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벡 영화는 아버지-아들 서사가 아주 많다(앞서 언급한 것들 중 둘을 꼽자면, <야만적 침략>과 <C.R.A.Z.Y.>). 영향력 있는 연구인 하인츠 바인만Heinz Weinmann의 『상상적 퀘백의 영화Cinéma de l’imaginaire québécois』는 프로이트적 가족 로맨스의 관점에서 민족의 알레고리로서 퀘백 영화들에 대해 논쟁적이지만 강하게 오이디푸스적인 독해를 한다. 그를 위해 민족적 ‘성숙성’이라는 목적론 내의 변화하는 부성적 형상들로서 ‘프랑스인’, ‘영국인’, 가톨릭교회, 그리고 세례자 성 요한[각주:1]을 제시한다. 퀘벡 영화와 그에 대한 비평적 입장에는 두 가지의 태도가 존재한다. 하나는 통일된 남성적, 이성애적heterosexual, 오이디푸스적 관점에서 독해된 어떤 민족적 자리를 구축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더욱 이질적인more heterogeneous 것으로서 그러한 지배적 남성적 자리에 대항하거나, 그것을 계급과 같은 다른 핵심적 조건들과 연결하기를 추구함으로써 그를 입증하거나, 혹은 통일성과 민족적-오이디푸스적 시나리오를 전적으로 내던져 버리는 것이다. 퀘벡에서 여성의 영화는 때에 따라 후자에 속하는 탐사의영역을 구축했다. 안느-클레르 푸아리에Anne-Claire Poirier의 작품과 미레유 댄서로Mireille Dansereau의 작품이 그러한데, 미레유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la vie rêvée>(1972)는 자아에 대한 유희적 파편화라는 재치 있는 여성화feminization라는 점에서 <모든 것을 고려하여>와 닮아 있다.
그러나 나는 두 장르영화를 예시로 삼아 들여다보며 이러한 오이디푸스적, 그리고 반-오이디푸스적 입장들을 따져 묻고자 한다. 하나는 장-클로드 로종Jean-Claude Lauzon의 첫 장편 <밤의 동물원Un Zoo la nuit>(1987)인데, 이 영화는 장-자크 베네Jean-Jacques Beineix의 <디바Diva>(1981)로부터 그 설정과 장식과 도상학(특히 악랄한 경찰)뿐만 아니라 민족적-퀘벡성의 특징들을 또한 빚지고 있는 수사물a policier이다. 다른 하나는 이브 시모뇌Yves Simoneau의 두 번째 장편 <친밀한 권력Pouvoir intime>(1986)이다.
<밤의 동물원>은 마약 사기에 연루되어 2년 형을 선고받아 복역한 후 석방되는 마르셀(질 마흐Gilles Maheu)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에게 누명을 씌운 두 경찰은 이제 돈을 원하고, 이전 [마르셀의] 미국인 감방 동료의 도움으로 그 경찰관은 죽임을 당한다. 그사이 마르셀은 소원해진 아버지 알베르(로저 레 벨Roger Le Bel)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위해 마르셀은, 죽기 전 마지막 한 번의 사냥 여행을 목적으로 그를 병원 침대에서 데리고 나와 동물원으로 데려간다. 그 동물원에서 알베르는 코끼리를 쏜다.
바인만에 따르면, <밤의 동물원>은 마르셀이 아버지를 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퀘벡적québécois 정체성의 성숙함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는 심지어 첫 번째 민족주의자 수상으로 르네 레베크라는 사람이 민족의 아버지a father of the nation였고 7,80년대 퀘벡 문화에서 아버지라는 형상의 복권에 공헌했다는 점에서도 암시되고 있는 바이다.) 물론 이를 위해 ‘나쁜 아버지’로서 새디스트이고, 부정직하고, 게이이면서 영국계 캐나다인경찰관 조르지(Lorne Brass)는 물리적으로 제거되어야 한다. 이는 그가 미국인 동료와의 섹스에 유혹당하며 일어난다.
