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디지털 시대의 존재론
지영 | 국문학 연구자
1. 디지털 사회의 도래
2017년 ‘4차 산업혁명’이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트렌드로 등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 분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실 ‘4차 산업혁명’은 몇 년 전부터 인구에 회자되던 ‘빅데이터’나 ‘포스트휴먼’ 논의와 유사 계열을 이루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과학기술 담론 안에서 기존의 논의들이 확대・변용・재생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와 문학의 관계를 탐색하기 위해 던져야 할 질문은 ‘4차 산업혁명’이나 우리가 향유하는 테크놀로지의 기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 담론이 여타의 담론들을 압도하는 양상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오늘은 ‘디지털 시대의 존재론’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지금을 ‘디지털 시대’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20세기 말에 등장한 인터넷과 21세기에 등장한 스마트폰 때문이다. 장강명의 『열광금지, 에바로드』에는 “IT 하청업체 직원”인 종현의 대사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인터넷이라는 게 신기해요. 저희 아버지 인쇄소가 망한 것도 인터넷 때문이고, 동대문 (시장)이 그 모양이 된 것도 인터넷 때문이고. 그때부터 희미하게 ‘아, 이제 밥 벌어먹고 살려면 뭘 해도 인터넷과 연관이 있는 걸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작품 말미에서 IT업에 종사하는 종현은 결국 ‘인터넷’에서 ‘텀블벅 모금’을 하고 그 돈으로 다큐멘터리 영화 <에바로드>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인터넷이 정말 그에게 ‘밥(=돈)’을 준 것이다.
이제 인터넷은 단순히 밥 벌어먹는 차원을 넘어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기본값으로 작용한다. 2017년 아마존 본사에 인공지능(AI)을 활용하여 체크인과 체크아웃만 하면 계산대 결재가 필요 없는 쇼핑몰 아마존고(Amazon Go)가 문을 열었다. 아마존고에는 매장 내의 센서와 딥러닝 기술, 그리고 고객의 행동을 인식하는 기술이 사용되었다. 아마존고는 스마트폰과 아마존앱을 활용하면 계산까지 알아서 되는 시스템이다. 이곳에는 직원과 계산대, 그리고 기다림이 없다.
디지털 시대가 도래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아마존고’는 물건을 사기 위해 마트의 계산대에서 앞 사람의 계산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본인 순서가 되면 직원과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절차를 제거해 버렸다. 이런 절차는 한편으로는 번거로운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들을 포함한다. 이 절차가 사라진 아마존고에서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발걸음의 멈춤 없이 ‘고(Go)’만 하면 된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질문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급격히 변하는 세상 속에서 문학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2. 매체의 변화가 가져온 문학의 새 자리
디지털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은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매체 역시 변했음을 의미한다. 사실 매체 이론에서 보자면 문학은 문자 매체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구텐베르크 이후 인쇄술이 발전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문자를 읽고 쓸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인구의 대부분이 합리적 의식의 세례를 받았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가 문자 매체와 더불어 인간들의 의식을 장악했다.
월터 옹의 말대로 매체는 의식을 재구조화한다. 문자 매체 시대에 문학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텔레비전・인터넷・소셜미디어가 등장한 이후의 세계에서 문학은 영상 매체에 밀릴 수밖에 없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매체가 변했다는 것은 단순히 ‘플랫폼’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 구조’까지도 그 매체에 적합한 형태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진지함으로 일관하는 문학을 버거워 한다.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라는 농담처럼, 사람들은 흑백의 대비만으로 구성된 문자 매체보다는 다채로운 이미지와 오감을 자극하는 영상을 더 선호한다.
대중들의 기호를 간파한 문학자들은 이러한 요구에 부합하는 작품들을 창작하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초단편소설’과 ‘경장편소설’이다. 초단편소설은 200자 원고지 5~30매 분량이며, 경장편소설은 원고지 500매 내외로 창작된다. ‘초단편소설’은 분량이 짧기 때문에 SNS에서 유통되기에 적합하고, 스마트폰으로 읽기에도 무리가 없다. ‘스낵컬처(snack culture)’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장르야말로 문학이 매체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출판사 은행나무는 2014년 배명훈의 『가마틀 이야기』를 시작으로 경장편소설 시리즈를 내고 있다. 그리고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 등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최근 짧아진 소설들은 문학계의 ‘주력 장르’로 떠올랐다.
