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 SF와 면역의 생명정치
우주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은 세계 각국의 신화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과학 문명이 싹트기 전부터 존재하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새가 하늘을 나는 것을 보고 대기는 달까지 펼쳐져 있어서 인간이 어깨에 날개를 달면 달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살던 시대의 유럽에서는 당대의 사회를 비판하는 정치철학적인 이야기들 속에서 우주가 유토피아로 제시되었다. 그러다 1643년 이탈리아의 물리학자인 토리첼리가 기압계를 만들어 공기에 무게가 있음을 증명하면서부터 우주는 이야기의 세계에서 나와 본격적으로 과학적 탐구 대상이 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우주를 둘러싼 과학상의 발견이 SF 창작의 원동력이 된 사례도 존재한다. 1877년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스카파렐리가 화성에서 강의 바닥인 ‘카날리(canali)’를 보았다고 보고하자, 보스톤의 외교관인 퍼시벌 로웰은 이를 증명하기 위한 증거를 수집해 『화성』(1896), 『생명의 거주지로서의 화성』(1901), 『화성과 그 운하』(1911) 등을 집필하였다. 과학적 발견들은 화성에 지성체가 살고 있다는 상상력을 발동시켰고, 이로 인해 SF의 고전인 웰스의 『우주 전쟁』(1898)과 버로스의 화성 연작도 탄생하였다.[2]
이후로도 SF 작가들은 최신의 과학적 성취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우주선’뿐 아니라 ‘우주 엘리베이터’나 ‘웜홀’ 등 인간이 우주에 갈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탐구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우주 이야기는 끊임없는 변주 속에서 외계 행성의 대기와 자연환경을 인간들이 살기에 적합한 형태로 바꾸는 ‘테라포밍(terra-forming)’ 프로젝트나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 도착해서 기존의 생태계를 바꾸는 이야기 등으로 발전하였다.
한국 SF 작가들 역시 과학적 성과와 문학적 사유의 긴밀한 연동 속에서 꾸준히 새로운 문제의식을 담은 작품들을 산출하고 있다. 그중 우주와 생명의 문제를 다루는 한국 SF들이 기후재난이 심화되고 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한 2020년대에 다각화된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3] 기후재난은 인간뿐 아니라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의 멸종이라는 문제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팬데믹은 인간이 숙주가 되어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시기에 사회 면역은 더욱 강화되었고 낯선 타인에 대한 경계는 배가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박해울, 정세랑, 김초엽이 인간과 사회구조의 취약성을 인정하면서 ‘세계의 끝’에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다시 말해 외계 행성의 지구화와 생명공동체의 문제를 다루는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박해울의 「요람 행성」에는 지구를 대신할 행성을 지구처럼 만드는 모습이 담겨 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그곳의 생태계가 파괴됨을 목격하고 처음의 의도와 달리 속죄의 마음을 담아 ‘그들’을 살리고 ‘자신’이 죽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정세랑의 「리셋」에는 화학 물질로 가득 찬 지구를 정화하기 위해 독이면서 약인 ‘파르마콘’의 역할을 담당하는 거대한 지렁이들이 지구의 건물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모습이 그려진다. 마지막으로 김초엽의 「오래된 협약」에는 자신들을 죽이려는 인간들을 받아주고 함께 살기를 선택하는 행성이자 생명체인 오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오브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인간들에게 나누어주고, 인간들은 수명의 일부를 포기하고 오브들을 해치지 않겠다는 협약을 맺은 후 이 둘은 공존을 이어간다.
본고에서는 이 소설들을 보다 정치하게 분석하기 위해 ‘상호 호혜성’과 ‘상호 의무’를 중심으로 ‘공동체(community)’와 ‘면역(immunity)’을 함께 사유한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로베르토 에스포지토(Roberto Esposito)의 이론을 참조할 것이다. 현대 면역학의 영향을 받은 에스포지토는 방어와 부정을 중심으로 면역을 사유하던 근대의 면역화 프로젝트에서 벗어나, 면역을 상호침투와 생성의 영역으로 새롭게 사유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이질적인 생명체들이 공존하는 생명공동체는 서로가 서로에게 베풀어야 하는 의무를 다할 때 유지됨을 보여준다.
본래 생명정치(Bio-Politics)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주권 이론을 중심으로 구성한 것이었다. 그는 고전적 ‘생사여탈권’이 ‘죽게 만들거나 살게 내버려두는’ 권력인 반면 근대의 ‘생명권력’은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임에 주목한다. 이것은 생명정치의 주된 특징이 종으로서의 인간, 즉 인구를 통제하고 관리하면서 이들을 살게 만드는 것임을 뜻한다. 생명정치는 포괄적인 조절 메커니즘을 바탕으로 인구로서의 인간을 살게 만들거나 죽게 내버려둔다. 이것의 최종 목표는 “인구의 조건 개선, 인구의 부, 수명, 건강 증진”과 그에 따른 효율성의 증대이다.[4] 이를 위해 생명정치는 통계학적 분석과 예측을 활용하고, 안전 메커니즘을 기반으로 정상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에스포지토는 안전을 위한 통제 사회로 나아가는 푸코의 생명정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공동체를 뜻하는 ‘코무니타스(communitas)’와 면역을 뜻하는 ‘임무니타스(immunitas)’를 중심으로 자신의 생명정치 논의를 구성해 나간다. 어원적 측면에서 코무니타스와 임무니타스는 모두 책무, 업무, 선사의 세 가지 의미를 지니는 ‘무누스(munus)’와 관련이 있다. 무누스는 선물을 받은 누군가가 되갚아야 할 의무이자 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주는 선물이다. 이런 무누스에서 우선시 되는 것은 ‘주는 행위’의 상호성, 혹은 상호의존(munus-mutuus)의 관계이다. 그래서 ‘함께’ 혹은 ‘공동’을 뜻하는 접두사 ‘콤(com)’과 무누스가 결합된 코무니타스는 타자에 대한 의무를 함께 이행하는 집단을 뜻하게 되고, 타자에 대한 개방성을 그 본질로 한다. 반면에 부정 접두사 ‘임(im)’과 무누스가 결합된 임무니타스는 공동의 의무에서 면제된 상태를 나타낸다.[5]
