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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전환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1980년대 여성시인과 1990년대적인 것에 대하여 (1/2)

 

길혜민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본 원고는 20232월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컨퍼런스에서 발표되었던 글을 편집한 것입니다. 또한 필자의 박사학위논문 주제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는 글입니다. 본 글을 인용하는 경우 반드시 출처를 밝히길 부탁드립니다.

 

0. 방에서 죽은 여자를 보는 여자.

 

1981년도에 출간한 최승자의 첫 시집 이 시대의 사랑1992년도에 출간된 고정희 시인의 유고시집 사라지는 모든 것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에는 각각 독신자 여성의 모습이 등장한다. ‘잠실 독신자 아파트와 같은 1인 가구에 홀로 사는 독신자인 여성이 1980년대 시에서 등장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러한 데다 두 시인 모두 독신 여성의 죽음을 장면화 하여 작품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한 지점으로 보이기도 한다. 두 시인이 그려낸 독신자 여성의 형상이 나타나게 되는 1981년부터 1991년도에 이르기까지는 시간은 소위 “87체제라 불리는 시기와 겹친다는 점에서 필자는 현대시에서의 여성 주체“87 체제라는 시대적인 접점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보려 한다.

최승자 시인의 경우, 첫 시집이 상재된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정치 공동체로서의 우리를 시적 주제로 다루는 시인은 아니지만, 여성적 시적 주체에 대해 주목을 요하는 다양한 연구가 진행된 바 있다. 1980년대라는 시대의 키워드로 이해되는 공동체’, ‘광장’, ‘이념’, ‘민주() 시민의 논의는 최승자 시인과 시적 주체를 이해하는 데에 익숙한 틀이 아니다. 한편, 고정희 시인은 민중의 시인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자본주의 비판’, ‘여성해방운동’, ‘광주의 눈물등과 관련하여 이해되는 민족’, ‘광장’, ‘이념’, ‘민주주의’, ‘여성주의등의 굵직한 수식어를 통해 소개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이처럼 1980년대의 시세계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축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시인의 시적 주체가 죽음으로 형상화 되는 독신자 여성이라는 점은 뜻밖의 장면이다.

권명아는 여성 작가들이 보여주는 싱글 라이프라는 삶의 방식을 번역 불/가능한 싱글 라이프라 정의한 바 있다. 여성의 서구적인 삶의 방식을 우리의 언어로 번역하는 순간으로 기억할 수 있는 전혜린과 나혜석의 삶[각주:1]이 번역 불/가능성으로 이해되는 것은 그녀들의 삶과 죽음이 사회로부터 충분히 이해되지 않았다는 판단의 표현이다. 권명아는 특정한 죽음 과정이 사회적인 현상으로 반복되어 나타날 때 그것은 공동체에서 추방된 부당한 죽음을 애도하는 일이 되어야 하고, 그것에 대한 살아있는 자들의 책임을 묻는 일이 필요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는 과거의 사건으로서의 여성 작가들의 싱글 라이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가정의 피붙이라는 삶의 형식을 선택하지 않은 채로 비정규직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여성의 삶에 대한 기시감과 피로감에 대한 이해로부터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번역 /가능성이라는 가능과 불가능의 동시태의 명명은 이러한 어려움에 대한 공감의 시도에서 도출되었다.

최승자와 고정희의 작품 속에서 나타난 두 여성의 죽음의 유사성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여성들에게 싱글 라이프가 하나의 정치적 실천이자 결단이었던 적이 있었고, 이 시기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사이에 20~30대를 보낸 여성들에게 싱글 라이프를 선택한다는 것은 명백한 결단의 행위[각주:2]였다는 데에 중요성이 있다. 1992년 겨울에 발행된 또하나의 문화9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에는 1991년 실족사로 세상을 떠난 고정희 시인을 기리는 코너가 마련되는 한편, <책을 펴내며>에는 고정희를 기리는 내용이 담겨 있다.

 

시인 고정희는 단순히 시인이 아니었다. 그는 논설과 논문과 기사와 평전 들을 쓴, 폭넓은 글쓰기를 한 문필가였다. 그의 글에는 일상적 삶에서 부대끼면서 모순을 풀어내는 ‘몸으로 쓴 부분’과 거대한 ‘진리’를 깨우친 자의 목소리가 압도하는 ‘머리로 쓰는 부분’이 함께 있다. 만약 타계하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 집을 짓지 않는 여자에게 가해지는 압력과 가지지 못한 사람을 계속 서럽게 하는 체계가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에 대해 열심히 쓰고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서 ‘독신녀’와 ‘지사’로서 양분되어 있는 자신의 삶을 통합해 가는 새로운 글쓰기의 장을 열어가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각주:3]

 

그녀가 관심을 두었던 기독교, 민중(민주화), 여성주의, 3세계문제, 여성해방문학 등의 다양한 주제들에도 불구하고 고정희가 생전에 가졌던 마지막 문제의식을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이 글에서는 독신녀와 (여성)빈곤의 문제에 시인이 주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지하듯 고정희에 앞서 최승자도 자신의 방에서 죽은 여성의 모습을 형상화한 바 있다.

 

 

어느 빛 밝은 아침/잠실 독신자 아파트 방에/한 여자의 시체가 누워 있다.

 

식은 몸뚱어리로부터/한때 뜨거웠던 숨결/한때 빛났던 숨결이/꾸륵꾸륵 새어나오고/세상을 향한 영원한 부끄러움,/그녀의 맨발 한 짝이/이불 밖으로 미안한 듯 빠져나와 있다./산발한 머리카락으로부터/희푸른 희푸른 연기가/자욱이 피어오르고/일찍이 절망의 골수분자였던/그녀의 뇌 세포가 방바닥에/흥건하게 쏟아져 나와/구더기처럼 꿈틀거린다.[각주:4]

어느 여인의 종말전문

 

 

작품을 읽기 전에 우리는 시인이 내세운 화자나 대상을 시인으로 바로 대입하여 작품을 읽기보다는 작품이 어떤 주체를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는가를 먼저 이해하려는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각주:5]본고도 마찬가지로 싱글 라이프라거나 독신녀라고 이해했던 두 시인의 생애사에 대한 이해를 잠시 접어두고 작품에 해석하고자 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대상은 자신의 방에서 죽음을 맞이한 존재이다. 위의 최승자의 시를 보면, 화자는 잠실 독신자 아파트에 누워 있는 한 여자의 시체를 보고 있다. 밝은 아침에 비로소 볼 수 있는 이 여성의 시체를 보고 있는 시적 화자(주체)는 어쩌면 죽은 이의 지인이라 상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망자가 세상을 향한 영원한 부끄러움을 가질 수 있거나, 자신의 죽음을 타인이 발견하게 했다는 미안함을 가진 맨발을 표현했다는 사실을 시적 주체가 이미 알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시적 대상인 독신 여성의 시체는 아직 사망한 시점으로부터 멀지 않은 시간에 발견되었다. 그렇기에 몸에서 숨결과 같은 생명활동이 아직은 포착된다. 그리고 죽은 이 여성은 살아있을 때에도 일찍이 절망의 골수분자였다고 화자는 말하고 있다. 이처럼 최승자의 시에서 발화하고 있는 시적 주체는 시적 대상인 여성의 삶의 조건 속으로 들어가서 죽음의 구체적인 모습을 설명할 수 있는 주체이다. 이 주체의 정체를 보여주는 것은 시적 대상의 상황인데, 시적 대상인 죽은 여성이 가진 삶을 대하는 태도를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신자 여성의 삶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최승자 시에서 나타나고 있는 시적 주체임을 알 수 있다.[각주:6]

