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 100년: 변혁적 실천의 상징 연구소장 슈테판 레세니히와의 인터뷰 - 비판적 사회이론의 전통과 미래에 관하여
인터뷰: 알렉스 스트루베(Alex Struwe). 2023년 1월 23일
슈테판 레세니히(Stephan Lessenich) 교수는 2021년부터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 소장이며 또한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 사회이론과 사회조사 담당 교수를 맡고 있다. 최근 그의 책 『더 이상 정상적이지 않은: 신경쇠약 직전의 사회(Nicht mehr normal. Gesellschaft am Rande des Nervenzusammenbruchs)』가 베를린의 한자 출판사(Hanser-Verlag) 에서 출간되었다.
레세니히 선생님, 약 1년 반 전에 당신은 사회조사연구소(IfS)의 소장직을 승인받았고 최근 연구소 100주년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이러한 기회가 당신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매우 일상적인 실천의 관점에서 100주년은 연구소가 오랜 시간 이후 다시 대중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기점을 나타냅니다. 팬데믹 동안의 제약들 이후에 이제 다시 여기서 행사들이 열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규적인 일상의 작업들도 시작되었습니다. 서너 달 전까지만 해도 많은 것들이 여전히 대부분 불확실했죠. 과학성과 대중성 사이의, 연구와 교육 사이의, 사회에 대한 성찰과 사회적 행위자들과의 상호작용 사이의 분기점에서 활동하는 연구소에게 이것은 중요한 계기입니다.
게다가 100주년은 당연히 그 자체로 대중적인 관심과 언론의 관심을 받는 커다란 기회입니다. 연구소의 명성은 물론 원래 1950년대와 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에 대한 관심은 1969년 테오도어 W. 아도르노의 죽음과 함께 끝나버렸고 그 후 단순히 기록으로서만 오늘날로 건너 뛰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역사는 상황에 일정한 어려움을 주고 있고 압력 또한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바로 저한테 말인데요. 저는 연구소 기획의 발전과 그 학술적 성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지요. 우리의 후원자들과 협력자들은 축제에 초대받았으며, 당연히 연구소가 무엇을 하고 있고 어느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지 알고싶어 합니다. 저는 이분들의 관심과 후원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비판적 사회연구의 과제와 본래 의도를 감안할 때, 저는 너무 우호적이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연구소의 활동이 의미하는 것은 현재의 상황을 단순히 계속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일상적 과정을 – 그러한 과정이 이뤄지고 있다면 – 중단시키는 것입니다.
100주년을 맞아 ‘전설적 연구소’와 그것의 ‘신성한 공간’이라는 언급이 나오고 있습니다. 당신은 사회조사연구소의 신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화에 관해서 저는 많이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연구소의 개별 성원들이 이룬 일생의 성취들을 존중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비화는 오늘날의 사회적 관계들을 파악하고 지성적인 지배비판을 학술적 연구에 도입하는 과제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신화는 우리의 구체적 작업을 하는 데에 부담일 뿐입니다. 물론 그러한 신화가 동시에 이 연구소의 가장 큰 자본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존경을 표하는 것이 신화화를 수반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비판이론과 정치적 실천의 관계에서든 혹은 성적 관계에서든 연구소의 공백이 어디에 있는지에 관해서도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연구소의 역사에 관한 언론의 서술에서는 남성이 아니었던 인물들은 거의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당신이 연구소장직을 승계했을 때, 이것은 일종의 패러다임 변화와 결부된 것이었습니다. 인정의 철학에서 참여의 사회학으로 이행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텐데요. 이러한 전환과 연구소에서 당신의 기획을 어떻게 서술할 수 있을까요?
