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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미시정치: 맑스와 현재 이전의 역사』 서문(1/2)

"현재와 같은 시간은 없다"

제이슨 리드

번역: 이승준(연구공간 L)

 

* 원문 Jason Read, The micro-politics of capital: Marx and the prehistory of the present,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03.

 

 

맑스주의 이론은 역사에 뒤처질 수 있으며, 심지어 그것이 도래했다고 믿는다면 그 자신에게도 뒤처질 수 있다.

 

루이 알튀세르, 철학에서 맑스주의자가 되는 것은 간단한가?

 

20세기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어쩌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저 수적인 약어나 텅 빈 계열, 혹은 명목적 표현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어느 정도 그것은 19세기에 잘 알려진 이데올로기‧희망‧신비화의 반복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의 반복은 더 빠른 속도로 일어났으며, 그 요소들을 한계로 밀어붙였다. 한마디로 극단으로 치달았다. 따라서 그러한 반복은 우리로 하여금 우선 19세기에서 벗어나지도 않은 채 21세기를 시작하게 했던 “시간의 조급함”을 나타낸다.

 

안토니오 네그리, 전복의 정치학

 

 

이데올로기이자 실천, 경제로서의 자본주의가 사회생활의 모든 차원에 침투해 전 지구의 신문 가판대와 방송에서 승리를 선언한 바로 그 시점에서, 자본과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는 사라지고 없다. 계급, 계급투쟁, 상품화, 착취 등의 용어는 마치 다른 장소와 시간에만 속해 있는 듯 공허하게 울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 사라짐은 결국 자본과 정치경제학은 비판할 게 없었다라는 축하의 목소리로 쉽게 설명된다. 시장은 자유와 동의어이며 늘 그랬다. 나는 이 글에서 그러한 주장과 변호론을 직접 다루기보다는 자본의 팽창과 그에 맞서야 할 비판적 어휘 일체의 고갈이 역설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상황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의 설명을 제시하고 싶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지난 30여 년 동안 깊은 변동을 겪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재화와 상품의 생산자인 자본을 전에는 상부구조라 불렀던 관념신념지각취향의 생산과 분리하는 것이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생산은 문화신념욕망의 생산을 직접 전유하거나 혹은 그것들을 상품의 생산과 유통에 간접적으로 연결시킨다. 어떠한 상품도 그것에 따라붙는 라이프스타일이나 하위문화와 분리해서 생각하기란 어려운 일이리라. 오늘날 대중 매체의 광고와 이미지에서 사라지고 해외로 옮겨진 것은 생산과정뿐만이 아니다. 또한 이제는 종종 상품 자체를 발견하는 것도 어렵다. 그 대신 잡지 광고는 라이프스타일, 쿨한 이미지를 보여주며, 우리가 구매한다고 여겨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미지이다. 이러한 변형은 또한 노동의 근본적 변동을 수반한다. 즉 이제 노동으로 내몰리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 노동력이 아니라 지식정동욕망이다. 요컨대 자본주의적 생산은 그날그날의 사회적 실존의 조직망, 궁극적으로는 주체성 자체의 조직망에 스스로를 끼워넣음으로써 미시-정치적이라고 묘사될 수 있는 어떤 차원을 떠안았다. 낡은 용어들이 공허하게 울리는 것은 그것들이 자신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변화우리는 이제 더 이상 19세기에 살고 있지 않다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바로 그 비판의 용어 자체도 변화했다는 사실에 아직 적응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보편적 역사의 거대한 도식에 따라 자본을 비판하거나 또는 자본의 광범위한 변동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가치와 욕망의 최후의 흔적에 기대 자본에 반대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비판은 자본의 미시-정치적 차원에 맞춰져야만 하며, 또한 비판은 미셸 푸코가 우리 자신의 비판적 존재론이라 불렀던 것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비판적 사고가 어느 수준으로 이러한 현실과 마주해야 하는가는 불분명하게 남아있다. 얼핏 보기에 생산과정의 변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사회학적 논의나 경제학적 논의에 적합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 경우 내가 언급했던 변형은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거나 논쟁할 만한 새로운 경제의 지위즉 경제 내에서의 여러 유형의 생산과 대비되는 소통정보서비스의 우위에 관한 논의에 적합할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변형이 주체성생산이것은 지각사고행위와 같은 근본적인 인간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이 맺는 관계의 변동이라고 제시하면, 그것이 경제와 동일시되는 어떤 것 내에서의 과업과 우선권의 단순한 변경을 넘어서, 바로 그 구조나 토대의 근본적 변형 즉 인간 실존 자체의 근본적 변형으로 확대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따라서 비판적 사고가 이러한 변형과 마주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그러한 비판적 기획 이전에 존재하는 바로 그 범주들 및 분리들 내에 어떤 결함이 이미 작동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다시 말해 확정적이고 구획지어진 실존 영역 즉 재화와 서비스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영역으로서의 경제를 다루는 경제적 분석과, 적어도 암묵적으로는 비역사적이라는 가정하에서 인간의 지각욕망지식을 다루는 철학적 분석을 가르는 바로 그 분리가 현재의 변형을 파악하는 데에는 근본적인 장벽으로 작용할 것이다.