 

 

환절기의 옷장을 정리하듯/애증의 물꼬를 하나 둘 방류하는 밤이면/이제 내게 남아 있는 길,/내가 가야 할 저만치 길에/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크고 넓은 세상에/객사인지 횡사인지 모를 한 독신자의 시신이/기나긴 사연의 흰 시트에 덮이고/내가 잠시도 잊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달려와/지상의 작별을 노래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므로 모든 육신은 풀과 같고/모든 영혼은 풀잎 위의 이슬과 같은 것,/풀도 이슬도 우주로 돌아가, 돌아가 -(XX)

 

강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어라/강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어라/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이어라-(xx)

 

잊어야 할까봐/나는 너를 잊어야 할까봐/아무리 붙잡아도 소용없으니까 -(xx)

 

하느님 보시기에 마땅합니까? -(xx)

 

오 하느님/죽음은 단숨에 맞이해야 하는데/이슬처럼 단숨에 사라져/푸른 강물에 섞였으면 하는데요 -()

 

뒤늦게 달려온 어머니가/내 시신에 염하시며 우신다/내 시신에 수의를 입히시며 우신다

 

저 칼날 같은 세상을 걸어오면서/몸이 상하지 않았구나, 다행이구나/내 두 눈을 감기신다[각주:7]

독신자전문

 

 

고정희의 시에서 나타나는 화자는 로 불릴 수 있는 주체이다. ‘는 나에게 죽음만이 남았음을 알고 있다. 바로 이어지는 연에서는 1연에서 언급한 죽음의 그림자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 앞에 드러나게 되는지 서술한다. ‘라는 독신자가 어딘가에서 죽었을 그 순간이 되자 사람들은 죽은 자를 위하여 작별의 노래를 하기 위해 달려온다. ‘로 정체화하고 있는 시적 주체가 이미 알고 있을 한XX, XX, XX, XX 등은 나름의 방식으로 의 죽음에 반응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자의 어머니가 달려와 에게 수의를 입히시는 죽음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이 곳은 독신자의 공간이다. 이 작품에서 나타나고 있는 로 불릴 수 있는 시적 주체는 단순 목격자로 나타난 앞의 시의 그것과는 달리 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거나 죽은 이후에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독신자로 이해할 수 있는 라는 여성의 죽음의 장면을 예견하는 주체인 는 분명 객사를 하거나 횡사를 할 것으로 알고 있다. 독신자 삶 속에 불안정성이 내재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 시적 주체는 자신의 삶과 죽음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이해되고 애도되리라고 예상한다. 주체의 인칭은 서로 다르지만 최승자 시인과 고정희 시인이 각각 드러내는 시적 주체는 독신 여성의 죽음이라는 삶의 마지막 모습을 알고 있는 자라는 점은 공통적이다.[각주:8]또한 각각의 주체는 독신자 여성의 죽음이 생로병사의 생애주기에 따라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젊은 육체를 가진 채 끝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요한다.

두 시인을 통해 독신자로서의 여성의 삶을 이해하는 주체가 1980-90년대의 여성문학에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공교롭게도 이러한 시적 주체의 모습은 죽음과 가깝게 상관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1980년대라는 시간 속에서 독신자로서의 삶을 불안정성과 죽음으로 이해하는 시적 주체가 등장한다는 점은 1980년대에서 여성의 삶에 대한 이해와 사회사적 관심을 요청한다. 왜냐하면 1980년대로부터 1990년대 사이에서 20-30대를 보낸 여성들이 독신이라는 삶의 형식을 선택했다는 결단, 그것이 약속하는 것으로서의 고독과 죽음의 상상력이 당대의 작품 속에서 시적 주체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문학의 장에서 나혜석이나 전혜린을 대표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가정에 속하지 않은 여성의 불안정성은 결혼의 결과나 실패로 나타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삶의 형식을 개인여성으로 결정한 주체들이 등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주체의 등장이 일회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10년이라는 시차를 가지고 다시 등장했다는 점은 10년이라는 시간이 가진 질적인 차이를 숙고해야 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점에 무게를 두고 본고는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여성시인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주체가 표상하는 개인으로서의 여성을 다루어보려고 한다. 일찍이 최영미 시인은 여성 개인으로 산다는 것은 죽지 않고 살기 위해, 안전한 저녁을 보내기 위해 자기 스스로 삶의 지혜를 배워나가야 하는 힘든 노동이라고 작품을 통해 말한 바 있다.[각주:9] 이와 같은 1990년대의 증언은 앞선 1980년대적인 독신자 여성의 개인-여성 되기라는 시도를 통해서 삶과 시를 관통하는 여성주의적 시적 주체를 확보하게 한 문학사의 한 장면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을 증명하려면 우선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문학장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계보학적으로 구성된 것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90년대를 1980년대와 전환기라는 주장으로 단절시키려는 비평권력과 여성주의적 시각을 가진 여성 비평가가 절대적으로나 부족한 현실과 만나게 되면서 여성의 작품과 문학적 주체의 문제를 사유할 수 없게 만드는 난점을 톺아보기 위함이다. 그리고 1980년대의 여성주의적 문학과 학술 운동이 어떤 여성 주체를 만들고자 했는지 이해하면서 1980년대에 읽히지 않은 채로 남겨진 개인’ ‘여성이라는 시적 주체를 이해할 맥락을 만들어보려 한다.[각주:10]이와 같은 작업은 오로지 작가의 역량만이 아니라 당대의 여성주의적 인식이 어떤 독자를 만들었는지에 대한 이해와 동시에 진행될 필요가 있다. 시적 주체는 글을 쓰는 작가에게만 귀속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읽으려는 독자의 욕망과 만나고 시대의 욕망과 만나 시적 주체는 탄생하고, 의미화 되며, 갱신하기 때문이다.

 

 

1. 진정성으로부터 내면으로 가는 길은 유효한가.

 

1992후일담 문학이라고 불리는 박일문의 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우리 앞에 나타났던 그 시기 “90년대 문학의 출발을 조건지었던 근원적인 파토스는 아무래도 80년대에 대한 청산과 단절의 감각[각주:11]이었다고 기억된다. “90년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좌담에 참여한 진정석은 80년대와의 청산과 단절의 감각은 인식론적, 미학적 <>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90년대를 인식하게 했다고 말한다. 덧붙여서 말하면, 혁명에 대한 신념과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 자리에 자본주의적 문화생산의 조건들이 장악해가면서 90년대는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의 진행이라는 자연법칙에 따른 인식론적·미학적인 전환의 선언은 문학의 발전과정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서술하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전환기로서의 90년대의 문학은 80년대로부터 얼마만큼 멀어진 것일까.

