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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전환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1980년대 여성시인과 1990년대적인 것에 대하여 (2/2)

길혜민
 

*본 원고는 2023년 2월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컨퍼런스에서 발표되었던 글을 편집한 것입니다. 또한 필자의 박사학위논문 주제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는 글입니다. 본 글을 인용하는 경우 반드시 출처를 밝히길 부탁드립니다.
 
 

3-1. 최승자 초기시에서 나타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와 여성-주체의 모색

 
최승자의 첫 번째 시집 『이 시대의 사랑』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시기적으로 3개의 구분에 의해 나눠져 있다. 시인이 직접 작성한 자서에는 “제1부는 올해 1981년에 쓴 시들을 나의 생각대로, 제2부는 1977년부터 1980년까지의 시들을 씌어진 순서대로, 그리고 제3부는 대학 3학년때부터 대학을 그만둔 해까지의 시들을 역시 씌어진 순서대로 묶은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시인의 안내에 따라 가장 이른 시기인 1973년~1976년에 창작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제3부에 배치된 작품 「자화상」은 ‘나’의 정체를 찾아가는 시적 주체의 목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누구의 친구도 못 된다./잡초가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니 나는 어둠이에요./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풀섶에서 일어난 어느 아침부터/긴 몸뚱어리의 슬픔이예요.
 
밝은 거리에서 아이들은/새처럼 지저귀며/꽃처럼 피어나며/햇빛 속에 저 눈부신 천성의 사람들/저이들이 마시는 순순한 술은/갈라진 이 혀끝에는 맞지 않는구나./잡초나 늪 속에 온 몸을 사려감고/내 슬픔의 독이 전신에 발효하길 기다릴 뿐
 
뱃속의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듯/하늘 향해 몰래몰래 울면서/나는 태양에의 사악한 꿈을 꾸고 있다.[각주:1]

「자화상」 전문

 
 
1연에서의 ‘나’는 누군가의 제자나 친구가 아니라고 부정되면서 온전한 인간의 육체를 가지기 어려운 존재인 것처럼 표현된다. 2연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둠’이나 ‘슬픔’이라는 추상적인 단어가 ‘나’라고 가리키고 있는데, 3연에서 ‘갈라진 이 혀끝’이나 ‘내 슬픔의 독’을 통해서 ‘나’를 뱀의 형상으로 완성시켜간다. 하늘을 향해 울면서 ‘나’를 ‘뱀’으로 이해하고 있는 시적 주체의 자화상은 사악한 꿈을 꾸는 상황 속에 있다. 어떤 ‘암시’인지 또 무슨 ‘꿈’을 꾸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1970년대 중반기의 시인의 작품 속에서 시적 주체가 스스로를 저주받은 사실에 괴로워하는 ‘뱀’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이로부터 시간이 흘러 1981년에 이르러 씌어진 시 「일찌기 나는」은 시집에서는 첫 번째 작품으로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뒤에 자리한 작품의 답변, 즉 다시 쓰는 「자화상」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마른 빵에 핀 곰팡이/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너당신그대, 행복/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각주:2]

「일찌기 나는」 전문

 
 
1970년대에는 자신이 누구의 제자도 아니고 누구의 친구도 될 수 없다고 주장했던 화자가 있었다고 한다면, 1981년도의 화자의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라는 고백에 유의하여 과거와의 연속적인 관련성을 두고 이해를 시도해볼 수 있다. (화자=시인=자아=실체라는 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시인이 내놓은 주체들의 관련성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이해할 때, 1970년에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림을 뱀으로 정해놓고 그 운명에 절규하며 꿈을 꾸던 시적 주체가 1981년 당대의 시간보다 더 이전의 시간으로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깨달은 자로 진화한 것으로 연결하여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연관성 속에서 우리는 시인이 말하게 하는 시적 주체가 꽤 오랜 시간동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했으리라 추리해볼 수 있다. 과거에는 자신이 팔과 다리도 없는 그저 몸뚱이일 뿐이라는 사실에 절규했지만, 이제는 그 차원을 넘어 비체의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각주:3] 그 오랜 기간의 고민 속에서도 화자는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라는 태도를 보이며, “나는너를모른다”라고 선언한다는 점에서 앎의 임시성을 내세운 극도의 자기 윤리를 선언하는 주체라 이해할 수 있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시적 주체의 모습들은 시인이 상당한 기간 동안을 모색기로 보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시적 주체가 뱀에서 균(또는 부패) 그 자체로 변하는 동안 화자는 자신의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끝없이 추구했다. 이러한 시간적 경과에 따라 변모하는 시적 주체가 고민하는 내용은 ‘살아있다는 것’으로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로 이동한다.[각주:4]
 
 
1.어디까지갈수있을까 한없이흘러가다보면/나는밝은별이될수있을것같고/별이바라보는지구의불빛이될수있을것같지만/어떻게하면푸른콩으로눈떠다시푸른숨을쉴수있을까/어떻게해야고질적인꿈이자유로운꿈이될수있을까
 
2.어머니 어두운 뱃속에서 꿈꾸는/먼 나라의 햇빛 투명한 비명/그러나 짓밟기 잘 하는 아버지의 두 발이/들어와 내 몸에 말뚝 뿌리로 박히고/나는 감긴 철사줄 같은 잠에서 깨어나려 꿈틀거렸다/아버지의 두 발바닥은 운명처럼 견고했다/나는 내 피의 튀어오르는 용수철로 싸웠다/잠의 잠 속에서도 싸우고 꿈의 꿈 속에서도 싸웠다/손이 호미가 되고 팔뚝이 나이 되었다
 
3.바람 불면 별들이 우루루 지상으로 쏠리고/왜 어떤 사람들은 집을 나와 밤길을 헤매고/왜 어떤 사람들은 아내의 가슴에 손을 얹고 잠들었는가/왜 어느 별은 하얗게 웃으며 피어나고/왜 어느 별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추락하는가/조용히 나는 묻고 싶었다/인생이 똥이냐 말뚝 뿌리 아버지 인생이 똥이냐 네가 그렇게 가르쳐 줬느냐 낯도 모르는 낯도 모르고 싶은 어느 개뼉다귀가 내 아버지인가 아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살아계신 아버지도 하나님 아버지도 아니다 아니다/내 인생의 꽁무니를 붙잡고 뒤에서 신나게 흔들어대는 모든 아버지들아 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
 
