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 물신주의들
로라 멀비
박상빈 옮김
이 글은 로라 멀비의 주저 『물신과 호기심(Fetishism and Curiocity)』(London : Indiana University Press, 1996)의 서론으로 수록된 글이며, 1993년 학술지 『October』 65호에 「동시대 문화 콘텍스트에서 물신 이론에 관한 소고(Some Thoughts on the Theory of Fetishism in the Context of Contemporary Culture)」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바 있다. 이 글은 2019년 9월부터 2020년 1월까지 진행된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페미니즘 이론학교 시즌3의 수업을 위해 번역된 것임을 밝힌다.
1960년대 좌파의 위기를 수습하려 했을 때, 페미니즘 정치학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라는, 마르크스의 정치적 아젠다 옆에 나란히 프로이트를 놓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내가 속한 60년대 이후 페미니즘 정치 세대에 있어 이 이름의 조합은 거의 마술적인 주문이자, 두 관념 뭉텅이를 교섭케 하려는 욕망이었다. 그것은 마치 현자의 돌을 찾는 것과 같이 좌절과 고무를 동시에 느끼게 했다. 이미지 정치학의 개발이라는 첫 번째 심급에서 페미니즘의 정신분석 이론 전유는 프로이트 쪽으로 그 잠재적인 연금술이 기울어져 불균형한 상태였다. 오늘날 마르크스의 영역이라고 코드화된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장(sphere)은 역설적이게도 마르크스를 추종하다가 몰락해버린 동유럽 체제와 같은 모습으로 다시 한 번 전면에 대두된다. 영국과 미국에서 80년대 우파 정권이 발생시킨 경제적 사회적 위기들은 여전히 악화되고 있고, 공허함과 쓰라림은 오늘날 소비문화와 스펙타클의 사회를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이미지’라는 주제는 더 이상 페미니즘만의, 혹은 정신분석학만의 문제가 아니며, 더 진보한 자본주의는 엔터테인먼트와 커뮤니케이션 산업들을 통해 세계의 권력을 결집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공산주의의 붕괴는 역설적으로 상품(com-modity) 물신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소비문화에 대한 열망으로부터 최후의 일격을 맞았다(하지만 경기가 침체하고 있는 지금, 많은 자본주의들은 이 벽에 등을 기대고 있을지도). 이는 소비에트 연방을 괴롭혔던 명백하고 실제적인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뿐만 아니라, 혹처럼 도드라져 이미 알려져 있었던(acknow-ledged) 소련 사회의 ‘비참한 상태(abjection)’와 자본주의 물신의 힘 때문인 것만 같았다.
오늘날 정신분석 이론은 1930년대의 반복처럼 마르크스를 필요로 한다. 프로이트를 추방했던 파시즘과 내셔널리즘은 유럽에 다시 울려 퍼지고 있다. 이와 동시에 세계 정치가 전도된 모습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여남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치 내부에서 괴물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비합리적인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그것은 점점 더 역사의 진보 운동보다 더 강력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물신 개념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모두에게서 찾아볼 수 있으며, 표면적으로는 둘 사이의 연금술적 연결 고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개념 모두는 아프리카에 대한 비합리적이고 원시적인 믿음을 담고 있는 이 용어를 그들 자신의 사회로 되돌려준다. 유럽 사유의 합리성이라는 용어는 아마도 비합리적인 현상 속 미신적인 믿음들과 인간사에 대한 초자연적 현상의 개입을 사회에서 몰아내 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르주아 경제학과 그 정신은 여전히 또 다른 비합리성들에 침윤되어 있다. 계몽주의가 수복해야할 땅은 여전히 광대하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자본주의 경제 구조들로의 근본적인 변화는 그 첫 번째 전제조건이다. 반면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이 합리적인 것을 인간의 비합리성으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음을 명확히 했으며, 또한 그것의[인간의 비합리성의] 궁극적인 처치 곤란함과 직면하기도 했다.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모두는, 한 사람은 사회적인 것의 차원에서, 다른 한 사람은 정신분석의 장에서, 가치의 상징적 체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의 거부(refusal)나 장애(blockage), 혹은 정신의 공포증적 불능을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이 물신 개념을 활용했다. 하지만 물신 개념을 이렇게 발동시키는 둘 사이의 차이는 그 유사함과 비슷할 정도 혹은 더 많은 중요성을 보인다. 우선 마르크스의 물신은 기입이 문제가 되는 곳에서 도출된다. 즉, 가치의 징표는 어떻게 상품에게로 가서 가격이 되는가? 이는 상품 물신에 뒤덮여 있는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된 현실적 사물(object)들의 교환 가치 설정하기의 어려움 속에, 그리고 그 주변에 존재하는 문제다. 반면 프로이트의 물신은 환상적 기입(phantasmatic inscription)으로서 맹위를 떨친다. 사회적 합의에 따르자면 가치가 없는 대상에 과잉된 가치를 부여하기. 즉, 어떤 대상(object)이 어떻게 어머니의 남성 성기라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잃어버렸다고 여겨지는 부재햇던 것을 대체하는 성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가? 한 사례에서는 가치의 징표는 실제 사물에 자신을 기입하는 데에 실패하는 반면, 다른 한 사례에서는 상상된 결여의 장소 위로 대상(object)을 대체하면서 과잉-기입된다.
