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인-무브

트랜스페미니스트 선언문(3)

The Transfeminist Manifesto1)

 

에미 코야마(Emi Koyama)

백소하 옮김

 

 

 

 

 

image by 쏠

 

 

 

 

본 글에 붙은 괄호숫자 1) 또는 2) 등은 각주 번호를 가리킵니다. 티스토리의 각주 서비스 종료로 번호만 표기했습니다. 정확한 각주 내용을 확인하실 분은 글 마지막 부분에 업로드된 파일을 다운로드하여 보시길 권합니다. 

 

 

 

 

『파도를 붙잡기: 21세기의 페미니즘을 탈환하기』 후기

 

나는 포틀랜드로 이사하고 몇 달 뒤, 트랜스젠더 및 성전환자 공동체를 알게 되고 페미니즘과 트랜스 경험의 상호교차점을 탐색하기 시작한 2000년의 여름에 「트랜스페미니스트 선언문」을 썼다. 내가 순진했던 것 같지만, 난 일부 페미니스트 사이에 반트랜스 정서가 있고 일부 트랜스 사이에 반페미니스트 정서가 있는 걸 처음 알고서는 놀랐다. 왜냐하면 내가 만난 트랜스들은 내가 페미니스트로서도 트랜스 활동가로서도 존경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하게 친트랜스인 페미니스트 이론과 페미니즘에 정초한 트랜스 수사(修辭)를 정교화하기 위해 이 선언문을 썼다. 내 생각에는 성공한 것 같다.

 

그러나 이 선언문에는 내 성에 차지 않는 문제점도 있다. 내가 지난 2년 간 여러 번 개정하면서 작은 문제들은 일부 고쳤지만, 글 전체를 다시 쓰지 않고는 고칠 수 없는 큰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이 문제들이 무엇이고 왜 이 선언문에 뻗쳐 있는지를 논하는 것은 중요한 것 같다. 이 커다란 문제 가운데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 FtM 트랜스 및 트랜스젠더나 젠더퀴어로 정체화하는 다른 이들을 희생해 MtF 트랜스를 과하게 강조한 것. 나는 이 선언문이 MtF들이 마주하는 문제들에 중점을 두면서 FtM 트랜스 및 다른 트랜스젠더들과 젠더퀴어들이 마주하는 특수한 투쟁을 등한시한 것에 전적인 책임을 진다. 난 이 글을 쓸 즈음 페미니즘의 초점을 “여성”으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이 초점을 넓히면 비트랜스 남성이 소위 남권(男權) 단체 일부가 했듯이 페미니즘을 이용하는 게 가능하게 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이 두려움에 이유가 있다고 느끼면서도, 다른 트랜스 및 젠더퀴어들을 희생해 성전환자 여성을 특권화하는 게 실수였음을 깨달았다. 

 

- 상호교차적 분석의 부족함. 선언문은 성차별주의와 트랜스들의 억압의 교차에 중점을 두고 있으나, 이 문제들이 다른 사회 부정의와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직접 다루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 운동 내 백인 여성의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유색인 여성의 비평을 선언문에서 언급했지만, 트랜스 여성이 어떻게 유색인 여성과 동맹을 맺을 수 있을지를 직접 다루는 데 실패하였다. 나는 마찬가지로 다른 (비트랜스)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을 두려워해, 이 선언문을 쓸 때 초점을 성차별주의에서 옮기는 걸 망설였다. 나는 이제 여성 사이에 작동하는 인종차별주의, 계급차별주의, 비장애중심주의 등을 설명하지 못하는 어떤 페미니스트 이론도 불완전하다는 인식에 동의하며, 이 선언문이 불완전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두 비평은 사뭇 다르긴 하나, 같은 근원에서 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는 주로 모든 여성이 경험하는 억압에 초점을 맞춰야 하고, 가끔은 오직 이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발상 말이다. 이 세계관에서 인종차별주의나 계급차별주의는 유색인 여성에 대한 백인 남성의 인종차별주의처럼 가부장제에 대한 투쟁을 확장시킬 때에만 다루어졌고, 여성 운동을 “분열을 일으킨다”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성 내부의 감춰진 구획을 드러낸다고 여겨질 땐 다루어지지 않았다. 이 선언문은 대개 이런 궤적에 따라 움직이며 인종이나 계급 등의 측면에서 선언문이 지닌 차별적인 함축에 도전하는 데 실패했고, 그 점에서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나는 내가 선언문을 쓸 당시 여러 문제를 중심으로 조직하는 데 확신이 강하지 않았고, 내가 페미니즘을 희석시키고 있다고 비판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굴복했음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다른 유색인 여성, 노동계급 여성, 장애 여성이 보여준 지난 2년간의 동지애를 통해서야, 나는 이러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이제 내가 2000년부터 얻게 된 확신과 명확함을 가지고 이러한 통찰을 직접 다룰 새로운 선언문을 쓰는 것도 생각해보았으나, 당장은 이 과업을 다른 이들에게 남겨두겠다. 만약 하나 쓴다면, 부디 내게도 하나 보내달라.

