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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0~71년> 출간 기념(!?)으로 푸코가 등장하는, 더 정확히 말하면 푸코 읽기가 소재로 쓰인 단편 소설 하나를 번역해 올립니다. 저자는 미국의 작가 리디아 데이비스(Lydia Davis, 1947~  )로, 1997년 발표된 작품집 <거의 아무런 기억도 없이>(Almost No Memory, New York: Farrar Straus & Giroux, 1997)에 수록된 “푸코와 연필”입니다. 이 작품은 약 10년 뒤에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리디아 데이비스 작품 전집>(The Collected Stories of Lydia Davis, 2009)에도 재수록됐는데, 이번에 번역 대본으로 삼은 건 1997년판입니다(원문은 첨부파일을 참조해주세요). 작품 감상을 방해할 수 있으니 여타 더 자세한 정보는 작품 뒤에 (늘 그렇듯 주저리주저리) 적어놓은 ‘코멘트’를 참조하면 되겠습니다. 

참고로 이 작품은 푸코의 <지식의 의지에 관한 강의>를 비롯한 푸코의 콜레주드프랑스강의록을 지속적으로 출간하고 있는 난장출판사와 협의하에 난장출판사에 게제된 글을 인무브에도 함께 올립니다.

  ​▲ 리디아 데이비스, 파리, 1973년



푸코와 연필


푸코를 읽으려고 연필을 손에 들고 앉았다. 물잔을 엎어서 대기실 바닥에 흘렸다. 푸코와 연필을 내려놓고, 물을 훔친 뒤, 물잔을 다시 채웠다. 푸코를 읽으려고 연필을 손에 들고 앉았다. 공책에 메모하는 걸 멈췄다. 연필을 손에 들고 다시 푸코를 읽었다. 상담사가 출입구에서 불렀다. 공책과 펜뿐만 아니라 푸코와 연필도 집어넣었다. 상담사와 앉아서 숱하게 언쟁이 격해진 갈등 투성이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상담사가 위험을 알리며, 적신호를 보냈다. 상담사가 떠났고, 지하철로 향했다. 지하철 차칸에 앉아, 푸코와 연필을 꺼냈지만 읽지 못하고, 그 대신에 갈등 투성이의 상황, 적신호, 여행과 관련된 최근의 언쟁에 대해 생각했다. 언쟁 자체는 여행의 형태를 띠게 됐는데, 매 문장은 언쟁 당사자들을 다음 문장으로 실어날랐고, 다음 문장은 그 다음 문장으로 실어나른 바람에, 결국 언쟁 당사자들은 출발점에 있지 못하고, 여행에 지쳐서 각자 상대방을 마주보는 데 시간을 허비했다. 언쟁에 대해 생각하느라 지하철 정거장 몇 개를 지나쳐 보낸 뒤, 생각을 멈추고 푸코를 열었다. 프랑스어로, 푸코를 이해하기란 어렵다는 걸 알게 됐다. 짧은 문장들은 긴 문장들보다 훨씬 더 이해하기가 쉬웠다. 어떤 긴 문장들은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지만, 지나치게 긴 문장의 경우에는, [문장의] 끝에 닿기도 전에 어디가 시작인지 까먹었다. 시작으로 되돌아가, 시작을 이해하고, 계속 읽다가, 또 다시 끝에 닿기 전에 시작을 까먹었다. 수중의 연필을 놀리면서, 되돌아가지 않고, 이해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고, 깨닫지 않고 계속 읽어나갔다. 명확한 문장을 만나면, 여백에 연필로 표시했다. 표시는 이해했음을, 책에서 진척이 있었음을 나타냈다. 푸코로부터 눈을 떼고는, 다른 승객들을 바라봤다. 공책과 펜을 꺼내서 승객들에 관해 적다가, 우연히 푸코의 여백에 연필로 표시를 해버려, 공책을 내려놓고, 표시를 지웠다. 언쟁을 다시 생각했다. 언쟁은 언쟁 당사자들을 앞으로 실어나르는 수단인 것만이 아니라 식물이기도 했는데, 언쟁 당사자들을 처음에는 얇게 휘감아, 약간의 빛이 들다가, 갈수록 두터워져, 빛이 들지 않거나 빛을 어두컴컴하게 만들어버리는 생울타리처럼 자라났다. 언쟁이 끝날 즈음에, 언쟁 당사자들은 생울타리를 떠날 수도 없었고, 서로를 떠날 수도 없었으며, 빛은 흐릿해졌다. 언쟁에 관해 질문된 문제를 생각하며, 공책과 펜을 꺼내 적어갔다. 공책을 치워두고 푸코로 되돌아갔다. 푸코를 어떤 부분에서 훨씬 더 이해하기 힘든지와 어떤 부분에서 훨씬 더 이해하기 쉬운지를 더 명확히 이해했다. 요컨대 문장이 길어서 문장의 주어를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명사가 한참 앞 시작 부분에 있을 때, [혹은] 남성이나 여성 대명사로 대체되어 있을 때에는 이해하기가 훨씬 더 힘들었고, 대명사가 어떤 명사를 대체하고 있는지를 까먹었을 때에도 이해하기가 훨씬 더 힘들었으며 대명사만을 동행 삼아 문장 전체를 여행할 때에도 이해하기가 훨씬 더 힘들었다. 대명사가 문장 중간에서 새로운 명사에게 자리를 양보할 때도 있었는데, [그] 새로운 명사는 곧 새로운 대명사로 대체되어 문장의 끝까지 계속 가기도 했다. 문장의 주어가 사유, 부재, 법 같은 [추상] 명사일 때에도 이해하기가 훨씬 더 힘들었다. 반면에 주어가 해변, 파도, 모래, 요양소, 숙소, 문, 복도, 혹은 공무원 같은 명사일 때에는 이해하기가 훨씬 더 쉬웠다. 그렇지만 모래, 공무원, 혹은 숙소에 관련된 문장 앞뒤로는, 매혹, 무시, 공허, 부제, 혹은 법과 관련된 문장이 나왔고, 그런 까닭에 책에서 이해되는 부분들은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에 의해 나뉘어 있었다. 푸코와 연필을 내려놓고는, 공책을 꺼내 푸코를 읽을 때의 이해 부족에 관해서 적어도 지금 이해한 바를 적은 다음, 고개를 들어 다른 승객들을 쳐다보고는, 다시 언쟁에 대해 생각하다가, 비록 다른 단어를 중심으로 해서이지만 앞서와 같이 언쟁에 관해 똑같은 질문을 적어내려갔다. (끝)




