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인-무브

네 번째 엽서

― 현상학과 그라마톨로지 ―


최 원 | 독립연구자    


그 동안 잘 지내셨나요? 한 동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몇 번의 비와 함께 벌써 가을이 성큼 다가온 듯 날씨가 선선합니다. 이번 엽서에서는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현상학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데, 이게 저로서는 조금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오랜 기간 맑스주의나 포스트-맑스주의(특히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논의들), 그리고 정신분석학(특히 라캉의 논의들)에 관심을 기울여 왔기 때문에 현상학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저의 엽서를 받아보시는 당신도 어쩌면 현상학을 조금 낯설게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상학은 앞으로도 몇 차례에 걸쳐서 당신께 말씀드려야 할 주제인데요, 그래서 오늘은 우선 데리다를 논하는데 왜 현상학에 대한 논의가 꼭 필요한지 말씀드리면서 현상학에 대해 일반적인 차원에서의 설명을 곁들이는 정도로 엽서를 써내려 가볼까 합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중심적으로 논의하게 될 하나의 중요한 쟁점을 뽑아내는 일도 해볼 생각입니다.


현상학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에 의해 창안되었고, 그 안에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같은 굵직굵직한 철학자들이 속해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바로 데리다 자신이 속해 있는 거대한 철학적 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과연 데리다가 현상학자라고 볼 수 있는가, 오히려 데리다는 현상학을 비판한 사람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표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 맞습니다. 데리다는 현상학을 비판한 사람이지요. 그가 초기에 쓴 『「기하학의 기원」에 대한 소개Introduction to the “Origin of Geometry”』(1962)와 『목소리와 현상Speech and Phenomena』(1967)은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비판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데리다의 비판은 참 특이하지요. 왜냐하면 탈구축(deconstruction)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의 비판은 비판의 대상을 단순히 부정하고 기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숨겨진 전제들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을 비판적으로 재구축(reconstruct)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입니다. 후설의 현상학을 데리다가 비판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현상학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탈구축하면서 동시에 재구축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놀랍게도 그 결과로서 생산된 것이 바로 그라마톨로지(grammatology)라고 볼 수 있습니다(물론 다른 이론가들에 대한 마찬가지의 탈구축 작업과 함께 말이지요). 요컨대, 그라마톨로지는 탈구축-재구축된 현상학, 또는 X라는 말소 표시가 붙어 있는 현상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에 나오는 데리다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볼까요?



그래서 우리는 현상학적 환원과 초월적 경험에 대한 후설의 준거를 단순한 담론의 계기로 위치시켜야 한다. 경험 일반의 개념―그리고 특히 후설에게 나타나는 초월적 경험의 개념―이 현전이라는 주제에 의해 여전히 지배되는 정도까지, 그것은 흔적을 환원하는 운동에 참여한다. 살아 있는 현재는 후설이 우리에게 준거토록 하는 초월적 경험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형태이다. 시간화 운동의 기술(記述)에서, 이 형태의 단순성과 지배를 흔들지 않는 모든 것은 우리에게 초월적 현상학이 형이상학에 속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단절의 힘들과 합의를 봐야 한다. 후설이 실질적으로 기술하는 것과 같은 시원적 시간화와 타자 관계의 운동에서, 비현전화나 탈현전화는 현전화와 마찬가지로 ‘시원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흔적에 대한 사상은 초월적 현상학과 단절될 수 없을 뿐더러 그것으로 환원될 수도 없다.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김웅권 역, 동문선, 116~117쪽, 데리다의 강조, 번역은 수정)



