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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네그리 <탈근대적인 전지구적 협치와 비판법학 기획> (3/3)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영문 번역 : 쥴리아 크리소탈리스(Julia H. Chryssostalis), 패트릭 하나핀(Patrick Hanafin)
한글 번역 : 연구공간L 박성진, 이승준

 

 

* 출처 : Law and Critique, 2005, no. 16, pp. 27–46.
* 영문 제목 : ‘Postmodern global governance and the critical legal project’[각주:1]

 

 

IV

 

그런데 우리가 비판 운동의 정치적 위상을 고려한다면, 이론에게 요구되는 변화 역시 마찬가지로 심대하고 광범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판법학 이론은 이론이 몰두하고 그에 반응하는 새로운 사회적 상황에서는 새로운 주체에 대한 탐색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주체에는 더 이상 노동하는 대중의 형태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며, 노동자의 사회적 형태, 즉 사무직 노동자와 지식 노동자, 시간제 노동자, 여성 노동자, 이주 노동자 등이 포함된다. 한때 운동에서 정치적 동일시의 요소였던 생산적 사회주의는 오늘날 더 이상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한다. 비판법학 이론이 개입해야 하는 영역은 더 이상 직접적 생산의 영역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분산적인 생산의 영역, 서비스 노동, 재생산 노동, 가사 노동이다. 새로운 주체는 더 이상 정치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삶정치적이다. 새로운 주체는 자본주의적 삶권력과의 적대를 삶의 전체 무대 위로 다시 끌어온다.

기초적인 현상학은 우리의 이론적 귀납법을 확인시켜주면서, 상식적인 시민적 법 개념의 기본 조건 중 일부가 최근 수십 년 동안 소진되었음을 드러낸다. 탈근대적인 법의 꽉 막혀있으면서도 또한 우발적인 이미지를 강화하는 이러한 변화는 포드주의 시대의 헌법이 자리를 잡았던 좀 더 특수한 장치와 관련이 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그 목록을 나열하게 될 위험이 있는 어떤 현상학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모든 길이 로마정치적 대의의 위기로 통하는 이점이 있다. 실제로 정치적 대의는, 포드주의 시대의 사회적 갈등이 그것을 고정시켰던 현실적 형태 안에서, 민주주의적 헌법의 실질적 장치, 즉 매개를 목적으로 확립된 (정당이나 제도의) 주체가 되었다. 우리가 이러한 갈등 및 그것의 구성적 ()해결의 관념을 전체적으로 발견한 것은 푸코의 훈육 장치개념 속에서이다.

이제는 민주주의의 정치적 대의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이 짧은 20세기에 소진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대의이다. 무한한 수의 특수하고, 역사적인 요소들이 모여 이 위기를 그것의 벌거벗은 물질성 안에서 정의한다. 입법권력(환칭[換稱/antonomasia]에 의한 대의)을 지배하는 정부의 훨씬 더 압도적인 중요성에서 기업의 침범과 행정부 부패의 진부화로 야기된 대의 메커니즘의 왜곡 및 차단(또는 뒤틀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점점 더 분명해지는 공식적인대의 장소(의회와 정부)의 포기에서 언론에 의해 규정되는 새로운 공적 공간의 한계없는 확장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결과로서 사회적 갈등의 사법적인(‘독립적인권력?) 위로부터의 결정에서 입헌 권력을 두고 다투는 경쟁의 불균형에 이르기까지 등등. 그리고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로부터 위기의 또 다른 요소가 발생한다. 첫째, 주권 권력이 종종 예측할 수 없이 변형되는 권력의 다른 중심지들(가령 유럽에서는 한편으로는 연방정부의 형태,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정부의 형태)로 표류한다는 점. 둘째, 무엇보다도 (주권적 권한에서의 위기에 더해진 대의에서의 근본적 위기를 통한) 국민국가의 제국으로의 권력 이양. 마지막 셋째, 정치적 대의가 희귀해진다는 점, 그리고 이 목록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매개 메커니즘 즉 구성적 장치라는 의미에서 대의 기능이 여기서 어떻게 출현할 수 있는가? 푸코(멀리서 이 위기를 예상했던)가 이 문제와 대면했을 때, 그는 정치적인 것과 정부의 근대적 형태, 즉 계급갈등을 훈육하는근대적 형태가 빛이 바래지고 더 정확하게는 붕괴하면서 다른 패러다임을 위한 여지를 남겼던 순간에 민주주의 장치를 회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주장한다. 그 결과로 푸코가 통치능력’(‘협치혹은 통치성’)의 대의를 진정으로 넘어서는 새로운 역학을 이론화하고, 이 새로운 정부형태의 효력을 삶정치적 통제라는 (내적이고, 연속적이며, 강도높은) 구조 안에 위치시킬 때, 여기서 그는 우리가 살고 있고, 그가 우리를 밀어넣은하지만 해방에의 필요성을 제기할 가능성을 우리에게 남겨주지는 않는새로운 시대로의 이행을 염두에 두고 있다.

