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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 팬덤’과 분열하는 리버럴의 진정성


고태경 | 정치철학 연구자


대선이 막 끝나고, 한 문재인 지지자는 SNS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공격들에 일일이 직접 대응하고 맞서고 해명하고 다투어야 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문재인 정부는 다르다. 대통령과 정부가 나서기 전에 지지자들이 먼저 나서서 두터운 방어막을 형성한다. 때로는 방어를 넘어서 선제공격한 자들에게 통렬한 역습을 가하기도 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의 운신의 폭이 넓어진다. … 직접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어진다.”1)

문재인 팬덤 내에서 강력한 호응을 얻은 이 글은 오늘날 ‘이니 팬덤’의 성격을 그 어떤 글보다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당선 후 문재인의 행보를 요약해 주는 핵심 키워드는 단연 ‘위로’와 ‘공감’이었다. 당선과 함께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리본을 달고, 5.18 유가족을 안아주며,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세월호 유가족을 청와대로 초대한 문재인은 사드 배치 후 발표한 담화문에서도 반대세력에게 “위로”를 전달하는 데 주력한다. 노타이에 아메리카노를 들고 산책하는 탈권위적 대통령의 이미지 컨셉은 아픈 자들을 보듬어 안는 ‘착한’ 대통령의 이미지와 완벽한 시너지를 일으킨 듯하다.

지지율의 고공행진은 당분간 지속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위로와 공감의 이미지 반대편에서 움트는 불안을 어쩔 수가 없다. 성주 주민들과 사드 반대진영이 대통령의 ‘위로’ 이전에 발견한 것은 경찰들의 거친 진압이었다. 러시아 순방 중인 대통령의 “손을 더립”히지 않기 위해 정부 관료들은 발빠르게 움직였고, 팬덤은 성주 주민들을 직접 질타하고 나섰다. 사드배치가 북핵방어용이 아니라는 것은 정부관료들도, 팬덤들도 모두 숙지하는 사실이다. 마키아벨리적인 정치공학의 세계에서 아이돌처럼 방부처리된 이 ‘이니’의 존재는 대체 무엇일까.

진정성이라는 모호한 이미지와 그 분열

한국에서 정치팬덤의 태생은 2000년대 초의 노무현 팬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도 정치 판도를 변화시킬 거대한 힘을 보였던 팬덤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 규모나 활동 목적 등 모든 면에서 변화와 진화를 거듭했다. 잠시 2003년으로 돌아가 보자.

주지하다시피, 2003년 이라크 파병은 노무현의 지도력에 치명타를 날렸다. 2002년 대선에서 열광적인 지지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이끈 노사모는 2003년 이라크파병 반대 성명을 발표해 대통령 노무현과 대치한다. 지지층에서 혼란이 일었으나, 이 혼란을 바로잡아준 것은 바로 ‘인간 노무현’의 진정성에 대한 믿음이었다. “대통령이 지금 이런 부도덕한 전쟁을 진심으로 지지하고 있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2) 1인 시위로 이라크 파병 반대를 선언한 노무현 지지자 고 신해철의 이 발언은 당대 노무현 팬덤의 내적 분열을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노무현 팬덤의 노무현 지지방식을 잘 보여준 이러한 분열은 노무현의 별칭에서도 잘 드러난다. ‘바보 노무현’은 어떤 존재인가. 그에 대한 평가 중 하나는 그가 성급하게 대중 앞에 나타나 정치적 선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지지자들 뒤로 물러서서 이미지 정치를 하는 문재인과 달리 노무현은 (순진한) 포퓰리스트적 선동가의 기질을 갖고 있었다. ‘바보 노무현’(혹은 인간 노무현)은 정치공학의 세계에 발들인 ‘대통령 노무현’과의 대비 속에서 그 진정성의 의미작용을 일으켰다. “직접 손을 더립”히며 팬덤을 선동한 이 정치인에게서 이라크 파병 철회의 진정성이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에 대한 팬덤의 믿음이 이라크 파병에서 한미FTA를 거쳐 대연정 제안까지의 5년을 관통하며 급격히 냉각되었다는 점이다.