이러한 에스포지토의 논의는 근대의 면역화 패러다임을 넘어선다. 에스포지토는 홉스와 로크를 경유하면서 근대의 주권 개념이 자기 보존적 면역의 방식으로 작동하고, 자유가 안전 개념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설명한다. 근대의 면역화 패러다임은 안전을 지향하면서 개별적이거나 집합적인 유기체의 보존만을 추구한다. 그리고 이 방식이 극단화되면 자국 인구의 생존을 위해 전쟁을 불사하고 대량학살을 합리화하게 된다. 이처럼 근대의 면역화는 타자와 이질적 요소를 철저히 배제하여 내부의 안전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6]
반면에 에스포지토는 면역인 임무니타스를 ‘무누스’ 그중에서도 선물이자 증여를 나타내는 ‘도눔(donum)’의 측면에 주목하여 살핀다. 이것은 차이에 자신을 개방하는 감염을 동반하며, 기존의 자기를 보존하는 것이 아닌 생산적 결합으로 생명을 생성한다. 이러한 면역은 인간 생명 탄생의 원동력이기 때문에 임신과 출산은 하나의 생명에게 면역을 증여하는 문제로도 읽을 수 있다. 또한 증여로서 작동하는 면역은 삶과 죽음을 연결하고 소통할 수 없는 것들이 소통하는 공동체를 생성한다. 차이를 향해 열려 있는 증여로서의 면역은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을 향해서도 열려 있다.[7]
타자에 대한 개방성을 추구하는 에스포지토의 면역철학은 기후재난과 팬데믹으로 인해 면역학적 사유가 강화되는 시기에 더욱 유효하다. 이 시기에 우주적 상상력과 생명정치는 현실사회에서뿐 아니라 문학적 담론장 안에서도 주요한 문제로 부상하였다. 한국 SF를 다루는 연구 중 이 주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많지 않지만, 기후재난과 인류세, 우주와 생명에 대한 문제의식을 벼리는 데에 도움을 준 연구들은 존재한다. 첫 번째는 포스트휴먼 논의를 중심에 놓고 SF 장르에 대한 탐색을 지속하고 있는 노대원의 연구들[8]이고, 두 번째는 인류세와 기후재난을 다루는 복도훈의 연구들[9]이다. 마지막으로 2000년대 이후에 발표된 한국소설의 생명정치를 탐구한 연구들[10] 역시 본고와의 연장선상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이러한 연구들의 성과를 이어받아 본고에서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창작된 한국 SF 중에서 테라포밍과 생명정치의 문제를 다루는 작품들[11]을 분석할 것이다.[12] 그리고 외부의 존재들이 망가진 지구를 ‘재지구화’하는 과정과 인간들이 외계 행성을 ‘지구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면역의 생명정치’를 고찰할 것이다. 이를 통해 생명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행성과 생물종(種)에 상관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상호 호혜성’이 필요함을 밝히고자 한다.

2. 전염의 확산과 생명권력의 거부 : 박해울의 「요람 행성」
SF들에서 그려내는 행성 이주의 직접적인 원인은 핵전쟁, 인구 폭증, 기후재난 등이다. 그리고 태양계 안에서 테라포밍에 가장 적합한 후보는 ‘생명거주가능지대(goldilocks zone)’ 안에 들어 있고 크기가 행성급인 화성과 금성이다. 그중에서도 화성은 기압이 압도적으로 높고 지표 온도가 섭씨 450도에 이르는 금성에 비해, 테라포밍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기대된다. ‘행성 공학(planetary engineering)’ 혹은 ‘지구화’로도 불리는 ‘테라포밍(terra-forming)’은 말 그대로 ‘대지를 만든다(earth-shaping)’는 의미로, 외계 행성에서 인간이 지구에서처럼 우주복이나 산소마스크 없이 쾌적하게 살 수 있도록 현지의 대기와 환경을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동식물 생태계를 일구는 거시적인 ‘행성 개조 프로젝트’이다.[13]
화성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 지구화는 우선 화성의 극지방에 있는 얼음을 녹이는 활동을 통해 대기 밀도를 높이고, 화성 전체의 표면온도를 서서히 높이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대기 중 산소 비중을 높이고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등 화성 대기를 인간이 호흡할 수 있는 상태로 조정하는 작업[14]이 진행되어야 한다. 테라포밍 이전에도 행성 간 생명체 이주는 진행되겠지만 행성으로 이주한 지구인들이 안전한 삶을 지속적으로 살게 되는 것은 테라포밍 이후이다.
그런데 테라포밍을 진행하는 사람들은 인류가 우주에서 새로운 거주지를 찾고 그곳의 환경을 개조하는 동안, 그 행성에 원래부터 살고 있던 토착 생명체들의 생명권을 고려 대상에 두지 않는다. SF들에서는 행성의 기존 생태계를 파괴하고 인류에게 최적화된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지구에서 가지고 간 바이러스, 균, 이끼류의 식물 등이 이용되기도 한다. 지구의 (미)생물로 인해서 외계 행성의 생태계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을 띠게 되고 그 안에서 살아가던 많은 생명체들은 죽음을 맞이한다.
박해울의 「요람 행성」에도 테라포밍으로 인해 행성의 토착 생물들이 계속해서 죽어가는 장면이 담겨 있다. 액자구성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의 ‘속 이야기’는 주인공 ‘리진’이 요람 행성의 지구화 작업에 참여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겉 이야기’에는 먼 훗날 죽은 줄 알았던 리진의 딸 ‘수현’이 요람 행성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엄마가 남긴 기록을 보면서 이 행성의 생명체들을 위해 죽기 직전까지 노력한 엄마의 삶을 긍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리진은 동생과 딸의 생계를 지원하고 이들의 이주권을 얻기 위해서 ‘후각 감퇴’, ‘우울 경감’, ‘활력 징후’ 시술을 받고, 요람 행성에서 30년간 자율주행 정화차량을 타고 다니면서 폐기물을 처리하고 그 차량 1만 대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는다. 그런데 리진이 한 가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요람 행성에도 ‘생명’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구와 흡사한 대기를 조성하는 유전자 조작 식물 ‘론’과 론을 키워낼 생장 촉진제는 이곳의 생태계를 완전히 망가트리고 있었다. 연초록빛의 론은 고동빛 혹은 검은빛의 토착 식물들 위로 곰팡이가 피게 만들었고, 새와 물고기의 떼죽음을 불러왔으며, 염소 머리 생물들의 개체수를 계속 줄여나갔다. 수많은 죽음을 목도한 이후에야 리진은 자신이 치워야 할 것이 건설 폐기물과 론의 앰플이 아니라 바로 생물들의 사체라는 것을 깨닫는다.
