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가요, 루이
Adieu
에티엔 발리바르
번역: 배세진 (파리 7대학 정치철학 전공 박사과정)
옮긴이 주: 출전은 Écrits pour Althusser, Étienne Balibar, La Découverte, 1990이다. 이 텍스트는 이미 윤소영 교수가 편역한 “루이 알튀세르(1918-1990)”, 민맥, 1991에 ‘알튀세르를 위한 조사’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바 있다. 하지만 기존 번역본을 거의 참조하지는 않았다. 참고로, 이 텍스트는 알튀세르의 장례식에서 읽기 위해 발리바르가 집필한 ‘조사’라기보다는 알튀세르의 사유를 해석하기 위한 일종의 ‘이론적 주석’이다. 독자들은 이 짧은 텍스트를 독해하면서 발리바르가 포착해 강조하고자 하는 알튀세르 사유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한 자리에 모두 모였습니다. 루이 알튀세르, 그를 존경하는, 그를 예찬하는, 그를 사랑했던 그리고 그를 앞으로도 잊지 않을 사람들과 함께 그에게 어울리는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서.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며, 이는 [알튀세르와 우리 모두를] 위로해줄 것입니다. 그토록 길었던 몇 년 간의 침묵, 그리고 몇 년 간의 [알튀세르와 우리 사이의] 헤어짐 이후, 나는 알튀세르의 장례를 위해 우리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있는 이 광경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조금은 힘듭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이 자리에 모여 있다는 것, 이는 그토록 길었던 몇 년 간의 침묵과 헤어짐보다 더 강력하게 현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실제의] 우리는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서 서로 바라보고 있는 우리보다 그 수가 훨씬 더 많습니다. 저는 북경, 뉴욕, 하바나, 독일, 스웨덴,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런던, [알제리의 수도] 알제, 네이메헌 혹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같은 세계 곳곳의 수많은 남성들과 여성들을, 우리와 함께 이 장례에 참석하고 싶어하는 수많은 이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각자가 또한 다른 이들을 알고 있겠지요. 아마도 그 수가 더욱 많을, 우리 중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들을 셈하지 않더라도요. 우리를 포함한 이 모든 사람들이 모인다면 이는 사유의 거대한 행렬을, 알튀세르의 친구들로 구성된 거대한 하나의 모임을 이룰 것입니다. 알튀세르라는 이름, 알튀세르라는 인물, 알튀세르의 저술은 프랑스에서든 다른 곳에서든 언제나 저에게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항상 독특하며(singuliers) 항상 다른(différents), 알튀세르에 관한 기억들을 각자 가지고 있습니다. 감히 저는, 그를 알았던 이들 모두에게 알튀세르가 각기 다른 인간으로 존재했다고 말하고 싶기까지 합니다. 알튀세르가 자신의 대화 상대자들에, 그리고 자신이 처한 상황들에 스스로를 적응시킬 줄 알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알튀세르가 각자의 독특성을 듣고(écouter la singularité) 이 독특성을 촉발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말해야만 할 것입니다. 만일 다음과 같은 표현이 정말로 어떠한 의미를 가진다면, 진정한 알튀세르라 부를 수 있는 바는 무엇보다도 바로 이러한 그의 능력 자체일 것입니다.