그러나 이러한 남성중심의 민족적 서사는 사실 성적인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바인만이 다음과 같이 썼을 때 그는 이 점을 놓치고 있다. ‘조르지를 제거함으로써 그는 아버지-아들이라는 관계의 표현을 방해하는 아버지를 향한 자신의 동성애적 충동들을 동시에 제거하고 있는 것이다.’(바인만, 1990: 116). 이러한 스펙터클적 부인spectacular disavowal은 (즉, 조르지의 사디즘과 영화 초반 감옥에서 마르셀을 강간하기 위해 보내진 수감자에 의해 제시되는 스펙타클을 통해 ‘정당화’되는, 게이-바이팅gay-baiting과 살인) 마르셀이 알베르의 벌거벗은 몸을 씻기고, 스스로 옷을 벗은 채 그와 함께 잠자리에 드는 매우 놀라운 마지막 씬을 합법화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각주:2] 1960년대 <단호한 결의Parti pris>에서와 같은 정복된 퀘벡의 ‘여성화feminization’는 뒤집힌다. 그리하여 영국계 캐나다인, 그리고 연방주의적fédéraste 캐나다 퀘벡을 지지하는 피에르 트뤼도[각주:3] 같은 사람은 (수동적인) 동성애에 오염되어 있는 사람이 된다. 줄리(Lynn Adams)가 마르셀에게 ‘너의 클럽 샌드위치, 너는 그 위에 앉을 수 있어.’라고 제안할 때처럼 항문 삽입의 공포는 도처에 만연해 있다. 특히 어머니-형상이 아닌, 영화에서 유일한 여성인 줄리는 매춘부이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마르셀의 우위는 석방 이후 그가 처음으로 그녀와 섹스를 하며 행사되는데, 이는 재기하는 마르셀의 모습을 영화에 담아내기 위해 일종의 강요된 짝인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불안들의 원천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는데, 심지어 영화가 그러한 불안들을 부인하고자 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로베르 슈바르트발츠는 퀘벡에서의 1960년대 탈식민지 담론이 결국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고정성들fixities을 해체하기보다 새로운 총체적 정체성들의 천명을 채택했음을 주장한다. 승리했던 것은, ‘총체적 주체whole Subjects의 구성을 그 과업으로 삼는 어떤 정치적 순간의 우위였다. 총체적 주체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의 발생 순간을 구축하는, 바로 그 파편화로부터 탈출구를 찾을 수 있다(슈바르츠발츠, 1991: 178).’ 그러므로 <밤의 동물원>은 여성의 변화된 지위(알베르의 와이프는 그를 떠난다. 줄리의 저항은 억압되는데, [그로써] 그녀는 구원의 서사에 끼워 넣어질 수 있다)와 뿐만 아니라 이주자들과 다문화주의의 변화된 지위에 따라, 그리고 세계화와 전통적인 것, 모던적인 것, 포스트모던적인 것 사이의 내용과 형식상의 관계에 따라 ‘소수적’인 것보다 ‘다수적’인 것을 따른다.
알베르는 근대성과 산업화로부터 출현한 도시 노동자계급에 속한다. 그들의 문화는 외견상으로 민족의 역사적 충만함을 형성하기 위해 사냥과 낚시라는 더 전통적인, 즉 농촌의 활동들에 묶여 있다(그가 강에서 마르셀에게 구전된 낚시법을 가르칠 때 마르셀과의 유대감이 암시된다). (로종처럼 바인만(1990:118)은, 원주민이 보야저voyageur[각주:4]와 쿠뢰 드 부아coureurs de bois[각주:5]에게 전달하는 그러한 문화는 문제적인 것이지 어떤 충만함의 원천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각주:6]그러나 알베르는 그의 공장이 문을 닫고 생산 과정이 미국으로 이동함에 따라 세계화 과정에서 직업을 잃었다. 마르셀이 1957년산 뷰익을 자신에게 선물로 주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본인이라면 저걸 만들지는 못했을 거야.’ 그러면서 자신을 전후 포디즘(그리고 암시적으로는 1950년대의 성적인 역할들)에 대한 확신들 안에 위치시킨다. 알베르가 지내고 있고, 마르셀이 처음에는 대체 가족으로서 받아들이는 듯한 이탈리아인 공동체도 마찬가지로 경쟁적으로 보인다. 식당 사장 토니가 마르셀을 사냥에 데리고 갔을 때, 코끼리 사냥은 그에게 부과된 경쟁을 나타내고 있다. 마르셀은 도시의 예술가(음악가)이고, 로프트에 살며, 그 자신을 소비주의와 그 파열된 정체성을 통하여, 특히 마약의 소비를 통하여 규정한다. 알베르와의 대화는 처음에 그러한 세계들의 접점에서 이루어진다. 마르셀의 자동응답기에서 흘러나오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알베르의 메시지는 세대와 시대의 대조를 강조하고 있다. (‘나는 너의 아버지야. 그리고 너는 나의 아들이고. 그건 여전히 내게 무언가를 의미하는 거야.’) 알베르는 노동자계급의 삶에 대한 환유인 낡은 도시락에 마약 자금을 숨긴다.
