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인-무브

 

<90년대·포스트모더니즘·여성해방문학론>

 

본 대담은 제1회 한국학 페스티발 <대전환의 시대, 한국 학문의 미래> (2022년 1월 27일)에서 발표되었습니다. 지난 1월, 임옥희(여성문화이론연구소 이사)·권보드래(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90년대·포스트모더니즘·여성해방문학론>에 대해 이야기 나눈 내용을 이은솔(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이 정리한 것입니다.
 
대담자인 임옥희·권보드래 선생님, 대담 정리자 이은솔의 도움으로 웹진 인-무브에서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대담에 대한 정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일시 : 2022년 1월 6일 오후 2시 
·장소 : 합정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주최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제1회 한국학페스티벌

- 목차 -


0) 대담에 들어가며
1) 90년대의 페미니즘 담론과 ‘변두리 페미니즘’
2) 80년대 말~90년대 초의 대학 풍경과 경희대 영문학과에서의 지적 경험
3) 90년대의 여성 잡지 : 「또 하나의 문화」, 「여성과 사회」 그리고 「여/성이론」
4) 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담론과 ‘여성 없는 여성주의’의 정치성
5) 배수아에서 양귀자까지, 90년대 여성 문학을 기억하는 방식들 
6) 「여/성이론」창간호와 주디스 버틀러의 주체 이론 소개

 

 

0) 대담에 들어가며 

 

1980년대 말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은 1990년대에 들어와 평론의 핵심 키워드로 부상했을 뿐 아니라, <민족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 심포지엄(백낙청 사회, 도정일 발제, 강내희·황지우 토론)이 열릴 만큼 문학계의 화두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에 관한 시선이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 가령 민족문학론의 입장에서 여성해방문학론을 주장한 「여성과 사회」 논자들은 원고지 300매에 달하는 분량의 기획연재 「포스트모던 여성해방론의 딜레마」(김영희·이명호·김영미 저)를 통해 포스트모더니즘과 여성해방론의 결합이 야기하는 다양한 이론적/실천적 문제점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여성)주체 없는 정치는 불가능하다’라는 논지로 집약되는 이 글은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에 관한 당대의 반응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의 페미니즘 이론이 여성과 남성의 구분에 따른 여성 억압을 비판하면서도 다시 여성 본질론으로 환원하는 모순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이와 달리 여성이라는 범주를 해체하고 주체라는 개념 자체를 의문시하는 또 한 부류의 이론가들도 존재하지만,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회의 변혁과 정치를 이뤄내려는 것인지 불명확하다고 비판한다. 이 글에서 제기한 ‘주체 없는 이론, 주체 없는 정치의 (불)가능성’이라는 테제의 영향력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이 ‘대세’가 되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최근에 와서도 여전히 강력하다. 

 

그렇다면 민족문학론과 다른 위치에서 본 1990년대 한국 학계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 수용 과정은 어떠했을까? 1990년대 영미 학계의 모더니즘 및 포스트모더니즘 문학 이론 소개에 앞장섰으며 당시 한국에서는 생소하고 난해했던 해체주의 페미니즘을 발 빠르게 번역했던 임옥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이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대담이 이루어진 장소는 20여 년 동안 머물렀던 혜화동을 떠나 지난 2018년 마포구 서교동으로 이사 온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이하 여이연)로, 임옥희 이사가 1997년부터 몸담아온 곳이기도 하다. 여이연은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새로운 시대의 이론적 패러다임을 만들겠다는 설립 취지에 맞게 최신 젠더 담론을 소개하는 강의와 콜로키움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비대면 강의로 전환되었기 때문인지 사뭇 조용했다. 그곳에서 임옥희 이사, 권보드래 교수, 이은솔 국문과 박사과정생 세 사람이 ‘1990년대·포스트모더니즘·여성해방문학론’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은솔) 

 

 

1) 90년대의 페미니즘 담론과 ‘변두리 페미니즘’

 

※임옥희는 '임', 권보드래는 '권', 이은솔은 '이'로 표기됨.

