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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의 양면, 창조과학과 과학주의

-과학잡지 『에피』 창간호 “가짜는 거짓인가?” 서평-



Andante


과학잡지 『에피』가 창간됐다. 잡지에 대한 소개를 하기 전에 먼저 학술활동이라는 제도에서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 층위가 매우 중요하다는 나의 견해를 밝히기 위해 올해 8월 말부터 9월 까지 논란이 된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인선을 통해 창조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8월 24일 신설된 중소벤처기업부의 수장으로 박성진 후보자를 지명했다. 박 전후보자는 1991년 포항공과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LG전자 과장, 벤처기업 엘레포스 부장, 세타텍 이사, 미시시피 주립대학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포스텍 기술지주 대표이사이자, 산학처장이자, 기계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과학기술분야에서 여러 ‘성과’들을 내왔으며 ‘벤처기업 생태’에 대한 이해가 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박 전후보자의 창조과학회 이사 활동경력이 알려지면서 시민사회 및 과학기술분야 종사자들의 비판여론이 조성되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박 전후보자의 신앙 문제는 업무와 무관하며 이를 상쇄할 만큼 후보자의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지명을 철회할 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해명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후 청문회에서 “지구 나이가 6000년이며, 창조과학은 비과학이 아니라”는 발언, 동성애 반대교수 성명에 동참했다는 사실, “포항 땅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다”는 발언, 뉴라이트 역사관 등이 알려지면서 ESC 성명을 포함한 과학기술계의 비난여론이 거세지자 스스로 후보자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논란이 마무리되었다.

나는 이 일련의 사건에서 과학기술 전문가 집단 내에서 공유되었던 발언들과 평소 경험을 통해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이번 논란에서 과학기술분야 종사자들은 과학이 방법론과 가치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이 분야 종사자들이 평소에 하는 행동을 보면 과학과 기술은 종교나 정치라는 헤게모니 구성에 이용되는 ‘기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박성진 전후보자에 대한 청와대의 해명은 어떻게 보면 있는 현실을 그대로 말했을 뿐이기도 하다. 실제로 과학기술연구는 사회시스템 속에서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해결되어야 할 질문들이 탈맥락화 과정을 거쳐 특정한 세계관, 문제해결 시스템과 합성되어 재조직된 하나의 제도이다. 따라서 연구의 가치는 마치 세상 다른 것들과 아무런 연관 없어 보이는 지루한 연구 활동을 통해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꾸며내느냐가 결정한다. 물론 이런 학술장을 둘러싼 사회적 헤게모니 투쟁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나는 학자 집단이 스스로 설명하는 자신의 행위와 실제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간극과 그 효과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과학기술분야의 연구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한 일의 사회적 의미를 부정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 사회적 의미를 쟁취하기 위해 찾아다니는 과정에 가깝다. 그래서 연구의 의미는 전적으로 개인의 통찰력에 의해서 얻어진다기보다 정규직에 진입하고 학술장에서의 명성을 얻으려는 많은 사람들이 학회나 논문참조를 통해 작업물의 기능과 의미를 집단 수준에서 형성하는 과정에서 사후적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과학기술 분야 종사자들은 이런 학술활동의 큰 부분을 은폐하고 자신이 역사 바깥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해당 분야 패러다임 내의 ‘기술’적 부분에 대해서는 타인과 논쟁하더라도, 사회적 측면에서는 ‘보편’적인 서사, 다시 말해 갈등요소나 정치적 쟁점이 없는 방식으로 자신이 한 작업의 의미를 확보하기를 원한다. 이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권력작용에 순응하는 보수성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주로 자본에 의해서만 과학과 기술이 매개되고 중산층 이상 남성의 시선에서만 생산되는 오늘날 과학기술의 폐쇄성과 폭력성은 이런 연유로 발생한다. (이런 현실은 『에피』의 “크리틱”에 기고된 글 들에 잘 서술되어있다.) 그래서 나는 이 해프닝이 단순히 과학에 대한 정치가와 행정가의 몰이해에 의해서 발생한 사건이라기보다 좀 더 큰 맥락에서 전문가, 비전문가를 불문하고 사회가 학술활동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에 내재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폴리페서”가 비난의 말이 되는 시점에서 이것은 이미 과학기술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과학기술은 '객관성' 이데올로기가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장으로서 학술활동의 모순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박성진이라는 인물은 이런 과학기술계의 풍토에 아주 적합한 인물이다. 한국의 과학기술은 박정희 정권 때 부터 경제발전을 위해서 고급인력을 키워야한다는 논리에 의해 자본이 투여되었으며, 상위권 대학 학생들의 경우 군대를 면제해주는 등 여러 혜택을 부여받았다. 따라서 과학자의 역할은 과학기술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탐구하며 학술활동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지 시민과 소통하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사회에서 과학자란 선진국의 기술력을 따라잡기 위해서 복잡한 기능을 빠르게 학습할 수 있는 머리좋은 사람들을 모아놓은 일종의 엘리트 집단으로서 국가와 민족이라는 ‘보편’이익에 충실히 복무하는 ‘기능인’이다. ‘과학고’, ‘영재고’와 같은 특수목적 고등학교의 신설, ‘천재’, ‘수재’, ‘영재’와 같은 교육분야의 수사들도 결국 어떤 국민을 길러낼 것인지 결정하고자 하는 국가의 의지와 중산층 부모들 다수의 우파적 생존전략이 만나 만들어낸 파생물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과학의 풍토가 정도만 다를 뿐 한국만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나라나 과학기술에 투자하는 이유가 바로 ‘국력’과 ‘자본’이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이나 기술을 잘하는 사람의 보편적 이미지로 사회적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상상하는 것, 그리고 과학기술의 중립성과 진보를 강조하는 관념을 만들어낸 것이 서구문명임을 볼 때 그렇다. 따라서 박 전후보자가 이런 과학의 풍토에서 주류의 위치를 점해왔다는 것은 우파의 문화적 코드와 관념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본인도 그것을 따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창조과학회 이사 경력도 이렇게 사회에서 학술장의 위치와 역할을 통해 조명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창조과학의 문제는 단순히 말도 안 되는 것을 믿고 증거를 결론에 맞추어 편집하기 때문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한국 과학기술분야 종사자 사이에서 공유되는 다음의 비판 논리들은 이 사안의 절반만 보고 있으며, 오히려 장기적으로 학술활동이라는 현상에 대한 시민들의 합리적 이해를 방해할 소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1) 박 전후보자가 믿고 있는 창조과학은 ‘신’과 같은 ‘가짜’를 믿는 것이므로 유사과학이며 반과학적이다.
(2) 박 전후보자가 믿고 있는 창조과학은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증거들을 편집하기 때문에 ‘방법론’적으로 잘못되었고 반과학적이다.
(3) 박 전후보자의 창조과학회 이사 이력이나 역사관을 문제 삼지 않는 것은 과학자를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도구’로 보는 것이며, 국가는 더 이상 과학을 ‘도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와 같은 주장의 칼날을 스스로에게 돌렸을 때 과학기술 또한 반과학적이라는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과학의 진짜 문제점은 학술시스템을 포함한 사회의 총체적 관점에서 다시 찾아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잡지에 기고된 여러 글들을 참조하여 풀어보고자 한다.