1990년대가 시작하던 무렵, 평론가 권성우는 성민엽의 글을 인용하면서 “1983년에 어느 젊은 문학평론가는 “70년대와 80년대 사이에 질적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다. 외형상으로는 급격한 단층에 의해 나뉘어지지만, 실제에 있어서 이 두 시대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같은 문제가 더욱 심화 · 악화되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90년대를 여는 현재는 과연 어떠한가? 말하자면 90년대는 80년대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질적인 차이가 존재하게 될 것인가?”[각주:12]라고 스스로 묻는다. 1990년대가 시작하자마자 그가 이런 질문을 꺼내는 것은 섣부른 것이라 판단될 수 있지만 그가 던진 질문은 문단 내부에서 공동의 고민거리였던 것 같다. 앞선 세대와 우리 세대는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구별짓기의 시도는 언제나 새로운 세대라 호명되거나 자처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숙제이다. 때문에 1990년대가 시작하면서부터 그리고 밀레니엄 초입인 1999년까지 1990년대는 무엇이 1980년대와 달랐는지 질문된다.[각주:13]

1994년에 처음으로 출간한 계간지 문학동네(이하 문동)1980년대와 다른 것으로서의 1990년대의 개인의 내면성’, ‘미학적 자율성’, ‘문학주의란 문학적 담론을 구축한 386세대의 작업을 이끌어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최근의 문학 연구는 이러한 세대의 등장과 그들이 시도한 구별짓기가 우리가 사는 동시대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입장에서 진행되고 있다.[각주:14]

최근 1980-90년대 문학 연구는 공교롭게도 2015년도의 신경숙 표절 사건과, 2016#문단_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서 시간의 역방향에서 시작되며, 그 결과 문학사는 해체되고 재구축(또는 의문시)된다. 1990년대의 신경숙 작가는 갑자기 등장한 신인이 아니었고, 이미 1980년대에 등단하여 이미 두 권의 소설 단행본을 발간한 이를테면 자리를 잡은 작가였다. 그런데 1994년에 외딴방을 연재하면서 그녀는 백낙청을 위시한 1990년대 초의 남성 평론가들은 1980년대식 노동지성’(글쓰기)의 분열에서, 신경숙식 소설을 통해 뭔가 새로운 점을 보려 했던[각주:15]작가로 거론되었다. 백낙청의 창비만이 아니라 문동에서도 신경숙은 1980년대의 진정성을 내면의 윤리로 습화한 1990년대의 개인의 내면을 가진 문학의 대표적인 이름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1980년대의 민중문학의 진영에서 치열했던 남성 비평가들의 시선이 신경숙을 상찬하며 이른바 문학 스타처럼 만들고 있을 때, 이들은 1980년대의 탈 민중/민족문학의 알리바이로 그녀를 택한 것이라 보는 여러 연구자들의 지적은 이후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문학적 전환이라는 사건의 알리바이를 해체하려는 시도에 해당한다. 그들이 보기에 이 시기는 1992년에 발표된 박일문의 소설을 통해서 후일담 문학으로의 민중문학의 변형과 이탈이 일어난 사건적 전환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 김영현의 소설에 대한 비판과 보류 등에 활발한 논의가 있은 뒤이며, 신경숙의 내면은 여성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것이자 윤리적인 것으로 보호되었다는 데에 대체로 동의한다.

1990년대에 강조된 ‘(개인의)내면성1980년대적인 것과의 전환점을 만들어주고 있음은 앞의 여러 일화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나누는 것으로 등장한 내면이란 진정성의 주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를테면 박일문의 소설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같은 후일담 소설은 1980년대로부터 살아남았다는 생존을 부끄러워하는 진정성이라는 감수성의 형식을 모티브로 한다.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라는 브레히트의 유명한 글귀를 인용하면서 각인된 진정성은 타인을 누르고 또는 타인 대신에 내가 살아남았다는 생존이 부끄러움이 되는 감수성, 이런 마음의 형식이다. 그리고 이것이 공유되고 하나의 가치로서, 옳은 삶의 기준으로서 설정되어 통용되던 시대[각주:16]로서의 진정성의 시대가 1990년대에 열리는 것이다. 1990년대에 호용된 내면이란 이처럼 1980년대에 대한 마음의 빚으로부터 길어 올린 것이기 때문에 진정성의 윤리는 1990년대의 문학의 윤리로 확장되어 이해되었다. 이런 점에서 ‘(개인의)내면이라는 문학적 레짐은 진정성의 주체를 통해 1990년대를 이어가는 그러나 단절하기 위해 이어나가는 것으로 호용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안지영이나 조연정은 진정성이 문동이 만들어 낸 것이면서도 그 자신에 의해서 탈구축이 되어가는 개념이라는 점을 지적한다.[각주:17] 김홍중은 다른 의미로 진정성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다. 진정성 개념은 진품성의 개념에서 연원하고, 이는 예술품의 진위 여부를 밝히는데 사용된 미학적 뿌리가 있다. 진품이라는 유일성은 무엇이 진품 즉 진정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 권위가 존재[각주:18]해야만 한다. 그런 권위가 없다면 진정성은 실증이 아닌 주장의 대상이 되고, “과잉이 아닌 결여의 형식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이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기초한 내성적이고 사적인 윤리의 계기와 사회와의 관계에 기초한 공적인 도덕의 계기로도 표현된다. 이렇듯 윤리적 진정성과 도덕적 진정성 사이에는 화해하기 어려운 간극이 있고, 그런 점에서 진정성 레짐은 와해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불안한 체제라고 설명한다.

 

 

1990년대 문학에 대한 관심은 “90년대 여성 문학의 문제성이라는 꼭지를 통해서 표현되기도 한다. 이 대담에 참여한 이광호, 황종연, 김동식, 진정석 네 사람은 대담자리에 여성 비평가가 없기 때문에 비판적인 의견 표현이 가능했다는 한계점을 표한다. 그들이 실토한 논의의 한계는 페미니즘이라는 이론에 대한 몰이해와 여성주의적 비평가의 부재 속에서 오래 고착된 젠더화된 비평 글쓰기가 가진 여성주의에 대한 무성의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미 1980년대에 고정희나 박완서 등에 의해서 한국 문단에는 여성의 작품을 읽어줄 여성 비평가의 부재가 문제라고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리면 1990년대의 문학의 내면으로의 전환이나 신경숙이라는 여성 개인 화자의 내면을 전면화한 현상도 여성주의에 의한 논의를 끌어오는 데에 부족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90년대는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본다면 여성 문학사의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연대로 기록되어야한다는 이광호는 페미니즘 문학이야말로 민족문학 이념의 위축 이후 이 땅에서의 가장 진보적이고 전위적인 문학운동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특히 페미니즘 통해 여성의 말이라는 문법적인 것으로서의 미학이 등장했다고 이해한다. 그럼에도 페미니즘 문학의 난해성은 문제적으로 지적되어 왔으며 시에서는 김혜순과 김정란의 작업이 줄기차게 진행되고 있다고 보았다. 황종연은 루카치의 소설론을 빌려서 소설이란 성숙한 남성의 형식이지만, 90년대 소설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루카치적인 의미에서 문제적 개인에 미달한다고 진단한다. 90년대는 거대서사를 불신하면서 탐색의 가능성이 줄었기에 소설의 영토를 구할 곳이 없는 결과가 문제적 개인에 달하는 남성이 없는 이유라고 보는 것이다. 반면에 거대서사가 사라진 대신에 여성 작가들은 대체로 일상성의 영역에 익숙하기 때문에소설의 활로를 얻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황종연의 의견에 이어 김동식이 생각하는 여성주의 문학은 아래와 같이 이야기 된다.