아무도 따지 않은 썩은 과일이 떨어지듯이, 큰 짐승이 쿵 소리를 내며 생명을 다한다. 썩은 과일은 운이 좋으면 그 안의 씨앗이 싹을 틔울 수도 있겠지만, 짐승은 그것으로 종말을 맞는다. 구더기가 들끓고 날벌레가 춤을 춘다. 시냇물은 점점 탁해지고 검은 잎은 누렇게 말라간다.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생물에서부터, 나보다 더 큰 생물까지 차례대로 세상을 뜬다. 생물들이 죽을 때마다 내 정신도 가장자리부터 까맣게 타들어 간다.[15]
위의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요람 행성의 생물들은 계속해서 죽어 나간다. 이곳의 생태계가 하나의 유기체이고 면역이 외부 (미)생물에 대한 유기체의 자기방어[16]라면,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외부에서 유입된 ‘론’이라는 ‘항원’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그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 다시 말해 면역의 실패이다. 염소 머리 생물들이 자율주행 차량들을 막기 위해 차 안에 자갈을 집어넣기도 하지만 이러한 대응으로는 행성 차원에서 벌어지는 ‘전염병’의 은유, 다시 말해 론의 확산과 그에 따른 생태계의 변화를 막을 수 없다.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면역체계는 삶과 죽음을 구분하면서 의미를 만드는 장치이다. 면역체계는 개인과 집단을 상대로 의미를 제조하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통상적으로 가장 우세했던 것은 이질적인 요소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차원의 면역이다. 면역의 방어는 “적대적 세균-침략자 집단과의 전투”처럼 군사용어에 비유된다. 면역학은 전쟁의 메타포를 즐겨 사용하였고, 면역체계는 강한 생명체가 약한 생명체를 지배하는 가운데 복합적으로 진화하였다.[17]
소설 속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테라포밍 진행률/지구화율’ 역시 면역의 생명정치 안에서 전염(병)의 확산을 보여주는 은유로 읽을 수 있다. 리진이 처음 요람 행성에 도착했을 때 지구화율은 5%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비율은 점점 높아졌다. 인간들 입장에서의 ‘지구화율’은 요람 행성 입장에서 본다면 생태계의 파괴 비율이다. 행성의 모든 생물들은 론과 자율주행 차량 앞에서 무력했는데, 그중에서도 “왜소하고 약한 개체들”(103)부터 순차적으로 사라져갔다.
리진은 처음 몇 년 동안 점점 살 곳이 줄어든 지구인들을 위해 이 행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공포와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수많은 죽음들을 외면하였다. 하지만 염소 머리 생물들이 동족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른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그들의 생활을 관찰하기 위해 자주 숲으로 갔다. 때로는 그들에게 말을 걸기도 하였다. 그들과 자신은 언어가 달라서 소통할 수 없었지만, 리진은 “이제 그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102)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다른 일이 생겼음을 깨닫고 그 일을 실행한다.
리진이 담당하는 업무는 요람 행성에서 인간들이 ‘살게 만들기’ 위해 이곳의 생물들을 ‘죽게 내버려 두는’ 일이었다. 이것은 인구의 정상성 유지를 목표로 삼는 생명권력의 작동방식과 일치한다. 하지만 지구에서 난민이자 빈곤층이었던 리진은 자신과 가족, 그리고 요람 행성에서 죽어가는 생명체들이 모두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그리고 이들을 ‘죽게 내버려두는’ 수동적 방관이 실제로는 적극적인 ‘죽이기’와 다르지 않음을 인지한 후, 멸살을 멈추기 위해 모든 자율주행 차량을 수동으로 멈출 계획을 세운다.
그렇다면 리진이 생명권력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요람 행성의 생물들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던 초창기의 리진은 다른 존재들이 가하는 행위의 작용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감수자(patient)였다. 그는 행성 생물들의 죽음 앞에서 행위가 아닌 수난과 수동성의 주체인 감수자의 감수능력(patiency)을 발휘한다. 그것은 얼핏 보면 외부로부터 가해진 작용을 참고, 침묵하고, 받아들이는 능력 같지만, 실상은 일련의 과정들을 겪으며 서서히 변화해갈 수 있는 역량이다.
요람 행성의 생물들처럼 지구에 있는 자신의 가족들이 그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갔을 것이라는 짐작과 자신 역시 회사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한 후, 리진은 더 이상 수동적인 감수자에 머물 수는 없게 된다. 이제 그의 감수능력은 미래 행위의 씨앗인 ‘행위형성적 감수력(agentializing patiency)’으로 전환된다.[18] 리진은 행위자가 감수자가 되고 감수자가 행위자가 되는 이 두 과정의 중첩에서 독특하고 역동적인 힘을 발휘하여 무기력하고 수동적이던 존재에서 능동적인 행위자로 변화해 간다.
리진을 요람 행성으로 보낸 회사는 리진에게 스스로 관리자 의식을 가지고 “행성의 모든 일은 ‘알아서’ 판단하고 처리해야 한다”(89)고 교육했다. ‘알아서’라는 말은 개인의 세계관이나 윤리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회사는 리진에게 요람 행성에서 ‘회사를 위해’ ‘알아서’ 판단하라는 의미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체적인 판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리진은 행위형성적 감수력을 발휘하여 직업윤리 대신 생태계를 살리는 생명윤리를 선택한다. 행성의 존재들과 자신이 다르지 않다고 느끼고 그들의 수많은 죽음 앞에서 정신이 가장자리부터 까맣게 타들어간 리진은 요람 행성 프로젝트 전체를 뒤엎을 결정을 내린다.
내가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정화 차량을 정지시켰다. 정지한 정화 차량을 보면 상당히 복잡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후회한다. 조금이라도 빨리 시작할걸. 염소 머리 생물을 만나기 전에, 다른 생물이 죽은 것을 보고 바로 결정할걸. 너무 늦었나. 내가 헛된 일을 하는 건 아닐까?[19]
리진의 행위가 낳은 결과는 “지구화 40퍼센트”라는 숫자와 초록빛과 검은빛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들판과 숲의 빛깔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화 차량이 계속 운행하는 지역에서는 론의 연초록빛으로 들판이 물들고, 요람 행성의 생태계가 힘을 발휘하는 곳의 숲은 검은빛을 띤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리진은 인간들을 위한 생명정치를 구현하는 ‘론의 편’이었으나 이제는 반대가 되었다. 그는 요람 행성의 파괴자였고 회사의 프로젝트를 그르친 사원이었지만, 요람 행성이 론에 의해 ‘면역화’ 되는 것을 막은 그의 행위를 헛된 일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것은 감수력이 행위력으로 전환되면서 생성된 힘의 작용이며, 생명권력을 거부한 채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충실히 실천했던 윤리적 주체가 남은 인생을 바쳐 일궈낸 성과이기 때문이다.