 

 

특전: 전미여성학협회에서의 인종차별적 페미니즘2)

 

2008년 6월 28일

 

3월에 나는 흑인 페미니스트 사상, 특히 미국여성학회National Women's Studies Association, NWSA에서 오드리 로드Audre Lorde의 업적과 삶에 헌정하는 “기념 토론단”에 발언자로 초청되었다. 내 자신의 삶은 물론 전체적인 페미니스트 운동 내에서 오드리 로드의 중요성을 다루도록 선발된 데 영광이기도 했고 적잖이 겁을 먹기도 했다. 루이빌 대학교 소속 카일라 아디아 스토리Kaila Adia Story, University of Louisville와 캘리포니아 칼리지 오브 디 아츠 소속의 멜린다 L 데 헤수스Melinda L. de Jesus, California College of the Arts가 다른 토론자였다.

 

나는 대학 2년차에 들은 ‘여성학’ 강좌에서 오드리의 저작을 처음 알게 되었다. 학기가 끝날 때까지 학생들은 매주 여러 글을 읽고 강좌에서 토론해 그 주차의 자료를 돌아보는 일지를 썼다. 주어지는 자료의 대부분은 매주같이 백인 중산층 이성애자 (아니면 간혹 “정치적 레즈비언”) 여성이 쓴 것이었고, 나는 대부분의 논의를 이해하는 게 어려웠다. 난 내 일지에 내가 어째서 자료를 이해하지 못하는지를 계속 썼지만, 그게 선정된 자료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나는 내가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들에게 너무 “부정적”이라는 데 죄책감을 느꼈다.

 

기말을 앞두고 “유색인 여성”의 저작만을 다루는 데 한 주(이야, 한 주씩이나)가 할애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게 맞다면, 문집 『나의 등이라 불리는 이 다리』에서의 발췌(컴바히 강 공동체 선언문3), 그리고 내 생각에는 체리 모라가Cherrie Moraga의 글)와 오드리 로드의 『시스터 아웃사이더』을 다루었다. 이 글들은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이들은 내가 짚어낼 수 없는 소외와 좌절의 감정에 목소리를 주었다. 한 학기 가운데 한 주에 불과했고 이는 학과 과정 내 형식주의의 가장 저열한 형태일 것이지만, 이 글들은 나를 지금까지도 페미니즘과 여성학에 붙잡아두고 있다. 『시스터 아웃사이더』가 없다면, 난 지금 페미니스트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인종차별적이고 계급주의적인 언행이 유발한 정서적 고통과 슬픔을 의식하지 못하는 백인 중산층 페미니스트들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소리 내어 말할 확신과 힘을 기르기에 한 주는 충분치 않았다. 오드리나 오드리와 같은 이들이 쓴 걸 읽는 거로는 충분치 않았고, 내 주변에 지원 체계, 사회 전 영역의 정의와 서로에 대한 공감적 책임에 열정적으로 전념하고 모든 인종과 젠더로 구성된 이들을 실제로 꾸려야 했다.

 

2000년 여름에 나는 오리건주 포틀랜드로 이사했다. 내가 성인으로서 살게 된 첫 대도시였다. 포틀랜드에서 살게 된 둘째 날에, 나는 가정 폭력과 성폭력의 트랜스 및 인터섹스 생존자의 필요를 다루는 ‘생존자 프로젝트Survivor Project’를 창립한 백인 성전환자 여성 다이애나 쿠르방Diana Courvant을 만났다.4) 나 역시 젠더 및 성별 정체성을 둘러싼 복잡한 역사의 생존자이기에, 바로 생존자 프로젝트에 관여하게 되었다. 다이애나가 여러 문제를 중심으로 한 사회 정의 조직화에 노련한 것도 도움이 되었고, 나는 다이애나로부터 많은 걸 배웠다.

