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질에 관해 다시 한 번 성찰해보게 됩니다. 이처럼 장애라는 것이 특정한 부류의 개인들 및 집단에게만 고유한 특성이나 현상이 아니라, 우리 인간(및 동물, 더 나아가 생명체 일반)이 보편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특성임에도, 우리는 왜 장애라는 것을 특수한 개인들 및 집단들에게 고유한 문제로 여기게 되었고, 왜 장애학이라는 학문을 ‘장애인들’이라고 불리는 특수한 이들에 관한 특수한 학문이라고 간주하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철학도로서 생각해본다면, 서양 철학에서 전통적으로 전승되어온 인간의 본질에 대한 특정한 개념화가 주요한 이유로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주체’(subject)라고 하는 것을 토대로 삼고 있는 서양 근현대철학, 그리고 이 철학들에서 제시되는 표준적인 인간에 대한 관점이 장애를 특수한 문제로 간주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꽤 오래 전부터 페미니즘 학자들은 서양 근현대철학에서 제시되어온 표준적인 인간, 곧 자율적인 존재자로서의 주체의 모델이 사실은 여성을 근원적으로 배제하는 남성 중심적인 모델이라고 고발해왔습니다. ‘인간’을 가리키는 영어의 맨(man)이라는 단어가 동시에 ‘남자’를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서양 근현대철학, 더 나아가 서양 근현대문명에서는 ‘인간 = 남자’로 간주되어 왔고, 여자는 남자에 비해 열등한 존재자로 치부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여성은 공적인 활동에서 배제된 채 가사일을 전담하면서 아버지, 남편, 자식을 위해 봉사하는 종속적인 존재자의 지위를 할당받아오게 되었고요.
그런데 서양 근현대철학은 여성만을 차별하거나 배제해온 것은 아닙니다. 동시에 이 철학들에서 제시되는 표준적인 인간으로서의 주체는 당연히 ‘비장애인’ 주체이고, 비장애인으로서의 주체는 자기 스스로 다른 사람의 도움 내지 돌봄 없이 사고하고 활동할 수 있는 존재자입니다. 주체라는 개념의 핵심적인 속성이 ‘자율성’으로 정의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주체는 스스로 사고하고 활동하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자입니다.
이러한 근대적 주체 개념에 대하여 미국의 철학자이나 퀴어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는 정당하게도 그것이 ‘판타지’(phantasy)라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주디스 버틀러, 『비폭력의 힘』,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20). 이것이 판타지 또는 망상인 이유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노년 시절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돌봄 속에서만 존속될 수 있고 재생산될 수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돌봄 활동이라는 것은 특정한 존재자에게만 필요한 특수한 활동이 아닙니다. 자율적인 존재자로서의 주체는, 오직 타자들의 돌봄 속에서만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존재자로서 살아가고 사고하고 활동할 수 있습니다. 돌봄은 자율성 및 자립성의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그것은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가 경험한 흥미로운 일화가 있습니다. 제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는 어느 계간지의 편집회의에서 특집 주제로 “돌봄”의 문제를 다뤄보자고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제안에 대해 어떤 편집위원은 아니, 노인이나 장애인 같은 사람들을 돌보는 활동이 어떻게 특집 주제가 될 수 있느냐고 반문을 했습니다. 그것은 아주 지엽적인 문제라는 것이죠. 버틀러의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전형적인 서양 근대 철학의 판타지의 표현일 것입니다. 더욱이 매우 남성 중심적인 시각일뿐더러, 신자유주의로 표현되는 주류경제학적인 시각입니다(반드시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겠지만요). 이런 시각에서 보면 돌봄은 특수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지엽적인 활동일뿐더러, 돌봄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재정 투입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정상적인 주체’로서의 대다수 비장애인들 시민에게 돌봄은 반드시 필요한 활동이 아닐뿐더러, 만약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각자 필요한 만큼, 그리고 능력만큼(요컨대 돈이 있는 대로)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앞에서 말했던 것이 얼마간 타당성이 있다면, 이런 시각은 의료적 장애 모델에 입각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주체에 관한 전통주의적 시각, 곧 남성 중심적이고 주체 중심적인 판타지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시각일 뿐입니다.
