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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벌새>가 보여주는 여성 서사의 개방성: 저 남자 왜 울어?



단감



 



여성의 이야기에서 남성은 어떤 역할을 맡을 수 있을까? 끝끝내 쓰러뜨려야 할 적일 수도 있고, 적당히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나 승리의 결과로 따라오는 트로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다루든 ‘여성 서사답지 못하다’는 문제제기가 따르기 십상이다. 남성이 적이면 ‘남성에게 맞서는 것도 결국은 남성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일 뿐’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남성이 성적 대상으로 등장하면 ‘여성이 끝내 남성과의 이성애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야기’라는 평을 들으며, 남성이 동지로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 이런 논쟁을 피하려면 남성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 편이 가장 안전한 선택지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작년에 한국에서 호평을 받은 여성 서사 중 남성 캐릭터를 특징적으로 다뤄 화제가 된 작품이 있었다.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이다. <벌새>는 중학생 은희가 집, 학교, 학원 등을 오가며 겪는 일상적 경험을 세밀히 묘사하며 1994년 서울을 살아가는 여성 청소년의 삶의 의미를 탐구한 작품이다. 주인공이 독립된 주거를 마련하기 어려운 중학생인 만큼 같이 사는 가족이 중요한 비중으로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아빠와 오빠에 대한 인물 묘사가 관객들 사이에서 논점이 되었다. 요약하면, 남성 인물이 쓸데없이 다면적이라는 것이다. 아빠와 오빠가 가정폭력의 가해자이면서도 은희와 언니 수희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 유일하게 울음을 터뜨리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울음은 여러 지면에서 ‘가부장제는 남성들마저 억압한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해석되었다[각주:1]. 이를 통해 가부장제의 한계를 다층적으로 그려내는 한편, 남성 인물까지도 너그럽게 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울음이 ‘가부장에 대한 이해’라면, 94년을 사는 여성 청소년을 탐구하는 영화의 주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돌출적인 사건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중학생의 삶과 내면을 집중적으로 다룬 뛰어난 여성 서사로 평가받은 영화에서조차 남성 인물들은 사회에서 남성이 겪는 문제를 토로한다는 점에서 여성 서사의 지향에 융화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벌새>에서 남성 인물이 가지는 의미를 보다 자세히 추적하면서, 그것이 주인공 은희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중심으로 텍스트 내적 논리를 면밀히 검토해보자 한다. 또한 이 남성 인물들과 은희가 맺는 관계가 만들어내는 여성 서사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서도 살펴보겠다.

  <벌새>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주인공 은희가 사회와 관계 속에서 자신이 머물 곳을 끊임없이 찾아다니는 이야기이다. 은희가 자신이 안심하고 머물 곳을 마련하지 못했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가 소외된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적으로 여성이자 청소년이고, 집에서는 일하느라 바쁜 부모 밑에서 무시당하는 막내딸이며, 학교에서는 공부 안 하고 놀러 다니기나 하는 불량학생이다. 자신이 어디서도 있으나마나 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그는 엄마나 선생님, 혹은 또래 친구의 사랑이나 관심으로 자신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 그런데 귀 밑에 생긴 혹을 제거하는 간단한 수술을 받기 위해 아빠와 함께 병원에 갔다가, 갑자기 병원 복도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아빠의 모습에 은희는 당황한다. 문구점에서 도둑질을 하다 잡힌 은희를 경찰서에 보내겠다고 주인이 협박할 때에는 관심도 없던 아빠였기에 더욱 그렇다. 그리고 등굣길에 성수대교가 무너져 사고를 당한 줄 알았던 언니 수희가 무사히 집에 돌아왔을 때, 말없이 저녁을 먹던 식탁에서 갑자기 오빠가 울음을 터뜨리던 장면도 이와 비슷하다.

