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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의 앵스탕스와 최종심급

 

에티엔 발리바르

번역: 배세진 (파리 7대학 사회학 정치철학학과 박사과정)

 

<옮긴이 앞글 : 이 텍스트는 Actuel Marx 2016/1, n.59에 실린 에티엔 발리바르의 논문 L’Instance de la Lettre et La Dernière Instance를 옮긴 것이다. 이 텍스트의 출전에 관해서는, 옮긴이의 설명을 대신하여 발리바르의 각주 1번을 그대로 옮겨오겠다. “다음의 텍스트는 내가 유럽철학 어휘사전”(Vocabulaire européen des philosophies) -“유럽철학 어휘사전은 바르바라 카상(Barbara Cassin)의 책임지도 하에 Seuil/Le Robert 출판사에서 2004년에 출간되었다- 의 영어번역본(Dictionary of Untranslatables, Emily Apter, Jacques Lezra, Michael Wood 편집,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3)을 위해 2010년에 작성한 논문 ‘Agency/instance’를 수정하고 증보한 판본이다[다시 말해, 여기 우리가 옮기는 이 텍스트가 여러 버전이 존재하는 이 논문의 최종판본이며, 앞으로 논문을 읽어나가면서 독자들도 파악할 수 있겠지만, 앞에서 언급된 영어논문의 제목 ‘Agency/instance’에 등장하는 이 두 단어 모두는 프랑스어 앵스탕스의 두 가지 영어번역어이다]. 나는 이 논문의 프랑스어본[, 여기 우리가 옮기는 이 텍스트]을 스리지(Cerisy)에서 열린 “Les pluriels de Barbara Cassin”이라는 제목의 콜로퀴엄(20129)에서 발표했었는데, 그 당시 내 발표의 제목은 문자의 앵스탕스”(L’instance de la lettre)였다. 이후 이 프랑스어본은 Büttgen Philippe, Gendreau-Massaloux Michèle, North Xavier가 책임지도한 Les Pluriels de Barbara Cassin, ou le partage des équivoques (Bordeaux, Éditions Le Bord de l’Eau, 2012)에 실린 논문들 중 하나로 출간되었다.” 우선 번역과 게재를 허락해준 발리바르에게 감사한다. 몇 가지만 지적하자면, 옮긴이는 라캉의 instance 개념과 알튀세르의 instance 개념을 비교하는 이 논문을 번역함에 있어 instance를 어떻게 옮겨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라캉과 알튀세르 모두 프로이트의 Instanz 개념으로부터 이 프랑스어 instance 개념을 가져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알튀세르의 경우 이것이 명확히 심급을 나타내기 때문에 번역어를 선정하는 데에 있어 그다지 고민이 필요 없지만(알튀세르 저작의 국내 번역본들 모두 이 instance심급으로 번역한다), 라캉 에크리의 영어번역자들이 이 instanceagencyinstance, 그리고 심지어는 insistence로 옮기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듯, 라캉에게 있어 이 instance라는 개념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라캉 저작의 국내 번역본들 또한 이 instance를 다양한 용어로 번역하고 있다). 그래서 가독성이 상당히 떨어지더라도 라캉의 경우 instance를 프랑스어 그대로 음독하여 앵스탕스라고 옮겼으며, 독일어 원어인 Instanz의 경우 독일어 그대로 음독하여 인스탄츠라고 옮겼음을 밝힌다. 프랑스어 instance가 지니는 의미들 중 하나인 insistance(앵시스탕스, 이 단어의 영어번역어가 바로 insistence이다)의 경우,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끈기있게) 계속하다, (끊임없이) 지속하다,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강조하다, 요구하다, 간청하다, 강요하다, 고집하다, 역점을 두다, 주장하다 등등의 의미를 지니며, 물론 이 논문과 관련하여 핵심적인 의미는 (끊임없이) 지속하다 또는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다. 그래서 아래에서는 이 insistance존속또는 존속하다로 통일했지만, 이 또한 만족스러운 번역어는 아님을 밝힌다. 더 가독성 있는 번역본을 만들지 못 한 점에 대해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바란다. 라캉 정신분석학에 대해 무지한 옮긴이의 번역을 도와주신 황재민 선생님, 한보희 선생님께 감사드리지만 모든 오역은 옮긴이의 책임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지적하자면, 알튀세르의 최종심급과 관련해서는 철학연구자 최원 선생님의 알튀세르의 최종심급 개념’(1999)과 철학연구자 진태원 선생님의 과잉결정-과소결정’(2013)(이 두 논문 모두 웹상에서 쉽게 검색 가능하다)을 참조하길 바란다.>

1960-1970년대에, 처음에는 자크 라캉(Jacques Lacan) 그리고 이후에는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오늘날 우리가 프랑스 철학의 구조주의적 시기”(moment structuraliste)라고 부르는 바를 특징짓게 방식으로, 또한 사상가가 공유했던 제자들의 담론에 강력히 영향을 미치게 방식으로 앵스탕스(instance)라는 범주를 활용했다. 하지만 행동(action), 요구(demande), 존속(insistance), 유효성(efficace), 결정(décision), 위계(hiérarchie) 같은 다양한 바들을 지시하는, 그리고 앵스탕스라는 단어 속에서 이것들이 서로 결합되는 [앵스탕스의] 복잡한 체계는 다른 언어들로, 특히 (오늘날 비판이론 대표적인 언어가 ) 영어로 번역하기가 굉장히 까다롭다는 점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가지 사상적 유산(마르크스, 프로이트, 소쉬르) 대한 종합(syncrétisme) 실현하기 위해, 프랑스 이론가들은 앵스탕스라는 단어의 다의성을 활용하였다. 그러나 앵스탕스라는 단어는 영어에 동일한 단어[, instance]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영어에서는 프랑스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며, 이로부터 영국과 미국의 번역가들이 단어를 번역하면서 내렸던 여러 가지 분기하는 선택들을 검토할 필요성이, 그리고 단어를 프랑스식의 구조주의적패러다임 내부에 영향을 미치는 [이론적/개념적] 긴장과 논리적 불안정성의 폭로자로 만들 필요성이 따라 나오는 것이다.

