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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그 책, 저 책으로 목록-C를 지시하기 ☞

디자인 책―이 책, 그 책, 저 책》 전시 리뷰

 

 

 

☞ 기간. 2023.1.11. ~ 2023.1.31.

☞ 시간. 11:00 ~ 19:00

☞ 장소. wrm space (서울시 마포구 잔다리로3안길 46 L층)

☞ 기획. whatreallymatters

 

 

정지영 | 디자이너.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디자인 책 ― 이 책, 그 책, 저 책》 전시 포스터. 출처: wrm

이 디자이너, 그 디자이너, 저 디자이너

 

전시 《디자인 책–이 책, 그 책, 저 책》에서 지시사 ‘이’ ‘그’ ‘저’는 책과 나 사이를 임시로 대리한다. 나와 책이 관계맺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어떤 책은 “이 책” “그 책” “저 책”으로 불린다. 지금 여기, 내가 두 손으로 잡은 “이 책”은, 손이 닿을 수 있는 거리를 벗어나면 “저 책”으로, 전시가 종료된 후 말이나 글로 소환된다면 “그 책”으로 불릴 테다. 그러니 《디자인 책–이 책, 그 책, 저 책》은 서로 다른 각각의 책을 지시하기도, 시간과 공간으로 분리된 하나의 책을 지시하기도 하는 제목이다.

 

전시는 책을 DR, DW, DA로 분류한다. DR, DW, DA는 차례로 연구자(Researcher)로서의 디자이너, 노동자(Worker)로서의 디자이너, 작가(Author)로서의 디자이너를 뜻한다. 전시는 세 “-디자이너”를 분류기준으로 삼지만, 그것이 고정된 정체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디자이너는 자신이 당면한 시간과 공간에 따라 세 역할을 유동하며 수행한다. 연구자의 태도로 대상을 분석하고, 작가의 관점으로 논리를 부여하며, 노동자의 세심함으로 작업에 매진한다. 그러니 DR, DW, DA는 서로 다른 각각의 디자이너를 지시하기도,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하는 한 사람의 역할을 지시하기도 하는 명칭이다.

 

그런데 연구자, 노동자, 작가의 역할이 비단 디자이너로 불리는 이들에게만 부여되는 건 아니다. 전시장에는 매체 철학자 빌렘 플루서와 방사선학과 의사 마틴 바인만의 책도 있다. 플루서의 『디자인의 작은 철학』(A-2003-DR-215)은 디자인의 의미에서 출발하여 매체 현상학 측면에서 디자인을 다룬다. 바인만의 『손이 지배하는 세상』(A-2002-DR-201)은 손이 지각, 감각, 인식, 언어활동에 미치는 영향을 학제적으로 탐구하고 노동자와 예술가에게 손의 역할을 강조한다. DR, DW, DA 분류체계에 따라 두 책은 DR로 분류된다. 전시는 본래 디자이너로 불리지 않던 이들을 연구자의 태도로 디자인을 수행하는 ‘연구자-디자이너’로 삼는다.



전시 전경. 사진: 정지영

이 손

 

오프라인 전시 공간인 wrm space 입구에는 기획 글이 시트지로 부착되어 있다. 통로를 따라 들어오면 출입 명부와 함께 1976년부터 2015년까지 국내에 출간된 디자인 책을 조사한 「책들의 목록」이 놓여 있다. 안쪽에는 벽을 따라 〈책들의 연대기〉가 연도별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열된다. 연대별로 나열된 책 제목은 점차 늘어나는 추이를 보이다가 2013년, 14년에는 바닥에 닿고 2015년을 끝으로 중단된다. 연대기 맞은편에는 앞뒤로 책이 진열된 철제 서가가 2줄로 서 있다. 서가는 가로 여덟 칸, 세로 네 칸의 그리드를 이루며, 〈책들〉은 그리드 위에서 글줄처럼 가로로 흐른다. 600여 권의 책이 표지를 보이며 발행 시대순으로 나열되어 있지만, 관객의 시선은 그와는 상관 없이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한 대각선으로, 본인의 지극한 관심이 이끄는 반대편 서가로 이동하게 된다. 바닥에는 동선을 알리는 손가락표가 시트지로 부착되어 있고, 손가락표를 따라 이동하면 전시장 구석에 위치한 〈스크랩룸〉에 다다른다.