이 비상한 구절은 데리다가 현상학(특히 후설의 것)에 대해 비판하는 점이 어디인지를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그라마톨로지가 현상학과 “단절될 수 없다”는 점, 다시 말해서 그라마톨로지는 현상학의 연장(continuation)이라는 점을 또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이 나오고 있는 절에 데리다가 준 제목은 “바깥쪽은 안쪽이다”인데, 데리다는 이 “이다”에 말소의 X표를 쳐 놓았지요. 여기 웹진에는 편집기능이 제한되어 있어서 그것을 표시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바깥쪽과 안쪽을 이렇게 등치시키면서도 등치시키지 않는 태도는 현상학적 사유의 핵심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바깥이 선차적이다’(경험론 또는 모종의 유물론) 또는 ‘안쪽이 선차적이다’(합리론을 비롯한 다수의 관념론) 주장하며 서로 싸우고 있을 때, 후설은 바깥쪽과 안쪽의 ‘사이’(inbetween) 공간에 주목하면서 우리는 늘 그런 사이 또는 중간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했지요. 그는 이를 “현상학적 다리(bridge)”라고도 부르지요. 데리다 또한 바로 바깥쪽과 안쪽을 탈구축하는 저 제목을 통해서 자신이 주목하고 있는 것 또한 이 사이 공간, 또는 오히려 (데리다의 관점에서는) 사이 시공간(time-space)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반면 데리다가 후설에게서 비판적으로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바로 후설의 사고가 “살아있는 현재” 또는 “현전”의 시간성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바깥쪽과 안쪽의 사이 공간을 특징짓는 것이 후설에게 있어서는 바로 ‘의식’(consciousness) 입니다. “의식은 항상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이다(Consciousness is always a consciousness of something)”라는 “지향성”(intentionality)에 대한 후설의 유명한 테제를 떠올려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의식은 늘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을, 곧 어떤 ‘대상’(objects)을 지향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대상을 “이념적 객관성(ideal objectivities)”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지요(이 전환은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달성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의식은 기본적으로 현재라는 시간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의식은 늘 무엇인가를 현재적으로 지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의식은 과거와 미래의 어떤 것을 지향할 수 있습니다. 의식의 지향(intention)이 과거를 지향할 때 그것은 기억(retention)이 되고, 미래를 지향할 때 그것은 예기(protention)가 됩니다. 그렇지만―이 점이 매우 중요한데―의식은 과거를 지향할 때에도 바로 현재로서의 과거 또는 현재적 과거(present past)를 지향하며, 미래를 지향할 때에도 현재로서의 미래 또는 현재적 미래(present future)를 지향합니다. 바꿔 말해서, 후설에게 시간이란 현재들(now-s)의 연속인 것이지요. 지금, 지금, 지금이 모여서 시간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위의 절(X표 친 “바깥쪽은 안쪽이다”라는 제목의 절)에 바로 이어지는 절(“틈새”)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데리다의 말을 함께 읽어볼까요?



그러한 복잡성은 요컨대 후설이 기술한 복잡성 자체인데, 과감한 현상학적 환원에도 불구하고 분명 직선적이고 객관적이며 세계적인 모델의 현존에 만족한다. 있는 그대로의 B라는 지금은 A라는 지금의 과거 기억과 C라는 지금의 미래 예기에 의해 구성된다 할 것이다. 이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유희에도 불구하고 세 개의 지금 각각이 그 자체 안에 시간의 이러한 구조를 재생한다는 사실로 인해, 이 계속성의 모델은 X라는 지금이 예를 들어 A라는 지금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금지할 터이고, 의식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지체의 효과를 통해 하나의 경험이 이 경험의 현재 자체 속에서 하나의 현재, 이 경험을 즉각적으로 앞서지는 않았지만 그것에 매우 폭넓게 ‘선행’할 수 있는 그런 현재에 의해 결정되는 일을 금지할 것이다. 이러한 면은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는 지체 효과의 문제이다. 지체 효과가 준거하는 시간성은 의식이나 현전의 형이상학에 적합한 시간성일 수 없다. 그래서 여기서 문제되는 모든 것을 여전히 시간․지금․선(先)현재(선행하는 현재)․지연 등으로 부르는 권리에 이의가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같은 책, 125쪽)