 

앵스탕스들이라는 구조주의의 발명품

 

연대기 순으로 보았을 때 이 앵스탕스 개념을 최초로 활용한 이는 라캉이다. 라캉은 자신의 1957년 논문인 무의식에서 문자의 앵스탕스와 프로이트 이후의 이성에서 이 개념을 최초로 활용했다. 하지만 라캉 자신의 독트린에 있어 정초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에크리에 실린] 그의 다른 텍스트들 모두가 그러하듯, 이 텍스트 또한 1966년 출간된 그의 논문모음집 에크리”(Écrits)493-528쪽에 실리면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제목에 등장하는 표현인 문자의 앵스탕스[각주:1]는 이 논문의 본문에서 기표의 앵스탕스(instance du signifiant)라는 표현으로 대체된다. 이러한 대체는 소쉬르로부터 가져온 모델, S/s(또는 기표/기의)라는 쌍에 우리가 주목하도록 만든다. 앵스탕스 개념의 영어 번역들에 있어, “기표라는 통념 내에서 역설적인 방식으로 서로 결합되는 두 가지 속성들, 즉 기표의 형식성과 그 물질성에 대한 강조는 앵스탕스라는 통념이 지니는 다의성에 의해 과잉결정된다. 만일 앵스탕스를 영어단어 agency[행동, 행위자성, 관리장치, 관리기구,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무의식과 관련하여 행위의 의식적 주체도 원인도 아니라는 맥락에서) 대행성 또는 대리자성 등]로 번역한다면[각주:2], 이러한 선택에 있어서의 중심적인 관념은 문자”(lettre, 편지)가 지니는 유효성 또는 권력 -주체가 의식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장소와는 다른, 주체가 무의식적으로 사고하고 있는 장소를 설립할 수 있는 권력- 이라는 관념이다. agency라는 선택은 사고들 또는 증상들이 종속되어 있는 반복강박(contrainte de répétition)에서 특히나 잘 표현되는 바인 기표적 연쇄가 지니는 앵시스탕스”(insistance)라는 관념을 억압한다. 앵시스탕스라는 관념에서 강조점은 욕망의 파괴 불가능한성격에 더욱 강하게 놓여 있으며, 여기에서 주체는 욕망의 도구로서 무의식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각주:3].

 

반면 1962년 루이 알튀세르는 모순과 과잉결정이라는 논문을 출간하는데, 이 논문은 이후 1965년에 논문모음집 마르크스를 위하여의 한 장으로 들어가게 되며, 벤 브루스터는 1969마르크스를 위하여를 영어로 번역한다[각주:4]. 알튀세르는 역사 내에서 작동하는 원인들의 과잉결정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이 논문에서 처음으로 제시했는데, 여기에서 이 과잉결정이라는 용어는 증상의 무의식적인 형성물과 꿈에 관한 프로이트적 분석으로부터 명시적으로 차용한, 하지만 역사와 정치의 자장으로 전위(transposé)시켰으며 특히 혁명적 사건들에 대한 분석에 적용한 그러한 용어이다. 브루스터는 앵스탕스를 알튀세르 논문의 번역에 있어 심급(instance)으로 번역한다. 그리고 이 심급이라는 용어는 (앞으로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프로이트적인 메타심리학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는 것이지만, 사실 이 논문에서 알튀세르의 참조점은 오히려 엥겔스의 유명한 정식이며, 이 정식을 통해 엥겔스는 (그가 마르크스로부터 연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역사의 유물론적 개념화에 관한 논의를 진행한다[각주:5]. 역사적 사건들과 사회형태들은 경제적 요인들에 의존하는데, 그러나 이 경제적 요인들은 최종심급”(in letzter Instanz)에서만 유효하다. 알튀세르의 논의에 있어서 이는 하나의 사회구성체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diversement) 절합된 여러 심급들로 구성된다는 관념으로 전개된다(본질적으로는 마르크스가 경제적 토대또는 하부구조라고 불렀던 것과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상부구조”Überbau라고 불렀던 것이라는 두 가지 심급). 알튀세르는 이 두 가지 심급들 중 어느 하나도 다른 하나에 환원되지 않는다는 관념을 강조한다. 비록 이 두 가지 심급들 중 한 가지 심급이 인과성이라는 관점에서 어떠한 우위를 점할 수는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 논문 이후 구조인과성이라는 관념을 발전시키는 알튀세르의 이후의 텍스트들에서[각주:6], 최종심급은 역량에 있어서(en puissance) 다른 심급들보다 항상 우위에 있는 심급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심급들 사이로 유효성 또는 유효성의 표지를 비밀스럽게 (그리고 [항상] 변화하는 과정 내에 있는 역사적 지배를 정립instituer하는 방식으로) 배분하는 그러한 심급으로서 특징지어진다. “수준”, “영역”(région), 그리고 또한 실천과 부분적으로는 등가적인 그러한 표현들을 활용하기는 하지만, 결국 알튀세르는 항상 이 심급이라는 개념으로 되돌아오는데, 왜냐하면 어떠한 다른 해결책들도 토픽”(topique, 장소론)인과성이라는 도식을 절합 가능하게 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각주:7].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는, 엥겔스가 변증법의 새로운 개념화를 도입하기 위해 항상 적용했었던 계기”(moment)라는 헤겔적 범주를 바로 심급만이 진정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또 다른 이유가 추가된다.

 

프로이트적 개념들(concepts) 대한 라캉의 개조는 소쉬르적인 언어학적 개념화들(conceptions) 정신분석학에까지 확장하는 작업에 기초하고 있다. 이로부터 언어와 같이 구조화된”(structuré comme un langage) 무의식이라는 라캉의 중심관념이 등장하는 것이다. 반면 알튀세르에게 있어 결정적인 지점은 모순이라는 통념을 다시 취하면서도 모순이라는 통념에 프로이트로부터 가져온 해석모델들을 적용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적인 변증법적 범주들을 변형하는 것이다(물론 알튀세르의 몇몇 비판가들은 이를 마르크스주의적인 변증법적 범주들에 대한 완전한 변질로 간주할 것이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인스탄츠 지니는 다양한 의미들은 인스탄츠라는 용어 - 용어의 프랑스어 번역은 일반적으로 앵스탕스 반면, [제임스 스트레이치의] 영어판 프로이트 표준전집은 이를 agency 번역한다- 프랑스어 단어[ 앵스탕스] 또는 영어 단어[ agency, instance, insistence] 가지는 다의성을 활용함으로써 라캉과 알튀세르에게서 되살아나게 된다. 이러한 놀라운 의미론적 통일성이 어떻게 구축되는지 가까이에서 살펴보자.

