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락되지 않은 빈곤
김지안
청년여성재구성팀
‘청년+여성’의 문제점
언제나 우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보편적 위치에 여성이라는 명사가 붙어야 한다. 이제는 구체적으로 상상되는 청년문제에도 추가분(+a)으로 ‘여성’이 붙는다. 청년이라는 말의 대표성으로는 동일한 연령대의 여성이 경험하는 문제들을 담을 수 없으니 ‘청년여성’이라는 명명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청년여성은, 오직 청년이고 여성인 자신의 조건들을 통해서만 문제를 경험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몰젠더적으로 구성된 청년문제는 누구의 문제인가? 이때 청년여성 문제는 기존의 청년담론이 이야기해왔던 청년문제에 추가적인 문제들을 덧붙이면 설명되는 것일까? (남성)청년들이 겪는 각종 불평등 문제에 (청년)여성이 갖는 특수한 문제들을 더하면 청년여성 문제를 볼 수 있을까?
만약 ‘청년여성’ 집단과 담론이, 이 명명처럼 ‘청년+여성’으로 구성된다면 우리의 경험은 언제나 문제의 추가적인 부분으로만 여겨질 것이다. 분명히 ‘청년여성’은 청년세대 담론이 청년문제를 남성청년들의 문제로 상상해오던 흐름에 대한 비판적 맥락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이 명명은 자동적으로 청년여성 문제를, 청년문제와 여성문제의 결합으로 사고하게끔 한다. 일자리, 고용불안, 정서적 결핍, 주거난 등으로 대표되는 청년문제가 있고 여기에 안전, 성폭력, 경력단절, 임금차별과 같이 성별에 기반 한다고 여겨지는 문제들이 덧붙여진다. 이런 구분을 통해서 청년담론 안에서 이야기되지 않았던 것들을 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명명의 과정을 통해서, ‘청년+여성’이라는 결합의 형식으로는 사고할 수 없는 문제들을 놓치게 된다. 나는 청년여성들의 문제가 이제까지 다루어지지 않았던 새롭고 다채로운 문제들로써 청년담론에 추가되는 것을 경계하며, 이 문제들을 통해 청년주체와 청년문제 자체가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 동안 ‘수도권 지역의 20대 남성 대학생’이, 적극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생애주기 달성에 실패함으로써 겪게 되는 포기의 경험과 감정들이 청년담론을 둘러싼 상상력이었다. 상황을 이렇게 본다면 정상적인 생애주기에 미달하는 청년들에게 일자리도 주고, 전세대출도 쉽게 해줘서 다시 정상적인 삶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다양한 청년주체들의 경험이 이야기되고 있다. 청년여성의, 비진학청년의, 퀴어인 청년의, 비수도권 지역 청년의, 수없이 다양한 경험과 문제들이 존재하고 모두가 여러 측면에서 자기 삶에 필요한 변화를 상상하고 있는데 왜 동일하게 일자리와, 취업성공패키지(심지어 이것은 청년 대상 정책도 아니다)와 (취업상태가 조건인) 희망두배통장을 통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는가? 우리가 실제로 겪고 있는 경험을 가시화함으로써 대학 진학, 취업, 결혼, 출산 등등의 정상적인 삶의 경로라고 생각되는 보편적 생애주기 자체를 겨냥해야 한다.
보편적인 경험은 없다
이 명명은 왜 문제인가? 앞서 말했듯이 청년+여성이라는 형식은, ‘청년’이라는 보편적인 문제에서 ‘여성’이라는 새로운 집단이 튀어나와서 또 다른 문제들을 구성해내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서 청년문제를 보겠다는 측면에서 새로운 주체화이다. 하지만 어쨌든 ‘청년’에는 여성이 포함되지 않았었고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는 여성이라는, 성별에서 비롯된 문제들을 청년 문제에 추가되는 한 부분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보편적인 청년 문제에 특수한 부분으로서 청년여성 문제가 포함된다면, 청년여성은 언제나 청년문제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존재할 것이다. 기준은 언제나 청년남성일 것이며 청년여성은 비교점이 된다.
