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인-무브

  


 

스스로를 믿는 자의 분노

『시스터 아웃사이더』 서평.

(오드리 로드, 주해연·박미선 옮김, 후마니타스, 2018)



길혜민(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교차성에 대해서라면 SNS를 통해 눈동냥으로 배운 것, 웹진에 올라왔던 크랜쇼의 논문이 앎의 전부이다. 그런 상태에서 오드리 로드의 책 『시스터 아웃사이더』를 읽었다. 아직도 교차성에 대해서 자신있게 말하기 어려운 정도의 지적수준이지만 이 책을 통해서 나는 페미니즘적 감정 사용법에 대해서 지도받은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특정 젠더가 우월하게 전제되어 있는 사회에서 감정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감정 억압의 기제에 대응할 힘을 준다. 때때로 우리는 감정이야말로 이성적이고 논리적 대응보다 갖춰져야 하는 계기라는 것을 쉽게 잊고 살았던 것 같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정의하지 않으면,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환상에 산 채로 잡아먹히게 될 거란 걸 알게 됐다” (242쪽)고 오드리 로드는 말했다. 이때 그녀가 지적한 환상은 그럴 듯한 것으로 기능하여 삶을 살만한 것으로 만드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젠더, 인종, 계급에 대해서라면 ‘환상’은 지배와 피지배 구도를 지켜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알다시피 환상은 ‘여자다움’, ‘흑인답게’ 등등의 ‘~다움’을 끈질기게 붙들고 다니며 왜곡된 인식의 틀을 자연적인 것으로 보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제와 거리가 먼 이미지들을 능동적으로 떠받들게 만드는 것이 오드리 로드가 지적한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성찰하고 이에 대하여 표현하지 않으면 ‘나’는 타인에 의해 정의 되는대로 남겨진다. 이미 보부아르가 『제2의 성』에서 여성이 ‘제1의 성’에 대하여 타자로서 정의되고 취급되었다고 한 지적에서 우리는 이런 지혜를 얻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나’는 보여지는 존재로 ‘~다움’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말해야 한다. 당연히 스스로 말하기 위해서 필요한 의식적 과정은 ‘나’와 맺는 관계일 것이다. 오드리 로드는 ‘나’와 맺는 관계에 대하여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성애’를 잘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the sexual’이라고도 쓰는 ‘성애(오드리 로드는 그리스어의 에로스를 참고한다)’는 ‘섹슈얼리티’와는 다른 결의 단어이다. ‘성애’는 “카오스로부터 태어나 창조력과 조화”하는 “여성의 생명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또한 각각의 인간이 자신의 내면과 관계를 맺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성애’는 영적인 면과 정치적인 면을 연결해주는 다리를 구축한다. 


“즉 우리 안의 가장 깊고 강력하고 풍요로운 것을 신체적·감정적·심리적으로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 즉 가장 깊은 의미에서의 사랑을 향한 열정이 바로 성애이다. 피상적인 수준을 넘어 깊은 숙고로부터 나온 표현, 즉“내 느낌이 맞아”라는 표현은 성애의 힘을 진정한 앎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 느낌이이야말로 우리가 진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강력한 등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74쪽, <성애의 역할>)


  내가 나의 경험을 믿는 것, 타인에 의해 강요받지 않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는 건 오드리 로드를 따르자면 ‘성애’다. 모두 알다시피 – 아니 이제 알게 되어도 무방하지만 – 오드리 로드는 흑인, 사회주의자, 페미니스트, 암환우, 레즈비언이면서 동시에 백인 전남편과의 결혼에서 두 아이를 출산한 여성이다. 단 한사람일 뿐인데도 오드리 로드라는 이름은 이토록 복잡한 정체성의 태피스트리로 이루어져 있다. 만약 자신의 경험을 스스로 믿을 수 없었다면 그녀는 위의 것 중에 단 하나도 자신의 것이라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살았던 세계는 백인, 자유주의자, 가부장제적 가족, 건강한 신체, 이성애자가 아니라면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존중받지 못 하는 교차적 억압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오드리 로드’로 스스로 살아가기 위해 투쟁해왔던 연대의 기록을 읽으며 나는 동시에 최근에 읽었던 시의 이미지에 붙들려 있었다. 


창문에 돌을 던졌는데

깨지지 않는다


생각날 때마다 던져도 

깨지지 않는다


밤이면 더 아름다워지는 창문


환한 창문에 돌을 던져도

깨지지 않는다


어느 날엔 몸을 던졌는데

나만 피투성이가 되고

창문은 깨지지 않는다


투명한 창문

사람들이 모두 그 안에 있었다


                강성은, 「채광」, 『Lo-fi』, 문학과 지성사, 2018.


  시를 읽기 전, 맹렬히 밀려오던 청색 바닷물이 하얗게 부서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낮고 연약한 것을 한숨에 날려버릴 수 있는 자연을 보고 있던 곳은 높고·아름답고·안전했다. 지금 이 작품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시와 어울리지 않는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어 느닷없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시집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었다. 

  사실, 단번에 ‘돌’이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했기에 불편했던 것 같다. ‘나만 피투성이’가 됐지만 ‘창문이 깨지지 않았다’는 부분에서 갑자기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이 시가 던진 이미지와 문장이 나에게 돌아와 ‘페미니즘’이 창문을 깰 수 없다고 하는 해묵은 절망을 반복하려는 독법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절망적인 의식을 확인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럼, 내 인식 때문에 나는 다시 한 번 더 절망스러워하면 될까. 하지만 이 순간에도 오드리 로드는 경고한다. 