 

칼 맑스가 생산양식이라는 용어로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역사적으로 이행하고 있는 생산의 영역과,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문화적 가치의 영역 간의 바로 이러한 분리였을지 모른다. 맑스의 생산양식 개념 혹은 생산양식의 문제에 유용하고 심지어 필수 불가결하기까지 한 어떤 것이 있다는 점을 인용하고 제안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오늘날의 철학적이론적 분위기에서는 기껏해야 시대착오적인 짓으로 보일 뿐이다. 이것이 시대착오적인 이유는, 의문의 여지 없이 그 자체로 기억에서 잊혀진 1960-1970년대의 생산양식 논쟁으로의 회귀를 암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맑스 저작과의 단순히 사회학적이거나 경제학적인 연관성보다는 오히려 지속적인 철학적 연관성을 시사한다는 더 근본적인 이유 때문이다.

 

맑스주의의 죽음에 대한 이러저러한 선언과 그 역사를 검토하는 것은 이 책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 하지만 이 논쟁에 관한 다양한 입장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은 곧 맑스 사상은 철학을 위해 남겨놓은 게 아무것도 없다고 가정하는 것과 같다는 점을 단지 지나가는 말이라도 지적해 둘 만하다. 맑스주의 정치기획의 일부 견해에 여전히 동조하는 철학자들에게조차 맑스라는 이름은, 주제화해서 다루기가 어려운 착취의 현실에 반대하는 윤리적 불만을 대표하거나 아니면 순수한 경제적 분석의 기본도구를 대표한다. 이 외에도 맑스의 철학은 소외에 대한 초기 저작들에 한정되며, 이 저작들은 헤겔에 대한 기백은 넘치지만 미성숙한 비난에 불과한 것으로 자신을 드러낼 뿐이라고 여겨진다. 실제로 대부분의 포스트-맑스주의그 중에서 특히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샹탈 무페, 주디스 버틀러 등는 맑스의 후기 저작인 『자본』『요강』이 오늘날의 철학적정치적 실천에 제공하는 바에 대해 상대적으로 침묵을 지키는 편이다. 대신에 포스트-맑스주의는 정치적 실천의 역사,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실천에서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잡는다. 그리고 맑스의 저작을 조금이라도 끌어들이는 것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모순적 경향을 분석하는 것은 대체로 비난받을 만한 정치적지적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고들 가정한다. 그들은 맑스를 철학적으로 읽는다면, 발견하게 될 것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재작성된 헤겔의 역사 주체뿐이라고 가정한다.1) 이 책에서 포스트-맑스주의의 주장을 직접 다루는 것은 내 의도가 아니다. 오히려 나의 목표는 맑스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인식을 산출하는 데 있다.

