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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시대의 “구멍” 상상하기  

- 『페미니즘 리부트: 혐오의 시대를 뚫고 나온 목소리들』서평-



김지안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세미나 회원


  기나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거의 평생이었을 혐오의 시대를 뚫고서 나온 “목소리들”과 페미니즘이 만났다. “목소리들”은 혐오의 시대를 ‘지나서’ 당도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견디다 못해 시대를 “뚫고 나온” 존재들이다. 혐오를 통해서, 혐오에 대항해 벼려진 “목소리들”에 선행한 것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혐오라는 정동이다. 그래서 우리는 혐오를 혐오한다고 맞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터넷상에서, 페미니즘을 말하는 동시에 소수자 혐오를 말하는 것이 그다지 특이한 현상이 아니게 되었다. 인권은 ‘챙겨줘야’ 하는 나열된 이름 중 하나가 되었고, ‘너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운동은 네가 직접 하라.’는 논리 속에서 각자도생의 한 방법인 된 페미니즘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여성혐오에 맞섰던 주체들이 또 다른 혐오를 재생산한다면, 리부트된 것은 페미니즘일까 아니면 혐오일까? 물론 지난 3년간 페미니즘은 우리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여성혐오는 언제나 일베와 함께, 일베의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되었지만 우리가 알아채지 못했던 사회 곳곳의 수많은 여성혐오가 페미니즘이라는 시각을 통해서 가시화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운동과 움직임이 조직되었다. 이런 당연한 사실들을 전제해 두고서 질문해 보고 싶은 것은 저자가 “우리 모두의 정동”이라고 표현한 ‘혐오’에 대한 것이다. 나는 페미니즘이, 저자가 “혐오의 시대”라고 명명한 지형 속에서 ‘리부트’ 되었다는 점과 여전히 혐오와 몇 가지 측면에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페미니즘 리부트』는 다양한 개념을 가지고 한국 사회의 여러 가지 현상과 영화, 그리고 특히 여러 역사적 맥락들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 중에서도 혐오에 대한 분석은 이 책에서 가장 중점적이고 현재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복잡한 질문들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혐오 중에서도 왜 여성을 향한 혐오가 그토록 많았는가? 혐오는 왜 만들어지고, 어떻게 구성되는가? 그리고 왜 ‘혐오’는 한국사회의 가장 문제적인 정동이 되었는가?’

혐오: “우리 모두의 정동”

  「혐오의 시대」에서는 그에 대한 답을 먼저 정치경제적인 맥락에서 분석하는데, 그것은 87년 체제를 통해 이야기된다. 87년 민중 봉기의 민주주의적 열정이 제도화를 통해 (일부분) 달성된 시점은 자본이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효율적 축적을 실패한 시점과 겹쳐진다. 87년 체제 이후 운동은 더 크고 합법적인 공간에서 합법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되었지만 그러한 공간에 포함되지 못한 소수자 운동은 더 작고 불법적인 공간으로 비가시화 되었다. 이러한 교착상태에서 87년 이후 운동의 상상력 고갈은 “외부 없음의 세계”를 열어젖혔고 신자유주의적 폐소공포증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로 현재 헬조선에 이르기까지 파편화된 개인들은 먹고 사는 문제에만 매몰되며, 여기서 혐오라는 정동의 물질적 기반이 만들어진다.