 

 

V

 

세 번째 문제: 비판의 인식론적 규약(protocol). 정치와 법이 더 이상 (근대적인 홉스적 의미에서) 다중의 통합에서 출발하지 않고 그 자체 다중의 다양한 실천으로 나타날 때, 정치와 법은 애매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가능한 궤적을 따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목도하는 장()은 복수성으로, 그리고 동시에 자본주의의 분리와 위계로 특징지어질 뿐만 아니라 또한 (특히 우리에게는) 탈주선으로, 새로운 착취형태에 맞선 투쟁의 운동들로, 그리고 다중의 새로운 협력 형태로 특징지어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치와 법의 형태구성(mise en forme)’이 반드시 전지구화 및 그 효과의 맥락에서 일어난다면, 이는 그것이 또한 사유와 행동의, 삶과 해방의 다양한 공간으로 이뤄진 내재적이고 반복되는 구축물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판법학 이론은 아래로부터 매일매일의 삶의 새로운 범주를 구성할 어떤 과정을 요청이론화옹호하는 새롭고 가난한 프롤레타리아 주체들의 실존과 저항을 따라야만 한다. 해체는 끝났다. 이제 우리는 제헌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절박한 것은 해방의 응답이다. 그렇지만 누가 그것을 제공할 수 있는가? 현실주의가 선택할 수 없는 길이 되고 윤리적으로 건전한 기획을 건설할 토대를 확인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덕을 발현할 수 있는가? 현실주의를 필요로 했던 갈등들이 이제 종식되었다면, 외부가 없는 자기-준거적 관계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일련의 원리를 모두를 위한 해방과 진보에 기반한 헌법 재구축의 기초로 확인할 수 있는가? 패러다임 변화에 의해 결정되는 새로운 인간학적 틀 내에서 새로운 헌법 논쟁의 토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일련의 직관적 원리를 확인할 가능성은 존재하는가?

이 문제를 숙고하는 데 있어, 나는 페더럴리스트의 기원에 놓여 있는 저 새로운 정치학’, 즉 무타티스 무탄디스(mutatis mutandis[바뀌어야 할 것이 바뀌었다])의 방법만이 떠오른다. 그 당시에 여러 미국의 지식인들은 과학적논쟁을 개시했는데, 이는 미국의 각 주()로부터 시작해 정치사상의 세계 중심에 즉 계몽주의 문화에 도달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논쟁은 새로운헌법 논의, 권리에 대한 정의 및 그것의 배분, 권력과 대항권력의 분리와 균형 등을 위한 준거틀을 구성했다. (가장 권위있는 역사가들에 따르면)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의 사유에 영감을 준 사람은 흄과 루소였다. 그들의 영향력은 공개 토론을 개방시키게 만들었으며(이는 『페더럴리스트에 기재되어 있다), 그것은 구성적 목적론을 향한 일련의 직관적 원리에 의해 추동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의문은 우선 권리와 해방, 권력과 대항권력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헌법을 만드는 것에 관해 의미 있는 토론을 할 수 있는 직관적 원리가 오늘날 존재하는가의 여부이다. 내가 가진 두 번째 의문은 오늘날 입헌적 논의를 수립유지발전시킬 수 있는 정치인과 변호사가 실제로 있는가의 여부이다.