  나는 이 장면이 흔히 회자되는 바와 같이 ‘가부장제 하에서는 남성들도 억압을 받는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득권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행사하느라 겪는 고충을 헤아리는 것은 그 권력체제를 비판하는 논리가 아니라 강화하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가정이 아니라 다른 조직에서는 가부장적 질서의 약자일 수 있고, 그 조직을 비판하는 맥락에서는 아버지도 가부장제 하에서 억압을 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빠와 오빠가 권력자인 가정에서 자신의 권력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은, 아빠와 오빠가 가부장제에 거리를 두는 계기로 작용하지 않는다. 가부장제의 억압을 발견한 아빠와 오빠가 집안의 여자들과 공감적 연대를 형성하는 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이 장면에서 남성의 고충을 ‘발견’하는 사람은 아빠와 오빠가 아니라 은희와 수희이다. 아빠와 오빠는 언제나 그 고충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고충을 자신이 가부장제를 비판하며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의 약자들의 헌신과 돌봄을 받으며 해결해왔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울음을 터뜨리면서도, 자신에게 권력을 준 이 제도를 자신이 거부해야 하는 분열을 겪지 않는다. 그들의 울음은 자연스럽고 주저함이 없으며 합일되어 있다. 이 울음이 자신의 권력을 은폐하며 강화시켜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울음으로 인해 분열을 겪는 사람은 은희이다. 은희는 때때로 소리 지르고 날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억누르는 이 가부장제에서 뛰쳐나가고 싶다는 분노를 느껴 왔다. 그러나 자신의 수술 소식에 나약하게 흐느끼는 아빠의 모습을 보며, 그는 자신의 분노를 마음껏 아빠에게 겨눌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당황한다. 그는 아빠를 단순히 권력자이자 가정폭력의 가해자로만 보지 못하고 연민과 돌봄의 대상으로도 봐야 한다는 분열을 겪는다.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간절히 필요한 사랑과 인정을 줘야 할 책임이 있다고 믿었던 사람에게 오히려 자신이 사랑과 인정을 줘야 할 책임을 떠맡는 분열을 겪는다.

  이 은희의 분열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이 ‘아빠도 가부장제의 억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남긴 흔적에 머물 뿐일까. 그리하여 결국 아빠를 미워하면서도 불쌍해하고, 돌봐주고도 무시당하며, 패악을 부리고 나서 다시 봉양하기를 반복하는 딸의 굴레를 암시하는 것일까. 오히려 우리는 이 분열에서 타자가 지나간 균열을 간직한 채로 끊임없이 세계를 탐험하며 성장하는 여성 주인공의 탄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계속 새로 발견되는 타인과 자신의 관계 속에서, 타인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균열로 남겨둔 채 계속해서 자신을 확장해나가는 여성성이 지닌 문학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엘렌 식수가 「출구」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그는 여성적 글쓰기를 설명하면서 “(여성적) 글쓰기는 타자가 내 속으로 들어오고, 머물다 나가는 통로, 입구, 출구, 거주지이다. 이 타자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나는 타자가 될 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타자가 나를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는 나를 살게 한다. 또한 그는 나를 찢고 불안하게 하며 변화시킨다.”[각주:2]고 밝혔다. 즉, 이렇게 정해진 관계 속에 합일된 존재로서 안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해서 타자를 발견하고 그에 의해 분열되는 것이 여성적 글쓰기의 고유한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이는 아빠로 인해 겪은 분열을 어떤 식으로든 봉합하여 온전한 자신을 되찾으려 하지 않고, 끊임없이 사람과 세계를 찾아다니는 은희의 여정과 잘 어울린다. 

  은희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이 이야기는 주인공의 목표를 성취하거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직선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은희는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이나 도달하고자 하는 상황을 정해놓고 추구하지 않는다. 가령 영화 <레이디버드>의 주인공 크리스틴은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이나 받고 싶은 엄마의 사랑, 살고 싶은 집의 모습 등을 분명히 정해두고 있다. 그의 문제는 현실이 자신의 이상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은희는 자신이 구상한 모습을 본인이나 세상에 관철시키려는 방식으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병원에 다녀온 후 식사 자리에서 전에 없는 가족의 관심을 받고도, 그 자리에서 자기가 원하던 사랑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더욱 적극적으로 영지 선생님에게 의지하여 고민을 나누고, 소원했던 친구 지숙과도 관계를 회복하며, 자신을 좋아하던 후배 유리, 심지어 헤어졌던 남자친구 지완과도 만남을 시도한다. 그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에게 기대를 걸었다 끊임없이 좌절하지만, 이것은 그 여정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는 은희의 모험이 지닌 고유한 특성을 보여주는 과정이다. 좌절을 거치면서도 다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은희는 불량학생이든 선생님을 잘 따르는 학생이든,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그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은희의 다양한 만남이 보여주는 이 포용성은, 식수가 타자를 포용할 수 있는 잠재력으로서의 여성성을 설명하면서 “여성성이란 그녀에게 의탁하는 타자, 즉 방문자를 살아있는 채로 간직할 수 있는 여성성이다. 그녀는 그것을 타자로서 사랑할 수 있다. 타자가 되기를, 다른 사람이 되기를 사랑하는 것이다.”[각주:3]라고 말했던 것과 상통한다.