 

앵스탕스라는 단어는 라틴어 instantia에서, 그러니까 동사 instare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문자 그대로 보자면 이는 무언가의 안에 자리잡다/유지하다/스스로를 붙잡고 있다”(se tenir dans) 또는 무언가의 앞에”(devant)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이 단어는 또한 우리가 반복형인 insistere(적용하다appliquer, 지속하다insister)를 머릿속에 떠올리도록 만들기도 하다[각주:8]. 이 단어는 14세기에 프랑스어와 영어에서 거의 동시에 출현하는데, 이 두 언어는 그 때부터 현대사전들(Oxford English Dictionary, 블로흐Bloch와 바르트뷔르흐WartburgDictionnarie étymologique)이 제시하는 네 가지 용례를 전개하고 이 용례들 사이를 위계화하기 시작한다. (1) “긴급함”(urgence), “압력/급박함”(pression), “급박한 요구”(demande pressante)(이 의미로부터 누군가의 반복된 간청”instances répétées으로 인해, 누군가의 간청에 따라”sur les instances 무언가를 한다는 관념이 유래한다). (2) 현재 또는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시간 내에서의 급박한 순간”(moment pressant, 영어로는 instant time). (3) 하나의 예시, 논의의 기반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하나의 논거, 또는 반대로 어떤 논증에 있어서 반대주장을 도입하기 위해 사용하는 영어의 for instance(하지만 “par exemple”를 사용하는 프랑스어에서는 이런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 (4) 제도적인 또는 은유적인 의미에서 법정에서의 행동 또는 법정 그 자체(Oxford English Dictionary에 따르면 “a process in a court of justice”)[각주:9].

 

프랑스어는 영어보다도 [(3) 제외한] 앞의 가지 용례를 많이 활용한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 현대 영어는 단어의 동사형태를 가지고 있는데(to insist, insisting), 반면 프랑스어는 특히 기술적인 의미의 명사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다[ 프랑스어 instance 동사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독일어에서 인스탄츠 프로이트적인또는 알튀세르적인맥락에서가 아니라면 오늘날 법률적인 용어로서만 사용된다. 독일어에서 가장 폭넓게 활용되었던 단어의 최초 용례는 단어의 동의어 또는 -동의어로 빠르게 대체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stehen in으로부터 유래한 Instand라는 단어이며, 단어로부터 형용사인 inständing(프랑스어로는 “de façon insistante”, 지속적인 방식의’) 유래한다. 나는 모든 용례들 가운데에 있는 불변하는 핵심이 법정 앞에서 se tenir한다(se tenir devant un tribunal) - 법정 앞의 누군가에게 우리는 어느 정도 비가역적인 효과들을 생산하면서 청구/소송서 또는 최고/독촉서를 반복적으로 전달한다- 관념이라고 주장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사실 카프카의 소설 /법정 앞에서”(이는 그의 소설 심판/재판 장으로부터 가져온 소설이다)로부터 가져온 논증이다.

 

우리는 프로이트가 이차적 토픽 개념들을 교육학적으로 제시해야만 했을 비로소 그에게 있어 인스탄츠 건축술적기능을 뒤늦게 획득하게 되었다는 점을 알고 있다(1938년에 작성되었으며 프로이트 사후 1940년에 출판된 정신분석학 개요 보라). 사실 여기에는 가지 단계가 존재했는데 각각의 단계는 점진적으로 발전하는(évolue) 사유도식을 위한 서로 다른 결합들(associations) 소환한다. 1900년의 꿈의 해석”(Traumdeutung) 이래로 프로이트는 검열” - 뿐만 아니라 욕망의 다른 표현들은 검열에 종속되는데, 검열로 인해 욕망의 표현들은 무의식 속에서 부분적으로 억압된다- 특징짓기 위해 인스탄츠라는 단어를 활용한다. 프로이트는 심지어 카프카로부터 가져온 것인 문지기라는 이미지, 허락과 금지를 가르는 문턱에 있는[각주:10]문지기라는 이미지를 활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능에 자아에 대한 감시그리고 심지어는 자아에 대한 학대라는 관념을 결합한 뒤에(편집증과 신경증적 강박에 대한 관찰이 드러내는 바로서의 감시와 학대), 프로이트는 인스탄츠라는 용어를 재발견하게 되고 이를 초자아”(Über-Ich,영어로는 Superego 번역된다)라는 관념과 결합시킨다. 초자아라는 관념은 자아를 심판하고 자아를 내부에서부터 있도록 -다양한 사회적 권위, 특히 가정 내의 아버지 또는 더욱 일반적으로는 부모(프로이트는 종종 이를 die Elterninstanz, 부모-심급으로 정의했다) 벌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의 외적 형벌과는 반대로- 자아를 분리하고 분할하는 그러한 심급으로 프로이트가 1923년에 정의했던 것이다. 하지만 단계에서, 배타적으로 초자아에만 심급 법률적이고 형벌적인 은유가 적용되는 것이며, 여기에서 심급 다른 영역들”(Bezirke) 또는 다른 정신적 장치의 체계들 관련되지 않는다[각주:11].

 

1931년의 새로운 정신분석학 강의 다른 동시대의 텍스트들(특히 불안 다루는 임상적 연구들)에서 은유는 변형되기 시작한다. 프로이트가 우리에게 기술하는 것은 주체가 행위자(agent)이자 동시에 쟁점이 되는 그러한 갈등이다. “자아 편에서는 그것(ça)”(das Es, 제임스 스트레이치에 따르면 이는 영어로 the Id 번역된다) -프로이트에게 그것 충동의 저장소 개념화된다- 으로부터 발현되는 (충족 또는 쾌락의) 무제한적인 요구(demande)라는, 다른 편에서는 초자아 - 초자아로부터 문명의 불만 유래한다- 의해 표현되는 리비도(libido) 도덕성 또는 억압에 대한 요구(exigences)라는 여러 주인들 모순된 요구들(exigences) 사로잡힌다. 사실을 말하자면 프로이트의 설명이 항상 일관된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자아 어떤 때는 주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불행한 희생자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현실또는 외부세계 요구(exigence) - 현실또는 외부세계 요구는 주체에게 있어 또한 잠재적인 불안의 원천이기도 하다- 라는 3 요구의 대표자로 심급화/장치화/대리자화”(instancié)되기도 한다. 우리는 스트레이치가 인스탄츠 영어로 agency 번역했는지 보게 되는데, 이유는 스트레이치가 보았을 이것이 정신적 장치의 구조를 (오래전에 플라톤이 그렇게 했듯이) 대칭적인 힘들 사이의 갈등에 관한 용어들로 -물론 당연히 이러한 아장스”(agence)[각주:12]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조건에서-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각주:13]. 하지만 긴급성 또는 급박함이라는 의미의 영어 instance라는 번역어가, 특히 그것(ça) 끊임없는 요구들” -초자아와 자아는 금지를 활용함으로써, 그리고 또한 방어기제를 활용함으로써 끊임없는 요구들 맞서 싸워야만 한다- 특징짓는다는 점에서, [agency 마찬가지로] 전혀 근거없는 번역어가 아니라는 점 또한 명확하다.