서양근현대철학이 이처럼 자율적인 존재자로서 주체에 관한 판타지를 포함하고 있다면, 스피노자는 이러한 철학사의 흐름에서 상당히 예외적인 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스피노자는 인간을 포함한 유한한 존재자를 실체로 간주하지 않고 양태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스피노자 철학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바와 달리 실체(substance)의 철학이 아니라 양태(mode)의 철학, 양태의 존재론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데카르트까지, 그리고 데카르트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 전통에서 존재하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실체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때 ‘실체’라는 범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따르면, 주어의 자리에 올 수 있는 존재자들, 곧 자립적인 존재자들을 가리킵니다. 반면 스피노자는 인간을 포함한 존재하는 이런저런 사물들을 실체가 아니라 양태라고 정의합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양태”의 라틴어 원어는 모두스(modus)인데, 이것은 원래 ‘척도’라는 뜻 이외에도 ‘방식’이나 ‘태도’ 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래 모두스라는 용어는 어떤 실재나 사물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그 사물의 모양이나 존재방식, 행위방식 등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럼에도 스피노자는 인간을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양태들입니다. 여기 있는 책상이나 의자, 건물, 나무, 그리고 지구 전체도 양태이며, 더 나아가 관념과 정신 역시 하나의 양태입니다. 그러면서 스피노자는 『윤리학』 1부 정의 3에서 실체를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정의 5에서는 양태를 “다른 것 안에 있고 다른 것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실체와 양태에 대한 두 개의 정의의 내용이 서로 대조를 이루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실체가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존재자를 가리킨다면, 양태는 기본적으로 타율적이고 의존적인 존재자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스피노자에게는 오직 신 또는 우주 전체만이 실체이고,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양태이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타율적이고 의존적인 존재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던 헤겔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용납하기 어려웠던 점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스피노자처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을 양태라고 규정하면, 인간은 주체일 수가 없으며, 따라서 인간에게는 윤리적 실천의 여지도 자유의 여지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을, 아직 주체가 되지 못한 실체의 철학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요컨대 스피노자의 철학은 진정한 의미의 근대 철학에 미달하는 철학이라는 셈입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스피노자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을 양태라고 규정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근본적으로 상호의존적인 존재자라는 것, 따라서 타자와의 관계 없이는 성립할 수도 없고 존속할 수도 없는 존재자라는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요컨대 스피노자의 양태의 존재론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을 오직 관계 속에서만 실존하고 존속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관계론적인 시각을 나타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독특한 실재”(res singularis, singular thing)에 관한 스피노자의 정의입니다. 스피노자는 『윤리학』 2부 정의 7에서 “독특한 실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나는 독특한 실재를,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작용에 협력하여 그 개체 모두가 함께 하나의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된다면, 나는 이것들 모두를 바로 그런 한에서 하나의 독특한 실재로 간주한다.”
이 정의에서 흥미로운 것은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작용에 협력하여 그 개체 모두가 함께 하나의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된다면”이라는 대목입니다. 이는 “독특한 실재”라는 것이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다수의 개체들이라는 점을 말해줍니다. 또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독특한 실재를 구성하는 것은, 이 개체들이 공동의 결과를 산출하는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할 때입니다. 그것들은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한에서 하나의 독특한 실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독특한 실재가 바로 스피노자가 양태, 특히 유한 양태라고 부른 것의 다른 표현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양태 또는 독특한 실재는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실존하고 존속할 수 있는데, 스피노자는 이를 “변용”(affection)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합니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변용되기와 변용하기의 연속입니다. 생명체로서의 내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공기에 의해 변용되어야 하고 마실 수 있는 물에 의해 변용되어야 하며, 일정한 영양분에 의해 변용되어야 합니다. 역으로 나는 다른 사물들이나 사람들을 변용함으로써 존속하고 실존합니다. 나 또는 우리의 가족이나 친구, 동료들의 변용되기와 변용하기 속에서, 나 또는 우리의 적들과의 변용되기와 변용하기 속에서 우리는 실존하고 존속하고 때로는 손상을 입거나 소멸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용의 관계가 우리의 실존과 삶의 보편적인 조건을 이룹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좋은 변용의 관계만을 경험한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좋은 변용들만이 아니라 나쁜 변용들을 경험할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고 때로는 신체나 정신의 일부가 파괴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매우 심각한 손상을 입을 수도 있고 죽음을 겪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용의 관계는 양가적인 관계입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우리가 우리의 역량을 획득하고 증대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이룹니다. 