4.자신이왜사는지도모르면서 육체는 아침마다배고픈시계얼굴을하고 꺼내줘어머니세상의어머니 안되면개복수술이라도해줘 말의창자속같은미로를 나는걸어가고 너를부르면푸른이끼들이 고요히떨어져내리며 너는이미떠났다고대답했다 좁고 캄캄한길을 나는 기차화통처럼달렸다 기차보다 앞서가는 기적처럼 달렸다. 어떻게하면 너를 만날수있을까 어떻게달려야 항구가있는바다가보일까 어디까지가야 푸른하늘베고누운 바다가 있을까[각주:5]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전문

 
 
1에서 화자는 연쇄된 질문과 답변의 보류되는 과정을 통해 ‘어떻게 해야 자유로운 꿈이 될 수 있을까’(또는 꿈을 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도달한다. ‘고질적인 꿈’에서 ‘자유로운 꿈’으로의 변환이란 이미 자신의 한계를 설정해놓은 ‘꿈’이 아니라 한계를 잊은 ‘꿈’으로의 도약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2에서 알 수 있듯이 화자는 아버지의 두 발을 물려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계속 꿈에서 그 유전적 문제를 물려받은 한계를 넘으려고 싸워야만 한다.[각주:6]태생적인 가족의 테두리 바깥의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꿈꾼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응하고 있다. 어떻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모색이 자신의 한계를 확인할 때, 시초를 부정하며 “다시 태어나기”라는 방식으로 그 사고를 변환하기 마련이다. 이 작품의 화자도 삶의 방향성이나 정체성의 문제의 가로막힘 속에서 의미와 방향에 대한 의문이 없고, 의미가 충만한 ‘저 삶을 살지 못하고 왜 하필 이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하는 방식의 비교를 통과해야만 했을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가진다는 것은 답을 갖고 있는 (내가 아닌) ‘너’를 찾을 수 없는 미로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너’는 (이미 떠났기 때문에) 만날 수 없게 된다. 아버지( 또는 아버지들)의 자녀도 아닌 존재로 살아가기 위하여 현재의 ‘나’의 존재가 아닌 답을 가진 ‘나’를 만나려는 최승자의 시적 주체는 이 질문에 답을 갖지 못한 채로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본고에서는 「자화상」에서 시작하여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에 이르기까지 최승자의 초기시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연속과 부정을 통해서 여성-개인으로서의 시적 주체를 마련하는 최승자의 궤적을 따라가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기성의 1980년-90년대의 비평 언어를 지양하려는 노력과 별개로 최승자의 시적 주체의 모색 과정에는 ‘방법론’이 등장한다. 이는 당대성으로부터 초래된 문학적 현실로 이해할 필요도 있다.
 
 
모두가 바캉스를 떠난 파리에서/나는 묘비처럼 외로웠다./고양이 한 마리가 발이 푹푹 빠지는 나의/습한 낮잠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사라졌다./시간이 똑똑 수돗물 새는 소리로/내 잠 속에 떨어져내렸다./그러고서 흘러가지 않았다.
 
엘튼 죤은 자신의 예술성이 한물갔음을 입증했고/돈 맥글린은 아예 뽕짝으로 나섰다./송x식은 더욱 원숙해졌지만/자칫하면 서xx처럼 될지도 몰랐고/그건 이제 썩을 일밖에 남지 않은 무르익은 참외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다르게 사랑하는 법/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한 아이과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각주:7]

「올 여름의 인생 공부」 전문

 
 
화자는 프랑스의 파리에서 여름을 지낸 것으로 보인다. 잠 속에 빠진 화자에게 시간은 떨어지되(주어지되) 흘러가지는 않는다. ‘만약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면?’이라는 질문이 내포되어 있는 부분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 작품에서의 화자는 올 여름의 인생 공부를 했다고 하지만 시에서 서술되고 있는 것은 예술에 대한 공부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직접적으로 언술하고 있지 않지만 그가 깨달은 것들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 우리는 화자가 여름에 파리에 남아 ‘어떻게 살 것인가’ 또는 ‘어떻게 버텨야 할 것인가’ 공부 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공부의 결과는 다르게 기도하고 다르게 사랑하면서 무언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기만의 ‘방법론’을 가져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아는 주체가 되는 것이 이번 여름의 교훈이라는 것이 화자의 생각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다르게 기도하는 법”이라는 (방법론적인) 답을 얻은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방법’이란 당대의 비평에서 모든 현실 비판의 도구로 요술지팡이처럼 사용하는 ‘방법’이 아니라 다른 길을 선택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결단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르게 기도하고, 다르게 사랑하는 자는 무엇을 알게 되는가? 아마도 그러한 주체는 어느 여인의 종말을 보게 될 것이다. 자신의 방에서 죽은 여성의 시체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개인-여성이라는 주체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의 질문을 가진 자가 갖게 되는 썩지 않는 법일 수 있다. 이와 같은 모색기를 거친 다음에서 나타나는 그녀의 여성적 현실에 대한 천착은 1980년-1990년대의 개인-여성의 새로운 ‘정동소외자’로서의 주체와 만나게 된다.[각주:8]
 
 

3-2. 김혜순의 초기시에서 ‘여성-개인’의 경험을 탈자연화 하는 주체

 
문학과지성사의 시인선의 16번째 시집이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이라면, 17번째는 『또 다른 별에서』라는 제목을 가진 김혜순의 시집이다. 당대의 유행이었는지 또는 첫 시집을 내는 시인들이 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김혜순의 시집도 최승자의 시집처럼 최근의 시를 앞으로 배치하고 가장 예전에 쓴 작품들은 뒤로 배치하였다. 즉, Ⅰ장은 1980년~1981년도, Ⅱ장은 1979년도, Ⅲ장은 1976년~1978년도에 씌어졌다. 김혜순 시인의 시집도 수록된 순서로는 역순서이지만 1970년대로부터 1980년대까지 시간에 따라서 살펴야 할 한 흐름이 있어보인다.
 
 
어느 날 그 예술가는/진실이 뭔지 모른다고/모른다고 대로상에서 나를/흠씬 두들겨 팼다./-진실도 몰라! 몰라? 정말 몰라?/-알아. 이제 알게 됐다니까./-뭐야, 그럼 말해 봐./-이렇게 걷어채이면서도 아프지 않은 거./그는 나를 또 두들겨팼다./더욱더 신나게.
 
