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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페미니스트 선언문(2)

The Transfeminist Manifesto1)

 

에미 코야마(Emi Koyama)

백소하 옮김

 

 

 

 

 

image by 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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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의제로서 신체 이미지/의식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에서 우리가 편안하고 당당하며 힘찬 느낌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싶다. 안타깝게도 이는 많은 여성들에게 사실이 아니고, 트랜스 여성도 여기 포함된다.

 

많은 트랜스페미니스트에게 신체 이미지의 문제는 안녕과 안전에 대한 우리의 필요가 우리의 페미니스트 정치관과 직접 부딪히는 지점이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우리의 모습에서 불편감과 수치심을 느껴,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채 남아 있거나 우리의 몸을 전기 분해 제모, 호르몬 치료, 외과적 조치로 우리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에 맞게 변형하기를 택한다. 이러한 조치들은 비싸고 아프며 시간이 걸리는데다가 생식 능력의 영구적 손상 외에도 암 발병률 증가와 같은 중대한 합병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보기에도 잔혹한 이런 실천을 도대체 왜 택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신체를 우리의 젠더 정체성에 맞추려는 욕구가 선천적이거나 본질적이라고 믿고 싶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개인적 선택들의 원인이 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요인들을 무시하는 건 솔직히 말해 불가능하다.

 

이분법적 젠더 역할의 사회적 강제는 그런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가 태어난 사회적 환경 안에서 구성되기에, 개인의 젠더 정체성과 신체의 성별 사이의 불연속성이 문제적인 건 오직 사회가 능동적으로 이분법적 젠더 체계를 유지하기 때문이라고 논할 수도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의 젠더가 사회에서 중요하지 않은 요소라면, 젠더의 이분법에 자신의 몸을 맞추려는 트랜스들의 욕구는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증이 트랜스들이 자신의 몸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걸 억제하기 위해 쓰여서는 안 된다. 트랜스 여성은 폭력, 학대, 차별에 이미 극도로 취약하며, 이들이 안전함과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자신에게 필요한 무슨 일이든 하는 걸 가지고 죄책감을 느끼게 되어서는 안 된다. 트랜스페미니즘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요인이 우리의 선택에 영향을 주는 방식들을 우리가 고려하도록 하나,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몸과 젠더 표현에 관해 우리가 각각 내리는 어떤 결정이라도 사회가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

 

안전함과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자신이 사는 방식을 고를 개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동시에 경직된 젠더 역할의 제도적 강요에 맞서 싸우는 건 모순적이지 않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자신의 몸을 변형하는 개인의 결정을 받아들이면서도 우리가 건강한 자존감을 형성할 수 있는 상호 지원을 서로에게 제공하는 것 역시 모순적이지 않다. 우리는 교조적이지 않고도 젠더와 성에 대한 사회의 자의적인 가정에 각자 저항할 수 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우리 삶에 있는 모든 억압적 요인을 한 번에 거부하리라고 기대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우리를 소진시키고 미치게 할 것이다. 우리의 작은 저항들이 연합된 총계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규범적 젠더 체계를 동요하게 할 것이다. 다양한 형태의 페미니즘들, 퀴어 운동, 트랜스페미니즘, 그리고 다른 진보 운동들은 모두 공동의 표적, 즉 이성애주의적 가부장제의 다른 부분들을 공격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

 

페미니스트들은 1970년대부터 여성에 대한 폭력이 그저 독립적인 사건들이 아니라, 모든 여성을 종속시켜 두려는 가부장제의 체계적 작용임을 확인하여 왔다. 트랜스페미니즘은 여러 개의 억압들에 고통을 받는 다른 여성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비트랜스 특권이 있는 여성에 비해 트랜스 여성이 폭력에 특별히 취약하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한다.