그러므로 알베르는 위험에 처한 ‘진정성authenticity’을 대표한다. 비록 영화가 1950년대로의 회기를 암시하고 있지는 않고, 외려 그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지만, 그것은 주로 오이디푸스적이고, 동성사회적이고, 동성애혐오적인 서사를 통하여 그러한 [50년대] 정체성과의 접촉을 새로이 하기 위하여 작동한다. 현재를 위해 그것[50년대]을 재작동시키면서 말이다. 마르셀의 아버지를 향한 금지된proclaimed 사랑은 그가 그 자신의 사냥, 즉 경찰을 죽이게 되는 호모 사냥chasse à pédé에 나선 이후 그 절정에 도달한다. 그러한 행동은 줄리가 핍쇼의 유리 벽 뒤에서 죽음에 위협당할 때 순간적인 좌절을 맛본 이후로 그의 역량을 재천명하는 것이다. 마르셀의 적극적 남성성은 상징적으로 [핍쇼의 유리 벽과 같은] 그러한 스크린을 관통할 수 있고, 가로지를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자신의 실재성을 그 위에 부여할 수 있다. (영화 전체는 상징적이든 아니든 장벽들을 점진적인 파괴를 보여준다. 감옥 철창들을 관통하여 마르셀의 강간이 촬영되는 오프닝에서부터, 알베르의 집에서 철거된 벽들을 거쳐, 동물원 울타리로 통하는 통로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단순한 유행style, 쾌락주의, 그리고 소비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고, 알베르가 ‘너 같은 젋은 사람들은 자신이 세계를 바꿨다고 생각하지. 단지 자신이 밤에 선글라스를 쓸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하고 주장하는 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 결국 알베르의 마지막 모험은 마르셀이 제공한 코카인의 흡입에 의해 도움을 얻는다. 그러나 의미심장하게도 오이디푸스적 서사의 여세는 마르셀을 이성애적 짝의 형성, 아버지라는 법과 욕망의 화해라는 고전적인 공식화로까지 이끌지는 않는다.
게다가 이 영화의 형식 또는 형식들은 어떠한 선형적인 독해, 총체화하는 독해와도 어긋난다. 분명히, <밤의 동물원>에서 색다른 것은 수사물의 폭력과 가족 드라마의 조합이다. 하지만 그러한 대비는 두 가지 구별되는 세계관을 표현하는 두 종류의 영화 제작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그 영화의 상업적 성공으로의 진입the federating market success을 설명해 주지만 영화가 공언한 일관성을 약화시킨다. 사실 핍쇼의 장벽으로부터 그 자신의 행위[즉, 호모 사냥으로서 경찰 살해]로의 마르셀의 최후의 ‘가로지름’은 하나의 영화 인용(나중에 <미국인 친구>를 참조하여 뒤따르게 될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에서 다른 하나의 영화 인용(<디바>나 <서브웨이> 같은 프랑스 영화들뿐만 아니라 당대 미국 갱스터영화mob movie의 유명한 폭력. 즉, 노골적이지만 오렌지 빛과 그림자들, 저급한seedy 호텔의 회랑들의 상당히 양식화된 미장센으로 촬영된 폭력)의로의 경과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예를 들자면 이탈리안 식당을 배경으로 하는 알베르의 씬들은 미셸 브로가 낚시 시퀀스에서 보여줬던 회화적 다채로움과 화려함으로 퀘벡의 지배적 사실주의 양식에 따라 촬영감독 기 듀퐁Guy Dufaux에 의해 촬영되었다. 따라서 이 영화의 핵심에 자리하는 바로 그 젠더화된 민족적 ‘진정성’이란 명백하게 하나의 구축물이고, 신경증적 남성성이다. 즉, 최종적으로 결핍을 완전하게 메울 수 없고, 역사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세계화와 정체성의 탈-전통화에 의해 유발된 풀어헤침들unravelings을 봉합할 수 없는 그 신경증적 남성성 말이다. 알베르의 집은 말 그대로 알베르에게 맞춰 재구축된다.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 그것이 은유적으로 어떤 모습을 띠게 될지는 불분명하다.