매체 환경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문학 장르는 바로 ‘웹소설’이다. 지금은 ‘웹소설’이 범칭으로 자리 잡았지만, PC통신 시절에는 ‘온라인 소설’이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되었고,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는 ‘인터넷 소설’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였다. 팬픽, 로맨스, 무협, 판타지 등의 장르가 주로 창작되기 때문에, 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웹소설’은 본격문학 혹은 순수문학에 못 미치는 ‘하위문화’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위의 포스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웹소설은 상금으로 3억 원 이상의 금액이 붙을 만큼 지금은 대중들에게 각광 받는 문학 장르이다. 조회수가 높은 웹소설들은 대중성을 담보하기 때문에, <엽기적인 그녀>를 필두로 <늑대의 유혹>, <구름이 그린 달빛> 등 웹소설을 영화화하거나 드라마화하는 작품들이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
3. 안녕, 인공존재
시대를 대표하는 매체가 변하면 그 시대에 주목 받는 문학의 장르뿐 아니라 문학의 내용도 바뀌게 된다. 최근 한국 문학계에서도 포스트휴먼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로봇과 인공지능, 사이보그, 복제인간, 사이버 자아 등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였다. 이런 주제를 다루는 작품의 기점에는 ‘‘인공존재’를 소설 속에서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라는 물음이 담겨 있다. 2009년에 발표된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는 ‘인공존재’의 문제를 다루면서, 제작자인 ‘인간’과 제작물인 ‘기계’ 사이의 이분법을 넘어서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컴퓨터 회사의 신상품 연구개발원인 신우정 박사가 의문의 제품인 ‘조약’을 남기고 자살을 하는 데서 시작한다. 히트메이커인 신우정 박사는 “경쟁사들이 좀더 많은 감각을 기계에 담으려고 애쓸 때”(108) “기계로 들어가고 나가는 감각의 숫자를 줄이려고 애썼다.”(108) 이런 신우정 박사가 죽기 전에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우주비행사 이경수에게 ‘조약’이 완성품인지 미완성품인지를 판단해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래서 이경수는 ‘조약’과 함께 생활하며 이 ‘인공존재’의 의미를 탐구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인공존재’가 완성되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경수는 ‘인공존재’가 ‘인공성’과 ‘존재성’을 모두 가지고 있을 것이란 전제 하에 “뭔가 작동할 텐데. 존재한댔어.”(108)라고 말한다. 그에게 인공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작동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재함=작동함’이라는 등식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경수는 존재의 증명에 이르지 못하고 난항을 겪는다.
존재는 좀처럼 증명할 수 없었다.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존재라는 게 대화를 나누고 눈을 들여다보고 그러면서 전해지는 거지, 문을 꽁꽁 닫고 아무 말 안 한다고 전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그런 생각만 점점 굳어져갔다.
사실 조약을 인공존재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신우정 박사가 죽기 전에 작성한 ‘조약 사용설명서’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이 설명서에 따르면 이 제품은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 공법으로 디자인”(109)된 것으로 “Dubito 회로라는 회의(懷疑) 회로를 통해 데카르트의 존재 추출법을 시행하여”(109) ‘Cogito’를 추출한다. 신우정 박사는 데카르트의 「성찰」을 변용하여 사용설명서를 작성함으로써, 데카르트가 신과 분리된 합리적 인간을 발견한 것처럼 제작자와 분리된 채 자가 이성으로 자기를 증명할 수 있는 인공존재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경수는 신우정 박사의 이러한 의도를 ‘조약’을 우주에 던져버리고 난 후에야 깨닫는다. 인공존재가 사라지고 나서야 그의 ‘반자리의 크기’를 실감하고, 인공존재는 작동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만약 이 작품이 이경수의 이 깨달음에서 끝이 났다면 인간을 중심에 놓고 서사를 이어갔던 기존의 소설들과 크게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작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인공존재의 ‘자각’까지를 작품에 담음으로써, 알고리즘에 따라 실행되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자율성을 지닌 “기계지성”의 문제까지를 암시한다. 우주에 던져진 ‘조약’은 시간이 갈수록 “생각보다 의심을 더 많이 했고, 의심을 하면 할수록 존재를 더 많이”(132) 하는 상태에 이른다. 게다가 조약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132)라고 생각하는 순간, ‘존재폭발’을 통해 존재가 사라진다. 인공존재는 이 사라짐의 순간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스스로를 증명”(133)한다.
4. 이제 문학은...
한갓 문학이 이 척박한 시대에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은 몇 가지 있다. 문학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금기를 넘어 인간 본연의 ‘욕망’을 감싸 안고, 갈 곳 없는 이들에게 ‘영혼의 안식처’를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문학 작품을 읽으며 ‘나를 찾는 여행’을 떠날 수 있고, ‘죽음’으로써 삶의 진실을 가르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문학은 내가 겪어 보지 못한 것, 즉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공명’하는 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인간은 물론 생물 더 나아가 사물과도 ‘교감’할 수 있게 만든다.
앞으로 우리는 오늘 살펴본 것처럼 인간뿐 아니라 동물과 식물, 기계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아닌 것들과 교감할 수 있는 법을 문학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이다. 특히 ‘인간과 기계의 공존’이라는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얼마 전 보스톤다이나믹사는 자신들의 회사에서 만든 ‘강아지 로봇 스팟(spot)’을 영상으로 공개하면서, 이 로봇의 균형 감각을 자랑하기 위해 사람이 로봇을 발로 차게 했다. 인간이 힘을 주어 차도 쓰러지지 않는 강아지 로봇을 선전하기 위함이었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의외의 지점에서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강아지 로봇을 발로 찬 것을 ‘동물 학대’라고 비판하는 댓글이 쇄도한 것이다. 이 일화는 별것 아닌 듯 보이지만 사람들의 감각이 변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일부 사람들은 ‘강아지’가 잘 연상되지 않는 외양을 지닌 로봇과 생명체인 강아지를 동일시할 수 있는 감수성을 지니게 되었다.
문학은 기존 감수성에 균열을 내는 움직임들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새로운 감수성을 창안하는 일에 적극성을 보여야 한다. 이 작업은 기존에는 가시화되지 못했던 존재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고, 하나로 보였던 것들 속에 미세한 차이를 지닌 다양성이 존재함을 알려줄 것이다. 공동체의 미학적 좌표는 계속해서 움직이고, 그 움직임의 과정을 언어로써 구현하는 것이 바로 문학의 역할이다. 이제 문학은 테크놀로지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세계에서 그것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타자들과 조우하고, 그들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