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영화연구를 위하여(2/2)
폴 윌먼 Paul Willemen
번역 : 박상빈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영화에게 던지는 비교라는 질문
영화에 관하여 비교라는 질문을 던질 때에, 수많은 개념적 자기장들은 자기 스스로를 연구를 위한 영역으로서, 다소간 국가 테두리 내적으로, 어떻게 그리고 왜 특수한(particular) 영화적 형식(표현과 내용 둘 모두에 있어서)이 특수한(particular) 때에 특정적인(specified) 영화 생산의 구역 속에서 달성되었는지에 대한 그럴싸한 이해를 만들어내는 연구 영역으로 통하는 관문의 윤곽을 그려준다. 비교 프로젝트를 위한 출발점으로서 필수적인 그 이론적 직관은 발견하기 상당히 쉽다. 이미 수행된 대부분의 작업과 주요한 초기 작업은 친숙한 이론적 패러다임들의 측면들 사이에 새로운 연결의 꾸러미를 정교히 만들어내었다.
필수적인 역사의 이론을 위하여 나는 이미 좋은 출발점으로서 마르크스/하비라는 묶음을 지적했다. 또한 아마도 지오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와 로버트 브레너(Robert Brenner)와 같은 경제사가들, 또한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D. D. 코삼비(D. D. Kosambi), 로밀라 타파르(Romila Thapar)와 같은 이들을 따르는 조절학파의 경제 분석가들과 역사가들에 의해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그들의 분석들을 특정 사회구성체들의 역사들을 생산할 때 고려할 것들 속으로 진지하게 끌고 들어간다.
필수적인 이론, 혹은 좀 더 정확히는 의미작용의 이론들에 대해 말하자면, 이 주제는 아마 좀 더 논쟁적일 것이다. 우선, 반영이론, 그러니까 지난 수십 년 간 평판이 나빠져왔던 러시아와 체코 형식주의자들의 이론, 즉 텍스트와 콘텍스트 사이의 직접적인 거울반영의 추정에 대한 비판에 착수하는 일은 전혀 필요치 않은 일이다. 다루어져야만 할 것은 재현이 대체적 관계를 함유하고 있다는, 즉 무엇이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상당히 기본적인 통념에 대한 비판이다. C. S. 퍼스의 작업으로 돌아가는 일은, 이는 1960년대 후반에 피터 월렌에 의해 영화연구의 안건으로 처음 제기된 바 있는데,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유용한 방도를 제공한다. 우리는 퍼스의 작업에 대한 지배적인 오독, 그가 기호의 세 가지 다른 유형(지표the index, 도상the icon, 상징the symbol)을 규명했다는 주장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신에, 우리는 퍼스가 어떤 기호 속에서나 나타나는 세 가지 차원들(그러나 이들은 중요성의 서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에 관해 이야기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기호를 (그 기호의 도상적이고 상징적인 차원을 통해) 부분적으로는 재현적이고 (그 기호의 지표적인 차원 속에서) 부분적으로는 비재현적인 것으로 다룰 수 있는 텍스트 분석 유형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게 된다. 후자는 대체관계를 포함하지 않으며, 반대로 기호와 지시체 사이의 존재론적 연관을 알려주는 일종의 표현적 인접성(expressive contiguity)을 수반한다. 그리하여 첫 번째 이론적 연습문제가 그곳으로부터 주어진다 : 이미지 속에서 작동중인 지표적, 도상적, 상징적 관계들을 명시하는 것을 통하여 어느 영화 이미지이건 그것의 세 가지 차원들을 규명하기.