 

먼저, 트랜스 여성은 여성으로 살기 때문에 표적이 된다. 여성혐오적인 사회에서 여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위험하지만, 우리가 성적이고 가정적인 폭력의 대상이 될 때 우리를 더 취약하게 하는 일정한 요인들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남성이 트랜스 여성을 공격할 때, 특히 그녀를 강간하려고 할 때, 그는 피해자가 “남성”의 신체를 지녔거나 지니고 있음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 발견은 대개 동성애혐오나 트랜스혐오로 추동된 더욱 잔인한 공격으로 이어진다. 트랜스 여성은 자신의 트랜스 신분이 드러났을 때 남성들에게 흔히 공격당한다. 트랜스 여성의 피살은 매춘부의 피살과 마찬가지로, 미디어나 당국에 진지하거나 동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피해자가 매춘을 하는 트랜스 여성이라면 특히나 그렇다.

 

트랜스 여성은 또한 대개 낮은 자존감과 부정적인 신체 이미지로 인해 파트너의 정서적이고 언어적인 폭력에 더욱 취약하다. 가해자들은 트랜스 여성이 추하고 수치스러우며 쓸모없고 미쳤다고 느끼게 만들기 쉬운데, 왜냐하면 사회 전체가 수많은 세월에 걸쳐 그녀에게 던진 게 바로 정확히 그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가해자들은 여성이 자신의 정체성과 경험을 정의할 능력, 트랜스 여성이 애당초 취약하기 쉬운 영역을 앗아감으로써 가정 폭력을 일으키고도 넘어간다. 트랜스 여성은 직장을 찾기가 더 어렵고 이혼에 자녀가 연관되면 학대를 가한 파트너에게 자녀 양육권을 잃는 게 거의 확실하기에, 가해자를 떠나는 데 추가적인 어려움을 겪는다.

 

게다가, 트랜스 여성은 퀴어로서 표적이 된다. 동성애혐오자들은 혐오 범죄를 저지를 때 게이들과 트랜스들을 구분하지 않고는 하는데, 트랜스들은 대개 게이들보다 훨씬 가시적이기에 공격에 더 취약하다. 동성애혐오적 테러리스트들은 게이들을 사냥하러 나설 때 사람들의 침실을 살피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사냥감에게서 인지된 성별과 일치하지 않는 젠더화된 신호를 찾아, 사실상 가시적으로 젠더이형인 이들을 표적으로 삼는다. 전국적으로 대서특필된 게이 혹은 레즈비언의 피살 뒤에는, “커밍아웃한” 트랜스보다 “커밍아웃한” 게이와 레즈비언이 훨씬 많음에도 전국적으로 훨씬 더 많이 살해당한 트랜스들이 있다.

 

트랜스 남성 역시 사회적으로 정립된 역할을 벗어나는 남성들을 박해하는 사회를 거치면서 폭로에 대한 지속적인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 트랜스 남성을 향한 범죄는 낯선 이들만큼이나 가까운 “친구들”에 의해, 의심할 바 없이 트랜스혐오와 여성혐오의 결합을 동기로, 젠더 규범 위반에 대한 처벌로서 “여자의 자리”에 이들을 돌려보내고자 이루어진다.

 

트랜스페미니즘은 우리가 살아가는 위험으로 인해, 트랜스들을 향한 폭력이 우리가 진력해야 하는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라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를 들이지 않으려는 일부 여성 전용 행사에 상처받고 실망할 수도 있지만, 너무도 오랫동안 너무도 자주 우리를 말 그대로 죽이고 우리를 자살하게 한 건 우리를 향한 폭력이다. 우리는 즉시 행동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전통적인 가정 폭력 쉼터, 성폭력 위기 센터, 혐오 범죄 예방 프로그램들과의 협력은 필수적이다. 다른 쉼터들은 여러 이유로 주저하고 있지만, 어떤 쉼터들은 이미 트랜스 여성을 다른 여성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받아들일 것을 결정했다. 우리는 기성 단체들을 조직화하고 왜 트랜스 여성도 지원해야 하는지 교육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대개 더 취약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트랜스 여성을 향한 폭력의 역학이 비트랜스 여성이 포함되는 폭력의 역학과 다르지 않음을 강조해야 한다. 또, 우리는 트랜스 남성을 위한 지원 역시 옹호해야 한다.