3. 파르마콘을 둘러싼 절멸과 회복의 변증법 : 정세랑의 「리셋」
박해울 작가의 「요람 행성」이 테라포밍 과정에서 발생하는 생명권력의 거부와 생명윤리의 회복을 다루고 있다면, 정세랑 작가의 「리셋」은 망가진 지구를 다시 복원하는 리테라포밍(재지구화, reterra-forming)과 그 이후의 서사를 담고 있다. 주로 지구 이외의 행성에서 전개되는 테라포밍 서사와 달리 리테라포밍 서사를 분석할 때는 지구가 살아있는 생명, 유기체, 몸이라는 관점에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다.
이를 위해 지구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는 ‘가이아 가설(Gaia Hypothesis)’[20]을 먼저 살펴보자. 1970년대에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은 그리스 신화 속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의 이름을 따서 ‘가이아 가설’을 발표한다. 이 가설의 핵심은 “지구는 다른 행성들과는 달리 생물들이 살기에 적합하도록 항상 스스로 환경을 조절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21]라는 것이다. 러브록은 1975년 NASA의 화성탐사 계획에서 화성의 대기 구성을 조사하여 생명체의 존재 여부를 찾는 ‘바이킹 프로젝트’에 참여하던 중, 지구의 생명체들이 진화 과정에서 대기를 자신들의 생존에 맞게 변화시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살아있는 지구를 사이버네틱 시스템(cybernetic system)에 비유해 설명한다. 사이버네틱스는 유기체와 기계가 외부 환경에서 주는 피드백을 바탕으로 개체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시스템이다.[22]
하지만 20세기 후반 이후 인간들이 수백만 년 동안 지구가 스스로 변화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대기권과 지표면을 망가트리면서 러브록이 생각한 ‘가이아로서의 지구’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지구의 일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인간들이 가이아를 위험에 빠뜨렸고, 지구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기후재난을 활용해 인간들을 다시 위험에 빠뜨린다. 러브록은 가이아의 자정능력을 과대평가하며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했지만 상황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비극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과학기술 철학자 브르노 라투르는 러브록의 관점을 기본적으로 존중하지만 가이아가 항상성과 능동적 조절 능력에 의해 비교적 균질적 상태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가이아의 유동적이고 가변적이고 혼종적이고 불안정한 성격에 주목한다.[23] 또한 기후재난 이후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가이아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에게는 지구라는 행성뿐 다른 출구나 바깥이 없음을 강조한다.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해 다른 종의 생명 및 생태계 전체를 파괴하고 부정했던 시간들이 결국 지구가 스스로를 파괴하는 기후재난으로 되돌아왔고, 그 결과는 인간을 위시한 지구 생태계의 전면적인 붕괴로 이어지고 있다. 말 그대로 ‘가이아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 ‘탈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에 기반을 두고 있는 라투르의 이론 안에서 인간의 변화한 존재조건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지구에 묶인 자들(the Earthbound)’들은 가이아의 일원으로서 비인간 행위자들과 함께 ‘지구이야기(geostory)’를 써나가야 한다.[24]
라투르의 ‘지구의 묶인 자들’이 몸의 물질성에 주목한 것과 마찬가지로 면역의 생명정치 역시 ‘몸’의 핵심적인 역할을 중심으로 구축된다. ‘몸’이야말로 정치와 생명/삶의 관계가 가장 즉각적으로 성립되는 영역이다. 병/악의 침투를 가장 직접적으로 실험하는 것이 ‘몸’이다. 몸을 둘러싸고 작동하는 생명정치는 근원적인 동시에 생산적 전복이 이루어지는 지점이다. 질병은 생명이 계속해서 거리를 두어야 할 외부의 테두리로 기능하는 동시에 생명이 스스로와 변증법적으로 관계하도록 만드는 내부의 주름으로도 기능한다.[25] 이러한 논의는 「리셋」에 나타난 기후재난 이후의 리테라포밍을, 파르마콘을 매개로 지구-몸이 회복되는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정세랑의 「리셋」은 시간 순서에 따라 거대 지렁이들이 지구를 초토화시킨 ‘리셋’ 원년부터 A.R. 2년까지를 다룬 전반부 서사와 재건이 이루어진 A.R. 74년의 후반부 서사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에서는 거대 지렁이의 갑작스러운 출현과 이에 대한 인간의 대응이 주요 사건으로 다루어진다. 후반부에서는 지렁이가 떠나고 난 후 지구가 인간 중심주의와 소비 만능주의에서 탈피해 변화하는 양상이 구체적으로 서술된다.
소설 속에서 인간들이 삶의 궤도를 수정할 수 있게 도운 존재는 ‘거대 지렁이들’이다. 처음에 인간들은 거대 지렁이가 다른 차원에서 우주선을 타고 온 존재라고 생각했었지만, 실제로 거대 지렁이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의 지구에서 온 존재들이었다. 두 엄마가 모두 빈강모 학자였던 ‘앤’이 지구를 정화하기 위해 미래에서 지렁이들을 보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지렁이들은 공포스러운 존재였지만, “과잉생산과 과잉소비에 몸을 맡겼”(44)던 인간들에게 구역감을 느끼는 인물과 인간들은 실패했지만 “화석연료 산업을, 거기서 파생된 다른 거대 기업들”(62)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물은 지렁이의 출현을 반긴다. 거대 지렁이들은 플라스틱을 비롯한 “휘발성 유기화합물”을 집중적으로 먹어 치웠다. 인공적인 구조물들을 공략하는 거대 지렁이들은 지구를 망가트리고 파괴하러 온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이들은 지구를 구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이러한 지렁이들을 ‘면역의 생명정치’와 연결하여 이야기해 보면, 지렁이들이 지구에 온 것은 지구를 구성하는 존재가 지구를 공격하는, 다시 말해 지구의 ‘자가면역질환’을 유도하기 위한 ‘파르마콘적 기획’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공통성을 완전히 제거하는 근대화의 ‘면역화’ 프로젝트 안에서 나와 타자, 면역성과 공통성의 관계는 파괴의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 이는 자기 파괴적인 충동에 가까우며, 이 충동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자가면역질환이다. 자가면역질환은 면역장치가 전복되어 스스로를 공격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외부의 힘을 막아 경계를 고수하는 조치가 과잉 면역으로 이어지면, 면역체계는 원래의 환경이나 자기자신의 구성 성분을 이물질로 인식하는[26] 자가면역이 진행된다. 이 경우 면역체계는 잠재적인 전투력의 포화상태를 주체하지 못하고, 어느 시점에선가 스스로를 공격하여 유기체의 전면적인 붕괴를 야기한다.