비교영화 프로젝트에서 발굴되어야 할 두 번째 이론적 분야는 크리스티앙 메츠(Metz 1974: 208-212)에 의해 재형성된 것으로서 루이 옐름슬레우(Louis Yelmslev)의 구별법이다 : 여섯 개의 차원을 구성하고 있는 표현과 내용 둘 모두의 질료, 실체, 형식 사이의 구분. 특히, 표현의 형식과 표현의 실체, 내용의 형식과 내용의 실체 사이의 구분은, 특히 서술을 조직하는 다섯 개의 약호들 중 하나로서 문화적 약호들(내용의 실체들)에 대한 롤랑 바르트식 검증(Barthes 1975:184)에 비춰 볼 때, 이 무대에서 비교 프로젝트를 위한 위대한 약속을 수용하기 위한 것처럼 나타난다. 바르트라는 양념이 뿌려진 퍼스와 옐름슬레우의 콤비네이션은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영화 텍스트의 내용의 실체와 형식 및 표현의 실체와 형식의 도상적, 지표적, 상징적 차원을 탐사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물론, 이와 같은 서로 다른 이론적 구성물들로부터 뽑아낸 요소들의 브리콜라주된 조합은 각각의 문제틀로부터 온 이론적 도구들의 특수한 선택과 연관된 모든 종류의 반대에 대해 열려 있다. 가령, 기호의 세 가지 차원들에 대한 퍼스의 규명은 지켜나가는 반면에 특정 기호를 정의하는 요소로서 해석체 개념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일은 아마도 퍼스 기호이론에 대한 부당한 재단으로 보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내 목적이 비교의 접근법을 통한 영화연구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 속으로 퍼스의 방식에 대한 변론을 기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 무대에서 어떤 특별한 충실함의 부족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퍼스의 해석체 개념을 위한 공간을 제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해석체 개념은 의미론적인 기표의 언어적 사전적 정의들로 나를 이끌고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퍼스의 해석체 개념을 고려해야 할 필요는 아마도 내적 발화의 문제가 의미작용의 차원으로써 제기될 때, 다시 말해, 야콥슨(Jakobson 1988:32-57)에 의해 묘사된 담화 기능의 편성orchestration of discursive function이 발생하는 것으로써, 사유과정을 주로 비-언어적non-verbal 기호들과의 연관으로 고려해야만 할 때 되살아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특수한 해석체들의 적합성은 야콥슨이 메타언어적 기능으로서 정의하는 것의 활성화에 따르는 말걸기 과정의 변조들modulations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퍼스의 해석체는 바르트가 문화적 약호들이라 부른 것, 그리고 이에 동반하는, 텍스트 혹은 텍스트의 파편(가령 영화에서 한 시퀀스)의 메타언어적 차원을 구성하는 것, 이것들과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언어적) 약호의 한 요소로서 작동한다.
또한 만약 이 논문에서 지지하고 있는 경로가 실행가능하게 되었을 때 다루어질 필요가 있는 더 세부적인 사항 속에 다른 어려움들이 존재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주제는 영화의 표현 형식이 그 자체로 서로 다른 형식들의 극도로 복잡한 합성 혼합물이라는 점이다 : 심지어 영화는 수많은 표현적 약호화codification에 따라서, 예를 들자면 35mm 필름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16mm나 비디오로 유통될 때 그 자신의 상품 형식도 또한 변화할 수 있다. 이러한 예시는 영화음악, 발화되고 쓰여진 언어적 형식들, 기록된 소음 패턴들 등등으로 늘어날 수 있으며, 텍스트 속에서 유통되는 것은 또한 중요한 정도에 따라 변화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내가 제안한 브리콜라주가 의미하는 것의 예시를 거칠게나마 그려볼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영화적 서사의 표현 형식의 지표적 차원은 영화 제작에 배치된 가능한 기술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특정한 산업적 조직화의 종류, 노동의 분할과 투자의 흐름에 대한 지표). 이러한 측면에서, 사용된 렌즈의 확인, 사용된 카메라의 종류, 필름 종류, 조명 장비, 스튜디오 시설, 현상 기술들, 색보정, 특수효과 등등은 모두 조합되어 이처럼 기계장치의 효율적 배치에 가치가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정 종류의 산업적 생산 조직화를 지시한다. 기술들의 지표적 차원은 또한 예를 들자면 가능한 다른 종류의 자본 구성의 영향과 그 역할 사이를 구분하는 일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 불변자본(장비와 원재료들) 혹은 가변자본(노동력), 유동자본(원재료들과 노동력) 혹은 고정자본(공장), 또한 잊어서는 안 될 허구적 자본의 중요성(토지는 말할 것도 없고, 또한 싸구려 소설들, 신문 기사들, 오래된 소설들과 연극들, 노래들 등등에 의해 구성된 잠재적 가치, 단순히 시나리오나 줄거리의 원재료로 변형되는 것만을 통해서 종종 가치를 획득하는 것이자 그렇게 되자마자 독점적 지대를 산출하는 사적 소유의 영역으로 변형되고 울타리 쳐지는 것들).