여기서 우리는 데리다가 후설의 현상학이 가지고 있는 시간의 모델이 현재들의 선형적 연속이라는 모델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 대목에서 어쩌면, “그렇다면 지금들의 연속으로서의 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이 정말 있다는 것인가?” 의문을 표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데리다가 간략하게 언급하는 프로이트의 “지체 효과”이지요. 여기서 “지체 효과”라고 김웅권 선생이 번역한 용어는 Nachträglichkeit로 주로 ‘지연효과’라고 번역되거나 또는 ‘사후성’(après-coup)이라고 번역되는 말입니다. 데리다가 ‘지연’이라는 문제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보면 데리다의 맥락에서는 지연효과라고 옮기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지만 정신분석학 내에서는 주로 사후성이라는 번역어가 더 선호됩니다. 어쨌든 프로이트의 지연효과는 시간(또는 인과성)이 선형적인 순서로 진행되지 않고 오히려 뒤에 오는 어떤 사건이 앞서 온 어떤 사건을 결정하는 식으로 진행되기도 하며, 현재화되지 않는 어떤 것이 무의식적 과거로서(따라서 “절대-과거”로서) 남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지연효과에 대한 좀 더 상세한 논의는 글의 흐름상 본문에 담을 수 없으니 각주로 처리 하겠습니다[각주:1]). 이 반-직관적(counter-intuitive)이자 무의식적인 시간성을 데리다는 차연(differance)의 시간성이라고 부르면서 오히려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지금들(nows)은 이 차연의 운동의 효과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하지요. 지금들이 모여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차연의 시간이 지금들을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는데, 데리다는 나중에 루소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도 이 점을 다시 한 번 환기합니다.



현재란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시간을 사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차연으로서의 시간으로부터 현재를 사유해야 하는 그 역의 필연성을 지우면서 말이다. (같은 책, 292쪽, 번역은 수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데리다가 후설이 주목한 현상학적인 사이 공간을 자신의 그라마톨로지가 전개되어야할 공간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떻게 보면 바깥쪽과 안쪽이라고 우리가 믿는 것은 사실은 사이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차연의 운동의 효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깥쪽과 안쪽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사이 공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이 공간이 먼저 있고 그것의 효과가 바깥쪽과 안쪽으로 경험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이는 소쉬르가 언어에서 차이란 적극적인 것(즉 A와 B라는 서로 다른 적극적 항이 있는 차이)이 아니라 소극적인 것이며, 언어에는 차이만이 존재한다고 말할 때와도 유사하게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봤듯이 데리다는 후설적인 사유가 현전의 시간성에 얼마간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현전에서 벗어나는 운동 또한 행하고 있다고 파악하면서 이 사이 공간을 그라마톨로지의 공간으로 재구성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서 길게 논할 수는 없지만, 또 다른 현상학자이자 기호학자로서의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에게서 데리다가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른바 ‘(사)물 자체’는 언제나 이미 직관적인 명증성의 단순성으로부터 벗어난 표상이다”(같은 책, 95쪽)라는 것입니다. 이는 사물 자체가 놓여있는 바깥쪽은 없으며(바깥쪽이 없으니 당연히 안쪽도 없지요), 오직 대리표상들(representations) 또는 (같은 말이지만) 대리보충들(supplements)로서의 에크리튀르가 있는 사이-시공간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퍼스는 “상징은 상징으로부터만 나온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아무리 우리가 상징하는 것으로부터 상징되는 것으로의 연쇄를 쫓아가도 우리가 그 연쇄의 기원의 자리에 있을 거라고 가정되는 사물 그 자체의 현전에는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사물은 ‘항상 이미’(always already) 상징 또는 표상인 것이지요.


후설 또한 칸트의 물자체 개념을 비판하면서 시간과 공간에서 모두 빠져나가 있는 물자체라는 관념은 부조리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후설은 어떤 주어진 사물의 본질은 그 사물의 현상들의 총합, 다시 말해서 그 사물이 주체에게 나타나는 무한한 모습들의 뭉뚱그림(adumbration)일 뿐이라고 말했지요. 다만 데리다가 “바깥쪽은 안쪽이다”의 “이다”에 가위표를 치고 있는 것은 이런 현상학적 사이 시공간을 마치 실체처럼 또 다시 현전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루소를 논하는 맥락이긴 하지만) 데리다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대리 보충성(supplementarity)의 논리, 그것은 바깥쪽이 안쪽이기를 바라고, 타자와 결여가 부족한 것을 대신하는 추가분으로서 스스로를 추가하기를 바라고, 어떤 것에 스스로를 추가하는 것이 사물 안에 있는 결핍(default)을 대신하기를 바라고, 안쪽의 바깥쪽으로서의 결핍이 이미 안쪽에 있어야만 하기를 바라는 것 등이다. (같은 책, 376~377쪽, 번역은 수정)



