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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자스시티에 해방을’: 디지털 그리오로서의 자넬 모네의 혁명(2/4)

 

 

카산드라 L. 존스(신시내티 대학 아프리카학 조교수) 저

단감 번역

 

 

 

모네의 메트로폴리스에서 시간의 흐름과 신체 및 저항을 통제하기

 

시간여행이라는 비유는 아프리카 미래주의자들이 사회 불평등의 윤곽을 드러낼 뿐 아니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역사를 재구축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자아를 넘어설 수 있는 한 가지 수단이다. 레이나 자몬에 따르면,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예술가들에게 시간여행은 “인종 및 성적 지배에 저항할 공간을 만들어낼 도구”가 될 수 있다. 모네의 비디오에서 시간을 넘나들며 다른 시간대의 여러 반군을 규합하는 능력은 저항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이다. 자넬 모네의 메트로폴리스에서 혁명은 모네의 노래 “Q.U.E.E.N”와 함께 공개된 뮤직비디오에서 그려진 바와 같이 아프리카인 및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뿐만 아니라 지식과 기술의 사용이 한데 엮여 있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모네와 밴드 멤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영상은 메트로폴리스의 ‘시간 위원회’를 대표하는 어떤 백인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시간여행을 하는 반군을 막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 시간 위원회는 그 일을 해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전설적인 반군을 가사상태(suspended animation)로 보존해 둔 살아있는 박물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금 이 전시에서는 완다랜드(Wondaland)의 멤버와 그들의 악명 높은 리더 자넬 모네, 그리고 그의 위험한 공모자 바둘라 오브롱가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그들은 21세기에 음악적 무기 프로그램인 Q.U.E.E.N 프로젝트를 함께 시작했습니다. 연구자들은 여전히 이 프로그램의 본질을 해독하며, 완다랜드가 노래, 감정 그림 및 예술 작품으로 위장시킨 갖가지 자유 운동을 쫓고 있습니다.

 

보이스오버가 가까워지면서, 두 명의 젊은 흑인 여성이 박물관에 들어와 잠시 눈길을 주고받은 뒤, 빠르게 완다랜드 전시 쪽으로 다가간다. 그들은 박물관에서는 수동적으로 관람만 해야 한다는 관습을 깨고, 두개골의 금빛 이빨을 사용해 레코드를 재생하고, 곧 경비원을 결박한다. 음악이 시작되자, 가사상태의 형식에 갇혀 있던 완다랜드 멤버들이 깨어나 노래를 연주한다.

목소리가 설명하듯, 시간여행, 무기화된 음악 기술, 반란은 모네의 내러티브에 깊이 얽혀 있다. 이 노력은 모네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선 라, 아미리 바라카, 폴 D. 밀러 등 많은 아프리카 미래주의 음악가, 작가, 이론가가 함께 이러한 아이디어 혼합체를 발전시켜 왔다. 자신의 선언문 「리듬 사이언스Rhythm Science」에서 밀러는 다음과 같이 시간의 경계를 넘어 디제이와 다른 사람들, 소리, 그리고 물체를 연결하면서 후기 자본주의 시스템의 여러 조합된 욕망과 바로 그 동일한 시스템의 기술이 자아의 경계를 해체하는 방식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탐구한다.

 

디제이의 마음속에 파편화의 깊은 감각이 발생한다. 내가 디제잉을 하러 왔을 때, 내 환경 –고도 자본주의에 기반한 미디어의 밀집한 스펙트럼- 은 내 열망과 욕망의 너무나 큰 부분까지 이미 구축해둔 듯했다. 나는 신경이 이 모든 이미지와 소리, 다른 사람들에까지 확장된 듯 느껴졌다. 그 모든 것이 내 자신의 연장이듯 나 역시 그들의 연장이었다. 기차, 비행기, 자동차, 사람, 다국적 기업, 모니터 화면 –대형과 소형, 인간과 비인간- 이 모든 것이 구획된 순간과 불연속적 거래의 세계에서 말끔한 시간 및 공간의 수렴을 재현했다. 그 모든 것이 어떻게든 아주 잘 돌아갔다. 