그런데 내 생각에 첫 번째 의문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반드시 의견일치가 이뤄지지 않을지라도) 몇 가지 직관적 배치(dispositivi), 즉 윤리-정치적 틀짓기를 시도하고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최근 몇 년간 복지국가의 종말 및 이른바 유일사상[각주:2]에 관한 논쟁을 둘러싸고, 즉 헌법의 삶정치적변형의 역설에 관한 교환을 둘러싸고 전개된 생각을 염두에 둔다면, 특히 두 가지 직관적 원리가 떠오른다.

내 생각에 새로운 정치학의 첫 번째 원리는 삶정치적 장에 대한 인식에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정치적 대의라는 수수께끼(따라서 입헌적인 것의 자율 및/또는 정치적인 것의 자율)에서 출발해 법현실주의를 이러한 초월론적 작업에 종속시키는 모든 추론의 노선은 반드시 위기에 봉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 생산이 사회적인 것이 되는 만큼 정치가 생산적인 것이 되기 때문에, 행정과 생산, 정치와 경제가 훨씬 더 높은 강도로 뒤섞인다. 주체의 관점에서 보면, ‘삶정치는 정치적인 것의 근대적경험이 소진되었음을 의미한다. 정치적인 것은 더 이상 삶과 분리되지 않고, 삶에 참여한다. 복지국가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파괴의 역설적 결과는 사회적인 것 전체가 생산적인 것이 되었고, 삶 전체가 노동이 되었다는 점(푸코와 들뢰즈가 분명하게 이해했듯이)을 드러내는 데 있다. 그 결과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소유주와 노동조합, 비정부적인 것과 사회적 생산의 제도화가 중첩된다. 따라서 정치적인 것의 장 역시도, 생산적인 것이 이 관계에 의해 완전히 다시 정의되는 것처럼, ‘삶정치적인 것에 의해 완전히 새로운(그리고 직관적으로 분명한) 방식으로 정의된다.

새로운 정치학의 두 번째 직관적 원리는 유일사상에 대한 비판과 많은 관련이 있다. 그것은 권력(이 경우에는 삶권력)과의 갈등이 삶정치의 장 내에서 일어나고, 그 결과 삶정치는 근본적인 적대로 규정된다는 점을 함의한다. 생산의 사회적 행위자들인 생산자들이 내린 삶권력에 대한 결단이 스스로를 사회적 자본의 정치적 지지자들 및 그들을 대의해야만 하는 민주주의 제도에 의해 표현된 것과 모순되는(그리고 환원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나는 곳에서 이러한 적대가 나타난다. 달리 말해, 이 적대는 (‘삶정치적’) 생산력의 사회적 표현이 경제적 질서를 보존하고/하거나 삶권력의 기존 패턴을 재생산하는 형태들 속에서 억제왜곡봉쇄되는 곳에서 나타난다. ‘삶정치적인 것을 특징짓는 근본적 적대는 삶 즉 생산의 사회적 힘[potenze sociali]을 해방하길 원하며, 생산에 대한 청구권(charge)(생산에 참여하는) 삶에 부여하길 원한다.

 

 

VI

 

