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믿음과 행동, 그리고 너로 하여금 견디도록 하는 일들은 네 열등함의 징표가 아니라 그들의 비인간성과 두려움의 징표라는 것을 부디 기억해라....과연 그들은 아직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역사의 덫에 걸려 있고, 그 역사를 이해하기 전에는 덫에서 풀려날 수 없다...우주의 변화가 두려운 건 개인의 현실 감각을 깊숙이 공격하기 때문이다."[각주:2]
‘정체성 정치’는 가치중립적인 명칭이 아니다. 정체성 정치는 현대 사회운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때 주로 사용된다. 젠더와 인종 그리고 장애 등 정체성을 중심으로 차별에 맞서는 사회운동에 따라다니는 꼬리표라 할 수 있다. 정체성 정치를 얘기하는 이들 중에는 지배 질서에 대한 저항을 억누르고 그 정당성을 깎아내리려는 이들도 있다. 또는 정체성 정치가 저항적 실천을 한계 짓기 때문에 억압과 차별을 타파하기 위해선 정체성이라는 틀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어느 쪽이든 ‘정체성 정치’는 오늘날 사회운동의 현실을 진단하고 전망을 모색하는 데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흑인 페미니즘 사상』(Black feminist thought)[각주:3]의 저자인 패트리샤 힐 콜린스와 상호교차성을 연구해온 시르마 빌게가 공저한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각주:4]에서, 두 저자는 ‘정체성 정치’에 대한 주요 비판을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정체성 정치는 분리주의적이며 파편적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당면한 구조적 문제를 개별 정체성의 문제들로 파편화하고, 특정한 정체성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만의 문제로 국한한다. 둘째, 정체성 정치는 경제적 분배보다 문화적 인정에 더 가치를 둔다. 정체성은 문화적인 것이기에, 정체성에 대한 인정만을 중시하게 되면 경제불평등에 대한 투쟁이 약화될 위험이 있다. 셋째, 정체성 정치는 피해자 정치(victimhood politics)를 부추긴다. 정체성에 대한 인정과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피해자 지위에만 집착하고 있다.[각주:5] 하지만 정체성 정치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은 적절한가? 힐 콜린스와 빌게는 세 주장 모두 부당한 비판이라며 단호히 거부한다. 두 저자에 따르면, 이상의 비판들은 정체성과 상호교차성에 대한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또한, 정체성에 근거한 현실의 투쟁들은 오히려 상호교차성을 더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있다. 따라서 정체성 정치에 대한 기존의 비판들은 정체성 정치가 보여준 가능성과 실천적 함의를 축소하거나 왜곡한다.
그런데 이러한 저자들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정체성에 근거한 모든 운동이 언제나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일까? 즉, 두 저자가 제시하는 엄밀한 상호교차성에 근거한 사회운동은 실천 가운데서 실현해가는 것이지, 처음부터 자연스레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체성을 근거로 삼지만 상호교차적이지 않은 대중운동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그에 대해서는 어떤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달리 말해, 왜 정체성을 앞세우면서도 상호교차적이지 않은 대중운동이 나타나는가? 어떻게 해야 정체성을 중심에 두면서도 상호교차적인 대중운동이 가능할까?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정체성 정치의 현실과 이를 둘러싼 이론적 논쟁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특히, 정체성에 근거한 정치적 실천의 ‘미끄러짐’을 면밀하게 살펴봐야 한다. 그럼으로써 부정적 의미의 정체성 정치로 미끄러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렇게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선 어떠한 실천이 필요할지 답을 찾아 나가야 한다.
이번 <크리티컬 북리뷰>에서는 그 여정의 이정표가 되어줄 책 한 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계급, 인종, 대중운동, 정체성 정치 비판’이라는 한국판 부제를 단 아사드 하이더(Asad Haider)의 『오인된 정체성』(Mistaken Identity)[각주:6]이다. 제목만 보면, 하이더 역시 힐 콜린스와 빌게가 거부하는 정체성 정치에 대한 세 가지 비판을 그대로 따르는 게 아니냐는 아쉬움이 들 수 있다. 물론 정체성 정치에 대한 세 가지 비판을 상세히 풀어주기를 기대한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하이더는 ‘정체성 정치’를 비판한다. 그러나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장애 등과 같은 정체성 범주를 무시해도 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상호교차적 문제의식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수용하되, 오늘날 사회운동에 ‘정체성 정치’로 명명되는 어떠한 부정적 측면이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트럼프 시대의 인종과 계급’이라는 원서 부제에서 명확히 드러나듯, 하이더는 미국의 진보적 사회운동이 트럼프 현상으로 대표되는 백인 정체성 정치의 등장에 무력했던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이를 위해 미국에서의 반인종주의 투쟁의 역사와 문화, 정체성에 관한 여러 이론적 작업을 검토한다. 아울러, 정체성을 기각하지 않으면서도 부정적 의미로서의 ‘정체성 정치’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한 과제와 진보적 사회운동이 나가야 할 방향을 모색한다. 이제 『오인된 정체성』에 담긴 하이더의 문제의식과 정체성 정치에 관한 논의를 차근히 살펴보자.
