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말] 이 글은 2015년 1월 7일 프랑스에서 있었던 '샤를리 엡도' 신문사 테러 직후인 1월 9일 일간지 '리베라시옹'에 발리바르가 기고한 칼럼이다. 오늘날 종교적 혹은 국민적 극단주의 정치의 정세에 직접 개입하는 이 글은 샤를리 엡도 테러 당시 프랑스 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발리바르는 이 칼럼 이후 누군가의 죽음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말(혹은 발화, parole)'의 자유로움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했고, 2018년 "자유로운 말(Libre parole)"이라는 저서를 출간하기에 이른다(그리고 이 칼럼은 "자유로운 말"의 부록으로 수록되었다). 요컨대, 이 칼럼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발리바르의 사유의 시발점이라 할 것이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자유로운 말"의 뒷표지 소개글과 목차를 부록으로 덧붙인다.
(원문 url : https://www.liberation.fr/debats/2015/01/09/trois-mots-pour-les-morts-et-pour-les-vivants_1177315)
죽은 자와 산 자를 위한 세 가지 단어(mots)
에티엔 발리바르 씀
배세진 옮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일본인 친구이자 전(前) 동경대 교수인 가토 하루히사(Kato Haruhisa)는 샤를리 엡도 테러 직후 나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라 전체가 애도 속에 잠긴 프랑스의 이미지를 보았습니다. 저 또한 매우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오래 전에 저는 조르주 볼린스키(Georges Wolinski)의 만화를 무척 좋아했지요. 예전부터 지금까지 저는 “카나르 엉셰네”(Canard enchaîné)를 계속 구독해 오고 있습니다. 매주 저는 장 카뷔(Jean Cabu)의 보프(Beauf)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그의 만화를 즐겨 봅니다. 저는 샹젤리제 거리에서 관광을 하며 기뻐하는 어린 일본인 소녀들을 그린 카뷔의 그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카뷔와 파리”(Cabu et Paris)라는 만화를 제 연구실 한편에 항상 걸어 놓고 있는데, 이 그림들은 참으로 경탄스럽지요.
하지만 조금 뒤에 나의 친구 가토 하루히사는 다음과 같은 유보를 표한다.
“르 몽드”의 1월 1일자 사설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됩니다.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세상은 무엇보다도 먼저 IS(État islamique)와 그들의 맹목적인 야만에 반대하는 투쟁에 대한 강화를 전제한다.” 저의 관점에서는 사실상 모순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주장, 그러니까 평화를 얻기 위해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는 이러한 주장에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터키, 아르헨티나, 미국 등등… 세계 곳곳의 다른 이들 또한 나에게 편지를 썼다. 이들 모두는 동감과 연대를 표현해 주었지만, 동시에 우리의 안전과 우리의 민주주의, 우리의 문명(심지어 나는 우리의 영혼이라고 말하려 했다)에 대해 우리를 걱정하기도 했다. 나에게 지면을 제공해준 “리베라시옹” 뿐만 아니라 우리를 걱정해준 이들 모두에게 이 글을 통해 나는 답하고자 한다. 지식인들이 그 어떠한 특권 없이, 특히 이 지식인들이 가졌다고 전제되는 특별한 지적 능력을 통해 제시되는 [부당한] 특권 없이, 하지만 동시에 그 어떠한 망설임과 계산 없이 자신들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정당하다. 이는 위기의 시간에 정치체(cité) 속에서 말(parole)을 유통시키기 위한, 지식인이 지니는 기능적 의무이기도 하다. 오늘날, 이러한 위급함 속에서, 나는 세 가지 혹은 네 가지 단어(mots)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공동체(Communauté). 그렇다. 우리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애도를 위해, 연대를 위해, 보호를 위해, 성찰을 위해. 그렇지만 이러한 공동체는 배제적이지 않다. 