 

그러나 나는 다이애나를 알아가면서 모든 페미니스트가 트랜스들을 받아들이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당시 다이애나는 사실 포틀랜드의 레즈비언/페미니스트 공동체 내 최악의 악몽의 한복판에 있었고, 나중에 글로 쓰게 되었다(「특권 얘기를 하자면"Speaking of Privilege"」, 『우리가 집이라 부르는 이 다리This Bridge We Call Home』, 글로리아 안잘두아Gloria Anzaldúa, 아나루이즈 키팅AnaLouise Keating 편집 참조). 요약하자면 다이애나는 오레건주 삼림의 여성 쉼터에 초대되었는데, 이 쉼터는 다이애나가 초대를 받은 뒤 성별 재지정 수술을 받지 않은 성전환자 여성의 참석을 금지하는 “음경 금지” 정책을 도입하였다. 다이애나는 참석을 거절하였으나, 비트랜스 협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트랜스 문제를 다루는 연수회를 밖에서 개최하였다. 연수회는 성공적이었으나, 그 직후 다이애나가 여성 전용 쉼터에 무단으로 침입해 성기를 노출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당연히 거짓이었으나, 극도로 고통스러운 소문이었다.

 

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후일 로리 디커와 앨리스 파이프마이어가 편집을 맡은 문집 『파도를 붙잡기: 21세기의 페미니즘을 탈환하기』로 출간될 글 「트랜스페미니스트 선언」을 썼다. 이 선언문은 재생산에 관한 선택권, 건강, 여성에 대한 폭력 같은 페미니스트 문제를 다루었고, 성전환자 여성이 어떻게 다른 여성들의 문제 가운데 많은 것을 공유하는지를 논의하였다. 나는 성전환자 여성은 다른 모든 여성과 너무도 달라 페미니즘 내에 성전환자 여성의 자리는 없다는 (혹은 페미니즘이 성전환자 여성에게 쓸모가 없다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페미니스트 이론을 집필하고 싶었다. 나는 친트랜스 페미니스트들이 트랜스 여성을 향한 노골적인 편견과 거짓말을 마주할 때 쓸 수 있고 따라하기 쉬운 주장을 제공하고자 하였다. 이런 목적에 관해서는, 「선언문」이 성공한 것 같다.

 

그러나 「선언문」에는 불안한 점이 있다. 성전환자 여성과 비성전환자 여성 사이의 동맹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 글은 “여성”으로 정체화하지 않는 성전환자 남성과 다른 트랜스젠더나 젠더퀴어의 투쟁을 포함하는 게 편리할 때를 제외하면 등한시하였다. 또, 이 글은 상호교차적 분석, 즉 어떻게 반트랜스 정서 및 억압이 성차별주의 외의 억압, 특히 인종차별주의와 계급차별주의를 포함하는 억압들을 뒤섞고 복잡하게 하는지에 대한 분석에는 취약하다. 이 글은 예를 들어 성전환자 여성의 독특한 경험이 이들을 배제하는 근거가 된다면 단일하고 보편적인 여성 경험이 상정되는데, 이는 분명하게 거짓이기에 이러한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 것처럼, 유용할 때에는 유색인 여성의 작업으로부터 빌려다 쓰면서도, 트랜스 감수성의 포용이 인종차별주의 및 다른 억압들에 맞서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등에 관한 어떤 통찰도 제공하지 않았다. 

 

사실 내가 이 글을 쓸 때는 새로운 동네에 살게 된 지 세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나는 ‘여성학 개론’ 10주 가운데 9주를 채운 백인 페미니즘에 대한 내 불편을 완전히 마주하지도, 페미니즘은 그저 성차별주의에 맞서 여성을 옹호하는 것뿐이고 그 이상은 아니라는 관점에 도전하기에 충분히 자신 있지도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내가 쓴 건 성전환자 여성을 포함할 정도로만 수정된 버전의 백인 페미니즘이었다. 당시에는 이게 페미니즘 내에서 성전환자 여성의 자리를 주장할 페미니스트 이론을 쓰기에 유일하게 안전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후 2년간 모두를 위한 정의에 마찬가지로 헌신하는 사람들을 더 만나며 보냈고, 오드리 로드가 말한 대로 “침묵을 언어와 행동으로 바꾸는” 데 필요한 자신감을 천천히 쌓아나갔다.

 

내가 아래에서 논할 것은 침묵이 언어와 행동으로 바뀐 일례이다.

