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의 사회재생산과 이데올로기: 리즈 보겔과 주디스 버틀러의 알튀세르 읽기(2015)_두 번째
<젠더 스터디 박사 및 교수 강연 시리즈>, 2015년 12월 1일
앤드루 라이더
번역: 단감 /페미니즘 번역모임
그러나 보겔은 대다수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모성능력을 통해 노동자를 재생산해야 한다는 필요와 그에 따라 임신․출산 기간 동안 여성 자신이 돌봄을 받아야 하는 필요로 인해 발생하는 의존성은 ‘일상적 관리뿐만 아니라 세대 보충 활동을 수행하는 장소가 된’ 가족을 이용하여 해결하고 있다고 밝힌다. 즉, ‘제도화된 여성 억압 구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남성의 지배에 의해 통상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다(190). 여성의 물질적 불평등과 남성 우월 이데올로기는 ‘노동력의 유지와 보충에 대한 여성의 특질적 역할’을 통해 설명해야 한다(같은쪽).
그러나 젠더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노동의 유형을 통해 여성의 억압적 조건을 규정했다는 점에서 거의 ‘수행적’이다. 보겔은 이러한 과업이 생물학적 여성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고 또 분리되고 있으며, 가사노동을 포함한 돌봄 노동은 남자(혹은 젠더가 확정되지 않은 개인)에 의해서도 마찬가지로 행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자본의 이해에 따라 가사노동을 자연화하거나 간접적 경제에 숨기면, 여기에 임금을 배정하여 지배계급이 착취할 잉여가치를 감소시키지 않을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겔은 가사노동은 생산 노동을 보조하고 있으며, 반드시 가치를 생산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사회 구성요소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것이 일반적으로 ‘가치는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여 가치를 전유하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193). 그는 이러한 활동의 영역이 비록 임금 및 직접적 가치생산과는 대체로 분리되어 있다 하더라도, 생산의 지점과 마찬가지로 계급투쟁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자들은 노동력에서 보다 높은 수익성을 쥐어짜내기 위해 가사노동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면서도 그 노력에 대해 어떤 비용을 부담하는 것도 거부하며, 동시에 ‘노동자들도 자신을 재생하기 위한 최선의 조건을 얻기 위해 싸우는데, 그것에는 일정 수준과 형태의 가사노동이 포함된다.’(194). 이러한 노력과 싸움의 결과로 가사노동을 지탱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적 형태(가족임금제, 보호법률, 보육 혜택 등)가 도출된다. 보겔은 1990년대에 이르러 사회재생산의 이해는 전형적인 가족 구성 분석의 범위를 넘었다고 언급했다. 그는 에블린 나카노 글렌이 이제 사회재생산은 ‘사람을 신체만이 아닌 문화적․사회적 존재로서 창조 및 재창조하는 것’으로, ‘정신적, 감정적, 육체적 노동을 포함’하며, 이 ‘노동은 무수한 방식 – 무급 노동이든 유급 노동이든, 교환 가치를 생산하든 오직 사용가치만을 생산하든, 집안에서 집안을 돌보는 방식 - 으로 조직될 수 있다’고 관찰한 바를 인용한다(197). 이런 관점으로 보면, 재생산 노동은 실제로 일의 형식적 측면과 비형식적 측면을 연결하게 된다. 사회재생산은 단순히 젠더나 경제로 국한될 수 없는 복잡한 카테고리이다. 보겔은 가치를 생산하는 임금 노동과 가사노동을 모두 아우르며 통합된 계급투쟁을 명확히 드러내고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노동 운동과 젠더 운동 사이에서 투쟁의 통합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알튀세르: 인식론과 이데올로기
보겔의 통찰은 알튀세르의 연구에 명시적이자 암시적으로 기대고 있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아이디어와 보겔의 관계는 아직 모호하여 설명이 더 필요한 상태이다. 알튀세르의 주장은 사회재생산 이론에서 여전히 논쟁적인 채로 남아있다. 실제로 수전 퍼거슨과 데이비드 맥널리는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억압』 개정판 서문에서 보겔이 알튀세르의 견해를 지지하는 것을 분명히 비판했다. 보겔 역시 자신이 맑스는 경험적 자료에 기대기보다는 자본의 근본적 개념을 발견했다는 알튀세르의 주장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186). 1960년대 중반과 그 이전에 알튀세르와 그의 동료들은 맑스의 개념적 통찰을 역사 – 그리고 지리 - 기반의 묘사와 분리하며, 맑스에 대한 스피노자적 접근을 발전시켰다. 