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Deleuze and The Schizoanalysis of Cinema(2008)의 4장을 번역한 것이다. 괄호 안에 페이지 인용은 들뢰즈·가타리 저작의 영역본을 기준으로 표기되었다.
얼굴 잃어버리기(1/2)
Losing Face
너의 얼굴을 잃어라. 기억 없이, 환영 없이, 해석 없이, 검토 없이 사랑할 수 있게 되어라. 그냥 흐름들로 두어라. 이따금 마르거나, 얼어붙거나, 넘쳐 흐르는, 이따금 한데 모이거나 갈라지는 그런 흐름들로.
그레고리 플랙스만 & 엘레나 옥스만
Gregory Flaxman & Elena Oxman
번역: 정경담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영화이론 세미나팀
1. About face얼굴에 대하여
그의 저작, 그리고 펠릭스 가타리와의 공저에서 질 들뢰즈는 ‘얼굴’을 가장 핵심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로 만든다. ‘얼굴’은 (많은 들뢰즈의 연구에) 편재하는데, <차이와 반복>에서는 타자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드러난다. 이 ‘얼굴’은 <천 개의 고원>에서는 안면성의 ‘흰 벽과 검은 구멍의 표면’으로, <시네마1>에서는 정동-이미지affection-image로, 그리고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는 ‘타자’의 얼굴로 등장했다. 이러한 지대들을 거치면서 ‘얼굴’은 일정한 성질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변화들을 겪게 된다. 혹은 되려 ‘얼굴’의 변화가 반론의 여지없이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언제나 모호한 논리를 갖는, 하나의 계열을 구성한다. ‘얼굴’을 구성하는 상이한 얼굴들은 서로 어떤 관계인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들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작업 내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 스스로 ‘구성주의’라고 정의한 그들의 철학 내에서, 저자들은 언제나 사유를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위치시킨다. ‘얼굴’은 어떤 종류의 문제인가? 이는 그 드러남 전체의 범위를 가로질러, 우리에게 ‘얼굴’이 단순히 문제를 되풀이하는 장소라기보다는 “’얼굴’이 사유를 문제틀로 만든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있어 사유란, 단순히 해법을 제공하는 것을 그치고, ‘문제화problematism’의 모순적인 형식에 응할 때에야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문제’는 막다른 길에서 사유를 중지시키는, 이른바 무능impouvoir을 구성한다. 하지만 이 정동적 마비는 우리를 ‘사유하도록 요청된 것(하이데거)’에 강제로 착수하게끔 하는 순간에 다름아니다. 사유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를 자동적인 습관이나 클리셰, 혹은 의견opinions 같은 것들에서 빗겨나가도록 만드는 일종의 자극(나아가 폭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세계의 어떤 것이 우리를 사유하도록 강제한다’고 말할 때, 이는 우리가 철학이라고 부르는 종류의 사유조차도 ‘비-철학적’ 영역, 혹은 그에 따라 철학이 응답하고, 그로부터 자신의 문제를 추출하며 심지어 사유 그 자체의 문제도 추출하는 ‘아니다(NO)’와의 관계 내에서만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들뢰즈, 1994: 139)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이어지는 논의에서는 사유가 철학과 비-철학 사이에 있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작업에서 사유를 촉매하는 복잡한 역학관계를 고려하게 될 것이며, 이는 우리를 그것의 개념적 구성주의의 면에서 시네마틱 이미지의 영역으로, 또 거기에서 다시 분열분석의 실천에 이르도록 할 것이다. 각각의 영역에서 우리는 사유의 문제가 ‘얼굴’을 통해 단계적으로 진행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개념적으로(‘타자’로서), 다음은 상상적으로(‘어펙트-이미지affect-image’로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정치적으로(‘안면성faciality’으로서) 말이다.
무엇보다도 이 글은 ‘얼굴’ 그 자체가 비-철학이라는 비평적 지대를 형성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얼굴에 대한 그들의 묘사renderings와 기술들descriptions이 식별 가능한 원천에서 나온다 할지라도,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남아있다. 그리고 그 의미란, 즉 들뢰즈와 가타리가 ‘얼굴’에서 본질적으로 식별 불가능한 것을 마주할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얼굴’의 분열분석적 잠재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얼굴’의 말소에 관한 잠재력으로, 표현의 특이성들이 ‘얼굴’의 주관적 좌표들에서 분리됨을 이르는 것이며, 우리는 이를 통해 감정-사유feeling-thinking의 이미지이자 사유되기를 요구하는 이미지인 ‘정동’이 갖는 익명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특히 ‘얼굴’의 말소에 필요한 조건들, 즉 비-의미작용, 비-주체적인 것, 그리고 상실된 얼굴의 영역을 향한 탈주선을 발견할 수 있는 곳, 즉 시네마의 영역 안에 있다. 더이상 ‘얼굴’은 주체성의 전거도, 응시contemplation의 전거도, 심지어 지각의 전거도 아니다. ‘얼굴’은 주체와 비-주체적 생성, 안면성과 그것의 소멸, 사유와 비사유 사이의 마주침이 일어나는 (비)장소이다.