며칠 후 대로상에서, 나는/그 예술가를 다시 만났다./여쭈었다, 나는. 정중하게./진실이라는 게 뭣인지요./그러나 그는 힛쭉힛쭉/내게 되물었다./스무고개하는 거오니이까?/좋습니다. 그럼 첫째 고개./그게 먹는 거 아니오니이까?/-똥강아지 녀석![각주:9]

「진실」 전문

 
 
이 작품은 김혜순의 첫 시집에 수록된 마지막 작품이다. Ⅰ~Ⅲ세 개의 장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씌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 이 작품에는 화자인 ‘나’와 ‘예술가’가 등장한다. ‘나’라는 화자는 ‘예술가’로부터 진실이 뭔지 모른다는 이유로 대로상에서 두들겨 맞는다. 그런데 ‘나’는 ‘예술가’의 이런 폭력적인 행동에 복종하거나 수긍하는 태도를 가지지 않고, 예술가가 나에게 행하는 폭력이 무엇인지 말로써 되돌려주며, 이 폭력이 ‘나’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듯이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럴수록 ‘예술가’는 ‘나’에게 진실을 요구하면서 더욱더 신나게 나를 팬다. 다음 연에서 시작하는 ‘나’와 ‘예술가’가 다시 만나는 장면은 ‘진실’이 무엇인지 묻는 ‘나’의 질문에서 시작한다. 정확히 무엇에 관한 ‘진실’을 알기 위해서 또는 폭로하기 위해서 두 인물이 마주하는가는 전달되지는 않지만, ‘진실’을 요구하는 ‘예술가’에게 ‘나’는 ‘진실’이라는 것이 ‘먹는 거’라도 되냐고 묻고, 그 격조가 없는 질문에 ‘예술가’는 ‘나’에게 “똥강아지 녀석!”이라고 외치며 이 작품은 끝이 난다. 이 작품에서 ‘진실’을 알고 있는(또는 알고 있어야만 하는) ‘나’라는 주체가 등장하고, 그는 계속해서 ‘진실’해지기를 요구받는다. 실상 ‘예술가’ 조차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리고 ‘나’와 ‘예술가’의 성별이나 연령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알고 있지 않으므로 이 순간이 ‘젠더적 폭력’의 순간이라고 확장하여 읽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누군가로부터 ‘진실’에 대해 말할 것을 강요받는 ‘주체’는 시차를 달리하며 각 장마다 반복해서 등장한다. 김혜순의 ‘화자’들이 강요받는 상황 속에 이토록 노출되는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계속해서 ‘강요’의 형상화를 반복적으로 수행하면서 ‘강요받기를 강요당하지 않을 자유’를 가리킬 수 있는 ‘시적 주체’를 빚어나가기에 가까워 보인다.
 
 
<A가 좋아>라고 나는 말했다./그러자 B가 달려와 나를 때렸다./<A가 좋아라고 말해서 B에게 맞았어>라고 말하자 C가 달려와 나를 때렸다./<A가 좋아라고 말해서 B에게 맞았고, B에게 맞았어라고 말해서 C에게 맞았어>라고 말하자 A가 달려와 나를 때렸다./<A가 좋아라고 말해서 B에게 맞고, B에게 맞았어라고 말해서 C에게 맞고, C에게 맞아어라고 말해서 A에게 맞았어>라고 말하자 A, B, C 모두 달려와 나를 때렸다./나는 이제 헐떡거리며 <맞았어, 맞았어>라고 말하며, 맞는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누구를 좋아했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각주:10]

「몰매」 전문

 
 
「진실」보다 행위자가 더 많아진 위의 작품에서 ‘나’는 ‘좋다’라고 진실을 말하자마자 A로부터 맞고, A에게 고백한 행위로 인해 맞았다는 사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B에게서 맞는다. 또 같은 이유로 C에게 맞는 연쇄적인 폭력의 행위를 ‘나’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이 ‘진실’이나 ‘고백’이 아니라 ‘몰매’라는 점에서 화자인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거에는 ‘진실’을 모른다는 이유로 맞았던 화자가 있었고, 이제는 자신의 ‘진실’을 가진 자가 되더라도 ‘몰매’라는 다수에 의한 폭력을 당하는 화자는 이제 ‘진실’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A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B에게 맞고 B에게 맞았다는 이유 때문에 C에게 맞는데, 심지어 A는 ‘나’가 자신을 좋아해서 때리는 것이 아니라 B와 C가 나를 때렸기 때문에 나를 때린다. 이렇게 이들이 ‘나’를 때리는 이유는 ‘나’가 누군가를 좋아해서인지 또는 누군가로부터 맞았기 때문에 ‘나’는 맞아도 되는 사람이 된다는 논리가 만들어지면서 ‘몰매’를 맞게 되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게 된다. 처음에 ‘나’는 ‘나’에 대한 진실을 손에 쥔 사람인 줄 알았지만 오히려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남겨지는 것이 이 작품이 가진 진실이다. 그리고 ‘나’는 “맞았어 맞았어”라는 말밖에 못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맞다”는 ‘적이나 어떤 세력에 대항하다’는 의미인지, ‘틀리지 아니하다’는 의미인지, ‘외부로부터 힘이 가해져 몸에 해를 입다’는 의미인지 알 수조차 없게 된다.
 
 
열!/-열 번 세는 동안에 고백하라고? 알았어./아홉!/-벌써 아홉이야?/여덟!/-거꾸로 세는 거구나. 그럼 고백을 시작하겠……/일곱!/-그런데 어떡하지? 고백 경험이 전혀 없는 걸./여섯!/-좀 천천히 할 수 없니? 생각을 해야잖아. 내가 정말 그런지, 안 그런지. 또는 앞으로 그럴 건지, 또 안 그럴 건지. 혹은……/다섯!/-………/넷!/-걷어차지 말고 숫자 세는 거에나 전념하시지./셋!/-알았어. 한다니까, 유창하게, 고백을. 휘영청 달 밝은 밤에 이 가슴 설렙니다./둘!/-간을 빼 주면 안 되니? 솔직히 말해서 고백이란 하고나면 시시해지는 거 아니니?/하나 반!/-하나 반? 모두들 고백했다고? 넌 복도 많고 애인도 많고./하나 반의 반!/-반의 반? 때리지만 말고 네가 한번 해 봐. 그럼 널 따라하지, 내가. 정말이야. 그대로 따라 외친다니까. 너도 알다시피 난 창의력이 부족해./하나!/-앗, 끝이야? 그럼 좋아. ……사랑해.[각주:11]