다른 한편으로, 표현의 형식의 도상적 차원으로서, 리들리 스콧의 <글래디에이터>(2000) 및 다른 수많은 할리우드 상품들 속에서 사운드의 활용은 과거의 신중한 배경음악 관습이 도상적으로 엘리베이터나 대기실에서 흘러나오는 시시한 음악을 떠올리게끔 했었던 반면, 패션 샵이나 부띠끄 샵과 같은 소매점에서 음악을 활용하는 것과의 유비관계를 환기시키게 한다. 이 표현형식의 도상적 차원은 더 나아가 내용의 실체의 지표적 층위에서 어떤 침묵-살해silence-killing 장치들의 광범위한 이식으로 이끄는 산업심리학 작업을, 그리고 그러한 연구에 기반하고 있는 교묘한 공적관계 이데올로기로 이끄는 작업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 가령, 무성영화를 위해 쓰여진 악보들과 큐시트들 속에서 음악이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관한 연구가 있을 수 있겠으며, 또한, 2차 세계대전기간 중에 시작된 BBC의 <노동-배경-음악Music-While-You-Work>프로그램에서 독창적으로 나타난 바와 같이, 공적관계 전략들의 확산과 산업 심리학의 발전이 서로서로를 변화시켰는지를 검토해 보는 (내 생각엔 아마 서로 연관이 있을 것이다) 연구가 있을 수 있겠다.
영화의 내용의 형식의 도상적 차원은 아마도 말하자면 로버트 알트만의 <숏컷Short Cuts>(1993)의 서사구조와 다양한 틈새관객들과 틈새소비자들을 위한 쇼핑몰 푸드코트 설계와 같은 <힐 스트리트 블루스Hill Street Blues>(1980년대 초반)와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서사구조] 사이의 유사성을 알려준다. 다시 말해 우리는 단지 내용과 표현의 형식·실체의 도상적, 지표적, 상징적 차원을 밝히는 것을 학습하는 것만이 필요한 게 아니라, 또한, 동일한 텍스트 내부에서 상호작용하는 것들로서 이들 다양한 차원들 사이에서 가능한 접속들 또한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지적은 아마도 그레마스의 기호사각형, 텍스트 분석을 위해 제임슨이 임시적으로 채택한 사각형의 예시를 통해 더욱 명확해질 수 있다. 그레마스의 기호사각형은 텍스트의 내용 형식의 구조를, 즉 텍스트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구조적 청사진의 구조(내용 형식의 상징적 차원)를 기술하는 분석도구이다. 임권택의 <취화선>(2002)과 같은 영화 속에서 이 형식은 공적인 것/사적인 것과 국가/개인 사이의 대립을 경유하여 구성된다. 개인화는 만취, 감정적 불안정, 강렬한 고통, 결핍, 지리학적 동요(방랑하는-것nomadic-ness)와 같은 다양한 종류의 혼란disorder과 더욱 연관된다. 이와 같은 내용 형식의 지표적 차원은, 우리에게 훗날 낭만주의로 특성화된 바 있었던 유럽에서의 비슷한 이데올로기 형성체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그리고 극화되고 있는 동시적인 사회적 질서에 대한 긍정과 고통스러운 파열이라는 통제할 수 없는 감정적 성질emotionality로서 개인화에 관한 비슷한 양가감정을 전달하는,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우리에게 지시하고 있다. 지표적으로 말하자면, 임권택의 영화가 남한의 오늘에 관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의 의미론적 구조는, 약 200년 전 유럽에서와 같이, 개인화는 고통스러운 문제로서 경험된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감정적 불안정성과 예측불가능성, 그리고 가엾은 사회적 기능마비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만취라는 것의 대부분의 진부한 속성은, 미국에서, 그리고 서양의 어딘가 에서의 전근대적 이데올로기들의 완고한 저항을 보여주고 있는 부코프스키Bukowski나 헨리 밀러Henry Miller의 소설들과 할리우드 영화들 속에서 여전히 일상적으로 실천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기능마비적 (그러나 긍정적으로 가치가 매겨진) 개인화의 서구적 예시화들을 제외하면, 공적인 장, 사적인 장, 국가적 장은 그레마스 사각형에서 각기 다르게 위치지어진다(종종 소비자주의consumerism나 종교, 혹은 사회 질서의 군사적 범례는 드라마를 위한 긴장의 장field을 그려내는 추천 대안들을 제공한다). 도상적으로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적 내용의 실체들(말하자면, 지금껏 새겨져 온chiselled 선택된 형식들과 용어들 바깥에 있는 실체들)은 서양에서 낭만주의로 알려진 이데올로기적 형체와 유사하다. 하지만, 이는 유비적 관계analogical relation일 뿐, 전부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낭만주의처럼 보일 뿐이다.