  이렇게 내적 균열이 추동하는 대로 끈질기게 타자를 만나는 과정에서, 은희는 차츰 자신이 살고 있는 1994년의 세계를 발견해간다. 그 세계는 은희가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구성된 세계이다. 김일성 사망 소식에 급격히 불안에 빠지고, 연애하다 들키면 남자친구 엄마가 여자애를 야단치며, 재개발로 철거민이 공터에서 농성하는 세계는 합당하다고 통용되는 질서 속에서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균열을 드러낸다. 그리고 은희에게 크고 작은 균열을 보이던 세계는 성수대교 붕괴라는 사건으로 절정에 달한다. 이 균열을 맞닥뜨리고 오빠 대훈이 울음을 터뜨린 이유는, 오빠에겐 은희나 수희처럼 크고 작은 균열이 자기 세계의 일부로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부장제라는 세계의 질서가 자신의 이익과 부합하는 오빠에게 세계의 균열은 있어선 안 되며, 나타나더라도 빨리 봉합되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가령 오빠가 자신을 때린다고 은희가 고백하자 엄마가 너네는 싸우지 좀 말라며 우리 집에 그런 구조적 폭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봉합할 때, 그 봉합은 오빠에게 정당하고 이로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성수대교가 붕괴하여 누나가 죽을 뻔한 일에 대한 그의 울음은 세계가 다시 복구되어야 한다고 애원하는 울음이다. 그렇게 복구된 세계는 다시 자신을 위한 곳일 터이다. 성수대교가 붕괴하기 이전의 세계에 일치감을 느끼는 대훈을 은희와 수희는 생경하게 바라본다. 그들이 경험한 세계에는 균열이 없었던 적이 없을 뿐더러, 자신이 그걸 어떻게 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존재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균열은 견딜 수 없다고 우는 대훈을 보며, 은희와 수희는 다시 한 번 세계에서 멀찍이 소외되어 있는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고는 대훈에게 거리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번에도 은희와 수희는 소외된 자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반대로 몰래 그곳을 찾아가 이 세계의 분명한 일부로 자리하고 있는 균열의 흔적을 직시한다. 그 막대한 붕괴가 만들어 낸 지금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고 직면하면서, 은희와 수희는 그 붕괴로 인해 다치거나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온전히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일치감을 느끼며 그들을 애도하고 기억한다. 게다가 은희는 이 사건으로 인해 영지 선생님마저 잃게 된다. 영지는 은희가 거의 유일하게 믿고 좋아하며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도움을 얻으려 했던 사람이기에 그 상실감은 막대하다. 그러나 영지는 거의 유일하게 ‘세상은 어떤 곳이며 너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은희에게 직‧간접적으로 지시하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변화하고 확장해나가는 은희의 여정에서 ‘방학이 끝나면 모두 다 해주겠다’던 그 이야기는 끝내 전달되지 않은 채 남겨져야 한다. 그래야만 은희가 영지 선생님과 맺은 관계를 여전히 수용하면서도 선생님의 이야기에 갇히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세계를 찾아나갈 수 있다.

