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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물론 5연구한국어판 서문[각주:1]

 


1974년 출간한 저의 논문 모음집 역사유물론 5연구가 배세진 씨의 노고로 이전 1989년 번역본과는 달리 이제 완역돼 새 한국어 번역이 나올 수 있게 되어 저는 큰 기쁨과 영광을 느낍니다. 저는 역자 배세진 씨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은데요, 그런데 45년도 더 전에 출간했던(그리고 이 5연구 중 몇몇 연구의 경우 그보다도 더 오래되었죠) 책을 오늘날 한국의 독자들이오늘날 한국의 독자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제가 교육받았던 그리고 제가 철학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던 그러한 세계와는 분명 매우 다른 세계 속에서 성찰의 시대[혹은 나이]로 이제 막 접어들고 있는, 젊은 세대의 독자들이관심을 가질 만한 가치가 있을 거라 판단하고 이를 번역하기 위해 그가 그토록 고된 작업을 수행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당연히 제가 표하는 감사에는 감동 또한 함께할 것입니다.


또한 저는 이 기회를 빌려 저의 미래의 독자들에게, 그리고 이 미래의 독자들을 통해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반가운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애석하게도 저는 한국에서 저에게 제안한 초대들을 수락할 수 없었고, 결국 한국을 직접 방문해 그 민감한 현실 속에서 이 나라를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저는 영화, 예술작품, 문학, 언론 그리고 한국의 몇몇 학자들(이들 중 몇몇은 이미 자신들의 동료 시민들에게 제 작업을 소개하기를 원하고 있었죠)과 나누었던 서신들을 통해서만,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히 제가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던 곳인 저의 나라 프랑스에 저 세계 반대편 끝에서부터 유학을 온 한국 학생들을 통해서만 한국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이들 덕분에 저는 한국의 정신적[문화적 혹은 학문적] 풍요로움을, 그리고 한국에서(특히 대학에서) 전개되었던 해방투쟁의 역량을 조금은 인지하게 되었고, 이 해방투쟁의 주인공들의 영웅적 행위에 감탄했습니다. 저에게 이는, 제 책들 중 한 권이 한국어로 새로이 번역된다는 것이 단순한 우연적 사건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명, 이 책에 포함되어 있는 시론들과 이 책이 담고 있는 역사유물론에 관한 해석의 관념들 혹은 가설들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사고해야 하는지를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저에게 속해 있지는 않습니다. 상황의 강제에 의해 저는 이에 대한 왜곡된 지각[기억]을 갖고 있는데, 달리 말해 이는 다른 요소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정치철학의 영역 내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해석과 이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 저로 하여금 성찰하도록 만들기를 멈추지 않았던 해석의 관념들 혹은 가설들에서의 요소들만을, 그리고 오류는 아니라고 해도(그런데 철학에 오류란 것이 있다면 그건 도대체 무엇입니까?) 최소한 더 이상은 유지하기가 불가능한 그러한 입장들로 오늘의 제가 간주하는 혹은 그 반대물로 전도해야만 할 것 같은(많은 경우 이러한 반대물로의 전도는 동일한 질문에 대해 계속 실험해나가는 하나의 방식이죠) 그러한 요소들만을 [다른 요소들 대신] 제가 기억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 책을 제가 아닌 다른 이가 쓴 책으로 판단하기 위해 이 책으로부터 스스로를 거리 둘 수 없으며, 또한 저는 이 책을 썼던 당시의 저와 지금의 저를 동일시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 가지 지점에서 이제 저와는 서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어느 한 명의 프랑스 철학자, 하지만 인격적 동일성(identité personnelle)이라는 질문에 관한 그의 현상학적 작업에 제가 여전히 경탄하고 있는 어느 한 명의 프랑스 철학자(즉 폴 리쾨르)의 아름다운 표현을 활용하자면, 이는 다른 한 명의 타자와 같은 나 자신’(moi-même comme un autre)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 서문에서, 한국의 독자들의 너그러움을 요청하면서, 이 책을 썼던 당시 제가 작업했던 조건들에 대한 몇 가지 세부적인 맥락들을 제공하고, 이 책에 포함된 연구들중 세 가지가 저의 관점에서 보자면 여전히 지니고 있는(물론 이 세 연구 각각이 서로 다른 이유로 인해 지니고 있는) 흥미로운 점들을 지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합니다.[각주:2] 하지만 제가 이러한 저의 선택을, 다른 독해들보다 몇몇 특정한 독해들을 특권화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겠습니다.