 

 

여성적 체험의 서사화에 대한 저의 소박한 견해를 말씀드리자면, 전체적으로 볼 때 1인칭 <나>의 관점과 즉자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씩씩하게 혼자서 가라는 식으로 의지를 강조하는 명령법의 주의주의(主意主義)나, 아니면 여성들이 테러리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계몽적인 설교나, 불륜이나 이혼 경험을 통해서 여성을 주체 정립의 욕망을 지닌 존재로 설정해 가는 여러 작품들에서 어떤 찜찜한 느낌을 받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싸움판으로 행진해 들어가는 여전사의 이미지들인데요, 개인적으로는 여성 문제의 처세술 버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무튼 90년대의 여성 문학의 성장은 문학적 저변을 넓혔고 또 상업적 성공을 거둔 예도 많지만, 언젠가부터 위기의 국면에 처해 있다고 생각됩니다. 여성의 정체성 찾기를 주제로 내세웠다고 해서 여성 문학이 자신의 문학적 정체성을 확보했다고 볼 수는 없으니까요.
(……)
문학과 관련지어 말하자면 여성이 작품을 쓴다거나 여성에 대한 작품을 쓴다거나 하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여성 문학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어떠한 글쓰기 전략을 수행하는가가 문제가 되겠지요. 자신의 위치를 싸움판에다 설정하지 않으면서도 싸우고 있는 작가들이 있습니다. 오정희, 김혜순, 김정란 등의 작품은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비기기 위한 전략을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금지된 것을 소망한다는, 욕망의 맨얼굴 드러내기도 전략이 될 수 있겠지만, 비기기 위해서도 싸움의 전략은 필요한 법입니다. 90년대 여성 문학이 양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글쓰기의 전략 차원에서도 전기를 맞이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각주:19]

 

 

김동식이 여성의 경험에서 찜찜한 느낌을 받는 이유는 여성의 관점은 즉자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여성의 1인칭은 주체 정립의 욕망을 지닌 존재로 설정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서 싸움판으로 행진해 들어가는 여전사의 이미지는 문학적 도전이나 주체의 등장으로 먼저 이해되기 보다는 처세술이라고 서술된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여성의 정체성 찾기라는 주제 자체를 통해서는 여성문학이 자신의 문학적 정체성을 확보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하는 근거는 무엇인지 알 수 없다. 1인칭 여성의 화자의 정체성 찾기라는 과정을 통해서 그가(또는 그가 인정하는 문학장이) 인정할 수 있는 주체의 상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싸움의 한가운데에서는 그러한 주체는 인정될 수 없다는 점은 알 수 있다. 싸움판에 가지 않고도 비기기 위한 전략을 수행하는 여성 문학의 차원은 오정희, 김혜순, 김정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는 그의 의견은 더 많은 보충적인 설명을 남긴다. 그의 발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오정희, 김혜순, 김정란의 작품 속에서는 어떤 주체가 확인되고 있거나 확인될 수 있다는 진단이다. 여전히 비평가 김동식이 김혜순으로부터 확인한 비기기 위한 전략이 무엇인지도 알 수는 없지만, 같은 시기인 1999년도 문동 특집에 90년대 한국문학이란 무엇인가- 90년대의 시절 현실, 어디에 있었는가라는 제목으로 김혜순 시인이 작성한 글을 참고하면서 여성시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요청을 받고 무엇을 산출했는지 추적해볼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에서 90년대를 거쳐 시인으로서의 내가 제일 많이 들어본 평론가의 말은 사회의 바다로 나오라는, 사회라는 바다에 이득이 되고 소통이 되는 시를 쓰라는 간곡한 권고였다. 그들은 다성적인 목소리의 시에서 어떻든 하나의 단선의 목소리를 끄집어내어 그것을 소위 리얼리즘적 시각만으로 읽어내고는, 제발 이제 가족주의 내지는 내면주의를 청산하고 사회라는 바다, 그 대양에서 사회적 질곡을 사실주의적으로 발설하라고 나에게 주문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여성시인은 자연, 어머니 같은 부드러운 것을 늘 일깨워야 하며, 삶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투명하게 빛나는 유토피아를 제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것이 그들의 알리바이를 위한 발설인지, 진정으로 시인을 위해 하는 권고인지는 지금에 와서도 판단하기 어렵다.
이러한 전체주의적 시각은 나라는 여성시인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을, 그중에서도 여성시인들을 주변화하고, 그들의 개성적 표현을 억압하는 중요한 기제가 되었다. 이때 여성시인들의 아버지는 이중, 삼중의 폭력, 그러니까 사회적 정치적으로 개인을 억압하는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어그러뜨리고, 여성의 정체성을 외부에서 조립하여 하달하는 아버지로 비쳐졌다. 이러한 억압적 시각은 90년대를 지나면서 억압된 것의 미학적 지적 여성적 승화 작업을 통해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여성시인들의 대부분은 남근적 힘을 추구하는 여성주의자가 아니라 억압에 대항하는 새로운 방식의 아방가르드적 언술을 개발해내었다. 그들의 언술은 자신들의 육체성을 탐구하거나 아니면 근대가 버린 초월의 공간을 탐색하고, 복원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
그 항의의 언술 방식은 직접적이라기보다는 (……) 뭉뚱그려 탈근대적 방식의 언술을 개발한 것이었다. 그것은 여성을 주변화시키는 기존의 힘의 논리를 바꾸자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핵심에 두고, 차이의 표상을 그려나가자는 데 더 주력한 결과였다.
(……)
90년대 문학계에서 여성시인들의 가장 큰 역할은 80년대 시의 정치적 혁명 과제를 시적 언술의 변화 안으로 끌어들인 데 있다. 다시 말하면 여성에 대한 억압과 피억압의 소용돌이를 문학 안으로 끌어들여 시적 언어로 승화해낸 데 있다. 여성시인들이 사용한 가장 독창적인 시의 언어는 남성적 주체들이 떠안겨준 부정성, 타자성을 큰 상징계 안으로 방출해버리고, 하달되어 내려온 고정된 여성 정체성을 깨어버렸다.[각주:20]

 

김혜순에 따르면 1980년대로부터 1990년대까지 여성주의적인 작품을 발표한 그녀는 여성주의적 미학의 차원으로 구축된 다성주의적 목소리를 사실주의적인 단일한 목소리로 축소(변형)하여, 가족이나 내면을 벗어나 사회적 차원의 바다로 나오는 시를 내놓으라는 요청을 받아왔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요청 자체가 여성주의적 시쓰기에 대한 몰이해이며, 김혜순의 미학적 노력을 어떤 주의 아래로 포함시키려는 억압이면서 남근적 힘의 발휘였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 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80년대의 시의 정치적 혁명 과제를 시적 언술의 변화로 끌어들여 90년대적인 성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고정된 것으로 하달된 여성의 정체성 자체를 바꿀 수 있었다. 80년대의 민주화운동으로서의 문학이 감당했던 혁명성에 대한 요구가 90년대의 여성주의 시인의 성과로 이뤄졌다는 김혜순의 평가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80년대의 문학운동이 오로지 민주화운동이나 민중운동으로서의(노동자의 글쓰기, 아래로부터의 글쓰기) 성격만이 아니라 페미니즘이라는 여성주의 운동의 몫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문학사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녀가 80년대와 90년대의 문학을 정립해나가고 이해하는 어떤 장면을 설명해주는 긴요한 자료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김혜순이 정리하고 있는 90년대의 페미니즘 문학의 성과는 김동식이 언급하고 있는 비기기의 전술과는 사뭇 다른 싸움터에서 진행된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김동식이 김혜순을 비롯한 여성 시인들에게 사회적 차원의 바다로 나오라는 주문을 했는지 이 글을 통해서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여성의 정체성 찾기를 주제로 내세웠다고 해서 여성 문학이 자신의 문학적 정체성을 확보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던 것과 달리 김혜순의 입장에서는 여성 시인들이 여성의 정체성 자체를 바꾼 것으로 정리된다. 이러한 이해의 차이에는 평론가가 페미니즘 문학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하거나 김혜순 시인이 상황을 착각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확대 해석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 이해할 수 있겠다.