「고백」 전문

 
 
「진실」로 시작하여 「몰매」 그리고 「고백」에 이르기까지 시적 화자는 ‘진실’을 말하면서 또는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 폭력에 노출된다. 1970년대에 씌어진 시에서는 ‘진실’이 없기 때문에 맞았던 ‘나’, 그 ‘나’가 스스로의 진실을 아는 자가 되어 자신의 ‘진실’을 말하지만,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맞았기 때문에, 또, 맞았다는 이유로 맞는 상황이 되고, 1980년대의 ‘나’는 ‘진실’을 ‘고백’하는 데에 정통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정해진 시간 안에 고백을 하라는 요청을 받은 ‘나’는 ‘사랑해’라고 말할 때까지 카운트다운을 하는 상대방을 통해서 강요받는 상황에 들어가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실이 고백이 될 때까지 화자는 고백이라는 상황을 오히려 희롱하는 ‘화자’가 된다. 오히려 숫자를 거꾸로 카운트다운 하는 상대방이 ‘둘’에서 ‘하나 반’과 ‘하나 반의 반’으로 숫자를 쪼개가며 ‘나’의 능청에 넘어가게 되는 것이 위 시가 보여주고 있는 ‘고백’의 상황이다. 오히려 ‘진실’이 먼저 있어서 ‘고백’이라는 순서를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이 ‘진실’을 만들어버리는 뒤집힌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김혜순의 첫 번째 시집에서 강요를 받는 화자는 진실을 고백하는 자가 아니라 고백이 진실을 만든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그래서 ‘강요받는 것을 강요받지 않을 자유’를 획득하는 ‘주체’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각주:12] 이렇게 만들어진 ‘시적 주체’의 형상은 김혜순의 두 번째 시집인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를 통해서 여성에게 주어진 ‘진실’로서의 ‘경험’이 자연화되어 있으며 그것에 대한 탈신비화를 드러내는 ‘여성-개인’이라는 주체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촉감 연습 시간이야/눈을 감고 열 손가락을 빚어/만들고 느끼는 거야/자 지금 이 순간 시궁창으로부터/이것을 집어/올려봐/그것을 두 손에/들어 네 품에 안았다고 상상해봐/눈썹이 없는 아이/피돌기가 피부 밖에서도 들여다보이는/투명한 아이/발은 있지만 발가락이 없는 아이/머리칼은 없고 손톱도 없는 아이/눈을 보일락말락하고 입술도/있을락말락하고/자세히 들여다보면 바늘귀보다 작은/콧구멍으로 숨을 쉬는 아이/배꼽으로 허겁지겁 먹는 아이/그리고/그리고 그 작은 아이를 이끌고 열 길/지옥으로 걸어드는 한 여자/네가 마다한/여인.[각주:13]

「판토마임 강사」 전문

 
 
두 번째 시집은 후반부에 있는 「해산」에서부터 시작하여 여러 편의 작품이 시인의 출산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위의 시는 ‘임신과 출산에 대한 기억이 과연 맞는가?’ 하는 의구심을 안겨주는 작품으로 주목을 요한다. 아마도 ‘판토마임 강사’이리라 예상되는 ‘화자’는 시의 마지막 행에서 지칭되는 “지옥으로 걸어드는 한 여자 네가 마다한 여인”을 향해 “시궁창으로부터 이것을 집어 올려봐”라고 말한다.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면서 출산 직전에 이루어지는 산모 교육에서 다룰 법한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행과 행이 이어질수록 아이는 아직 인간의 형상이 아닌 아직 뱃속에서 성장이 필요한 임신 초기의 태아임을 알 수 있다. 수정 후 8주의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인간의 상태가 되는 태아는 8주 이전까지는 배아의 상태로 각 세포분열 중이라 아직 완전한 인간 개체가 되기 전의 상태이다. 이제 막 배아에서 태아기로 접어든 작품 속의 아이는 ‘시궁창’에 있고, 그 아이는 아직 생명활동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지는 않지만 여성의 배꼽과 연결되어 여성이 섭취하는 에너지를 “배꼽으로 허겁지겁 먹는 아이”로 묘사된다. 판토마임 강사인 ‘화자’는 이렇게 여성에게 임신의 과정 속에서 아이가 여성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낱낱이 상상하도록 요구한다는 점에서 다소 음험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임신한 여성에게 태아란 아직 성장이 필요한 상태이고, 절대 의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산모를 통해서 충분한 영양분을 공급받거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태아’의 입장에서 임신이라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태아로 인해 자신의 삶이 시궁창이 되어버린 여성의 입장에서 아직 인간의 형상도 제대로 갖추진 못한 태아를 들어올려 상상해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상상의 내용은 신체의 변화에 따른 공포의 대상이자 뱃속의 이물질인 태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상상속의 태아와 여성은 어쩌면 모자 관계를 맺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작은 아이를 이끌고 열 길/지옥으로 걸어드는 한 여자/네가 마다한/여인.” 이라는 판토마임 강사의 발언은 이 여인이 임신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는 그녀가 임신상태라는 것에 대한 공포 속에서 지옥으로 뛰어들었다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 더 챙겨야 할 것은 “네가 마다한/여인”에서 ‘네가’는 이 여인을 말하는 것인지 이 여인과 함께 아이를 만든 상대방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여인은 임신으로 인해 누군가로부터 버려졌는지 혹은 그 자신이 임신이라는 것을 마다한 것인지도 고민을 요한다. 판토마임 강사는 임신이라는 상황이 여성의 신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모성의 신화’를 동원하여 포장하지도 않고, 강요하지도 않으면서 발언하고 있다. 임신했다는 사실만으로 여성의 심리 속에 ‘모성’과 태아에 대한 ‘보호본능’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고 강요했던 가부장제적 가족 이데올로기가 탈자연화될 필요가 있으며, 임신을 유지하거나 중지하는 선택은 여성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주체’가 김혜순의 작품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에 수록된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시적 주체’는 임신-출산-육아라는 과정이 자연적이지도 않고, 천부적인 모성에 의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주체이다. ‘모성의 신화’는 여성의 일방적인 목숨을 건 노동에 기대어 만들어진 것을 폭로하는 이 주체는 첫 번째 시집에서 ‘진실’이 ‘고백’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이라는 것이 ‘진실’이 있는 것처럼 만든다고 폭로한 ‘시적 주체’와 유사하다. 여성은 어머니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어머니로 만들어지는 것이며, 심지어 어머니가 되는 과정을 중간에 멈출 수 있는 권리까지 가진 존재로 본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여성에게 있어서 모성은 자연스럽다거나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고 폭로하는 ‘여성-개인’의 권리와 주체성을 주장할 수 있는 주체가 김혜순의 시에서 말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성이라는 시민에게 주어진 권리가 다만 가정 안에서의 여성이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선언은 이미 1980년대 여성주의 운동을 통해서 널리 퍼져가고 있었다. 따라서 ‘독신녀’라는 삶의 방식은 ‘여성-개인’주체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한 모습일 수 있음도 앞의 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독신녀’라는 삶의 형태는 큰 용기와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성-개인’이라는 주체가 결혼을 한다거나 임신을 한다는 것은 어떤 고민과 상상을 경유해야 하는 것인가? 그러한 고민과 공명하는 문학적 주체가 김혜순의 작품 속에서 등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3. 박서원의 시에서 나타나는 시적 주체의 변모