「리셋」 속에서 지구를 파괴하는 거대 지렁이의 형상 역시 ‘자가면역’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지렁이는 미래라는 외부에서 온 ‘항원’인 동시에 적과 다를 바 없는 내부적 분쟁의 일부인 ‘자가-항체’이다. 이는 면역체계 논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면역체계가 감지하는 모든 것과 대치한다면 감지되는 자신 또한 공격에서 예외가 될 수 없고, 자가면역이 시작되면 자기 인식은 자기 적대와 자살로 이어진다. ‘내전’과도 같은 자가면역은 침투의 경로가 없으며 스스로 파멸해야 끝이 난다.[27]
이처럼 자가면역을 유도하는 장치로서의 거대 지렁이는 ‘파르마콘(phármakon)’의 상징으로도 볼 수 있다. ‘의약’과 ‘독약’의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파르마콘은 ‘삶의 공동화’가 야기할 수 있는 소멸의 가능성으로부터 삶을 보호하는 ‘해독제’의 의미를 지닌다. 인간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던 물질문명은 기후재난과 생태재난을 가져오는 등 인류를 가장 위협하는 요소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유기화합물’을 중점적으로 먹어 치우는 거대 지렁이는 지구를 파괴하면서 동시에 구하는 파르마콘이라고 할 수 있다.
두려움을 원료로 인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지렁이들이 다다르지 않았던 땅 깊은 곳에 도시를 지었고, 지열 발전으로 에너지를 만들어냈고, 어떤 쓰레기도 도시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자원은 도시 안에서 끝없이 순환되었다. 주된 위기는 지진이었다. 초기에는 암반을 잘못 건드려서 지진이 일어났던 적도 있고, 애초에 지진 지역인 경우 지하도시는 훨씬 위험했다. 시행착오를 거치고 천천히 요령을 깨치며 문명을 다시 이룩해내야 했다. 지렁이들이 오기 전보다는 분명 덜 폭력적인 문명이고, 어쨌든 병원도 학교도 있으니 리셋이 모든 걸 리셋한 건 아니어서 다행이다.[28]
파르마콘으로 지구가 회복된 이후에는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 리셋 시대의 영웅들이 건설한 지하도시의 초기 버전은 “지렁이 굴과 다른 지렁이 굴, 지렁이 굴과 기존의 지하시설을”(77) 이은 것이었다. 지하도시가 안정적으로 운영되자 땅 속 지압을 견딜 수 있는 인류는 지하로 들어가고 지상은 다른 종들에게 내어주었다. ‘종차별 금지법’이 만들어진 이후에 인간들은 다른 생명체를 감금하거나 이들을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다. 리셋 이후 사람들의 윤리 감각은 짧은 시간 동안 급격히 변하여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된 것이다.
면역의 생명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지구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거대 지렁이들을 불러와 지구에 자가면역질환을 유도해서라도 지구를 리셋해야만 했다. 물론 그렇다고 이곳에 비극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지구에는 파국이 예상되는 마지막 순간에도 여전히 ‘이타심’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과 아이들을 교육할 학교도 남아 있었다. 거대 지렁이들이 자행한 리셋은 망가진 지구의 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한 것이어서 제도적으로나 심정적으로 가치가 있는 부분들은 리셋 이전 상태로 보존되었다. 그래서 소설은 지구를 파괴했던 유기화합물을 걷어내고 인류애와 온정은 지키는 장면, 즉 재앙을 만난 사람들을 도와주러 가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이처럼 「리셋」의 리테라포밍은 파르마콘적 기획을 경유하면서 부정적인 것들의 절멸과 긍정적인 가치의 회복이 변증법적으로 지양되는 과정을 따라서 진행된다.

4. 증여받은 시간과 공동면역을 위한 협약 : 김초엽의 「오래된 협약」
김초엽의 「오래된 협약」에는 새로운 항로가 발견되어 ‘벨라타’ 행성에 도착한 인간들과 이곳의 생물, 대기, 해양, 암석 등 모든 조절작용에 관여하는 행성 자체이자 생명체인 ‘오브’가 등장한다. 벨라타에 살게 된 인간들은 오브가 죽은 식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오브는 “생각하고 말하는 지성체”(216)인 동시에 지상의 모든 만물을 관장하는 자기조절적 실체이다. 게다가 이들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간다.
언뜻 죽은 고목처럼 보이는 오브들은 이 행성 전체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땅 위로는 몸의 일부를 드러낸 채, 행성 자체로 기능합니다. 그들은 개체인 동시에 집단이며, 개체로서의 지성과 집단으로서의 지성을 모두 지닙니다. 집단으로서의 오브는 사실상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가지요. 벨라타의 모든 생태계가 직간접적으로 오브들의 근권과 내권, 엽권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생명 활동과 대사 작용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바로 대기 중의 루티닐입니다. 벨라타 생물들에게 그것은 정상적인 생태계 순환을 구성하는 주축이자 물질대사 고리의 중요한 요소이지요.[29]
그런데 처음 벨라타 행성에 도착한 인간들은 오브들이 내뿜는 신경독성 물질인 ‘루티닐’로 인해서 이곳의 환경이 자신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음을 깨닫고, 오브와의 공존 대신 자신들이 살기 위해 그들을 죽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인간들의 공격은 강력한 오브들에게 그다지 타격을 주지 못했고, 침략자가 되는 대신 지하로 숨어든 몇몇 인간들이 진심을 다해 사과하자 오브들은 인간들에게 자신들의 영원한 시간을 나눠주기로 결정한다.