여러분의 죄책감이든 저의 죄책감이든 저로서는 그것을 창조적으로 활용할 방법이 없습니다. 죄책감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면서도 하지 않을 때 쓰는 방편, 분명한 선택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에서, 나무를 쓰러뜨리고 땅을 뒤집어 놓는 폭풍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그저 시간이나 좀 벌어 보겠다고 쓰는 방편일 뿐입니다.(224쪽,<분노의 활용>)


  죄책감이라고 정확히 떠올리지는 않았지만 사실 오드리 로드의 말에 따라서 해석하자면, 그 시를 읽어낸 필자의 습관은 죄책감을 한켠으로 견인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세계가 억압하고 있는 논리에 따라서 손을 놓고 절망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위해서, 페미니즘을 계속 공부해나가면서 내가 분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통찰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나는 오드리 로드가 인도하는대로, 분노로 시작하여 죄책감에 머물지 않고 이 시를 다시 읽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오드리 로드의 글을 읽고 ‘가부장제’(또는 ‘가부장제’에서 비롯한 이성애중심주의)라 가정했던  ‘창문’의 정체를 새로 정할 수 있었다. “우리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모든 여성이 똑같은 억압을 겪는다고 하는 것은 가부장제의 수많은 도구들을 고려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여성들도 그런 도구들을 부지불식간에 서로에게 들이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이”(95쪽)다 라고 오드리 로드는 정확히 지적한다. 흑인 여성이 겪는 문제는 크랜쇼가 표현했듯 “교차로에서 네 방향 모두로 오고가는 교통 흐름"[각주:1]과 같이 한 가지 방향만을 문제 삼아서는 충분하지 않다. 이성애중심주의 페미니즘, 이성애중심주의를 기각한 페미니즘, 인종적 혐오에 포위된 페미니즘, 세대론에 갇힌 페미니즘 등등 깨지지 않아 좌절의 증거가 될 만한 ‘창문’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 오드리 로드의 입장에서 ‘창문’을 바라보는 건 어떨까. 오드리 로드가 끝없이 ‘창문’에 돌을 던져왔다는 것은 자명하다. 오드리 로드는 페미니스트, 레즈비언, 흑인 여성, 암환우, 백인 여성 파트너와 사는 흑인 여성이다. 1977년 거절했다가 1981년 미국여성학회 연례 학술대회에서 연설한 일화, “메리 데일리에게 보낸 공개 서한” 등은 백인 이성애자 중심의 페미니즘에 던진 돌이었다. 이에 따라 그녀가 겨냥한 ‘창문’ 안에 있던 사람들을 다시 정의해야 하지 않을까.

  ‘창문’ 안에는 백인 여성이 있었을 것이다. 이성애주의자인 여성이 있고, 건강한 싱글 여성도 있다. (가부장제도 당연히 포함된다 그리고 유색인종이지만 이성애자이며 건강한 싱글 여성인 나도 포함된다) 이처럼 교차성의 문제제기로부터 우리는 ‘창문’ 안의 사람들이 되지 않기가 어려울 것이다. 오드리 로드의 감정이 촉발하며 밝혀진 나 그리고 당신의 자리, 나와 당신이 그녀의 ‘창문’ 안에 있을 수 있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때로는 부끄러움과 죄책감도 따라올 것이다. 

  (오드리 로드 식으로 또는 은유적으로 말해서) 흑인 여성은 흑인 여성의 눈을 바로보지 못한다. 서로에게 분노하기 때문이다. 내가 부정하고 지우려는 모습이 상대 흑인 여성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워져야 하는 내 모습, 그 모습을 가진 존재를 혐오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흑인 여성)가 아니다. 억압받는 집단은 서로를 미워하도록 조정되었다고 말한다. 우리(흑인 여성 또는 여성)가 분노해야 할 ‘창문’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있도록 서로의 눈을 보자고 그녀는 제안한다. 혐오에 익숙해져 이미 서로의 내면은 아프지만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고도 말한다. 지식, 사회, 역사는 지우려고 했으나 지울 수 없는 자신들의 존재를 말이다. 


그토록 많은 혐오를 겪고 살아남았으면서도 그것을 계속 견디며 살아가는 존재가 도대체 흑인 여성 말고 또 있을까? (291쪽)

이토록 맹렬한 적대감을 온몸으로 흡수하면서도 여전히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는 인간존재가 또 있을까? (293쪽)

이들은 매일 혐오를 밥 먹듯 먹고 자란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충분히 흑인답지 않다는 이유로, 누군가 꿈에 그리던 여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즉 내가 나라는 이유로. 누구나 이 같은 혐오를 계속 겪다 보면 결국 내 적의 혐오를 내 친구의 사랑보다 더 중시하게 된다. 그 혐오에서 바로 분노가 생겨나며 분노는 강력한 연료가 된다. (295쪽,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교차적인 억압 속에서 겪을 수 있는 혐오란 무엇인지 경험하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여성 이민자 유색인종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자. 젠더, 인종, 국적, 종교 등이 개입하며 이는 실제로 수많은 유색인종의 처지에 가까운 정체성에 해당한다. 국경을 넘는다는 것, 또는 난민의 지위를 얻게 된다는 것은 역사에 내재된 혐오와 지배의 시간을 개인의 자격으로 짊어지고 가는 일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역사의 오류를 특정 인종, 젠더, 세대가 혐오로 대신 받아내기를 요구하는 비틀어진 '환상'에 대하여 분노해야 한다. 

   분노는 소중한 것을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되찾는 투쟁의 첫 감정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도 중요하다. 단순히 주적인 가부장제로만 삼았던 ‘창문’, 이것의 복잡성을 새롭게 바라볼 용기를 오드리 로드는 분노라는 감정을 통해 전해준다.

 

 


  1.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웹진 ‘인무브’ 페미니즘 번역팀 제공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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