 

 

이 : 안녕하세요, 임옥희 선생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제1회 한국학 페스티벌에서 <1990년대 전반기의 한국 문학과 젠더 담론의 지형>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게 되었는데요, 그중 ‘90년대 지식장과 여성학(자)’라는 세션에서 선생님에 관해 소개하고자 대담을 요청드렸습니다.

임 : 민족 문화에 제일 안 어울리는 사람이 저인데…(웃음).

권 : 은솔 씨 질문지 보면서 사실 좀 재미있어했어요. 젊은 사람들이 옛날 선배들을 이렇게 보는구나.

임 : 어떤 이야기를 할까 이러면서.

이 : 저는 선생님이 주로 질문해 주시는 줄 알고 중간중간에 적막이 생기면 이걸 조금씩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웃음).

권 : 무슨 마음을 먹어도 뜻대로 안 될 수 있어.

임 : 풀리는 대로 하죠.

이 : 네. 그래도 또 준비를 해왔으니.

임 : 그렇죠. 저는 변방에서 살았기 때문에 변방의 이야기만 들려드리겠습니다. 페미니즘 내부에서도 참 관점과 담론들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요, 일례로 자매애(sisterhood)를 강조하는 게 페미니즘의 메인스트림이지만 오드리 로드와 같은 흑인 레즈비언은 자매애 바깥의 여성, 즉 시스터 아웃사이더(sister outsider)를 얘기하지요. 한쪽에서 시스터후드를 이야기할 때 다른 한쪽에서 시스터 아웃사이더를 말하는 건 어찌 보면 한국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이야기는 제가 왜 90년대에 포스트 모더니즘에 쏠렸는지에 관한 설명과 이어질 듯해요. 

임 : 최근 부산대에서 열린 학술대회에 참가했는데 거기서 전남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어요. 그 친구들이 지역에서 페미니즘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에 대해서 울먹이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너무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저는 제가 있는 곳을 변두리라고 말하곤 하지만, 서울의 변두리와 지역의 상황은 또 얼마나 다른지…. 페미니즘이라고 말하면 다 비슷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방언들이 너무 많은 거죠. 저도 사투리를 쓰고 있는 거고. 누가 표준어를 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도권과 비제도권, 수도권과 지역 등 여러 차이에 따라 각자 다른 언어들을 쓰고 있죠. 그래서 공통의 언어가 되기 굉장히 힘든 것 같아요. 

임 : 그 친구가 얼마나 힘들면, 거기서 울었거든요. 그런 부분들이 좀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곳에서 더 활동하지 못하고 떠나니까. 거기에 페미니즘으로 구할 수 있는 일자리도 없고, 활동가로서 사는 것도 너무 힘들고. 그렇다 보니 논문을 쓰고 재생산을 한다는 게 페미니즘에서는 잘 안 되는 거예요. 그 발표자는 사회학 전공자였는데, 페미니즘을 한다고 했을 때 자원들이 너무 협소하고 그 안에서 서바이벌하는 것이 힘들죠.

권 : 90년대도 그랬겠지요? 

임 : 그런데 그때가 지금보다는 나았어요. 그때가 나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때는 페미니즘이 굉장히 붐이었어요. 여성 작가들도 엄청나게 쏟아지고, 그 이야기들을 하고. 박완서 선생님 같은 사람들도 페미니즘 이야기를 쓰고, 양귀자 작가든 공지영 작가도 다 그때 한참 나왔죠.

권 : 거의 처음으로 대중적으로 발설한 거죠? 

임 : 예.

이 : 저는 90년대 소설 읽으면서 지금이랑 비슷하다는 느낌도 받았는데요.

임 : 지금하고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할 때는 지금은 일단 미디어가 바뀌어서 너무 환경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때는 많은 여성 작가들이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젊은 세대들이 굉장히 으쌰으쌰 밀어주는 분위기? 그리고 정말 서로 ‘시스터후드를 발휘하자!’ 이런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정치적으로 우리는 올바르고 우리가 하는 말은 정당한 거야’라는 목소리가 굉장히 많았고요. 