아래에서 행할 논의는 하나의 실험이다. 두 물신 개념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특정한 기호학적 문제들(semiotic problems)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을, 그리고 물신의 기호학(semiotics of fetishism)이 이론적 프레임 작업 속에서 사회적 혹은 성적 현실을 개념화하는 것의 의미를 추정할 수 있는 방식을 사유하기 위한 시도인 것이다. 라캉은 ‘실재(Real)’라는 용어를 인간을 주체로 만들어내지만 인간 의식으로는 결코 접근할 수 없는 존재 조건들을 대신 표현하기(represent) 위해 사용하였다. 말하자면 실재하는 문제는 결코 표상이나 의미로 상상계나 상징계 속으로 번역될 수 없다. 라캉의 지적이 굉장한 중요성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방식은 실재를 접합하는 일의 불가능성을 역사와 그 정신의 과정과 접합하는 그 어려운 작업을 쓰러뜨리게 만들 수도 있다. 서론에서 나는 사회구성체 및 정신형성체를 가로지르며 ‘징후학’을 구성케 할 물신의 다양한 구조에 관한 한정된 논의를 제언하려 한다.
이 논의의 두 가지 주요한 측면을 먼저 언급해야겠다. 첫 번째는 프로이트의 페티시의 특수한 구조에 관한 것이며, 두 번째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상품과 볼거리 사이의 응축에 관한 것이다. 물신은, 마치 진주를 만들어내는 굴(oyster) 속의 모래알처럼, 억지스러운 지점에서 사회적 정신 혹은 성적 마음(social or sexual psyche)을 괴롭히는 사물들의 사회적이고도 성적인 구성물(social and sexual constructions of things)을 만들어낸다. 만약 이러한 구성물들이 증상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밝혀질 수 있다면, 그 의미들은 사회와 사회의 의식이 끊어지게 되는(loose touch) 허약한 지점을 표시하게 될 것이다. 그곳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사물들 사이의 관계가 되곤 하는 그런 지점이다.