벨라타 행성의 인간과 오브의 관계는 몸의 문제와도 얽혀 있다. 에스포지토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도나 해러웨이나 알프레드 토버는 폐쇄적인 일체형 정체성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정체성 개념에 주목한다. 이들의 논의 안에서 몸은 주변 환경과의 지속적인 교류에 개방되어 있는 활동적인 구성체이다. 아울러 몸은 ‘교류’뿐만 아니라 면역체계에 기반을 둔 ‘교환’에도 개방되어 있는데, 오브와 인간의 관계를 연상케 하는 이 사유는 에스포지토가 이야기하는 ‘면역관용’을 매개로 하여 그 의미를 보다 구체화할 수 있다.
에스포지토는 여성의 임신을 중심으로 면역관용을 설명한다. 임신 상황에서 면역 메커니즘은 이중적으로 작동한다. 면역체계는 태아(타자)에 대해서뿐 아니라 산모(자아) 자신에 대해서도 면역을 시도한다. 항체는 산모의 자기보호체계를 은폐하여 태아의 생존을 허락하게 되는데, 이때 태아의 유전자가 충분히 이질적이어서 항체가 생성되어야 산모가 태아를 견딜 수 있다. 태아는 산모와의 ‘차이’를 통해 고유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산모의 면역체계가 태아를 수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태아의 유전자가 지닌 ‘유사성’이 아니라 ‘이질성’이라는 사실은 ‘차이’가 우리를 끌어들이고 가로지르기 위해 활용하는 일종의 진동판 내지 공명상자라는 것을 보여준다.[30]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오브들과 인간들의 관계는 에스포지토가 이야기하는 산모와 태아의 구도와 유사하다. 원래 벨라타는 “역동하는 생명들의 행성”(221)이었지만 지금은 정적인 행성으로 변화했다. 그 이유는 연민할 줄 아는 존재인 오브들이 불청객이자 취약한 존재인 인간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루티닐의 생성을 줄이기 위해 움직임을 최소화한 채 잠을 자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오브들은 인간들에게 “우리가 행성의 시간을 나누어 줄게.”(218)라고 약속하고, 인간들은 더 이상 오브들을 해치지 않겠다는 ‘협약’을 맺으면서 이 둘은 오랫동안 하나이면서 둘인 채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 행성에는 신경독성 물질이 대기 중에 분포해요. 루티닐이라는 이 물질은 당신들의 신경계로 침입해 뇌를 파괴하지요. 태어난 직후부터 당신들이 들이마시는 공기가 끔찍한 죽음을 초래하는 거예요. 당신들의 수명이 짧은 것도, 당신들이 몰입을 경험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에요. 몰입은 뇌의 손상으로 나타나는 결과일 뿐이에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이미 벨라타에 존재한다는 사실이에요.”
저는 고개를 내저었지만 당신은 말했습니다.
“바로 오브를 먹는 거예요. 노아, 당황스럽겠지만…….”
“대화는 여기서 끝내는 게 좋겠어요.”
“오브는 그냥 죽은 식물이에요. 생물학적 활성이 없어요, 노아. 금기도 신의 저주도 아니라고요.”[31]
그런데 이러한 공생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간들의 수명이 너무 짧아졌고 생의 마지막 시기에 기억을 잃거나 언어능력이 급격히 감쇠하거나 환각을 보는 ‘몰입’ 상태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구에서 온 ‘이정’은 자연과 우주, 미생물과 별의 시간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친구가 된 ‘노아’에게 오브를 먹으면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알려준다. 벨라타에 사는 인간들을 걱정하는 이정의 마음은 진심이지만, 오브와 인간 사이의 ‘오래된 협약’을 알 리 없는 그는 이 둘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면역관용적 태도로 협약을 맺은 이들과 달리 이정은 오브와 인간의 대결 구도를 기반으로 사유를 이어나간다. 그래서 이 소설은 벨라타인인 ‘노아’가 지구인인 ‘이정’에게 오브와 인간들 사이의 ‘오래된 협약’에 대해 알려주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인간은 신체적 취약성을 지닌 채 보편적인 불안정성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존재들이다. 모든 개인의 신체는 고통, 질병, 죽음의 관점에서 평등하게 취약하다. 그리고 이처럼 평등한 인간의 취약성은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기초가 되기도 한다.[32] 지구인인 이정은 벨라타 행성의 사람들이 이 취약성을 넘어서기 위해 오브를 먹어야 한다고 조언하지만, 노아는 오브를 먹지 않기 위해 수명의 단축을 선택한다. 전자가 타자에 대한 배제와 부정에 기반을 둔 면역학적 구도라면, 후자는 상생을 위한 면역관용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벨라타의 사람들이 증여받은 “삶의 시간은, 이 행성의 시간을 잠시 빌려온 것에 불과하다.”(224) 그래서 노아는 오브들이 ‘신’이거나 ‘금기’의 대상이어서가 아니라 ‘협약’을 통해 약한 존재들과 ‘함께-살기’를 선택해준 존재들이기 때문에 경외한다. 협약 이후 오브와 인간들 사이에는 ‘총체적 호혜(total presentation)’라고 부를 만한 현상이 만들어진다. 이 둘 사이에서 전적인 의존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의무적인 선물[33]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오브들과 자신들을 구분하고 오브들을 제거하려고 할 때 인간은 괴물인 채로 죽어가지만, 인간과 오브의 공존 구조 속에 들어오게 되면 이 둘은 공동면역 상태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된다.

5. 보답할 의무가 만드는 생명공동체
테라포밍이 나타나는 소설은 ‘세계의 끝’과 맞닿아 있다. 이 소설들은 기존 소설들에서 중심을 이루던 인물, 사건, 배경 역시 다르게 구성된다. 인물보다 (비)인간 행위소와 피조물의 감정이 더 중요해지고, 사건은 인간과 비인간의 얽힘뿐 아니라 파국과 일상의 얽힘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배경과 전경이 얽히고, 심원한 시간과 인간이 사라진 세계가 펼쳐지기도 한다.[34] 그래서 이 소설들 속에서는 인간들이 외계 생명체들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기도 하고,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생명체들이 지구를 정화하기도 하며, 인간과 외계 생명체들이 공존하기 위해 협약을 맺기도 한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그 역량의 증진을 위해서는 외부와의 접촉이 불가피하다. 살균과 멸균의 욕망은 개인과 공동체의 건강을 보장하지 못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전염과 폭력은 생명들 간의 공존을 위협한다.[35]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 나타난 사회적인 분위기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시기에 창작된 한국 SF들에서 타자는 장벽을 세워 막아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상호침투와 새로운 존재 생성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그려진다.
