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안면적 조우가 실제로 어떤 잠재적 개방성일지라도, 이러한 사실이 반드시 들뢰즈가 시간-이미지와 연관시킨 모종의 탈안정화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들뢰즈, 가타리의 협업의 맥락으로 『시네마 I, II』에서의 얼굴에 대한 논의를 읽어내야만 한다. 『천개의 고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얼굴을 의미화과정과 주체화과정의 쌍방결정 프로세스에서 핵심적인 것이라 논한다. 여기서 얼굴은 힘의 체계들을 중심화하고, 분류하며, 집행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이러한 안면성의 기능은 보편적이지 않은데, 이 기능이 특수한 사회적 체제들에 의해 야기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각각의 체제들은 자신의 의미, 규율 그리고 힘의 배치(configuration)에 기초를 둔다.
이러한 안면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들뢰즈와 가타리는 여러 종류의 사회적 체제들의 밑그림을 그렸다. (그 분류 목록은 완전하지 않다.) 다성적 ‘원시’사회들은 상대적으로 탈중심화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분명히 어떤 상징화 단계가 작동하고 있지만, 그것 역시 국지적이고, 물질적이며 변화들에 열려있다. 그러나 의미화 체제는 국가권력을 중심화한다. 전제-군주(the despot-leader)의 신체는 국가의 신체를 대리하고, 그 폭군의 얼굴은 의미화하는 중심이 되는데, 그 중심으로부터 모든 의미가 발산한다. 모든 기호들은 이러한 얼굴을 통해 여과되고, (제사장(the priest)의 형상으로 구현된) 해석은 감소하는 순응성의 고리들 안에서 밖을 향해 나선운동한다.
로날드 보그가 묘사하듯, 예술-역사적 관점에서, 우리는 전제군주의 얼굴을 팬토크래터(우주의 지배자로서 그리스도의 그림)의 도상, 즉 전능한 자로 상상할 것이 틀림없다. 그 전능자는 후광을 띄고 우리 앞에 직접 드러내는 모습으로, 혹은 돔의 정상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모습으로 상상된다 (2003:96). 전제군주의 얼굴에 대항하는 것은 고문 받은 신체, 즉 그/그녀의 얼굴을 잃은 희생양이다. 이 점에 주목하여 결론을 앞지르면,그 희생양의 탈주선은 그 체계의 엔터로피, 의미작용에 저항하는 것, 즉 ‘고약한(bad)’ 모든 것을 표시한다 (Deleuze and Guattari, 1987: 116).
대조적으로 의미화 이후의 체제는 그 희생양의 탈주선을 만회(recuperation)함으로써 나타나는데, 이로써 그 탈주선을 ‘우리의 주체성과, 정념(Passion)에 대한 긍정적 노선으로’ 변경한다 (Deleuze and Guattari, 1987: 122). 방황하는 예언자의 형상은 해석보다도 정념에 의해 추동되는 이러한 형상에 새겨져 있다. 여기서 전제군주와 얼굴의 관계는 변경되고, 거기에는 외면하기(a turning away)가 있다. 요컨대 신은 자신의 얼굴을 돌리고, 주체는 공포에 질려 외면한다 (1997: 123). 이것은 배반의 체제이다. 사람들은 신을 배반한다. 그러나 그들은 신을 배반하는 가운데, 스스로에게 악을 행함으로써 신의 소망을 충족시키고, 그런 식의 이중의 배반을 실행한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스스로가 중앙집권적인 얼굴, 즉 비잔틴 도상과 같이 정면으로 보이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척해진 채, 옆모습으로 외면하는 두 얼굴들 사이의 대결’을 발견한다(1987: 124). 우리는 여기서 두초의 <성 피터와 성 엔드류의 부름>에서 반쯤 외면한 응시들을, 혹은 군중을 배경으로 중앙에서 정확히 옆모습으로 고정되고 얼어붙은 시선들, 즉 지오토의 <유다의 키스>에서 그리스토와 유다의 얼굴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주체화 과정(subjectification)이 일어나는 지점인데, 주체화 과정은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소용돌이이자, 장소로서 언표행위의 주체뿐만 아니라, 진술의 주체 또한 야기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상황을 정신분석학의 분석 대상자와 비교했다. 분석자는 결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반면에, 분석 대상자는 항상 그녀가 말하는 담론에 예속되어 있거나 혹은 그녀를 통해서 말하는 담론에 예속되어 있다(1987: 129-32).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이러한 다양한 체제들은 거의 항상 혼합된 상태에서 존재한다. 혼합된 전제적-정념적 체제를 지배하는 얼굴적인 것은 단지 어떤 얼굴이 아니다. 그보다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역사적으로 영년(the year zero)과 연결하는 하얀 벽/검은 구멍 체계이다 (1987: 182).