※ 리디아 데이비스의 작품/작풍은 현지에서 ‘플래시 픽션’(flash fiction)이라고도 불립니다. 플래시 불빛이 잠깐 번쩍이다가 이내 사라지듯이, 데이비스의 작품은 시작했는가 싶다가 곧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극도의 간결함’이 데이비스의 작풍인 셈입니다. 이런 점에서, 지난 2014년 4월 6일 데이비스를 대담한 미국의 공영 라디오 채널 <내셔널퍼블릭라디오>가 뽑은 헤드라인은 데이비스의 작풍을 일목요연하게 묘사해주고 있죠. “리디아 데이비스의 새로운 작품집에는 이 헤드라인보다 짧은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다”(Lydia Davis’ New Collection Has Stories Shorter Than This Headline). 그러니까 데이비스의 작품 중에는 열 단어가 안 되는 작품도 있다는 말입니다(실제로 그런지는 굳이 확인해보지 않았습니다만……). 아무튼 이렇게 적은 단어들로 어떻게 완결된 작품이 나오겠느냐 궁금하실 분도 계실 텐데, 전례가 없던 것도 아닙니다. 데이비스의 작풍을 선취한 여러 작품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단어 6개로 되어 있습니다. “판매합니다. 아기용 신발, 신은 적 없음”(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은, 불의의 사고로 갓난아이를 잃은 부모가 상심에 빠져, 갓난아이의 흔적을 애써 잊고자, 미리 구입해놨지만 미처 신겨보지도 못한 아기용 신발을 내다 판다는 내용을 그리고 있습니다.