우리가 (직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원리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오늘날 시행하는 것이 중요해 보이는 그러한 입헌적 목적론에 적용할만한 몇 가지 결론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결론은 일련의 새로운 입헌 원리가 확인되고 실행될 때에만 새로운 헌법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원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시민을 위한 삶정치적 소유(belonging). 이는 모든 것이 모두에게 속한다는 것을, 그에 따라서 그리고 중요한 것으로 모든 시민은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이며 누구든지 사회적 재생산을 보장할 수 있는 기본소득[각주:3]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공통적인 것의 강탈로서의 착취를 혹은 삶권력의 몫을 특이하게 재전유할 권리.[각주:4] 이는 부자와 빈자, 통치자와 피통치자 간의 적대의 근거가 어떤 식으로든 중립화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와는 달리, 입헌 기계가 이러한 차이를 통해 드러나고 또한 그 차이를 극복하게 해야 한다. 입헌 기계는 대항권력[contropotere]의 행사를 정당화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잘 기능하는 헌법을 내세우는 데 필요한 세 번째 (직관적) 원리가 있다. 그것은 차이를 인정하는 원리이고, 따라서 연방주의의 원리이다. 물론 연방주의는 늘 영토적 분배의 메커니즘으로, 따라서 차이를 공간적으로 중립화시키는 수단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이 새로운 직관적 원리(이 경우에서도 푸코와 들뢰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의 맥락에서 연방주의는 차이의 입헌적 장치, 해방과 탈주의 장소로, 시민을 위한 늘-가능한 운동의 장소로 내세워진다. 즉 외국인을 형제로 환대하고 문화와 인종의 융합이 새로운 생산력을 창출하는 공간으로 내세워진다.

그러나 이제 계몽주의 철학만큼 효과적으로 그러한 강력한 입헌적 제안을 주장할 수 있는 법 사상가나 법 이론이 있는지 묻자. 그리고 왜 오늘날까지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묻자. 내 생각에 그 대답은 복잡하고, 어쨌든 적어도 이중적이다. 사실상 지식인들(법 사상가를 포함해)이 포스트-포드주의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탈근대 사회에서 경험했던 입장의 급진적 변형을 받아들이는 것(더 올바르게는 충분히 가정하는 것)은 아직 가능하지 않다. 지식인의 위치에 대한 이러한 재규정으로부터, 오늘날 사회에서 사상가의 기능에 대한, 지적 작업의 유관성과 효율성(일반적으로나 법적으로나)에 대한, 그리고 적어도 정치적 행동 및/또는 법적 행동이라는 두 가지 장치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나온다.

따라서 이 문제를 넓은 의미에서 다룬다면, 우리는 포스트-포드주의 사회에서 지식인들은 직접적으로 지적소통적관계적 생산 안에서 일함으로써 노동력더 올바르게는 노동의 새로운 비물질적 형태이 되었고 말할 수 있다. 지식 노동은 점점 더 서비스 노동과 동일시되고, 그에 따라서 지식인은 서비스 제공자로 규정되기 시작했다. 서비스는 높거나 낮을 수 있으며 따라서 지식인은 사회에서 높거나 낮은 위치에 놓일 수 있다. 이는 항상 그랬다. 새로운 것은 지식인들이 그들의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이제 사회적 생산 내에서 단일한 개인들이 아니라 대중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에 있다. 더욱이 대중 지식인’[intelletualita` di massa]으로서 그들은 사회적 노동의 세계 안에서 점점 더 지식의 기획자나 혁신가의 역할보다는 경영자의 역할로 등장한다. 지식인이 대중-노동-력이 되었을 때 지식인에게 비판적 양심’(이것이 계몽주의 전통에서 지식인에게 부여된 역할이기 때문이다)으로 기능하도록 요구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지식인들이 지난 20여 년 동안 자신들의 비판적 기능에 손을 놓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더 나아가 그들 중 일부가 어째서 부끄럽게도 권력의 감언이설에 굴복할 수 있었는지) 묻는다면, 우리는 이 시기에 대중 지식인은 전례 없는 비참함과 생산적 종속의 물결에 압도되었으며, 이 새로운 맥락에서 대항-헤게모니적 양심[coscienza anagona]을 개인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어려움이 크다고 응답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의 근본적 변형이라는 전망의 힘을 (누군가의 새로운 사회적 지위에 대한 완전한 인식 속에서) 획득할 가능성은 이제 대중으로서의 지식인의 새로운 성격에 의해 존재론적으로 규정된다. 대중지성이 탈근대적 생산체제의 기본적 생산력이라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사회적 노동의 새로운 헌법에 대한 직관적 원리가 지시하는 바이다. 실제로 대중지성은 삶정치적이다. 즉 생산과 해방이 대중지성의 존재 및 작동 모두에서 일치한다. 대중지성은 적대적이다. 즉 생산 수단은 자본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두뇌에 속해 있고 교육으로 구성되며 주체의 기술적 성장(Bildung)으로 형성된다. 대중지성은 모바일[이동]적이고 유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유동성과 유연성은 자본의 배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해방의 표현이다. 이 사람들(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법 사상가)이 새로운 헌법을 만들 수 있는가?