 
박서원의 시를 다루는 시각은 그녀가 실제로 겪었던 질병으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백선율의 논문에서는 박서원에 대한 연구사를 검토하며 “공통된 견해는 박서원의 시가 개성적인 목소리를 통해 고통을 시화하고 새로운 주체의 자리를 마련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박서원 시인은 자신이 걸린 “병에 주목하면서 병적 상태가 시적 주체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게 할 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각주:14]을 갖게 한다는 데에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다고 밝힌다. 이러한 조건은 시인이 일관성을 가지고 자신의 작품에서 신병 문제를 다뤘기 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작품을 읽어나가는 관점도 여기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도 박서원의 시가 ‘질병을 가진 육체’로부터 연원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작품을 분석하려고 한다.
황현산은 전집에 붙인 해설에서 “『난간 위의 고양이』, 『이 완벽한 세계』는 한국어가 답사했던 가장 어둡고 가장 황홀했던 길의 기록으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라며 극찬을 한 바 있다. 그리고 아래의 시는 『난간 위의 고양이』의 첫 번째에 놓인 작품이다.
 
 
희롱하는 술잔과 사랑의 즐거움으로 찢겨져나간 드레스/음악은 멋도 모르고 손가락이 흥에 겨워/손님들도 멋도 모르고 잔을 부딪치네 건배! 건배!/나는 그때 보았네 하나의 예감이었던/내 유년의 공작새가/깃털마다 파란 피를 적시며 푸드득 날아가는 것을/벌써 보았네 그 누구의 어깨 위에도 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각주:15]

「파티」 전문

 
 
화자는 파티를 관망하고 있다. 음악과 술이 흥겨움을 증폭시키면서 어떤 사람의 드레스는 찢겨지기도 했다. 화자는 이 파티 안에 속하지만 파티의 흥겨움과 소란스러움을 바라보고 있는 자이다. 화자는 어쩌면 푸른 색깔을 가졌을 그 술이 든 잔을 부딪치는 장면 속에서 ‘공작새’를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새보다도 가장 화려한 깃털을 자랑하는 공작새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화자는 “그 누구의 어깨 위에도 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취한 사람들의 흥겨운 모습 속에서 어린 날의 예감을 만들어줬던 존재가 화자의 곁으로부터 떠나갔다고 고백하는 것은 유년의 마음과 여린 예감에 기대어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가지게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적 주체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기대지 않으려는) 존재가 될 것이다. 이렇게 파티의 흥겨움 속에서 불현듯 도약하고 성장해버린 것이다. 화자의 눈 앞에서 날아간 공작새가 떠나기 전의 화자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또 공작새가 떠난다는 것은 이제 어떤 주체로의 변화를 요청하는 것일지 우리는 시인의 작품을 통해서 파악하려 한다.
 
 
나는 독방으로 갑니다/완전한 사랑을 위해/바다에 나가 돌아오라고 아버지를/부르듯이 파도를 부르듯이/용수철을 가슴에 박듯이/불 때지 않은 콘크리트 네모진 방/담요 한 장 없이/사랑을 위해 나를 잠그러 갑니다/햇빛과 열려진 세상은/당신에게만 가야 할 사랑을 빼앗아/창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완전한/나의 당신을 느끼기 위해/물 한 컨 없이 독방으로 갑니다/물 한 컵도 휘황한 세상 몰고 올까/두려워/난 냉기 속에서 표범처럼/완전한 사랑의 힘을 갖기 위해/나를 잠그고 기다립니다
 
난 아마도 과거에 곰이거나/동굴이었나 봅니다/당신이 버린 빈 병 하나도/항아리에 담아 빨간 고추처럼 익기를 기다리는 나
 
드디어 소름이 돋기 시작합니다/콘크리트 벽 모퉁이에서 소름 같은/샘물이 솟습니다/풀잎이 돋아나고 있습니다/풀잎을 타고 현미경처럼 내려오는 당신이/보입니다/당신이 커집니다/난 여기서 눈을 감습니다/당신, 당신을 위해/당신을,/나를,/나를,/잠그고/오로지 내 것인/폭포와 큰 나무 아래 표범을 키워/끝없는 사랑의 힘을 누리기 위해/독방에서[각주:16]

「표범처럼 완전한 사랑」전문

 
 