 

또한 음악의 포장과 그것을 생산하는 마케팅 기계가 거기에 심어둔 열망과 욕망을 분해하여 재조립하는 기록 보관자로서, 디제이는 이러한 파편화를 그저 그의 음악이 관련된 곳으로만 경험하지 않는다. 음악과 신체의 융합이 발생하고, 거기서 디제이가 사이보그로 변형되며 그의 음악적 해부는 팔, 리듬, 다리, 비트를 붙이고 다시 붙이는 사이보그 사지 해체의 실천이 된다. 사지 해체와 재부착의 이 행위는 신경 말단을 자신의 경계 너머로 확장시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행위가 된다. 디제이가 수술하듯 정밀하게 음악을 혼합할 때 그의 손가락 조작을 통해 음악의 음파는 공기를 통과하여 청취자의 고막을 진동시키고, 신경 말단을 건드리며, 그들의 육체적, 감정적 반응의 전체 단계를 활성화한다. 이런 식으로 디제이는 자신을 넘어서까지 연결된다. 모네의 경우에는 이러한 자아 확장을 수단으로 삼아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문화 전투를 벌이고, 음악 기술을 무기화한다. 

 

기계, 인간, 동물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다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신화를 바탕으로, ‘리듬 과학자’로서의 디제이는 한 곡이 다른 곡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거나 충돌하면서 음악의 경계를 해소하고, 그러면서 그의 손끝의 경계를 넘어 연결을 만들어내면서 자기 몸의 한계를 확장한다. ‘그가 사는 시절’ 전에 있던 ‘옛날’의 노래를 선택하면서, 그는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이러한 샘플들로 새로운 노래를 만들 때에는 미래의 리듬 과학자가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아카이브를 만들어내며 자신을 미래에 투사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기술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다른 시대에 연결해주면서, 과거, 현재, 미래가 한데 합쳐져 우리가 역사적 순간에 직접적이면서도 변화되고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한다. 

 

과거와 현재의 병합은 디지털 그리오로서 모네가 수행하는 작업이다. 뱅크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옛날’ 내러티브는 민권 운동 및 흑인 권력 운동을 직접 경험하거나 그 시절을 살았던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를 구별할 때 사용된다. 더 나아가 이 두 집단이 서로에게 이야기하기보다는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들 간의 대화를 막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이렇게 세대 단절에 대한 내러티브는 ‘디지털 시대의 흑인 문화, 정체성, 액티비즘에 대한 뿌리 깊은 불안’을 드러내며 기술 영역에서도 똑같이 작동한다. 디지털 그리오는 ‘옛날’ 내러티브를 리믹스하고 고유성originality의 개념을 휘저으면서 이 간극을 연결할 수 있다. 이렇게 액티비즘과 사회 정의에 대한 세대적 소유권을 완화시키면서 다양한 목소리를 전달할 뿐 아니라 세대 간의 연결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모네는 디제이가 전복의 행동으로서 공연하는 시간여행을 출발시킨다. 모네와 완다랜드의 다른 멤버는 ‘시간여행을 하는 반군’이며, 이 전복을 사용하여 예술과 액티비즘을 ‘완다랜드가 노래, 감정적 그림 및 예술 작품으로 위장시킨 갖가지 자유 운동’으로 결합시킨다.

 

