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원고는 2023년 4월 15일 장애인 권리예산 투쟁에 연대하는 마포-신촌 학술단체 모임 학술 토론회에서 발표한 강연문을 다소 수정한 것입니다.
머리말
우선 발표에 앞서서 오늘 이 자리를 가능하게 해준 두 분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장애인 차별 철폐를 위해 앞장서 온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으로 약칭)의 헌신적 투쟁 덕분에 저는 조금이나마 우리나라 장애인 차별의 문제에 대해, 그들의 고통에 대해, 그들의 열망과 투쟁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애인 차별과 억압에서 드러나는 국가권력의 폭압성에 대해, 사회적 차별과 배제의 뿌리 깊음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따라서 그것을 철폐하기 위한 투쟁이 우리 시대 민주주의적 실천의 본질을 이룬다는 데 대해 얼마간이나마 깨닫게 된 것 역시 전장연의 투쟁 덕분입니다. 따라서 전장연의 투쟁을 이끌어온 박경석 공동대표님께 이러한 각성의 기회를 주신 데 대해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또한 김도현 선생님께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도현 선생님은 저와 같이 장애인 운동 바깥에 있고 또한 장애학 운동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는 장애인 운동과 장애학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귀중한 길잡이가 되어 왔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비판적 장애학이 단지 당사자들로서의 장애인들만이 아니라 비장애인들의 광범위한 관심사가 되고,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 사이의 연대와 횡단의 정치를 모색하는 데 준거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많은 부분 김도현 선생의 부단한 노력 덕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선생이 제도권 학계 바깥에서, 장애인 운동의 유기적 지식인으로서 이런 성과를 일궈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단지 제도권 내의 장애학만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의 제도권 인문사회과학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 증상으로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몇 마디 해보려는 것이 두 분을 비롯한 전장연 활동가들 및 비판적 장애학 연구자들의 가르침에 얼마나 부응하는 것일지 알 수 없습니다. 사실 제가 과연 오늘 학술대회의 기조강연자로서 적절한지, 그럴 만한 자격과 역량을 지니고 있는지에 관해 아마 많은 분들이 의아해하실 듯합니다. 저 역시도 과연 제가 저에게 부과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저 자신이 별로 미덥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오늘 여러분에게 몇 마디 전해보고자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제가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는 마포-신촌 학술단체 모임의 동료들에게 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투쟁에 관해 무언가 지지와 연대를 표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던 첫 번째 발언자였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제안자가 되는 일이 이렇게 위험한 겁니다 여러분. 아무튼 그 제안을 여러 동료들이 흔쾌히 받아주었고, 뜻을 함께 하는 연구자들이 속속 참여하게 되어 '장애인 권리예산투쟁에 함께 하는 마포-신촌 지역 학술단체 모임'이 결성되었습니다. 저희는 먼저 일간지에 전장연의 지하철탑승투쟁 및 권리예산투쟁에 대한 저희의 지지와 연대의 뜻이 담긴 공동 선언문을 게재하기로 하고 모금 및 지지 서명 활동을 전개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 학술대회를 기획하고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제가 첫 번째로 발표를 하게 된 것은, 그것이 이 모임의 최초 제안자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책무를 제가 어느 정도나 수행한 것이 될지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보편을 정의하는 역량으로서의 해방
보시는 바와 같이 오늘 학술대회의 전체 주제는 “역량(capability)으로서의 장애”입니다. 그리고 오늘 제 발표의 핵심 주제 중 하나 역시 역량입니다. 제가 발표문의 제목을 생각하면서, 아니 그 전에 마포-신촌 지역 학술단체 모임의 공동 성명서 초안을 만들면서 “역량”이라는 말을 떠올렸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존 맥나이트의 다음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문제로 정의된 사람들이 그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혁명은 시작된다.” 김도현 선생의 『장애학의 도전』(오월의 봄, 2019)을 읽은 이들이라면, 본문 맨 앞에 제사(題詞)로 인용되어 있는 이 문구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2017년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 캐치프레이즈였던 이 문구는 어떤 의미에서 장애가 역량인지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역량이란, “문제로 정의된 사람들이 그 문제를 다시 정의할 수 있는 힘”을 뜻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가 『불화: 정치와 철학』(진태원 옮김, 도서출판 길, 2015)에서 민주주의의 본질을 “몫 없는 이들의 몫”으로 정의하면서, 몫 없는 이들의 몫의 설립에 의해 지배의 자연적 질서가 중단될 때 정치가 시작된다고 말하면서 염두에 둔 것도 이러한 통찰과 다르지 않습니다.