화자가 독방으로 가는 이유는 ‘당신’과의 사랑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이 작품에서 지칭하고 있는 ‘당신’은 부재하는 존재이고, ‘나’는 ‘당신’을 완전한 방식으로 기다리기 위해서 햇빛과 열려진 세상까지 차단할 수 있는 “창 하나 없는 어둠”의 독방으로 가려고 한다. 무엇이 화자를 이토록 사랑에 ‘완벽’을 기하고 싶게 만들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가장 유력한 단서는 ‘화자’ 자신이다. 독방에서 홀로 고요히 정지한 상태로 ‘당신’을 기다리는 화자와 유사한 태도는 「문으로 가는 길」[각주:17]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문으로 가는 길」에서 화자가 밖으로 연결되는 통로는 오직 ‘청각’, 소리라고 단언한다. 소리를 듣기 위해서 몸의 모든 신경을 청각에 집중시키고 적막 그 자체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화자’가 문으로 가는 존재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시에서 등장하는 또 다른 인물이 있는데 그것은 시각장애를 갖고 있는 ‘마부’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눈이 먼 마부가 이끄는 마차에 탔을지도 모르고, 또는 그런 마차가 무사히 문을 찾아가기 위해 적막이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마부가 문으로 가는 길을 제대로 찾아가기 위해서 화자와 마부는 모두 적막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목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적막으로부터 어떻게 모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오로지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한 소리, 소리가 없는 소리, 마부가 끄는 말의 갈퀴가 날리는 소리, 나뭇잎 세포가 시들어가는 떨림의 소리가 모든 목소리에 해당할 수도 있다. 이처럼 마부의 이동에 따라서 화자는 ‘적막’을 절대화 한다. 문을 통과하기 위한 적막이 전도되어 오히려 적막은 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다. 이러한 자세를 가진 ‘화자’를 통해 「표범처럼 완전한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는 ‘화자’를 읽어보자.
「문으로 가는 길」에서 화자는 적막 속에서 적막을 만드는 것들을 들으면서 문으로 가야한다고 말한다. 한편 「표범처럼 완전한 사랑」에서의 화자는 ‘물 한 컵’이 세상을 몰아온다고 생각한다. 완전한 사랑은 바깥으로의 교통의 가능성을 모두 잠그고 그 안에 있는 나의 고립을 완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화자에게 즉, ‘당신’이 방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창문도 문도 모두 잠근 그 방 안에서 ‘당신’은 어떻게 들어올 수 있을까. 종교적인 환영이나 환각적 엑스타시에 충만하게 빠져드는 상태에 빠지는 순간을 ‘당신’이라고 화자는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 화자는 「문으로 가는 길」의 화자가 문으로 가기 위해서 적막을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막이 문으로 가는 길이라고 전도된 성찰을 전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독방’을 완성하는 것만이 ‘당신’과의 사랑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길을 차단할 때에야 비로소 나타나는 ‘독방’ 그 자체는 세상으로부터 차단된 나를 만들어주고 그것이 나를 충만하고 완전한 힘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적 주체는 시 「파티」에서 누구의 어깨에도 기대서는 안 된다고 깨닫는 자와 분명히 공유되는 측면이 있다.
 
 
누구나가 그럴듯하게 조금씩은 연기를 잘해내지만 내 연기는 특별한 데가 있어. 가족들과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끌어모아 비난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지. 내가 아무리 아파서 발버둥 쳐도 동생은 신나에 뿌려진 불덩이처럼 미쳐 날뛰는 “쇼”라고 말하고 동네에서는 망나니라고 혀들을 차거든./그들의 말이 사실일지도 몰라.태양과도 같은 판토마임을 향해서 속력을 내는 건지도./한 번도 내 자신을 속이지 못하는 것. 이 천형을 미치광이라니./“쇼”라니./“쇼”라는 게 별 게 있어. 보여지는 게 “쇼”지. 사실 무대와 현실을 무슨 차이가 있는 것도 아냐. 위치에 따라서 모양이 바뀌어 보이는 의자와 걸상의 관계지.혹은 양말과 장갑의 관계./그러고 보면 훌륭한 관객은 매우 드물군. 내가 괴성 대신 노래를 부른다면 훌륭한 관객은 박수 대신 야유를 보낼 테니까./하지만 아무도 몰라주는 내 판토마임은 결국 시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어. 누군가에게 기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바보짓인지./길고도 긴 세월.난 드디어 기막힌 판토마임을 생산해냈지.식사 때나 잠을 잘 때나 화장실에 앉아서도 더더욱이 예배당에 갈 때는 목을 석 자는 더 빼고 나는 종……종……사람들이 때리면 떄리는 대로 징 징 징 울리는 종처럼 종……종……종……신음하고 신음했지. 음미했지. 과연 효과란 얼마나 멋지고 단단한 칼집과도 같을까. 망나니에서 요조숙녀로 탈바꿈한 이 기막힌 묘기./내 연기는 역시 특별한 데가 있어. 이제는 모두들 내가 부러워 질투를 하지. 매번 내 자신을 속여서 보여주는 것. 이 천형의 모범을./“쇼를[각주:18]

「판토마임」 전문

 
 