임 : 당시 창작과비평(이하 창비)이라는 출판사에서 좌파 혹은 민족주의 담론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는데 거기에 페미니즘도 함께 결합했던 부분이 있거든요. 그래서 지금보다는 분위기가 훨씬, 비교하자면 그때가 훨씬 시스터후드를 잘 발휘했던 시절이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임 : 정말 그때는 대단했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그걸 뭘 지표로 알 수 있냐면,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많았던 시절이에요. 남자들이 ‘나도 페미니스트야’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시절인데, 지금 아무도 그런 소리 안 하잖아요.

권 : 갑자기 반쪽이가 생각나요.

이 : 저도 어렸을 때 봤습니다. 반쪽이에서 아빠가 딸이랑 같이 유럽 여행 가고...

 

 

권 : 예, 분단과 나중에는 페미니즘과도 연결되어서 여성신문에도 계속 연재하시고.

임 : 그 당시에는 남자 페미니스트가 많았었죠. 대부분 그 사람들이 핵가족 안에서 어떻게 가사분담을 하고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하는지의 고민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담론이 완전히 바뀌어 있는 부분도 있잖아요.

권 : 그렇죠. 그때만 해도 거의 설거지를 둘러싼 투쟁.

임 : 예, 또 제사 투쟁. 기존의 결혼 제도 안에서 여자들이 어떻게 좀 더 동등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그리고 항상 여성의 노동을 무가치하게 보는 시각에 대한 가치 투쟁이 주로 이야기가 됐죠. 

임 : 지금은 1인 가구가 30%가 넘는 상황인데, 정상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 해체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해체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퀴어 가족 이야기를 하는 방향이니까, 진짜 많이 달라진 부분이 있죠.

임 : 그 당시에는 동성애라든지, 아니면 퀴어라는 말 자체가 없었어요, 90년대에는. 

권 : 「또 하나의 문화」 이하 「또문」에서, ‘어떻게 다른 가족을 구성할까’라는 논의를 시작했었죠.

임 : 예,  「또문」이 나왔을 때 굉장히 충격이었어요. 조혜정 선생님이 했던 그런 이야기가 90년대에는 표면에 드러났던 시절은 아니었거든요. 그 시절에도 디나이얼 게이 있고, 레즈비언도 있고 다 있었지만 가시화되지 않은 상태였던 거죠. 그 언어들에 목소리를 부여하고 그 이야기들이 공론장에서 논의될 수 있게 된 건 2000년대 들어와야 가능했던 것 같아요.

권 : ‘마음001’이 몇 년도였죠. 

이 : 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임 : 뭐예요? 저도 몰랐어요. 

권 : ‘마음001’은 서울대 동성애자 동아리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학교를 넘어서 일반적으로 파급 효과가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지금은 동성애자 인권지수가 지금 0.01(1%)이지만 동성애자 인권지수가 100이 되는 그날까지 계속하겠다는 것이 모토였어요. 그게 제가 본 걸로는 공공장에서 퀴어가 자기 목소리를 내는 첫 시도였던 것 같아요. 그게 90년대 후반이었던 것 같고. 내 친구들이 ‘우리 다 퀴어 해야 하지 않니’라고. 퀴어라는 표현은 안 썼는데 레즈비언 실천을 해야 하지 않냐는 얘기를 농반진반으로, 완전히 진지하지는 않고. 그런 얘기를 시작했던 것 같아요. 

 

 

2) 80년대 말~90년대 초의 대학 풍경과 경희대 영문학과에서의 지적 경험

 

 

 

 

권 : (이은솔에게) 임옥희 선생님께 뭘 제일 여쭤보고 싶었나요.

이 : 선생님께서 80년대에 대학원에 진학하셔서 박사 논문을 쓰시기까지의 지적 여정이 궁금합니다. 

권 : 어쩌다 그 시절에 대학원 들어가서 공부를 하기로 하셨는지도 궁금하네요.