 

손가락표를 따라 서가 사이를 걸어보자. 말로만 듣던 책 표지는 전설적인 선배처럼, 익숙한 책 표지는 오랜만인 동기처럼 반갑다. 그중 나에게 가장 의외였던 만남은 『손이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전시된 다른 책들과 달리, 이 책은 디자인에 관한 서술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이 책의 출판사인 해바라기는 디자인 책을 전문으로 내는 곳도 아니다. 인터넷 서점에 이 책을 검색해보니 교보문고는 과학으로, 알라딘은 인문학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이 책이 놓인 전시장 서가 왼편에는 『디자인 문화비평 06』이, 오른편에는 『디자인 3분 스피치』가 놓여 있다. 그러나 『손이 지배하는 세상』의 제목이나 목차 어디에도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각주:1]

 

『손이 지배하는 세상』은 디자인의 역사나 이론, 방법을 직접 다루지 않는다. 책에서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만나기 위해서는 444페이지까지 가야 한다. 12장 「예술가의 손」에서 마이케 크리스타틀러는 오늘날 ‘디자인(design)’에 해당하는 이탈리아어 ‘디세뇨(disegno)’를 바사리와 동시대(르네상스) 사람들이 ‘그림’과 ‘이념’이라는 두 가지 뜻으로 사용했다고 소개한다. 바사리가 정의한 예술 활동은 예술가가 비례를 인식함으로써 이념과 사상을 형성하고 훈련된 손으로 그 사상을 표현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표현된 그림에는 예술가의 이성이 반영된다. 바사리의 예술관에 따르면 비례를 인식하는 이성과 표현하는 손에 각각의 역할이 배정되지만, 결과물에서 그 둘이 뒤섞인다.

 

전시 전경. 사진: 정지영

그 손

 

전시장에서 손은 대체로 자유롭지 못하다. 전시장의 작품은 자주 ‘보는 대상’으로 한정된다. 혹여나 훼손될지 모른다는 우려로부터, 책도 예외는 아니다. 책이 디자인과 밀접한 사물인 만큼 책은 디자인 전시에서 단골 작품으로 등장하지만 그중 대부분은 만질 수 없도록 전시된다. 비용의 한계와 가치의 보존이 이유이자 변명으로 따라붙기 마련이다. 때로 호기심 많은 관객을 위해 보이지 않는 책의 내부와 뒤표지를 다른 매체를 통해서라도 보여주려는 전시가 있는가 하면,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는 전시도 있다. 읽을 수 없는(만지고 살피고 펼치고 들여다보고 해석하는 다양한 과정이 읽기에 포함된다) 책 전시에서 책은 박제된 채 꼼짝없이 누워 있다. 그때 관객에게 책은 전시장에서 지나치는 풍경의 일부일 뿐이다.

 

《디자인 책–이 책, 그 책, 저 책》는 책을 박제된 시체로 만들지 않는다. 전시는 서가에서 관객이 책을 집어 들고, 펼쳐 읽으며, 원하는 부분을 스크랩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전시 방식은 책과 관객이 서로를 성장하게 한다. 전시 기간이 지날수록 책은 표지가 점점 닫히지 않고 조금씩 휘어진다. 모서리는 닳아 부드러워지고 손때가 묻어 색이 탁하게 변한다. 그럼에도 전시는 관객이 책을 만지고 펼쳐보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을 만질 수 있게 함으로써, ‘연구자-디자이너’ ‘노동자-디자이너’ ‘작가-디자이너’는 전시장에서 관객이 수행하는 역할로 탈바꿈한다. 전시장에서 관객과 책은 함께 늙으며 성장한다. 전시는 책의 노화를 성장의 흔적으로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Berkeley, Bancroft Library, MS 85 (14th century)

출처:medievalbooks.nl/2014/09/05/getting-personal-in-the-margin/

 

저 손

 

전시장 바닥의 손가락표는 관객을 〈책들의 연대기〉에서 〈책들〉로, 〈책들〉에서 〈책들의 목록〉으로, 〈책들의 목록〉에서 〈스크랩룸〉으로 이끈다. 〈스크랩룸〉에 마련된 복합기로 페이지를 복사하면 흰 A4용지와 세 종류 색지에 번갈아 가며 출력된다. 색지의 색상은 전시 아이덴티티로 사용된 형광 핑크, 라임, 청록이다. 채도 높은 색지에 출력된 글자들은 흰 종이에 출력된 글자에 비해 쉬이 읽히지 않는다. 복합기 옆 테이블에는 다른 관람객이 복사한 뒤 놓고 간 페이지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다. 색지에 출력된 페이지들은 마치 그래픽 이미지처럼 보인다. 전시장에서 책을 복사하는 관람객은 어느새 글자를 옮기는 필경사이자 그래픽 이미지 제작자가 된다.