앞에서 박서원에 대한 연구경향에 대해 밝혔듯이 그녀의 시세계는 신병과 관련된 것들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했던 경험이 있고, 그녀가 평생 아픈 상태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녀의 시에서 누군가가 공간에 갇혔다고 표현된다면 그 서술은 곧바로 시인의 개인사와 관련되어 보인다. 또한 이 작품의 화자를 시인의 생애사와 연결되어 이해할 수 있지만, 최대한 화자와 시인을 동일시하며 읽기를 보류하면서 시적 주체의 특성을 살필 필요가 있다.
화자가 자신이 겪는 고통을 표현하면 가족들과 사람들은 “비난의 감탄”을 보여준다. 그렇게 언제나 불덩이처럼 미쳐 날뛰면서 발작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녀의 고통의 표현은 이해되지 못 하고 “쇼”라고 말해지면서 비난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비난이 계속되다 보면 화자는 그 자신조차도 자신의 병이 “쇼”와 같은 “판토마임”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도 생길 것이다. 자신의 고통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의심의 과정 속에서 화자는 자신이 판토마임을 하고 있으며, 이 비난을 멈추기 위해서, 이 발작(판토마임)을 향한 훌륭한 관객이 없기 때문에 다른 판토마임을 생산해야 한다는 착각까지 하게 된다. 바로 예배당 앞으로 가서 신음하는 것이다. 성스러운 신전에서 그녀가 고통을 표현한다면 그것은 비난을 받을 일이 아니라 요조숙녀가 신에 대한 성심을 표현한 것이라는 반응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배당에서의 신음은 사람들에게서 동정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믿을 만한 것이다. 요약하자면,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화자는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비난받는다. 그래서 화자는 자신의 고통이 그들의 비난처럼 ‘판토마임’일 수도 있다고 착각하게 되면서 기왕의 고통을 다른 방식의 ‘판토마임’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가족들 앞이 아닌 예배당에서 화자의 “쇼”는 그녀를 ‘망나니’가 아닌 ‘요조숙녀’로 탈바꿈하게 한다. 그런 연기가 화자로 하여금 “매번 내 자신을 속여서 보여주는 것. 이 천형의 모범”이라고 뒤집혀서 생각하게 만든다. 자신이 겪는 고통은 거짓이라고 착각하게 되면 고통 그 자체를 ‘판토마임’으로 바꿔버린 화자는 자신의 고통을 전시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이왕이면 더 훌륭한 관객 앞에서 자신의 판토마임의 가치를 부러워할 수 있는 관객들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화자는 자신의 고통이 가족들로부터 외면을 받았기 때문에 그 바깥으로 나가 자신의 병을 전시하고 타인을 통해서 자신의 결핍과 고통을 보상받으려는 존재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와 같은 화자의 판토마임은 병을 고칠 수 없다. 병을 통해서 화자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병을 구경할 수 있는 관객이라는 의존 가능한 대상들도 필요하다. 그렇기에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화자는 새롭게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을 바꿔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타인의 비난과 질투에 기댄 이 판토마임극은 그 자신에 의한 존재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질병을 앓는 존재가 된다. 그런 점에서 ‘나’가 누군인지를 알 수 없게 되는 것은 예견이 가능한 사태이다. 그러한 박서원의 시에서 반복되는 질병은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고백하는 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시선이나 반응과 결부되면서 시적 주체로 하여금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인식하게 만든다”[각주:19]
질병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인식과 위치를 인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시적 화자가 「파티」에서는 자신이 누군가의 어깨에도 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의존 불가능성의 선언이 될 수도 있지만 시인이 ‘자유로운 개인’이 될 수 있는 도약점이 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은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넘어가는 시점에 발표된 이 작품의 시적 주체가 여성주의적 비평의 방향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고민이 필요한 것으로 만든다. 시인이 가진 신병과 그녀가 겪은 고통은 모두 가족이데올로기 안에서 벌어진 나쁜 예들을 답습하는 듯이 보인다. 이렇게 가족 안에서 만들어진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표현한 시적 주체는 그들로부터의 인정을 통해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의존적인 상태임을 알고 있다는 것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병든 신체에 의존하고 있는 존재이면서 그 가해 세력으로부터의 인정에도 의존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성에 머물기만 한다면 온전히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이 되기는 어렵다. (뿐만 아니라 시인이라는 사회적 자아를 이끌어 나가는 데에 있어서도 주체성의 수정은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앞에서 분석하고 있는 작품들은 시인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그녀의 작품은 질병의 고통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시적 주체들도 이 병을 앓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의존성을 가진 여성 주체가 자신의 의존 불가능성을 고백하고 ‘고립’의 공간으로 들어가려는 도약은 의미심장한 부분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병든 화자는 곧 죽음을 향해 간다고 예상되지만 이 병든 주체가 죽기에는 불충분한 자신의 회심을 분명히 가진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존 불가능성을 통해 자신의 ‘고립’된 그러나 그 고립을 통해서 자신의 문을 찾아나가는 시적 주체의 발생은 1990년대에 이어져가는 박서원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도 여성주의적 문학 읽기에도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4. 나가며

 
본고는 문학사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를 단절과 전환점을 가진 것으로 양분하는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였다. 1990년대적인 것으로 발명된 개념들인 ‘개인의 내면’, ‘진정성’, ‘일상성’ 등이 1980년대와 1990년대 여성주의 문학을 읽어나가는 데에 불충분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1980년대의 여성 시인들의 작품을 읽어나가려고 했다. 1980년대의 활발한 여성주의 운동이 학술의 장과 문학장 모두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어 나가면서 당대의 시인들이 보여준 여성 주체들이 이들의 자유로운 여성-개인으로의 도약과 일정한 상관관계를 가진다고 가정하며, 1980년대 여성 시인들의 일부 작품에서 여성-개인이라는 주체를 확인하려고 했다. 이러한 발견의 노력은 1980년대 여성 시인들과 여성에 대한 이해에 기반한 여성주의적 비평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1990년대적인 것으로 불리는 것들과 1980년대적인 것으로 불리는 것 사이에 과연 전환점 또는 단절이라고 확신하여 불릴만한 것이 있는지 다시 살펴보길 촉구하는 바람으로 진행되었다.
강석경의 소설 「숲속의 방」[각주:20]은 강석경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알려진 사실대로라면 작가의 여동생이 자살한 실제 경험과 소설 속에서의 소양이 휴학을 한 이유는 작가 강석경이 대학시절에 휴학을 결정한 이유와 같다는 사실로부터 소설의 모티브를 찾을 수 있다.[각주:21] 소설 속에서 소양은 중산층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재수를 거쳐 진학한 대학에서 만난 학생운동이라는 또 다른 세계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하다 대학을 휴학하기로 한다. 소양은 연애, 가족, 학교, 사회에서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있는 관계나 지위를 찾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존재이다. 소양이 피를 흘리며 죽은 방에서 발견된 마지막 일기에는 “생업을 위해 싸우는 이 세계가/진공 속의 풍경처럼 소원하다/구호는 눈부시지만 나를 거부해/나는 섬이야 어디와도 닿지 않는 함정 같은 섬이야”라고 적혀있다. 부르주아적인 사고방식과 생활력을 가진 가족들을 혐오하되 학출이 되어 노동자가 되려는 생각은 없는 소양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해야 하는 노동자와 그들의 싸움을 외면할 수도 없다는 것. 이렇게 분열되어가는 그녀가 걸쳐있는 서로 다른 두 세계는 ‘데모는 안 했지만 최루탄은 피하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일기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부르주아의 삶에도 노동자의 삶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자신의 구호가 되지 못하는 다른 이들의 ‘우리’의 구호를 바라보는 그녀는 거부당하고 있는 ‘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소설에서 형상화하고 있는 이 여성의 죽음은 어쩌면 소위 말하는 ‘청춘의 양식’이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본고는 이 여성의 고민이 1980년대를 살아갔던 (여성)독자들의 ‘여성-개인이 될 수 있는가’의 질문과 만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조심스러운 이해의 틈새를 마련하고자 위와 같은 분석을 시도했다.
 