이러한 ‘지점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가시화하고자 시도하는 문화 분석가는 다만 새로운 경제적 사회적 조건들이 실존을 이어받게 되었을 때 죽어가는 물신을 좀더 잡아채기 쉽게끔 그려내면서 그들에게 가 닿기 시작할 수 있을 뿐일 것이다. 예를 들자면, 나는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에 의해 밝혀진 물신이 영화의 스크린 위에서 (그 둘의 유사성보다는 차이점이) 서로 융합된다고 주장하긴 하지만, 이는 영화가 더이상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지배적인 미디어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다. 오직 시간 지각의 사라짐 속에서만 정신(the mind)이 그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역사가 가시성을 부여하는 문화적 형식들이 있는 곳, 나의 시론은 그곳을 바라보고 있다. 부인(프로이트)과 소외(마르크스)의 과정은 사물의 과잉-가치화를 만들어내며, 이 과잉-가치화는 사물의 미적 의미적 차원(aesthetic and semiotic of things) 위로 흘러가며 이들을 변용시킨다. 나는 동시대 기호 이론의 맥락 속에서 물신주의를 논의하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C.S. 퍼스의 지표-도상-상징이라는 세 개념을 활용하고 싶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상품의 가치는 상품 생산자의 노동력에서 나온다. 만약 이 노동력이 그 생산물인 상품 위로 그 자신을 지표적으로 기입하는 것이 언제든지 가능했다면... 만약 노동력이 만들어낸 상품에 노동 시간과 숙련도의 유형의 표식이 남겨진다면, 어떠한 문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지표, 직접적으로 각인되는 그런 기호는 실패한다. 가치는 교환에 의해 만들어져야만 한다. 마르크스는 가치가 어떻게 동등한 가치를 지닌 서로 다른 상품들의 등가관계에 의해 표시되는지를 보여주었다. 하나의 상품은 또다른 한 상품이나, 실제로는, 등식에 따라 동등하다고 여겨지는 다른 많은 상품의 가치를 반영하고 그리하여 표현하는 그런 거울로서 행위한다. 이 무대(stage)는 퍼스의 도상 개념과 유비관계가 있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러한 과정에 따라 가치가 상품의 자연적이고 전-존재적 속성이 됨을 상정하고 있기에, 이는 정체성의 오인지 과정으로서 거울단계에 관한 라캉의 분석과 유비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동시에 가치는 이러한 반영 과정을 통해 기입되며, 이는 재화의 나타남 그 자체에, 교환이 일어나는 만큼 반복되어온 교환행위에 의존하고 있다. 대규모 생산, 교환, 유통을 포함하는 복잡한 경제 체계는 일반화된 기호 체계를 거쳐 등가를 표현하게 되는 수단을 발전시킨다. 바로 화폐가 그것이다. 가치의 상징적이고 표현적인 층위에서 발생하는 화폐 교환은 언어의 유연하고 추상적인 자질과 습득한다. 가치의 기호로서 화폐는 사물의 교환 그 자체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게 될뿐 아니라, 가치의 원천으로서 노동력을 최종적으로 지워내는 기능 또한 수행한다. 말하자면 지시대상은 생산과정으로부터 유통 및 시장으로, 외관상 자동적으로 가치가 첨가되는 그런 상품이 나타나고 유통하는 곳으로 이동한다. 마르크스의 용어로 맗자면, 이러한 자기 발생적 가치의 외관은 상품 물신을 만들어낸다. 혹은 노동력에 있는 그 가치의 원천을 부인하게 만든다. 상품이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유통되는 것은 그 생산의 표식을 지워내는 데에, 공장의 땟국물과 기계제 대량 생산,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자의 착취라는 모든 지표성의 흔적을 지워내는 데에 달려 있다. 대신에 상품은 매혹적인 광택으로, 욕망됨을 경쟁하는 사물로서 시장에 나타난다. 동시에 화폐는 세련된 것으로, 교환 수단의 추상이자 상징으로 나타나며, 자본주의는 이미지로서 상품을 부활시킨다. 마르크스는 상품 문화가 최초로 가시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1860년대에 쓴 『자본』에서 다음과 같은 굉장히 많이 인용되는 구절을 쓴다 :
따라서 그와 유사한 예를 찾으려면 종교적인 세계의 신비경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여기에서는 인간 두뇌의 산물이, 독자적인 생명을 부여받고 그들 간에 또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관계를 맺는 자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나는 물신숭배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되는 순간 이들에게 달라붙는 것으로서 상품생산과는 불가분의 것이다.
이는 믿음을 위하여 지식을 부인하는 완벽한 패러다임이다. 추상적 가치 체계는 사물들 속의 상상적 투자와 접목되고, 가치의 기원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유통 속으로 상품을 가져왔던 상징화 과정까지 부인한다.
상품 물신은 볼거리로서 승리한다. 볼거리로서 대상은 이미지와 믿음이 되고, 종교적 아우라보다는 에로틱한 아우라에 의해 보장된다. 수잔 벅-모스는 『보기의 변증법 :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The Dialectics of Seeing: Walter Benjamin and the Arcades Project)』에서 이 문제를 무대 위에 올리는 벤야민의 근본적인 관점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벤야민에게 있어 … 새로운 도시 환등상 문제를 푸는 열쇠는 시장-안-상품이 아니라 진열-중-상품이었다. 진열 중인 상품에서는 교환가치 역시 사용가치와 마찬가지로 실제적인 의미를 상실하며, 순수한 재현적 가치가 전면에 등장한다. 섹스에서 사회적 지위에 이르기까지 욕망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상품으로 변형될 수 있었으며, 진열-중-물신인 상품은 사적 소유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우에도 여전히 군중을 매료했다.