 

 

1980년대의 대표적인 여성주의 문화운동 무크지인 또 하나의 문화의 동인이자 발행 주체로 참여한 고정희와 주요한 참여자이자 필자였던 박완서는 제3호의 기획으로 <페미니즘 문학과 여성운동>이라는 대담을 통해서 당대의 여성해방 문학의 전망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그 중에서도 고정희는 두 번에 걸쳐 여성문학을 읽어주는 비평가가 부재하고 있으며, “여성문학을 지원해 주는 평론가가 별로 없다고 말한다. 이 문제는 “1990년대는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본다면 여성 문학사의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연대로 기록되어야한다는 이광호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1980년대로부터 시작하여 1999년까지도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앞에서 다룬 신경숙과 개인의 내면성이나 진정성의 논의들을 종합하여 고민해 보았을 때 1990년대의 문학의 전환에 대한 환호와 평가는 아직 설명되지 않은 것들을 남긴 것으로 사료된다. 사실 신경숙이라는 현상을 이끈 작품 외딴방은 여공이었던 화자가 소설가가 된 1990년대의 후일담으로 취급되고 그녀의 내면진정성의 윤리를 담보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치더라도 그것은 오롯이 여성주의 문학의 성과라고 평가되거나 주장되지 않는다.

소설 외딴방1994년도에 연재되기 시작하면서 독자와의 소통 속에서 완성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경숙의 작품을 읽은 영등포여자고등학교 야간산업체반 출신의 친구들이나 교사의 편지와 전화를 받은 대목은 실제 작가가 작품을 써가면서 독자와 소통한 흔적이며, 그 과정은 해당 소설이 공장 노동자이면서도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이해와 반응을 통해 어떤 주체의 모습을 표상하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와 같은 작가와 그것을 향유하는 존재로서의 독자의 존재를 소거한다면 이 문학은 여성주의적 체험이나 여성주의적 문학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에 가까워진다. 하지만 소설의 연재와 함께 나타난 현상이 알려주는 것과 같이 작품을 통해서 어떤 주체에 동일시하는 자들이 손을 들며 나오고, 독자층이 만들어지는 현상은 이 문학작품이 문학주의로 불리는 고립된 공동체만의 것이 아니라 문학의 정치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덧붙여 희재언니의 삶과 죽음은 여공의 방에서 죽어간 경험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가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고향을 떠나 가장으로서 살아가는 여공의 여성의 삶에 대한 동일시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여성주의 문학으로의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살펴본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전환으로 단절하는 문학장의 논리는 개인의 내면을 부각시키면서 내면이 여성 화자를 통해 서술되더라도 그것은 1990년대의 보편으로 젠더화된 목소리로 취급되고 있었다. 이 글에서는 한 편의 소설을 둘러싼 전환의 감각과 소요 상황을 취급하고 있지만, 내면성의 발견은 문학장 전체를 흔든 사건으로 이해된다. 배하은은 1990년대의 단절의 선언을 “1990년대 초 문학의 내면성에 대한 당대 비평의 승인은 다소 섣부르게 시도된 자구적인 의미화는 아니었을까. 1980년대 문학과의 결별, 그것의 극복을 위해, 그리고 스스로가 위대한’ 1980년대 문학으로부터의 퇴행이 아님을 입증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어떤 중요한 측면들을 배제·주변화하거나 애써 외면한 것은 아니었을까[각주:21]라는 질문을 통해 되돌아보려고 한다. 1990년대의 장정일은 진정성의 논리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했으며, 그는 “1990년대 비평이 마침내 찾아낸 문학적 진정성의 자리-주체의 내면-를 메타픽션적인 방식으로 해부하며 그것이 일종의 환영임을 폭로[각주:22]하려고 했다. 그의 작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1990년대의 비평을 통해서 만들어진 주체의 내면이라는 것은 부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오히려 수행적으로 구성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때의 수행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주디스 버틀러의 논의를 참고하여 이해할 수 있다.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의 표현물 뒤에는 그 어떤 젠더 정체성도 없는데, 이는 정체성이 그 결과인 것처럼 보이는 표현물로 인해 수행적으로 구성되기 때문[각주:23]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정체성은 그것을 가진 것이 본래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인식 가능한 것으로 행위하고 반복하여 말하는 과정 속에서 가시화된다는 주장이다. 만약 내면이나 진정성이라는 것이 원본이라는 정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반복적인 호명과 정체화의 시도 속에서 수행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일시적으로 소환되었다가 다시 흩어지는 것으로까지 이해할 수 있다.[각주:24]1990년대에 내면은 문화주의와 (여성주의적 또는 여성적)일상성이라는 담론으로까지 확장된다. 사실 이토록 1990년대가 단절하고자 했던 1980년대는 1970년대와의 단절의 산물이었다. 단절(또는 전환)의 감각은 수행적으로 구성되면서 그것의 표현물을 만든다는 주장을 할 수 있지 않을까.

 

70년대의 비평은 그 통일로의 지향에 반성 혹은 실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반성 혹은 실천이라는 명제가 구체화되면서 70년대의 문학은 ‘범속한 트임’의 세계로 진입하였다. 80년대 문학의 자양은 70년대에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80년의 의미는 ‘단절’이었다. 정치적 폭압이 모든 문화적 꿈들을 말살하였을 때, 그 통일로의 지향은 다시 명제로 환원되었다. 하지만 본래의 대립으로 돌아갈 수 없는 또한 시의 현실이었다.
(……)
모순의 싸움이 잉태한 세계는 두루 ‘현실’의 이름을 가졌지만 그 모양은 다채로웠다.
(……)
우선, 생활의 세계가 발굴되었다. 그 이전까지 시의 관할이 아니라고 여겨졌던 생활의 생동하는 리듬이 시의 울타리를 단숨에 무너뜨린다. 그 리듬에 의하면 생활은 단조롭지도, 간난하지도 않은 것이었다.[각주:25]

 