자, 이제 우리는 『그라마톨로지』에 나오는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라는 데리다의 스캔들적인 테제가 (탈구축된) 현상학적인 테제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떤 치열한 논쟁이 발발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보게 됩니다. 특히 저에게는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루이 알튀세르의 입장을 쫓아온 사람인데, 알튀세르가 현상학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튀세르는 현상학이 바깥을 사유할 수 없는 무능력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말하면서, 이질적인 심급들로 이루어진 복잡한 전체라는 실재적 바깥을 하나의 현상학적 공간 내의 ‘바깥’, 다시 말해서 ‘안’의 전도된 상으로서의 ‘바깥’으로 환원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여기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제 책 『라캉 또는 알튀세르』의 제3장을 참조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데리다의 관점에 서서 우리는 알튀세르가 바깥의 ‘현전’에 사로잡혀 있는 철학을 하고 있었다고 말해야 할까요? 그리고 우리는 오히려 후설적인 현상학을 탈구축적으로 재구성하는 데리다의 작업에 더 주목해야 하는 걸까요? 앞으로 저는 이 문제에 대해 당신께 저의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어수선하게 엽서에 담아 보내 드리게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아직 저로서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데리다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알튀세르가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이야기를 전개하기에 앞서서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일반적인 차원에서의 설명을 간략히 드리는 것으로 이 엽서를 마무리 하고 싶습니다. 데리다와 알튀세르 사이의 쟁점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후설에 대한 이해가 필수불가결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후설의 현상학의 기원에 있는 것은 칸트(또는 칸트와의 논쟁)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칸트는 잘 알다시피 경험론과 합리론의 종합을 이룬 사람이지요. 그는 특히 이 종합을 직관과 개념 간의 선험적 종합판단의 문제로 정식화함으로써 이룩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유명한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고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라는 말은 바로 우리의 모든 판단은 개념과 직관이라는 양극을 모두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적절히 표현하는 말이지요. 사물에 대한 이론적 인식에 관련된 판단을 칸트는 규정적 판단(determinate judgment)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예술에 관련된 반성적 판단(reflective judgment)과 대립시켰는데, 오늘 우리의 논의와 더 깊은 관련이 있는 규정적 판단은 직관을 개념 하에 포섭(subsume)함으로써 이루어지는 판단입니다. 예컨대 “이것은 고양이다”라는 판단은 “이것”이라는 대상의 독특함(singularity)을 “고양이”라는 개념 또는 범주 하에 포섭함으로써, 즉 그 사물의 독특함을 지움으로써 달성됩니다(반면 반성적 판단은 어떤 사물의 독특함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론적 개념들을 그 엄격한 본래적 사용으로부터 분리시켜서 유희적 방식으로 활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판단이지요).