기능주의에 맞선, 유물론적 분석을 위하여
테제 7. "역사유물론자는…결을 거슬러 역사를 솔질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본다."[각주:7]
아사드 하이더는 파키스탄계 미국인으로, 2018년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산타크루즈캠퍼스 의식사학과(the History of Consciousness Department)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캐나다 요크대학교 정치학과의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전후 유럽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의 당과 전략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 1960년대와 1970년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사회운동을 비교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하이더는 당대의 사회정치적 변화를 공산당과 의회 바깥의 사회운동에 초점을 두고서 연구하면서, 특정한 정치적 정세에 대한 개입으로서의 이론적 작업으로 사회운동이 생산한 텍스트들을 분석하는 방법론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연구 방법은 그의 활동에도 반영된다. 그가 창립 멤버이자 편집자로 참여하고 있는 좌파 매체 「뷰포인트」(Viewpoint)는 현대 사회운동에 관한 저널리즘적 비평과 과거 사회운동에 담긴 지식의 역사를 검토하는 작업, 역사적으로 중요한 혁명적 이론과 각종 텍스트의 번역을 주된 활동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지적·실천적 태도를 갖고서 하이더는 오늘날 미국에서 주요한 사회운동 중 하나로 주목받는 반인종주의운동, 인종차별반대운동에 대한 이론적 개입을 시도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오인된 정체성』이다.
하이더의 연구 프로젝트에서 주요한 질문은 ‘사회적 토대의 표현으로서 정치를 규정하지 않고서, 어떻게 사회구조와 정치적 행동 간의 관계를 규명할 것인가?’이다. 그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고 있을까? 『오인된 정체성』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저자의 문제의식을 쫓아가기 위해 잠시 미국의 좌파 매체 「템페스트」(Tempest)에서 소개된 아사드 하이더의 인터뷰[각주:8]를 살펴보자.
2020년 8월 25일부터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에서, 하이더는 2020년 5월 펜실베니아 대학교 명예교수이자 흑인 사회주의자인 아돌프 리드(Adolph Reed Jr.)의 강연 취소를 계기로 벌어진 ‘인종과 계급 환원주의에 대한 논쟁’을 논평한다. 당시 리드는 미국 좌파가 코로나19가 흑인에 미치는 영향을 실제보다 지나치게 강조한 탓에 다른 인종에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있으며 그 결과 다양한 인종을 조직하기 위한 노력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리드는 특정 인종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건과 경제적 정의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미국 좌파 내에서 인종주의와 인종 문제를 과소평가한다는 발발과 함께 ‘계급 환원주의’이자 ‘반동적 태도’라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미국 민주적 사회주의자 뉴욕시 지부에서 진행될 리드의 강연은 취소되었다. 이후 이 논쟁은 「뉴욕타임즈」의 특집 기사로 다뤄질 정도로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하이더는 첫 번째 인터뷰에서 이 논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한편에서는 반인종주의가 전문직 관리자 계층의 계급적 이해에 기반한 신자유주의 정치라고 비판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반인종주의에 대한 비판은 경제불평등으로 모든 문제를 치환하는 계급환원주의이자 반동적 태도라고 주장한다. 전자에 속한 사람들은 후자에 대해, 계급환원주의라는 비판은 자유주의자들이 덧씌운 허구적 상상에 불과하다고 반박한다. 하이더는 이렇게 대립 구도를 정리한 후 양측이 같은 전제를 공유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둘 다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논평한다.
우선, 하이더는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도전이 중요한 과제임을 분명히 한다. 이는 경제적 불평등에 맞선 개혁이 노동자 계급 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색인, 여성, 트랜스젠더에게 더 많은 긍정적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기 때문이고, 역사적으로도 사회주의자와 노동운동은 인종 평등과 성 평등을 위한 사회운동의 최전선에 늘 함께 해왔기 때문이다. 나아가 하이더는 인종주의에 대한 반대와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반대 간의 연관성을 밝혀내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다음으로, 하이더는 경제적 불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이 결코 반동적인 게 아니라고 변론하면서도, 반인종주의를 신자유주의 정치로 규정하는 전자의 논리에 대한 비판을 이어간다. 하이더에 따르면, 그들의 주장은 ‘기능주의’적 관점이라는 방법론적 문제가 있다. 하이더는 기능주의적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기능주의는 모든 사회 현상과 정치적 행동이 사회의 토대로부터 결정된다고 규정하는 방법론적 태도다. 그 때문에 기능주의는 우발성이나 우연적 계기, 의식적 실천을 통한 변화 가능성을 제거해버린다. 이 점에 기능주의는 목적론적이면서 관념론적이지, 결코 유물론적이지 않다.