(1) 박 전후보자가 믿고 있는 창조과학은 ‘신’과 같은 ‘가짜’를 믿는 것이므로 유사과학이며 반과학적이다.

(1)과 같은 비판은 전형적인 경험주의의 오류로서 수학이 약속된 기호이고 상상된 ‘가짜’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문제가 있는 주장이다. 그리고 물리학의 ‘장’개념도 그렇고, 볼츠만의 ‘원자’ 개념에서도 그것이 ‘실재’하는 것인지 갑론을박이 있었고, 지금도 있는 것을 볼 때 단순히 그것이 인공적인 개념이라고 해서 무조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잡지에 기고된 “상상하면 존재한다 - 허수와 가짜구의 수학”에서 주장하듯이 이런 ‘가짜’ 개념들이 논리적으로 어떤 엄밀성을 가지는지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큰 개’ 신호 - 라이고 중력파 검출 성공의 뒷 이야기”에서 보여주듯이 그런 상상된 개념들이 어떤 사회적 기능을 하는지도 매우 중요하다. 인간이 개입하는 모든 현상은 상상된 특정한 '패러다임'에 의해서 해석되고 독해된다. 따라서 창조과학에서 ‘신’ 개념의 문제는 그 개념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 지에서 찾아져야 하지 ‘가짜’라는 것을 문제 삼으면 안 된다. 그것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2) 박 전후보자가 믿고 있는 창조과학은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증거들을 편집하기 때문에 ‘방법론’적으로 잘못되었고 반과학적이다.

(2)와 같은 비판은 과학기술의 역사를 보면 종교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천동설을 지지하기 위해 주전원을 도입한 것과 같이 보조가설 설정을 통한 문제 회피는 모든 지식활동에서 아주 비일비재한 일이기 때문이다. 창조과학만 반증을 자꾸 피하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밀리컨의 기름방울 실험이나 멘델의 실험과 같은 중요한 작업들이 조작되었다는 것과 대칭성과 같은 특정한 미학적 기준이 물리학이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면, 특정한 스타일이나 가설에 편향되어 현실을 과도하게 왜곡하는 것은 과학기술연구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연구방법론의 비합리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이와 같이 과학 대 유사과학 구도로 하게 되면 합리적 판단 여부가 쟁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식 패키지를 지지하느냐의 문제로 환원된다. 이 때 과학 내부의 비합리성은 은폐되며, 과학이 아닌 다른 학제에서 사용하는 방법론들은 상대적으로 의미가 없는 학술활동으로 평가 절하된다. 이는 과학기술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 혹은 많은 시민들이 과학 이외의 분야에 대해 가진 대표적인 편견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오직 수학적 명제의 연쇄나 통계적 추론과 같은 특정한 '추론 스타일', 혹은 정상과학이 구성한 '세계관' 자체를 진실이라고 맹신하는 ‘과학주의’이다. 따라서 나는 합리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 선행하지 않는 한 여러 학술활동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합리적 방법론은 구성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창조과학은 과학의 지위를 얻으면 자신의 주장의 시공간을 초월하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주의’이기 때문에 문제다.