  <벌새>에서 은희는 다른 여러 인물과의 관계와 더불어 아빠와 오빠라는 남성 인물과의 관계를 통해서도 가족과 세상에 대해 분열을 겪고 거리감을 느끼며 계속해서 세계를 탐구해 나간다. 이때 아빠와 오빠가 그저 가차 없는 ‘가해자’이지만은 않다는 점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들이 단순한 가해자라면 은희에게도 단순한 피해자의 자리가 마련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빠와 오빠가 ‘그들도 가부장제의 억압을 받는다’고 이해를 해줘야 할 대상도 아니다. 그들을 통해 은희는 가부장제 권력이 독단이나 폭력은 물론, 서글픈 흐느낌이나 겁에 질린 통곡으로도 드러난다는 것을 경험한다. 그럼에도 은희는 그들을 쫓아내거나 뜯어고쳐야 할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그들을 통해 스스로 분열하기도 하고 세계의 균열을 자신과 일치시키기도 하며 모색을 이어간다. 그는 이미 정해진 자신의 모습이나 세계의 모습을 요구하지 않고, 끊임없이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자신과 세계를 확장시켜가는 계기로 삼는다. 이렇게 타자를 포용하면서 자신도 계속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자신이 구성한 세계도 확장되어가는 여성 이야기의 특성을 식수는 개방성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여성의 이야기가 “이 개방성 덕택에 자기 자신에게서 나와 타자에게로 간다. 미개척지를 여행하는 여성은 부인하지 않고, 다가간다. 간격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간격을 보기 위해서, 그녀가 아닌 것, 그녀인 것, 그녀일 수 있는 것을 경험하기 위해서.”[각주:4]라고 말한다. 이는 집을 떠나 타자와 맞서 싸우며 자기 안에 있던 진정한 힘, 즉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끝나는 전형적 남성 영웅의 이야기와 분명히 대조된다. 이런 이야기에서 여성을 포함한 타자를 그저 남성의 정복 대상이자 소유 대상으로 다루는 방식이야말로 가부장적 사회 구조를 떠받치는 각본으로 작용해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영지 선생님마저 떠나보내고 난 은희는 마치 새로 태어난 여성처럼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운동장에 모두 모인 학교 아이들을 똑바로 바라본다. 또래 아이들과 사회적 관계를 이뤄야 하는 학교는 은희가 가장 철저히 소외되었던 곳이자 그가 한사코 책상에 엎드려 외면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 은희는 학교 및 또래 아이들과 맺을 관계와 그 과정에서 발생할 균열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첫 장면에서 엉뚱한 집 문을 두드리며 엄마를 찾던 은희는 마침내 자신이 차마 발 딛지 못하던 또 다른 세계를 곧게 주시하며 새로운 탐색을 준비하는 여성 주인공이 된다.

  1. 이러한 해석은 다음과 같은 감독의 인터뷰나 다른 작가의 코멘트에서 등장한다. “질문: 영화 속 오빠는 은희와 형제지만 동시에 가부장적 가치를 그대로 답습한 끼인 세대기도 하다. 흥미로운 건 영화에서 여성이 아닌 아빠와 오빠 이 두 남성만 크게 울며 통곡한다. 답변: 전 가부장제에서 승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게임이지. 폭력을 합리화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아빠와 오빠가 억압하는 주체인 동시에 자신들도 억압당하고 있다는 걸 생각했다. 물론 피해를 입는 이가 여성이기에 전 항상 여성 서사를 말하고 싶다. 그 의도는 영지 선생님의 대사로 전달했고, 감독으로서 전 영화 속 모든 캐릭터를 사랑하기에 아빠와 오빠 또한 나쁘게 그리고 싶지 않았다. 그 이면을 들여다 보고 싶었지.”, 이선필 기자, 「"가부장제에 승자 없어" '벌새'에서 아빠·오빠만 우는 까닭: [인터뷰] 영화 <벌새> 김보라 감독이 말한 희망, 그리고 일상의 정치」, 오마이뉴스, 2019년 8월 23일 13시 47분 최종 업데이트,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_w.aspx?CNTN_CD=A0002564154. “앨리슨 벡델: 사실 영화 안에서 ‘울음’의 기능도 무척 흥미로웠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영화 안에서 울었던 캐릭터들은 아빠와 오빠뿐인 것 같다. 남성중심적인 사회는 여성들뿐 아니라 거기에 속한 구성원 모두를 다치게 한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방식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보여 줬다.” 김원영 외, 󰡔벌새󰡕, 김보라‧앨리슨 벡델, 「여성, 서사, 창작에 대해」, 아르테, 2019. [본문으로]
  2. 엘렌 식수‧카트린 클레망 저, 이봉지 역, 󰡔새로 태어난 여성󰡕, 나남, 2008, p. 154. [본문으로]
  3. 위의 책, p. 155. [본문으로]
  4. Ibid.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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