 

전시 아이덴티티로 사용된 손가락표는 원래 독자가 책을 읽다가 여백에 그렸던 표시였다. 르네상스 시대에 독자는 책을 읽으며 많은 논평을 달았다. 책은 그저 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방향 소통 매체가 아닌 논쟁과 토론의 장이었다. 그중 손가락표는 책의 말을 짚어내어 나의 말로 변환하는 장치였다.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손가락표는 활자 기호에 포함되어, 저자나 편집자가 독자의 자유로운 생각을 다시 책으로 견인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각주:2] 오늘날 유니코드 문자 U+261C, U+261D, U+261E, U+261F로 표현되는 손가락표는 책이 흡수한 독자의 흔적인 셈이다.

 

르네상스 시대 손가락표가 본문 밖에서 독자의 생각을 불러오듯, 전시는 전시장 밖에서 관람객에게 손가락표를 내어주며 전시에 관한 생각을 불러오게 한다. 전시 기획자 이호정은 몇몇 디자인계 종사자를 프리뷰 리뷰어로 참여시켜 전시에 초대하고 SNS에 리뷰를 올리도록 했다. 프리뷰 리뷰는 전시가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전시 기간 내에 업로드된다. 잠재적 관람객은 SNS에서 시작일 이전에 업로드되는 리뷰를 읽으며 전시를 상상하고, 전시에 방문한 관람객은 리뷰어와 자신의 감상을 비교하며 새로운 리뷰를 남긴다. 본문 바깥을 지시하는 손가락표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전시장 바깥을 향해 말하게 한다. 전시장에 놓이지 않은 책까지 포함된 725권의 〈책들의 목록〉은 전시 기간이 끝난 뒤 전시장 바깥에서 관람객의 시공간에 흘러든다.

 

전시 전경. 사진: 정지영

이 책, 그 책, 저 책

 

《디자인 책–이 책, 그 책, 저 책》이 지시하는 방향은 현재의 우리다. 전시는 디자인사를 다시 해석하고, 디자이너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도록 촉구한다. 2015년에서 끊어진 목록은 그 이후에 출간된 디자인 책을 관람객 스스로 찾아 나서게 하는, 목록의 불완전함을 통해 다음에 올 빈자리를 가리킨다.[각주:3] 따라서 725권의 책이 담긴 목록은 앞뒤로 인쇄된 6장의 종이 묶음이지만, 물리적인 책이 전시된 전시장과 비슷한 무게를 갖는다. 〈책들의 목록〉은 현재를 위한 모든 관람객-디자이너들의 참고 문헌이자, 미래를 위해 또 다른 책을 부르는 주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목록-C를 만들 수도 있겠다. 전시장에 놓인 목록-A와 문서에만 존재하는 목록-B 다음에 오는 사건으로서의 목록-C 말이다. 우리 손에서 목록-C가 발생한다: “이 책”이 말하는 “그 책”이 “저 책”이었다는 사건으로; “이 책”이 소개하는 “그 책”을 찾다가 “저 책”을 만나게 되는 사건으로; “이 책”에도, “저 책”에도 등장한 적 없는 “그 책”을 호출하는 사건으로.

 

  1. 디자이너 최슬기는 리뷰에서 전시된 책 제목을 분석한다. 책 제목으로 ‘디자인’과 자주 함께 사용된 단어를 분석한 리뷰로, 전시에 포함된 책의 유형을 파악하고 싶다면 참고하라. https://www.instagram.com/p/CnMWQwhPX16/ (디자이너 최슬기 인스타그램 포스트, 2023년 1월 31일 접속) [본문으로]
  2. 키스 휴스턴, 『책의 책』, 이은진 옮김, 김영사, 2019, p. 453 [본문으로]
  3. 기획자 이호정은 필자와의 대화에서 2015년을 분기점으로 삼은 이유 몇 가지를 밝혔다. 2015년을 전후한 디자인계 내 페미니즘 담론의 본격화, 이케아 매장 국내 첫 개점, 엑스트라 스몰(XS) 스튜디오의 증가 등이 있다. 이는 각각 디자인계 내에 사회적 담론이 가시화되고, 대중이 원하는 디자인 스타일이 변화하며, 디자이너가 일하는 방식이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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