특히 이 공동체는 점점 더 악랄한,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 가장 재앙적이었던 사건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러한 선전[프로파간다]이 (우리의 공포, 우리의 [성찰적] 빈곤함 혹은 우리의 [거짓된] 환상famtasmes의 희생양으로 만들기 위해) 프랑스에 대한 침공과 테러리즘과 동일시하는 이들(프랑스 시민들 혹은 이민자 시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들)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공동체는 또한 국민전선의 테제들을 믿는 혹은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의 산문이 매혹시키는 이들 또한 배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공동체는 그 스스로 자기 자신을 설명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현재 우리 사이에서 통용되고 있는 ‘세계적 내전’이 요청하는 감정, 책임 그리고 이니셔티브(initiative)의 공유가 전세계적 차원에서 우리가 함께 행해야 하는 것이며, 또한 만일 가능하다면(이 점에서 에드가 모랭Edgar Morin은 완전히 옳다) 세계정치적(cosmopolitique) 틀 내에서 행해져야 하는 것이라는 점이 명확하다면, 자신이 마주한 경계들[국경들] 위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를 국민적 통일체(union nationale)와 혼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국민적 통일체라는 개념은 사실상 고백하기 부끄러운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되어 왔다. 불편한 질문들에 침묵을 강제하기 위해, 예외적 조치들의 불가피성을 믿게 만들기 위해. 명백히 [양차대전 당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는 국민적 통일체라는 이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 이미 우리는 자신의 특권인 국민적 애도에 호소하면서 프랑스의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François Hollande)가 프랑스의 군사적 침공--이 군사적 침공이 세계를 현재의 흐름으로 미끄러지도록 만드는 데에 기여하지 않았다고는 확신할 수 없다--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국민적 애도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보았다. 이 이후 ‘국민[주의]적인’ 정당들과 (‘국민[주의]적’이라는 이름을 표방하더라도) 그렇지 않은 정당들 사이의 모든 잘못된[거짓된] 토론들이 전개되었다. 그러니까 이들은 국민전선의 수장인 마린 르펜(Marine Le Pen)과 경쟁하고 싶은 것인가?
경솔함(Imprudence). 샤를리 엡도의 만화가들은 경솔했는가? 그렇다, 하지만 이 ‘경솔함’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다소간 쉽게 분리 가능한(물론 이러한 분리 가능성에는 나의 약간의 주관성이 개입되어 있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하다. 첫 번째 의미는 위험(danger)에 대한 무시, 리스크(risque)를 향한 욕망 혹은 원한다면 영웅주의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또한 두 번째 의미는 건강한 도발이[건강한 도발조차도] 초래할 수 있는 잠재적으로 재앙적인 결과들에 대한 무관심이다. 샤를리 엡도의 경우에는 이미 낙인이 찍힌 수백만명의 사람들[무슬림들]이 느낀 모욕감, 이 수백만명의 사람들을 조직된 광신도들[즉 IS]의 조작에 빠지도록 만드는 그러한 모욕감이다. 나는 [샤를리 엡도의 구성원들인] 샤르브[스테판 샤르보니에]와 그 동료들이 이 용어의 두 가지 의미 모두에서 경솔했다고 믿는다. 오늘날 이러한 경솔함이 표현의 자유가 초래하는 죽음의 위험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이들의 생명을 앗아갔으므로, [이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생각한다면] 나는 첫 번째 측면만을 사고하고 싶다. 하지만 내일, 그리고 그 다음 내일을 위해(왜냐하면 이 사건은 하루만에 끝날 사건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두 번째 의미와 그것이 첫 번째 의미와 형성하는 모순 이 둘 모두에 대처하는 가장 지성적인 방식으로 성찰하기를 원한다. 이것이 꼭 비겁함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하드(Jihad). 마지막으로 나는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공포를 일으키는 이 단어를 말했다. 왜냐하면 이 지하드라는 단어의 모든 함의들을 검토할 시간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하나의 관념의 출발점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관념을 발전시키고자 한다. 이 관념은 다음과 같다. (‘무슬림’이라는 명명이 아무리 부정확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운명은 무슬림들의 손에 달려 있다. 