이후, 하이더는 기능주의에 대한 비판을 인종 문제의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재정식화한다. 모든 인종 차별 반대운동을 신자유주의 정치로 규정하는 것은 인종주의라는 범주를 고정된 것으로 파악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인종 문제를 경제적 조건과 분리해 사고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이더는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강조를 모두 계급환원주의로 배격하는 태도 역시 기능주의적이라고 평가한다.
따라서 하이더는 두 입장 모두가 전제하고 있거나 논쟁 중에 빠져들 수 있는 기능주의의 함정을 지적하며, 인종이라는 범주를 ‘역사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야말로 ‘추상에서 구체로’로 대표되는 유물론적 분석의 핵심이라 강조한다. 즉,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성되고 재생산되는 ‘이데올로기’로서 인종주의를 개념화하고,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속에서 오늘날 반인종주의 운동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하이더는 첫 번째 인터뷰 말미에 BLM(Black Lives Matters) 운동이 제기한 경찰 폭력의 사례를 되짚어보면서 유물론적 분석의 가능성을 제시하려 한다. 예를 들어, 빈곤층은 부유층에 비해 경찰에게 살해될 가능성이 더 크다. 백인 빈민이 경찰에게 살해당하는 사건 또한 빈번하다. 인정의 문제를 사유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흑인이 백인에 비해 경찰에게 살해될 가능성이 더 크다. 이는 빈곤층 다수가 흑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흑인이 백인에 비해 더 빈곤한가? 그럼에도 왜 빈곤층 중에서 흑인이 더 빈번히 살해되는가? 그리고 왜 백인 경찰이 더 쉽게 자주 폭력을 행하는가? 경제적 정의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
빈곤과 경찰폭력의 문제 모두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 하이더는 다음과 같은 방법론적 태도를 견지할 것을 요청한다. 계급이나 인종 범주 모두 특정한 사회 현상을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 대신, 사회현상을 설명할 때 하나의 인과적 요인에만 주목하면서 다른 인과적 요인을 약화시키거나 배제하기보다는, 각 요인의 ‘상대적 자율성’을 인정해야 한다. 하이더는 『오인된 정체성』에서 이런 관점을 견지하면서, 인종주의를 유물론적 분석의 구성요소 중 하나로 받아들인다.
인종 이데올로기 비판 : 추상에서 구체로
테제 6.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 것을 뜻한다. 역사적 유물론의 중요한 과제는 위험의 순간에 역사적 주체에게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를 붙드는 일이다."[각주:9]
『오인된 정체성』은 얇은 책이지만, 이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상당한 내용을 대단히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이 때문에 친절하게 서술된 것에 반해, 생각보다 쉬이 읽히지는 않을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인종 문제에 관한 사회적 관심과 연구가 충분치 않은 상황을 감안할 때, 본서가 담고 있는 논의의 맥락을 온전히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뒤에서는 책의 전체 논의를 간략히 정리하고, 하이더의 이론적 틀과 실천적 함의에 관한 쟁점 몇 가지를 소개해보겠다. 다만, 미국 흑인 사회운동의 역사와 이에 대한 평가보다는 정체성 정치 일반에 관한 논의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이는 인종 문제와 흑인 사회운동에 대해 다루기엔, 필자의 여력과 지면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며, 정체성 정치에 대한 일반화된 비판을 통해 한국의 상황을 돌아보는 데 큰 무리가 없으리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하이더는 흑인 운동의 역사와 당시 제출된 다양한 문헌들을 검토하며, 현대 인종 차별 반대운동의 상황을 진단한다. 이를 위해, 1974년 결성된 컴바히강공동체(Combahee River Collective)과 1966년 결성된 블랙팬서당을 비롯한 흑인 사회운동 조직의 활동과 그에 속한 활동가 - 듀 보이스(W. E. B. Du Bois), 바라카(Amiri Baraka)- 와 이론가들 – 이그나티에프(Noel Ignatiev), 길로이(Paul Gilroy) 등 - 이 작성한 각종 자료를 참고한다. 이때, 하이더는 웬디 브라운(Wendy Brown)이 제기한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각주:10], 즉 “권리가 특수한 정체성 집단에 의해 요구되고 이 범주를 보호하는 것이 정치의 전부가 된다면, 그 집단의 일원은 피해자로 고정되고 만다는 점이다. 권리 자체는 이 피해자에게 가해진 상처에 대한 반응으로 환원되고 만다. 그 권리의 해방적 내용은 사라진다(p. 169).”를 본인의 문제의식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단지 정체성 정치가 그러하다는 진단에 머물지 않는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이러한 한계가 왜 발생하는지를 묻고, 다시금 해방이라는 지향을 되찾기 위해선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다. 이 두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하이더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과 버틀러가 『권력의 정신적 삶』[각주:11]에서 제시한 ‘주체화’와 ‘예속화’에 관한 논의를 자신의 이론적 자원으로 삼는다.