 
 
 
 
 
 
 

  1.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82-83쪽. [본문으로]
  2.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13쪽. [본문으로]
  3. 크리스테바는 비체를 “동일성이나 체계와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비체는 대상이 될 수 없기에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비체는 특정 담론에서 규정된 방식의 존재인 대상성을 벗어난다. 누군가 비체를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비체가 말끔한 자아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체는 우리 몸에서 배출되는 땀, 침, 똥, 오줌과 같은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 서민원 옮김, 『공포의 권력』, 동문선, 2001 참조) [본문으로]
  4. 장석주는 이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최승자에게 삶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단언한다. 그에 따르면 “시적 자아의 삶을 허용한 이 세계”는 “그 삶의 의미를 일궈내려는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만들기 때문에 이 세계는 나에게서 등을 돌려버린 변심한 애인과 같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일찌기 나는」이 실린 시집이 아닌 다른 시집인 『즐거운 일기』에 수록된 「Y를 위하여」와 바로 연결하여 읽어내면서 최승자에게 왜 삶은 아무것도 아닌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최승자의 일부 작품에서 삶에 대한 허무감을 읽어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전부이지 않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음은 그의 글에서도 드러난다. 이와 유사한 해설방식으로는 정과리의 『즐거운 일기』에 붙인 해설을 들 수 있다. 그는 “시인에게 삶의 무의미성은 생래적 조건이다”라고 단언하며 허무와 비극만을 읽어낸다. 이러한 방식의 독법은 비판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특히나 여성 시인들의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해석의 노력보다는 자극적인 것만을 찾아 시인의 것으로 돌려주는 성급함을 지양할 필요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장석주, 「죽음·아버지·자궁·그리고 시쓰기」, 『문학과사회』, 문학과지성사, 1994) [본문으로]
  5.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20-22쪽. [본문으로]
  6. 본고는 이 작품의 2의 내용인 “짓밟기 잘 하는 아버지의 두 발이 들어와 내 몸에 말뚝 뿌리로 박히고”라는 표현 때문에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려는 화자를 통해 가부장제의 폭력을 고발하고 있다는 다수의 해설에 따르지 않는다. 단순히 억압자/피억압자의 구도로 폭력성에 기대어 작품의 한계를 미리 예단해놓는 태도보다는 화자가 자신의 혈연적 한계를 넘어서 자신의 존재적인 고민을 위한 장치로 이 부분을 이해하고자 한다. [본문으로]
  7.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28-29쪽. [본문으로]
  8. 최승자 시에서 나오는 ‘정동소외자’에 대한 논의는 이 글에서 분석하려는 내용과 다른 목적과 결을 가지고 있으므로 구체적인 분석은 다음을 기약한다. [본문으로]
  9. 김혜순, 『또 다른 별에서』, 1981, 95쪽. [본문으로]
  10. 김혜순, 『또 다른 별에서』, 1981, 68쪽. [본문으로]
  11. 김혜순, 『또 다른 별에서』, 1981, 40쪽. [본문으로]
  12. 어떤 대상이 진리를 가졌다는 믿음은 대상이 형이상학적 실재를 표현하거나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다. 하지만 진실이 가진 깊이의 허구성은 그것의 본래적인 정체성이 없고 오로지 수행적 차원을 통해서 만들어진다고 하는 지적을 통해서 폭로될 수 있다.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가 수행적이라는 관점은, 우리가 젠더의 내적 본질이라고 여기는 것이 일련의 지속적인 행동을 통해 만들어지며, 젠더화된 몸의 양식화를 통해 그 위치가 정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 자신의 ‘내적’ 특성으로 생각하는 것이 특정한 몸의 행위, 극단적으로 말해 당연시된 제스처의 환각효과를 통해 우리가 기대하고 생산해낸 결과라는 점을 입증한 것이다. 그것이 심리에 관해 ‘내적’으로 간주되는 모든 것은 제거되었으며, 그런 내면성은 거짓 은유”라고 한다. 이것은 진실을 말하라는 내면성을 고백하는 형식이 고백적 주체를 만든다는 폭로에 해당하는 한 장면이라고 확장하여 생각해보 수 있다. (주디스 버틀러. 앞의 책, 55-56쪽 참조) [본문으로]
  13. 김혜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1985, 121-122쪽. [본문으로]
  14. 백선율, 「박서원 시에 나타난 질병과 사랑의 의미」, 『우리문학연구』77집, 2023, 221쪽. [본문으로]
  15. 박서원, 『난간 위의 고양이』(『박서원 시전집』, 최측의농간, 2018, 93쪽) [본문으로]
  16. 박서원, 『난간 위의 고양이』(『박서원 시전집』, 최측의농간, 2018, 116-117쪽) [본문으로]
  17. “적막,//모든 육신의 뚜껑을 열고/모든 소리를 들어야 할/나뭇잎 세포가 시들어가는/떨림까지도//말갈퀴는 고요히 눈보라 치고/마부는 눈이 멀어/마을로 가는 입구는 넓다/이 모두를 잿더미로 끌어안고//적막,/모든 목소리를 들어야 하리.” - 「문으로 가는 길」 전문(박서원, 『난간 위의 고양이』(『박서원 시전집』, 최측의농간, 2018, 177쪽) [본문으로]
  18. 박서원, 『난간 위의 고양이』(『박서원 시전집』, 최측의농간, 2018, 22쪽) [본문으로]
  19. 백선율은 “질병을 단순히 질환의 차원에서 다룰 것이 아니라 ‘질병과 불편함의 권유’를 인식하는 시적 주체가 질병을 통해 어떻게 사회 내에서의 자신의 상황과 위치를 드러내는지, 또 질병이 문학에 대한 인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백선율, 앞의 논문, 223쪽) 본고도 이에 동의하는 바이나 본고에서 박서원의 작품을 다루는 데에는 “질병이 문학에 대한 인식”과 연결되는 것까지 다루지 않는다. [본문으로]
  20. 「숲속의 방」은 『세계의 문학』 1985년 가을호에 처음으로 발표되었고, 1986년 3월 소설집 『숲속의 방』(민음사)이 출간되었다. 『숲속의 방』은 출간 3개월 만에 2만부가 팔리면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러한 작품에 대한 호응도를 보았을 때 당대에 큰 인기를 받음과 동시에 많은 이들에게 반응을 유도한 작품이다. [본문으로]
  21. 강석경이 여성 작가들의 산문을 모은 책에 실은 글 「촛불의 제의」, 「담배 한 개비」, 「뫼르소와 성가대」에는 소설 「숲속의 방」에서처럼 동생이 자살한 이야기나 작가가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대학을 휴학한 일 외에도 다방에서 담배를 피우던 일, 재수생이었던 친구들 이야기 등이 나오는데 이는 작가 자신의 경험이 이 소설의 모티프가 되었음을 알 수 있는 장면들이다. (『자유로운 여성』, 열음사, 1984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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