 

이제 알튀세르와 라캉 둘 모두를 함께 살펴보자. 모든 사태는 마치 이 두 사상가가 프로이트의 은유들을 구조에 대한 개념화와 갈등에 대한 개념화(이 두 개념화는 동일한 것이 전혀 아니다)라는 두 가지 개념화와 결합함으로써, 하지만 또한 이로부터 이 두 사상가의 제자들이 앞으로 시도하게 될 어떠한 종합의 가능성을 열어놓으면서 프로이트의 담론이 지니는 대립되는 두 가지 측면을 선택한 것처럼 진행된다.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심급들이라는 언어는 (프로이트적 과잉결정을 마르크스적 정치관계의 복잡성을 위한 모델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마르크스적 의미와 프로이트적 의미, 힘관계”[세력관계]라는 관념 또는 갈등이라는 관념을 동시에 원용할 수 있게 해주는 (무엇보다도 특히) 그 명목론적 기능을 지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엥겔스가 그 법률적 함의와 함께 활용했던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라는 표현에 대한 지속적인 참조가 알튀세르라는 이름의 이 고전주의 시대 정치철학자들의 열렬한 독자로 하여금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주권/지배(souveraineté)를 도입하기 위한 역할을 했던 유명한 질문으로 향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누가 심판자가 될 것인가?”(Quis judicabit?)[각주:14] 결과적으로 우리는 구조인과성이라는 문제설정이 생산력”(노동자는 본질적으로 이 생산력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이 역사의 동력이라고 언표하는 유물론적전제 -알튀세르에 따르면 이러한 전제는 극복할 수 없는 아포리아로 인해 그 값을 치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최종심급이라는 고독한 시간은 절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의 형언 불가능한 한 단면을 형성하는 주권자/지배자”(souverain)의 담론이라는 유령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 원인들의 과잉결정으로 인해 역사의 주권자/지배자 -이름을 가지지 않으며 또한 하나가 아니라 다수인- 가 그토록 무력하게 남아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가지게 된다. 반면 라캉은 법률적 의미의 재판과 (관용어를 통해 형성되는) 인과적 자동성 모델 사이의 역설적 결합이라는 테마를 더욱 명시적으로 원용한다. “저는 문자의 앵스탕스라고 말했는데, 만일 제가 여기에서 앵스탕스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면, 이는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 발리바르] insistance의 수준에서만큼이나 법률적 수준에서도 그 반향을 지니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각주:15] 하지만 1957년 논문의 부제, 프로이트 이후의 이성으로부터 우리는 중요한 지표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체라는 철학적 세공작업에 있어 항상 지배적이었던 칸트적 전통이 이성을 판단(jugement, 심판)비판적기능을 행사하는 법정으로 제시했던 방식을 떠올려 보아야만 한다. 이제부터 더 이상 이성이 아니라 무의식이 최고법정인 것이다. 하지만 이는 무의식이 비이성적인 또는 비논리적인 심급으로 사고되어야 한다는 점을 전혀 뜻하지 않는다. 이는 오히려 이러한 또 다른 논리”, 즉 기표(또는 문자”)의 논리 -주체는 이 논리에 예속된다. 또는 이 논리는 주체에게 담론 내에 이 주체를 위한 자리를 지정해준다- 를 표현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agency라는 영어번역어가 절반의 번역어에 불과한 것이다. 기표의 자율성과 그 권력에 관계 지어진 예속화라는 관념(이라는 프로이트적 유산)을 강조함으로써, 이 절반의 번역어는 구조인과성이라는 관념이 지닌 무언가를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자크-알랭 밀러(Jacques-Alain Miller)가 알튀세르적 정신에 따라 1966년 제안한 라캉적 이론의 형식화 내에서, 이 구조적 요소는 (번역에서는 고려되지 않은) 체계적 지표(index)라는 형태 -이 형태를 통해, 라캉이 행했던 물질성지배라는 마르크스적 통념들과의 불장난이 명확히 드러난다- 로 명료하게 해명된다. 자신의 실재라는 개념을 변형함으로써 -실재라는 개념에 상징화할 수 없기에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물(Chose angoissante) 또는 공백의 존속(insistance)을 기입하기 위해- 라캉은 이후 이러한 유형의 구조주의를 넘어서야만 했다. “앵스탕스라는 용어를 번역함에 있어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어려움은, 라캉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알튀세르에게 있어서도, 최종적인 분석에서 행동(또는 실천)과 주체성(또는 주체화) 사이의 관계라는 수수께끼가 바로 이론이 끊임없이 회귀하게 되는 그러한 아포리아를 구성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용어의 영어번역이라는 문제를 통한 우회는 장황한 주석보다도 더욱 효과적으로 이 아포리아의 전제들을 명확히 밝혀줄 수 있다.

 

주권/지배와 인과성

 