우선, 하이더는 1장 “정체성 정치”와 2장 “인민 내부의 모순들”에서 정체성과 정체성 정치를 이데올로기로 개념화하고, 그것들의 한계를 명확히 한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하이더는 “정체성은 가상적인 것입니다. 정체성은 우리 경험에 관한 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적 이해에 선행하고 우리의 지각 능력에 의해 제한되는 우리 안에 떠도는 이미지입니다...인종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현실의 존립 조건에 맺는 가상적 관계를 재현한 것입니다.”(p. 9) 그런 점에서 하이더는 “정체성은 추상이며, 정체성을 구성해온 구체적 사회적 관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p. 33)라고 말한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정체성은 이데올로기로서 우리가 겪는 경험을 인종, 젠더 등의 범주로 재현해주지만, 정작 재현된 우리의 경험은 현실에서 경험한 바와 간극이 있다. 하이더는 이 간극으로부터 ‘오인’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정체성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정체성으로 묶이는 공통적인 실체가 존재하고, 그 실체를 지닌 개인들이 있고, 이 실체의 특징들이 우리의 경험을 표현해줄 수 있다고 여기게끔 만든다. 이로 인해 실제 사회구조, 현실의 경험은 불분명해진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효과로 인해, 계급환원주의에 맞서며 정체성에 근거한 저항을 조직하려 했던 초기 사회운동의 유산은 오늘날 비판받는 ‘정체성 정치’로 퇴행하고 말았다.
하이더는 이러한 진단에서 기초해 해방의 정치를 재정립하기 위한 과제를 도출하고자 논의를 이어간다. 특히, 컴바히강공동체와 블랙팬서당 등이 보여준 실천의 함의를 발굴한다. 이 지점에서 하이더는 일종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수행한다. “인종, 젠더, 계급은 완전히 다른 사회적 관계를 지칭하며, 그 자체가 구체적인 물질적 역사의 관점에서 설명되어야 할 추상”(p.33)이기에, 구체로 나아갈 것을 요청한다. 정체성을 초역사적으로 살펴보는 게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체화시켜 바라봐야 한다. 즉, 하이더는 정체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구성되어온 역사를 그걸 둘러싼 모든 사회적 요인을 덧붙이는 식으로 구체화해 나가기를 강조한다. 『오인된 정체성』에서 이 작업이 가장 두드러지게 이뤄지는 부분이 바로 3장 “인종 이데올로기”다.
여기서 하이더는 앨런(Theodore W. Allen)과 이그나티에프가 인종 범주를 역사화한 작업[각주:12]에 주목한다. 우선, 하이더는 흑인종 개념이 등장하고 백인종 개념이 등장한 게 아니라 그 반대임을 지적한다. 지배 집단이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먼저 구성하고 그에 비춰 피지배 집단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이더는 백인종의 발명과 그 역사적 과정의 중심에 있는 아일랜드인의 사례를 강조한다.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 역사에 아일랜드인의 지위는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처음에 아일랜드인은 유럽에서 차별받았던 것처럼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노예와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1676년 ‘베이커의 반란’을 계기로, 아일랜드인은 백인종이라는 새롭게 발명된 인종 범주로 포섭된다. 베이커의 반란 당시, 아프리카인 노역자와 유럽인 노역자들이 연대하여 버지니아 식민령의 수도인 제임스타운을 불태우자 식민지 관료와 부유층은 심대한 위협을 느꼈고, 이에 아일랜드인과 같이 하위 노동 계층을 이루고 있던 유럽계 미국인들을 자신과 같은 인종적 범주로 포섭하기 시작했다. 백인을 하나의 법적 범주로 만들고, 노예 대부분을 아프리카인으로 채움과 동시에, 강제 노력을 합리화하기 위해 아프리카인이 열등하다는 인종 이데올로기를 내세웠다. 이 과정에 대해 하이더는 프레드릭 더글러스의 논의[각주:13]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유럽계 미국인 노동자들은 하얀 피부의 특권을 얻는 대신 백인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역자들에 대한 가혹한 억압에 적극 가담하는 행위자가 되었다. 하지만 또한 그들은 자신의 삶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악화시켰다...독자 생존할 수 있는 대규모 노동자운동의 발전을 가로막는 조건을 만들어 냈다.”(p. 100-101)
이상의 분석과 평가는 오늘날 정체성 정치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3장에서 하이더는 인종 이데올로기를 역사화하는 비판적 작업들을 참조함으로써, 정체성 정치가 보편적 해방을 위한 투쟁이 될 수 없음을 독자들에게 확인시킨다. 오히려 그는 정체성 정치가 특정 집단이나 몇몇 엘리트가 지배 질서 내에서 자신들의 지위와 이해관계만을 보장받으려는 것에 불과함을 비판한다. 나아가 이러한 분리주의적이고 퇴행적인 시도는 결국 모두의 해방을 불가능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지배 집단에 동조한 이들의 이해관계를 저해하거나 또 다른 억압을 겪게 한다.
