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상호-대상성/객관성/객체성(inter-objectivité)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 지음
배세진 옮김(정치철학 박사)
[옮긴이 앞글: 이 텍스트는 발리바르의 논문집 『시민-주체』(Citoyen sujet, PUF, 2011)에 수록된 논문 「상품의 사회계약: 마르크스와 교환의 주체」의 ‘후기’(post-scriptum)를 번역한 것이다.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은 번역이므로 가독성을 해치더라도 inter-objectivité는 ‘상호-대상성/객관성/객체성’으로, inter-subjectivité는 ‘상호-주관성/주체성’으로 옮기도록 하겠다. inter는 ‘상호’ 혹은 ‘간’으로 옮길 수 있으며, objectivité는 불어의 objet나 영어의 object가 ‘대상’, ‘객관’, ‘객체’를 모두 의미하듯 ‘대상성’, ‘객관성’, ‘객체성’으로 모두 옮길 수 있다. 참고로 옮긴이가 번역한 『마르크스의 철학』(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배세진 옮김, 오월의봄, 2018)의 부록 3번으로 번역된 ‘상품의 사회계약과 화폐의 마르크스적 구성: 화폐의 보편성이라는 문제에 관하여’는 발리바르의 요청에 따라 『시민-주체』에 실린 판본이 아니라 이 글의 최초 출간본인 2004년의 텍스트를 번역한거라 이 후기가 빠져있을 뿐만 아니라 (옮긴이가 상당히 개입했음에도) 여러 지점에서 『시민-주체』에 실린 판본과는 내용이 다르다. 참고로 이 ‘상호-대상성/객관성/객체성’이라는 개념을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의 (‘상호-능동성’ 즉 inter-activity와 대립되는) ‘상호-수동성’(inter-passivity) 개념과 비교해보는 것은 계발적일 것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지젝 또한 마르크스 해석에서 물신숭배론을 중시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수련 옮김, 새물결, 2013)을 참조하길 바란다.]
앞에서 우리가 수행한 분석을 근대 주체성의 문제설정에 관한 탐구 내에, 특히 이 문제설정이 헤겔의 명제들과 맺는 관계 내에 더 잘 위치짓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언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1]
1) 첫 번째로, ‘상품의 사회계약’이라는 이름으로 소묘된 구조가 ‘상호-주관성/주체성’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대상성/객관성/객체성’의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로 대상들(상품들) -사회적 노동의 역량(puissance)을 담지하는 대상으로서의 상품들- 의 수준에서 알튀세르가 ‘사회효과’(effet de société)라고 불렀던 효과를 생산하는 관계들이 확립되기 때문이다[2][3]. 하지만 여기에서 즉시 이러한 상호-대상성/객관성/객체성이 그 자체로 주체성의 양식 또는 주체의 구성을 형성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는 주체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진다/낯설어진다/소외된다’(devenir étranger à soi, Entfremdung)는 의미에서 마르크스가 ‘소외’라고 부르는 것이다. 소외된 주체성은 그럼에도 엄연히 하나의 주체성이다. 아마도 심지어 이 주체성은 역사적으로 이 통념(notion)을 일반화했으며 이 개념에 존재론적 유효범위를 부여했던, 주어진 사회적 구조 내에서 전형적인 주체성이기까지 할 것이다. 