1900년 즈음 부상한 인도 리얼리즘이라는 [자본주의와의 마주침이 유발시킨 이데올로기적 형성체의-옮긴이] 또 다른 시나리오 또한 가능하다. 인도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그들 눈앞에 닥쳤던 것들의 확고한 질서에 대해 문제제기 할 수 있는 미학을 개발했을 때, 그들은 서구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발달시켰던 리얼리즘에 의지하였지만, 그들의 문제제기와 비판적 목적들은 모더니즘의 그것과 같은 것이었다. 확실히 모더니즘 미학은 리얼리즘 미학과 유사하지 않다. 사실 서양에서 모더니즘은 리얼리즘의 변증법적 대립항으로 정교하게 구성되었으며, 둘 모두는 표현의 형식(서사적 인과성의 양식, 즉 다른 담론 형식들에 반하는 것으로서 산문prose 등등)이면서 내용의 형식(리얼리즘은 긍정affirmative을 옹호한다고 여겨지거나, 최소한 운명론적, 수동적, 정치적 정적주의quietism적 이데올로기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이었다. 하지만 인도 리얼리즘과 서구 모더니즘 둘 모두의 상징적·지표적 층위들에서, 이 두 가지 경향 모두는 개인화의 과정이자 동시에 피부로 느끼게 되는 통치 질서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를 표시하고 있다. 지표적으로 그들 모두는 우리에게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발전과 연관된 사회적 변화의 특정한specific 과정들을 지시한다. 이는, 비록 그들의 양상이 기능적으로 유비적이라 하여도, 인도 리얼리즘(아마 라자 라비 베르마(Raja Ravi Verma)를 예로 들 수 있는 경향)이 유럽 모더니즘과 같은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상적 연관성은 내용의 두 미학 형식의 ‘내용 형식의 상징적·지표적 차원들’과 연결되지만, 그들의 표현의 형식들에 연관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이 두 미학은 그들 각각의 사회구성체들 속에서 유사한 기능들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퍼스와 옐름슬레우의 브리콜라주 혼합에 기대는 것에 의해, 비교가능성들은 구체화되었다. 그것은 복잡한 차이화들과 동역학 속에 숨겨진 것, 즉 우리들에게 Ravi Verma 혹은 세잔의 회화들이 그들 각각의 사회-역사적 그리고 미학적 환경들 속에서 작동하는 양상들을 이해시켜주는 것이자, 미적 구성물들configurations에 대한 상세한 결합 분석(그러나 구조적이거나 해체적 분석)이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다.
퍼스와 옐름슬레우의 결합은 그리하여 경제적 구조, 가능한 기술들의 범위와 종류, 다른 종류의 자본에 연루된 유통, 이러한 특정한 형식들과 실체들을 영화적 서사로 구성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들configurations 등등과 영화의 연관을 직시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 요약하자면, 텍스트의 상이한 측면들은 그들의 표현적-지표적 차원을 통하여 법의학적 혹은 계보학적 읽기라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을 위한 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이는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로부터 기인한다는 읽기 방식이며, 또한 코삼비가 그것을 역사기록학을 위해 결집시켰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현재 규범적이든 법의학적이든 가장 많이 실천되고 있는 처방전이다. 게다가 이러한 읽기는, 가령 문학(영화) 스타일의 진화에 관한 로만 야콥슨과 유리 타니아노프의 저술들 속에서 형식적 갱신들과 같이 연대기순으로 기록된 변화와 돌연변이들을 과잉-결정하는, 더 장기의 사회적 동역학을 확인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데이비드 보드웰과 그의 동료들이 고전 미국 영화라 부르는 것에 관해 연구한 상세한 작업들은 유용한 실마리들을 제공할 것이다.
