. 그들은 차이와 타자성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알제리 사례를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Q: 이런 이론사를 머릿속에 두고 현재의 논쟁 지형을 바라보면 어떻게 달라지나요?
A: 프랑스 지식인들에게서 우선 배우는 것은 구체적인 부당함, 이 경우에는 식민주의에 직면하여 철학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입니다. 식민지가 없었다면 프랑스 이론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현재의 논쟁 지형을 보면서 분명해지는 것은, 오늘날 너무나 자주 한탄스럽게 이야기하는 화해할 수 없는 진영적 사고가 예전에도 있었다는 점입니다. 특히 알제리 전쟁 중에는 진영을 선택해야 한다는 명령이 편재했죠. 제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제 책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어떻게 진영 논리를 빠져나갔는가 하는 점입니다. 제가 그들을 위해 변론해야 한다면, 그것은 모순에 대한, 모순을 견디는 것에 대한, 애매모호한 상황에 대한, 뉘앙스에 대한 그들의 만트라와 같은 지지일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오늘날 많은 토론을 지배하는 단순한 사고에 무력해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