비평가 정과리가 1991년도에 작성한 절정의 곡예사라는 글에서 1970년대는 단절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1990년대의 1980년대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단절이라는 선언은 새로운 문학의 등장을 알리는 새로움을 향한 주장일 것이다. 단절의 결과는 생활의 세계가 발굴되는 것이며, “생활의 생동하는 리듬으로 증명 또는 완성된다. 물론 1980년대가 시작되자마자 벌어진 광주민주화항쟁이나 노동운동의 차원에서 끌어올려진 민중문학이라는 대대적인 사건과 의미가 있는 그대로 1970년대와 1980년대를 단절시키는 데에서도 발견된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1980년대의 문학장에서 강조하는 단절이라는 것은 정치적 폭압에 대항하는 것으로서의 생활세계의 발견으로, 사회적 폭압에 반대하기 위하여 선택된 반대항으로서의 생활의 세계가 된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1980년대의 문학운동의 이념성으로부터의 반대항을 찾는 내면의 발견의 강조로 반복되는 것이다. 이 반복된 단절이라는 방식으로서의 문학적 수행의 선언은 새로운 세대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수행을 통해 선언된 내면진정성을 주창하는 세대는 여성주의적 작품의 주체를 식별의 수행문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평의 본질은 젠더화된 것으로 고착되어 자신의 내적특성에 여성주의 혹은 여성적인 것의 자리는 부재하기 때문이다. ‘단절을 선언하는 수행성의 존재들은 이제 문학이라는 체제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 체제의 필요조건에 따라 형성되고 정의되고 재생산된다. 이런 반복은 고정희와 박완서가 요청했던 여성 비평가적 안목 또는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비평의 젠더가 확보되도록 했을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페미니즘의 법적 주체로 간주된 것을 생산하고 또 은폐하는 정치적 작용을 추적하는 일은 바로 여성 범주의 페미니즘 계보학이 맡아야 할 과제[각주:26]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앞으로는 버틀러의 페미니즘 계보학의 과제라는 문제의식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함께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여성주의 문학적 주체를 생산하고 은폐하는 문학의 이해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앞에서 다룬 내용이 은폐를 가시화하려는 노력에 해당했다면 앞으로의 작업은 여성 시인들의 작품을 분석하며 여성주의적 주체를 규명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2.  자유로운 개인의 ()가능성

1979년 여름 창비에서는 이효재(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이창숙(전 한국일보 기자), 김행자(이화여대 정치학과 조교수), 서정미(성심여대 불문과 전임강사), 그리고 백낙청이 모여서 오늘의 여성문제와 여성운동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대담을 진행한 결과를 계간지 창작과비평에 실었다. 우선 이효재는 대담이 시작하자마자 중산층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중산층 여성운동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다. “가진 여성, 교육받은 여성들로 하여금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일으키게끔 의식화시키는 문제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대가족 모델에서 부부 중심의 핵가족 모델로의 가정 형태의 변화는 중산층 여성의 문제의식을 둔화시킨다고 판단한다. 이와 같은 언급은 무엇보다도 여성문제와 여성운동의 주체를 가정 안의 여성으로 정해놓았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서정미는 노동계층 여성들과 중산층 여성들이 모두 여성의 문제를 강조해야 하며, 양쪽 문제를 양분시키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여성 운동이라고 말한다. 여성노동의 문제는 중산층이거나 아니거나 모두 마찬가지로 공사구분에 의한 여성 노동임금이나 처우의 차별 문제라고 제기된다. 이효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산층 여성들도 직업을 갖는다는 것이 중년의 여가를 선용한다든지 또 현대사회에서는 무언가 직업을 가져야 된다는 통념에서 사회진출을 요구하는 거지, 직장생활이 좀 여의치 않다거나 가정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면서 직장생활을 해나가기가 힘들다든지 하면 쉽사리 직업을 버리고 가정으로 되돌아가버리는 거예요. 직업이라는 것에 대한 이런 인식으로부터 우리 여성들이, 중산층 여성이든 근로층 여성이든, 벗어날 때가 됐다고 보는데, 사실은 사회구조 자체가 인간활동을 공적인 분야와 사적인 분야로 갈라놓고 사적인 분야는 말하자면 가정생활이고 여자의 영역이다, 이렇게 못박아 놓음으로써 우리 여성들을 차별하고 있다고 봐요. 이런 남녀간의 역할분담에서 여성노동자의 저임금이라든가 중산층 여성의 경우도 남자보다 못한 보수가 주어지는 것이 정당화되는 거예요. 수출증대라든가 해서 공적인 분야가 노동력을 많이 필요로 하니까 여성노동력을 쓰지만 여자는 원래 사적인 분야에 속하는 존재니까 임금을 제대로 안 줘도 된다는 선입견이 깔려 있는 거예요. 또 여자는 결혼을 하면 직장을 그만두라고 하는 것도 그런 전제 위에서 하는 소리고 노동력의 수요가 줄어들 때 여자들이 제일 먼저 감원조치의 대상이 되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그리고 어느 계층을 막론하고 여자의 경제적 위치와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여자가 집안에서 하는 가사노동은 전혀 경제적으로 인정을 못 받는다는 사실이에요. 단적인 예로 요즘 중산층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이 소위 증여세 문제에요. 남편이 벌어온 돈으로 집에서 여자가 알뜰살뜰히 살림을 해서 돈을 모았는데 그 돈으로 집을 한 채 더 산다고 할 때 그걸 부인 이름으로 산다면 증여세라는 걸 내야 되잖아요? 왜냐하면 여자는 직업이 없고 수입원이 없으니까 거저 얻은 돈이라는 거지요. 가사노동이라는 게 따지고 보면 남자들이 직장에 나가 노동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건데 이것이 공적으로 인정이 안되기 때문에, 예컨대 노후문제만 해도 남편이 은퇴해서 살아 있으면 연금이 나오다가도 남편이 죽으면 여자는 연금도 없어지는 실정이지요. 이렇게 여성의 경제적인 입장이 중산층에서나 근로층에서나 기본적으로 인정이 안되어 있다고 보아요.[각주:27]

 

 

이효재는 여성과 남성의 노동은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의 구조가 형성되지 않고 있으며, 동시에 여성의 가사노동은 경제적으로 인정을 못 받고 있다는 현실을 꼬집는다. 이를 표현하는 하나의 장면으로 제시한 여성의 이름으로 부동산을 장만하게 된다면 증여세를 내게 하는 현실, 남성의 사망으로 인해 여성은 연금이 없어지게 된다는 두 장면은 여성의 가사노동이 어떻게 무급노동으로 취급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여성의 노동에 대한 평가절하와 소외는 여성의 노동 의욕을 꺾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운동의 측에서는 이에 대한 교육을 통해 근로여성의 사회로의 진출을 고취시킬 수 있어야 할 것으로 이해된다. 주요 논의는 중산층 여성과 근로 여성이 대중운동의 성격을 공유하면서 여성운동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1970년대를 마무리 짓는 이 대담을 통해 1979년의 여성주의 운동의 전선이 더 확장되지는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79년의 현실에서 여성의 인간화, 인간화로서의 여성주의 운동은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의 이동, 중산층 여성으로부터 근로여성으로의 논의와 함께 이동 및 확장 되었지만 가정 바깥의 여성에 대한 고려는 나타나지 않는다.

1984년 출판된 산문집 자유로운 여성[각주:28]10명의 여성 작가들이 여성들에게 보내는 산문을 모은 것이다. 앞의 1979년도의 대담과는 다른 여성 주체에게 말걸기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이 글의 내용과 기획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산문집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글을 실은 작가와 책의 기획자의 생각을 모은 것으로 볼 수 있는 <이 책을 읽는 분에게>라는 에필로그가 남겨있다. 여기에서는 가부장적 문명의 울타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계급사회(남과 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여성과 자유에 대한 공론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럼에도 이 책의 의도는 한국사회의 여성들이 여성의 자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으로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의 삶을 성취하라고 말하기 위하여 기획되었다고 밝힌다. 이 글이 씌어진 1984년에도 여성의 삶은 복종과 예속의 문제에 결부되어 있다는 판단과 함께, 여성과 남성이 더불어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질문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복잡한 문제들을 자유로운 삼을 지향하고 있는 열 분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서 엿보려는 것이 이들의 기획이다.