또한 우리는 이 명명을 통해서 청년여성 문제를, 청년문제와 여성문제라는 개별적인 문제들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청년문제가 무엇인지 쉽게 이야기할 수 있다. N포세대 담론이 이야기한 대상들을 나열하는 일은 너무나 간단하다. 그리고 우리는 여성문제가 어떤 것인지도 바로 떠올릴 수 있다. 여성에게 취업, 노동, 육아 등등 삶의 경로들을 따라서 각종 성차별과 불평등이 부과된다. 그렇다면 청년여성들의 문제란 이 모든 것들을 더한 결과가 되는가?
이렇게 문제들을 더하는 형식은 언제나 청년여성을 청년남성에 비해 더 많은 종속과 억압을 갖는 피해자의 위치로 설정할 수밖에 없다. 물론 청년여성은 청년남성에 비해 더 복잡한 맥락에서 동일한 사건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야기되는 것이 억압의 양적 측면이라면 우리가 겪는 불평등과 차별은 계속해서 경쟁 구도에 놓일 것이다. 출산-군대와 같이 등치 될 수 없는 주제들이 끊임없이 대결 구도 속에 놓이는 것은 문제를 양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념 속에서 알파걸 등을 예시로 이제 세상은 여성상위시대라고, 혹은 적어도 남녀의 등가교환된 억압 속에서 남녀평등 시대라고 하는 전복이 시도된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여성은 언제나 기준점인 청년문제에 대해서 상대적인 위치로 모호하게 재현된다. 때로는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상징(걸파워)으로서, 때로는 기존 담론에서 배제된 피해자로서 말이다.
어쨌든 우리는 ‘청년여성’으로, 청년이고 여성이라는 두 가지 정체성에 기반하는 두 가지 범주가 모두 우리의 문제가 된다. 이 정체성을 청년문제와 여성문제라는 두 가지 문제의 결합만으로는 사고할 수 없다면, 어떤 방법을 통해서 볼 수 있을까? <흑인 페미니즘 사상>에서 패트리샤 힐 콜린스는 교차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교차 패러다임은 억압이 하나의 근본적인 유형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며 여러 억압들이 부정의를 생산하는데 서로 함께 작동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콜린스는, 앞서 젠더/인종/계급과 같은 억압의 항들을 더하는 형식으로 억압을 설명했던 ‘더하기 모델’이 아니라 억압들이 맞물리면서 발생하는 지점들을 봐야한다는 흑인여성 활동가, 연구자들의 선행 작업을 통해서 교차성 이론을 발전시킨다. 교차성 이론을 통해 참조할 수 있는 핵심적인 것은 청년여성에게 청년문제와 여성문제가 개별적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각각의 범주들 사이에서 누락되고 배제되는 경험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억압의 범주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음으로써, 애초의 억압과는 질적으로 다른 효과가 발생하는지 보아야 한다. 즉 청년여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특정한 정체성을 통해서 어떻게 같은 문제가 다르게 경험되는지 밝혀야 하며 그 다른 경험들을 가시화시킴으로써 현재 보편적으로 경험된다고 믿는 ‘청년문제’라는 것이 잘못된 출발점임을 말해야 한다.
청년이 포기상태라고?
먼저 청년문제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보자. 청년은 경제위기와 일자리 부족 속에서 심각한 문제점으로 등장했다. 일차적으로 청년문제는 실업, 노동조건의 악화, 고용불안 등으로 이야기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일반적인 청년문제가 되고서는 흙수저 담론을 통해서 앞선 문제들이 계층화된 불평등을 통해서 다르게 경험된다는 지적이 나왔다. 계층의 차이에 따라서 개개인이 벌어야 하는 수입이 달라진다. 벌어야 하는 수입의 차이는 곧 사용해야 하는 시간의 차이이다. 이 차이는 일상/휴식과도 연결 되지만 학점/취업준비처럼 미래 전망과도 연결되기 때문에, 계급에서 비롯된 빈곤이 계급으로 인한 현재적 조건 때문에 미래까지 쭉 이어질 것이라는 불안감을 낳는다.