2. Facing the Other Person타자와의 마주침
철학이 기원이나 시작을 주장할 때, 그리고 ‘명백하지는 않지만 틀림없는 것’ 에 대해 주장할 때,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것이 기원의 고정점을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와 관련하여 개념화를 발생시키는 힘이라고 쓴다. (들뢰즈&가타리, 1994: 15) 그들은 ‘모든 개념은 문제들과 연결되어 있다’ 고 말하고, ‘그렇지 않았다면 개념들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했을 것이며, 스스로 고립되거나, 해결책이 떠올랐을 때에만 이해되었을 것’ 이라고 설명한다. 개념들은 오직 문제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들이 다루거나 결합시키는 특정한 ‘관점이나 근거[raison]’를 발견한다. (1994: 16) 이에 비추어,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타자’를 철학의 첫 번째 개념으로 고려할 수 있다. — 이는 모순적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이 선험성apriority에 접근한다는 전제 하에, 그 어떠한 열거법도 불가능해지는 비-철학과의 관계 내에서만 첫 번째 개념으로 꼽힐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대타자the Other’는 무수한 다른 작은 타자 사이의 한 장소를 지정한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사유가 시작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유를 문제로서 제기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 ‘문제’, 즉 타자에 대해 들뢰즈와 가타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자[autrui]는 필연적으로 자아에 후속하는가?’ (1994: 16) 만약 자아가 먼저 있고 나머지가 뒤따른다면, 우리는 타자가 (‘나’의) 자아와 관계하는 대상으로서 스스로를 나타내는 주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타자를 다른 주체와 동일시해버리며, 그 주체는 ‘나’가 특별한 대상으로서 출현한 것이다. 이제, ‘나는 다른 주체로 나타난 ‘나’로서의 타자이다.
우리가 타자에 대한 질문을 ‘처음’에 오는가 ‘나중’에 오는가 묻는 방식으로 제기하는 것은, 즉각 용어 상의in terms 문제를 일깨운다. 즉, 다른 개념들(특수한 대상, 주체, 자아)을 발생시키면서 동시에 그것들을 모두 우선순위의 문제로 축소시켜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쟁점보다도 무엇이 ‘처음’에 오는지, 혹은 무엇이 무엇을 야기하는지에 치중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선험적인 타자를 다루는 것인가, 선험적인 자아를 다루는 것인가? 이 미결정성의 장은 이미 처음의 것을 재구성함으로써 부상하는 또다른 문제들의 윤곽을 제시하고 있다. 만약 이런 질문—무엇이 ‘처음’에 오고, 무엇이 무엇을 야기하는지—을 하는 대신에 우리가 자아와 타자를 정의하는 위치들의 본성이나, 심지어 주체와 객체를 정의하는 위치들의 본성을 살펴본다면? 또는, 아예 타인의 다양성variability과 이를 구성하는 –그 자신의 권리상 개념이 될 수 있는 요소, 그리고 그것을 결정짓는 관계를 조사하면 어떨까?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타자는 특별한 대상도 아니고, 다른 주체도 아니며, 심지어 자아도 아닌 것, 그러나 이 세 가지 모두가 가능한 위치를 가리키게 된다. 만약 타자가 다른 개념을 요구한다면, 이는 타자에 대한 문제가 ‘차이’의 개념 만큼이나 ‘주체의 다수성, 그들 간의 관계, 그리고 상호간의 현시’를 고려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타리, 1994: 16) 다시 말해, 여기서의 ‘타자’ 개념은 즉시 여러 개의 주체들을 생산한다.
그러므로, 들뢰즈와 가타리가 ‘절대적인 것이 아닌,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개념이 첫 번째가 되는 조건은 무엇인가?’ 라고 질문했을 때, 우리는 이미 여기서의 ‘처음’이 하나의 기원이 아닌 개념적 창조의 핵심에서 가변성의 발생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해야 할 것이다. 이 때 그 개념은 개념들의 가변성을 조직하고, 그 개념들의 가변성으로부터 분리불가능하게 된다. 개념으로서 타자의 부상, 즉 그 구축의 순간은 또한 이것이 질적으로 ‘다른 구성요소’의 질서짓기를 완수하는 한 ‘이종발생’인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타자에 대해 구축할 때 그들은 곧 ‘사유의 이미지’를 구현한 것이기도 하다. 즉, 개념적인 지평을 가로지르는 분배의 힘을 촉발시킨다는 것이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세계의 어떤 순간이 있다. 갑자기 화면 밖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공포에 질린 얼굴이 어디에선가 불현듯 나타난다. 이 타자는 주체도 대상도 아니지만 매우 다른 어떤 것으로서 드러난다. 가능세계, 공포스러운 세계의 가능성으로서 말이다. 이 가능세계는 실제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즉 가능세계란, 얼굴의 표현(공포에 질린 얼굴) 안에서만 존재하는 표현된 것(공포스러운 세계)이다. 얼굴, 혹은 얼굴과 등가인 것으로 말이다.” (1994: 17)
이 개념적 영토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조직하는 ‘사유의 이미지’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먼저 우리는 이 관점 내에서 우리가 더이상 ‘point of view’의 시점에 의지하는 주체나 객체의 위치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도 타자도 아닌, 불현듯 나타나는 익명의 얼굴 속 미결정성의 풍경(a ‘there is…’)과 직면해 있는 것이다. 이는 누구도 아니고(not anyone), 문자 그대로 ‘아무도 아니’(no one)며, ‘공포스러운’ 세계의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하는 미결정된 ‘무엇’(one)이다. 주체 혹은 대상들, 자아와 타자들보다도, 우리는 얼굴과 가능세계—아직 제3의 요소가 추가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는 ‘주어진 경험의 장 내에서 말해졌을 때’ 가능성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언어나 발화speech이다. (들뢰즈&가타리, 1994: 18) 타자는 이 ‘세 가지 불가분의 구성요소: 가능세계, 존재하는 얼굴, 그리고 현실의 언어나 발화’가 ‘응집된 지점’이다.