이제 이 상호-대상성/객관성/객체성 -마르크스는 이 상호-대상성/객관성/객체성의 구조를 역사적 관점에서 기술하고 해석했다- 이 ‘사물’(chose)이라는 범주와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인격’(personne)이라는 범주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질문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텍스트 내에서 ‘인격’에 대한 참조가 가지는 모호성(amphibologie)과 맞닥뜨리게 된다. 한편으로, 인격이라는 범주는 소외에 선행하는 주체들(그러니까 현실에서는en pratique 상품관계들)에 적용되거나 또는 정반대로 소외에 대한 (가설적) 지양으로부터 돌발하는, 다시 말해 자신들의 ‘사회적 관계들’이 사물들 사이의 관계라는 형태로 ‘전도되어’(inversés) 나타나지 않을 그러한 주체들에게 적용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특히 『자본』 1권 1편 2장, 즉 ‘교환과정’ -나는 앞에서 이 장 전체가 헤겔적인 의미의 ‘추상법’이라는 범주들 위에 기초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이 설명하듯) ‘인격’은 사물의 물신숭배의 또 다른 면을, 즉 상품 유통에 필수적인 소유와 교환의 권리에 의해 공형상화된(configuré) 인간의 ‘분신’(인간적인[즉 인간의 모습을 한] 분신이라고 말하지는 않더라도)을 지시한다.[4] 이것이 내가 ‘사물의 물신숭배’와 평행하는 ‘인격의 물신숭배’에 대해 언급했던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마르크스에게서 인격의 물신숭배는 사물의 물신숭배의 한 측면일 뿐이다. 물론 이러한 [마르크스의 텍스트 내에서 ‘인격’이라는 준거가 지니는] 모호성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다. ‘인격’이라는 범주의 의미들 중에 우리는 하나의 의미 또는 다른 하나의 의미를 선택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제시된 소외의 현상학의 두 가지 가능한 독해들 중 하나 또는 다른 하나에 유리한 방식으로 선택을 해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인격’을 소외로부터 자유로운 주체성(상품 교환의 일반화에 선행하는 것이든 후행하는 것이든)으로 부르기로 선택한다면, 우리는 (이론적으로) 탈소외된 사회성(sociabilité désaliénée) -이 탈소외된 사회성 안에서 순수한 ‘상호-주관성/주체성’이 부정의 부정을 통해 상호-대상성/객관성/객체성을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재구성될 것이다- 을 다룰 수 있는 수단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인격’을 (마르크스가 다른 곳에서 언급하듯) ‘상품의 사회계약’이 규정한 기능들을 이행하는 주체들이 담지해야 하는 ‘법적 가면’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어떠한 탈소외도 언급하지 않는 것이며(최소한 이러한 표상구조의 출현이 가지는 역사적 조건들이 확정되지précisées 않는 한 - 왜냐하면 이 역사적 조건들은 이러한 표상구조를 필연적으로 형성할 뿐만 아니라 이 표상구조에 그 한계를 부여하기도 하기 때문에), 대신 우리는 하나의 구조의 주체-효과를 분석하는 것이다.[5] 이러한 두 번째 가능성은 첫 번째 가능성만큼이나 역시 비판적인데, 왜냐하면 이 두 번째 가능성은 예속화(assujettissement)의 논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하지만 물론 이는 훨씬 덜 ‘혁명적’이다). 부차적으로 또 하나 지적하자면, 이 두 번째 가능성은 마르크스의 구축물의 (개념적인) 이론적 결과를 가장 잘 기술한다는 점을, 하지만 그럼에도 마르크스가 의식적으로 증명하려 노력했던 바와는 조응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자. 