 

이렇게 조용히 맑스 문헌의 철학적 논증이 삭제되는 것은 단순히 철학적 분위기가 변화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내가 앞서 경제 비판적 탐구와 철학 비판적 탐구의 관계에 관해 언급했던 문제와 관련이 있다. 내가 말했듯이, 이러한 구분은 오늘날의 문화와 정치, 그리고 궁극적으로 존재에서의 변화를 인식하는 데에는 해로울 수 있는데, 오늘날에는 문화 범주와 경제 범주를 일종의 밀폐된 격리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리는, 면밀하게 조사되고 탐구되지 않는 한에서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 것과 관련해 분명 책임이 있으며, 또한 그만큼 맑스 저작의 문제를 파악하는 데에도 방해가 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맑스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11번 테제에서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많은 이들은 이 진술 역시 맑스가 철학을 명시적으로 비난하면서 철학으로부터 이탈한 것이라고 볼 것이다. 그래서 맑스의 후기 저작은 [철학이 아니라] 정치경제학, 역사, 정치분석에서의 작업으로 이해될 수 있다. 루이 알튀세르가 맑스의 인식론적 단절이것은 청년 맑스를 노년 맑스와 분리시키는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말하며, 궁극적으로 『자본』과 같은 저작의 기저에 깔려있는 철학적 문제에 주의를 집중시키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이라는 자신의 논쟁적인 테제를 발전시킨 것은, 일정부분 맑스의 철학을 1840년대의 초기 저작에만 위치시켰던 그러한 생각에 반대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알튀세르가 맑스 후기의 정치경제학 비판에 깔려있는 새로운 철학적 문제를 강조한 것이 옳았다면, 그러한 철학적 문제가 새로운 설명양식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도 인정되어야 한다. 『자본』『요강』에서 철학적 사변, 철학적 인간학, 역사철학 등의 요소들은 기계, 공장법, 정치투쟁에 대한 구체적 분석과 교차한다. 후자[기계, 공장법, 정치투쟁]는 단지 전자의 예화나 사례가 아니며, 근본적으로는 보다 일반적인 철학적 진술을, 아마도 그의 고유한 철학적 진술을 변경한 것이다.2) #철학적 사변과 다양한 존재 차원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대립하는 것이 특수한 사회적 상황 내에서 철학의 구획된 장소를 반영하는 실천에서의 유물론이며, 또한 동시에 그것은 해석에 있어 특수한 도전 및 어려움을 제기한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말에 따르면, 맑스의 저작은 철학적 지식이라는 보편적 주장을 그것의 특수한 역사적물질적 조건에 노출시킴으로써 철학을 넘어서지만또한 그와 동시에 겉보기에는 자의적인 테제로 지식의 본성 및 실존에 관한 진술을 제시함으로써 철학에 미달한다.”3)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맑스의 생산양식 개념 혹은 생산양식의 문제로 되돌아가, 그것을 경제나 사회의 다른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철학적 문제로 이해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맑스는 “생산양식”이라는 용어 및 개념을 특수한 물질적 실존의 생산과, 의식 형태를 포함하는 특수한 사회적 질서 간의 역사적으로 가변적인 관계를 개념화하는 데 사용했다. 이 개념을 가장 광범하게 제시하는 구절에서 맑스가 말했듯이,

 

인간들은 자신들의 실존의 사회적 생산에서 불가피하게 자신들의 의지와는 독립적인 규정적 관계에, 즉 물질적 생산력의 주어진 단계에 적합한 생산관계에 진입한다. 이러한 생산관계의 총체는 실재적 토대[Basis]인 한에서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구성하며, 이 토대 위에서 법적‧정치적 상부구조[Überbau]가 발생하며, 사회적 의식의 규정적 형태가 그에 상응한다.4)

 