그게 그렇게 보인다니 재미있네요. 당연하게도 그것은 역대 연구소장들을 연구소의 연구기획에 필요한 ‘전체를 위한 일부’로 간주하고 연구소를 인물과 동일시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직전 연구소장 악셀 호네트는 현대성의 규범적 역설에 대한 철학적 비판과 결합되고, 저는 참여의 정치 사회학과 결합되죠. 물론입니다. 국가사회적 틀을 폭발시키고 미시적 사건과 거시적 사건들 서로 함께 사고하는 비판적 사회학이죠. 저에게 물어보신다면, 이것이야말로 제가 하는 일이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당연하게도 저의 작업은 연구소의 연구기획 속에서 재발견되어야 합니다. 양자는 평행적으로 진행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연구원들을 자석처럼 저의 연구 관심에 붙잡아두는 요구를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매우 정교한 수평적인 연구기획의 발전과정을 만들어내는 중입니다. 이때 우리는 실제로 상이한 충동들 – 예컨대 학문분과들과 경험적 배경들에서 비롯하는 – 을 하나의 기획으로 결합하려고 시도합니다. 물론 이것은 자의적으로 진행되거나 오직 상이한 부분들을 덧붙이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초기의 사회조사연구소는 사회의 위기뿐만 아니라, 이 위기를 파악하고 극복하기를 요청하는 이론인 맑스주의의 위기라는 이중적인 위기진단을 통해 이론적 틀을 획득했습니다. 늦어도 1931년에는 연구소장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이로부터 강령적인 글인 ‘사회조사연구소의 과제들’을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제기되는 과제는 무엇입니까?
정확히 동일한 것입니다.
정확히 동일한 것이라고요?
정확히 동일한 것입니다. 적어도 구조적으로는요.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체계적으로 고통을, 특히 사회적 다수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생산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부르주아 사회가 체계적으로 인간 해방의 객관적 가능성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것은 비판이론의 근원적인 앎(Urwissen)입니다. 모든 생산성과 가능성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민주주의 사회모델은 그 대립물인 배제와 파괴를 함께 생산해냅니다. 비판이론은 언제나 이러한 어두운 측면을 강조했고 특히 전체(das Ganze)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을 고수해왔습니다. 전체적 상태는 사회적 과정, 대립, 갈등, 투쟁의 인위적 산물이며 어떤 방식으로고 자연화될 수 없습니다. 단순히 하나의 체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이해를 가진 현존하는 행위자들이 사회적 투쟁의 형성과정에 참여한다는 것, 그러한 투쟁들의 결과가 현재사회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구기획의 기저에 흐르는 주요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사회가 예나 지금이나 자본의 자기증식, 자연파괴, 사회적 관계들의 파괴라는 동일한 작동 메커니즘을 추구하고 전체 역시 여전히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은 상이한 권력의 입장들 속에서 이러한 관계들로 기입됩니다. 이것은 상황을 설명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러한 지속적으로 위기를 생산하는 사회가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본래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것은 경험적으로 추적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판이론에 대해 자주 제기되는 반론은, 비판이론이 후기자본주의만을 언급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시점에서 후기 혹은 최종적 후기자본주의에 살고 있다면, 언제쯤 상황이 좋아질 것인가 하는 것이죠.
실제로 자본주의의 사회적 형태는 일정한 방식으로 소진되었지만, 그것의 소진 이후에도 삶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주의의] 생존은 수많은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들을 괴롭게 합니다. 여기 독일에서 그것은 인간들에게서 삶의 소진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다른 곳에서는 더 심각하죠.
제가 보기에 이것이 100년 전과 동일한 구조적 문제설정입니다. 사회유형들의 어떤 성격적 특징이, 사회적인 것의 어떤 조직형태들이, 어떤 제도적 전제들이 파시즘이 권좌에 오르고 지속될 수 있게 해주었는가? 어떤 이유로 독일 연방공화국은 –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 오로지 나치즘 이후의 사회(post-nationalsozialistische Gesellschaft)로서만 이해될 수 있는가? 현재사회에서도 민주주의의 위협, 경제체계의 파괴력 그리고 사회적 관계들의 위기가 표출되고 있습니다.