이러한 전복에도 불구하고, 밀러가 지적하거나 해러웨이가 사이보그의 기원에 대해 주장한 바와 같이, 디제이는 그를 둘러싼 경제 및 정치 구조에서 자유롭지 않다. 해러웨이는 사이보그가 ‘국가 사회주의는 물론 군사주의와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불법적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이 ‘불법적 후손’은 정확히 그 불법성과, 전혀 아버지를 향하지 않거나 꼭 그의 권력 구조를 복제하려 하지는 않는 충성심으로 인해 전복적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밀러는 그 자신의 욕망과 열망을 대신 구축해주는 마케팅 시스템으로 오염된 음악의 기원을 지적한다. 그러나 밀러는 다양한 레코드를 샘플링하고 그것의 말끔한 포장을 분해하며 각 부품을 해체하면서 이러한 구조를 붕괴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잉글리쉬와 킴은 이것 역시 모네의 작업의 진실이라고 언급했다. “모네는 ‘대규모의 ‘자본이라는 존재’ 바깥에 문화적 행위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하는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한다’는 점을 … 충분히 알고 있다.” 믹스 음악을 통해 다양한 샘플을 연결하며 시간을 관통하여 움직이는 디제이의 능력은 다양한 역사적 순간을 샘플링하여 역사적 아카이브의 선형적 내러티브에 저항하는 리믹스를 만드는 디지털 그리오의 힘에 반영된다.

 

 

안젤라 Y. 데이비스

 

이야기의 통제력을 되찾는 이 능력은 모네의 뮤직 비디오에 묘사된 반란의 핵심 요소이다. 안젤라 Y. 데이비스가 고작 한 세대만에 자신이 그저 ‘머리모양’으로 정의되면서 ‘해방의 정치가 패션의 정치로 축소되어버린’ 방식을 비판했던 것처럼, 시간 위원회의 박물관도 마찬가지로 완다랜드와 다른 시간여행 반군의 묘사를 큐레이팅하거나 통제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비디오는 선형적 역사 내러티브와 기술이 합쳐져서 완다랜드 멤버의 반란을 억누른다고 암시한다. 19세기 중반 이후의 박물관이, 서로 다른 시대, 지역, 그리고/또는 역사의 인공물을 전부 합쳐버릴 수도 있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진열실의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처럼, 박물관은 더 큰 사회에 도전하는 다양한 시대의 혁명적 목소리의 위험성을 제거하고 모두 질서정연하게 가사상태로 배치하여, 그저 관람객들이 구경하는 것만으로 소비하도록 전시하는 선형적 감옥으로 기능한다. 실제로 시간 위원회와 박물관은 이러한 선형적 내러티브를 구축하여 지배적인 관점에서 효과적으로 ‘전설적인 반군’의 잠재력을 무력화한 뒤 자유 투사가 아닌 범죄자로서 반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데이비스가 언급한 것처럼, 반란에 새로운 사람이 합류하는 일은 모네가 ≪Metropolis: Suite I (The Chase)≫ 앨범과 “Many Moons” 뮤직비디오에서 보여준 신디 메이웨더의 이야기에서도 나타난다. 인간과 사랑에 빠지는 범죄를 저지른 사이보그 메이웨더가 법을 피해 도망 다니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앨범이 진행되면서 메이웨더가 자신과 비슷하게 쫓기고 있는 사이보그들의 지하 운동 단체를 만나 혁명적 인물이 되는 것으로 이어진다. “Many Moons”의 가사는 “깨진 꿈/사라진 햇살/끝없는 범죄/우리는 자유를 갈망한다(자유를)”이나 “당신들의 삶에 혁명을 일으키고 탈출구를 찾아라”처럼 자유를 위한 투쟁에 초점을 맞춘다. 메이웨더는 국가가 인가하지 않은 자신의 퀴어적 사랑으로 인해 정부와 대립하게 되면서 이등시민의 자리로 밀려난다. 이러한 가사는 그녀가 평범한 연인에서 현 상태를 해체하려는 자유 투사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뮤직비디오는 메이웨더의 이야기에 추가적 요소를 넣어 그의 반란을 그저 셀러브리티가 전시하는 패션으로 바꾸어 저항을 흡수하고자 하는 사회를 묘사한다. “Many Moons” 영상에서는 경매자이자 진행자가 메이웨더를 ‘이 지역의 인기스타’라고 소개한다. 메이웨더는 “두려움 없이 과감하게 사랑을 향해 나아갈 수 있”냐고 묻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지만, 오직 행복하기만 한 듯 공연을 하면서 그의 음악에 맞추어 요란하게 춤추고 응원하는 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셀러브리티와 패션의 흡수적 내러티브로 인해 인간과 사이보그 사이의 사랑은 사라져버리고, 모네와 밴드만 남아 관객들의 기쁨을 위해 연주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공연이 모두 메이웨더의 얼굴을 한 사이보그들이 최고 입찰자에게 팔리는 노예 경매였음이 밝혀지면서, 이 흡수는 한층 더 심화되어 나타난다. 이 경매는 패션쇼 무대에서 사이보그들이 모델처럼 워킹하고 포즈를 취하는 동안 입찰이 진행된다. 이때 ‘모델’이라는 말은 패션모델과 사이보그 생산 라인의 특정 하드웨어 유형 모두를 지칭하는 이중적 의미로 사용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메이웨더의 반란은, 데이비스의 머리카락 및 의상과 마찬가지로, 메트로폴리스 권력구조의 압도적 내러티브로 인해, 이성애중심적 정치를 비판하는 정치적 힘을 상실한 소모품으로서의 패션의 정치로 변형된다. 