맥나이트의 정의는 우리에게 몇 가지 점에 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제시해줍니다. 우선 철학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보편성이라는 것이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더욱이 보편성의 사회적 구성은 조화롭게, 아무런 갈등이나 다툼도 없이 누구나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중립적인 기준이나 절차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갈등적이고 심지어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보편성은 그것의 성립 조건으로서 적대와 폭력을 함축합니다. 새롭고 진정한 보편성이란, 아무런 문제가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서 문제가 드러날 때, 지금까지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 문제로 출현할 때 시작됩니다. 곧 지금까지 누군가에 의해 문젯거리로 여겨졌던 이들, 다른 이들과 평등한 이들로 간주되지 않고 무언가 부족하거나 비정상적인 이들로 여겨지고, 차별과 종속의 대상이거나 배제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이들이, 이런 취급은 부당하다고, 나 또는 우리는 비정상적인 것도 열등한 것도 아니며 차별과 종속의 대상이 되어 마땅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고 나설 때 진정한 보편성이 등장하게 됩니다.
랑시에르는 『불화』에서 이점에 관해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진정한 인간, 진정한 시민이란 오직 귀족들뿐이었습니다. 그들만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될 만한 재산(여기에는 노예들이 포함됩니다)을 지니고 있었고, 일을 하는 대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원과 기회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평민들은 형식적인 자유를 지니고 있긴 했지만, 먹고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동을 수행해야 했고, 정치적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자원과 여유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진정한 시민으로도, 진정한 인간으로도 대우받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자유는 불평등했으며, 귀족들만이 실질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자유는 불평등의 조건 속에서 향유되었습니다. 그리스나 로마의 평민들이 여기에 맞서 자유는 불평등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평등의 징표를 나타낸다고 주장하고 나섰을 때, 자유로운 이들은 평등을 누릴 자격이 있으며, 역으로 평등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될 경우에만 자유는 현실적으로 향유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 비로소 자유는 평등의 다른 표현이 될 수 있었으며, 만인의 평등한 자유를 위한 정치로서 민주주의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시민에 대한 보편적 정의를 새롭게 수립한 해방의 사건이었습니다.
19세기 유럽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곧 자기 자신과 자식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무산자 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에 맞서 자신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평등한 인간이고 평등한 시민이라고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다시 한 번 민주주의가 새롭게 구현되고 확장되었습니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평등의 3단논법”(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도서출판 길, 2014)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삼단논법의 대전제는 간단하다. 1830년에 막 공포된 헌장 전문에는 모든 프랑스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적혀 있다. 이 평등이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된다. 삼단논법의 소전제는 즉각적인 경험에서 이끌어 온 것이다. 예를 들어 1833년에 파리의 재단사들은 양복점 주인들이 급료, 노동 시간, 일부 노동 조건들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업을 시작했다. 따라서 삼단논법의 소전제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전개될 것이다. 그렇지만 양복점 주인 슈바르츠 씨는 우리의 근거들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실 그에게 급료를 재검토해야 할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근거들을 그는 검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을 검증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를 평등한 자들로 대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그는 헌장에 기입된 평등에 위배된다.(『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89쪽)
해방의 삼단논법이 구성되려면 먼저 대전제가 성립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삼단논법에서는 모든 프랑스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전제, 곧 보편적인 평등 전제가 헌법에 기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본질적인 중요성을 얻게 됩니다(그리고 이러한 기입 자체가 투쟁의 성과입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그 헌법에서 내세우는 평등의 원리란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사이에 실제로 존재하는 계급적 불평등을 은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고발한 바 있지만, 랑시에르가 볼 때 이는 19세기의 노동자들이 실제로 생각하고 실천했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위의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당시의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국가가 스스로 내세운 보편적 평등의 원리를 대전제로 삼아 그것을 위반하는 부르주아 주인의 행태(소전제)를 비판하면서, 결론적으로 자신들을 보편적 평등의 원리에 따라 실제로 평등하게 대우하라고, 사장과 동일한 인간이자 동일한 시민으로서 존엄하게 대우하라고 요구하면서 투쟁한 것입니다. 이것도 다시 한 번 인간과 시민에 대한 보편적 정의를 새롭게 제시하는 해방의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1849년에는 잔 드루앙(Jeanne Deroin) 같은 여성이 남성들에 대해,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과 시민에 대한 보편적 정의를 쇄신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식민지 해방투쟁을 전개했던 이들에게도, 흑인 및 유색인종의 인권과 시민권을 위해 투쟁했던 이들에게도, 그리고 오늘날 미등록 이주자 및 난민의 권리, 성적 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종속적이고 열등한, 심지어 비정상적인 존재자라는 낙인이 찍힌 가운데 차별과 억압, 배제를 감내하기보다는 그러한 낙인찍기와 차별에 맞서 투쟁하고, 이러한 투쟁을 통해 자신들에게 부과된 비정상적이고 열등한 인간과 시민의 지위를 철폐할 수 있을 때, 해방의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해방의 사건만이 보편성을 새로 정의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닙니다.