그러므로 나는 가지 보충적인 언급들을 하고자 한다(당연히 보충적인 언급들은 더욱 완성된 이론적 발전들, 그리고 특히 라캉과 알튀세르의 텍스트들 자체에 대한 더욱 자세한 인용 대상이 되어야만 것이다). 보충적인 언급들은 어떻게 이중적 구조주의 제시하는 질문을 순수하고 단순하게 제거해버리지 않으면서도, 그리고 주권/지배와 인과성이라는 가지 문제 사이의 특정한 유사성을 유지하면서도(하지만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의 거리를 취하도록 하면서), 이중적 구조주의 경향적 해체(décomposition) 나아가는 방식으로 주권/지배와 인과성이라는 가지 문제(또는 형이상학적인 아르케archè 가지 ) 사이의 긴장을 통해 이중적 구조주의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1. (프로이트-소쉬르적인) 라캉적 정식화들과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적인) 알튀세르적 정식화들 사이의 상호접근(rapprochement, 떨어져 있는 두 항을 서로 접근시키기) -이 상호접근은 내가 위에서 철학적 구조주의의 발명품의 핵심으로 지시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은 정확한 장소를, 다시 말해 물질적 지지물[즉 텍스트]을 가지고 있다. 이는 바로 라캉의 논문모음집 에크리의 출판을 위해, 그리고 이브 뒤루(Yves Duroux)와 장-클로드 밀네르(Jean-Claude Milner)와 함께 집필했던 구조의 행동’(l’action de la structure)이라는 논문을 분석을 위한 잡지”(Cahiers pour l’Analyse)에 출판했을 당시 자크-알랭 밀러가 작성했던 개념의 지표들’(l’index des concepts)이라는 텍스트이다[각주:16]. 사실 이는 하나의 지표 훨씬 그 이상의 것, 즉 체계의 인식론적 기초들, 존재론적 함의들, 임상적 처방들,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내에서의 정치적 활용들을 배치하는 그러한 체계의 재구성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의에 대한) “기표의 우위”, “실재와 상상계에 대한 상징계의 우위”, “[대타자의 - 발리바르] 자리와 문자의 물질성과 같이 특히나 문자의 앵스탕스로부터 유래하는 표현들을 외삽하거나 재해석하는 정식화들과 설명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정식화들과 설명들은 이것들이 라캉에게 있어 상징적인(또는 상징적인 것의) “최종심급의 존재를 지시한다는 점에서 명백히 마르크스주의적-알튀세르적 토픽의 도식들과의 결합의 산물이다. 더욱 정확히 말해, 이 정식화들과 설명들은 상징적 질서 내에서 실재를 상상적인 것을 매개로 언어와 제도에 종속시키는 바를, 또는 실재를 주체의 소외를 매개로 자기 자신의 거울이미지에 종속시키는 바를 지시한다. 이러한 테제는 증상, 환상(fantasme),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언표 또는 행위에 대한 모든 해석이 최종심급에서는 문자” -문자는 기표 자신의 연쇄 내에 존재하는, 그리고 우리가 결합관계(combinatoire)를 통해 기술할 수 있는 기표의 존속일 뿐이기 때문에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 의 효과성과 관련된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경제적 최종심급이 유물론적 토픽의 한 요소인 것이 아니라(이 요소가 결정적인 요소라고 할지라도) 모든 다른 심급들에게 각자의 자리를 배분하는 기능인 것과 마찬가지로, 라캉적 체계의 밀러적 재구성에 있어, “기표의 논리로서의 상징적 질서는 분석적 경험의(또는 무의식의 기능작용의) 다른 차원들(registres)배분했으며 이 차원들을 상징적 질서의 우위를 보증하는 매개자로 만들었다. 이러한 설명을 통해 우리는 한 때의 알튀세르-라캉주의자들”(과거의 나도 이에 속해 있었다)이 그 당시 자신이 어느 편에 속할 것인지를 선택하도록 강제되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2. 내가 이제부터 아래에서 언급할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길 바란다. 나는 단지 내가 아래에서 언급할 모든 것이 이론의 여지가 있는 것이라는 점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두 가지 표지를 제시해보겠다. 첫 번째 표지는 푸코의 반응인데, 푸코는 담론의 질서”(콜레주 드 프랑스의 취임강연으로 1972년에 출판되었다)에서 담론적 통제의 심급들에 대한 분석을 자신의 비판적 과업으로 삼으면서 기표의 주권/지배를 걷어내기를 자신의 구호로 제시했다. 이후에 푸코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나는 진리라는 용어를 통해 각각의 순간에 각자에게 진실로 간주되는 언표들을 선언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러한 과정들 전체를 의미한다. 절대로 최고심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각주:17] 이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푸코가 밀러, 밀네르, 레뇨(Regnault), 그로스리샤르(Grosrichard)로 구성된 인식론 서클과 행했던 1968년의 대담이다. 이 대담에서 푸코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항상 재출현하는 부재의 작용 내에서 담론의 무한한 연속성과 그 자신에 대한 비밀스런 존재를 보증하는 기능을 지니는 모든 테마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담론의 사건적 침입(irruption) 내에서부터 담론의 매순간 전체를 받아들어야 합니다() 담론을 머나먼 기원의 존재와 관련지어서는 안 되며, 대신 담론을 그 담론의 심급작용[agency라는 영어번역어를 고려한다면, 대행작용] 내에서 다루어야 합니다하지만 언표적 사건의 심급을 () 마치 그것이 독립적이고 고독하며 주권적/지배적인 것처럼 그 자체로 다루어서는 안 되며 이 심급을 (“실천적장치들 또는 제도들의 범위 내에서 - 이러한 논의는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라캉보다는 알튀세르에 더욱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담론적 본성을 지니지 않은 [-담론적] 사건들과 결합해야 한다는 관념을 강조하는 푸코에게, 밀러는 정의상 모든 제도는 기표로부터 형성되는 것이며, 이 제도에서 생산되는 기표의 사건들은 바로 그 기표의 효과라고 응답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클로드 밀네르가 처음에는 1995년 출간한 명료한 저작”(L’Oeuvre claire)에서, 그 다음으로는 2002년 출간한 구조의 대항해”(Le Périple structural)에서 단지 구조주의만이 아니라 또한 하이퍼-구조주의라고 이름 붙였던 무언가를 두 가지 공리에 연결 지음으로써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quelconques) 요소들로 만들어진, 다시 말해 구조 자신이 지니는 문자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구조만으로도 효과들을 생산하기에 충분하다는 공리, 그리고 일반적”(quelconque) 구조의 행동(agency)이 생산하거나 초래하는 일반적이지 않은”(non quelconque) 효과가 바로 주체의 구성이며 그 표현방식들의 규정이라는 공리. 이 지점에서 밀네르가 말하지 않는 것은, 주체들을 주권적인/지배적인 방식으로(souverainement) 이 주체들의 나타남과 사라짐의 법칙들에 예속시킨다는 사실로부터, 구조(달리 말해 기표의 연쇄)가 모든 사회적 실천을 포섭한다는 점, 또는 사회적 형성물들무의식의 형성물들의 아종(sous-espèce)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이로부터 내가 예고했던 번째 표지가 등장하는 것인데, 그렇지만 표지는 수동적인 표지이다. , 알튀세르가 구조주의를 거부했다는 , 알튀세르와 그의 가장 충실한 제자들이 담론이론이라는 그들 고유의 기획을 포기했다는 , 그리고 최종심급 대한 고전 마르크스주의적인 해석으로 후퇴했다는 점이라는 수동적인 표지. 하지만 고전 마르크스주의적인 해석은 기표적 연쇄의 위상학”(라캉의 용어) 아닌 토픽”(마르크스에게 적용된 프로이트의 용어)이라는 질문을 계속 되새김질할 때를 제외하고는 알튀세르를 이론이 없는 상태 남겨둔다. 하지만 이는 -담론적인 하나의 심급을 최종심급으로 만드는 자의적인, 아니 사실은 (이데올로기적이라고까지 말하지는 않더라도) 정치적인 결정과 관계된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알튀세르의 비판적인 사이드스텝 - 비판적인 사이드스텝을 통해 알튀세르는 최종심급의 고독한 시간은 오지 않는다”(“마르크스를 위하여”), 다시 말해 물질적인(경제적인 또는 다른) 최종심급의 존재 또는 심급 부재하는 원인 존재 또는 심급과 다른 것이 전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정통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스스로를 거리둘 있게 된다- 의미를 약화시키게 된다(이것이 우리가 말할 있는 최소한의 것이다).