나는 지금 이 새로운 영토로 옮겨가지 않을 것이며 여기서 등장한 인식론적 주제를 발전시키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차라리 더 나아가는 역설을 강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삶정치적 맥락에서 이것이 관계가 점점 더 사법(私法), 즉 파슈카니스가 그랬듯이 교환의 법을 떠올리게 하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새로운 세계에서 사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관계는 특이한 관계에 다름 아니며, 더 올바르게는, 그 관계들은 더 이상 사법의 규칙에 따라 공간적으로 넓게 확산된다거나 스스로를 시간적으로 배열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 교환과 계약이 강력해 보이는(그리고 세계가 상품이라는 보편적 유령의 형태를 띠는) 순간에, 그리고 동시에 삶정치적 지평이 일련의 관계로 나타나는 그 순간에, 그 관계의 대다수는 완전히 상품 형태의 법칙 아래에 놓일 수 없다. 비물질적 생산력 또는 협동적인 생산 및 생산의 힘은 교환의 논리로 환원될 수 없다. 실제로 생산적 주체성은 특이하다. 그것이 초과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정치적 특이성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통적이며, 공통적인 것은 주권과 근대적 법이 공적인 것’(즉 생물학적 공동체나 국가가 제정한 공동체[comunanza])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했던 것이 아니라 욕망과 차이로부터 현실을 건설하는 특이성들의 다중이다. 공통적인 것은 다중이 사용하는 언어로, 그것은 전수되고 축적된 것이며 늘 새로운 것을 발명하며 이 과정에 우리 모두가 참여한다. 그러므로 법학의 방법은 언어 공동체’[comunità linguistitca]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갈 필요가 있고, 그것을 구성하는 유물론적이고 창조적인 텔로스[목적]를 되찾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건설될) 법의 문법은 자유화/해방[liberation]이라는 말에 고개를 숙일 것[경의를 표할 것]이다.

 

()

 

 

 

  1. [영역자주] 이 글은 원래 20019월 영국 켄트대학법학부가 주최한 <비판법학 컨퍼런스>에서 제출된 것이다. 이 행사는 켄트대학 법학부의 마리아 드라코풀루(Maria Drakopoulou)가 조직하고, 하음 셰펠(Harm Schepel)이 진행시킨 로마의 비디오링크를 통해 성사되었다. [본문으로]
  2. [옮긴이주] ‘유일사상’(la pensée unique)이란 주류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것을 경멸적으로 비판하는 것으로, ‘신자유주의가 사회를 구성하는 유일하게 올바른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비꼴 때 사용된다. 가령 전 영국총리 마거릿 대처의 모토인 티나TINA(‘대안이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가 그런 경우이다. 이 표현은 󰡔목요일의 사건(L'Événement du Jeudi)󰡕의 편집장인 장 프랑스와 칸(Jean-François Kahn)19921월 사설에서 처음 사용했다. [본문으로]
  3. [영역자주] 기본 소득(reditto di cittadinanza)에 대한 더 많은 정보는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BIEN/Basic Income European Network)의 인터넷사이트 www.etes.ucl.be/BIEN/index.html를 보라. 또한 P. Van Parijs, “Basic Income: A Simple and Powerful Idea for the Twenty-First Century”, Politics and Society 32 (2004), pp. 739, C. Pateman, “Democratizing citizenship: Some Advantages of a Basic Income”, Politics and Society 32 (2004)를 보라. [한글본] 캐롤 페이트먼, 필리프 판 파레이스 등, 분배의 재구성, 양난주조성은 외 옮김, 나눔의 집, 2010, 21-77(파레이스)153-179(페이트먼)을 보라. [본문으로]
  4. [영역자주] 이탈리아어 원문은 ‘il diritto alla riappropriazione singolare di una quota di biopotere’라 되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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