어떤 구체적인 얼굴이라기보다도, 우리는 이러한 체계의 중심에서 어떤 추상 기계(machine)를 발견한다. 그 기계는 특히 들뢰즈와 가타리가 그를 보고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라고 기술한 백인(the White Man)의 가면을 통해 의미화 과정와 주체화 과정의 통합된 프로세스들을 수행한다(1987: 176). 이러한 얼굴의 텅 빈 검은 구멍은 맹목적으로 자신을 거쳐가는 얼굴적인 것들(the faces)을 평가하는 어떤 기계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탈선의 정도들을 계산하며 자신을 통과하는 주체들을 격자지우는 기계이다. 다른 말로, 의미화하고 주체화하는 실체(entity)로서 얼굴적인 것은 어떤 추상체계의 산물이다. 요컨대 그 추상적 체계는 감시, 권력 그리고 통제의 매트릭스에 따라 개인화(individuation), 범주화 그리고 식별(identification)의 수단으로서 그러한 얼굴을 구성한다.
인종은 이러한 체계에서 핵심적이다.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러한 안면화 기계를 검은구멍들을 가진 하얀벽, 즉 깊은 역사적, 정치적 그리고 지리학적 뿌리들을 가진 체계로 기술해야만 한다. 그 체계를 통해 그리고 그것에 대항해 모든 다른 얼굴들은 조직되고 정의된다. 그러한 하얀벽/검은구멍 체계는 단지 주체들만이 아니라 그 세계까지도 초코드(overcodes)화 하거나 안면화한다. 그리고 그 체계는 끊이지 않은 일련의 의미화 연쇄들을 통해 외부 세계의 현존(the presence)를 제거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데, 그 결과로서 모든 것은 깊이 없는 주체성의 검은구멍을 향해 밀어 넣어진다 (1987:179).
거기에는 또 다른 실체가 있다. 그 실체는 안면화 기계의 초과로부터 태어날 수 있다. 즉 그것은 어떤 자동화 미사일같은 ‘탐사하는-머리(prove-head)’인데, 탈안면화하고, 탈영토화하며, 그리고 흔히 말하듯 상이한 특성들과 지층들 사이에서 새로운 횡단선들을 산출하는 기능을 한다 (Delezue and Guattari, 1987: 190). 우리는 여기서 프란시스 베이컨과 같은 예술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베이컨은 얼굴적인 것에 의해 불명료해지는 머리와 신체, 즉 ‘고깃덩이’를 그려냄으로써, 비결정적이고 동물적인 살정(fleshiness)의 영역을 촉발시켰다. 요지는 단지 추상하거나 해체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신경을 건드려서, 우리의 재현적 체제들에 의해 모호해지는 신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공명작용을 조명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어펙트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어펙트는 하나의 살아있는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비인간 되기이다. (...) 마치 사물들, 짐승들, 그리고 사람들이 (,,,) 즉각적으로 자신의 자연적 차이생성(differentiation)에 선행하는 지점으로 끊임없이 도달하는 것처럼, 비인간 되기는 식별 불가능성(indiscernibility)과 비결정성의 영역이다.’ (Deleuze and Guattari, 1994: 173). 들뢰즈와 가타리가 얼굴과 연관 짓는 의미작용과 주체성의 회선(involution, 안으로 얽히며 말리는 선)에 비추어, 우리는 어펙션-이미지 내에서 두 가지 경향들을 지정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질서를 부과하여 주체를 격자지우는 안면화의 종류로 향한다. 다른 하나는 주체뿐만 아니라 더 큰 재현체계에 대항하는 얼굴의 탈영토화로 향한다.