그에 반해 이브 시모뇌의 <친밀한 권력>은 젠더, 섹슈얼리티, 그리고 민족에 대한 설득력 있는 고찰을 제공한다. 시모뇌와 영화에 등장하는 스타들 중 한 사람인 피에르 퀴르지Pierre Curzi가 각본을 쓴 <친밀한 권력>은 기본적으로, 포스트모던을 시사하는 하이스트 무비이다. 두 부패한 관료들, 경찰서장 뫼르소Meurseault(장-루이 미예트Jean-Louis Millette)와 법무부 보안 책임자 H.B.(이반 폰톤Yvan Ponton)는, 돈뿐만 아니라 유죄를 뒤집어씌우는 서류를 싣고 있는 보안 차량을 강탈하기 위해 도둑 테오Théo(자크 고딘Jacques Godin)를 고용한다. 테오는 이제 그의 십대 아들 로빈Robin(에릭 브리스브아Eric Brisebois), 또 다른 전문 범죄자 길도르Gidor(피에르 퀴르지Pierre Curzi)를 고용하는데, 길도르는 다시 전 연인 록산느Roxanne(마리 티포Maire Tifo)를 고용한다. 그들의 행동은 시작부터 꼬인다. 공범자인 경비원은 보이지 않고, 로빈은 패닉에 빠져 세 명의 경비원을 쏴 죽인다. 팀은 멈춘 채로 잠겨 있는 밴을 자신들의 은신처로 운전해 가야만 하고, 그곳을 떠나기 위해 살아남은 경비원 마르시알Martial(로버트 그라벨Robert Gravel)을 데려가려 시도한다. 그 분투가 영화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마지막에 이르러 공모자와 도둑들은 전부 죽음을 맞이한다. 록산느와, 그리고 마르시알의 동성 연인이며 록산느가 마르시알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은신처로 데려왔던 장비에Janvier(자크 루시에Jacques Lussier)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들은 얼마간의 약탈품을 가지고 그들 각자의 길을 나아간다.
<친밀한 권력>에 대한 논의는, 어찌 됐건 장르영화처럼 보이는 이 영화에서의 동성애 요소를 주목해 왔다. 쥘 테리엔Gilles Thérien은 1980년대 [퀘벡] 영화들이 실패한 분리독립 투표의 표식을 짊어지고 있다고 본다. 80년대 영화들에 대한 그의 조사에 따르면, 그것은 동성애가 퀘벡에서의 막다른 길에 처한 정체성을 대표하도록 하는 방법의 또 다른 예시이다. 자크 라비뉴Jacques Lavigne의 1971년 작업인 『객관성L'Objectivité』에 일부 의지하며 테리엔은 동성애가 타자the Other와 관계하는 데에 있어서의 실패를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친밀한 권력>의 비극은 타자성alterity의 모든 관계들의 붕괴, 이를테면 법/법이 아닌 것, 남성/여성, 아버지/아들의 관계들의 붕괴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후에 분리되는 게이 남성이자 양성적 여성이라는 동일자가 남겨졌다. ‘진짜 동성애, 가짜 여성성false fafeminine, 권력의 수직적 위계에 맞선 동질윤리적homoethical이며 수평적인 차원의 승리.’(테리엔, 1987:111) 그리하여 동성애는 퀘벡의 중간적intermediary 상황을 요약한다. 즉, 동성애가 1960년 이전 뒤플레시 정권Duplesis 시대의 자기-고립과 세계 ‘저쪽’에서 벌어지는 투쟁과 자유의 불확실성의 ‘사이in between’를 요약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퀘벡은 유독 민족적 아버지-형상을 결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즉, 아버지 형상의 결여]은 퀘벡이 오이디푸스적 반란을 시작하는 것을 막는다. 즉, [퀘벡은] ‘대타자Other로서의 타자the Other와 사회의 이질적인 소여로서의 타자성에 도달할 수 없고, 기원의 문제, 정체성의 문제로 거슬러 올라가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다(테리엔, 1987: 113-14).