보겔은 이것이 자본주의 안에서 재생산의 필수적 역할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뒷받침해주었다고 말한다. 그는 「가사노동의 재발견」에서 이를 분명히 서술했지만, 이러한 개념적 주목을 제외하면 자신의 이론에서 알튀세르의 요소를 정교화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이 빚은 저서의 초판에서는 제대로 설명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여성 억압』의 각주와 인용을 검토하며 보겔이 알튀세르와 그의 사상에 대한 연구를 특히 배리 힌데스와 폴 허스트의 매개를 통해 폭넓게 진행했다는 것을 확인했다(79, 95, 144, 160). 나는 알튀세르의 이론이 세 가지 측면에서 보겔의 입론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첫째, 보겔은 『자본론』 및 관련된 자료에 담긴 맑스의 후기 사상을 지지하며 초기의 인간적 맑시즘은 강조하지 않는다. 둘째, 보겔이 잘못된 출발이라 평가하는 엥겔스의 고전적 저서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는 기원의 문제를 보겔이 거부하고 있다. 셋째, 나는 개별적 논리를 유지하는 가운데 자본주의로 통합된 상부구조와 사회의 하위체계가 가진 상대적 자율성에 대한 알튀세르의 이해 덕분에 보겔이 사회재생산의 구성에서 우연성의 요소에 주목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 나도 이후에 이 점을 더욱 발전시킬 것이다. 이 모든 아이디어는 알튀세르의 1965년 저작 『자본론을 읽는다』 및 이전 저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겔은 알튀세르의 생산 관계의 재생산에 대한 후기 연구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듯하다. 이것은 사회재생산에 대해 보겔의 이론과 독자성만큼이나 매우 중요한 유사성을 가진 평행적 이론이기에 꽤 놀라운 일이다. 1968년 5월 혁명을 계기로, 알튀세르는 『재생산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원고를 집필했다. 이 책은 지난해(2014년)까지도 온전히 영어로 번역․출판되지 않았지만, 거기서 발췌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1970년에 출판되어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에세이에서 알튀세르는 생산조건의 재생산이 생산 자체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재생산의 필요를 유지시켜주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사회적 실천은 잉여가치 생산과 착취를 촉진하는 사회적 질서를 구체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Althusser 2014, 232-233). 그는 이데올로기 재생산이 일어나는 주요 장소로 노동조합 및 언론사와 더불어 교회, 학교, 가족을 꼽았다(Althusser 2014, 243). 알튀세르가 저서에서 가족의 역할을 상세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재생산에서 가족이 담당하는 역할에 대한 탐구는 반드시 사회재생산 이론의 출발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Althusser 2014 75-77, 142-147). 더구나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란 경제적 토대에 대한 왜곡된 관념적 표상이기보다는 재생산을 촉진하는 물적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여성 억압은 여성의 능력에 대한 구시대적 생각과 고정관념이 아니라 가사노동과 돌봄 노동의 착취가 중심이라는 사회재생산 이론과 보완적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주체가 자본 하에서 노동하고 착취당할 수 있게 만드는 데 가족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반면, 보겔은 기본적 단위로서의 ‘가족’에 상대적으로 중점을 두지 않는다. 나아가 그는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라는 개념보다는 노동의 특정 형태를 탐구하는 것을 선호한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해는 실천적일 뿐 아니라 의식의 수준에서 자기 인식과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보겔은 전체적으로 이 요소를 간과하고 있다. 알튀세르에게 가족은 특정한 능력과 자유뿐 아니라 한계와 맹점을 가지게 될 어떤 유형의 개별 주체를 생산하는 데 필수적이다. 개인에 대한 자유주의적 이해는 이렇게 정신분석에 의지하여 비판할 수 있으며, 알튀세르의 사상 중 바로 이러한 측면이 특히 버틀러에게 영감을 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