얼굴에 대한 탐구는 그러므로 분열분석과 연관된 동일하게 해체적이고 생산적인 과제들을 필요로 한다. 즉 분열분석의 밖을 향한 운동에 수반되는 해체하기와 발굴의 과제 말이다:
얼굴 해체하기(dismantling)는 동일하게 기표의 벽을 타개하는 것이며, 주체성의 검은구멍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분열분석의 프로그램, 슬로건은 다음과 같다. ‘당신의 검은구멍과 하얀벽을 찾아내고 당신의 얼굴들을 알아라(know).’ 이것이 앞으로 당신이 그것들(블랙홀과 화이트월)을 해체하고 자신의 탈주선을 그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다. (Deleuze and Guattari, 1987: 188)
‘정말 경악스러운 무엇, 바로 얼굴’ 들뢰즈와 가타리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얼굴은 본래 구멍들, 평면들, 매트들 (...) 그리고 구덩이들을 지닌 달의 풍경이다. 얼굴을 비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클로즈업이 필요하지 않다. 얼굴은 그 자체가 클로즈업이고 비인간이다’(1987: 190). 실제로 어펙션-이미지로서 얼굴은 하나의 감각블록이다. 베이컨의 그림들은 새로운 육체적 관계들을 가시화할 수 있게 만들 목적으로, 색상, 리듬 그리고 형상적인 것을 사용했다. 이와 매우 유사하게 영화적 얼굴은 어떤 표현적인 힘을 촉발하기 위해, 자신의 고유한 특질들(지속, 운동 그리고 장소의 짜임들)을 활용한다.
감각, 어펙트 그리고 반드시-인간일-필요 없는 육체성에 집중한 논의는 이러한 두 가지 구별되지만 중첩되는 얼굴의 현시들(presentations) 사이에서 명백한 연결을 형성한다. (가령 『시네마Ⅰ,Ⅱ』에서 발견되는 탈맥락화하는 얼굴, 『천개의 고원』에서 식별되는 원시의-얼굴 / 그리스도의-얼굴 / 탐사하는-얼굴의 형상들.) 지각과 행동의 사이의 고원, 의미작용과 주체성 모두를 위한 문턱으로서, 얼굴은 분열분석적 기획의 핵심이다.
아버지의 응시 아래서: <나쁜 교육>
권력 구조들보다도 구체적인 인간의 얼굴들에 천착하면서,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안면성에 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작업을 독해하는 것은 오독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보다 추상적인 (사회과학)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안면화’로서 이러한 과정을 묘사한다. 그 이유는 바로 인간의 얼굴이 그 과정들의 시작부터 가장 명백하게 맞물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필자는 이러한 역학을 정확하게 탐구하는 영화를 살펴보고 싶다. 그 영화는 바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나쁜 교육>이다. 거기에는 어떤 층위가 존재하는데, 그 층위 위에서 <나쁜 교육>은 전제적-정념적 체제의 트라우마를 재-상연한다.
거기에는 명백히 시각적인 유사점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들을 들뢰즈와 가타리가 묘사하는 일련의 안면적 관계들뿐만이 아니라 일련의 테마적 공명들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얼굴과 그것의 시각적 왜곡들, 또는 서사적 내용에 구체적 묘사들 너머에 있는, 감각들의 배치(deployment)이다. 그 배치는 어떤 특수한 순간을 규정하는 권력들과 네트워크들을 발굴한다. 알모도바르는, 파시스트-카톨릭 체제의 관상학(physiognomy)을 조망하고, 프랑코 스페인 이후의 모습(visage)에 여전히 기입되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구석구석 스며있는 미시 파시즘을 발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얼굴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나쁜 교육>은 서로의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서사의 여러 버전들로 구성된다. 알모도바르가 묘사한 것처럼, 그 서사들은 마치 러시아 인형들과 같다. 이야기의 핵심은 두 명의 어린 소년들, 즉 이그나시오 그리고 엔리케와 관련되는데, 그들은 1964년 어떤 카톨릭 기숙학교에 다닐 동안 사랑에 빠진다. 이그나시오는 끊임없이 그를 위해 기도하는 문학 선생, 신부 마놀로의 집착에 시달린다. 자신의 욕망의 대상을 소유할 수 없는 마놀로는 질투에 사로잡혀, 소년들의 관계를 끊기 위해 학교에서 엔리크를 추방한다. 이 이야기는 매우 매개된 방식으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어쨌든 영화의 현재는 엔리케가 성인이 된 1980년이다. 현재 영화감독이 된 엔리케는 자신이 이그나시오라고 주장하는 한 배우의 방문을 받는다. 그는 엔리케에게 자신들의 청소년기 경험을 바탕으로 한 대본 ‘방문객(The Visit)’을 건내준다. 그 이야기는 내레이션된 ‘이야기담화들(visits)’ 그리고 (필기된, 영화적인 그리고 구두적인) 텍스트들의 그물망을 통해 전개되는데, 그것들 각각은 배반, 가장 및 위조로 포개진 겹들을 드러낸다.