아이러니하게도 ‘이성의 간지’는 철학적 글쓰기에서도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2) 두 번째로, 우리는 마르크스적 ‘사회계약’이 사회계약의 고전적 모델들과 가지는 유사성이라는 문제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주권의 발생genèse과 그 ‘절대적’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홉스가 최초로 구축했던) ‘총체적 소외’의 문제설정 내에서 루소가 수행한 ‘전복’(renversement)을 특별히 중심적으로 고찰하는 더욱 정교한 해석을 이 마르크스적 사회계약에 부여[적용]해야 한다. 내가 위에서 제안했듯이, ‘인격’이 ‘사물’로 예속화되는 바를 포함하는 방식으로 마르크스가 제안한 Tun aller und jeder[6]의 현상학(이 현상학에서 ‘인격’은 ‘사물’로 전환된다transférée)은 인가(autorisation)라는 (구조적) 과정(이는 상품들의 사회에서 하나의 상품을 ‘착출extraction’[즉 배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반적 등가물의 구성 과정인데, 이러한 구성은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하나의 상품을 통해서만 배타적으로 교환되겠다는 상품들 전체의 동시적 결정에서 기원한다), 그리고 이 과정의 뒤를 이어 나타나는 표상(représentation) 과정(이는 일반적 등가물 -일반적 등가물이라는 것은 하나의 순수한 기능일 뿐이다- 이 화폐argent의 ‘육신’ 내에서 육화 또는 물질화되는 것인데, 이 육화 또는 물질화는 이 일반적 등가물이 보편적 수요의 대상으로 자신을 자율화하고 새로운 상품들을 창조할 수 있는 자신의 고유한 권력을 발전시키는 과정과 동시에 행해진다coïncidant)을 기술함으로써 시작된다. 이렇듯 마르크스는 루소에서 홉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패러다임적 역행을 작동시키는데, 이는 (헤겔과 관련하여 - 그런데 헤겔의 Sache selbst[7]의 모델들 중 하나는 루소적인 ‘일반의지’였다) 주권의 신비롭고 환상적인(mythiques, fantasmatiques) 상상적 역량(바로 ‘물신’이라는 이름이 이 주권의 상상적 역량의 이름으로 꼭 알맞은 것이다)에 대한 자신의 강조와 조응하는 것이다. 주권의 구성을 (의지volonté 또는 의식conscience의 효과보다는) ‘사물들이 가지는 초자연적 권력’이라는 표상과 연결짓는 심원한 친화성을 정교하게 이론화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마르크스가 소묘했던 바가 상품의 사회화가 취하는 ‘민주적’ 도식(이 도식 안에서는, 심지어 자율화된 경우라 할지라도, ‘전체tout’의 권력은 집합적 구성의 표현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8])에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만큼 놀라운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마르크스가 설정했던 비판적 목표(그리고 심지어는 ‘탈소외’의 정치라는 의미에서 정치적 목표)와 관련해, 이전의 것과 유사한 애매성(ambiguïté) 또는 모호성(amphibologie)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상호-대상성/객관성/객체성의 구성을 떠받치는 인가와 표상의 과정을 명확히 해명함으로써) ‘물신’의 매혹을 제거하고 어떤 의미에서 지적인 방식으로 주체들을 ‘사물’ -주체들이 타자와 맺는 관계를 독점하기 위해 이 관계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인가? 혹은 이는 사회적 노동이 교환에 종속된다는 사실 또는 노동생산물의 사회적 유용성이 ‘가치형태’로 표현된다 -화폐(argent)는 이 가치형태의 필연적 전개(développement)를 구성한다- 는 사실로부터 산출되는 유사-초월론적인 허상(illusion)의 효과들에 대한 제거(déduction)를 통해 (상품 교환의 지양을 통해 만들어질) 자유와 연대(또는 이 둘 사이의 상호 인정)를 상상하게(그리고 이러한 상상을 넘어 꿈꾸게…) 만드는 것인가? 이러한 양자택일은 마르크스 자신의 지표들을 따라 물신숭배에 대한 분석을 상품사회와 공산주의 사회 사이의 차이라는 문제설정과 연결짓는다면 전혀 부차적인 문제가 아닐 것이다.