생산자들은 소비자들이 된다. 노동자들이 하는 노동의 비가시성은 상품에 대한 욕망에 핵심적이다. 장인 노동의 가시성이 공예 물품에 대해 그러하듯 말이다. 노동자의 노동력이 자신의 생산물에 자신을 가치로서 날인하는 데에 실패하는 기이한 입법과정에 의해 생산자나 생산 과정에 대한 모든 지표적 흔적은 씻겨나간다. 상품 주변을 떠도는 노동의 유령과 같은 현전은 상품의 완벽하게 때 묻지 않은 새 것 같음과 절대로-누가-만지지-않은 포장에 의해 말소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의 위대한 지적 성취, 그러니까 상징적 체계로서 경제 체계의 구성은 그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계속될 수 있게 된다.
상품의 물신은 의미(significance)와 볼거리(spectacle)로 이루어져 있다. 즉, 보드리야르가 제기했던 ‘기호 가치(sign value)’는 자기 자신을 고도로 함축적인 연합체(connotative association)로, 시장이 추동하는 수요로서 실현될 수 있는 자극하는 욕망으로 만든다. 기호 가치의 ‘의미(significance)’는 생산물의 의미(significance)이거나 그 경제적 중요성(meaning)이 아니다. 그리하여 두 층위에서 전치가 작동한다. 우선 첫 번째 경제적 층위에서는 노동력이 부인되고, 두 번째 의미론적 층위에서는 구매욕의 내포의미들(connotations of desirability)을 투사한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상품에 관해 본질적으로 물신적인 것은 없다. 가치가 정해지는 일은 항상 유통과 교환의 정교한 체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복잡한 과정이며, 그 가치의 원천으로서 노동력의 장소를 해독해내기란 아마 언제나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상품 물신은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작동 아래에 있는 사회에 특수한 정치적 징후이다. 상품 물신은 또한 인간의 상상을 소비하는 이미지들과 사물들의 끊임없는 매혹을 목격하는 일과 표상의 상상적 체계 및 그 환등상 속에서 믿음을 가짐으로써 얻게 되는 쾌락에 의존하고 있다. 화려하게 현현하는 사물(object)과 이미지는 기호학적 의미를 흠뻑 빨아들이면서 정동(affect)의 발음생략(elision)을 유발하는 부인 과정의 중심에 서 있다. 무엇보다 그것들은 틀림없이 성화되어있다.
「환상의 미래」에서 종교적 믿음을 해부하고 난 직후에 쓴 1927년의 짧은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페티시즘’을 거세 불안의 결과로 발생하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사건들에 수반되는 정신의 연쇄는 부인과 대체 그리고 흔적 새겨 넣기(marking) 프로세스를 통해 상연된다. 페티시의 대상은 어머니의 자지라는, 잃어버린 것으로 간주되는 사물을 대체하는 ‘기호’로서 작동한다. 이러한 대체는 또한 부재라는 트라우마적 광경을, 특히 그 ‘부재’에 따라 연상되는 신체의 상처 및 피흘림을, 부인하고 뒤덮는 하나의 가면으로 기능한다. 정신은 추함과 불안을 아름다움과 욕망 뒤로 숨기는 표면 혹은 껍질의 환등상적인 지형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의미론인 것과 위상학적인 것의 복잡한 뒤섞임은 가장 중요한 무의식의 작업이며, 또 다른 측면을 갖고 있다. 페티시적 사물은 또한 기념비이다. 그것은 최초의 거세 불안에 의해 남겨진 기호이며 또한 상실한 대상을 애도하고자하는 흔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호로서의 페티시는, 심지어 여성의 자지에 대한 그 집착적인 믿음조차도, 페티시의 기원에 관한 잔여적인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 페티시적 사물은 역사적 사건을 개인의 연대기와 합리적 기억 바깥으로 고정시키고 동결시킨다. 하지만 페티시는 여전히 최초의 트라우마적 실재와 접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고유한 역사적 이야기로의 잠재적 접근을 유지하고 있다.