임 : 그 시절을 이야기하면 또 온갖 ‘라떼는 말야’가 되어 버리는데. 주변에 있는 친구들은 다 감방으로 갔는데 저는 대학원을 갔거든요. 항상 그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그 친구들한테 언제나 그 당시에 조롱감이 됐던 게 ‘어떻게 영문학을 할 수 있니’ 뭐, 그런 시절이었어요. 그 친구들하고 타협을 봤었어요. ‘나는 감방으로는 못 가겠고, 그다음에 내가 열심히 과외를 하든 뭘 하든 해서 옥바라지는 할게.’ (전원 웃음)

임 : 이런 말을 하면 되게 낯뜨겁고 민망한데. 80년대 후반 언더서클이 있던 시절의 이야기예요. 위장 취업이나 이런 걸 논의할 때였는데, 제가 했던 이야기는 ‘나는 내가 공장에 다니던 노동자고, 노동자 되기 싫어서 사실은 대학을 들어왔거든?’이었어요. 이런 이야기가 당시 친구들한테 충격이었던 게, 노동자혁명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저는 노동자가 되기 싫어서 자기만 쏙 빠져나와서 굉장히 이기적으로 살아보려는 인간 중 한 명인 거죠. 그래서 그 친구들이 짱돌 들고 던지고 있을 때, 도서관에 꾸역꾸역 가는 그 무리 중 한 명으로 봐야 하는 거죠, 결과적으로. 대학원이라는 델 들어갔으니까. 

임 : 그런데 사실 위장 취업이라는 말 자체가 굉장히 모순된다고 저는 생각을 했었어요.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취업이 위장이 되어야 하는 건가. 그때 위장 취업은 공장에 들어가서 노조를 만들고 노동자 해방이라는 대의에 헌신하는 그런 이야기였거든요. 그런데 따지고 보자면 위장 취업을 한 학생들 대부분은 대학을 들어갔던 것만으로 그 시절에는 조금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는 조건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취업을 ‘위장’이라는 이름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한계를 잘 보여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임 : 친구들이 공장에 들어가고, 감방에 가고…. 고문이나 이런 것 때문에 나중에 자살한 친구가 두 명이 있어요. 그러니까 항상 빚진 느낌으로 살고 있었고 부채의식을 굉장히 많이 느낄 수밖에 없었던 시절을 살았던 것 같아요. 그게 90년대에 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소위 말하면 약간 좌파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 먹물이었던 사람들의 사회적인 부채의식이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굉장히 부담스러운 시절을 살았고, 제 친구들은 이런 한국에 살기 싫다며 이민 간 친구도 있었고 하여튼 그랬었습니다.

권 : 선생님께서 대학 들어가신 게…?

임 : 80년이었어요. 처음에 들어간 학교는 때려치고 돌아다니다가 도무지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서 들어갔던 게 경희대 80학번. 제가 본래 들어가면 75학번이 되는 거죠.

권 : 그러면 정말 늦게 시작을 하신 거예요. 그런데 80학번들은 참 정말 비운의 학번이었죠.

임 : 들어가자마자 전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서 한 학기를 아예 학교 근처도 못 가고 학교에 탱크가 진주하고 있었던 시절이었고. 경희대는 봄철이면 벚꽃이 굉장히 화려했는데 벚꽃만큼이나 최루탄이 하얗게 깔려 있었어요. 4~5월이면 항상 그랬던 기억이 있고, 백골단 들어와서 진압하고. 그 시절은 ‘피’[페이퍼, 삐라]라고 했는데, 페이퍼를 뿌리고 잡혀가는 걸 하나의 절차처럼 했던 시절이었죠. 군대에 강집 당해서 가서 죽은 친구들도 있고, 하여튼 그런 시절이었어요. 그런 시대를 경험했기 때문에 어찌 보면 아직도 그 세대들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권 : 그렇구나. 저는 어디나 굉장히 눈에 띄는 스승이 있으면, 그분을 중심으로 눈에 띄는 후배 학자와 제자 학자들이 있길래 도정일 선생님이 80년대 초반에 경희대 부임하시고….

임 : 예, 83년에 오셨어요.