고려될 수 있는 세 번째 이론적 영역은 로만 야콥슨의 담화의 여섯 가지 기능에 대한 증명이다. 이는 특히 에밀 벤베니스트(Emile Benveniste)의 이야기histore와 담화discourse 사이의 구분에 의해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결합은 말걸기 양식의 분석에 있어서 굉장한 유용함을 제공한다. 야콥슨의 작업은 어떻게 옐름슬레우와 퍼스의 담론의 차원들 간의 결합이 [야콥슨의] 여섯 가지 중첩되는 말걸기의 중심선들 사이에서 복잡하게 변화하는 강조점을 둘러싸고 조직되어 텍스트의 직조물로 편성될 수 있는가를 시사하는 작업으로 나타난다. 더 나아가 담화의 기능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화들과 반향들에 관한 분석, 즉 텍스트성에 추가로 부여된 옐름슬레우의 여섯 가지 차원과 퍼스의 세 가지 치원은 의미가 어떻게 표현 형식의 층위에 있는 지표적 차원에서 내용의 실체의 층위에 있는 도상적 차원 혹은 내용의 형식으로서 도상적 차원으로 이전해 갈 수 있는지에 관한 통찰력을 산출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그러한 분석은 아마도 텍스트에서 그들의 비-재현적 측면들에 의해 조건 지어지는 재현적 측면들과 그들의 말 걸기 체제들이 어떻게 텍스트 직조물들 속에서 작동 중인 동역학을 편성하는가(통제하고 동력을 부여하는가)를 노정케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이 바로 내가 이 프로젝트의 시초적 무대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주장하고자 하는 이유이다 : 비교영화연구의 의제들 속으로 들어가는 가장 생산적인 경로란 텍스트의 말 걸기 양식 분석을 경유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의학적 읽기의 빛 속에서 밝혀지게 된 주체 위치들은, 그리하여 사회구성체 내에서 계쟁 중에 있는, 논쟁이 중이던 텍스트의 공식화를 주도했던, 현행하는 사회적 주체 위치들(이익집단들)을 어떤 절차와 (유비적으로나 지표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연관시킬 수 있게 한다. 그 절차는 텍스트를 텍스트의 토대를 이루는 벡터적 추동력의 확인과 서로 다른 이익 집단들로 채워진 역사적으로 입증 가능한 주체 위치들 사이에 있는 어떤 긴장들을 극화하는 ‘장field’으로서 간주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읽기는 텍스트가 주로(절대로 독점적이지 않게) 발화된 역사적 위치로부터, 그리고 텍스트가 밀어내려고 하거나 끌어당기려고 하는 수신자가 있는, 어떤 종류의 사회를 향하는, 그 방향을 규명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내게 비교영화연구의 영역과 연관시켜야 하는 네 번째 이론적 성좌를 가져다 준다 : 발터 벤야민의 환상 개념의 프리즘을 통과한, 프로이트의 꿈 작업 속에서 왜곡의 네 가지 과정들에 대한 증명. 여기서 벤야민을 상당히 자세하게 인용하는 것은 아마도 유용할 것이다. 벤야민은 마르크스가 삶의 조건이 이데올로기 속에 반영된다는 관념을 이미 기각해 왔음에 주목하면서, 그의 미완성 작업인 『아케이드 프로젝트Arcades Project』에다 노트를 남긴다 : “사회의 존재를 규정하는 경제적 조건들은 상부구조에서 표현된다. 이것은 잠자고 있는 사람의 경우 가득 찬 위장이 꿈의 내용을 인과적으로 ‘조건지을’지 몰라도 그것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하다. 집단은 처음부터 자기들의 삶의 조건을 표현한다. 이들은 꿈속에서 그것을 표현하며 잠에서 깨어남으로써 그것을 해석한다.” [K 2, 5] 이는 또한 벤야민이 자신의 변증법적 이미지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킨 맥락이기도 하다 : “변증법적 방법에 있어 중요한 것은 대상이 처한 그때그때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대상에 관심을 갖게 된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은 항상 관심 자체가 해당되는 대상 속에서 사전에 형성되는 방식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보다 그러한 관심이 자기 자체 속에서 대상을 구체화하고, 과거의 존재에서 ‘지금 존재’(즉 각성하고 있는 존재)라고 하는 보다 고차원적인 구체화로서 상승했다고 느끼는 방식 속에 들어있다.” [K 2, 3] 조금 뒷부분에서, 생산과정 속에서 개별 기계들이 끊임없는 생산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집합적 기계 속으로 결합되어가는 방식에 관한 마르크스의 서술을 인용하고 난 다음,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쓴다 : “영화 : 오늘날의 기계 속에 예시적으로 들어 있는 모든 직관, 속도, 리듬의 형식을 풀어놓은 것이다. 따라서 현대 예술의 모든 문제는 영화와 관련해서만 최종적으로 정식화 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K 3, 3]
영화 텍스트들은 어떤 점에서는 수십 년 간 공통적으로 직관되어 온 그들의 생산을 주도하는 역사적 동역학과 연관된다. 그것들의 내용 형식과 표현 실체의 형성물의 지표적 측면 덕분에 그 영화 텍스트들이 처음부터 그렇다는 점은 밀고 나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가설이며, 그러므로 그것이 재현적으로든 표현적으로든 실재에서 텍스트로의 번역이 반드시 환상과 꿈 텍스트들을 구성하는 원인으로서 프로이트가 규명해 낸 네 가지 왜곡 과정(전치, 응축, 2차 가공, 재현가능성의 조건들)에 예속됨은 확실하다.