바로 알튀세르의 이러한 능력을 증언하기 위해 저는 이 자리에서 저만큼이나 이를 잘 말할 수 있을 알튀세르의 다른 제자들, 다른 동료들, 다른 친구들을 대신해 이에 대해 발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자본”에 대한 세미나를 준비했던 그 열광의 시기에서부터, 저를 포함한 세 명이서 “공산당 내에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것”을 한 줄 한 줄 다시 읽어내려갔던 고통스러웠지만 결의에 차있던 시기에 이르는, 무엇보다도 공동작업에 대한 기억인 저의 개인적 기억을 가지고서 그의 이러한 능력을 증언하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저를 용서해 주실거라 믿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고 사람들이 경험이라 말하는 바와 함께, 홀로 작업하지 않으려는, 다른 이들을 자신의 작업 속으로 끌어들이는, 하지만 이들을 제약하거나 자기 자신을 제약하지 않으면서 이를 행하는(반대로 제약은 사물/사태choses 그 자체로부터 유래했지요), 위급함 속에서만[정세 속에서만] 글을 썼던 그가 집필을 지연시키도록 만들기까지 했던, 그리고 공동연구자들의 작업과 만나 하나가 되기를 기다리기 위해 그리고 이 공동연구자들과 함께 하나의 공동의 지적 저작(œuvre)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의 기획을 변형하기까지 했던, 알튀세르가 지녔던 유일무이한/독특한(unique) 재능에 저는 점점 더 경탄하게 됩니다. 만일 제가 알튀세르를 알지 못했더라면, 저는 이러한 것이 가능하리라고 믿지 못 했을 것입니다. 대학에서, 문학에서, 정치에서, 저는 고독한 이들을, 다른 사람들을 모방하는 이들을, 온화한 교육자들을, 양심의 가책 없는 착취자들을, 영감을 주는 이들을, 조직가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알튀세르와 같이 다른 사람들과 사고를 공유하는 것이 사고의 조건 그 자체가 되는 그러한 지식인을 보지는 못합니다. 아마도 자신의 이러한 능력을 통해 알튀세르가 인정을 받은 적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 생각에 이러한 능력을 필요로 했던 이는 [다른 이들이 아니라] 바로 알튀세르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알튀세르는 다른 사람들과 생각을 공유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지식인으로 태어났음에 틀림없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 세대 전체가 그러했듯, 알튀세르로부터는 아니라고 해도 최소한 알튀세르 덕택에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저는, ‘대문자 스승’(Maître)이라는 이름이 알튀세르에게 썩 어울리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제 저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의 서문에서 우리가 쉽게 망각할 수 없을 몇몇 구절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여러분께 이를 다시 읽어드리기를 허락해주시길 바랍니다. “전쟁 직후의 일이었다. 우리는 당이 이끄는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대전투들 속에 난폭하게 던져졌다. 그 당시 우리는 우리의 선택을 평가해야 했고 선택의 결과들을 수용해야 했다. (…) 우리의 철학적 기억 속에서 그 시기는 오류를 그 모든 은신처에서 쫓아내던 무장한 지식인들의 시대, 저작은 없으면서 모든 저작을 정치로 삼는 우리 철학자들, 그러니까 세계를 단 하나의 칼날로 가르는 (…) 지식인들의 시대로 남아 있다.”
이 구절들을 읽고 나서 저는 다음과 같이 스스로에게 질문했습니다. 어떠한 흔적을 남겨 놓을 만큼 어떠한 의미와 어떠한 충분한 독창성을 지니고 있는 무언가, 우리가 그리로 되돌아올 수 있는 무언가, 우리의 [지적] 후예들을 여전히 놀라게 할 것들을 간직하고 있는 무언가라는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저작(œuvre)이란 존재하는가?
잠시 동안이라도 우리가 이러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저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알튀세르가 자신이 언급했던 저작 없는 철학자로 남아 있지는 않았다고 이 자리에서 말하고자 합니다. 이 저작 없는 철학자라는 표현이 의미하고자 했던 바를 고려하면서도, 동시에 만일 알튀세르의 전부가 자신의 저작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분명 아니라면 말입니다.
저는 이러한 저작 속에서, 알튀세르의 글쓰기, 알튀세르의 대상, 알튀세르의 이론적 복잡성, 알튀세르를 자극[촉발]했던 그 당시의 문제들에 대한 그의 적응, 이 모두를 통해 쓰여진 최소한 한 권의 매우 위대한 책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책은 정확히 “마르크스를 위하여” 입니다. 이 책 곁에서, 완성되거나 그렇지 못한, 때로는 공들여 집필되었으며 때로는 영감에 따라 빠르게 집필된 일련의 텍스트들이, 그 모두가 모여 사유에 대한 하나의 열림을 만들어내는 일련의 텍스트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텍스트들 속에는 테제들이,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알튀세르 스스로가 존재에 관한 테제들[즉 존재론적 테제들]이라고 불렀던 것이 존재합니다. 이 존재에 관한 테제들은 정통적인 성격을 지니지 않는 유물론의 한계점들이자 동시에, 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믿지 않는, 이미 보증된 결과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변증법의 모험’을 위한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이 테제들 중에서 저는 다음의 세 가지만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마르크스에게서든 다른 사상가들에게서든 존재하는) 인식론적 절단이라는 테제. 이론 내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테제(왜냐하면 계급투쟁은 이론 바깥으로 한정될 수 없기 때문이죠). (국가로부터 가장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보이지 않는’ 장치들까지도 포함하는)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즉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라는 테제. 알튀세르의 이 테제들이 그 자체로 진실이라고 우리는 말해야만 할까요? 