여기에서 테리엔이 ‘퀘벡’과 ‘동성애’를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과 그의 발전론적 모델은 크게 의심스럽다는 것과 그의 동일자/타자 개념들이 그가 비판하는 영화들처럼 타자성과의 맞물림을 결여하는 듯이 보인다는 것만 일단 말해두자. 어째서 동성애 관계가 자동적으로 동일자와의 관계를 암시해야 하는가? 차라리 사회적 위치에서 담화들의 다양성으로써 표시되는 두 이질적인 실체들entities 사이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에 대한 논리적 이유는 없는 것이다. 테리엔이 의도하는 타자성을 통한 정체성의 추구는 사실 이항 대립들에 대한 고도로 동질화하는 지도화mapping를 제시하고, 이성애라는 주인 담화a master discourse를 제시한다. 영화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그 배치들이 불안이 들끓는 교착 상태로 여겨진다는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반면 앙리 개리티Henry Garrity(1989-90)는 <친밀한 권력>이 효과적이고 전복적인 담화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권력의 수직적 위계에 대한 비판을 유효화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는 분자적 저항의 작인들agents이자 공권력이라는 몰적 구조들의 분산으로서 도둑들을 분석하기 위해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끌어온다. [영화에서] 경찰은, 틀린 방향으로 나아가는 차들을 두 번째로 길게 일별할 때와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릴 때가 아니라면 전적으로 찾아볼 수 없다. 조직의 구조들에 가장 고정되어 있는 그들, 즉 영토화된 정체성은 실패한다. [반면] ‘선결정된 역할들을 거부함으로써 탈영토화하는 그들’(Garrity, 1989-90: 34)은 (결국 죽지만 원금이 강도질당하는 것을 막아내는 마르시엘까지 포함해서) 성공한다. 록산느와 장비에가 버려지고 불타버린 교회에서 돈을 나누는 때인 강하게 상징적인 마지막 씬― 즉, 퀘벡의 포스트-카톨릭주의라는 풍경에서 벌어지는 어떤 전도된 결혼 세레모니― 은 거시구조들에 대한 개인의 최후의 승리를 대표한다.
이러한 분석이 확실히 올바른 노선이기는 하지만 전복과 개인주의의 등치는 문제시될 필요가 있다. 이 영화에서 일어나는 급진적 탈코드화들decodings은 오이디푸스적, 남성주의적 관점은 물론이고 개인주의적 관점에도 저항한다. 그러한 탈코드화들은 성적인 역할과 젠더 역할에 더하여 국가에 대한 태도를 포함하고, 뿐만 아니라 욕망이 장르영화에서 체계화되는 방식을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친밀한 권력>은 <모든 것을 고려하여> 이후로 가장 급진적인 퀘벡 영화이다. 이는 단순히 공감할 수 있는 동성애자 인물들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이 영화가 가능한 유토피아적 미래들에 대한 매혹적인 일별을 제공하면서 또한 모든 사회적 정체성들에 대해 질문하고 그것이 임시적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첫 번째 논거는 장르영화 안에서 이 영화의 위치에서 찾을 수 있다. 1970년대 초기 정규적 산업의 설립에서부터 퀘벡 영화에서 지배적인 작가주의의 압력strain은 주로 코메디를 통하여 ‘대중적’ 영화를 만들려는 시도와 TV의 퍼포먼스, 퍼포머와 공생하려는 시도를 동반했다. 확실히, 코메디나 수사물이 영화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할리우드나 프랑스에서와는 달리 장르영화는 퀘벡 [영화] 산업에서 가장자리의 활동으로 남는다. 따라서 퀘벡 장르영화가 따르게 되는 [할리우드 장르에 대한] 재작업들reworkings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친밀한 권력>은 할리우드 스릴러는 물론이고 심지어 하이스트 영화의 쾌락과 동일시를 거부한다. 즉, 시험받는 남성 신체의 스펙타클에 대한 강조, 대문자 법the Law(심지어 도둑들 사이의 대안적 법)과의 관계에 대한 강조, 하나의 단일하고 특권화된 시점의 우위에 대한 강조를 모두 거부한다. 장 라로즈Jean Larose에 따르면 이 영화의 특별함이란 ‘시네마’에 대한 이와 같은 거절에서 기인한다(반면 <밤의 동물원>은 이러한 과도한 영화에 대한 거부, 그리고 현실성에 대한 부인으로 인해 시달린다)(라로즈, 1989). 