이 산문들은 당대의 여성들이 여성으로서의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으며, 계급적(남과 여)이고 문화적인 부자유를 직시하고 여성의 자유성을 필요로 하지만 실제로 그 추구가 이행되기는 어렵다는 점을 이해하면서 씌어졌다. 중년 여성으로서의 생활면의 성찰을 담은 박완서의 글은 날이 갈수록 여성의 대학 진학률은 올라가고 있지만 실제로 이 여성들을 고용할 수 있는 취업의 길이 막혀 있는 현실을 꼬집는다. 여학생이 대학에 합격하는 비율이 올라가기 때문에 남학생의 진학이 어려워진다고 비난하는 성차별적 상황, 성차별을 뒷받침하고 있는 태아성별감식을 부추기는 남아선호사상, 고학력의 여성조차도 여성의 전화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가정 폭력이라는 일화들을 다룬다. 산문집은 자신의 작업과 자유는 어떻게 추구될 수 있는가를 여성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같은 고민을 모색중인 여성들에 대한 말 걸기로 볼 수 있다.

1984, 당대를 둘러싼 여러 문제의식 중에서도 그 무엇보다도 어떻게 자유를 추구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그 자유를 구유할 개인이라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강석경, 홍신자, 고정희, 이정희, 김승희의 글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여성이라는 개인이 어떤 조건을 갖춘 상태인가를 보여준다. 주로 왜 결혼하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통해서 자신의 혼자 있음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은 결혼하지 않은 채로 가정 바깥에서 여성-개인인 상황을 통해 자유로운 삶과 예술을 느끼며 실천하고 있는가를 밝힌다. 고정희의 글 혼자 사는 자유란 비장한 자유지요는 소설가 강석경이 고정희에게 했던 말 혼자 사는 여자의 자유란 비장한 자유야에서 따온 것이다. 강석경의 이 말을 자신들이 정신적인 자수성가의 세대들이라는 뜻이 담긴 것으로 본다며,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혼은 고사하고 최소한 내 생에서 가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아픔과 만난다. 가짜 인간, 가짜 시인만 안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내 삶의 가치는 충분하다는 생각을 한다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다. 결혼이나 출산이라는 기성적 생애에 구속되지 않고, 세상의 관심과 기준이 중심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독립된 인간이 되어 시인으로서 그 삶에 대해 진심으로 임하는 것이 고정희가 생각하는 자유로운 개인이라 이해할 수 있다. 고정희, 강석경, 홍신자, 김승희의 글을 포함한 나머지 글에서는 공통적으로 전문가나 직업인으로서의 위치에서 개인적인 자아와 사회의 관계를 조명하려는 작업이 이 산문집의 전제로 되어있다.

기성 소설가로서의 박완서의 시선과 30대 시인으로서의 고정희, 안무가로서의 홍신자, 연극평론가 김방옥의 생각은 존재론적이거나 사회과학적인 개인이라는 범주를 미리 약속한 것이 아니라 여성전문인으로서의 경험이 동시대와 어떻게 마주치고 있는가를 시론의 성격을 가진 글로 써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1984년이라는 시간적인 배경을 두고 개인자유에 대해서 말하려고 할 때, 우리는 정치적 자유나 언론의 자유 또는 계급적인 자유나 사상적인 자유를 생각하는 것이 빠르다. 그러나 이 산문집의 에필로그에 적혀있는 가부장적 문명으로부터의 자유나 계급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의 삶을 성취하는개인은 어떤 존재일 수 있을지 또 그런 개인이 실체가 있는 것인지 더 나아가 한국사회의 여성들이 여성의 자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정당한 것인지 다시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는 한국 여성운동의 새로운 지평이 열린 시기로 기록되고 있다. 사회학에서도 흥미로운 발돋움의 시기로 기억될 수 있는데 여성주의운동의 활발한 도약과 더불어 여성 더하기식의 사회학이 아닌 여성학 개념을 이용한 여성 경험을 가시화한 시기가 1980년대라는 것이다.[각주:29] [각주:30]1986년에 간행된 또 하나의 문화2호는 열린 사회 자율적 여성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만들어졌다. 장필화, 고정희, 조혜정, 조옥라 등을 포함한 동일들이 모여서 진행한 좌담의 주제도 열린 사회 자율적 여성인데 1950년대로부터 1986년 당대까지 아우르면서 여성이 직업을 갖는 데에 장애가 되는 사회적 편견을 다룬다. 이를테면 1950년대만 해도 직업이 있는 여성은 뭔가 결함이 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고 이야기 되는데, 이러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후반부 내지는 80년대라고 밝힌다. 즉 이 좌담이 이루어진 시기에도 여전히 직업을 가진 자율적인 여성이 되려는 이들에게 과거의 편견이 장애물로 기능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여성이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직업여성이 되기로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결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혼자 사는 것은 불행이다. 절대적 자의에 의해서 혼자 사는 것일 리는 없다는 식으로 보는 견해는 마찬가지로 지배적인 것이라 이야기 된다.[각주:31]좌담 내용을 통해서 독신자로 살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여전히 예외적이거나 특별한 사람으로 이해되는 풍토가 남아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풍토조차도 사회학자와 여성학자가 함께 모여있는 또 하나의 문화이기 때문에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들은 자율적 여성의 조건은 경제적 자립과 감정적인 독립이라고 의견을 모은다. 이를 위하여 필요한 것은 열린 사회로의 공동체적인 삶이다. 자율적인 여성의 모델로 독신자가 먼저 등장하기는 하지만 또 하나의 문화의 창간 이념은 가족문화를 주요 운동의 대상으로 삼고, 이에 대한 공동의 지식을 구축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가정주부의 자율적인 삶의 모색도 포함되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결혼한 여성이 가정주부가 되는 선택지 말고도 자신의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위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모두 동의한다. 이는 가사노동의 가치문제를 거론하는 일과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동인들의 좌담은 1980년대 중반에 젊은 여성들이 어떤 선택에 놓였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1980년대의 여성주의운동이 여성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가족의 형식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개인-여성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을 때, 여성의 눈앞에서는 실제로 선택가능한 것인가를 의심하게 하는 부담과 현실적인 모순이 함께 작동하고 있었다.