100주년을 맞아서 초기 비판이론이 얼마나 중단 없는 현재성을 갖고 있는지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를 다소 놀라게 하는데요. 초기 비판이론은 수십 년 동안 더 이상 시대에 적합하지 않다고 간주되었잖습니까. 위르겐 하버마스는 비판이론을 예전의 2차 세계대전의 시대적 분위기라고 설명했지요. 사회적 총체성에 대한 가정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논박되고 사회적 모순들은 예컨대 역설들로 대체되었습니다. 맑스주의적 내용에 대한 이러한 불신들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제가 저 자신을 정통파(orthodox)라고 인식하는 지점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초기 비판이론의 근본 개념들은 제가 보기에 전적으로 지속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초기 비판이론으로 되돌아가버리면, 자기 진영 내에서든 외부로부터든 이에 대한 비판들이 삭제되어 버립니다. 비판이론이 히트시킨 맑스주의적인 근본개념들을 떠올려본다면 – 모순, 위기, 착취, 소외는 이에 관한 전도유망한 후보들이죠 – 이 개념들은 시험대에 올라야 합니다. 그리고 모순이 정확히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보여주고, 모순의 층위와 역동성이 무엇인지 분석하는 것은 연구기획의 과제일 것입니다. 사회적 적대를 단순히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많은 것을 얻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주요모순에 대한 주장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상호교차하는, 상호 결합되어 작동하는 모순적 짜임관계들을 더 정확히 이해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착취는 예나 지금이나 이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핵심 개념입니다. 사회조사연구소 밖에도, 단지 핵심적으로 자본-노동-축에서만 움직이지 않는 사회에서의 착취개념을 재구성하기 위한 흥미로운 노력들이 존재합니다. 착취는 주로 임금에 의존하지 않지만 간접적으로 잉여가치 생산을 위해 도구화되는, 사회 내의 취약한 지위들과 관련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사적 가정들에서의 돌봄을 비공식적으로 담당하는 동유럽에서 온 돌봄 노동자들이나, 자신들의 활동을 통해 국가의 사회적 하부구조 산업을 담당하는 시민적인 참여자들이 있습니다.
또 다른 반론이 있지요. 비판이론에 대한 거의 일반화된 반론인데요. 그것은 총체적 현혹연관이나 허위적 전체 등이 언급될 때마다 등장하는 비관주의입니다. 당신은 이에 반해, 이러한 부정성이 적합하다고 말합니다.
네. 부정적 관계들은 입장 형성에서의 부정성을 필요로 합니다. 많은 고통과 파괴를 생산하는 사회화의 형태는 고통과 파괴를 통해 형성되는 관계들에 대한 급진적인 부정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이미 초기 비판이론에서 부정성은 언제나 변화에 대한 전망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부정성은 사회가 체계적으로 해방, 자기조직화 그리고 연대의 가능성의 배후로 후퇴했다는 사실을 증언해줍니다. 따라서 비판이론은 부정성을 포기할 수 없으며, 부정성이 외부를 지각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역할로 축소되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심지어 비판이론의 위대한 대변자들조차 – 예컨대 라디오 사회학자이자 공적인 지식인이었던 아도르노는 – 대기 중에 있는 음울한 요소들만을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항상 사회의 다른 형태를 위한 출발점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니까 치명적인 요소는 변혁에 대한 호소가 부족했다는 점이 아닙니다. 상황이 예전처럼 계속될 수는 없다는 통찰은 그러는 사이에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럼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발터 벤야민에게서 유래하는 문장이 있지요. “‘계속(so weiter)’된다는 것, 그것은 파국이다.” 그러나 상황이 계속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해지는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이 제기되는 것만으로도 이미 더 긍정적인 수로에 도착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상적으로는 이러한 방식으로 다양한 추진력들이, 그리고 상황이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는데도 계속된다는 사실에 대한 전제들이 보이게 됩니다. 여기에 놓여 있는 것은 다른 상태에 대한 일일이 묘사할 수 없는 관념, 무언가 다른 것이 가능할 거라는 관념입니다.
비판이론은 해방이 가능한 조건들에 관해 다룹니다. 그러나 비판이론이 이때 이론으로 소급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패배나 무기력의 표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페리 앤더슨은 ‘서구 맑스주의’에 관한 그의 에세이에서 이를 표현한 바 있죠. 당신은 그의 책 개정판을 위한 후기를 작성했습니다. 앤더슨은 현저한 방식으로 비판이론에 대한 불신을 표현했습니다. 비판이론은 너무 부르주아적이고 혁명과 노동계급을 배신했다는 것이죠. 비판적 사회이론은 정치적 실천과 어떻게 관계해야 합니까?