우선, 루이 알튀세르의 지도하에서, 그리고 (그 당시 저는 대학에서 공부 중이던 젊은 학생에 불과했지만) 저 또한 속해 있던 알튀세르 제자들의 집단[각주:3]과 함께 (1965년 출간한) 자본을 읽자라는 집단저작의 집필에 제가 참여했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상기시켜야겠습니다.[각주:4] 물론 이때의 저는 엄청난 강도로 작업했으며 우리 집단의 분위기가 빠른 습득을 가능케 했습니다(여기에는 알튀세르 자신의 강한 추동력 또한 기여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그의 추동력은 선생의 것이었음에도 그것이 거의 조금도 권위적이지 않았던 만큼 더욱 효과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저는 한 명의 견습생에 불과했죠. 이는 특히 마르크스의 저작에 대한 저의 이해가 우리 알튀세르 집단이 특권화했던 몇몇 텍스트들(특히 자본)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을, 그리고 마르크스에 대한 역사적으로 중요한 주해들과 동시대의 다른 독해들 대부분에 대해 무지했다는 점을, 그리고 많은 경우 제가 (알튀세르가 특히나 좋아했던 스피노자의 표현 하나를 다시 취해보자면) ‘전제 없는 결론들로 나아갔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결과적으로, 자본을 읽자 출간 이후 몇 년 동안, 우리 알튀세르 집단의 직관을 발전시키고자 시도하고 동시대에 벌어졌던 논쟁들에 무절제하게(sans modération) 참여함과 동시에, 저는 자본을 읽자에서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내가 이미 썼던 바를 다시 이해해야 했으며 그 적절성을 시험해보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제가 이런 식으로 저 자신을 추격해나갔던 반면, 우리 알튀세르 집단이 그 속에서 작업했던 상황이, 그리고 우리 집단이 이를 대상으로 하여 이론의 무기를 주조하기를 원했던 그러한 상황이 변화했지요. 심지어 이 상황은 무대의 완전한 변화까지도 생산했는데, 정치적 차원에서 보자면 이러한 무대의 완전한 변화에 대해 저는 상징적으로 1968년 봉기의 효과들을, 그다음으로는 (알튀세르와 마찬가지로 저 또한 소속되어 있었던) 프랑스 공산당의 유로공산주의의 프랑스적 변형태[변종]로의 변화(유로공산주의의 프랑스적 변형태의 중심 테마는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이었죠)를 연결지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저 자신의 관념들에 대한 회고적 전유 작업 속에서, 이 관념들을 새로운 전선에 복무하도록 만들기 위해 이 관념들을 조정하는 작업 또한 동시에 시도했습니다. 이 작업은 같은 시기에 수행되고 있었던 알튀세르의 (종종 매우 공격적이었던) ‘자기비판’(자기비판의 저서인 자기비판의 요소들존 루이스에 대한 답변모두는 1972년에 출간되었습니다)에 의해 영향 받았습니다만, 그럼에도 이 작업은 자신만의 고유한 길들로 나아갔죠. 자본을 읽자 집필 당시 알튀세르집단 내에서 그토록 강력했던 인식론적 관심을 포기하지는 않으면서도, 저 또한 구조주의적패러다임에 대한 일종의 부인’(reniement)에 기여했으며,[각주:5] 또한 마르크스에 대한 독해의 중심에서 마르크스의 정치적 의도를 복원하기 위한, 게다가 마르크스를 재정치화하기 위한(마르크스주의가 어떠한 하나의 정치를 정초하는 것 이외의 다른 목표를 가져본 적이 없는 하나의 독트린이기에,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꽤나 역설적으로 보일 것입니다) 시도를 행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알튀세르는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철학(일반)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제출했죠. 제 책에 담겨 있는 논쟁들 중 몇몇, 특히 이론적 실천(Theoretical Practice)이라는 영국 학술지의 편집진들의 하이퍼-알튀세르주의와의 논쟁은, 저 스스로가 그로부터 해방되고자 노력했던 편향들을 논쟁의 맞수들에게 부여하는 하나의 방식을 구성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이런 방식이 아름다운 것은 전혀 아니겠지만 지적 영역에서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죠).