 

 

 

모네가 디지털 그리오로서 해체하는 것이 바로 이 인종차별적이고 이성애중심의 압도적 내러티브이다. “Many Moons”에서 메이웨더는 흑인여성에게 붙여진 부정적인 낙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읊조리며 점점 더 격렬히 춤을 춘다. “건달, 약쟁이/신경 쓸 것 없는, 나이트클럽/숨은 알코올중독자, 욕조/ 버림받은 자, 괴짜/ 입양아, 괴물 쇼/ 흑인 여자, 흉한 머리카락/ 넓적한 코, 차가운 눈빛” 그의 ‘사이버네틱 카운트다운’이 계속해서 사회 통제의 방식을 보여주는 동안 메이웨더는 과부하로 인해 공중으로 떠오른다. 경매를 하던 관객들은 그의 사이보그 신체가 하늘로 전류를 방출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서 숨을 멈춘다. 그리고 흰 드레스를 입고 베일을 쓴 여성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기진맥진한 메이웨더가 가벼운 경련과 함께 바닥으로 내려온다. 메이웨더가 잠잠해지는 동안 “세상이 당신을 제대로 대하지 않는다면/ 그저 나와 함께 가자 내가 집으로 데려다줄게/ 샹, 샹 샹 샹그릴라”라는 가사가 전해진다.

 

그의 죽음으로 읽을 수도 있고 ‘la petite mort’의 핏줄 속 죽음인 오르가즘으로 읽을 수도 있는, 경련과 함께 무너지는 순간은 메이웨더에게 시스템을 퀴어링하고 사회적 통제로부터 그를 해방시키는 일종의 ‘귀향’을 나타낸다. 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감각으로 죽은 후에 영적 고향이나 천국과 같은 사후세계로 돌아간다는 의미뿐 아니라, 가족이 있는 지상의 공간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도 ‘귀향’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신부 같은 그 여성들의 존재는 권력 시스템을 퀴어링할 수 있는 메이웨더의 능력이 돌아왔음을 암시한다. 이제 그는 자신을 ‘집으로’ 데려갈 퀴어 웨딩에서 턱시도를 입은 여성이다. 메이웨더는 레즈비어니즘이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기저에 놓인 이성애주의에 대한 저항 행동이라고 주장했던 흑인 페미니스트 셰릴 클라크의 뒤를 잇는다. 겉으로는 죽은 듯이 보이지만, 이는 이성애 인물에겐 일상적으로 보장되는 사랑의 미래가 LGBT 캐릭터에겐 부정되는 ‘게이는 묻어라’ 비유의 또 한 가지 사례로 치부될 수 있는 순간이 아니다. 오히려 메이웨더의 죽음은 메트로폴리스가 만든 내러티브의 통제를 비트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메이웨더의 운명을 이미 결정해버린 추격의 패러다임 안에서는 그가 공식적으로 죽은 것일 수도 있지만, 이 비유적 죽음으로 인해 그가 사회적 제약에서 해방되고, 지하 자유운동 투사로 계속 싸울 수 있게 된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그의 혁명적 운동을 흡수하여 패셔너블한 상품으로 축소하려 했지만, 그 사이보그는 자신의 아버지 격인 창조자에게 충성하지 않았다. 도주 중에 만들어진 그와 공동체의 연결은 그가 경매장에서 공연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절되지 않았다. 여기서는 전류 방출 혹은 에너지의 오르가즘적 폭발로 표현된 이 연결은 궁극적으로 그의 존재를 마음대로 만들어내려 한 낙인의 시스템에서 그를 해방시킨다. 이것이 활동 중인 디지털 그리오의 힘이다. 그는 자신의 저항적 잠재력을 제거하려 했던 내러티브를 해체하여 자기 자신의 이야기와 미래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는다.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를 활용하여, 현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문제를 제기한다. 뮤직비디오의 마지막 장면은 신디 메이웨더의 인용문이다. “나는 자유로 가는 길을 하늘에서 밝혀 줄 여러 개의 달을 상상했다.” 경매장에 있던 노예의 처지 및 그들이 별을 비롯한 다른 천체의 특징을 활용하여 북부로 탈출한 기록을 사이보그의 테크놀로지와 리믹스하면서 모네는 흑인, 여성, LGBTQ 공동체가 겪고 있는 역사적이면서 당대의 교차적 불평등을 드러내는 미래의 한 가지 비전을 창조했다. 