물론 비판이론은 부르주아 사회의 지배적인 정치적 연관들 속에서 그들이 비판하는 실천 역시 고찰합니다. 실제로 비판이론은 실천에 거리를 둡니다. 이것은 정치적이고 또한 혁명적인 의도를 가진 실천과 이론적 반성 사이의 일종의 심연입니다. 게다가 여기에는 선한 의도가 있습니다. 이론은 실천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연은 습관적인 그리고 인적인 층위를 갖습니다. 이는 예컨대 학생운동이 아도르노에 대해 가한 소외 속에 확인됩니다. 아도르노가 1969년 사회조사연구소 점거세력에 대한 철거를 사주했던 것 혹은 아도르노의 강의를 중단시킨 ‘젖가슴 공격’을 둘러싼 소동 등이 이를 보여줍니다. 비판이론과 급진적 실천 사이의 간극은 언제나 역사적 시대의 징표를 담아내기도 했습니다.
맑스주의 철학자 죄르쥐 루카치는 비판이론에 대한 이러한 불신들 중 하나로 ‘심연이라는 그랜드 호텔(Grand Hotel Abgrund)’의 이미지를 선택했습니다. 이는 파국으로 향해 가는 부르주아적 관계들 속에서 사치스럽게 도달한 지위를 뜻하는데요…
그러한 논박들 중에는 언제나 한 줄기 진리가 속해 있습니다. 예컨대 이전의 기록들을 고찰해보면, 초기 비판이론의 어떤 주인공들은 그들만의 집단 속에 살았던 것 같은 관념이 자명해보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의도된 계획적인 등돌리기였습니다.
당신은 이러한 이미지[‘심연이라는 그랜드 호텔’]에 반대해서 ‘각성이라는 작은 여인숙(Petite Auberge Aufbruch)’을 내세웠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이제 이론적 반성의 그랜드 호텔에 관해서는 적어도 오늘날에는 더 이상은 전혀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 사회조사연구소에도 젖과 꿀이 흐르지 않습니다. 연구소에서는 그 누구도 – 아마도 소장 이외에는 – 특권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업가형 대학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다른 모든 영역과 마찬가지로 기업적이고 경쟁적인 경제적인 압력 하에서 학문사업 속에 작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취약해진 노동관계 하에서 고용되어 있는 사회조사연구소의 연구자에 관해서 그들이 독선적으로 연구소를 이끈다는 식의 말은 이제 거의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여기에는 허위의식의 형태들, 부르주아적이고 또한 상대적으로 안정된 실존방식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형태들은 소위 혁명적인 기획을 위해 즉각적으로 포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특히 이러한 기획을 정치적인 척도로 요구하는 것은 기이한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조사연구소에서 주어진 관계 하에서 활동하는 모든 사람들의 동기는 비판이론의 과제와 계획에 대한 지적인 가까움입니다. 모든 부르주아화 또는 관계들과의 일체화 속에서도 이러한 근본적인 분위기는 전적으로 각성을 위해 동원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오랜 시간 동안 독일 대학들에 부재했던 일정한 학문적-정치적 실천들을 다시 조금이라도 살아나도록 만들어냄으로써 말이죠.
왜냐하면 제 생각에 오늘날 – 완전히 다른 세대적 연관성 속에서, 완전히 다른 정치적 활동의 인물들, 유형들, 배경들과 더불어 – 역시 중요한 것은 이론과 실천 사이의 심연을 다시 축소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론이 정치적 실천에 근접한다고 손가락에 화상을 입는 것은 아닙니다. 제 생각에 일종의 습관적인 요소가 여기서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대개는 연구소의 축제일처럼 예의 있게 차려입고 연구소를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페리 앤더슨에게는 이것이 올바르게도 – 예전이나 그 후에나 마찬가지로 – 운동에 대한 접근으로 충분하지 않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변혁적 실천의 상징입니다.