이 유명한 아니 악명높은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건축적 형상은 사회적 관계를 다루는 맑스의 사상에서 생산양식의 중심성을 확립한다. 비록 그것이 어느 정도 모호성이 있으며 아니 적어도 이러한 모호성이 #사실 이후에, 말하자면 맑스의 저작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의해 생산되었다고는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이 구절을 생산양식에 대한 정의로 읽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생산양식이 단지 생산관계를 지시하는지 아니면 이러한 생산관계(및 생산력)가 정치적법적 상부구조와 그에 상응하는 의식 형태에 미치는 효과를 지시하는지는 불분명하다. 생산양식은 경제관계를 지시하는 제한된 개념이자 동시에 사회적인 것의 총체를 지시하는 확장된 개념이다.5) 각각의 경우 의식이나 주체성의 위치가 애매하다. 첫째, 제한된 이해에서는 주체성이 그 자체로 생산관계 내에 포함될 수 있는지가 불분명한 반면에, 둘째, 확장된 이해에서는 의식의 형태가 토대로부터 발생한다. 맑스의 사상에서 생산양식의 근본적 역할은, 헤겔 좌파와의 논쟁생산양식 개념이 처음 도입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부터 계급투쟁에 대한 생산양식의 우선성(혹은 규정된 생산양식 국면에의 계급투쟁의 의존성)을 강조하는 맑스의 진술까지의 구간에 잘 기록되어 있다. 생산양식을 실천(이론적 실천을 포함한)의 물질적역사적 근거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맑스의 철학과 정치적 작업은 도덕주의(‘자본주의는 나쁘다’)(부정확한) 예언으로 붕괴한다는 점을, 비록 약간 조잡하긴 하지만, 덧붙일 수도 있다. 맑스의 사상에서 생산양식의 중심성에도 불구하고, 혹은 어쩌면 바로 그 이유로, 생산양식은 단순한 정의로는 환원될 수 없는데, 그만큼 맑스의 저작에서 생산양식이 차지하는 지위가 더욱 문제가 된다. 혹은 알튀세르의 용어로는 문제설정(즉 질문을 제기하기 위한 장치)이 된다.

 

 

생산양식이라는 문제설정은 적어도 다음 네 가지의 분리되어 있지만 상호연관된 요소들을 통해 잠정적으로 확인될 수 있다. (1) 의식(이것은 사회성이나 주체성이라는 보다 현대적인 용어로 번역되거나 되지 않을 수 있다)과 생산의 관계, (2) “사회적 실천의 상이한 형태들, 즉 경제적법적정치적 형태와 맺는 관계, 요소는 이러한 실천들이 서로에 대해 가질 현실적이고 가능한 효과를 필연적으로 포함할 것이다. (3) 역사를 상이한 생산양식(즉 공동체적 생산양식, 아시아적 생산양식, 고대적 생산양식, 봉건적 생산양식,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시대 구분하기, 그리고 이 양식들 간의 이행이나 혁명들, (4) 역사성 혹은 모든 생산양식에서 재생산”(혹은 규정)해체(dissolution)”(혹은 과소규정)의 긴장, 그리고 역사의 모든 지점에서의 상이한 양식들의 공존.

 