우리는 이제 들뢰즈의 첫 번째 개념 가운데 하나로 왜 ‘타자’가 제시되었는지 이해해야 하는 자리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타자’가 절대적인 의미에서 ‘첫 번째’라서가 아니라, 그에 따라 철학이 시작하는 다양한 관계들과 소통하기 때문이다. 타자는 주체들의 어떤 특수성에도 관여하지 않는데, 이는 타자의 개념(주체의 개념들, 대상과 자아의 개념들과 마찬가지로)이 관계들의 배치에 따라 조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들뢰즈는 ‘관계들은 절대 그들의 항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관계들의 분배를 정향할 때, ‘타자’는 사유를 지각적인 장에 따라 무한히 유연한 조건들의 변조로 만든다. 더이상 그 장의 주체도 그 장내의 대상도 아니게 된 타자는 주체와 대상을 재분배하는 조건이 될 뿐만 아니라, 형상과 바탕, 가장자리와 중심, 움직이는 개체와 기준점, 타동사적인 것과 주어적인 것, 길이와 깊이를 재정의하는 조건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특히 타자의 공식은 칸트의 ‘초월적 감성학’에 대한 인상적인 개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후자가 가능한 경험의 조건 범주로서 주체에 계속해서 의존한다면, 들뢰즈와 가타리는 타자를 주체의 조건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타자들에 대한 지각’의 조건으로 만들 것이다. (1994: 18) 이는 간단한 구분이 아니다. 칸트가 ‘마음의 주관적인 구조’라고 칭했던 것을 외부도 내부도 아닌, 강도와 연장의 계열들을 분배하는 구성요소들의 조직이나 결합으로 변환하는 것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주의자와 신칸트주의자의 전통에서, 가능성의 조건들은 무엇이 느껴지고 지각되고 사유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법칙에 따라 실재를 효과적으로 변환한다. 그 결과 이 가능성의 조건들은 경험에 앞서서 경험에 선행하고 경험을 규정하고 경험을 제한한다. 하지만 들뢰즈는 ‘(감각될 수 있는 것의 과학으로서)감성학이 감각 가능하게 표상될 수 있는 것에 기반한다는 사실은 이상하다’고 쓴다. 재현의 체제는 철학에게 ‘그것이 사유되는 한 실재의 현실성들’을 무시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즉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타자’를 소환한다. 이미 주어진 척도 내에서만 가능성을 규정하는 초월론적 관념론에서의 경험을 초월론적(혹은 상위의) 경험론의 영역 속으로 대체시키려는 것이다. 일찍이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는 ‘우리의 주위를 가능성들이 둘러싸고 있지만, 우리의 가능자들은 언제나 타자들’ 이라고 주장했다. (1994: 260) 다시 말해, 실재가 우선하는 가능성들 때문에 조건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실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만 현동화되지는 않은 가능 세계들을 일깨워낸다는 것이다. ‘가능한’ 경험의 조건이라는 측면에서 출발하는 대신, 우리는 ‘타자’로 돌아간다. 아니 차라리, ‘타자’가 우리에게로 돌아서고, 공포에 대한 이것의 특이한 표현에 직면하게 하고 나서, ‘실제’ 경험의 조건으로서 가능세계의 ‘얼굴’을 제시한다고 말하는 게 나을 것이다. 이는 ‘외재적인 조건짓기가 아니라, 내재적 발생’이다. (들뢰즈, 1994: 154) 우리는 (마치 관념론의 부재로 인해 우리가 경험의 카오스적 흐름으로 떨어지고 만다는 듯이) 경험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험 그 자체는 약정들stipulations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 무엇도 닮지 않았다 할지라도 가능성은 절대적으로 현실real이다. 얼굴은 얼굴을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것과 닮지 않았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가능성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속하는insists 것이며, 그것은 타자의 표현 속에 ‘가능한 것’이 함축되고 동봉되는 장소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