이러한 서로 모순되는 추동력들이 만들어낸 결과는, 제가 마르크스의 텍스트들의 문자 그 자체, 그리고 알튀세르가 징후적 독해라 불렀던 바(제 생각에 이 징후적 독해는 알튀세르의 가장 위대한 철학적 관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를 마르크스의 텍스트들에 적용했을 때 이 마르크스의 텍스트들에서 드러나게 되는 아포리아들에 매혹되어왔었고 여전히도 매혹되어 있기에,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명제들에 대한 탈구축의 실천(역사유물론 5연구에 대한 서평에서 배세진씨가 지적했듯 분명 데리다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을 수행하게 되었다는 점으로 보입니다. 저는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명제들에 대한 이러한 탈구축실천을 이 역사유물론 5연구이후의 여러 저작들에서 추수해왔으며, 결국 근본적으로는 지금도 여전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실천은, 사람들이 겪는 것을 제가 종종 관찰합니다만, 마르크스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난점뿐만 아니라, 또한 마르크스에게 일의적인 혹은 확정적인 하나의 독트린을 부여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그러한 난점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이러한 실천은 우리를 점점 더 이러한 일의적인 혹은 확정적인 하나의 독트린을 부여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는데, 그러나 제가 보았을 때 또한 이는 마르크스를 그 미라화로부터 그러니까 그 죽음으로부터 지켜내는 유일한 방식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날의 저에게 보여지는 바 그 자체로서 이 책 안에서 제시된 세 가지 독해들의 전략적 특징에 대해, 몇 마디 하고자 합니다. 물론 매우 간략하게 말이죠. 우선 공산주의자 선언의 정정’, 그러니까 파리코뮌의 경험 이후 마르크스 스스로가 (역시 엥겔스와 함께 집필했던, 공산주의자 선언1872년 서문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는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문자] 국가장치의 파괴(destruction)와 해체(démantèlement) 작업에 착수하는 것 또한 필수적이라고 선언했다는 관념에서부터 시작해보죠.