 

“Many Moons”에서 보여진 내러티브에 대한 투쟁 및 저항과 비슷하게, “Q.U.E.E.N” 뮤직비디오에서도 모네는 자신을 규정하는 내러티브의 통제를 위해 전투를 벌인다. 반기술로서의 흑인성이든 투쟁의 수단이든, 문제가 되는 두 개의 내러티브 모두에서 기술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네는 기술의 위험 및 그와 연관된 자본주의적 내러티브를 직접적이자 비유적인 감금의 도구로 추적하면서, 흑인의 신체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기술을 사용하던 과거를 반영한다. 동시에 그는 기술이 그것을 만들어낸 시스템을 교란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관람객은 시간을 여행하는 장치에 접근할 수 없지만, 기술은 반군을 구금하는 매커니즘인 동시에 그들이 탈출하는 수단이다. 반군은 박물관의 가사상태 유도 기술에 의해 일시적으로 물리적으로 억류되어 있고 그들의 내러티브에 의해 수사적으로 갇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잡혀있는 것은 아니다. 턴테이블의 기술과 디제이의 음악적 확장을 통해 그들은 궁극적으로 갇혀 있는 자신을 풀어 줄 더 큰 공동체로 이어진다. 그 음악에 ‘감화된’ 두 명의 젊은 여성이 박물관을 습격하여 레코드를 재생시키고 완다랜드의 멤버들을 풀어준다. 

 

모네가 공동체를 사용하는 것에서 본질적인 부분은 그룹 내 멤버쉽과 ‘세포’ 사이에 있는 시간의 시냅스를 관통하는 코딩된 메시지의 전송이다. 이때 세포는 생물학적 단위인 동시에 모네의 ‘자유 운동’에 등장하는 개별 ‘테러리스트’ 그룹 모두를 지칭한다. 이 메시지는 바깥 세계에서는 읽을 수 없으며 오직 그룹 내 멤버들만 해독할 수 있다. “Q.U.E.E.N”의 보이스오버가 말했듯 “연구자들은 여전히 이 프로그램의 본질을 해독하며, 완다랜드가 노래, 감정 그림 및 예술 작품으로 위장시킨 갖가지 자유 운동을 쫓고 있”다. 음악을 통해 전송되는 이 메시지는 연구자들이 몇 년이 지나도록 뜻을 해독하기 위해 매달려도 의미에 접근하지 못하게 차단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다. 이 덕분에 최초의 혁명가들이 잡힌 뒤에도 오랫동안 혁명이 지속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자기 삶의 시간적 경계를 넘어서는 작업을 하면서 완다랜드 멤버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시간여행을 할 수 있었다. 