그 영화에서 대위법을 형성하는 겹들은 양식화된 활인화들(tableaux)로 구성되는데, 그것들 각각은 얼굴의 수행능력에 고정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안면성은 명백히 관계적이다. 우리는 어떤 사랑의 대상으로서 아이의 정면 얼굴을 본다. 그는 카메라를 한참 동안 곧바로 응시하고 있다. 우리는 배반과 치욕의 외면한 얼굴뿐만 아니라, 정욕(lust)의 얼굴, 그리고 한 편의 진정한 필름 느와르 영화에서처럼 어두운 폭로(정체 벗기기)에 의해 해체될 얼굴들 사이의 재인과 어펙션의 교환 또한 보게 된다. (일례로, 디지털 효과의 도움을 받아 소년들의 얼굴은 우리가 그들의 성인 얼굴이라고 추정하는 것으로 변하게 된다.)
우리는 영화적 아이콘의 얼굴, 즉 사라 몬테일의 요염하게 3/4쯤 고개를 튼 얼굴을 보게 된다. 그 얼굴은 어린 소년들의 실루엣 위로 극장 스크린에 걸려 있고, 실루엣 처리된 소년들은 그녀의 응시 아래서 서로 즐거워한다. 몬테일의 얼굴은 그녀의 모방자들, 노쇠한 드래그 퀸 그리고 이그나시오의 사칭자의 공연들에서 귀환한다(is revisited). 이그나시오의 사칭자는 여전히 욕망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그나시오의 사칭자는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가장 빈번하게, 우리는 각각의 이야기담화를 표시하는 옆모습의 대치를 본다. 알모바도르는 그러한 샷들을 끊임없이 풍부하게 보여준다. 그 샷들은 지오토의 <유다>와 매우 흡사하게 정중앙에 자리잡은 캐릭터들이 정확히 반쪽 얼굴만 보여주는 측면 모습으로 서로 극명하게 ‘대치한다’. 게다가 우리는 여기서 표면들(벽들, 포스터들, 조각들, 텍스트)에 대한 ‘얼굴화하기(facefication)’가 이따금 거의 문자 그대로 ‘뒤돌아봄’을 촉발시키는 것을 발견한다. 그 뒤돌아봄은 케릭터들에게서 조차 촉각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사제가 이그나시오를 더럽혔을 때, 얼굴에 대한 이러한 주의의 절정이 발생하여, 근본적인 분열을 초래한다. 혈액이 이그나시오의 이마에서 흘러내릴 때, 이미지 자체가 갈라져 열림과 동시에, 그의 얼굴을 둘로 찢는다.
그 얼굴은 여기서 성인이 된 영화감독 엔리크의 영화 <방문객>을 통해 시각화된다. 그렇게 시각화된 얼굴은 <방문객>의 배우로서 이그나시오의 형제-겸-사칭자의 형상으로 제공되는데, 그것은 사실 성인 이그나시오가 쓴 대본을 통해 구성된 것이다. 따라서 그 얼굴은 어떤 표면, 그 위에서 이야기가 쓰여진 벽, 그리고 그 속으로 주체성이 회전하는 소용돌이가 된다. 그 얼굴은 시간의 창조자(maker)일 뿐만 아니라, 찢겨진 표면이다. 그 표면은 <나쁜 교육>에서 역사의 단층들을 형성하는 옛 영화 포스터들의 찢겨진 겹들을 반향하는 얼굴이다. 그 얼굴과의 조우는 항상 하나의 공연이다. 알모도바르는 프래임화된 내러티브뿐만 아니라 스크린 그 자체의 프로니시엄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강조한다. 가령 <나쁜 교육>의 전 과정을 통틀어 이미지 주변에서 커튼과 같이 스크린의 종횡비가 열리고 닫힌다.