연구소가 올해 오순절 개최되는 두 번째 맑스주의 작업주간과 결합하려는 이념은 이러한 맥락 속에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의견을 서로 교환하고 우리 자신의 견해에 따라 독창적인 계획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은둔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실제로 추구하는 것은 우리 시대 사회적 정치적 행위자들과의 대결이며, 이는 비판적인 대화 속에서 다음과 같은 연관된 질문을 다루기 위해서입니다. 현재에 적합한 문제화 방식은 무엇이며, 이것이 비판-이론적 연구기획에 대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과제는 결국 사회적 상황에 의해 제시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는 바로 이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소위 노동계급 주체가 배신당하는 동안, 좌파는 오랫동안 더 이상 어떠한 혁명적 주체에게도 말을 걸 수 없었다는 사실로 인해 고통받아 왔습니다. 정치적 변동을 위한 주체로서 누구를 제시할 수 있을까요? 누구에 대해 거리가 수립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에 관해 저는 언제나 다음과 같이 되묻곤 합니다. 예전에 실제로 배신당한 노동계급 주체가 존재했는가? 행위자에 대한 인식이나 또 마찬가지로 이론에 대한 인식에서도 그렇게 설명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미 그때에도 모든 실천이나 활동 면에서 남성으로 가득 찬 노동계급 이외에도 잠재적으로 배신당한 주체들이 훨씬 더 많이 존재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노동계급 주체는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죠. 그것은 이전에도 이미 이론적 환원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훌륭한 역사적-경험적 근거들이 있습니다만, 사회적 질문을 노동계급 문제로 환원한 것은 우선 첫째로 하나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역사적 주체를 동원하는 데에서의 실패는 학문적 맑스주의에서 나타난 분석의 협소화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런 한에서 저에게는 변혁의 혁명적 주체를 언급하는 것이 예전보다 훨씬 어려워졌는지 확실치 않습니다. 우리가 더 높은 수준의 개인화, 다양한 주체화 효과들, 그리고 거의 간과할 수 없는 사회적 분열의 짜임관계들을 지닌 복잡한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반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두 개의 계급만 존재했으며 이러한 단순한 관계들 속에서조차 변혁이 성공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오류로 귀결될 것이며 정치적 실천 역시 저해할 것입니다. 과거에도 못했는데 정체성들의 다양성이 존재하는 오늘날에는 어떻게 성공하나요?
당신은 제3자 후원을 통한 학문적 사업의 현실에 관해서, 그리고 후원금에 대한 종속에 관해서 이미 언급했습니다. 비판적 사회이론에 대한 당신의 요구는 이러한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실현될 수 있습니까?
당연히 오로지 영양공급의 방식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연대적이고 변혁적인 연구의 관계라는 이상적 관념으로부터 훨씬 후퇴했고 후퇴해야 한다는 것은 완전히 분명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분명한 것은, 우리가 결국 돈을 연구소로 끌어들이는 연구기획을 필요로 하며, 어느 경우든 대중적 요구들이 수용할 수 있는 학문적 행위자로 보여야 한다는 사실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주어진 관계 하에서 – 대학에서 뿐만 아니라 제가 보기에는 사회적 삶 전반에 걸쳐 – 다른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허용하는 입장들과 가능성들을 활용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때 연구소의 상징자본만으로도 기회는 결코 적지 않을 것입니다. 또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가지내리기와 역동성을 위한 고유한 실천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에 대한 기여가 오로지 아도르노가 예전에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요구한 구 대학 캠퍼스 보켄하임의 신호등을 실현시킨 것일 뿐이라는 농담이 있습니다. 연구소장으로서 당신은 무엇으로 기억되고자 합니까?
뭐, 저는 이미 옥상 테라스의 난간을 고정시켰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두뇌 노동자들의 안전이라는 관점에서 신호등과 비교할만한 두드러진 일이 아니겠습니까(웃음). 제가 실제로 대변하고 싶은 것은 연구소의 개방입니다. 이것은 연구소를 다시 지성적 대결의 장소로 여기게 될 학생사회를 위한 것이기도 하며, 마찬가지로 사회조사연구소를 더 분명하게 해줄 대학 전체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수년 동안 연구소는 그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연구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심 있게 지켜볼 시민사회의 행위자들과 정치적 행위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그들이 무엇과 대결해야 하는지를 간과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다만 이 행위자들이 이에 맞서 대항한다는 의미에서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