이 관념은 특히 레닌에게서(그의 저작들 중에서도 특히 국가와 혁명안에서) 집요하게 남아 있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중심으로 하는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그 논쟁의 공통의 장소[즉 상식]입니다. 프랑스 공산당은 그 당시 [대문자]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concept)포기를 여전히 결정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렇지만 이에 대한 질문은 당 내에서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죠.[각주:6] 따라서 외관상 순전히 문헌학적인 것으로 보이는 저의 개입은, 마르크스주의의 정초적’(‘신성한이라고 말하려 했네요) 텍스트들에 대한 해석으로 코드화된[해석의 형태를 취하는] 방법을 따르는, 우리가 프랑스 공산당에게 그 책임을 물었던 수정주의에 대항하는 하나의 공격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제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자 했던 대상인 이론적 정교화 작업들(élaborations)에 대해 우리가 더욱 흥미로운 관념을 얻고 싶다면,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 한가운데에서의(au sein de l’État) 정치투쟁 혹은 계급투쟁으로 대체하는 관념을 발전시키는 니코스 풀란차스(Nicos Poulantzas)의 시론들(이와 동시대에 출간되었던)을 읽어야만 합니다. 그 당시 알튀세르는 이러한 풀란차스의 관념을 두려워했는데, 알튀세르와 달리 이후의 저는 그 당시의 제 입장을 전도하면서 이 관념에 존경을 표했죠.[각주:7] 하지만 제 생각에 여기에서 우리는 저 개인의 단순한 입장 변화보다는 더 나은 무언가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파리코뮌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마르크스의 정정적’[즉 자신의 이전 관념을 정정하는 성격의] 텍스트는 마르크스 이후 레닌이 변증법의 언어로 더욱 사변적인 정식화를 제시했던 그러한 하나의 관념의 맹아 혹은 의거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레닌의 이 사변적 관념이란,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목표로 하는 이행국가(이 국가에서 공산주의는 이행의 도구이자 동시에 그 목표입니다)는 하나의 국가/-국가’, 다시 말해 대립물들의 하나의 통일체 혹은 서로 대립하는 원리들과 힘들 사이의 항구적 전투의 장소라는 관념입니다.[각주:8] 우리는 레닌 스스로도, 자기 자신이 이러한 방식으로 정의했던 위험천만한 입장을 러시아 혁명의 와중에 유지할 수 없었다는 점을, 그리고 어쨌든 소련의 역사는 하나의 국가를 강화하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 이 -국가를 오래오래 매장시켜버리려는 역사였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 정식 속에서(아무리 이 정식이 추상적인 것이라고 해도) 혁명적 과정 전체를, 심지어는 (조직화와 자생성 이 양자 모두에 동시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서의) 혁명적 사회 변혁의 시도 전체를 특징짓는 모순의 이름 그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도록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공산주의자 선언그 자체 내에서 이러한 모순의 표현을 이미 구성하고 있는 바로 나아갈 수 있을 텐데요. 명백히 이 모순이란 바로, 마르크스가 민주주의공산주의라는 두 가지 통념들(notions), 어떤 때에는 민주주의를 기껏해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하나의 권력형태(그러니까 국가형태)로 만들면서, 어떤 때에는 민주주의를 (자유로운 연합이라는 이름하에) 생산자에 의한 생산자의 통치오늘날의 우리라면 급진 민주주의라고 부를로서의 공산주의 그 자체의 하나의 본질적 구성요소로 만들면서, 서로 만나도록 하는 모호한 방식 그 자체입니다.[각주:9] 이 지점에서, 저의 독해들이 가장 나은 경우에는 소심한 것이며 가장 나쁜 경우에는 보수적인 것이었다는 점을 인정해야겠습니다. 그 당시 저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레닌주의적 비판(오늘날에도 몇몇 다른 이들이 여전히 행하고 있는)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아마도 저는 러시아 혁명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당시 로자 룩셈부르크가 러시아 혁명에 온전히 참여하면서도 동시에 레닌에게 가했던 비판들을 충분히 제대로 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미구엘 아방수르 같은 마르크스 정치사상의 주석가는 (자신의 1997년 저서 국가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마르크스와 마키아벨리적 계기에서[각주:10]) 마르크스의 1843년의 (유고집인 헤겔 국법론 비판에서 제시된) 테제들에서부터 (파리코뮌 이후의) 1872년의 테제들로 나아가는 연속성의 선을 그려내면서,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공산주의자 선언은 다루지 않고 넘어가면서(아방수르가 공산주의자 선언은 다루지 않고 넘어간다는 사실은 우리의 질문이 지니는 난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보다 훨씬 더 정확히 이 점을 읽어냈습니다.