인간과 시민을 새롭게 정의하는 역량으로서의 장애
전장연을 중심으로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의 장애인들이 전개해온 투쟁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해방의 사건이었고, 그들 덕분에 한국 사회와 많은 ‘비장애인들’은 인간과 시민에 대한 진정으로 보편적이고 진보적인 정의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전장연의 투쟁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우리에게 새로운 통찰을 제공해줍니다. 그들은 우선 ‘비장애인들’에게 장애라는 범주를 다시 사고해보도록 촉구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장애인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닌 존재자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들은 우선 신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손상을 지닌 존재자이며, 이로 인해 다른 ‘정상인들’과 구별되는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존재자, ‘정상인들’이 보통 할 수 있는 이런저런 일들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존재자, 따라서 역량이 결여되어 있는 존재자이고(disability), 결국 다른 ‘정상인들’에 비하면 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 핸디캡을 지니게 되는 존재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은 우리 사회에서만 오랫동안 통용된 것이 아닙니다.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세계보건기구가 1980년에 제시한 바 있는 장애에 관한 국제적인 정의(ICIDH)의 핵심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른바 “의료적 장애모델”에 입각해 있는 이러한 장애인 범주에 맞서, 전장연은 문제를 다르게 사고하자고, 장애인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요컨대 장애인들의 능력 부족의 원인으로 제시되고, 따라서 차별적인 대우와 배제의 논거로 기능하는 정신적ㆍ신체적 손상이라는 것이 차별과 배제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손상은 오직 일정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차별과 배제를 산출하고, 이로써 ‘장애인’을 무언가 열등하고 비정상적인 존재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장애를 장애로 만드는 것은 바로 사회적 관계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동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이런저런 이들이 겪고 있는 신체적 장애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신체적 장애를 지닌 이들이 그 장애의 조건과 관계없이 충분히 편리하고 만족스럽게 이동할 수 있는 교통 인프라(엘리베이터, 저상버스 및 도보 편의 시설 등)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정신적, 신체적 손상으로 인해 의사소통에서 장애를 겪는 이들이 제대로 소통을 할 수 없다면, 그것 역시 그들의 손상 자체가 원인이라기보다는, 그런 손상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충분히 만족스럽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소통 인프라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적어도 이것이 만인의 평등한 자유라는 보편적 원리에 입각해 있는 민주주의의 원리에 부합하는 사고방식이고 실천일 것입니다. 이런저런 정신적, 신체적 손상을 지닌 이들은, 그런 손상을 지니지 않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곧 그들과 동등하게 인간과 시민으로서 대우받을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평등이 실질적으로 향유될 수 있도록 관련된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 및 지자체, 공무원들의 행정적인 돌봄의 의무일 것이며, 더 나아가 모든 시민들이 공유해야 할 정치적 의무일 것입니다. 다른 동료 인간과 시민(더욱이 매우 많은 수의)이 심각한 부자유와 불평등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나 또는 우리가 자유와 평등을 온전히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며 기만일 뿐입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는 민주주의적인 시민으로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특권적인 존재자로서, 지배자 내지 권력자로서 사고하는 것이며, 그것 자체가 갑질의 한 방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면, 과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구별 자체가 타당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만약 이런저런 정신적ㆍ신체적 손상을 지닌 이들을 ‘장애인’이라고 부른다면, 과연 우리들 가운데 장애인이라는 범주에서 자유로운 이들이 누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컨대 저는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안경이 없다면 제대로 책을 읽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상적인 도보가 어려울 만큼 시력이 심각하게 좋지 않습니다. 지난 두 달 동안은 목 디스크에 걸리는 바람에 제대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의자에 앉아 있는 일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론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약한 정도의 신체적 손상일뿐더러 영구적이거나 장기적인 손상이 아니라 일시적인 손상일 뿐이기 때문에, 장애와는 구별되는 것이라고.