2020년대의 팬데믹 시기에는 오래전부터 진행되던 기술화와 면역화의 결속 과정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정치적인 차원이 약화되었다. 팬데믹은 ‘면역화’가 사실상 문명화의 비밀스러운 이름임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면역의 생명정치를 둘러싼 제도의 변화와 이론적인 발전의 필요성까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 성과가 바로 ‘자가면역화’에서 ‘공동면역’의 미래적인 윤곽을 발견하는 것이다. 코무니타스와 임무니타스가 중첩되는 경로에서 역설적인 이름의 ‘공동면역’의 가능성이 포착된다.[36] 이것은 팬데믹 시기에 낯선 타자에 대한 배제와 혐오, 차별이 만연한 사회 속에서 이질적인 존재들의 ‘함께-있음’이 지니는 가치와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 호혜적인 관계가 지니는 의미를 재고하라고 요청한다.
본고에서는 이 시기에 창작된 SF 작품들을 ‘면역’과 ‘생명정치’와 ‘공동체’를 중심으로 고찰하여, 지구의 생명체뿐 아니라 외계의 생명체들도 서로가 서로에게 베풀어야 할 의무를 다함으로써 생명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 시기의 한국 SF들은 철학 담론과 더불어 대안적 미래의 이념으로 상생적 공존 논리를 모색하면서 그 고민을 보다 구체화하고 있다. 실제로 팬데믹 이후에 낯선 타인을 의심하고 경계하는 태도는 한층 더 심화되었다. 하지만 한국 SF들은 이방인을 항원처럼 여기며 배척하는 현대의 인간 사회에 경종을 울리며, 생명의 그물 속에서 이종(異種)의 생명체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을 내어주고 타인을 받아들이는 일임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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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은 20203년 9월 30일에 발간된 『국제어문』 제98집에 같은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2] 로버트 스콜즈⋅에릭 S. 라프킨, 『SF의 이해』, 평민사, 1993, 151-159쪽.
[3] 최이수, 『두 번째 달- 기록보관소 운행일지』, 에디토리얼, 2021, 431쪽.
최이수 작가는 ‘작가후기’에서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두 번째 달》의 첫 연재를 시작한 날짜는 2020년 4월 1일이고, 그때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가 올스톱되기 시작했던 시기입니다. 저 역시 그 여파를 피하지 못하고 재택근무를 시작했는데요. 재택근무 일과가 끝나거나 주말이 되어서도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서 많이 답답하더군요. 그래서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한 일종의 탈출구로 시작한 것이 《두 번째 달》의 연재였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이렇게 돌이켜 보니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셈입니다.”
[4] 미셸 푸코, 오트르망 역, 『안전, 영토, 인구』, 난장, 2011, 159쪽.
[5]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윤병언 역, 『임무니타스』, Critica, 2022a, 12-15쪽.
라틴어 사전에 따르면 ‘면역’ 또는 ‘면제’를 뜻하는 명사 ‘임무니타스’는 이에 상응하는 형용사 ‘임무니스(immunis)’와 마찬가지로 어떤 특성의 ‘결핍’이나 ‘부정’을 표현하는 단어이며, 부족하다고 지적하거나 부정하는 ‘무누스(munus)’에서 역으로 고유의 의미를 확보한다. ‘무누스’가 업무, 임무, 책무, 의무를 가리키는 반면, 임무니스는 어떤 업무도 맡지 않은 사람을 가리킨다. ‘임무니스’는 “무누스에서 자유로운, 무누스가 없는” 사람, 즉 공물 헌납의 의무(pensum)나 타인을 위한 봉사의 의무에서 벗어난 사람을 수식하는 용어이다. 이러한 ‘임무니스’의 개념을 결정짓는 것은 ‘무누스’라는 개인적이거나 금전적이거나 사회적인 의무사항의 면제다. 의무에서 벗어나 공동체 바깥에 머무는 자가 바로 임무니스, 면책 특권자다. 그래서 임무니스는 본질적으로 ‘달갑지 않은(in-grato)’ 존재다. 임무니스에 상응하는 ‘임무니타스’ 개념의 의미론적 핵심은 항상 타인들과 대조했을 때 부각되는 ‘예외성’이다. 임무니타스는 다른 모든 사람이 준수해야 할 어떤 규칙에서 벗어나는 예외적인 경우를 가리킨다. 따라서 임무니타스, 즉 ‘면역성’의 진정한 반의어로 간주되어야 할 용어는 무누스를 공유하는 이들의 코무니타스, 즉 ‘공동체’이다.
[6]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윤병언 역, 『코무니타스』, Critica, 2022b, 1-2장.
[7] 김은주, 「에스포지토의 증여로서의 면역(immunitas)와 공동체(communitas): 근대 면역 패러다임의 명 정치를 넘어서는 커먼즈의 구축」, 『탈경계인문학』 제31집, 이화인문과학원, 2022, 152-157쪽.
[8] 노대원・황임경, 「포스트휴먼, 바이러스, 취약성」, 『국어국문학』 no.193, 국어국문학회, 2020, 93-120쪽.
노대원, 「포스트휴먼 (인)문학과 SF의 사변적 상상력」, 『국어국문학』 제200호, 국어국문학회, 2022, 113-136.
───, 「미래를 다시 꿈꾸기: 한국과 글로벌 SF의 대안적 미래주의들」, 『탈경계인문학』 Vol.16 No.1, 이화인문과학원, 2023, 31-57쪽.
[9] 복도훈, 「인류세의 (한국)문학 서설」, 『한국문예창작』 vol.19 no.3, 통권 50호, 한국문예창작학회, 2020a, 13-34쪽.
───, 「행성 시학―어떤 사변적 소묘」, 『서정시학』 30(2), 계간 서정시학, 2020b, 118-128쪽.
───, 「망설임과 대혼란, 인류세라는 비평―아미타브 고시의 『대혼란의 시대』에 대하여」, 『K-문화융합저널』 제1권 1호, K-문화융합협회, 2021, 22-23쪽.
[10] 고봉준, 「재난의 생명 정치와 연대의 (불)가능성 - 2000년대 한국소설에 나타난 팬데믹 질병과 ‘종말’의 감각」『한국문예비평연구』 72호, 한국현대문예비평학회, 2021, 7-38쪽.
김혜선, 「생명권력에 나타난 ‘돌봄’의 정치학」, 『우리말 글』 73호, 2017, 우리말글학회, 367-397쪽.
임지연, 「2000년대 재난소설의 ‘어두운 함께-되기’ 서사와 생명정치적 장소성: 편혜영의 『재와 빨강』에 나타난 ‘자연문화’를 중심으로」, 『통일인문학』, 89호,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22, 453-479쪽.