 

트랜스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기성 조직들이 우리에게 지원을 제공할 것만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들과 함께해야 한다. 우리는 이들이 기반을 넓히면서도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효과적인 선별 방법을 개발하는 걸 자원해서 조력해야 한다.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다른 트랜스 여성을 위한 위기 상담사나 사례관리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들이 직원들을 위해 트랜스에 중점적인 연수회에 투자하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는 페미니스트 호신술 프로그램을 본뜨되 우리의 특수한 경험에 특히 집중하는, 트랜스 여성을 위한 호신술 강좌를 개발해야 한다. 맨땅에서 우리 자신의 쉼터를 시작하기에는 우리가 부족할 수도 있으나, 우리는 여성과 성소수자를 향한 폭력의 근절을 위한 더 넓은 연합에서 트랜스들을 향한 폭력의 근절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경제적 폭력의 문제를 직접 다루어야 한다. 트랜스 여성은 우리가 여성으로서 남성보다 돈을 덜 받기 때문에, 트랜스들을 향한 공공연한 고용상 차별이 만연하기 때문에, 트랜지션의 비용이 엄두도 낼 수 없이 비싸기 때문에 대개 빈곤에 시달린다. 이는 또한 트랜스 여성을 학대하는 파트너들이 우리를 통제하고 폭력적인 관계에 가두어둘 수단이 더 많음을 의미한다. 트랜스페미니즘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싸움터와 동시에 경제적인 싸움터에서 트랜스혐오와 성차별주의와 투쟁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건강 및 재생산 권리

 

대개 아이를 낳을 능력이 없는 트랜스 여성이 여성의 재생산권 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게 역설적이게 느껴질 수 있으나, 트랜스페미니즘은 트랜스 여성의 해방과 여성의 선택권 사이에 깊은 연결을 알아챈다.

 

무엇보다도, 트랜스의 존재에 사회가 낙인을 찍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생식기를 건드린다는 데 부분적으로 기인한다. 생식기가 아닌 부분의 성형 수술은 성별 재지정 수술보다 더 자주 이루어지지만, 이에는 몇 개월에 걸친 필수적인 심리 치료를 요구하지 않는다. 또, 성형 수술을 원하는 이들은 전국적으로 방송되는 쓰레기 토크 쇼에서 조롱과 경멸을 당하지도 않는다. 개인의 선택을 둘러싼 이런 히스테리는 우리 생식기에 관한 자기 결정에 사회가 가한 금기에 부분적으로 추동된다. 낙태를 하려는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은 공개적 영역이자 전장이다.

 

게다가 많은 트랜스 여성이 복용하는 호르몬제는 비트랜스 여성이 피임, 응급피임, 호르몬 대체 요법에 사용하는 것과 원료나 화학적 구성상 유사하다. 트랜스 여성으로서, 우리는 이런 에스트로겐 계통의 약의 안전성, 비용, 이용 가능성에 관한 이들의 우려를 공유한다. 트랜스 및 비트랜스 여성은 우리의 신체를 통제하는 수단과 정보를 불법화하거나 창출하려는 우익 전술에 대항해 연합해야 한다.

 

물론 재생산에 관한 선택권은 낙태나 피임에 접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특권을 덜 누리는 여성들의 강제·강압된 불임과 낙태에 저항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트랜스페미니즘은 인터섹스들에게 처방되는 바를 포함하는 수술적·호르몬적 조치에 저항할 권리를 위해 진력하며, 우리가 누구인지에 관한 우리의 감각을 사회가 존중할 것을 계속해서 요구한다.

 

일부 재생산권 조직은 1980년대에 자신들의 대의와 무관해 보이는 레즈비언들을 몰아냈다. 그러나 선택권은 근본적으로 여성이 자신의 몸으로 무엇을 할지 정할 권리를 갖는 것에 관한 것이기에, 배타적으로 이성애적이거나 비트랜스적인 문제가 아니다. 트랜스페미니스트는 재생산권 조직에 참여하며 선택권을 위해 데모한다. 여성이 임신에 관해 선택할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는 우리의 젠더 정체성과 일치하지 않는 몸에 의료적 조치를 취할 우리의 결정권을 존중하지 않을 테다. 우리가 호르몬제를 음지에서 구하거나 성별 재지정 수술을 받고자 해외로 나가야 하는 걸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위험한 음지 낙태를 다시 찾아야 할까 두려워하는 여성들과 동일시할 수 있어야 한다.