이러한 가설 적용의 결과 중 하나는 환상의 과정들이 작동하고 있는 장소인 텍스트들의, 서로 연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분되는 두 가지 층위들을 식별할 수 있게끔 해 준다는 점이다. 내용의 실체 층위에서, 문화적으로 결정된 환상 시나리오들의 목록(어떤 종류의 이데올로기적 패러다임들)은 아이디어들의 네트워크들이 2차 가공된 이데올로기적 혹은 철학적 문제틀들 혹은 특정한 ‘형식’(텍스트 속에서 상연되는/텍스트에 의해 수행되는 환상의 특수한 판본)의 편성을 뒷받침하는 기호학적 영역들 속으로 함께 직조되어 짜여지는 과정에서 압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환상 시나리오들은 예컨대, 하인들이나 부르주아 가정 내 만연하게 분리된 가사노동이라는 또 다른 부분들을 프로이트의 저술들에서 매우 중요했던 19세기 후반 중부 유럽 버전의 오이디푸스 시나리오에 연루시킬 때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텍스트의 표현의 실체 층위에서 중요한 것은 영화적 의미작용의 물리적-감각적 측면들이 표현적 절차들의 목록들로 변형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지표성을 덮어버릴 정도로 도상성을 강조하는 특수효과에 의지하기, 대역의 도움을 통해 연기적 몸짓성gestuality의 가능한 범위를 확장시키기, 배우들을 와이어에 매달기, 디지털 편집을 사용하기, 사운드 트랙을 증폭시키기 등이 이러한 가능한 사례에 포함될 것이다.
이러한 표현 절차들의 선택은 다른 종류의 환상 시나리오의 배달부로서 작동하는 표현의 실체를 구성한다. 예를 들어 영화 제작의 바람직한 기업적-산업적 조직화에 관한 테크노-물신적 환상은 그리하여 아마도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1999)와 같은 영화의 서사 속에서 작동 중인 오이디푸스 시나리오들을 ‘이중화’시킨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용의 실체와 표현의 실체 각각 속에 내장된 환상의 구별되는 두 층위들과 영화가 동시대 관객들을 클릭 하는 데 성공하는지 아닌지를 설명하는 것 사이의 연관관계도 있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역사적 변화들(문화적 변동들 혹은 개인적 성숙 속에서의 변화들)은, 특정한 영화의 마케팅 전략들에 의해 타게팅 된 동시대 관객들을 눈에 띄게 만들지 않고 남아있게 하는, 이들 두 층위들 사이의 어긋남이나 정렬됨을 강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측면에서, 만약 징후적으로 읽는다면, 비평들은 이 두 환상적 편성orchestration들이 특정하게 경제적으로 의미 있는 소비자 그룹을 위해 적절하게 배열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지 아닌지에 관한 논평 속에 종종 일종의 거친 사고plumpes denken를 함유하고 있다.
1969년 출간된 선구적인 저술 『영화의 기호와 의미Signs and Meaning in the Cinema』에서 퍼스와 옐름슬레우에 영화이론의 관심을 최초로 주목시켰던 피터 월렌(1998: 83-84)은 그의 책 『파리 할리우드Paris Hollywood』에 재수록된 그의 논문 「건축과 영화Architecture and Film」에서 이러한 종류의 거친 사고의 유력한 예시를 증명한다. 그것은 바로 영화에 관한 글쓰기이다. 그는 영화 건축술의 연구가 어떻게 ‘스타star’로서 건축술의 특징을 보이는 소수의 영화들에 끌리게 되는지를 기술한다. 특히 1966년에 출간된 디트리히 뉴만Dietrich Neumann의 책 『영화 건축술Film Architecture』에 주목하면서 월렌은 짓굿게도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남긴다 :
뉴만이 선정한 위대한 ‘영화 건축술’에서 우연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 엄선된 것이 막장 코미디crazy comedy, 호러, 디스토피아SF 장르 속에서 무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스타star로서 건축술은 범죄적 광기, 한심한 광대 짓 혹은 무제한적인 독재를 재현한다. 진심으로, 건축가들 그들 스스로가 이 그들의 예술에, 이것들이 그들을 관심집중의 대상이 되게 함에도 불구하고, 매혹되어야 한다는 점은 정말 이상해 보인다! (Wollen 2002: 208-9)
외견상의 모순은 그 영화들 속에서 작동 중인 환상의 두 층위 사이의 어긋남과 연관된다. 표현의 실체 층위에서 발생된 환상은 건축학적 설계들에 대한 긍정적인 감탄을 고무시킨다. 내용의 실체를 구성해내는 데에 토대를 두고 있는 그 환상은 정말로 범죄적 광기, 한심한 광대 짓 혹은 무제한적인 독재정치를 암시한다. 전자의 환상 단계는, 그것이 표현의 실체에 매여 있기 때문에, 영화 제작의 경제적 측면들에 관한 (지표적) 함축을 통해 긍정적 감탄을 가능하게 만든다. 건축술이 스타로서 특징을 보이는 곳에서 선정된 영화들 더미(<메트로폴리스>(프리츠 랑, 1927), <비인간>(마르셀 레르비에, 1924), <앨리타-로봇들의 반란>(야코프 프로타자노프, 1924), <상상해 보라>(데이빗 버틀러, 1930), <다가올 세상Things to come>(윌리엄 카메론 멘지스, 1936),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프랭크 카프라, 1937), <마천루The Fountainhead>(킹 비더, 1949), <블레이드 러너>(리들리 스콧, 1982), <배트맨>(??), <딕 트레이시>(??) 