나는 이러한 목록이 너무 성급하게 도출된 것일 수 있음을 덧붙이고자 한다. 첫째, 깔끔하게 번호가 매겨진 이 목록의 구성은 맑스의 저작이 지닌 불균등한”, “불완전한위상, 심지어 위급한 정세에 쓰여졌음을 간과한다. 이 각각의 요소들은 맑스 저작의 다양한 지점들에서 다양한 긴급사태와 관련해 서로 다른 정도로 발전되었다. 가령 의식과 그것의 물질적 생산의 문제는 철학 비판과 관련된 『독일 이데올로기』와 같은 초기 문헌을 넘어서 대부분의 맑스 저작에서는 명시적으로 발전되지 않는다. 반면 이 문제설정의 (3)번째, (4)번째 요소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화와 변형(혹은 성장과 몰락)을 다루는 『자본』의 대부분을 구성한다. 둘째, 이러한 목록은, 그것의 선형적 설명에 따라, 이러한 상이한 요소들 간의 암묵적 긴장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이지 않게 한다. 주어진 사례로 돌아가 확장해보면, 맑스의 문헌은 『독일 이데올로기』를 제외하면 틀림없이 의식의 생산과 생산양식의 변형이 서로 이론적으로 교차한다는 점과 관련해 그다지 많은 것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 및 역사성에 초점을 맞춘 『자본』과 같은 후기 문헌들에서 그러한 관계[(1)(2)]의 부재는, 문제설정의 이 두 요소들 간에 나타나는 가능한 긴장을 #제시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관념 및 주체성의 유물론적 생산은 맑스와 독일 관념론과의 갈등에서 대체로 그랬듯 주로 교훈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형성과 갈등에 대한 검토에서는 두드러지게 결여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의식의 생산이나 주체성 생산에 대한 분석은 현 정세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서는, 즉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상호작용에서는 가장 부재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일련의 문제들로 틀지어진 생산양식은 포스트-구조주의라는 용어와 동일시되는 일군의 철학자들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으로, 미셸 푸코,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그리고 그보다는 그 정도가 덜하긴 하지만 자크 데리다)과 연관된 자기 자리가 있다. 우리는 이 저자들 각각에게서 장치”, “사회적 기계”, “추상기계와 같은 개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개념들은 앞서 제시한 일련의 문제들에 응답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의식오늘날에는 소위 주체성과 그것의 물질적 조건의 관계, 그리고 상이한 실천들(정치적경제적법적 실천 등)이 맺는 관계의 접합의 문제가 그렇다.

 