 

오드리 로드의 유산을 기리는 토론단에 발언자로 초대하는 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NWSA는 귀하의 시간과 전문성에 감사를 표하고자 대회 무료 등록을 제공하게 되어 기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NWSA의 제한적인 예산으로 인해 귀하의 여행 경비는 지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직업적 연구자도 아니고, 고정적인 직장이 없는 상태에서 학술 대회에서의 발언만을 위해 수백 달러를 쓸 여유는 없다. 나는 내 사정을 설명하고 대회에 참석할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는 회신을 보냈으나, NWSA 상임 이사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NWSA는 대회 회원권과 등록을 무료로 제안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그 이상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행정위원회(NWSA의 이사진) 위원 일부와 이야기하였고, 나를 대변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들은 상임 이사에게 이메일을 보냈으나, 대답은 똑같았다. 또 나는 오랫동안 퀴어 사회 정의 활동가로 일한 내가 존경하는 분이 작년 NWSA에 초청된 적이 있지만, NWSA가 그녀의 여행 경비를 부담하기를 꺼려해서 거절해야 했음을 알게 되었다. 나도 초청을 거절할 수 있었지만, 그러면 NWSA는 매년 활동가들을 착취하려 하면서 누구에게도 도전 받지 않고 이들의 업적을 기리고 지지하는 행세를 계속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걸 해보기로 했다. 나는 수천 명이 구독하고 있는 세계 여성학 이메일 목록인 WMST-L에 연락해, 상황을 설명하고 NWSA에 관행을 규탄하는 편지와 내가 대회에 참석할 돈을 조금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수일 뒤 나는 행정위원회 위원을 포함한 열 몇 명의 기부 제안을 받았고, 보아하니 그만큼이 또 NWSA 상임 이사에게 연락을 취했다. 가장 협조적인 이들 가운데에는 레즈비언 위원회 회장 리사 버크Lisa Burke, 유색인 여성 위원회 공동회장 팻 워싱턴Pat Washington, 그리고 양성애자/트랜스젠더 이익 단체 대표 조엘 루비 라이언Joelle Ruby Ryan이 있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보아 하니 상임 이사는 나를 지지한 이들 가운데 일부에게 내가 이미 NWSA의 돈으로 호텔 객실을 지원받았다고 말하며, 내가 부정하게 굴고 있으며 사기를 쳐 선의의 페미니스트 학자들에게서 돈을 빼앗고 있을 수 있다고 암시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상임 이사가 생각을 바꿔 내 경비의 일부라도 지원하기로 했나 싶어, 나는 NWSA에게 다시 연락을 취했다. 바뀐 건 없고 나는 (많은 이들이 나를 돕고 있기는 하나) 여전히 혼자 알아서 와야 한다는 답이 왔다.

 

나는 경비를 거의 충당할 만큼 기부를 받았기에, 기념 토론단에 참가하고자 신시내티로 갔다. 나는 내 발언에서 내가 오드리 로드의 저술을 어떻게 알게 되었고, 얼마나 중요하며, 그럼에도 어째서 오드리의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힘기르기의 감각을 느낄 수 없는지에 관해 말했다. 나는 「트랜스페미니스트 선언문」의 후기로 쓴 글을 일부 읽었고, 이 글이 내가 페미니즘 안의 내 자리를 조심스럽게 협상하던 시기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를 말했다. 그리고 나는 토론단 그 자체에 대해, 토론회의 구조 그 자체가 오드리 로드의 유산을 배신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드리와 오드리의 업적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가해야 하는지를 내가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했는지에 대해 발언했다.

 

나는 오드리가 만약 살아 있다면 이런 모욕적인 상황에서 이 대회에 발언자로 초청되는 것을 받아들일지를 질문하게 된다고 말했다. 오드리는 이런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이 “기념 토론단”은 여성학에 오드리가 기여한 바를 기리고 추모하기에 적합한 방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이 토론단에서 발언하는 데 느낀 양가성은 내 대회 참석이 근본적으로 부당한 것을 정당화하는 데 일조할까 느낀 두려움에서 일부 기인하였다.