토머스 리처즈는 빅토리아시대 영국이라는 상품 문화가 처음으로 공적인 상찬을 받으며 나타났던 역사에서 과잉결정된 순간에 관해 논한다. 그는 1851년 만국박람회가 ‘1830년대와 40년대의 사회적 불만’을 함축적으로 전치했던 방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쓴다 :
[박람회가] 역사를 정정해나가는 방식은 모호하게 만들기이다. 읽기조차 어려운 자그마한 카드가 발명되었는데, 독자들에게 박람회의 전시물이 언제 어디의 것인지, 더구나 누가 어디에 쓰던 것인지 거의 말해주지 않는다. 박물관과는 달리 박람회는 각각의 사물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정확하게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게 만든다. 대신에 박람회 공간은 과거를 완전한 현재로 바꿔버린다. … 번쩍거리는 현재의 껍데기에 과거를 싸넣는 일을 통해 박람회는 과거를 기념하면서 동시에 완전히 소멸시킨다.
이는 마치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앨버트 공이 정치적 논쟁과 1848년의 무산된 혁명으로 막을 내리게 된 정치적 격변으로부터 세계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결정했던 일들과 아주 유사하다. 1851년의 박람회는 인민들에게 인간들의 관계가 사물들의 관계로 융해되고 사물들의 관계는 스펙타클의 사회 속에서 물질화되는 유토피아적 열망의 새로운 형식과 새로운 사회 양식을 제안했다.
물신이 아주 빈번히 응시를 끌어모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대중적 상상 속에서 그것은 반짝거리며 빛난다. 물신은 지식의 침략으로부터 믿음의 유혹을 방어하기 위해 물신숭배자(fetishist)들의 눈을 고정시켜야만 한다. 표면에 나타난 것에 대한 이러한 투여는 물신의 환등상적 공간을 강화하고 대상 집착이 이미지로 쉬이 번역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화폐의 상징적 체계에 대한 마르크스의 논의가 상품의 생산과 유통에 핵심적인 것인 반면, 프로이트의 페티시가 구성되는 일은 정확히 성적 차이라는 상징적 체계를 부인하는 것에 그 성패가 달려있다. 또한 프로이트의 페티시가 ‘기억하기(memorial)’로서의 기능 속에서 지표성의 흔적을 포함하고 있는 반면, 상품 소비자들은 ‘알고 있어, 하지만 그럼에도…’이라는 속삭임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성적 물신의 힘은, 아마도 동일한 위상학적 구조들에 의해 가능해질텐데, 볼거리와 부인으로 분할된 양쪽 모두의 물신 위로 넘쳐흐르며 상품을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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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자본주의로의 전환 속에서 현대 상업은 기묘하게도 이중적 사업에 종사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합리화의 과정이 있다. 판매행위가 산업으로 변형되는 것이 그것이다. 백화점은 마치 공장처럼 수백명의 노동자들, 자사의 주식을 보유한 회사들, 어마어마한 매출, 지속적으로 확장 전략을 펼치는 신중한 유통과정으로 조직된다. 다른 한편으로 산업은 상품 진열장으로 변형된다. … 상품 판매가 볼거리로 변형되는 일은 사실상 최초의 백화점인 영화가 나타난 이후 50여년간 발전된 산업과의 유비관계를 제공한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그저 보는 일, 보기의 즐거움은 그 자체로 돈을 지불할 만한 상품이다. 이미지는 모든 것이다. 관객의 흥미는 그/녀의 눈 앞에서 환영을 만들어내는 생산적 조직물에 의해 보증되지 않는다. 그것이 나타나는 방식 속에서, 할리우드라는 ‘꿈의 공장’은 필연적으로 기계적 노동이 투여된 부분을 억압한다.