 

3. 제대로 분석을 위해서는 지점에서 우리에게 존재론의 차원과 정치학의 차원을 절합하는 그러한 계보학이, 다시 말해, 앞잡이(suppôt)이자 동시에 (라캉이 말하듯) 가정된 (supposé)이자 (알튀세르가 말하듯) 담지자(Träger),다시 말해 사회적 구조를 구성하는 관계들 떠앉고 있는 ”(porteur) 주체라는 모호한 존재와, 기표의 법칙이든 사회효과이든 이러한 것들에 예속된 존재( 예속된 존재가 적절한 시기가 도래했을 봉기할 있다고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항상 예속을 동반하는 그러한 봉기란 결국 도대체 무엇인가?) 동일화하는 방식으로 인과성 담론과 주권/지배 담론을 절합하는 그러한 계보학이 필요할 것이다. 다른 곳에서 이를 소묘하기 위한 시도를 행한 있지만[각주:18], 아마도 나는 우리가 홉스에게 부여해야 핵심적인 중요성을 여전히 충분히 지적하지는 않았던 같다. 왜냐하면 바로 홉스가 주권자를 최종심급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권력 또는 원인으로 지시할 뿐만 아니라(“누가 심판자가 것인가?”), 또한 바로 홉스가 ( 누구도 자기 자신의 대표자 없는 방식으로, 또는 대표하는 내에 있는 대표되는 자의 존재가 또한 대표되는 자신의”en personne 부재이기도 방식으로) “주체 대표하는 자와 대표되는 자의 자리들 사이로 분배하는 것으로 이해된 표상”(représentation, 재현 또는 대표) 내에서 인과성과 주권/지배의 결합을 설정하는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라캉에게로, 그리고 라캉과는 다른 방식으로 알튀세르에게로 되돌아오자. 우리는 다음의 표현 전체를 잘 기억하고 있다. “기표, 그것은 다른 기표를 위해 주체를 대표하는 것이다.”[각주:19] 밀네르는 이러한 라캉의 발언(logion)이 기표들의 연쇄 -이 기표들의 연쇄가 바로 문자의 앵스탕스이다- 만으로 주체의 출현을 생산하는 바로서의 은유와 환유의 작용 이외의 다른 것이 전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르바라 카상은 이것이 담-(dis-cours, 흐름으로부터의 이탈) 내에서의 시간의 흐름인 환유가 환유의 정지 또는 실추를 표상하는 은유에 대해 지니는 우위 또는 우선성을 특징짓는 의미만을 지닌다는 점을 강조한다[각주:20]. 물론 이러한 설명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나는 은유가 이 환유의 우위 또는 우선성에 대해 반격을 가한다고, 그리고 이것이 일반적으로 기표게임의 주인”(le maître du jeu, 작용의 주인)일 때[각주:21], 하지만 현실에서 셋 가운데에서 [유일한] 일자가 되는(이 때 이 셋이란 세 명의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의 육체, 즉 상징적 육체, 상상적 육체, 그리고 실재적 육체를 뜻한다) 그러한 특별한 속성을 지니는 주인기표가 돌발할(surgit, 급작스럽게 출현함) 때 이러한 반격이 이루어진다고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는 왜 이 주인기표가 돌발할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 이유는 구조가 아무리 능동적이라고 할지라도, 이 구조는 환상(fantasmes)을 생산하는 한에서만 삶 속에서 효과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와 그 이외의 다른 정신분석가들과 마찬가지로, 라캉은 남성적 환상이든 여성적 환상이든, 낮의 환상이든 밤의 환상이든 이러한 환상이 최종심급에서, 다시 말해 다양한 우회와 대체를 통해서, 팔루스에 의해서만 자신의 자리를 배치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이것이 극단화된 팔루스중심주의(phallocentrisme)와 팔루스중심제(phallocratisme)를 반영하며 이 안에 이미 충분한 진실이 존재한다(there is enough truth in this)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또한 팔루스의 의미’(1958)[각주:22]라는 논문의 마지막 부분 전체에서 라캉이 육체에 통합되고 육화된 [팔루스라는] 기표가 아닌”, 하지만 이를 가지고 있는또는 가지고 있다고 믿는 수컷들의 우스꽝스러운 행진에 관한, 그리고 또한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항상 그들의 유혹을 위한 시도 속에서 등장하는 여성적인무언가에 관한 일종의 아나키즘적 전도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특히 한 번 더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문자의 앵스탕스의 테제들과 세미나 앙코르”(1972-1973)의 테제들 사이에서 심원하게 변화하는 바로 되돌아와야만 한다. 아마도 이러한 변화는 여성해방운동단체 MLF(Mouvement de Libération des Femmes)와의 언쟁의 간접적 효과일 텐데, 나는 이를 기표의 존속 또는 앵스탕스로 해석하기보다는, 이번에는 제기된 질문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급박한 요구라는 의미에서의 기표에 대한, 기표를 향한 존속 또는 앵스탕스로 해석하고 싶다. 이 모든 것은 두 가지 도식 사이에서 작동할 것이다. 첫 번째는 소쉬르가 나무에 관한 자신의 도식에서[각주:23] 삭제해버렸던 [한 기표와 다른 한 기표 사이의] 이항대립을 통한 의미작용의 구조를 다시 드러나게 만들기 위해 문자의 앵스탕스라는 논문에서 소쉬르의 이러한 삭제를 교정하며 제시하는 도식이다. 의미작용의 이항대립적 구조를 소쉬르가 삭제해버렸기 때문에, 라캉은 소쉬르의 이러한 삭제를 [소쉬르 자신의 우화를 통해] 교정함으로써 기차에 올라탄 남자와 여자 두 명의 아이들이 [남성칸과 여성칸 사이의 구분이 없는, 즉 동일한 기의의] 화장실 문 앞에서 각자가 남성칸여성칸”[이라는 서로 다른 기표]에 들어가고 있다고 믿는다는 우화를 통해 문자의 기초적 효과를 예증한다. 여기에서 주체는 그러한 선택이 차이가 없으며 자의적이고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남성 또는 여성을 선택하고 있다고 스스로 가정할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세미나 앙코르의 두 번째 도식(이 도식은 다이어그램의 형태로 표현되기도 하고 표의 형태로 표현되기도 한다)이 존재하는데, 이 세미나 앙코르에서 성차(이 성차의 근본적인 비대칭성은 여성적관점, 팔루스적 기능의 유효성의 영역 바깥에 떨어지는 전체-아님(pas-tout) 또는 나머지의 관점에서만 가시화될 수 있다)는 역할 또는 자리를 배분하는 것, 그리고 더욱 심원하게는 사랑과 향유 이 둘 모두와 동시에 관계맺는 것으로서의 각각의 주체를 -두 가지 유형의 향유사이에서의 주체 자신의 분리를 통해- 쪼개는 것이다[각주:24]. 이 두 번째 도식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상 유일하면서도 (다이어그램의 위쪽 칸들에 제시된) 의미화의 이중적 대립으로 인해 극도로 복잡한 기의가 기표 내의 동요, 즉 자리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주체들의 비지속적 순환으로서의 성적 비-관계의 증명과 다른 것이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비지속적 순환은 논리적으로 자기-제거적인, 그러니까 소피스트적인 것이다(이 지점에 있어 바르바라 카상의 주장은 완전히 옳다). 문자의 앵스탕스는 어떠한 의미에서 자기 자신에게 반하여, 어쨌든 이 문자의 앵스탕스가 처음에 허락했던 주권적/지배적해석에 반하여 되돌려지는 것이다.