3) 바로 이것이 정확히 나의 세 번째 언급 대상이 되는 것이다. 세 번째 언급은 공동체와 보편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마르크스가 제기하는 질문을 (바로 이 수준에서) 변용하는 비결정성(indétermination)에 관한 것이다.[9] 분명히 이 질문은 마르크스에게서 적지 않게 집요한 질문이었으며, 또한 ‘모순들의 지양’으로 향하는 변증법적 전진(progression)의 방향설정을 위해 적지 않게 결정적인 질문이었다(하지만 마르크스와 달리 헤겔에게는, 특히 『정신현상학』의 헤겔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헤겔에게서 ‘공통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이 반정립적인 두 극 -Wir(‘우리’)라는 극과 Sein(‘존재’ 또는 ‘범주’)라는 극- 과 같은 것(상호-주관성/주체성은 이 두 극 사이에서 움직인다[10])인 반면에, 마르크스에게서 이는 두 가지 보편성 사이의 경쟁으로 나타나는 ‘역사의 종말/목적(fin)’이라는 관념과 관련되는 것처럼 보인다. 첫 번째 보편성은 (모든 ‘사회’ 또는 ‘사회성’은 아니라고 해도) 모든 현실적 공동체로부터 근원적으로 배타적인 보편성(이는 상품들의 유통과 생산에 고유한 보편성인데, 그 ‘매개체’는 화폐, 다른 말로 표현하면 추상노동들 사이의 일반화된 양적 등가성의 물질화이다)이며, 두 번째 보편성은 ‘생산작업의 합리적 조직화’, 그리고 주체들 사이에서의 노동과 그 노동생산물의 분배 메커니즘의 ‘투명성’으로 구성되는 진정한/본래적(authentique) 공동체의 실현과 동일시되는 보편성이다. 우리가 이러한 두 가지 보편성 사이의 경쟁을 보편성과 공동체 그 자체 사이의 확정적 분리와 다시 연결시킬 수도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보편성이 표상적 추상(abstraction représentative)과 분리 불가능한 것으로 사고되고 이와 반대로 공동체가 구체적 보편(이 구체적 보편 내에서 ‘공통적인 것’은 모든 개인을 다른 개인들과 관계 맺도록 해주는 자유와 평등의 법칙 그 자체이다)에 대한 추구의 극단으로 사고되는 한에서 말이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공통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사이의 변증법의 ‘해소’(résolution) -이는 헤겔에서와 같이 두 항 사이의 점증하는 구분 불가능성(indiscernabilité) 위에 기초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두 항의 제거/환원 불가능성(irréductibilité) 위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최소한 헤겔의 몇몇 텍스트에서는 -특히 무엇보다도 이러한 변증법적 운동의 ‘객관적인’ 국가[주의]적 종합을 제시하지 않도록 경계하며 그 대신 공동체에 대한 아포리아적이고 비극적이며 동시에 신비로운 형상(이 형상의 원동력은 개인들을 상징적 죽음, 그리고 이 상징적 죽음이 약속하는 화해와 동일시하는 것이다)[11]으로 이어지는 『정신현상학』이 그러하다- 이러한 ‘근접성’(proximité)이 어떠한 의미에서는 속임수이거나 또는 결여(역사는 이 결여의 충족을 무한히 지연시킨다)를 은폐한다는 점 또한 알고 있다. 정반대로, 마르크스에게서 역사는 아마도 믿음이라는 행위를 통해서만(또는, 그다지 다른 것은 아니지만 [1] 계급투쟁, [2] 상품형태를 인간들 그 자체의 재생산으로[까지] 확장하는 것에 기초해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내적 모순의 발전, 마지막으로 [3] 노동의 집산화와 관련하여 ‘공리주의적’ 반反경향에 대한 ‘사회주의화’ 경향의 장기적 관점에서의 우위, 이 세 가지가 만들어내는 ‘필연적’ 효과들을 변증법적 전제présomption dialectique로 간주함으로써) 보편적인 것의 두 가지 양태 사이에서 더 이상 동요하지 않고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아포리아 중 어떤 아포리아가 다른 아포리아보다 (이 아포리아라는 단어의 고유한 의미대로) 더욱 유지하기 불가능한 것인지를 밝혀내는 문제는 분명 논리적 증명에 속하는 문제는 아니다. 이 두 가지 아포리아 모두를 고려한다면, 이 아포리아들이 또한 공통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을 정의하기 위한 새로운 양식을 요청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리고 ‘주체’에 대한 새로운 개념concept이 이 양식에 대응될 수밖에 없다)[12].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