1980년대 전체를 총괄한다고 확정하여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 시대의 여성의 자율적 주체의 형성과 삶의 양식의 요구는 또 하나의 문화의 제호를 거듭하면서 당대의 대안적 문화를 요청하는 여성 집단이 형성되는 현상과 함께 이해가 필요하다. 이러한 1980년대 여성주의 출판문화운동은 여성-개인주체되기의 문학적 모색이 나타나는 것과 같은 배경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1. 전혜린은 이러한 오명과 자신의 존재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 공동체적 질서와의 불화를 번역가-작가라는 형식을 통해 타개해보려 시도한 대표적 사례이며, “나혜석 역시 번역가-작가로서 여성 작가의 위태로운 생존 방식의 역사적 기원으로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나혜석의 에세이들을 번역으로 볼 것인가라는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이른바 서구적인여성의 삶과 공동체적인 질서가 요구하는 여성의 삶 사이의 불가능한 틈새를 양자 사이의 번역을 통해서 매개해보려는 시도가 그녀의 에세이들의 중요한 특성으로 이해해볼 것을 권유한다. (권명아, /가능한 싱글 라이프의 번역가능성과 번역불가능성, 여성문학연구26, 2011, 75) [본문으로]
  2. 권명아, 같은 글, 77. [본문으로]
  3. 조옥라 외, 『또 하나의 문화』 제9호, 도서출판 또하나의 문화, 1992, 17쪽. [본문으로]
  4.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32. [본문으로]
  5. 본고에서는 화자=자아=시인=실체라는 자아 중심의 시학적 이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시인(혹은 화자)이 지배하는 영역을 넘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 너머에 있는 것까지 읽어내기 위하여 발화의 중심점, 곧 발화가 생겨나는 자리를 주체라 부를 것이다. 그리고 이 주체는 단일한 목소리를 가진 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해 속에서 특정 발화가 만들어내는 수행적인 효과가 주체라 여길 것이다. 다시 말해 주체는 시적 언술을 산출하는 실체가 아니라, 언술들의 구조화된 장에서 생겨나는, ‘말하는 것으로 가정된어떤 지점이 되는 것이다. (권혁웅, 1장 주체, 시론, 문학동네, 2010, 23-59쪽 참조) [본문으로]
  6. 시적 주체는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화자=자아=시인=실체의 공식을 기각하는 입장에서는 대상의 위계와 배치에 따라 주체가 발생한다고 본다. 따라서 주체의 성격을 검토하려면 대상의 성격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 양상에 따라 시의 언술이 모습을 갖추기 때문이다. 시가 동일성의 산물이라는 것은 시적 대상이 자아의 변체라는 걸 뜻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이질적인 대상들을 하나의 평면에, 동일한 지평에 놓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화자는 그 모든 것들을 집해는 실재의 주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단지 문법적으로만 연계하는 가상의 주체이다. 주체는 대상의 일부이며, 주체와 대상 모두 다른 대상과 주체의 관계에서만 자신의 자리를 확증하며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관점을 통해 본고의 작품의 시적 주체와 대상을 이해할 것이다. (권혁웅, 앞의 책, 60-61쪽 참조) [본문으로]
  7. 고정희, 독신자,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창작과비평사, 1992, 188-190. [본문으로]
  8. 고정희의 시에서 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이 시에서 전제하고 있는 대상으로서의 공간 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다. 밤이라는 시간에 의 죽음을 예견하는 공간이면서 어머니와 친구들이 달려와 나를 위해 노래하고 시신에 수의를 입히며 염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무한정하지만 폐쇄되고 한정된 공간인 을 상상해볼 수 있다. [본문으로]
  9. 최영미. 혼자라는 건, 서른, 잔치는 끝났다, 창작과비평사, 1993. [본문으로]
  10. 1992년 발간된 고정희의 유고 시집에서 독신자라는 작품을 만날 수 있었지만 1980년대의 맥락에서 고정희에게 개인-여성이라는 주체가 나타난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고정희로부터 개인-여성으로의 주체성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녀의 또 하나의 문화동인으로서의 모습이나 1990년대의 작품 속에서 드물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고정희의 한 작품이 이 글의 주요 지지대가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정희의 1980년대 작품은 분석의 대상으로 포함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11. 황종연 외, 좌담: 90년대 문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90년대 문학 어떻게 볼 것인가, 민음사, 1989. [본문으로]
  12. 권성우, 베를린·전노협, 그리고 김영현 90년대 사회와 문학, 문학과사회1990, 255. [본문으로]
  13. 조연정은 계간지 문학동네가 기획한 1998~1999년의 20세기 한국문학 결산 연속 기획 특집을 읽으며 90년대의 386세대가 ‘90년대적인 것을 만들어 나갈 때 신경숙 현상이라는 특수한 장면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그것이 1990년대의 문학을 읽을 때 끼친 영향에 대해 더 연구가 필요함을 밝히며, 2000년대에 벌어진 신경숙의 표절사태와 문학장에서의 문학동네의 자리매김 과정의 유관성을 검토한다. (조연정, 「『문학동네‘90년대‘386세대의 한국 문학, 한국문화81, 2018.) [본문으로]
  14. 밀레니엄 이후에도 여전히 2000년대와 2010년대 등의 10년 단위의 단절전환의 감각을 충실히 따져야 한다는 입장이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15. 천정환, 창비와 신경숙이 만났을 때 1990년대 한국 문학장의 재편와 여성문학의 발흥, 역사비평112, 2015 가을, 289. [본문으로]
  16. 김홍중, 앞의 책, 18-19. [본문으로]
  17. 안지영은 문동을 중심으로 구축한 진정성의 개념이 문동의 대표적인 필자인 황종연, 서영채, 남진우 그리고 김홍중에게서까지 서로 다르게 이해되어 이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안지영, 문학혹은 근대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 ‘(포스트)진정성의 탈구축과 90년대 미적 근대성 비판, 상허학보63, 2021.) 조연정은 김홍중이 문동의 제2세대 평론가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에서 진정성을 이론적으로 구축한 과정이 문동이 공들여 지지한 내면성 문학의 자기동일성 개념 그 자체를 극복하게 하는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읽었다. (조연정, 문학주의의 자기동일성 1990년대 문학동네의 비평 담론, 상허학보53, 2018) [본문으로]
  18. 김홍중, 같은 책, 35. [본문으로]
  19. 황종연 외, 같은 책, 47-48쪽. [본문으로]
  20. 김혜순, 「90년대 한국 문학이란 무엇인가Ⅰ -90년대 시적 현실, 어디에 있었는가」, 『문학동네』 1999 가을 통권 20호, 347-348쪽. [본문으로]
  21. 배하은, 만들어진 내면성 김영현과 장정일의 소설을 통해 본 1990년대 초 문학의 내면성 구성과 전복 양상, 한국현대문학연구50, 2016, 553. [본문으로]
  22. 배하은, 앞의 글, 565. [본문으로]
  23. 주디스 버틀러, 조현준 역, 젠더트러블, 문학동네. 2008, 20. [본문으로]
  24. 주디스 버틀러, 앞의 책, 31. [본문으로]
  25. 정과리, 『무덤 속의 마젤란』, 문학과지성사, 1999, 23-24쪽. [본문으로]
  26. 주디스 버틀러, 앞의 책, 93-94. [본문으로]
  27. 백낙청 외, 「오늘의 여성문제와 여성운동」, 『창작과비평』 1979년 여름, 21-22쪽. [본문으로]
  28. 박완서 외, 자유로운 여성, 열음사, 1984. (박완서, 강석경, 강은교, 홍신자, 고정희, 김주영, 이정희, 김승희, 김방옥, 허영자 등의 차례대로 10명의 산문이 담겨있다.) [본문으로]
  29. 또 하나의 문화의 주요 동인이었던 조형이나 조혜정이 여성학 개념을 사용하여 성 차별, 성 평등, 성별 권력관계, 페미니즘, 성별 분업, 가부장제등을 동원하여 성별 불평등의 구조적 원인을 분석한 연구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이재경, 한국 사회학에서 여성연구의 성장과 도전, 사회과학연구논총Vol.11,2003, 28~31) [본문으로]
  30. 2003년도에 마지막으로 출간된 또 하나의 문화17호의 제목은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인데, 글의 첫 장에 해당하는 다시 비전을 세우며더 이상 정상 가족은 없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1984년도에는 가정 안에서 주부 여성 주체를 생산하고자 했던 또 하나의 문화는 가족의 존재를 의문시하며 핏줄주의를 넘어서는 동시대적 현상을 받아들이자는 제안을 한다. 이제 여성주의 문화운동에서 가족은 필수 항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본문으로]
  31. 장필화 외, 열린 사회 자율적 여성, 또 하나의 문화2, 도서출판 또하나의문화, 1996, 2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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