좋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시각을 넓혀서 사람의 일생을 생각해봅시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어린 시절 상당한 기간 동안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장애를 지닌 채 살아가게 됩니다. 엄마나 아빠, 또는 주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제대로 눕지도 앉아 있지도 못하고, 영양분을 공급받거나 대소변을 해결하기도 어렵습니다. 그 시기를 지난다고 해도 우리가 마냥 자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먹고 입고 자는 것을 도와주어야 하고, 공부하는 것을 돌봐주어야 합니다. 심지어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가 스스로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무인도에 고립되어 살아가는 로빈슨 크루소나 아니면 인기 티브이 프로그램인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혼자서 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서는(하지만 그들의 삶은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끊임없이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삶이며, 많은 이들의 돌봄 속에서만 인간은 인간답게, 그리고 자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 끼 밥을 차려주는 이들, 청소와 빨래 같은 가사일을 해주는 이들, 교통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 환경 미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 덕분에 우리는 오늘도 한 사람의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더욱이 최근에는 식생활이 개선되고 의료 서비스의 질이 향상됨에 따라 평균 수명이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장수를 누린다는 것은 축복일 수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것은 재앙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적어도 새로운 문젯거리의 출현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신체와 정신이 쇠약해지면서 여러 가지 질병을 겪게 되며, 따라서 자연스럽게 더욱 많은 의료 서비스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살아오면서 특별한 정신적, 신체적 손상을 겪지 않았던 이들도 노년이 되면 불가피하게 다양한 형태의 손상을 겪게 됩니다. 말하자면 노년기에 접어들게 되면 누구나 이른바 ‘장애인들’이 되는 셈입니다. 평균수명이 80세를 훌쩍 넘기고 주변에서 90세가 넘은 어르신들을 쉽게 볼 수 있는 우리 시대는 어쩌면 (대표적으로 치매나 암, 각종 뇌질환 및 신경 질환 같은) 장애 문제의 보편화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일생의 더 많은 부분을 정신적, 신체적 손상 및 장애와 더불어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른바 “노년학”(gerontology)이라고 하는, 새로운 학제 연구는 장애학과 많은 부분에서 중첩되는 쟁점들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비장애인’이라고 부르는 범주는 사실은 우리 일생의 특정한 시기, 곧 청년기와 장년기 같은 시기를 추상해서 만들어낸 추상적 범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더욱이 우리가 청년기와 장년기에도 이런저런 정신적, 신체적 손상과 장애를 자주 경험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과연 나는 온전한 비장애인이다 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만약 그렇다면 특정한 정신적, 신체적 손상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만을 장애인들로 분류하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이들을 차별하거나 억압하는, 심지어 배제하는 것은 더욱 더 정당성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들을 비정상적인 존재자로 분류하고 차별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정상성’을 특권화하는 ‘비장애인’이라는 범주 역시 정당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장애의 문제는 특정한 집단이나 개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공통적인 문제가 되었으며, 인간을 규정하는 보편적인 특성이 되었습니다. 전장연의 투쟁은 우리에게 이점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