  두 번째로 혐오는 개인과 공동체를 경계 짓는 감정으로서 인간적 감정 중 하나인데, 혐오를 정동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그것이 문화적/사회적/집단적으로 작동한다는 의미다. 혐오라는 정동은 주체와 공동체의 경계를 교란시키는 비체에 대한 ‘집단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혐오의 대상은 실질적인 위험이 된다기보다는 인식론적 차원의 불순물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일베의 소수자 혐오가 ‘무임승차’에 대한 문제로 구성 되어있다고 보는 분석들에 덧붙여, 혐오란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불안감 속에서 작동한다고 말한다. 이런 분석은 여성/이방인이 이전보다 무언가를 획득하여 무임승차자로서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기보다는 그들이 IMF 이후로 그만큼 열악한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혐오는 나의 불안한 정체성을 견고히 하기 위해 정체성을 교란하는 소수자들, 혹은 나보다 열악한 위치에 있는 약자들을 배제하려는 정동인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혐오가 소수자를 향한 ‘집단적 반응’이자 보편적인 정동으로서 자리 잡았다. 나아가서 우리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 보았듯이, 혐오가 공공연하게 말해지고, 응원되고, 심지어 상품이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트위터에서 갓건배를 향한 심각한 혐오와 폭력을, 트랜스젠더와 젠더퀴어를 지칭하는 ‘젠신병자’와 ‘젠퀴벌레’ 같은 혐오 표현을 같은 타임라인 안에서 보게 된다. 페미니즘을 안다는 것과 별개로, 보편적 현상으로서 혐오라는 정동은 다른 차원에서 지속되고 페미니즘 역시 그것을 벗어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애초에 혐오(여혐혐)는 혐오의 대상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자 전략적 무기였다. 그렇다면 ‘여혐혐’이라는, ‘혐오를 혐오한다(는 것뿐이다)’는 정동은 정말 전략적인 처세로만 우리에게 남았을까? 혐오를 통해서만 혐오의 대상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역설은, 혐오를 둘러싼 문제가 누가 더 판을 잘 장악하는지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편의 정치학을 넘어서

  저자가 우리 안의 혐오를 검토하면서 던지는 질문도 이러한 것이다. 혐오를 활용해 우리가 부당한 정치에 맞서 싸울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사안에 대한 재빠른 단죄가 이루어지는 조리돌림이라는 형식에서, 교란자를 배제해 순수한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혐오의 동학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저자는 이런 측면에서 페미니즘이 헬조선이라는 위치에서 ‘편’을 조직하는 방편으로써 등장했던 것이 아닐지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페미니즘 리부트」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현재의 상황에 대한 “젠더전(戰)”이라는 명명은 페미니즘이 성차의 해소가 아닌 젠더 규범, 젠더 위계의 해소로 가야한다는 저자의 의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정체성의 확립을 통해 싸움의 조건을 (겨우) 만들 수 있었던 페미니즘 리부트 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은 정체성 담론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적 “외부 없음의 세계” 속에서 정체성을 기반으로 적극적인 권리를 구성하는 것 외에 눈에 보이는 대안은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이런 문제들에 대해 끝까지 질문할 수 있는 것은 비평의 영역일 것이다. 저자는 「천공의 상상력과 영화-구멍」을 통해 균질화한 사건들로 연결된 근대 서구의 보편 세계사와 의미 없는 순간들을 편집해 완결된 서사로 만드는 영화의 문제를 연결시킨다. 역사와 영화 모두 보이지 않는 것, 서사화 되지 못하는 것들을 배제함으로써 완성된다. 하지만 한편에는 “소멸을 강요당한 것들에 대한 목격의 가능성”으로서 몇몇 영화들이 존재한다. 이런 목격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내가 목격한 내 ‘곁’을 재조직하는 문제라는 점에서 이 시대에 남은 가장 정치적인 행위라고 저자는 말한다.

곁과 상반되는 의미를 지니는 ‘편’은 적대의 정치학으로서 항상 편과 편이 아닌 것을 이분화한다. 반면에 ‘곁’은 말 그대로 내 곁을 보고, 그것을 상상하는 문제다. “염려되는 것은 ‘편’의 동학에는 그 ‘편’에서 누구를 배제할 것인지를 가늠하는 강력한 타자화의 움직임과 함께 절대적인 ‘적대’의 세계관이 내재되어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소수자 운동은 편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곁에 있는 타인을 계속해서 목격하고 포함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타인을 목격한다는 것, 타인을 둘러싼 세계를 상상한다는 것, 타인에게 곁을 내어준다는 것. 이런 시작점들이 혐오를 다른 편으로 토스하는 방식을 멈추고, 혐오라는 이름의 시대를 끝내는 페미니즘의 역할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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