그런데 후설은 칸트의 이런 이론에 근본적인 수정을 가하면서, 개념이란 부차적인 것이며 직관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모든 인식의 뿌리라고 주장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고양이를 볼 때, 우리는 단지 그 고양이만 보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적임(cat-ness)’까지 같이 본다는 것이지요. 후설에 따르면, 그렇게 우리의 직관은 어떤 사물이 우리에게 주는 무질서한 단순한 감각의 편린들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의 본질(essence)까지도 직관합니다. 이를 후설은 “범주적 직관”(categorial intuition)이라고 불렀지요. 칸트는 알다시피 ‘지적 직관’(intellectual intuition)을 부정하면서 그런 것은 신이나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후설은 (감각을 완전히 떠나 있는) 지적 직관과는 구분되는 (감각에 뿌리 내린) 범주적 직관을 이론화하고, 지성이 본래적으로 또는 선험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칸트가 말하는 개념들은 이 범주적 직관을 가공함으로써 얻게 된 것, 파생적으로 발생된 것이라고 본 것이지요. 후설에 따르면,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한 것이 맞지만,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후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무엇보다 철학을 이러저러한 모든 개별 과학들(국지 과학들)의 기초를 파악하는 “과학들의 과학”으로서의 현상학으로 확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후설은 젊은 시절에 프란쯔 브렌타노(Franz Brentano) 밑에서 공부하면서 『산수의 철학Philosophy of Arithmetic』(1891)이라는 첫 번째 책을 쓰고 산수의 기초에 대한 심리학적 설명을 시도했습니다. 즉 숫자 및 모든 산수적 진리들이 수학자들의 정신적 작업에 의해 구성되는 방식을 보여주려고 시도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1894년에 고틀로프 프레게(Gottlob Frege)는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 후설의 심리학주의를 비판하면서, 정신과는 독립적인 지시체(referent)로서의 숫자들과 그 숫자들을 파악하는 정신행위를 통해 형성되는 의미(sense), 곧 수학적 표현들의 의미를 후설이 혼동하고 있다고 지적했지요. 프레게는 알다시피 지시체와 의미를 구분한 것으로 유명한 철학자이지요. ‘새벽별’, ‘저녁별’이라는 말은 동일한 지시체로서의 ‘금성’을 가지고 있지만, 상이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것인데요, 이런 관점에서 프레게는 후설이 과학의 객관성을 지시체가 아닌 의미에서 도출하려는 시도가 가지고 있는 주관주의적인 성격을 공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후설은 곧바로 자신의 기획을 포기합니다. 『논리적 조사Logical investigation』(1900-01)에서 후설은 심리학주의를 거부하고 ‘형식적’이거나 ‘순수한’ 논리학을 추구하는데, 이는 칸트가 꿈꿨던 것이자, 베르나르트 볼짜노(Bernard Bolzano)가 “과학의 이론” 또는 “과학들의 과학”이라고 불렀던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후설은 이제 경험적 심리학은 ‘순수 심리학으로서의 현상학’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현상학의 과제를 순수논리학이 관여하는 ‘이념적 대상들’(ideal objects)을 확보하는 행위의 본질적 구조들을 식별하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후설은 『이념들Ideas』 제1권에서 이렇게 경험적 대상들로부터 이념적 대상들을 확보해내는 의식의 행위를 “현상학적 환원”(phenomenological reduction)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괄호치기 또는 에포케(epochē)라고도 부르는 현상학적 환원은 두 가지 환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형상적 환원”(eidetic reduction)이고 다른 하나가 “초월적 환원”(transcendental reduction) 입니다. 형상적 환원은 대상으로부터 모든 우연적이거나 특수한 성격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우리는 이를 통해 플라톤적인 의미에서의 형상(eidos) 또는 이데아(Idea)를 얻게 되지요. 반면 초월적 환원은 대상을 그 실존(existence)으로부터 분리하는 환원을 말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 대상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대상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됩니다. 예컨대 과거에만 존재했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공룡에 대해서도, 그리고 우리의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유니콘에 대해서도 우리는 현상학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종류의 환원을 수행함으로써 우리의 초월적 자아(transcendental ego) 내의 정신적 공간에는 이념적 대상들이 확보되고, 우리는 그 이념적 대상들에 대한 풍부한 관찰과 묘사를 통해서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되지요. 이 의미가 바로 후설이 노에마(noema)라고 부르는 것이고, 그러한 의미를 주는 의식의 행위가 바로 그가 노에시스(noesis)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이렇게 현상학은 경험적 대상을 이념적 대상으로 환원하는 현상학적 환원을 필수적인 계기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주관성, 우연성에 의해 지배되는 경험적 심리학이 아닌 순수 심리학이 될 수 있고, 또 이를 통해 프레게의 비판의 사정거리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후설은 믿었던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서 후설은 바깥에 있는 지시체에 근거하지 않으면서도 주관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의미를 과학의 기초라고 이론화함으로써 오히려 프레게를 순진한 자연주의자로 반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방금 전에 “후설이 믿었던 것 같다,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한 이유는 후설에게 이 문제는 결코 최종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아포리아(aporia)로 나타나기 때문인데, 이 점은 오늘은 다룰 수 없지만 데리다가 주목하는 부분이자 우리가 또한 앞으로 주목해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후설에 대해 더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앞으로 데리다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면서 그때그때 추가하기로 하겠습니다. 적어도 약간의 윤곽은 그려진 것 같으니까요. 다음 엽서에서는 데리다의 원-에크리튀르(archi-écriture) 개념에 대한 저의 이해를 밝히고, 그것을 알튀세르의 이론과의 쟁점으로까지 얼마간 발전시켜 보고 싶습니다.


그럼 다음 엽서에서 뵙겠습니다.