물론 대립물들의 통일이라는 관념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역사에서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제 시론의 집필 또한 지배하는 관념입니다. 이 시론은 이 시론의 집필 자체에서도, 그리고 이 시론이 다루는 텍스트들에 대한 독해에서도 세부지점에서 매우 불완전한 텍스트인 것으로 지금의 저에게는 보여지는데요, 그렇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지금의 저는 이 시론이 지니는 철학적 영감 일반의 의미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시론이 지니는 전반적인 철학적 영감은 앞에서 제가 이미 언급했던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에 관한 알튀세르의 정식화들, 그리고 지속적인’(continuée) 인식론적 절단이라는 관념이 지니는 것과 분명 동일한 의미를 지닙니다. 지속적인인식론적 절단이라는 관념을 통해 알튀세르는 인식론적 절단에 대한 자신의 최초의 이론이 지니는 기계론적 그리고 결국에는 실증주의적 특징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는데요, 이 관념은 이데올로기적명제들과 과학적명제들 사이의 구분이미 획득된 자연적인 것(acquis)과 같은 무언가가 전혀 아니며, 오히려 끊임없이 재정의되고 재구축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각주:11] 심지어 우리는 이러한 의미에서 어떤 하나의 명제가 [‘이데올로기적명제에서 과학적명제로, 혹은 그 역으로] 기호를 변경한다(changer de signe)고도 전제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는 하나의 맥락과 하나의 주어진 정세 속에서 이 명제의 활용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뒤에(그러니까 1976년의 단편적인, 하지만 매우 깊은 영감 속에서 집필된 텍스트들에서[각주:12])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가 정신분석학과 같이 분파적 과학’(혹은 분열적 과학’)이라는 관념이러한 과학들 안에서 정통성(orthodoxie)이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서로가 서로를 무한히 정정하는 편향들(déviations)만이 존재합니다을 제출하게 됩니다.[각주:13]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역사에서 유물론과 관념론이라는 시론에서 저는 이 정도로까지 멀리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이 시론에서 저는 서로 간에 대립되는 철학적 원리들 사이의 갈등이 서로 대립되는 지향성들에 의해 구성된(travaillé) 각각의 이론적 요소’(이 각각의 이론적 요소란 또한 각각의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죠)의 중심을 각각의 계기마다[매순간] 통과한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식이란 결국 하나의 투쟁입니다. 저는 이 시론에서 잉여-가치(혹은 잉여가치)와 계급투쟁이라는 예시를 취했는데, 그러나 아주 단순하게 노동노동-가치라는 예를 취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노동노동-가치에 대해 마르크스 스스로가 (고타강령 비판의 아주 짧은 하나의 단락에서) 노동노동-가치를 착취와 이 착취에 대항하는 저항에 대한 자신의 이론의 토대로 삼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에 어떠한 초자연적 역량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에게 지적해주었죠.


이 지점은 저로 하여금 이 책의 중심을 차지하는 긴 분량의 시론인 잉여가치와 사회계급으로 곧장 나아가도록 해줍니다. 이 시론을 이제는 다시 읽지 않기 때문에 제가 이 시론에서 제시되었던 정식화들 중에서 어떠한 정식화들에 동의하고 어떠한 정식화들에 아마도 제가 거리를 두고 있을 것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겠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이 텍스트가 여전히 유용하다고 저에게 종종 말해주곤 하지만, 저는 이 시론 전체가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조금은 독해하기 버거운 것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심히 두렵습니다. 반면 제가 잘 기억하고 있는 바는, 이 텍스트가 마르크스주의가 어떠한 의미에서는 그 탄생에서부터 노출되어 있었던 사회학주의뿐만 아니라 경제주의까지도 반박하는 그러한 텍스트이기를 제가 원했다는 점입니다.


사회학주의와 관련해 말해보자면, 핵심적인 질문은 (자본주의에 특징적인 사회갈등 내에서 서로 대립하는) 집합체(collectifs)로서 혹은 다중’(multitudes)으로서 사회계급을 정의하기 위해 어떠한 기준들을 우리가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뿐만이 아닙니다. 또한 핵심적인 질문은, 특히, 우리가 이 계급들의 투쟁의 역사적 양태들(modalités)과 부침들(vicissitudes)을 분석하기 이전에, 그러니까 우선 정치를 추상한 이후에 이 계급들 각각을 각각의 계급으로서 개별적으로(séparément) 정의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인데, 이는 각 계급에로의 소속과 계급의식이 갈등과 그 조직화의 유효성[효과성 혹은 현실성]과는 독립적으로 잔존할 수 있다는 관념을 의문에 붙이는 것으로, 그리고 즉자적 계급대자적 계급이라는 도식화로부터 단번에 완전히 벗어나는 것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이 텍스트를 집필할 당시 제가 이탈리아 노동자주의의 이론적 전개들(특히 1966년에서 1972년 사이에 집필한 마리오 트론티Mario Tronti의 저서 노동자와 자본의 이론적 전개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점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각주:14] 왜냐하면 그 당시 제가 그람시로부터(그람시에게서 이 계급 구성의 정치적 계기는 상부구조에 속하는 것이지요) 암묵적으로 저의 영감을 길어올리고 있었던 반면, 트론티는 이 계급 구성의 정치적 계기를 자본의 정치적 구성과 연결되어 있는 생산양식에 내재적인 하나의 특징, 서로가 서로에 대해 탈조직화’désorganiser하고자 하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항구적 대립으로서의 하나의 특징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각주:15]