일상적 차원에서는, 수입으로 무엇이 가능하고 불가능한지의 차이는 굉장히 세세하게 다르다. 그래서 무엇을 먹을 수 있는지, 입을 수 있는지, 할 수 있는지 모든 삶의 부분들이 흙수저라는 피라미드식 계층구성의 영향권이다. 이러한 불평등의 격차를 벌리는 주요한 원인 중 하나는 주거문제인데, 청년세대가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주거 불평등과 맞물리며 주거난의 대표적인 피해 집단이 된 후에는 고시원, 반지하, 원룸, 쪽방 등에서 최소한으로 살아가는 청년 주거 난민 이미지가 보편화된다. 그래서 당연히 물질적 빈곤이 정서적 빈곤 상태로 이어지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들이 말해진다. ‘흙밥’을 먹고 고시원에서 자는 청년의 이미지처럼, 단순히 일자리문제가 아니라 그로 인해 청년들이 어떤 일상을 살게 되었는지가 이야기된다. ‘N포 세대’ 담론까지 집/결혼/취업 등등처럼 미래 전망의 부재가 포기된 대상이었다면 ‘흙수저’ 이후에는 포기의 시간성이 현재가 되고 포기의 대상은 청년 스스로가 된다. 매 끼니, 매일의 노동, 매달의 월세로 포기는 점점이 현재 상태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구직활동 않고 그냥 쉰다" 취업포기 청년 30만명 돌파”, 서울경제)
그런데 청년문제가 포기와 절망적인 이미지들로 구성되었다면, 청년여성의 문제도 포기상태로 드러나는가? 주거문제를 예시로 들자면, ‘지옥고’로 통칭되는 청년주거문제의 서사는 대단히 남성적으로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이 그나마 안전한 환경을 갖추기 위해 더 비싼 수준의 보증금을 구하고 임대료를 내야 하는 현실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지적들이 등장한다. 절망적인 환경에서 사는 것만을 청년주거의 문제점으로 말해버린다면, 젠더화된 빈곤 문제를 (청년)남성의 관점에서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포기로 점철되는 청년담론 사이에서, 청년여성 문제를 말하기 위해서는 마치 기존의 이미지보다 더 문제적인 절망과 포기를 이야기해야 할 것만 같다. 한편으로 여기서 알파걸들의 등장을 보면, 특별히 청년여성들이 겪는 문제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상당히 많은 영역에서 여성들이 활약하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된다. 중/고등학교 시험부터 각종 고시와(“수능부터 공무원시험까지.. 왜 여자가 성적이 좋을까”, 한국일보/“2018년 외교관후보자 45명 최종합격…거센 ‘여풍’“, 법률저널 ) 블라인드 채용에 이르기까지 (“청와대, 블라인드 채용해보니…합격자 6명 모두 여성”, 경향신문) 여성들의 성적이 뛰어나다.
다시 생물학적 능력의 차이를 반대로 말할 것이 아니라면, 혹은 첫 번째 기사처럼 “남학생들이 게임중독 피해를 입고 있다”고 할 것이 아니라면, 같은 조건에서 왜 여성이 더 잘하고 있을까? 이걸 묻지 않고 무작정 여성상위시대라고 하는 것은 청년여성의 존재를 더욱 알 수 없게 만든다. 물론 여기에는 여성이 남성보다 선천적으로 능력이 없다고 여겨진 역사가 유구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현재의 격차가 부각되는 측면도 있지만,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성차별적인 문화적 조건 속에서 낸 결과물로는 대단히 인상적이다. 나는 알파걸 재현이 착시효과이자 청년여성 문제를 비가시화시키는 데 일조한다고 생각하지만 일단, 이런 통계와 재현을 밀고 나가면 청년(여성)은 청년담론이 이야기하는 포기상태의 청년들이 아니라 이전 세대보다 월등한 결과물을 내는 존재들이 아닌가? 근데 왜 청년은 포기상태로만 재현되는가?