어떠한 인물들도 ‘관객’에게 영웅의 형상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들 모두는 ‘자신들의 영화적 과업을 완수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결점과 인간성을 부여받기 때문’이고 ‘그들이 그들 스스로를 물리칠 수 없음으로 인해 패배하기 때문이고, 자신들의 사적 욕망을 억압하고 악당heavies, durs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라로즈, 1989: 27) 따라서 라로즈는 <친밀한 권력>을 ‘퀘벡 영화의 알레고리이자 그것[퀘벡 영화]이 위대하게 되는 데에 있어서의 어려움’으로 본다(라로즈, 1989: 27). <친밀한 권력>은 자기-주장을 막아서는 어떤 쇠약화하는 내부성을 특권화하는 퀘벡 문화의 경향을 상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는 다르게, 나는 <친밀한 권력>이 영화적 장르의 ‘소수적’ 전용에 기쁨을 누리고 있음을 주장하고 싶다. <친밀한 권력>은 할리우드 영화에 관해 레이몽 벨루어가 묘사한 오이디푸스적 폐쇄를 회피한다. 레이몽 벨루어에 따르면, 할리우드 영화는 감독, 인물, 상정된 관객에 의해 점유된 남성의 이성애적 욕망의 위치에서 그 재현물을 질서 짓고, 체계화한다. 그리고 그 서사들은 보통 영웅이 그의 욕망과 대문자 법 사이의 긍정적positive 관계, 즉 결혼 관계를 받아들이게 되는 오이디푸스적 궤적에 의해 특징지어진다(참조. Bergstrom, 1979). <친밀한 권력>은 아버지와 아들이 스스로를 파괴하고, 이성애 커플이 단호하게 형성되지 않고, 욕망이 대문자 법으로 재통합되지 않음에 따라 적극적으로 그와 같은 [오이디푸스적] 구조들을 불신한다. 결국에는 탈영토화되는, 어떤 중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복합적multiple 연결들로 사회적 영역과 접속하는plug’ 독신자들인 이들, 즉 록산느와 장비에는 팔루스적 칼과 총을 거부한다(들뢰즈와 가타리, 1986: 70). 이 영화의 시점 쇼트들은 상대적으로 적기는 하지만 상당히 복합적multiple이다. 이는 총이 발사되었을 때의 세 가지 고비의 씬에서 빠른 커팅에 의해 강조되는 사실이다. 오히려 특권화되는 것은 록산느인데, 이는 그녀를 소개하는 로우 앵글 쇼트에서, 그리고 남자화장실에서 마르시엘과 장비에의 관계를 듣게 되는 관음증자로서의 그녀의 역할에서 드러난다.
라로즈가 말하는 ‘역할’의 용법은, 영화가 장르의 어떠한 ‘다수적’ 용법도 작동하지 않게 만들도록 하는, 즉 이른바 퍼포먼스의 전경화를 무효로 만들게끔 하는 또 다른 근본적 방법을 제시한다. [그들의] 은신처는 소도구들, 더미들, 가면들로 가득한 극장 창고이다. 이는 초반부 역에서의 록산느와 길도르의 파노라마적 쇼트를 또한 떠올리게 하는데, 둘은 가장자리의 술에 취한 노숙자와 나란히 병치된 전사자 기념비 아래에서 만나고 있다. 록산느는 자신의 머리스타일을 바꿔야 한다. 테오에게 [그녀의 머리는] 그녀와 어울려 보이지 않고, 그녀는 충분히 ‘여성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부정직한 경비원은 무대공포증과 같은 것을 지니고 있다. 록산느와 장비에는 무대, 즉 그들의 시점 쇼트로 촬영된 텅 빈 극장을 경유해 건물에서 달아난다. 행동과 남성성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고정되고 자연화된 연결들 대신 <친밀한 권력>은 사회적 정체성들의 수행과 반복에서의 임시성provisionality을 선언한다. 우리가 전사자 기념비를, 그리고 마르시알이 그의 커플이 찍힌 사진을 응시하는 것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임시성은 기억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강도질의 시점에 휴가 때 찍은 스냅사진 한 장[의 쇼트]로부터 록산느 너머 열대 지방을 광고하는 전광판 [쇼트로의] 커트). 나아가 <친밀한 권력>은 다른 종류의 관객성을 만들어낸다. 한편으로 그것은 장르와 연관된 서스펜스를 제공하는데, 그 서스펜스에서 보는 주체는 과정과 위치, 비일관성과 고정성의 유희와 만나고, 서사에 의해 그리 조직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놀랍고 획기적인 엔딩, 반영적 미장센, 그리고 인간의 나약함(더 나아가, 퀘벡의 민족적 무기력함diffidence)에 대한 일반화하는 담론과 재현되고 있는 이질적인 위치들 사이의 애매모호한 관계를 통해 그러한 [오이디푸스적] 궤적에 의해 함축된 어떠한 확정이나 지배도 제거한다.