 

알튀세르가 처해 있는 앵스탕스에 관한 상황은 라캉이 처해 있는 상황보다는 더욱 불명확한데, 왜냐하면 알튀세르의 텍스트들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라캉의 텍스트들보다 더 많은 해석을 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튀세르에 관한 논의가 라캉에 관한 논의보다 덜 흥미로운 것은 전혀 아니다. 알튀세르는 최종심급이라는 고독한 시간은 오지 않는다라는 언표에 함의되어 있는 구조적 가설을 유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몇 이들은 이에 대해 오 맙소사, 그 강력하고 대담한 구조적 가설을 유지하지 않았다니!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알튀세르가 잃어버린 혁명을 되찾기를 원했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알튀세르는 68혁명 이후의 글들 -이 글들 대부분은 미간행된 상태로 남아있다- 에서 혁명을 유효한 부재, “공백적존재(présence “vide”)로 또는 심지어 어떠한 공백 존재(présence d’un “vide”)로 만들었던 바를 포기했다고 말해야 정당하다[각주:25]. 그리고 마찬가지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다시 말해 주체적) 실천에 대한 이중적 기입 -(심급들가운데 하나와 같이) 구조 내에, 그리고 동시에 구조가 자기 자신을 이론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장소인 구조의 바깥에, 즉 구조의 외부내에 또는 구조의 경계에 - 이라는 테마계를 주변화시킨다. 이로부터 우리는 알튀세르가 최종심급에 관한 자신의 질문이 지니는 문제점에 관해 탐구하기를 포기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질문은 혁명이 혁명가들에 의해 행해진다는 관념인데, 여기에서 상황은 이 혁명가들에게 혁명의 담지자(porteurs)또는 대표자라는 기능을 부여하며, 그 기능이 자연적인능력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누가 또는 무엇이 이 혁명가들에게 그러한 기능을 지시하는가라는 문제가 남게 된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개인의 주체로의 호명이라는 유명한 테마계를 발전시키기도 했는데, 이 테마계의 핵심은 우리가 알다시피 주체의 상상적 분열(dédoublement imaginaire)이라는 관념, 즉 소문자 주체가 주권적/지배적인 대문자 주체, 즉 주인(이는 구체적으로 실존하는 주인일 수도 있지만 또한 관념일 수도 있다)을 투사한다는 관념 -이러한 투사된 대문자 주체, 즉 주인에 의해 소문자 주체는 자신의 존재와 행위로부터 이에 응답하기 위해자신을 스스로 예속시킨다- 이다. 그리고 우리는 (불명예스럽게도) 알튀세르에 의해서는 거의 소묘되지 않은 또 하나의 지표를 발전시키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작업 덕분에 이것이 항상-이미 나쁜 주체 -이 나쁜 주체 고유의 존재양태과 존속양태는 구조의 행동을 영원히 실패하도록 또는 불발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의 출현을 위한 자리를 남겨 놓는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각주:26]. 버틀러는 호명을 대항-호명의 가능성과 관련짓는데, 이 대항-호명과 관련해서는 결국 이러한 대항-호명이 어떠한 종류의 수행성을 대표하는지, 또는 오히려 이 대항-호명이 다음과 같은 유형의 대항-호명의 정식에 따라 어떻게 자기 자신을 의미화의 수많은 가능성들 사이에서 순환시킬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가 남는다. “위대한 대문자 주체 또는 위대한 대타자, 너는 존재하지 않아. 너는 우리들처럼 좆도 아니야.”, “너의 그 [대문자] 법이라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않아. 그러니까 우리는 너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해.” 또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는, “우리는 또 다른 [대문자] 주인의 호명을 받았어.”(야훼가 아니라 황금송아지의 부름을, 카이사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름을, 국가가 아니라 혁명의 부름을)[각주:27] 바로 이것이 최종심급을 폐지하는 두 가지 양태, 즉 무의미 속으로 사라지지 않으면서도 구조의 우위또는 그 주권/지배를 형성했던 바를 구조가 다시 한 번 상실하도록 만드는 두 가지 방식인 것이다. []

 