권 : 그래서 선생님이나 민승기 선생님 등 공부 많이 하신 분들이 있어서 그 영향이 컸나 짐작했었죠.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이전부터 이력 같은 게 쌓여 있었군요.

임 : 예, 학교에서도 변방에 살았기 때문에 그 변방에서 이쪽저쪽 몸을 다 담근 거죠, 어찌 보면. 이쪽에 기웃, 저쪽에 기웃하다 ‘아, 나는 안 되겠어’ 뭐 이러면서 대학원을 갔던 거고. 대학원에서 친구들한테 말은 번드르르하게, ‘나는 뭔가 다른 일을 좀 해볼 수 있지 않겠어?’ 이딴 소리를 하면서 썼던 논문이 마슈레 논문이었어요. 

임 : 마슈레의 문학 생산이론이라는 걸 썼던 이유는, 그 당시에 민족주의 쪽에서 리얼리즘이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부분들에 좀 반발이 있었죠. ‘왜 리얼리즘이어야 되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이론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피력하고 만든 분이 백낙청 선생님이라면 그분과는 다른 방식으로 공부하셨던 도정일 선생님이 있었고. 도정일 선생님이 들고 왔던 이론들이 데리다, 라캉 등이었는데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그게 84~85년에 제가 석사 논문을 썼던 때였어요. 원래 대학원은 갈 생각 전혀 안 했는데, 도정일 선생님한테 가면 좀 더 배울 게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 영향으로 갔다고 말하는 게 제일 맞을 것 같아요. 그때 함께 공부했던 민승기 선생님이나 이명호 씨 모두 열심히 하고 되게 재밌었어요. 지적인 동료들이었고. 서울대 친구들하고 함께 조인트를 해서 공부도 하고 고려대에 가서 김우창 선생님 만나서 되게 좋아하면서 왔다 갔다 하고 그랬어요.

권 : 영문과는 또 그때 교류가 많았군요.

임 : 경희대에서는 커리큘럼이 너무 빤하니까 다른 학교에 학점 교환을 요청해서 그걸 가능하게 했었고, 대학원 시스템을 좀 바꿔보려고 노력도 좀 했었어요. 어떤 강의를 개설해 달라고 하면 당시 대학원장이셨던 나종일 선생이 그런 요청을 너무 잘 받아줬어요. 우리가 요구하면 바뀔 수도 있다는 걸 느꼈고, 당시에는 학교가 학생들은 좀 무서워하는 분위기도 있었던 것 같아요. ‘학생 저것들을 잘못 건드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이런 분위기 있잖아요.

권 : 대체로 79~81학번이 학교도 왔다 갔다 하고 대학원 학생회도 만들고 재야 연구소도 만들었던 세대들이라서.

임 : 예. 그냥 싸움만 한 게 아니라. 시위했던 세력뿐 아니라 학교에 남았던 세력도 부채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뭔가 변혁을 해야 한다는 의식들은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권 : 근데 묘하게 제가 영문과는 그런 교류가 많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국문과는 그런 교류가 굉장히 활발했고 지금까지도 흔적이 꽤 남아 있는 데 반해 영문과는 󰡔안과밖󰡕 등을 보면서도 광범한 학교 간 교류가 있었다든가 하는 생각은 하지 못했거든요.

임 : 그때 경희대 학번이 좀 독특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굉장히 사납게 굴어서 선생님들이 그냥 ‘그래 해봐!’ 이런 식으로 해줬어요. 진짜.

권 : 제 나이 또래의 국문과 연구자들은 연구를 같이 하면서 밖의 친구들을 만났는데, 영문과 연구자분들은 유학 가서, 같은 지역에 모인 타학교 사람들을 만나는 루트가 많더라고요.

임 : 예, 영문과 사람들이 대부분 그런데 그 당시에 경희대 영문과 사람들이 가난했어요. 대부분 유학 갈 형편도 안 됐던 사람들. 그런 이유도 있었고, 그 당시에는 유학을 다녀와서 국내 학계를 식민화한다는 인식도 강했기 때문에 유학을 굳이 가지 말자는 분위기도 있었습니다. 