의미심장하게도, <친밀한 권력>은 다수적 양상으로 살아남은 주체성들을 묘사하려 시도하지 않는다. 그 동성애 재현은 말할 필요도 없이 <밤의 동물원>의 비참함abjections과 구별된다. 그러나 ‘게이’ 혹은 ‘퀴어’가 새로운 헤게모니로 주장되고 있는 중이라는 암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또한 소수적 양상으로 게이 정체성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는 공권력에 대한 묘사와 영화 말미의 탈주선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 록산느와 장비에는 완결된 정체성을 과시하고 있지 않다. 이는 영화의 앞선 씬들에서 은유적으로 붕괴하도록 야기된 체계에 그들이 대항할 수 있도록 한다. 그와 반대로 그들[록산느와 장비에]은 탈영토화되어 있지만 또한 비-제약적이고 수평적인 관계들, 즉 몰적 실체들entities이 아닌 분자적 잠재성들을 구현하는데, 이는 영화에서 아버지-형상들과 위계적 연속에 의존해 왔던 권력의 수직성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친밀한 권력>은 욕망과 정체성의 경제를 생산하기 위해 장르로 작업한다. 이 욕망과 정체성의 경제는 단언컨대 ‘퀴어’의 애매성이 용인하는 것보다 더욱 급진적이다. 후자는 이항대립에 의존하는 경향, 하나의 조직을 구축하는 경향을 지닌다. 차라리 통일성unity이라는 안전한 문화적 이미지는 무언가 다른 것이 되기becoming의 과정에 동조하여 거절된다. 하이스트 무비는 심리적이고 인본주의적 예술 영화가 되고 (‘너무나 인간적인’ <친밀한 권력>), 심리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예술 영화는 유목적 로드무비, 즉 민족이라는 영화적 경계들의 횡단이 되고, 조직들과 커플들은 개인들이 되고, 개인들은 잠재성들의 집합들이 된다. 이는 <친밀한 권력>이 전적으로 안정성을 거절했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민족적-알레고리적 긴장의 방식으로, 안정성이 항상 임시적이고, 과정 중에 있으며, 동질화(인과율의 선형적 서사, ‘퀘벡’에 대한 인식의 형식들과 ‘퀘벡’에게 말거는 형식들)와 이질화의 힘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게다가 비록 그것이 민족이라는 몰적 구조에 반드시 애워싸여 있을 게이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기를 거부하기는 하지만 게이 남성과 양성적 여성이 마지막 씬을 차지하는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다. 다수의 퀘벡 영화에서 나타나는 오이디푸스적 교착 상태impasses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는 것은 바로 그들[즉, 양성적 여성인 록산느와 게이 남성인 장비에]의 경제이기 때문이다.
성 요한 세례자의 날Fête de la Saint-Jean-Baptiste(6월 23, 24일)은 퀘벡의 국경일로 분리독립 투쟁의 상징적 축제일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바인만의 견해와 달리, (‘나쁜 아버지’인) 조르지의 살인이라는 스펙타클적 부인은 외려 알베르와의 동침(동성애적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지, 아버지를 향한 동성애적 충동을 제거하여 오이디푸스적 아버지-아들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피에르 트뤼도Pierre Trudeau(1919-2000), 두 차례 총리직(1969-1979, 1980-1984)을 역임한 퀘벡주 출신의 캐나다 정치인이다. 법무장관 시절 낙태와 동성연애를 합법화하였다. 연방 총리직을 맡고 있던 시기애 연방주의적 입장을 취하며, 1980년 퀘벡주 분리독립 투표에서 ‘주권-연합’안이 부결되는 데 역할했다. [본문으로]
보야저voyageur, ‘여행자’라는 뜻으로 17세기부터 북미를 여행하며 원주민들과 모피 등을 교역했던 프랑스계 캐나다인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쿠뢰 드 부아coureurs de bois, ‘숲속을 달리는 자’라는 뜻으로 보야저와 경쟁하며 원주민과 모피를 교역했던 프랑스계 캐나다인을 가리킨다. 보야저가 ‘합법적’ 교역권을 부여받았던 데 반해 쿠뢰 드 부아는 ‘무허가’ 상인이었다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저자는 바인만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민족적 충만함을 묘사하기 위해 식민주의적 문제를 간과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