등등)는 모두들 많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설계된 유명세를 떨치는 프로젝트에 착수하면서(이러한 의도가 언제나 영화의 배급과정을 통해 현실화되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할 수 있는 것’의 쇼케이스를 보여주기 위해 산업의 자원들을 동원하는 매우 값비싼 상품들이다. 이 영화들은 영화산업의 건강한 재무상태나 문화권력에 대한 찬양을 만들어낸다. 텍스트의 또 다른 부분[영화의 내용]에서는 이러한 권력이 문제적으로 제시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표현의 실체 층위에서, 그것은 반짝반짝 빛나는 스펙타클의 건축술을 경유하여 상찬된 영화 산업 자신의 범죄적 광기(대개 공갈에 의해 획득한 것인 어마어마한 자원들을 동원하는 기업 권력의 스펙타클한 전시들, 교활한 사기행위와 무제한의 탐욕), 한심한 광대 짓(거의 모든 ‘큰’ 영화들의 프로덕션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것), 무제한적인 독재(공장장들, 투자자들, 관료들과 스튜디오 바닥에서의 그들의 대리인들, 그리고 영화 제작자들이, 열망의 형식들 속에서, 관객들에게 말을 거는 방식)로서 묘사될 수 있는 것이다. 산업의 관점에서 이러한 모든 것들은 산화산업의 위대한 성취에 대한 긍정적인 특징들이며, 이것들은 산업의 자원들을 통제하는 그 헤게모니의 더 위대한 영광을 작동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양적 자원들로서 주어진 명성은 이러한 영화들의 마케팅에 사용되었다. 뉴만과 같은 건축가들은 (포퓰리즘 이데올로기의 전략을 무심코 노출시키는betray) 내용의 실체의 환상들을 가볍게 무시하며, 아마 직감적으로, 기업의 지배를 비난하는 포퓰리즘 수사가 토대하고 있는 기업 권력의 ‘실제적’ 전시 속에 할당된 건축학적 설계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건축학적 디자인의 영화들에 대한 뉴만의 상찬은 가령 ‘큰 정부’에 반대하면서 기업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는 레이건스러운 수사와 유사하다 : 레이건의 후원자들과 레이건이 당선됨으로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이들은 이러한 포퓰리즘 수사가 단지 기업 권력의 증대와 심지어 더 커진 정부를 향하는 드라이브를 감추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레이건을 후원하는 것에 의해 자기 무덤을 판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뉴만이 어떤 종류의 거친 사유plumpes denken 속에서 포퓰리즘 수사에 구애받지 않는 것을 ‘스타 건축술’ 영화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기업 권력에 반대하는 곳에 배치시킨 직관은 옳았다. 사실 이 영화들은 아주 스펙타클하게 진열되는 표현 자원들의 전시와 ‘지표하기indexing’의 차원에서 기업권력을 상찬했었다. 하지만 이 영화들에서, 동시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환상의 두 가지 층위들은 누군가의 관점에서 봤을 때에는(월렌) 어느정도 이데올로기적 정렬에서 벗어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이의 관점에서 봤을 때(뉴만), 산업의 자기찬양 이미지를 통과하며 전달되는 이 환상들은 지표적으로 그것의 표현의 실체에 아로새겨져 있다. 그리고 아마 틀림없이 다른 어떤 중요한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 환상은 산업 그 자신에 의해 부끄러움 없이 스펙타클화된 매우 무제한적이고 독재적인 기업 권력의 전체주의적 측면들을 비방하고 있는 ‘표면적 수사’에 연관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들은, 그 영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배치된 표현적 의미들의 층위에서, 빈센트 미넬리Vincent Minnelli의 <파리의 미국인American in Paris>(1951) 혹은 세실 드 밀Cecil B. De Mille의 <클레오파트라>(1934)가 할리우드의 처분권에 놓인 자원들을 상찬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혹은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와 버호벤의 <로보캅>(1987)이 단순한 암시들을 통해 미국이라는 기업의 승리를 상찬하는 것처럼, 그들을 생산해 낸 금융산업과 문화산업 둘 모두의 권력을 상찬한다. 만약 당신이 매우 과시적으로 막대한 양의 죽은 노동과 엄청난 노동력의 중앙 통제에 의존하는 그러한 종류의 영화들을 좋아한다면, 당신은 그러한 중앙통제를 만들어 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하는 그러한 사회적 관계들에 반대할 수 없다. 같은 이유에서 어떤 시골 지역에의 전자문화 도래를 한탄하는 영화를 만드는 일은 넌센스이다 : 시골의 순수함에다가 끔찍하게 파괴적인 근대성과의 조우가 있기 이전의 지위를 강요하는 동일한 제스쳐와 함께, 영화들을 만들거나 보여줄 수 있는 바로 그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에 관한 소망을 전달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거의 무의미한 일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차라리 영화를 만들지 않는 것이 더 정직해 보인다.