하지만 경제주의라는 질문이 훨씬 더 중요한데요, 혹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최소한 이 경제주의라는 질문은 그 당시의 저에게는 훨씬 더 중요했었고, 최근 들어 마르크스를 지속해 나가거나 정정하기보다는 하나의 새로운 정치경제학 비판에 착수함으로써 마르크스를 다시 시작케 할 필요성을 점점 더 의식해나가고 있는 저에게 또 다시 더 중요한 질문이 되고 있습니다.[각주:16] 그 당시 저는 개념들 고유의 전개[발전]로부터 출발해 개념들을 사후적으로 결정한다는 개념화에 기초한 특이한(baroque) 관념을, 그러니까 잉여-가치’(혹은 잉여가치)에 대한 하나의 이론을 가치에 대한 하나의 이론 위에서 정초해서는 안 되며 역으로 잉여-가치(혹은 잉여노동의 착출과 실현)의 메커니즘으로부터 출발하여 가치란 무엇인지를 결정해야만 한다는 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착취 없이는 가치도 없다는 것이죠! 이는 경제학자들의 귀에는 부조리한 이야기로 들릴 것이며, 또한 마르크스주의자들 대부분을 화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인데요, 왜냐하면 이 경제학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만일 우리가 가치(그 표현 형태들과 측정 형태들과 함께 노동의 이중적 성격으로부터 유래하는)가 무엇인지 사전에 정의하지 않았다면 그다음으로 잉여-가치(노동자의 소비수단의 가치에 비해 이를 초과하는excédent 가치)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해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에 대립해 저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지 않는 한은, 그러니까 노동의 지출이 잉여-가치를 제공해야 한다는 요구에 지배되지 않는 한은, 역사적으로 일반화된 교환(그러니까 완전한 가치 형태)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을 제시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잉여-가치라는 개념을 억압하거나 전치시키면서도 동시에 가치를 필요노동으로 정의하고자 악착같이 노력했다는 점이 증상적인 사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스라파 같은) 동시대의 신-리카도파 경제학자들이 이윤이라는 범주를 보존하면서도 동시에 가치라는 범주를 순수하고 단순하게 제거하고자 노력한다는 점 또한 동일하게 의미심장한 사실인 것입니다. 오늘의 저는 이러한 관념에서 더 멀리 나아가, 마르크스 그 자신에게도 두 가지 서로 다른 용어들에 의해 담지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경향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자 합니다. WertbildungVerwertung이라는 독일어 단어들은 프랑스어에서 모두 ‘valorisation’[‘가치화혹은 가치증식’]으로 번역되는데, 그렇지만 동일한 프랑스어로 번역됨에도 Wertbildung의 경우 가치의 형성(formation de valeur)이라는 의미를, Verwertung의 경우 가치의 증가(accroissement de valeur)라는 의미를 가집니다(한국어로는 이 두 가지가 어떻게 번역되는지 모르겠네요[각주:17]). ‘상식에 따르면 가치는 스스로 증가(s’accroître)하기 이전에 형성’(formée)되어야만 합니다(그리고 이렇듯 생산의 결정작용들을 유통의 결정작용들과 뒤섞어버리도록 강제되었던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추론했던 것이죠). 하지만 변증법과 역사적 경험은 투입된(avancé) 어느 한 자본가치화/가치증식(mise en valeur) 혹은 그 증가를 목표로 한 투자가 어느 한 가치(이 가치는 다른 가치들과 비교 가능한 가치인데요, 이 비교 가능한 다른 가치들과 함께 이 가치는 항구적 운동 내 전체 자본의 유지를 위해 교환되죠)의 형성의 동력 그 자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각주:18]