각설하고 이번에 소개해드리는 “푸코와 연필”도 첨부파일의 원문을 보면 아시겠지만, 주어도 생략되어 있고 일체의 불필요한 수식어 내지 연결사들도 없습니다(몇몇 논평자들은 ‘누보 로망’ 스타일이라고도 말하던데 누보 로망 계열의 작품들을 딱히 읽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 하여, 주로 쉼표( , )나 등위 접속사 ‘and’로만 이어진 원문을 번역하면서 각각의 문장들을 어떻게 부드럽게 이을까 나름 고심했는데 뭐 판단은 읽는분들이 알아서……. 원문에는 문단 구분도 없어서 포스팅할 때 행간을 평소보다 좀 넓혀봤습니다. 가독성이 좋을지 어떨지 잘 모르겠네요.


데이비스는 자신만의 독특한 작풍으로 유명해지기 이전부터, 프랑스 작가들의 번역자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특히 마르셀 프루스트, 귀스타프 플로베르, 모리스 블랑쇼, 미셸 레리스 등의 작품을 의욕적으로 번역했는데, 1992년에는 레리스가 쓴 <게임의 규칙>(La Règle du jeu, 1948~1976)  연작의 1권(<삭제하기>[Biffures])을 번역해 프랑스-미국재단 번역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블랑쇼의 경우, 미국 학계의 초창기 블랑쇼 수용은 (약간 과장하자면) 전적으로 데이비스의 노력에 힘입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물론 데이비스는 푸코도 번역했습니다. 아마도 이때의 경험이 “푸코와 연필”의 집필에 일정 부분 도움이 됐을 텐데, 전작을 번역한 건 아니고 (제가 아는 바로는) 대담을 하나 번역했습니다(혹시 데이비스가 번역한 푸코의 다른 논문/작품을 아시는 분이 있으면 제보를 부탁드립니다-!). “논쟁, 정치, 문제화: 미셸 푸코와의 대담”(Polemics, Politics, and Problemizations: An Interview with Michel Fou-cault)이 그것인데, 대담자는 폴 레비노우였고 1984년 5월경에 이뤄졌습니다. 같은 해 데이비스의 번역으로 <푸코 독본> (pp.381~390)에 수록된 이 대담은, 프랑스어로는 <말과 글: 4권 1980~1988년>에 수록되어 1994년에 출간됐죠(pp.591~598).



이하 몇 가지 더 소소한 정보들이 있는데 벌써 ‘코멘트’가 본문보다 길어졌으니 그 내용들은 아래에 적어둡니다.

1. 눈치 빠르신 분들은 위에 올린 <블랑쇼 독본> 표지에 국내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이름이 적혀 있음을 아셨을 겁니다. 다름 아니라 ‘폴 오스터’(Paul Auster, 1947~  )입니다. 생각보다 안 알려진 사실인데, 데이비스와 오스터는 1974년에 결혼했다가 3년 뒤인 1977년에 이혼합니다. 오스터는 1971~74년 프랑스 체류 중에 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아마도 이때 역시 프랑스에 체류 중이던 데이비스를 만났던 게 아닌가 추측됩니다. 각설하고, 이 역시 (특히 인문사회과학 독자들에게는) 잘 안 알려진 사실인데, 오스터는 놀랍게도(?!) 프랑스의 정치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구아야키 인디언 연대기>(Chronique des indiens Guayaki, Paris: Plon, 1972)의 영역자이기도 합니다-!


2. 오스터는 1981년 역시 작가인 시리 허스트베트(Siri Hustvedt, 1955~ )와 재혼합니다. 허스트베트의 이름이 무척 낯선 분들도 많을 텐데, 다시 한번 더 놀랍게도(!) 허스트베트의 작품은 국내에 여섯 권이나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건 전적으로 허스트베트의 작품을 뚝심 있게(!) 계속 출판하고 있는 모 출판사 덕분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딱히 논리적 연관은 없는 바람이나(원래 바람이 다 그렇겠죠?!), 허스트베트의 작품들만큼이나 데이비스의 작품들도 하루빨리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됐으면 합니다(역시 뚝심 있는 모 출판사가 등장하기를 바라야만 하는 걸까요? ㅠ.ㅠ).