한편, 안철수와 문재인을 경유하며 형성된 오늘날 정치 팬덤의 스탠스는 노무현 팬덤의 시대정신과는 매우 이질적이다. 부산이라는 우파의 텃밭에 등장한 비주류 고졸 변호사와 엘리트 출신의 안철수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2011년 안철수가 정치 무대에 등장하며 퍼트린 대표적인 이미지가 이른바 ‘착한 위너’의 이미지였다. 2012년 10월 『안철수의 착한 성공』이라는 책이 출간되고, 다시 한 달 후 『착한 성공』이라는 책이 출간된다. 이어 출판시장에서 ‘착한’과 ‘성공’을 동시적인 키워드로 사용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착한’이란 무엇일까. 오늘날 청년 리버럴들은 이 ‘착한’의 이미지를 탐닉한다. 배우 한지민은 ‘착한 외모’에 기부 및 봉사활동 등의 ‘선행’을 소리소문 없이 행하며 대중들의 찬사를 받는다. 가수 김장훈과 션은 ‘기부천사’로 기억되고, 이효리는 모피코트를 거부하고 자원봉사에 열을 올리며, 자본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난(?) 변방의 섬나라에서 ‘친환경적’ 삶을 추구한다고 알려졌다. 오늘날 대중들에게 이 ‘착한’의 이미지들은 진정성의 새로운 표지처럼 이해된다. “이효리에게서 ‘연예인의 가식’을 본 적이 있나. 그가 ‘상품’이 아닌 이유는 진정성이 있기 때문이다.”3) 작곡가 김형석이 최근 이효리에 대해 내린 평가다.

오늘날 ‘착한’이라는 수식어는 좁은 도덕적 의미를 벗어나 삶의 거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국내 언어학 연구에서는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된 ‘착한’의 의미확장이 2000년대 이후 크게 가속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착한 가격, 착한 밥상, 착한 외모, 착한 기업 등 적용영역은 무한하며, 그중에서도 특히 ‘착한 소비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0년대를 전후로 소비자 운동이 대중운동으로 확장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조중동불매, 삼성불매, 옥시불매를 넘어 최근에는 한겨레/경향/오마이뉴스 등의 진보언론에 대한 불매가 문재인 팬덤 사이에서 불을 뿜기도 했다. 지자체와 정부의 지원으로 ‘사회적 경제’의 담론이 확산되며 올바른 소비의 덕목이 무엇인가를 묻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때의 ‘착한’과 같은 계열에 놓인 수식어가 2008년 촛불시위 이후 확산된 ‘개념’과 ‘깨어 있음’임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착한 연예인은 이른바 ‘개념 연예인’이며, 교양과 상식을 갖춘 이 연예인들은 대중의 열광적인 찬사를 받는다. 아이유의 이른바 ‘제제(Zeze) 논란’, 설현, 티파니 등의 역사의식 논란은 그 반례로서 기억될 만하다.

‘상식’의 시대가 진정성을 열망하는 법

요컨대, ‘착한’은 ‘교양’과 ‘상식’으로 대체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지난겨울의 촛불시위는 이른바 ‘상식 대 몰상식’의 대결로 프레임화되었다. 유력 대권주자로 촛불시위에 나섰던 문재인과 이재명은 이구동성으로 촛불은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승리’라고 말한 바 있다. 오늘날 유행하는 이 ‘상식’의 프레임, 혹은 ‘흙수저’론으로 불거지는 ‘공정성’의 문제틀은 사실상 문재인과 이재명이 아니라 2012년 안철수에게 그 기원을 둔 것이기도 하다.

지난 촛불시위가 던진 상식 담론의 반대편에 놓인 것이 ‘무당’ 최순실의 ‘국정농단’이었다. 촛불시민의 ‘교양’과 ‘착한’의 이미지가 시민의 규범적 자격을 묻는 것이듯, 촛불시위는 근본적으로 공론장의 시민적 자격을 갖춘 자들을 구별하기 시작했다. 우선, 무당에 대한 퇴출이 시작되었다. 최순실 게이트가 폭로된 지난해 10월 ‘테블릿 PC’의 등장과 함께 온라인을 가장 빈도 높게 달군 표현은 부패나 비리, 권력 혹은 자본 등이 아니라 최순실의 비정상성을 함축하는 ‘무당’, ‘사이비’, ‘강남 아줌마’ 등의 담론들이었다.4)

두 번째의 퇴출은 언론을 향해 진행되었다. 대선을 전후로 온라인에 나타난 문재인 팬덤의 진보언론 절독 움직임은 이미 1년 전 넥슨 여성 성우 해고사태를 통해 전개된 <시사인> 절독 움직임과 궤를 같이한다. 절독운동에 참여한 리버럴들은 반복해서 상식의 승리를 말한다. 이들에 따르면, 메갈리아의 페미니즘에 대항하는 ‘진짜 페미니즘’이 존재한다. 촛불 이후의 시대는 아무 실행력도 없는 ‘입진보’가 아니라, 상식의 규율로 무장한 ‘깨어 있는 시민’의 시대가 될 것이다. 상식(common sense)이란 말 그대로 다수에게 공통적인 시대인식을 말한다. 과거였다면, ‘지배 이데올로기’라고 불렀을 이 상식의 선언은 청년 리버럴 자신들의 사고와 감성이 시대의 지배적 규범과 일치한다는 자신감의 선언이기도 하다.