 

이 공동체의 정체성은 인종적이기도 하다. 이것은 박물관의 백인 문화적 표지와 완다랜드 멤버의 신체 및 “Q.U.E.E.N.”의 가사, 그리고 완다랜드 전시의 이미지에서 드러나는 흑인성의 표지가 대조를 이루며 한층 뚜렷하게 드러난다. 박물관은 여러 측면에서 백인성 표지를 가지고 있다. 박물관은 시각적으로 백인 여성으로 재현되며, 그는 클래식 음악을 배경으로 영국 발음으로 전시를 해설하며 문화적 백인성을 지시한다. 박물관 자체도 말 그대로 새하얀 색으로 뒤덮여 있다. 반면 완다랜드 전시는 흑인성 표지로 가득하다. 완다랜드 및 그들을 풀어주는 흑인여성의 신체의 흑인성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부족민의 그림, 금니가 박힌 해골, 모네의 음악이 모두 문화적 흑인성의 표지를 담고 있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가로질러 음악적 자극으로 활성화된 이 공동체는 완다랜드를 해방시키고 반란의 사이클을 다시금 시작시킨다. 완다랜드의 ‘음악적 무기 프로그램’은 해방을 가능케 하는 도구이다. 음악 기술은 무기화되었고, 해방을 위한 투쟁의 도구가 되었다.

 

Q.U.E.E.N에서 모네의 혁명의 열쇠인 음악의 무기화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사상, 특히 아프리카 미래주의 사상에서 역사가 오래되었다. 가령 선 라의 1974년 영화 <Space Is the Place>는 흑인 과학소설의 아이콘이 해방의 도구로서 음악이 가진 힘에 대해 토론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먼 은하계 행성의 숲을 돌아다니며 선 라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여기서는 음악도 달라. 음향의 진동이 다르지. 지구와는 달라. 지구에서는 총, 분노, 좌절의 소리가 나지. … 우리는 여기에 흑인을 위한 식민지를 건설할 것이네. 백인이 한 명도 없는 곳에서 그들이 그들끼리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게. 그들은 이 행성의 아름다움 속에서 무엇이든 마실 수 있지.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소리에 영향을 미치고 … 물론 좋은 영향이지. … 우리는 동위원소 순간이동으로 그들을 여기로 데려올 거야, 아니면 음악을 통해 행성 전체를 순간이동 시키는 편이 훨씬 낫겠지.

 

아프리카 미래주의 학자 그레이엄 로크가 선 라의 ‘우주 흑인 신화’라고 명명한 세계에는 음악, 공간 이동, 유토피아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선 라가 음악의 성격을 무기로 규정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멀리 떨어진 지점을 이어주는 기술로 존재하면서 그 사이를 연결해주는 운송 수단으로 기능한다. 자넬 모네의 “Q.U.E.E.N.” 비디오에 등장하는 인종화된 공동체와 유사하게, 이곳은 흑인을 위한 공동체이며, 당시의 흑인 분리주의 사상에 따라 그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흑인이 더 나은 삶을 영위할 가능성이 재현된다. “그것이 그들의 소리에 영향을 미치고 … 물론 좋은 영향이지.” 선 라는 일단 백인의 영향에서 벗어나면, 흑인들이 더 위대한 것, 즉 음악을 통해 가능해지는 유토피아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비전에서 음악은 부정할 수 없는 핵심이다. 선 라의 우주 철학과 여기에 반영되어 있는 당대의 흑인 민족주의에서 운송 수단일 뿐 아니라, 흑인의 ‘진동’인 음악은 흑인성의 매우 본질적인 부분을 구성한다. 그 행성의 음악과 이 음악의 파동으로 공동체 간에 구축된 연관성을 통해 흑인의 삶이 향상된다. “Q.U.E.E.N.”에서도 마찬가지로 음악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반군이 되려는 사람들을 규합할 뿐 아니라 흑인성을 열등한 것으로 규정하는 담론을 교란하는 역할을 한다.