거기에는 또 다른 종류의 얼굴이 있다. 그것은 이러한 맥락 내에서 출현한다. <나쁜 교육>에서 그러한 세심한 주의를 견지하는 유일한 다른 이미지는 글로 쓰여진 단어 이미지이다. 이그나시오의 이야기는 빈번히 글로 쓰여진 이미지의 반복을 통해 전개되는데, 이로써 캐릭터들과 카메라는 여러 차례 타이핑된 페이지의 얼굴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 텍스트 자체가 또 다른 종류의 하얀벽/검은구멍 체계가 된다. 요컨대 텍스트는 얼굴들 사이의 교환들을 반향하는 방식으로 촬영되어, 어떤 감각적 촉지성을 획득한다. 글로 쓰여진 페이지는 종종 어떤 ‘이야기 담화(visit)’를 위한 무대를 마련하는 힘을 발휘한다. 게다가 그 페이지는 인간 얼굴과 거의 같은 방식, 즉 강렬한 정면 클로즈업 그리고 옆모습의 짝을 이룬 마주침으로 촬영된다. 의미화작용과 주체화과정은 여기서 발생한다. 그러나 같은 방식으로 그 과정들 내에서 얼굴들 사이의 관계들은 이미지에 의해 해부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텍스트 또한 여기서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우화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므로 <나쁜 교육>에서 얼굴은 자신의 모든 현현들 안에서 전제적-정념적 체제를 지배하는 힘-관계들을 해체하는 데까지 나가지 못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은 그 기계의 핵심에 놓여있는 도착증을 드러낸다. 여기서 따지고 묻는 기계는 자신의 문화적 맥락에 뿌리내린 매우 특정한 기계이다. <나쁜 교육>의 내러티브는 자신의 정치적 토대를 전적으로 명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신중하게 플롯화 된 시간(temporal) 설정들은(1964년 유년기의 트라우마, 1977년 이그나시오의 이야기 배경 그리고 1980년 오늘날 영화 제작 현장) 스페인의 역사에서 핵심적 순간들을 표시한다.
알모도바르의 기획은 종교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정치적이다. 그리스도의 얼굴 뒤로부터, 그러한 체제를 지배하는 모습(visage)은 명백히 프랑코의 모습이다. 또한 <나쁜 교육>을 통틀어 유령적 존재를 유지하는 시네마 체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령적 존재는 이그나시오의 배우-형제의 변덕스러운 야망들, 퀴어-여왕-어머니 사라 몬테일의 분열된 쾌락들뿐만 아니라, 저자로서 엔리크 (그리고 알모도바르)의 지위 내에 깃들어 있다. 명백히 그러한 체계들은 내러티브와 같이 서로를 향해 펼쳐진다.
그 정념적 체제가 주체화과정(subjectification)의 지점에 집중한다면, 알모도바르의 정념적 연극 내에서 그 지점은 전복되고 다양해진다. 탈영토화는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엔리크라는 인물에 근거를 둔 채 남아있는데, 그는 작가이자 감독인 알모도바르의 신뢰할 수 없는 이중체(double)이지만, 특이한 ‘실재적인’ 정체성, 즉 그의 연인이자 부분(대상)으로부터 전해지는 것에 대한 불완전하지만 최종적인 텍스트적 소통의 수신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체화과정이 이루어지는) 정교한 방식인데, 그 방식 내에서 이러한 위치들과 관계들은 발굴된다. 또한 어펙트의 역할이 중요한데, 어펙트는 행동의 궤적을 유예하고, 분화하며 그리고 새로운 방향으로 돌리는 역할을 한다. 의미작용, 숭배, 주체 구성 그리고 통제 체계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들은 얼굴들과 그것의 무수한 어펙트들의 배치물들을 통해 밝혀진다.
이러한 안면성의 다면적인 잠재성(potential)을 탐구하면서 (변화와 미래를 향한 추진력과 짝을 이루는 계보학적 역사 탐구), <나쁜 교육>은 주체성과 정체성, 내재성과 외재성에 대한 제한적인 표현들(presentations)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얼굴을 배치한다. 동시에, 얼굴은 트랜스-주체적인 연합들을 열어젖히는데, 이는 얼굴의 다양한 수행적 반복들, 위장들 그리고 환경과의 공명작용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나쁜 교육>은 어떤 보편감각, 공통분모의 감정을 단언함으로써 이러한 열림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들의 얼굴들과 감각들을 코드화하는 억압체계를 노출시킴으로써 그것을 성취한다,
이것은 순수추상 속으로의 탈주(flight)가 아니라 느리고도 고통스러운 발굴과정이다. 우리는 주체화과정에 대한 서사가 재반복하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 반복은 계속적인 허위로서 노출된다. 이는 타자와의 조우라기보다도 주체들의 창조 자체가 억압적이고, 고통스럽고, 도착적이라는 깨달음이다. 어펙션-이미지는, 자신의 가장 급진적인 잠재성을 향해 움직일 때,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느끼고 사유하도록 고취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