이러한 유사성은 아마도 푸코의 경우에서 가장 강력할 것이다. 푸코는 생산보다는 권력의 근본적 변화(왕의 주권권력에서 근대국가를 특징짓는 감시와 통제의 훈육권력에 이르는)에 기초한 경합하는 시대구분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또한 맑스와의 방법론적 유사성을 지닌 뭔가를 공유한다. 맑스처럼 푸코도 철학 안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역사계보학현재에 대한 저술을 통해 현대 사회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수행했다. 푸코는 자신의 지적 기획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제 책들은 철학 논문도, 역사 연구서도 아닙니다. 기껏해야 그것들은 문제들의 역사적 장을 다루는 철학적 단편 같은 것이죠.”6) 그러한 서술이 일반적으로 역사에 대한 최후의 철학이라고 이해되는 맑스주의의 공식적 버전과, 즉 대단히 중요한 계급투쟁의 논리 하에서 역사 전체를 설명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역사에서의 철학이라는 그러한 관념, 말하자면 구체적인 역사적 순간들에 맞서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맑스 자신의 철학적 생산을 이해하는 데 생산적으로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맑스의 주요 개념들이데올로기’, ‘상품 물신주의’, ‘생산양식뿐만이 아니라, 또한 근본적으로 단절된 그의 저작의 상황쥐가 갉아먹은 비판으로 남아있는 초고들과 『자본』의 불완전한 몇몇 부분들은 이렇게 근본적으로 특정한 상황에 놓여있었으며, 급박한 정세에 있었던 사유의 양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이 맑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를 학계 내에서 방법론이나 적대적 진영으로 판단하려는 시도를 주된 관심사로 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앞서 언급한 모호한 유사성은 그들이 같은 지형, 즉 같은 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 불과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책은 다른 도발과 다른 정세의 의미와 어떤 관련을 맺으며, 이러한 다양한 연구와 도발은 배경으로서의 정세에 반대하여 그 방향을 잡고 실효성을 측정한다. 맑스와 푸코(또는 들뢰즈데리다가타리)의 궁극적인 관계에 대한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맑스와 이러저러한 사상가나 지적 운동의 관계로 틀지어진 그러한 문제에 해법을 제시하는 일은 일부 학문적 논쟁들과 적대를 화해시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포스트구조주의와 맑스주의의 차이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차이가 오늘날 반드시 다루어야 할 빈틈을 지적하는 방식이다. 한편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변형 및 발전을 검토하기 위한 맑스로부터 파생된 도구들그러한 도구들에서는 주체성이 사후적인 사유나 결과로 남아있다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적 가치화의 변형과는 별개로 검토되는 자기와의 관계로서 주체성 생산을 검토하기 위한 푸코와 포스트구조주의 사상가들로부터 나온 도구들이 있다.7) 따라서 포스트-구조주의와 관련되어 있다고 가정되는 이전의 모든 방법과 선입견과 단절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경제와 문화의 분리라는 손아귀에 붙들려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현재의 정세에서 우리는 생산 및 주체성 생산의 새로운 교차에 의해 정치문화경제의 변형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이 두 가지 연구 노선 사이에서 발이 묶여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이 책은 두 가지 동시적인 방향에서 작업한다. 첫째는 맑스를 주체성 생산 이론으로 읽는 것, 그리고 생산력과 생산관계나 토대와 상부구조의 개념적 형상에 대한 모든 인용을 능가하는 이론으로 읽는 것이다. 맑스가 이 이론을 명시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주체성 생산의 사상혹은 문제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 이론은 오히려 맑스 개념의 틈새와 그것의 긴장 및 접촉 지점에 존재한다. 따라서 그러한 검토는 맑스를 [합리적] 핵심에 반하여읽는 것을 수반한다. 아마도 맑스의 핵심에 반대하기보다는 여러 맑스주의 저작들에 반대한다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 저작들은 맑스의 초기 저작에서 인간주의적인 주체성 개념(#근원적 충만함 속에 그것의 이후의 소외가 필연적으로 미리 존재한다는 식의)에 대한 호소를, 후기 저작에서는 자본주의 발전 법칙에 대한 순전히 경제적 설명에 불과한 것을 발견한다. 핵심에 반대하는 이러한 독해는 여러 문헌들에 의해 가능해지는데, 그 문헌들에는 일종의 도발들, 즉 내가 앞서 언급했던 푸코와 여러 포스트-구조주의자들, 알튀세르발리바르랑시에르와 같은 이른바 구조주의적 맑스주의, 안토니오 네그리, 마리오 트론티, 레오뽈디나 포르뚜나띠,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빠올로 비르노와 같은 자율주의적 맑스주의”, 그리고 비판이론과 페미니즘 철학의 여러 저작 등이 있다. 이 문헌들은 이 글에서 수행되는 맑스 독해를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역으로 맑스의 문헌으로부터 도출된 개념 및 문제를 확장하는 잠재적 논점을 구성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점은 맑스에 대한 적절한 해석과 부적절한 해석을 구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단순히 이 책으로 종결될 진리와 오류의 역사로서의 해석의 역사를 도표화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기획의 두 번째 차원은 이러한 초기의 주체성 생산 이론을, 오늘날의 맑스 해석 및 서로 경합하는 주체성 생산 이론들과의 관계로 확장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맑스 독해를 현 정세의 요구들과의 접촉으로 확장하는 데 있다. 앞서 역사에서의 철학에 관해 말한 것은 맑스 방법에 대한 서술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기획이 열망하는 어떤 이념형으로 기능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맑스 기획의 지적 유산에 관한 최후의 말을 차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존재하는 모순적 경향들에 대한 이해를 생산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맑스와 맑스주의를 읽는 데 있다.