  1. 옮긴이 주: 이 ‘문자의 앵스탕스’에서 ‘문자’, 즉 lettre에는 편지라는 뜻도 존재한다. 라캉의 그 유명한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에서 이 편지가 바로 lettre이다. [본문으로]
  2. 각주: 앨런 쉐리든(Alan Sheridan)의 번역과 같이 말이다. The Agency of the Letter, in Jacques Lacan, Écrits, NewYork, W.W. Norton, 1977. [본문으로]
  3. 각주: “에크리” 전체의 번역과는 독립적으로 행해진 이 논문의 최초 미국 번역은 역으로 이 두 번째 측면을 우선시하고 있다(The Insistence of the letter in the unconscious, in “Structuralism”, Yale French Studies 특집호, 1966년 9월, Jacques Ehrmann 편집). 하지만 결국 “에크리”의 가장 마지막 번역자인 브루스 핑크(Bruce Fink, New York, W.W. Norton 1977)는 라캉의 주석들을 활용함으로써 이 프랑스어 단어가 영어 단어로 “귀화”하는 긍정적 효과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프랑스어 단어 앵스탕스(instance)를 다시 모방했다. 그러므로 핑크의 “에크리” 번역에서 이 논문의 제목은 다시 The Instance of the Letter in the Unconscious, or Reason since Freud이다.] [본문으로]
  4. 각주: Althusser Louis, Contradiction et surdétermination (Notes pour une recherche), La Pensée, n.106, 1962. Pour Marx, Paris, François Maspero, 1965에 다시 실림. [본문으로]
  5. 각주: Friedrich Engels, 1890년 9월 21일 조제프 블로흐(Joseph Bloch)에게 보내는 편지, “Nach materialistischer Geschichtsauffassung ist das in letzter Instanz bestimmende Moment in der Geschichte die Produktion und Reproduktion desw irklichen Lebens” (Marx-Engels, Werke, Band 37, Berlin, Dietz Verlag 1967, p. 463). [본문으로]
  6. 각주: 특히 “‘자본’을 읽자”라는 집단작업에 실린 알튀세르의 텍스트들을 보라. Lire le Capital, Paris, François Maspero, 1965 (재판, PUF, “Quadrige” 총서, 2008). [본문으로]
  7. 옮긴이 주: 토픽 또는 장소론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윤종희 교수와 박상현 교수 등이 공저한 “알튀세르의 철학적 유산”, 공감, 2008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8. 옮긴이 주: 옮긴이 앞글에서 잠깐 설명하긴 했지만 프랑스어 insister의 뜻을 옮긴이가 이 논문과 관련하여 조금 정리해 나열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끈기있게) 계속하다, (끊임없이) 지속하다,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강조하다, 요구하다, 간청하다, 강요하다, 고집하다, 역점을 두다, 주장하다 등등. 물론 이 논문과 관련하여 핵심적인 의미는 (끊임없이) 지속하다 또는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다. [본문으로]
  9. 옮긴이 주: 이 네 번째 의미에 따라 앵스탕스를 한국어로 옮기면 바로 ‘심급’이다. [본문으로]
  10. 옮긴이 주: 이 ‘서 있는’의 원어는 se tient, 즉 se tenir이며, 이는 위에서 이미 지적했듯 무언가의 “안에 자리잡다/유지하다/스스로를 붙잡고 있다”(se tenir dans) 또는 무언가의 “앞에”(devant)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본문으로]
  11. 각주: 나의 연구 Freud et Kelsen 1922. L’invention du Surmoi를 보라. Étienne Balibar, Citoyen Sujet et autres essais d’anthropologie philosophique, Paris, PUF, 2011에 다시 실림. [본문으로]
  12. 옮긴이 주: 아장스, 즉 agence는 영어 agency에 대응되는 프랑스어 단어이다. agency에 대응되는 프랑스어 단어를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일부러 옮기지 않고 음독한다. [본문으로]
  13. 옮긴이 주: 정신적 장치는 프랑스어로 appareil psychique, 영어로 psychic apparatus이며 영어의 agency는 행위자성이라는 뜻 이외에도 관리기구, 관리장치 또는 대리기구라는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일상에서 연예인들이나 스포츠 선수들의 소속사를 ‘에이전시’라고 말할 때의 그 의미이다. '에이전시'는 연예인 또는 스포츠 선수를 관리하는 장치/기구이자 그들을 대리하는 장치/기구이다. [본문으로]
  14. 각주: 특히 Thomas Hobbes, Léviathan, 21장 (“Of the Liberty of Subjects”)를 보라. [본문으로]
  15. 각주: Jacques Lacan, Je parle aux murs, Paris, Seuil, 2011, pp. 26-27. [본문으로]
  16. 각주: 이 점에 관해서는 피터 홀워드(Peter Hallward)와 녹스 페든(Knox Peden)의 책임지도 하에 킹스턴 대학의 현대유럽철학연구센터(Center for research on Modern European Philosophy)의 이름으로 최근에 행해진 “분석을 위한 잡지”의 고증 재판본을 참조하길 바란다. 온라인상으로는 이 연구센터의 홈페이지(http://cahiers.kingston.ac.uk/books.html)를, 출판본으로는 버소 출판사(Verso, Londres, 2012)의 출판본을 참조할 수 있다. [본문으로]
  17. 각주: Michel Foucault, “Kenryoku to chi” (“Pouvoir et savoir”, 1977년 10월 13일 파리에서 S. Hasumi와 행한 대담), Umi, 1977년 12월, Michel Foucault, Dits et Écrits III. 1976-1979, Paris, Gallimard, 1994, p. 407에 실림. [본문으로]
  18. 각주: 특히 “유럽철학 어휘사전”에 기고한 “주체” 항목(알랭 드 리브라Alain de Libera와 바르바라 카상과 함께 집필)을 보라. [본문으로]
  19. 각주: 이 표현은 특히 “에크리”에 실린 ‘주체의 전복과 욕망의 변증법’에 등장한다. Jacques Lacan, Écrits (1966), 재판, Paris, Seuil, 1999, 2권, p. 299. [본문으로]
  20. 각주: Barbara Cassin, Jacques le Sophiste. Lacan, logos et psychanalyse, Paris, Epel, 2012, pp. 175-176. [본문으로]
  21. 각주: “대타자라고까지는 아니라 해도 타자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무언가와 관련하여, 바로 그가 게임의 주인이며 당신은 가정된 이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주인에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당신은 주인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만큼 당신 스스로 그 의미를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Jacques Lacan, Je parle aux murs, 앞의 책, pp. 104-105. [본문으로]
  22. 각주: Jacques Lacan, Écrits, Paris, Seuil, 1966, pp. 685-695에 실림. [본문으로]
  23. 각주: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차용한 “나무에 관한” 도식. 1957년의 Payot판이 존재하며, 1995년 재판의 경우 99쪽이다. 이 개념에 관한 이러한 “예증”에서 라캉은 소쉬르가 “대립”을 통해 기표를 정의했던 자신의 사고 -구조주의자들은 이후 이 정의를 일반화시킬 것이다- 를 어느 정도는 “망각”했다고 지적한다. [본문으로]
  24. 각주: 예를 들어 우리는 “앙코르”(세미나 20, 1972-1973, Paris, Seuil, 1975)의 “성구분 도식”을 참조할 수 있다. Alain Badiou & Barbara Cassin, Il n’y a pas de rapport sexuel. Deux leçons sur “L’étourdit” de Lacan, Paris, Fayard, 2010에 실린 바르바라 카상의 논평을 보라. [본문으로]
  25. 각주: 나는 1972-1976년의 유고집 “마키아벨리와 우리”는 고려하지 않고 있는데, 사실 이 텍스트는 (프랑수아 마트롱François Matheron이 우리에게 훌륭히 설명해 주었듯이) 완전히 다른 기반 위에서 영어 agency 또는 프랑스어 agence와 그것이 공백과 맺는 관계라는 질문을 다시 다루고 있다. La récurrence du vide chez Louis Althusser (Louis Althusser, Machiavel et nous, Paris, Éditions Tallandier, 2009에 다시 실림)을 보라. [본문으로]
  26. 각주: Judith Butler, The Psychic Life of Power. Theories in Subjection,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 4장: “Conscience Doth Make Subjects of Us All”, p. 106 이하. [본문으로]
  27. 옮긴이 주: 그러므로 알튀세르의 ‘호명’ 개념을 항상 부정적인 의미의 예속적 호명으로만 사고하는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민주주의나 자유, 또는 평등이 호명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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