(3) 박 전후보자의 창조과학회 이사 이력이나 역사관을 문제 삼지 않는 것은 과학자를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단순히 ‘도구’로 보는 것이며, 국가는 더 이상 과학을 ‘도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3)과 같은 주장 또한 모든 문제의 원인을 국가와 사회로 돌림으로서 내부의 문제를 은폐하는 전형적인 수사법이다. 통상적으로 이런 논리는 전문가 집단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본인들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게 해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매우 편의주의적인 접근을 정당화하는데 동원된다. 이런 수사법은 주로 의사, 변호사 등과 같은 소위 전문 직종이나 중소기업 관련 종사자들의 발언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이들에게 사회적 책무란 본인이 생각하기에 ‘보편’적으로 지켜야한다고 믿는 규율들 뿐이고, 이외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이들은 본인이 수행하고 있는 직업의 사회적 위치, 역할, 효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탐구하지 않으며 자신이 하는 일을 미화하고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문화적 코드, 카르텔, 그리고 이익구조를 그대로 둔 채 단순히 연구자의 ‘자율성’만 강화될 경우 인류 보편의 이익을 위해서 복무해야할 학술활동이 어떤 방식으로 조직될 지는 불 보듯 뻔하다. 이런 과학기술계의 경향이 자본과 국가의 비호아래 ‘순수한 호기심‘이라는 표백제와 함께 조직됐을 때 어떻게 시민 다수를 기만하는지는 “화성으로 가는 백인 - 일론 머스크의 값비싼 몽환”이 잘 보여준다. 따라서 마치 사회적 주장을 하는 듯 보이는 이 마지막 주장 또한 한계점이 명확하다.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 샌드라 하딩이 말했듯이 과학기술 전문가들은 ‘정황 감추기’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지 ‘정황 드러내기’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따라서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특정한 세계관에 입각해 상황을 파악하고 문제해결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다양한 층위와 얽힐 때 어떤 의미가 되는지 알 능력도 동기도 없다. 왜냐하면 연구를 통해 성과를 내는 일련의 과정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개인적 차원의 ‘성공신화’로서 이해하기 때문이고, 그런 서사를 파괴하는 여러 사회적 맥락들은 부정하거나 축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수성과 맥락에 대한 이해가 없이 전문가를 가장한 주류집단이 보편성을 꾸며내게 되면 그것은 현실에 맞지도 않고 이득을 보는 특정한 계층 이외에는 모두 피해를 보게 된다.

따라서 나는 학술활동을 주장자와 주장의 ‘설득력’을 평가하는 하나의 권력분배 시스템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세계에는 ‘본질’이 있고,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선의’의 토론과 정해진 방법론으로 그 ‘본질’에 도달 할 수 있다는 ‘고대적 환상'이자 ‘근대적 기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지식에 대한 환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식을 형성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이미지’로 파악하게끔 호도하며 사회의 전체적 비판능력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그런 측면에서 과학잡지 『에피』는 과학뿐만 아니라 시민으로서 다양한 학술활동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여기에 어떻게 개입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좋은 잡지라고 생각한다. 잡지의 글에서 과학기술사회학자 실라 자사노프가 '지식의 공동생산'을 제안한 것처럼 안다고 믿는 것을 끊임없이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사회시스템에 대한 상상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좋아하는 노래의 한 구절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고쳤다고 생각한 습관이 몇 년이 지난 어느 순간에 되살아나 당황하게 할 때 사람들은 삶이 파괴적인 바람 속에 습관이란 턱없이 약한 끈에 묶여 간신히 의지함을 목격하게 되지. 더불어 배웠다고 믿은 것은 지식이 아닌 습관이었으며 사실은 조금도 자신이 성장하지를 못했음을. 상상할 수도 없었음을. 살아감이 귀찮은 것을. 노력이 결말을 말한다지만 비극적 결말이라곤 누구도 말하지 않아. 누구에게나도 자신에게 맞는 역할이 있다는 것에 대한 설교들이 평등의 이름으로 하찮음을 포장하는 곳. 핏빛을 장밋빛이라고 배운 나와 나의 동생, 이 가엾은 세대들에게.” -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 『아는 것, 모르는 것, 안다고 생각했던 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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