우리는 타자들과의 변용되기와 변용하기의 관계를 통해서만 우리의 역량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변용 관계 덕분입니다. 반면 변용 관계는 우리가 손상을 입고 때로는 파괴될 수 있는 원천을 이루기도 합니다. 변용 관계는 기본적으로 상처 받을 수 있는 가능성(vulnerability)을 잠재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상처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동시에 우리가 역량을 획득할 수 있는 조건인 한에서, 장애의 문제는 인간의 보편적 조건과 연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것은 지금까지 ‘장애인’이라고 불린 이들만이 아니라, 아마도 ‘비장애인’이라고 잘못 선험적으로 분류된 이들까지도 모두 배워야 하는 공통의 과제, 인간의 또는 생명체 일반의 공통의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제를 우리 공통의 과제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장애의 문제를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의 보편적 문제로 사고한다는 뜻입니다. 누구도 장애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으며, 실제로 우리 모두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항상 이미 장애를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편적인 삶의 조건으로서 돌봄
여기에서 보편적인 삶의 조건으로서 돌봄이라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제 시간이 없으니 마지막으로 돌봄에 관해 간단히 한 마디만 더 언급하고 제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앞에서 제가 말했던 것이 일리가 있다면, 장애인들에게만 돌봄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부모의 끊임없는 손길이 필요한 어린 시절이나 보호자의 지속적인 돌봄이 필요한 노년의 시기에만 돌봄이 요구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각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서 사회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며, 또한 스스로 다른 누군가의 삶을 지속적으로 돌봐야 합니다. 관계론적인 존재론은 돌봄의 윤리를 요구합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과 다른 누군가의 삶을 돌보는 것은 모든 시민의 의무이자 각자가 누려야 할 권리이며 필수적인 삶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대표는 최근에 출간한 자서전 『이규식의 세상 속으로:나의 이동권 이야기』(후마니타스, 2023)에서 “활동보조인이 생긴 뒤로는 내 삶이 180도 바뀌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활동 보조인의 돌봄을 받기 전까지는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는 ‘지금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인지’가 우선”이었던 데 반해, 활동보조인의 지속적인 돌봄을 받게 된 이후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양하게 시도해 보거나, 한 사람의 시민으로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애인만의 이야기일까요? 스스로 비장애인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 각자 역시 어떤 활동 보조인의 돌봄 없이는 시민으로서, 자립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을 누릴 수 없는 것 아닐까요? 다만 스스로 비장애인이라고 여기는 이들은, 자신의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의 역량을 가능하게 해주는 이러한 돌봄을 당연한 것으로, 자연히 주어진 것으로 여기고, 그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전장연의 투쟁은 우리에게 돌봄 활동이라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인 삶의 조건이라는 것, 우리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의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전장연의 투쟁은 우리 사회가, 특히 정부와 서울시가 이러한 보편적 돌봄의 중요성을 외면하고 그것에 대한 공적인 책무를 망각하고 있다는 점 역시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히려 정부와 서울시는, 그리고 보수 언론은 전장연의 시위를 선량한 시민들을 볼모로 삼는 이기적인 소수 집단의 불법적인 시위로 몰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처럼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고, 사회적 소수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묵살하거나 외면하면서 억압하고 배제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의 전형적인 특성입니다. 그 이유는 신자유주의에서는 타인과의 관계를 경쟁과 자기 향상의 틀 안에서만 추구하는 기업가적 개인을 인간의 전형으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식에 기반을 둔 사회 조직과 공적 행위는 협력보다는 경쟁을 우선시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효율성과 수익성이라는 이름 아래 그렇게 하죠). 또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요구, 곧 을들의 요구는 패배자들이나 무임승차자들의 부당한 불평불만으로 치부되고, 때로는 보편적인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법적인 치안 교란 행위로 간주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장연의 투쟁은, 더더욱 우리 사회 일부 개인들이나 특정 집단의 권익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통치에 맞선 보편적인 투쟁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잠재적 장애의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과 시민의 보편적인 돌봄의 권리에 입각하여 우리 사회를 민주주의적으로 개조할 것이냐 아니면 신자유주의적인 권위주의 통치에 밀려 세습적인 불평등의 질서를 강화하는, 따라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 무관심한 가운데, 각자의 이익을 위해 경쟁하는 질서를 용인할 것이냐를 쟁점으로 갖는 투쟁입니다. 광범위한 생태계 파괴와 보건 재난, 사회적 안전 재난 같은 다중적 재난으로 특징지어지는 우리 시대에 이 투쟁은 우리 평범한 시민들에게 서로를 돌보고 서로의 싸움에 연대함으로써 우리의 권리를 스스로 지키고 확장하는 길 이외에 다른 권력, 다른 역량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 투쟁이 다중 재난에 직면하여 또 다른 해방의 사건으로 기억될 수 있는가 여부는 우리가 이러한 공통의 역량을 구성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점을 가르쳐준 데 대해서도 전장연에 대해 깊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