 

내가 맑스를 포스트-맑스주의나 포스트-구조주의의 전위(avant la lettre)의 일종즉 누군가는 계급투쟁, 모순, 현실 역사를 발견해야 한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구조아포리아문헌적 긴장 등을 발견하는 것으로 변모시켰다는 비난이 가해질 것이다. 또는 다른 이들은 내가 푸코, 들뢰즈 등을, 호전적인 권력투쟁과 욕망투쟁 아래에서 유물론과 자본의 안정적인 현존을 발견하는 비밀-맑스주의자에 불과한 사람들로 환원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관념적으로 보면, 이 두 비판은 서로를 상쇄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두 비판이 이 기획의 한계를 지시하는 만큼이나 학술 범주들의 한계 및 물신화된 본성을 드러냄으로써 스스로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 이 밖에도 이러한 비난에 응답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는 그와 관련된 모든 철학자(맑스, 푸코 등)가 내가 그들에게 귀속시킨 바로 그것을 말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 책은 맑스의 실제 저작과 주장에 거의 강박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실제로 맑스를 읽는 것, 특히 『자본』『요강』의 초고를 작성한 부주의한 맑스를 읽는 것, 그래서 공식적인 맑스주의나 학술적인 맑스주의의 진부한 공식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이 기획은 지성의 역사를, 혹은 최소한 하나의 계보를 구축한다. 나는 앞에서 맑스와 포스트-구조주의 간에 몇 가지 공유된 지적 유산이 있음을 언급했는데, 이는 모든 초월성에의 호소를 거부(또는 내재성을 긍정)하는 것과, 추정된 비역사적 실체(가령 주체)의 역사적 생산에 주목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일반적인 지적 유사성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명할 것이다이 그 자체로 19-20세기의 역사, 즉 자본의 역사에서의 변형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생산양식에 대한 검토에서 주체성 생산으로의 이행은 그 자체로 자본 자체가 변화했음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다. 자본이 삶을 생산 및 재생산하는 사회적 네트워크 속으로 더 깊이 옮겨갈수록 비판적 사고는 일정부분 이 이동을 뒤따르면서 주체성 생산 및 재생산으로 관심을 돌린다. 알튀세르의 구조주의적 맑스주의가 이 책에서 두드러지게 기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알튀세르의 엄청난 철학적 생산은 맑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라는 추정상 적대적 진영들 사이에서 사라지는 매개자로 기능한다.

 

(계속)

 

 

각주

 

1) 이런 관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Judith Butler, Ernesto Laclau, and Slavoj Žižek, 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 Contemporary Dialogues on the Left, New York: Verso, 2000. [한글본] 슬라보예 지젝, 주디스 버틀러,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 좌파에 대한 현재적 대화들』, 박미선박대진 옮김, 도서출판b, 2009가 있다.

 

2) 맑스 철학의 지위 문제는 자크 데리다의 저작에 대한 최근의 논쟁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Jacques Derrida, Specters of Marx: The State of Debt, the Work of Mourning, and the New International, Trans. Peggy Kamuf, New York: Routledge, 1994. [한글본]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옮김, 그린비, 2014.

 

3) Étienne Balibar, The Philosophy of Marx, Trans. Chris Turner, New York: Verso, 1995, p. 19. [한글본] 에티엔 발리바르,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에 반해』, 배세진 옮김, 오월의 봄, 2018, 63.

 

4) Karl Marx,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Trans. S. W. Ryasanskaya. New York: International, 1970, p. 20. [한글본] 카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김호균 옮김, 청사, 1998, 7.

 

5) Louis Althusser, Sur la reproduction,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95. p. 45. 2장에서 나는 맑스와 푸코의 비교 속에서 생산양식의 확장된 의미와 제한된 의미 사이의 이러한 관계로 돌아올 것이다. [한글본] 루이 알튀세르, 『재생산에 대하여』,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7, 58.

 

6) Michel Foucault, “Questions of Method”, trans. Colin Gordon. In The Foucault Effect: Studies in Governmentality, Edited by Graham Burchell, Colin Gordon, and Peter Miller.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1. pp. 74. [한글본] 미셸 푸코, 방법에 관한 질문들, 『푸코 효과』, 콜린 고든, 그래엄 버첼, 피터 밀러 엮음, 심성보유진이규원이승철전의령최영찬 옮김, 난장, 2014, 114.

 

7) Maurizio Lazzarato, “Le ‘cycle’ de la production immatérielle”, Futur Antérieur 35-36, 1992, p.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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