 

또, 트랜스페미니즘은 여성 보건 운동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유방암과 같이 여성에 중점을 둔 건강 문제 연구는 진공 상태에서 나타난 게 아니다. 이런 문제는 격렬한 운동과 상호 교육을 통해 심각성이 인지되었다. 트랜스페미니스트는 의료계가 역사적으로 여성의 보건 문제를 적절히 다루는 데 실패했음을 인식하며, 권력을 쥔 이들이 트랜스 여성의 건강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게 우리가 여성 보건 운동에 참여하고 이를 확장시킬 이유이다.

 

여성 보건 운동에서 유사점을 찾으면 젠더 정체성의 병리화를 둘러싼 전략적 진퇴양난도 해소된다. 오랜 세월 동안, 트랜스들은 현재 특정한 의료 조치의 전제되는 성 주체성 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를 탈병리화할 것을 요구할지 말지를 두고 서로 논쟁했다. 성 주체성 장애의 병리화가 우리에게 낙인을 찍고 우리의 행위주체성을 부정하는 동시에 우리 가운데 일부가 의료적 조치를 받을 수 있게 해주었기에, 이 문제는 불화를 일으키곤 했다. 현대 의학에 대한 페미니스트 비평 이전에 여성 신체는 의료 체제의 남성 중심적 기준에 의해 “비정상”으로 여겨졌고, 이는 월경, 임신, 폐경과 같은 여성의 평범한 경험을 병리화하였다. 이런 경험이 평범한 인간의 경험에 속한다는 걸 의료계가 받아들이도록 강제한 게 여성 보건 운동이다. 트랜스페미니즘은 성전환성transsexulaity이 병이나 질환이 아니라, 임신만큼이나 평범한 인간 경험의 넓은 스펙트럼의 일부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성 주체성 장애”를 탈병리화하면서 트랜스들을 위한 의료 조치의 접근성을 높일 것을 요구하는 건 모순적이지 않다.

 

 

행동 촉구

 

우리가 페미니스트 공동체 내외에서 우리가 받아 마땅한 것 이상의 배제를 당하기는 했으나, 우리에게 가장 호의적인 동맹 또한 페미니스트, 레즈비언 및 기타 퀴어들이었다. 트랜스페미니즘은 “여성”의 범주에 누가 포함되고 포함되지 않는지를 지적으로 토론하는 게 쓸모없음을 확실히 밝힌다. 우리는 당장 행동해 동맹을 결성해야 한다. 

 

우리는 매일 희롱당하고, 차별당하며, 폭행당하고, 학대당한다. 우리가 패싱을 얼마나 잘 익히든, 모든 여성이 공격받고 있을 때 트랜스 존재의 사회적 비가시성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여성의 행동에 대한 사회의 규칙에 따라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우리는 비트랜스 여성만큼, 혹은 비트랜스 여성보다도 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트랜스페미니스트는 우리의 페미니스트 선조의 전통에서 자긍심을 느끼고 이들의 투쟁을 우리 자신의 삶에서 이어간다.

 

트랜스페미니즘은 엄격한 젠더 위계가 있을 때에만 우리의 존재가 문제적으로 여겨지므로, 젠더를 가로지르는 정체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모든 젠더의 사람들을 정당히 다루는 사회라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 하에서, 우리가 페미니즘 내 우리의 자리를 위협적이거나 간섭적인 방식이 아니라 친절하고 협조적인 방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과 긍지에 핵심적이다. 기존 페미니스트 기관 일부가 보이는 초기의 의심과 거부는 특히나 이들이 자칭 “친페미니스트” 남성에게 너무도 많이 배신당해왔기에 자연스러울 뿐이다. 행동을 향한 우리의 인내와 헌신으로, 트랜스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범위를 세상에 대한 더욱 포용적인 전망으로 바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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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페미니즘_에미코야마(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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