이러한 관념이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그리고 아마도 심지어 이 관념이 모호점들을 내포한다는 점 또한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화폐 형태로부터 출발해 이루어지는 인간 삶의 새로운 대상들과 새로운 측면들에 대한 항구적 상품화’(그러니까 가치화/가치증식valorisation)를 함의하는 자본주의의 현재 형태들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 이 관념과 계속 실험해나갈 것이며, 이 항구적 상품화에 대한 더욱 만족스러운 마르크스주의적해석을 찾고자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시도 속에서 저는 제 이전 작업에 대한 이해를 원하는 한국의 몇몇 독자들의 지지와 비판에 의지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미리 전하는 바입니다.

 

20198

에티엔 발리바르


배세진 옮김



  1. [옮긴이] 이 한국어판 서문 번역의 경우, 한국의 독자들에게 부치는 저자의 편지에 가깝다는 점에서, 글의 성격에 맞게 최대한 가독성에 중점을 두어 번역했음을 밝힌다. [본문으로]
  2. [옮긴이] 바로 뒤에서 등장하겠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굳이 첨언하자면 이 세 연구란 2장 「『공산주의자 선언』의 정정」, 3장 「잉여가치와 사회계급」, 5장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역사에서 유물론과 관념론」이다. [본문으로]
  3. 즉 『‘자본’을 읽자』의 초판에 등장하는 인물들(피에르 마슈레, 자크 랑시에르, 로제 에스타블레), 그리고 이 저서의 공저자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자본’을 읽자』 집필을 위한 예비 세미나의 토론에 활발히 참여했던 이들을 뜻한다. [본문으로]
  4. [옮긴이] 이에 대해서 독자들은 『‘자본’을 읽자』를 위한 발리바르의 2019년 새 서문을 참조할 수 있다. 「『‘자본’을 읽자』를 읽자」,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배세진 옮김, 웹진 인무브(www.en-movement.net) 참조. 이 텍스트는 한국어판 『‘자본’을 읽자』의 새 서문으로도 수록될 예정이다. [본문으로]
  5. 이러한 부인은 이 시기에 매우 광범위하게 행해졌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하는데, 알튀세르적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서뿐만 아니라 푸코, 심지어는 들뢰즈 같은 다른 이들에게서도 그러했다. [본문으로]
  6. [옮긴이] 이는 필자로 하여금 1976년에, 알튀세르의 요청에 따라, 특수한 목적을 지니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시론 한 편을 작성하도록 이끌었다. 이 시론에서 필자는 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을 정당화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스탈린주의적 해석을 비판하고자 시도했다. (이 시론은 알튀세르가 책임지도하던 『이론』 총서 중 한 권으로 프랑수아 마스페로 출판사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하여’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는데, 한국에서는 ‘민주주의와 독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민주주의와 독재』,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최인락 옮김, 연구사, 1988 참조. [본문으로]
  7. [옮긴이] 필자의 저서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aris, PUF, 2010에서 그러했다. (이 저서 즉 『평등자유 명제』의 국역본으로는 『평등자유 명제』,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진태원 옮김, 그린비, 근간을 참조할 수 있다. 특히 여기에서 발리바르가 언급하는 글은 『평등자유 명제』에 수록된 「공산주의와 시민성: 니코스 풀란차스에 대하여」인데, 이 글은 진태원이 웹진 인무브를 통해 공개한 바 있다. 웹진 인무브 www.en-movement.net 의 ‘공산주의와 시민성: 니코스 풀란차스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8. [옮긴이] 이 책의 2장에서 다시 언급되겠지만, 여기에서 non-État 즉 ‘비-국가’는 ‘국가 아닌 국가’로도 번역 가능하다. [본문으로]