허락되지 않은 빈곤
이제 사회에서 더이상 성차별이란 없으며, 오히려 남성청(소)년들이 위축되고 있다는 생각 속에서 알파걸, 여풍 등이 이야기된다. 이런 재현은 왜 문제일까? 여기서 단정해둘 것은 당연히 청년여성의 성취가 높다는 경향성이 청년여성 집단 전체를 대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알파걸은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뛰어난 ‘여성’이기 때문에 이 성취는 여성 집단 전체의 상황이 나아진 것처럼 착시를 일으킨다. (여기에 더해 여성 집단 간의 “여여격차”와 이것이 어떻게 다시 억압의 조건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지난 글 <파산으로서 여성빈곤>을 통해 정리했다.) 두 번째로 이러한 성취가 바로 소득의 증가로, 즉 빈곤과 무관한 상태로 이어지지는 않다는 것이다. 빈곤은 특히 여성에게 소득의 유무나 일정 소득의 달성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알파걸, 걸파워 등등의 이야기는 너무나 현실의 조건과 동떨어져 있기에 청년여성은 스스로 자신을 인식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실제 자기가 마주하는 조건인 이중 삼중의 억압을 겪는 피해자 위치에 몰입하게 된다.
알파걸과 피해자 위치 사이에서 청년여성들이 실제로 겪고 있는 구체적인 문제들은 개개인들의 개별적인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물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삶의 불안정성이 청년들의 포기를 낳았다면, 청년여성에게는 어떤 것을 야기했는가? 여러 가지 지표가 확인해주듯이 청년여성의 경제적 상황은 청년남성에 비해 특히 좋지 않거나 악화되었는데(“청년 여성노동은 성별 임금격차의 출발점이다”, 오늘보다) 그렇다면 여기에 포기의 이미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어떤 유형의 빈곤이 있을 것 아닌가. 나는 청년여성의 빈곤이 ‘허락되지 않은 빈곤’의 형태로, 사회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 글 <파산으로서 여성빈곤>을 통해, 빈곤을 소득의 문제가 아니라 자원의 결핍이라는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여성빈곤 문제 자체뿐만 아니라 여성 집단 내의 차이에 따라서 각기 다르게 구성되는 빈곤문제 역시 중요하다. 빈곤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지만 우리는 특정한 이미지만을 빈곤상태라고 생각한다. 즉 빈곤은 다양한 계층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되지만, 그 모든 형태들이 모두 빈곤상태로 인정받지는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어떤 관점으로 보는지에 달린 문제가 된다. 승인되지 않은 빈곤 경험은 빈곤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이 아닌 것이 되는 것이다.
‘(돈 쓰러 다니는) 여성이 뭐가 가난해?’ ‘(일 안하는) 청년이 뭐가 가난해?’와 같은 식으로 말이다. 인정된 집단만이, 인정되는 스타일로 가난한 집단만이 빈곤할 수 있다. 인정되지 않은 빈곤, 현실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빈곤은 개인의 몫이 되어 각자 개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된다. 특정 빈곤 이미지만이 현실이며 그것이 현실의 빈곤인 것처럼 상황이 전도되고, 승인을 거친 빈곤 이미지는 과잉으로 생산되고 소비된다.
청년이 줄곧 포기라는 관점에서 재현되어왔기 때문에 (남성)청년은 정상성에 미달하는 존재로 그려졌지만 청년여성은 알파걸 혹은 피해자라는 특정한 위치를 제외하고는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인식할 수 없다. 그렇지만 각종 삶의 지표들이 청년여성들이 처한 곤경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아직 그것이 어떤 결과를 만들고 있는지,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알 수 없다. 나는 특정한 빈곤만이 현실의 빈곤이 되는 상황에서, 청년여성 빈곤은 조건상의 문제로 인해 청년빈곤과는 다른 형태로 드러난다는 점을 보고자 한다. 청년여성 문제를 빈곤의 관점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임금, 노동조건, 미래전망을 둘러싼 자원들의 결핍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다음 글을 통해서 알파걸과 피해자라는 두 가지 상황을 매개로 청년여성 빈곤이 어떤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지 이야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