 

“Q.U.E.E.N.”에서 음악이 시간과 공간의 시냅스를 건너 동료 반군에게 전해지고 선 라의 <Space Is the Place>에서는 흑인들을 지구에서 새로운 땅으로 옮겨 오듯, 아미리 바라카의 단편 ‘리듬 여행Rhythm Travel’에서도 음악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흩어진 흑인을 수송하고 규합하는 역할을 한다. 바라카는 음악을 청취자를 공간은 물론 시간까지 이동시키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힘으로 여긴다. 그의 이야기에는 현대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게 하는 힘을 가진 특정한 음악 구절이 등장한다. 노예들의 노동요나 영가를 부르면, 노래가 말 그대로 과거에 불리던 그 장소로 이동하면서 현대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노예 조상과 연결해준다. 음악이 실제로 우리를 과거로 이동시키지는 않지만, 과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문화적으로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포샤 K. 몰츠비와 같은 음악학자가 증명했듯, 아프리카계 미국인 음악의 진화 양상은 ‘미국의 아프리카 의식 연속체’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조지아 주 해리스 넥의 굴라 가족이 부르는 짧은 노래가 멘더 언어로 쓰인 장례식 추도곡이었음을 밝혀가는 다큐멘터리 <당신이 울부짖는 언어The Language You Cry In>에서도 과거와의 연관성에 대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굴라 가족이 가사의 의미를 잃어버리긴 했지만, 노래는 그 공동체의 노년층에게 남아있었으며, 아멜리아 돌리로부터 그의 딸인 메리 모런에게 전승되었다. 멘데 족이 조상을 기리기 위해 부르던 의식곡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과 그들의 조상 및 그들의 뿌리를 이어주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고 전해진다. 이는 음악이 심지어 기원이 잊힌 경우에서조차 멀리 떨어진 가족을 한데 엮어주는 특정 형태의 문화적 의미를 유지할 수 있음을 특히 강력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멘데 부족과 그들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굴라 일족, 그리고 과학 소설을 사용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고대 아프리카의 이야기를 전하려는 아프리카 미래주의자들에게 음악은 우리와 조상 사이의 간극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준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청자들을 이어주는 음악이라는 개념은 과거의 전통과 미래의 비전을 통합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소리의 구조를 해체하고 재건하며 음악과 역사의 결합을 통해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해방시키기 위한 충동을 나누는 인물상인 디지털 그리오와 공명한다. 이는 이러한 문화적 순간들을 통해서만 추적해갈 수 있는 특유한 혁명적 사상의 역사이다. 바라카의 이야기에서 음악은 공연자를 시간 여행자로 변모시켜 현재 공연자의 물리적 신체를 과거의 시간 및 공간과 통합한다. 노예들이 일하던 장소는 고난과 억압으로 표지되지만, 현재는 행위성이자 저항이었고, 특히 자유, 정의, 심지어 노예를 학대했던 사람들에 대한 처벌까지 언급했던 노래들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노예의 저항 음악에 담긴 혁명적 사상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를 무시하는 미국 역사의 지배적 내러티브와 그 변화된 과거와 개인적 연관을 만들어내는 시간 여행자를 모두 변화시키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모네와 마찬가지로 바라카의 이야기도 흑인 노예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가 가진 행위성과 의미를 부정하는 압도적 역사 내러티브에 균열을 내려 한다. 모네가 집단 내 지식과 연구자들이 아직도 해독하지 못한 음악적 무기 프로그램의 암호화된 메시지를 강조했던 것과 같이, 바라카의 산문도 소양이 없는 백인 독자는 이야기 자체를 해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방언으로 되어 있다. 

 

노래의 본질과 그것이 가진 힘은 모호하며 그에 대한 문화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다. 바라카의 이야기와 모네의 “Q.U.E.E.N.” 뮤직비디오에 담긴 음악 여행은 집단 내 정체성을 동반하는 내부적 지식과 동시에 분명하게 흑인으로 표지된 지식에 기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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