 

오드리 본인도 1979년, “[뉴욕 대학교에서 열린 『제2의 성』 학술 대회]에서 흑인 페미니스트와 레즈비언의 목소리가 대변되는 세션은 내가 초대받은 이 세션이 유일”한 처지에서 논평하도록 초청받아 유사한 상황에 처했다. 로드는 “미국 여성들 간의 차이를 다룬 글들에 대해 논평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아 초청에 응했고, 이는 “가난한 여성, 흑인 여성과 제3세계 여성, 레즈비언 여성들의 중요한 이야기를 외면하면서” 할 수 있는 게 아닌 데 말이다. 『시스터 아웃사이더』에 수록된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제목의 발언은 제목이 알려진 바에 비해 잘 이해되지는 않았다.5)

 

오드리가 “주인의 도구”라는 말로 표현하는 건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등과 같은 여성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지 않으려는 백인, 중산층, 이성애자 페미니스트들의 저항이다. 왜 주최자들은 흑인 여성을 더 참여시키지 않았는가? 마치 오드리가 모든 흑인 여성을 대표할 것이라도 바란 건가? 오드리는 많은 백인 페미니스트들이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 사이는 물론 흑인 여성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올 수 있는 힘을 이해하는 데 실패하면서, 인종차별적이고 동성애혐오적인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데 공모한다고 주장한다.

 

 

 

 

오드리 로드, 다큐 <서로의 투쟁의 가장자리>의 한 장면

 

 

 

 

 

『시스터 아웃사이더』의 다른 글에서, 오드리는 다시는 백인 여성과 인종차별주의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물론 그 뒤에도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나는 오드리가 그만두고 싶은 충동으로 고심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대회에 참석해 기념회에서 발언하기로 정한 이유에는 내가 오드리 로드와 당대 인물들, 많이 살아있는 만큼 많이 떠나간 이들의 업적 위에 서있음에 감사함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토론회는 성공적이었고, 세 토론자와 청중들 사이의 토론은 원래 75분으로 계획되어 있었음에도 거의 세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다음날 대의원 회의에서, 레즈비언 위원회의 리사 버크가 포문을 열었다. 상임 이사는 버크에게 내 상황을 “처리하겠다”고 약속했고, 버크는 이 약속을 NWSA가 최소한 내가 회의 참여를 위해 머물 곳이라도 제공하겠다는 것으로 이해했지만, 어째선지 제공되지 않았다. 상임 이사는 NWSA가 사실 나를 위해 객실을 예약했고 NWSA의 계좌를 통해 그 대금을 지불하였다고 답하며, “혼선”의 책임을 그 자리에 없는 흑인 여성인 자신의 비서를 탓했다. 리사는 이 꼬리 자르기에 항의하며 NWSA가 내게 숙박비를 배상하고 공식적인 사과 성명을 발표할 것을 요구하였다. 모든 대의원이 이 발의에 동의하였다. 다른 유색인 여성이 내 반대편에 놓여 모든 일의 책임을 떠안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나 때문에 1박에 170달러짜리인 방이 비어있었다는 게 너무 낭비 같아서이기도 해서, 나는 이 결정에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나는 나를 위해 예약된지도 몰랐던 방에 NWSA가 얼마를 지불했는지 알아보려고 호텔에 다음날 아침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직원은 그런 예약은 지난주 어떤 날에도 기록되어있지 않다고 전했다. 대회가 열린 호텔에 빈 방이 없어 NWSA가 근처의 다른 호텔을 예약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신시내티로 가거나 집으로 돌아갈 일자를 NWSA가 모르기에,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전국적이고 학술적인 페미니스트 기관의 상임 이사가 오드리 로드의 유산을 기념하는 자리를 조직하고 개최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전형적인 부정과 인종차별주의를 자행했다고 생각하자 너무도 우울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 기념 토론단은 오드리의 유산을 완벽하게 기억했다. 이 사건은 오드리가 “인종차별적 페미니즘”이라고 한 추악한 현실, 공적인 피상적 반(反)인종차별주의 수사 뒤에 숨어 있는 것을 드러냈다. 분노를 포함한 격렬한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우리는 이를 건설적으로 활용하는 데 쏟고자 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오드리를 기렸고, 이는 오드리에 관한 논문을 읽는 게 아니라 모든 이들을 향한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것이었다. 내가 맡은 바를 다해 오드리를 자랑스럽게 한 거라면 좋겠다.

 

 

본 글에 붙은 1),2) 등의 숫자는 각주 번호를 가리킵니다. 티스토리의 각주 서비스 종료로 번호만 표기했습니다. 정확한 각주 내용을 확인하실 분은 아래의 파일을 다운로드하여 보시길 권합니다. 

 

트랜스페미니즘_에미코야마(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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