왜? [거짓된] 허상들(amalgames)을 경계하고 이슬람의 코란과 구전 전통 속에서 암살에 대한 호소를 읽을 수 있다고 [근거 없이] 주장하는(prétend) 이슬람 혐오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히도 정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지하드 조직에 의한 이슬람의 착취--세계 곳곳의 무슬림들, 그리고 심지어는 유럽의 무슬림들조차 그 주요 희생자라는 점을 잊지 말자--에는 신학적인 비판이, 그리고 결국에는 지하드주의를 무슬림 신자들의 눈에 반-진리contrevérité[즉 거짓된 진리 혹은 진리에 대립되는 바]로 만들 종교적 ‘공통감각/상식’(sens commun)에 대한 개혁만이 대응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위기에 빠진 우리 사회의 모욕 받은 이들과 상처 받은 이들 모두를 자신 속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테러리즘이라는, 그리고 점점 더 군사화되어 가는 국가들이 실행하는 안전 정책들과 같은 자유살해(liberticides)라는 [이중의] 곤경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무슬림들에게는 하나의 책임이, 혹은 오히려 그들에게 부과된 하나의 과업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또한 우리의 과업이기도 한데, 내가 말하는 ‘우리’라는 것이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그 정의상 많은 무슬림들을 포함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만일 우리가 (무슬림들의 종교와 문화와 함께 그들이 일반적으로 그 표적이 되는) 고립 담론을 계속 [무비판적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러한 [신학적] 비판과 [종교적] 개혁의 (이미 취약한) 가능성이 완전히 무의미한 헛것이 될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끝]
부록 : 갈릴레(Galilée) 출판사가 제공한 “자유로운 말” 뒷표지 소개글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의 저서 “자유로운 말”(Libre parole)은 그 스타일과 상황이 각기 다른 세 가지 에세이를 모은 책이다. 폭력의 시대의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를 주제로 한 ‘흐란트 딘크(Hrant Dink) 컨퍼런스’는 2018년 1월 이스탄불에서 저자가 행한 대중강연이다. 2015년에 발전시킨 ‘표현의 자유와 신성모독적 발언(blasphème)’에 관한 ‘테제들’은 IS 맴버들이 ‘마호메트에 관한 캐리커처’를 출판한 샤를리 엡도의 저널리스트들을 암살함으로써 촉발된 논쟁에 개입하기 위해 쓴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셸 푸코의 ‘파레시아’(parrêsia) 개념의 형태들에 관해 2013년에 진행한 세미나에 기반해 그 다음 해에 집필한 ‘세미나’는 그리스인들이 제시하는 예시로부터 출발해 그들의 진실의 용기에 대한 개념화를 전개한다.
이 세 가지 에세이의 공통 목표는 [한나 아렌트의 개념을 취하자면] 권리에 대한 권리[혹은 권리를 가질 권리]로서의 표현의 자유(자본주의적 세계화의 붕괴 효과에 의해 용이해지고 있는 민주주의적 형태들의 퇴보, 세계의 그 어떠한 지역도 이제는 완전히 빠져나갈 수 없는 그러한 지역적 전쟁상황이 초래하는 테러와 대항-테러의 효과에 의해 과잉결정되는 민주주의적 형태들의 퇴보가 가시화된 시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근본적인 권리로서의 위치를 차지하는 표현의 자유)의 조건과 기능을 문제화하는 것이다. 또한 이 세 가지 에세이의 공통 목표는, 만일 제도적으로 보장된 표현의 자유와 이 표현의 자유의 상관항을 형성하는 자유 발언이, 그 자율성이 민주주의 내에서 (이론적으로) 인정된 개인과 집단의 양도 불가능한 ‘속성/소유물’(propriété)을 구성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논의의 지반을 [스피노자적 의미의] 교통(communication)이라는 공적 재화(bien public)[즉 경제학적 의미의 ‘공공재’]에 대한 개념화로 고양시켜야 하며(만일 우리가 이 공적 재화에 대한 활용을 일반화시키고자 한다면 말이다) 이 공적 재화에 대한 차별적 활용을 방지하고 이를 통해 이 공적 재화에 그 모든 정치적 정상성(normativité)을 부여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목차
서문
1. 폭력의 시대의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
2. 표현의 자유와 신성모독적 발언(blasphème)
3. 말하기, 반박하기: 미셸 푸코가 제시한 파레시아(parrêsia)의 형태들에 관하여
부록: 죽은 자와 산 자를 위한 세 가지 단어(mo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