권 : 80년대 중후반까지 그 분위기가 확실히 있었어요. 80년대 후반부터는 다시 대세가 유학 가는 걸로 바뀌었죠.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중후반까지, 불문과·독문과를 비롯한 학과들은 모두 학문의 토착성을 일구려는 노력이 있었어요. 일본도 그보다 살짝 앞 시기에 비슷한 움직임이 있는데. 그럼에도 영문학 연구자들로부터 저희와는 너무 다른, 해외 유학 중심 경험을 많이 들은 것 같아요. 그래서 「안과밖」도 전적으로 백낙청 선생님의 영향이라고만 생각해버렸는데, 지금 임옥희 선생님한테 이 얘기를 듣는 게 굉장히 신기해요. 

임 : 예, 그때 남아 있는 사람으로서의 온갖 울분을 많이 얘기했었죠. 당시 교수의 99%가 다 외국 유학을 한 영문과 선생님들이었어요. 국문과는 그래야 할 이유가 없지만, 영문과는 그랬거든요. 그렇게 되면 자기네 풍토에서 학생들을 배출할 수도 없고 학자를 만들 수도 없는데. 신토불이를 지금 이야기하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한국 사회와 거리가 동떨어져 있는 이야기들을 할 수밖에 없는 부분들이 있잖아요. 그게 영문과가 굉장히 욕먹었던 이유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임 : 저도 영문학 전공하면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지식의 수입상’, ‘이론의 수입상’이었고, 이론을 식민화하는 데 가장 앞장선 세력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죠. 실제로 외국어를 아는 것 자체가 권력이 될 수 있는 시대를 살았다는 생각도 들어요.

권 : 저희는 워낙 영문과, 불문과 분들이 공부를 잘하던 시절을 산 사람이라서 요즘 젊은 친구들 감각과는 다를 것 같아요. 백낙청 선생님이나 70년대 말 김현 선생님처럼 외국 문학 하는 분들이 지적 탁월성을 보여줄 때는, 결정적으로 한국 문학이나 한국적인 것에 개입하실 때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에 비해 선생님 세대는 사실 그런 흔적이 그리 짙지는 않으시잖아요. 90년대는 한국 여성 작가들이 굉장히 활발하게 활동하던 때였지만 선생님께서도 비평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지는 않으셨던 것 같고요. 

권 : 또 선생님께서 박사과정 다니실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가장 전위적인 이론을 계속, 빠르게 탐색하시고 문제의식으로 삼는 작업을 해오신 거잖아요. 그 내력도 궁금하고 애초에 공부를 시작할 때 ‘이게 내 몫이야’라거나 ‘이게 나한테 맞아’라고 생각하신 까닭도 있었을 것 같은데.

임 : 옛날이야기를 소환하게 되는데. 여러 가지 환경, 자기가 살아온 역사라는 게 어떤 학문과 만나는 장으로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른 걸 다 떠나서 맑시즘에 굉장히 매력을 느꼈던 이유는 그 이론 자체가 실제로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거란 믿음보다는, 맑시즘이 모든 인간에 대해서 존중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한 사회에서 주변화되고 멸시받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제공해 주는, 자신을 정당화하고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언어를 제공해 주는 게 맑시즘이라고 생각했어요. 

임 : 이 지점 때문에 맑시즘에 매료되었다고 한다면, 페미니즘은 저에게 ‘우와 숨 쉴 수 있겠다’라는 느낌을 줬어요. 똑같이 공부하는데도 남자, 여자라는 차이만으로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가에 관한 의문이 많이 들었어요. 페미니즘으로 무슨 논문을 쓰냐, 그것도 학문이냐고 말하는 시대를 살았으니까.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도록 한 게 페미니즘이었죠. 제가 제일 재밌고 신나게 공부했던 게 맑시즘과 페미니즘이었어요. 

 

 

*게시물에는 각주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대담 전편이 공개된 후에 각주를 포함한 텍스트를 제공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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