  9. [옮긴이] ‘생산자에 의한 생산자의 통치’에서 ‘생산자’는 ‘직접생산자’, 즉 ‘노동자’를 의미한다. [본문으로]
  10. [옮긴이] 발리바르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 자주 인용하는 이 저서는 아쉽게도 국역되지 못했다. 수정증보판인 La démocratie contre l’État. Marx et le moment machiavélien, Miguel Abensour, Éditions du Félin, 2012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11. [옮긴이] ‘구분’(démarcation) 혹은 ‘구분선’(ligne de démarcation)에 대해서는 「레닌과 철학」, 루이 알튀세르 지음, 진태원 옮김, 『레닌과 미래의 혁명』, 이진경 외 지음, 그린비, 2008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12. 이 텍스트들은 프랑스어로는 Solitude de Machiavel et autres textes, Yves Sintomer 편집, PUF, 1998이라는 알튀세르의 논문 모음집에서 읽을 수 있다. 특히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라는 텍스트와 도미니크 르쿠르(Dominique Lecourt)의 저서 『리센코: 프롤레타리아 과학의 현실역사』에 부치는 서문인 「종결된 역사, 종결될 수 없는 역사」를 참조하라. (이 알튀세르의 논문 모음집 즉 『마키아벨리의 고독』은 서관모 교수가 번역하고 있으며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출간이 예고되어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의 경우에는 『알튀세르와 라캉』, 윤소영 편역, 공감, 1996에 국역되어 있으므로 독자들은 이 책을 참고하기를 바란다.─옮긴이) [본문으로]
  13. [옮긴이] ‘분파적’은 schismatiques을, ‘분열적’은 scissionnistes를 옮긴 것으로,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알튀세르의 논문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14. [옮긴이] 「잉여가치와 사회계급」 이후에 집필된 텍스트들에서는 발리바르가 트론티를 알튀세르와 체계적으로 비교하면서 그의 작업을 심도깊게 다루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서관모, 최원 옮김, 도서출판b, 2007)의 3부 2장 「붙잡을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서방 맑스주의의 하나의 이단점: 1960년대 초 알튀세르와 트론티의 상반된 『자본』 독해」(장진범 옮김, 웹진 인무브), 그리고 「마르크스의 ‘두 가지 발견」’(『마르크스의 철학』,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배세진 옮김, 2018의 부록 2번)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15. [옮긴이] 여기에서 ‘정치적 구성’은 composition politique을 옮긴 것으로, 명확히 이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나 ‘기술적 구성’ 같은 마르크스적 표현의 트론티적 변형태다. [본문으로]
  16. [옮긴이] ‘마르크스’를 ‘지속’ ‘정정’ ‘다시 시작’케 한다는 표현은 한국어상으로 어색하지만 발리바르의 의도를 살려 그대로 직역했다. [본문으로]
  17. [옮긴이] 이에 대해서는 「잉여가치」,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배세진 옮김, 『문화과학』 98호 2019를 참조하라. 이 논문에는 자크 비데(Jacques Bidet)가 발리바르에게 보내는 편지 또한 번역되어 있는데, 이 편지 또한 이 논점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참고로 ‘잉여가치’는 survaleur를, ‘잉여-가치’는 plus-value를 옮긴 것인데, 독일어 Mehrwert의 두 가지 다른 프랑스어 번역인 이 ‘잉여가치’와 ‘잉여-가치’에 대해서도 이 논문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본문으로]
  18. [옮긴이] 프랑스어 valorisation과 mise en valeur는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문헌에서 사실상 동의어로 쓰이며, 모두 한국어로는 동일하게 ‘가치화’ 혹은 ‘가치증식’으로 번역될 수 있다. 옮긴이는 가독성을 해치더라도 일부러 이를 ‘가치화/가치증식’으로 옮겨오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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