이 테제들은 물론 진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테제들이 존재한 지 15년에서 20년이 지나는 동안, 사람들은 이 테제들을 우회할 수는 있었어도 이 테제들을 거부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중단된(interrompue) 저작으로 인해 -어떤 저작이든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중단되기 마련입니다-, 개념의 불안정성(inquiétude)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이 테제들로 인해, 이론의 여지 없이, 알튀세르는 철학자입니다. 이 동일한 저작과 동일한 테제들로 인해, 알튀세르는 또한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심지어는 공산주의자이기까지 합니다. 온전히 철학자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온전히 공산주의자로 존재한다는 것, 이 철학자라는 항과 공산주의자라는 항 둘 모두를 서로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서로에게 종속되도록, 서로에게 예속되도록 만들지 않으면서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 이는 알튀세르의 지적 독특성이며, 알튀세르가 행했던 내기와 그 위험이었습니다. 잠시 동안이라고 할지라도, 그러니까 글을 쓰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몇 년 간의 짧은 시간이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내기를 계속했다는 것[즉 이러한 도전의 위험을 무릅썼다는 것], 이는 그 결과가 어떠했든 이미 알튀세르가 이 내기에서 이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실패가 아닙니다. 그리고 알튀세르가 이 내기에서 이겼기에, 마르크스주의는, 아니 오히려 공산주의는 20세기 후반에 프랑스 철학사에 기입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20세기 후반의 프랑스 철학사에 거대한 구멍을 만들지 않고서는 공산주의를 이 역사로부터 제거할 수 없을 것입니다. 20세기 후반의 프랑스 철학사에서 공산주의를 제거하는 것은 망각할 수 없는 행위이며, 동시에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입니다.
여러분들이 허락하신다면, 저는 덜 공적인 성격의 몇 마디를 보태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10년 전에 제가 방금 언급했던 일들이 사실상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옮긴이 주: 발리바르는 아마도 알튀세르가 자신의 부인 엘렌 리트만(Hélène Rytmann)을 1980년 교살한 뒤, 알튀세르를 포함한 마르크스주의 혹은 공산주의 전체가 프랑스 철학사에서 제거되었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뒤의 10년의 세월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물론 아마도 [장례식에는 어울리지 않는] 무례한 짓이겠지만, 이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이보다 더 무례한 짓일 것입니다. 무덤까지 우리가 함께 하고자 하는 이 사람은 [자신의 아내를 교살했던 1980년이 아니라] 1990년에 죽었으니까요.
알튀세르는 파괴했습니다. 알튀세르는 스스로를 파괴했습니다. 이는 진실이고 되돌릴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알튀세르는 또한 자신을 위해 그리고 다른 이들을 위해 살아냈으며, 그는 자신의 존재 속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았습니다. 거의 모든 이에 의해 버림받았던 알튀세르, 그는 옆방에서 온 혹은 세계의 반대편 끝에서 온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몇몇 이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해주었습니다.
알튀세르는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만일 알튀세르가 자신의 고통을 그토록 오랫동안 견뎌내 왔다면, 그리고 종종 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데에 성공했다면, 이는 매우 적은 수의 몇몇 인물들, 이름이 호명되기를 원치는 않을, 그리고 그를 매일매일 옆에서 도왔던 몇몇 인물들 덕분일 것입니다. 알튀세르를 사랑했던 우리, 하지만 지옥 속에서 살고 있던 그의 곁에 있어줄 힘과 능력이 없었던 우리, 오늘 우리는 우리의 친구 알튀세르가 가졌던 이 몇몇 친구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사고를 빚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몇몇 친구들이 도처에서 [알튀세르의 이름을 이용해 먹으면서 자신이 그를 도왔다고]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이들은 전혀 아니라는 점은 명백합니다.
한 마디 더 하고 싶습니다. 우리들 중 많은 이들에게, 엘렌 알튀세르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에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커다란 슬픔과 애정을 통해 엘렌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정말로 마지막 한 마디를 더 하고 싶습니다. 이틀 전에 스타니슬라스 브르통(Stanislas Breton) 신부는 루이의 목소리에 대해 저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삼십 년의 세월 동안 루이의 목소리는 저에게 그의 고통과 고통으로부터의 회복에 관한 확실한 척도였습니다. 목소리 이외에도 또한 그의 눈빛이 그러했습니다. 저는 루이를 생-루이 병원에서 지난 8월 마지막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때 또 다시, 루이의 이성과 기억이 흔들렸던 10년 전 생트-안느 병원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눈빛은 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정말 제정신이네. 이를 알아주면 고맙겠어. 그의 몇몇 사진 속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눈빛과 같은, 이 웅변적인 눈빛을, 이 따스한 눈빛을, 놀란 사람과 같은 그의 눈빛을 여러분은 발견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눈빛에 사로잡히지는 맙시다. 그의 눈빛을 우리의 눈 속에 고요히 살아 있게 남겨둡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