유사하게, 대부분의 재난영화들이나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들은, ‘스펙타클’을 구성하는 생산적 자원들의 바로 그 전시 속에서, 전지구적 아수라장에 대한 대단히 즐거운 스펙타클을 생산해내는 경로를 착실히 따르는 종류의 사회적 관계들의 조직화를 상찬한다. ‘블록버스터’와 사업 전략으로서 익스플로에테이션 영화의 메인스트림화는(독점적 생산의 즐거움을 상찬하는 예비용 ‘서사시’와는 대조적으로) 단지 영화 산업 전반을 지배하는 금융 자본의 지배를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 그들은 또한 우리, 관람자들이 금융자본의 유토피아들 속에서 즐거워하기를 요구한다. 그 영화들은 금융자본의 드럼통 속에는 아마도 썩은 사과들이 가득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마음속으로는 우리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괜찮은 녀석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1997) 혹은 마이클 베이의 <아마겟돈>(1998) 같은 영화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심지어 우리에게 전쟁을 판매하는(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2000)) 이러한 종류의 노동의 사회적 조직화는 아마도 결함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매우 인정을 베풀고 있으며 지원할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영화들은 정말로 두 갈래로 갈라진 혀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피터 월렌이 아마도 처음으로 깨달았다시피(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1941)의 형식(주의)적 우수함에 대한 감탄 속에서의 그의 논의를 떠올려 보라) 표현의 실체와 형식 층위에 기입된 환상들은 종종 분명한 이야기-내용들보다 더 크게 말하고 있으며, 이는 플롯-시놉시스와 영화 저널리즘 속에서 거짓 중요성을 전달하는 종류의 것이다.
이것은 이제 막 여정이 시작된 비교영화연구라는 새로운 학제 앞에 떨어진 과제이다. 좀 더 체계적으로, 사회-역사적 동역학이 어떻게 영화에 영향을 미치는가, 그리고 어떻게 영화로부터 그것을 읽어낼 수 있는가? 이러한 독해는 법의학적 관심을 지속해 나가야만 한다. 그것은, 서로 다른 지리-문화적 지역들 속에서, 영화가 그들의 말걸기 양식들을 편성하는 방식에 대해 주목하기이자, 표현과 내용의 실체와 형식의 지표적, 도상적, 상징적 차원 사이의 관계들에 대한 주목하기이며, 의미작용 관계들의 네트워크에 의해 운반된 이중 환상 구조의 공-현전에 대한 제대로 된 관심 집중하기이다. 이러한 작업은 어마어마하게 광범위하며 만약 이 작업이 어떠한 의미 있는 전진을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민족국가의 경계를 횡단하는 방식으로 수행되고 논의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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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
폴 윌먼Paul Willemen은 북 아일랜드 얼스터 대학 미디어 연구학과의 교수이다. 그는 1980년대 영화 잡지 <Framework>를 편집했으며 『Looks and Frictions』(1994)를 비롯한 다수의 저술을 출간했다. 최근 주요한 논문으로 Inter-Asia Cultural Studies(2002, Vol.3, NO.2)에 수록된 「한국영화를 통해 우회하기Detouring through Korean cinema」와 파멜라 처치 깁슨Pamela Church Gibson 편집의 『더 더럽게 보다More Dirty Looks』(BFI 2004)에 수록된 「포르노그래피적 풍경을 위하여For Pornscape」가 있으며, 디지털 이미지에 관한 논문을 작업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