그러면, 왜 인민들의 지배와 억압에 맞선 저항은 정체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붙들리게 되는가? 왜 계급환원주의를 피하면서 모두의 해방을 지향했던 초기 정체성 정치의 형태는 한계에 부딪혔는가? 이는 단지 인민들이 정체성이라는 ‘허상’에 빠져있기 때문인가? 그게 거짓임을 알려주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하이더는 버틀러의 예속화 논의를 참고해 정체성 정치의 미끄러짐을 포착해낸다. 버틀러에 따르면, 주체화는 언제나 예속화를 동반하며, 예속화 없이 주체화는 불가능하다.
예속화와 정체성 정치의 미끄러짐
"그 날 갈피를 못 잡고, 가차 없이 나를 가두는 타자, 백인과 떨어질 수 없던 나는 나를 대상으로 만들면서 내 존재로부터 멀리, 참으로 멀리 떨어졌다."[각주:14]
하이더는 1장 “정체성 정치”에서 버틀러가 『권력의 정신적 삶』에서 논의한 내용을 참고한다. 버틀러는 ‘주체’(subject)라는 단어의 양가성(ambivalence)에 주목한다. 버틀러에 따르면, 주체라는 단어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행위성(agency)을 뜻함과 동시에, 권력의 통제 아래에 있다는 종속되어 있음(subordination)을 의미한다. 이 양가성으로부터 버틀러는 권력에 대한 예속화(subjection)를 통해서 주체가 구성되는 독특한 주체화 양식을 도출해낸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주체는 주체가 되기 위해 권력과 그 권력으로부터의 인정을 요구한다. 권력이 없으면 주체의 저항적 행위도 성립할 수 없다. 결국, 주체는 권력의 효과이며 저항 또한 권력에 대한 복종의 효과다.
하이더는 예속화를 인종의 측면에서 다시 검토하면서 크게 두 가지의 지점을 지적한다. 우선, 흑인이라는 주체는 백인과의 대립 속에서 구성된다. 즉, 권력의 자리에 놓인 백인이라는 범주에 비춰, 다른 유색인들이 자신을 황인종, 흑인종 등의 정체성으로 주체화한다. 다음으로, 흑인이라는 주체는 권리를 배분하는 국가로부터 자신을 인정받음으로써 주체화된다. 이러한 두 경로의 예속화 과정을 통해, 흑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며, 동시에 흑인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는 저항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그러한 실천은 백인과 국가로부터의 인정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하이더는 이러한 예속화/주체화의 양식이 작동하는 과정에서, 정체성 정치의 미끄러짐, 정체성에 대한 오인이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3장에서는 인종 이데올로기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통해, 정체성 정치의 미끄러짐을 검토했다면, 4장 “패싱”에서 하이더는 예속화의 측면에서 인종이라는 정체성 형성과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저항, 그리고 그것이 한계에 부딪히는 과정을 추적한다. 하이더가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여기서 제기된 패싱(passing)에 관한 논의는 아마도 버틀러가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각주:15]의 6장에서 개진하는 넬라 라슨의 『패싱』[각주:16]에 대한 분석에 근거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여기서 ‘패싱’은 흑인이 백인으로 행세하거나 혹은 하층계급이 신분 상승을 꿈꾸며 상층계급처럼 행동하는 걸 의미한다. 이 대목에서 프란츠 파농이 『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유색인 남성과 백인 여성, 유색인 여성과 백인 남성의 관계를 상세히 다뤘던 걸 즉시 떠올릴 수 있다. 라슨의 책을 비평하면서, 버틀러는 패싱이라는 개념으로 인종의 수행적 측면을 드러낸다. 그중 한 측면으로, 백인-중산층-이성애-일부일처제가 헤게모니를 장악한 사회에서 흑인들이 백인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백인들의 사회적 규범을 자신들의 자아 이상으로 삼으면서 벌어지는 지배 질서에 대한 순응과 공모, 그리고 그 실패와 좌절을 보여준다. 백인이라는 타자로부터의 인정과 그에 따른 예속화, 백인 또는 흑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애착 등. 패싱은 버틀러가 날카롭게 지적하는 예속화와 주체화의 모순이 작동하는 구체적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이더는 4장에서 인종 차별 반대 투쟁에서 인종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양상을 포착하려 한다. 버틀러가 라슨에게 그러했듯, 하이더는 바라카의 삶에 반영된 반인종주의 투쟁의 역사에서 패싱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포착한다. 흑인 내부에도 분명 계층적·계급적 차이가 존재한다. 그때 자신의 계급적 지위나 계급상승의 욕구를 가리거나 애써 부정하고, 대신 피부색을 내세우는 식의 행태가 나타날 수 있다. 이는 백인의 죄의식을 독특하게 내면화한 결과다. 이런 행태가 반인종주의로 보편화되면, 흑인과 백인을 완전히 분리된 고정적인 범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화되고, 특정 엘리트의 정치적·경제적 지위 향상을 흑인 모두의 권리 신장을 위한 것으로 정당화하거나 인종 통합을 도모하여 인종 간 갈등을 완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중립화하는 흐름이 대두된다.