3.  다시 데이비스와 푸코 이야기로 되돌아와서, 이 두 사람에게는 재미 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만한 ‘애묘인’(愛猫人)이라는 점입니다. 실제로 데이비스는 자신의 작품에 즐겨 고양이를 등장시키곤 했습니다(가령 “푸코와 연필”이 수록된 작품집에 같이 수록되어 있는 “감옥 휴게실의 고양이들”[The Cats in the Prison Recreational Hall]). 푸코의 고양이 사랑도 만만치 않았다고 하는데, 믿을 만한(!) 정보에 의하면 푸코는 다음과 같이 고양이를 예찬했다고 합니다. “회의주의자들은 언제나 짐승의 영혼을 믿었다. 푸코는 내게 [그의 집이 있었던] 보지라르가 285번지 아파트들을 번갈아 가며 다니곤 했던 고양이의 지성을 예찬했다. ‘그 고양이는 다 알아들어!’”(<푸코, 사유와 인간>, 산책자, 2009, 108쪽). 고대 로마사 전문가이자 푸코의 절친이었던 폴 벤느의 증언입니다. 무엇을 다 알아들었다는 말일까요? 푸코 자신의 말을? 그렇다면 정말이지 대단한 지성을 갖춘 고양이죠-!   



4. 국내외를 막론하고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면, 푸코가 자신의 고양이 이름을 ‘광기’(insanité/insanity)라고 지었다는 포스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매그넘 소속 사진작가인 마르틴 프랑크가 찍은 위 사진에 주로 그런 캡션이 붙어 있죠. 그런데 제가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푸코 전기들(디디에 에리봉의 푸코 전기와 데이비드 메이시의 푸코 전기 등)에는 그런 정보가 전혀 안 나와 있습니다. 도대체 이 ‘소문’의 출처는 어디일까요? 흥미가 생겨 한번 찾아봤는데, 이 소문의 가장 유력한 진원지로 추정되는 것은 미국의 어느 문학 평론가가 한 웹진에 기고한 글인 듯합니다. 그 글에서 그 문학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푸코]가 자신의 고양이에게 광기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자크 데리다의 고양이 이름이 ‘로고스’라는 소문의 진원지도 이 글인 듯합니다. 데리다 전기 중 가장 최근에 나온, 그리고 가장 신뢰받는 브누아 페테르스의 데리다 전기에도 이런 정보가 없습니다).


아무튼 그 문학 평론가는 자신이 제공한 사실/소문의 출처를 전혀 밝히지 않고 있는데(그래서 상당히 미심쩍은데), 최근에는 한 단행본에서도 이와 유사한 주장이 나왔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줄 만한 출처(적어도 당사자나 지인의 증언 같은 거?)는 명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철학자들은 자신의 고양이 이름을 개념에서 따오는 경향이 있다. 데리다는 자신의 고양이에게 로고스라는 이름을 지어줬고, 사르트르는 무, 푸코는 광기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시인들은 자신의 작품에서 고양이 이름을 따온다. 마크 트웨인은 자신의 고양이에게 허클베리라는 이름을 지어줬고, 베케트는 자신의 두 고양이에게 머피와 와트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조지 버나드 쇼는 피그말리온, 앨런 긴스버그는 하울, 돈 드릴로는 마오 2, 무라카미 하루키는 카프카, 보르헤스는 알레프, 코르타사르는 베스티아리오라는 이름을 지어줬다”(Mario Ortiz-Robles, Literature and Animal Studies, London: Routledge, 2016, p.140). 그리고 국내의 경우에는 이런 주장이 고양이 집사 진중권 씨를 통해 반복되고 있는 중입니다. 물론 위 인용문에서 소개한 사례들의 진위를 모두 다 직접 확인해보진 못했습니다만. <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 혹은 <그 남자의 고양이>를 한번 훑어봐야 하나……. 역시 제보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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