반대로, 과거의 사회운동들은 시대의 규범과 불화하는 형태를 취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는 구호는 노동자와 빈민, 장애인 모두에게 모두 귀속되는 구호였고, 여성과 성소수자들은 자유로워지기 위해 먼저 시대의 규범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야 했다. 지배자의 언어가 아니라 억압받는 자의 언어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사회운동의 기본 과제 중 하나였다.

진정성(authentic)이란 무엇인가. 그리스어 어원에서 그것은 자기(autos)로 존재(hentes)하는 것을 말한다. 역사적 사회운동들은 이 자기됨의 목소리를 통해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열고자 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두발 자유화’를 내걸었을 때 이들은 자기 신체에 대한 직접적 자기통제권을 열망했다. 70년대 ‘여공’들에게 자기됨의 열망은 글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 쓰는’ 행위와 결부되어 있었다. 수많은 노동자 수기들이 쓰여졌고, 70~80년대 노동자운동의 주요 거점 중 하나는 이 글쓰기를 통해 매개된 야학이기도 했다. 이들에게 진정성이라는 것은 규범과 불화하며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그냥 본래적 자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해야 하거나 문자라는 새로운 세계와의 힘겨운 조우 끝에 쓰여져야 했던 무엇이다.

다시 2017년으로 들어서며 문학의 붐이 일기 시작한다. 전체 베스트셀러 중 압도적 다수가 문학작품이 되었고, 시인들에게 팬덤이 형성되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5) 청년들은 더 이상 자기계발서를 탐닉하지 않으며, 도서관은 시인들의 낭독회를 연출하기에 바쁘다. 모든 사회운동의 활황기, 혹은 역사적 혁명운동의 부흥기에는 문학의 번성이 있었다. 19~20세기 유럽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1970~80년대 한국 근대문학의 번성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와 해방은 ‘쓰여져야’ 한다는 것, 자기 본연의 존재로 돌아가는 것은 수많은 이들의 집단적 상상력과 투쟁을 통해 열정적으로 매개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2017년 문학의 새로운 번성이 이러한 문학적 상상력과 얼마나 연결될지 나는 알 수 없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것은 그저 자아연출, 혹은 ‘착한’ 이미지 연출의 도구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2007년 기업가 정치인의 등장에 환호하던 감성은 오늘날 많이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기업가’ 안철수를 무너뜨린 것은 놀랍게도 ‘MB아바타’의 이미지였다. 인문․문학 출판시장의 붐을 주도하는 것은 강남역 여성살해에 저항해 일어선 페미니즘의 저항 담론이다. 어떤 변화의 도정이 전개되고 있고, 모든 것은 복합적인 이미지와 관념들의 갈등 속에 중층결정되고 있다. 4년 전 대자보를 들고 안부를 물으며 철도파업을 지지하던 이들은 이 ‘헬조선’의 한복판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역사적으로 성공한 거의 모든 혁명은 두 번 이상 반복되었다. 한국에서 촛불이 다른 맥락과 움직임 속에서 다시 반복되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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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선진, 「문재인 지지자의 운명」, 2017년 5월 19일자 페이스북 게시물

(https://m.facebook.com/kimsunjin1977/posts/10155171969801893).

2) 「"칼 안 쥐었다고 공범 아닌가?" - 가수 신해철, 청와대 앞서 반전/파병 반대 1인 시위」, 『프레시안』, 2003. 3. 21.

3) 「‘효리 신드롬’..개량한복과 탱크톱, 눈주름과 마스카라」, 『스포츠조선』, 2017. 7. 10.

4) 김학준, 「빅데이터를 통해 바라본 촛불 민의」, 『황해문화』, 2017 여름, 66쪽.

5) 「문학서적 베스트셀러 장악 … 10위권 중 9권」, 『문학뉴스』, 2017. 8. 19; 「SNS 타고 호시절(好詩節) … 수만부 찍는 ‘스타 시인’ 잇따라」, 『한국경제』, 2017.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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