그런데 하이더는 바라카의 삶에서 중요한 두 분기점이 있다고 강조한다. 우선, 바라카는 백인 중심의 자유주의적 질서로 포섭되기를 거부하고 흑인 민족주의로 향했다. 더욱이 흑인 민족주의가 백인을 적으로만 규정하는 분리주의의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기에 이른다. 이렇게 바라카는 두 번의 분기점을 거치며 해방의 정치를 모색했다. 하이더가 보기에, 바라카의 삶은 정체성 정치의 한계와 해방을 향한 가능성 모두를 시사한다. 하이더는 바라카가 인종과 민족주의의 한계에 대해 성찰하였듯이, 이데올로기 비판을 수행해야만 정치를 정체성으로 환원하는 태도에 붙들리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다면 정치적 실천을 정체성에 근거한 특권 얻기로 동일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속되지 않는 주체화가 가능한가?
"너는 가능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잔인할 만큼 대놓고 너를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부르는 사회에 태어났다….오직 네 경험만 믿어라. 네가 어디서 왔는지 알아라. 네가 어디서 왔는지 알면, 실로 무한히 어디든 갈 수 있다."[각주:17]
『오인된 정체성』에서 하이더는 인종과 같은 정체성을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요소로 받아들이되, 인종이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임을 유물론적 분석을 통해 입증한다. 인종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하이더는 인종이나 젠더 등의 특정 정체성 범주만을 내세우는 정체성 정치가 관념론적인 관점과 분리주의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고 꼬집는다. 나아가 그 결과로 저항을 파편화시키고 대중들을 국가나 지배 질서에 의존하도록 만든다고 비판한다. 반대로, 모든 걸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로 치환하거나 계급투쟁으로 환원하는 것 또한 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하이더는 해방의 정치가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할 수 있다고 보는가? 무엇보다 하이더는 정체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이 해방의 정치를 실천하는 출발점이라고 본다. 그런데 인종 이데올로기가 ‘가상’이라는 점을 사람들이 인식하게 되면, 그것만으로 예속화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이 생겨나는가?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 실천도 그와 함께 자연스럽게 달라지는가? 달리 말해, 인민들이 자신을 주체화하는 과정, 즉 젠더나 인종 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예속화’의 문제를 피할 수 있는가?
하이더는 버틀러의 예속화/주체화 논의를 통해 정체성 정치를 비판한다. 정체성 정치가 예속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버틀러가 얘기하는 예속화와 주체화의 관계를 하이더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다. 하이더는 1장에서 “자유주의적 정치 형태에서 우리는 권력에 대한 예속화를 통해 정치에 참여하는 주체가 된다”(P. 32)고 설명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자유주의적 정치 형태다. 하이더는 자유주의 사회에서 권력에 대한 예속화가 작동하는 것이고, 다른 사회에서라면 권력에 대한 예속화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이해하는 걸까?