2017년 8월 27일

최 원 드림




  1. 사실 사후성과 지연효과라는 번역어를 둘러싼 차이가 조금 쟁점이 되기는 하는데, 이 부분은 오늘 다루기는 어렵습니다. 다음은 제가 다른 논문(「언어의 몸: 라깡의 정신분석이론을 중심으로」, <라깡과 현대정신분석> vol. 19 no. 1, Winter 2017)에서 프로이트의 사후성 개념을 설명한 부분입니다. 참조가 되셨으면 합니다. “프로이트는 전환신경증의 증상을 보이는 환자 엠마(Emma)를 분석하면서 정신분석학의 대상으로서의 무의식을 발견한다. 전환신경증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의학적으로는 환자의 신체 기능이 모두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자신의 신체의 일부에서 고통을 느끼거나 특이한 증상(예컨대 또 다른 신경증 환자 도라[Dora]의 경우처럼 기침을 멈추지 않는 증상)을 보이는 경우를 말한다. “엠마는 마을에 있는 어떤 가게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그 가게에서 나오던 두 청년이 자신의 옷차림새를 보며 놀리는 말을 하자 갑자기 공황상태에 빠지며 신경증의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프로이트는 엠마를 분석하던 도중 그녀가 어렸을 때 겪었지만 잊고 있던 결정적인 에피소드를 발굴해낸다. 그때 어린 엠마는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동네 가게에 갔다가 가게 주인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주인은 엠마의 치마 위로 손을 가져가 엠마의 성기 부위를 만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후 엠마는 어떤 트라우마도 경험하지 않았으며 증상을 내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알 수 없는 유혹을 느껴 며칠 후 다시 한 번 그 가게에 찾아가기까지 했다. 여기서 어린 엠마가 겪은 첫 번째 장면과 성숙한 엠마가 겪은 두 번째 장면 가운데 성적인 사건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첫 번째 장면이지만, 오히려 엠마가 트라우마에 빠진 것은 성적이지 않은 두 번째 장면에서였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며 프로이트는 ‘정상적 방어’와 ‘병리적 방어’라는 상이한 두 범주를 구분하고, 이들을 각각 생물학적 자극과 성적 자극의 문제와 연관시킨다. “정신은 프로이트에 따르면 외적이거나 내적인 자극에 대한 방어 체계이다. 각각의 뉴런은 침입해 오는 에너지에 대해 방어벽을 만들어 그 에너지를 감축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차례에 막아지지 않는 에너지의 초과분을 다른 뉴런들에게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기찻길과 같은 방어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된다. ‘신경의 길 내기 작업’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런 방어는 그러나 모든 종류의 자극에 대해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물학적인 자극(예컨대 뜨거움이나 배고픔 등)에 대한 방어는 위와 같은 정상적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거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있을 수 없기에, 그 결과 잘 구축된 방어망이 만들어지며 이후 유사한 자극이 반복될 때 그것을 쉽게 방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성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는 자극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적어도 이 당시 프로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성에 대한 지식은 대부분 사춘기를 경과하면서 얻게 되는데, 그 이전에 성적인 경험을 하게 되면 그것은 수수께끼처럼 이해되지 않은 채 다른 경험들과 동떨어져 있는 어떤 하나의 외래적 몸(a foreign body)으로, 일종의 졸고 있는 상태(dormant state)로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그러다가 사춘기를 지나면서 성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난 후 첫 번째 성적 경험과 몇몇 지점에서 유사하지만(예컨대 엠마의 경우 ‘옷’이라는 공통의 요소가 있다) 반드시 성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는 어떤 일을 겪게 되면, 그때 과거의 성적 경험이 회고적인 방식으로 해석되면서 일부는 의식 속으로 떠오르고 일부는 억압되어 증상을 형성하는 ‘병리적 방어’가 진행된다. 프로이트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와 같은 인과성(두 번째 장면이 첫 번째 장면을 규정한다는 의미에서)을 가리켜 ‘Nachträglichkeit’라고 불렀다(이는 보통 ‘사후성’ 또는 ‘지연작용’이라고 번역되며, 라깡의 회고적 인과성[retroactive causality]은 바로 이 개념을 언어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댓글 로드 중…

최근에 게시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