[11] 김초엽, 「오래된 협약」, 『방금 떠나온 세계』, 한겨레출판, 2021a.
박해울, 「요람 행성」, 『우리는 이 별을 떠나기로 했어』, 허블, 2021.
정세랑, 「리셋」, 『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
[12]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발표된 한국 SF 중에서 테라포밍 서사를 담고 있는 작품으로는 최이수 작가의 『두 번째 달- 기록보관소 운행일지』도 있다. 이 작품은 거의 11만 년 동안 진행되는 지구와 인류 재생 프로젝트를 다루고 있으며, 기후재난 이후에 재지구화 서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정세랑 작가의 「리셋」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다른 분석 작품들과 달리 빅스토리를 다루는 장편소설인 점, 생명정치의 문제보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성에 초점이 맞춰진 점 등으로 인해 본고의 분석 대상에서는 제외하였다. 이 작품에 대한 분석은 추후 과제로 남겨둔다.
[13] 고장원, 『SF의 힘: 미래의 최전선에서 보내온 대담한 통찰 10』, 청림출판, 2017, 108-109쪽.
[14] 배명훈, 「화성 내 인간 정주 시설 건립 시 적용 가능한 거버넌스 시스템에 대한 연구」, 외교부 정책연구용역 최종보고서, 2021, 10-11쪽.
[15] 박해울(2021), 앞의 글, 96쪽.
[16] 황임경, 「자기 방어와 사회 안전을 넘어서-에스포지토, 데리다, 해러웨이를 중심으로 본 면역의 사회 정치 철학」, 의철학연구 16호, 2013, 138쪽.
[17] 로베르토 에스포지토(2022a), 앞의 책, 291-299쪽.
[18] 김홍중, 「인류세의 사회이론 1: 파국과 페이션시(patiency)」, 『과학기술학연구』 19권 3호, 한국과학기술학회, 2019, 25-31쪽.
[19] 박해울(2021), 앞의 글, 106-107쪽.
[20] 제임스 러브록, 홍욱희 역, 『가이아 -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 갈라파고스, 2004, 19-20쪽.
‘가이아 가설’은 그 이름이 지닌 신화적 성격과 환원주의적 관점을 거부하는 논리 체계 때문에 처음 등장했을 때는 종교적 신념과 유사한 일종의 메타-사이언스(meta-science)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1994년 4월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 ‘자가조절적 지구(The Self Regulating Earth)’라는 제목의 모임을 시작으로, 신화적 요소를 배제한 후 지구 시스템 과학(Earth system Science) 또는 지구생리학(Geophysiology)’라는 이름을 불리기 시작한다.
[21] 제임스 러브록(2004), 위의 책, 9쪽.
[22] 송은주, 「인류세에 부활한 가이아: 가이아의 이름을 재정의하기」, 『인문콘텐츠』 제 62권, 62호, 인문콘텐츠학회, 2021, 252-255쪽.
[23] 브루노 라투르, 김예령 역, 『나는 어디에 있는가?: 코로나 사태와 격리가 지구생활자들에게 주는 교훈』, 이음, 2021, 44쪽.
[24] 송은주(2021), 앞의 논문, 258-262쪽.
[25] 로베르토 에스포지토(2022a), 앞의 책, 27-30쪽.
[26] 김은주(2022), 앞의 논문, 155쪽.
[27] 로베르토 에스포지토(2022a), 앞의 책, 305-310쪽.
에스포지토는 자가면역반응을 ‘내전’과 연결하여 사유한다. 그는 파울 에를리히의 ‘자가-독성 공포’라는 표현을 가져오는데, ‘공포’는 외부의 적이 없고 순수하게 반사적인 병/악의 특성에서 발견된다. 내전에는 침투의 경로가 없으며 스스로 파멸해야 끝난다. 즉 결과는 둘 중 하나의 승리가 아닌, 순수한 무정부상태다.
[28] 정세랑(2020), 앞의 글, 79쪽.
[29] 김초엽, 「오래된 협약」, 『방금 떠나온 세계』, 한겨레출판, 2021a, 221-222쪽.
[30] 로베르토 에스포지토(2022a), 앞의 책, 311-331쪽.
면역관용은 쉽게 말해 항원을 접촉했을 때 면역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면역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누구도 명쾌하게 답할 수는 없었지만, 면역관용은 동일한 메커니즘 안에서 효과만 전복시키는, 역행적인 면역이다. 면역관용에서 ‘자기와-다른-타자’는 면역 메커니즘 내부의 동력이자 효과로 활용된다. 여기에서 에스포지토는 네트워크 이론을 이용해 모든 타자성이 ‘자기’가 될 수 있다면, ‘자기’는 구축되면서 타자로 변형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자기’는 “고유의 타자성”이다. 같은 맥락에서 주체의 강화에는 주체의 탈구축과 동일시되는 지점이 존재한다. 이는 자기를 타자로 인지하여 자기를 파괴한다는 ‘자가면역’적 견해를 거부하고 자기를 자기로, 타자도 자기로 인지하고 파괴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지지한다. 그러면서 자기와 타자의 경계는 불분명해지고, 자기를 바탕으로 타자를 자기 내부로 끌어와 재정의한다. 네트워크 이론에 따르면 면역체계는 ‘자기’와 ‘타자’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열린 형태의 ‘자기규정체계’이다.
[31] 김초엽(2021a), 앞의 책, 206-207쪽.
[32] 이문수, 「인간 존재와 열린 공동체 로베르토 에스포지토의 사상을 중심으로」, 『문화와 정치』 5(2), 한양대학교 평화연구소, 2018.6, 171-172쪽.
[33] 데이비드 그레이버, 서정은 역,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교환과 가치, 사회의 재구성』, 그린비, 2009, 344쪽.
[34] 복도훈, 「인류세의 (한국)문학 서설」, 『한국문예창작』 vol.19 no.3, 통권 50호, 한국문예창작학회, 2020a, 29쪽.
복도훈이 이 논문에서 기존 소설들의 주요 요소였던 ‘인물’, ‘사건’, ‘배경’이 ‘인류세 소설’에서 변화하는 양상은 ‘행성의 지구화’를 다룬 소설들에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35] 황지영, 「감염원이 된 여성과 공동체의 면역반응: 심훈의 소설들을 중심으로」, 『어문연구』 Vol.48 No.2,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20, 1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