이 책에선 예속화에 대한 설명을 더는 이어가지 않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쟁점을 제기하는 수준에서 추측해볼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바로 앞 장을 참고해보자. 하이더는 버틀러를 인용하면서 “자유주의 정치 담론에서 권력 관계들은...여러 사회적 실천 속에서 생산되고 행사”(p. 31)되며, 그 결과로 개인화(individualization)가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볼 때, 버틀러가 제시하고 하이더가 분석의 틀로 따르는, 예속화의 양식은 자유주의에 입각한 사회질서에서 형성되고 작동하는 역사적 구성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버틀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참고해 푸코의 권력이론, 알튀세르의 호명이론 등을 검토해나간다. 이 점에서 버틀러 또한, 프로이트에게 제기되었던 비판인 초역사성과 보편성의 문제에 동일하게 부딪히는 건 아닐까? 버틀러가 제시한 예속화 양식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조건이자, 초역사적으로 작동하는 도식인가? 버틀러의 대답이 무엇인지, 여기서 더 살펴보긴 어렵다. 다만 앞서 보았듯, 하이더는 예속화 양식을 특정한 역사적 조건 하에서 성립하는 사회구성물로 이해하는 것 같다. 이는 다른 주체화의 양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도 있지만, 하이더의 입장을 따른다면 다음의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예속되지 않는 주체화’가 가능한가?
하이더는 5장 “법과 질서”에서 영국에서의 신자유주의화와 이에 대한 스튜어트 홀과 그의 동료들의 분석[각주:18]을 참고해,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인종 문제가 대두할 때, 사회운동이 어떻게 인종 문제에 대응할 것인지가 중요한 과제라는 점을 밝힌다. 하이더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이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물론 영화 <런던 프라이드>(Pride)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계급과 인종, 젠더를 넘어선 연대의 움직임이 형성되기도 했다. 하지만 인종 내에서의 계급 갈등과 계급 내에서의 인종 간 갈등이 격화되는 한편, 영국의 정부가 나서서 이를 사회경제적 위기로 간주하고 적극 개입 및 관리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연대는 무력화되고 말았다. 이 사례를 통해, 하이더는 사회운동단체나 사회주의 조직과 정당이 정체성 문제를 자신의 과제로 삼을 것을 요청한다. 나아가 정체성 문제와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연계하는 정책 프로그램을 고안하고, 이를 실현할 구체적 조직화 전략을 갖출 것을 제안한다.
이 지점에서 하이더가 제시하는 사회운동의 과제와 전망이 무엇인지 명확해진다. 하이더는 두 가지를 해방의 정치에 필수적이라고 보는 것 같다. 하나는 이데올로기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 근거한 당(또는 단체)의 조직화다. 후자의 경우, 대중운동 속에 자리하면서도, 대중운동을 견인하는 그런 조직과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대중운동 속에 위치하면서, 어떻게 대중운동의 관점과 입장으로부터 앞서갈 수 있을까? 이는 ‘가상’에서 깨어난 사람들 덕분일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데올로기라는 가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물론 ‘이데올로기 비판’ 덕분이다. 그런데 그러한 거리두기와 비판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를 설명하지 않으면, 조직화에 대한 강조는 외부로부터의 개입과 선도로만 이해될 위험이 크며 자칫 계몽적 태도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하이더가 이러한 우려를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하이더가 조직적 실천과 인식론적 비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역사 속에서 확인되는 대중들의 저항에 주목한다. 나아가 이러한 저항이 사회구조로부터 결정되는 게 아니라, 우연적 계기들 속에서 형성되고 변화하는 것으로 바라본다. 하이더는 6장 “반란자적 보편성”에서 자유를 요구하는 대중들의 적극적 행위성을 긍정한다.
6장에서 하이더는 막시밀리아노 톰바(Massimiliano Tomba)가 제시한 ‘반란자적 보편성’으로부터 해방의 정치가 가능할 것이라 전망한다. 잠시 톰바의 ‘반란자적 보편성’ 논의[각주:19]를 자세히 살펴보자.
톰바는 1789년 인권선언과 1793년 자코뱅 헌법 사이의 차이점에 주목한다. 1789년 인권선언이 제정된 이후에, 그 내용을 누구에게 어느 정도로 적용할 것이냐를 둘러싼 논쟁이 격화되었다. 특히 프랑스 식민지들에서 반발이 컸다. 결국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을 구분하는 식으로 권리 보장에 제한을 두는 조치가 취해졌다. 여성과 유색인 노예 등은 이에 반발하며 모두에게 평등하게 인권선언을 적용하라고 요구했다.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가 이끈 아이티 혁명이 대표적 사례였다. 당시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로 대표되는 자코뱅은 인권선언을 포기하든 식민지를 포기하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퀼로트의 지지에 힘입어 자코뱅의 주도하에 새로운 헌법이 채택되었다. 1793년 헌법은 저항권에 대한 무제한적 인정과 여성이나 유색인, 이민자, 노예 가릴 것이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기를 천명했다. 하지만 자코뱅의 몰락과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평등주의 준칙은 후퇴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러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톰바는 평등주의 준칙을 내세우는 배제되고 소외된 자들의 투쟁이야말로 보편성을 가장 제대로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의를 따라 하이더도 평등주의적 준칙를 따른 투쟁이야말로 해방의 정치를 가능케 한다고 본다. 그러면서, 하이더는 정의와 평등을 요구하며 저항해온 배제된 자들은 수동적 피해자가 아니라 “적극적 행위자였고, 반란자적 보편성의 근원이었다”(p.174)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하이더는 예속화의 문제를 은근슬쩍 건너뛰고 있다. 어떻게 정체성에 대한 ‘탈동일시’가 일어날 수 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역사에서 저항의 주체들은 언제나 평등주의 준칙을 지킬 것을 요구해왔다고 전제해버린다. 그런 후에 이러한 요구를 왜곡시키는 건 자유주의적 사고나 정체성 이데올로기라고 지적한다. 하이더는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인민들의 투쟁에서 가능성을 발견함으로써 앞서 제기한 계몽주의의 위험을 약화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하이더는 자신이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기 위해 도입한 예속화의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않고 넘겨버린다. 그 대신 대중들의 자율성과 억압, 차별, 불평등에 맞선 투쟁의 자생성을 인정하는 것에 그치고 만다. 조직화 과정에서 실행될 전략과 프로그램들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할 뿐이다. 분명 하이더는 예속화되지 않는 주체화의 가능성을 긍정한다. 하지만 예속화되지 않는 주체화는 왜 그리고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그의 대답은 불분명하다.
아마도 그건 하이더가 버틀러의 예속화 논의 중 일부분만을 분석에 활용하는 것에 그치기 때문은 아닐까? 그로 말미암아 하이더는 자신이 수행하는 정체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과 정체성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해방의 정치를 모색하는 작업 사이에 어딘가 모를 허점을 노출하고 마는 건 아닐까?
다소 거칠지만, 하이더의 논의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화에 관한 두 가지 다른 대답을 살펴보자. 버틀러라면, 예속화의 양식에 내재한 애착으로부터 촉발되는 애도와 분노가 타자의 윤리를 가능케 할 조건이라고 답할지도 모른다. 한편, 하이더가 책과 강연에서 종종 인용하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라면, 마치 톰바가 평등주의 준칙에 착안하였듯이, 평등자유(égaliberté)명제로 대표되는 권리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그를 통한 시빌리테(civilité)의 정치를 제안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톰바와 발리바르의 논의엔 차이가 있다. 톰바는 인권선언 그 자체가 아니라 배제된 이들의 존재와 그들이 행한 실천의 의미를 강조한다. 이에 반해, 발리바르는 배제된 이들이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바로 인권선언과 같은 권리의 보편성을 담지한 법과 제도, 조직 등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본다.
이 두 대답 중 뭐가 더 적합하고 타당한지, 두 논의 사이의 연관성은 무엇일지는 질문으로 남겨두자. 다만, 하이더가 제기한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을 더욱 진전시켜야 한다면, 우리가 마주해야 할 쟁점 중 하나가 바로 ‘정치적 주체화’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많은 논쟁과 실천 속에서 해방의 정치를 위한 길을 모색해나갈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불친절하고 부족한 <크리티컬 북리뷰>를 이만 마친다.
이 글은 지난 2022년 4월 첫째 주에 발행된 “주간 에라스무스 Critical Book Review”에 실렸다.[본문으로]
제임스 볼드윈 지음. 박다솜 옮김. 2020. “나의 감옥이 흔들렸다 – 노예 해방 1백 주년을 맞아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 『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The Fire Next Time). 파주: 열린책들. p.26-28[본문으로]
Wendy Brown. 1995. States of Injury.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본문으로]
주디스 버틀러 저. 강경덕·김세서리아 역. 2019. 『권력의 정신적 삶』. 그린비.[본문으로]
Noel Ignatiev. How the Irish Became White.Routledge. ; Theodore W. Allen. 2012. The Invention of the White Race. Verso.[본문으로]
Fredrick Douglass. 1854. “The Kansa-Nebraska Bill.” in The Life and Writings of Fredrick Douglass, vol. 1, ed. Philip S. Foner. 1950. International Publishtes.[본문으로]
프란츠 파농 지음. 노서경 옮김. 2014. 『검은 피부 하얀 가면』. 문학동네. p.110 [본문으로]
Stuart Hall, Chas Critcher, Tony Jefferson, John Clarke and Brian Roberts. 2013. Policing the Crisis : Mugging, the State and Law and Order. Palgrave Macmillan.[본문으로]
Massimiliano Tomba. 2011. “1793: The Neglected Legacy of Insurgent Universality.” History of Present. A Jounal of Critical Histoty, vol 5, no. 2[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