초기 영화는 볼거리로서 청중들을 사로잡았고, 합리적 지식과 믿음을 마주 세웠다. 영화는 대중 엔터테인먼트와 과학적 실험을 포함해 이미 현존하는 많은 부분의 산물이다. 그중 여기서의 논의와 관련이 있는 한 가닥은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는 관객들에게 영혼이나 유령의 등장을 빈번히 활용했던 과거의 환등기 영사 기술과 흥행술과 연결된다. 17세기에 최초의 카메라 옵스큐라를 제작했던 아타나시우스 키르허(Athanasius Kircher)는 관객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계몽시키기 위해 영사기를 사용했다. 그는 그가 만들어낸 환영이 단순히 기계가 만들어낸 산물일 뿐이라고, 그 환상적 이미지들은 영혼의 현현처럼 초자연적인 세계에서 나타나는 게 아니라고 설명하려 했다. 예수회의 일원으로서 그는 기독교의 정화와 신성이라는 더 추상적 개념으로 압력을 가하는 프로테스탄트에 맞서는 반종교개혁 가톨릭을 대표했고, 중세 종교의 대중 의례들과 신화들을 벗겨내려 했다. 키스 토머스(Keith Thomas)가 언급한 바와 같은 ‘마술의 쇠퇴’라는 이러한 국면에서, 초기 혹은 전(pre) 기독교적인 것이건 전통 가톨릭의 덜 정통적인 부분이건, 심령 세계 속 민속적 믿음들은 그 ‘신비성이 제거되기에(demystification)’ 딱 적당해졌다. 키르허의 카메라 옵스큐라는, 악마와 유령과 다른 공포스런 것들이 나타나는 원시적인 장치라는 의미에서, 옛 세계와, 시각적 트릭과 환영, 그리고 스토리 텔링을 통해 즐거움을 선사하는 기계라는 의미에서, 새로운 세계 사이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영화적 환영은 믿음 속 쾌락을 딛고 번창해왔다. 혹은 ‘앎’과 ‘불신의 유예’ 모두를 동시에 갈망할 수 있는 인간 정신의 능력을 딛고. 이러한 관점에서 영화는 다시 한번 합리적 세계를 의문에 부친다. 그것이 ‘물신’의 기원에 속하는 쉽게 믿기(credulity)의 세계이기에. ‘사회적 관계들의 사물들로의 전환’(임노동과 토지 임대를 지배하는 자본주의를 통한 사회적 관계의 상품화)을 일깨우기 위해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은유를 사용한다 :
그것은 마법에 걸려 전도되고 거꾸로 선 세계이며, 거기에서는 자본 사장님(Monsieur le Capital)과 토지 사모님(Madame la Terre)이 사회적 등장인물(동시에 직접적인 단순한 물적 존재)로서 유령 걸음을 걷고 있다. 이런 그릇된 외관과 기만, … 사물의 인격화와 생산관계의 물화(物化), 일상생활의 신앙, 이런 모든 것들을 해소한 것이 바로 고전파 경제학의 큰 공적이다.
이 구절을 읽어나가며 마르크스가 고전 경제학이 끝끝내 유령과 환영을 물리치고 세계를 계몽시키는 데 성공할 것이라는 희망에 대해 낙관적임을 느끼지 않기란 단언컨대 불가능하다. 그의 은유는 마치 인민들에게 상품화와 쉽게 믿기의 새로운 형식을 갖고 오기 위해 숨어 기다리고 있는 (아직 발명되지도 않은) 영화 기계를 미리 형상화하고 있는 것만 같다.
대체로 페티시즘은 명백하게 ‘남성’에게서 파생된 사물(‘man’-derived object)에 자족적이고 자동적인 권력의 속성을 연루시킨다. 그리하여 이는 앎을 부인하는 능력에 의지하고 있으며 그것[앎]을 믿음과 불신의 유예로 대체한다. 한편으로 페티시는 그것을 유지하는 메커니즘들의 유약성에 의해 언제나 유령처럼 떠다니게 된다. 페티시들은 지극히도 문화적으로 특정적(specific)이다. 에이젠슈타인이 <시월>의 신들의 시퀀스에서 분명하게 보여준 바와 같이 한 남자의 신은 다른 남자에게 그저 나무 장작일 뿐일 수 있다. 지식은 집요하게 의식의 양 극단을 맴돈다. 옥타브 마노니(Octave Mannoni)의 유명한 문장이 말하는 것처럼, 페티시스트의 부인은 전형적으로 ‘아주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표현할 수 있다. 크리스티앙 메츠(Christian Metz)는 영화에서의 불신의 유예에 관한 논의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다 :
관객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믿지 않아”라고 외칠 것이지만, 분명 모든 것은 마치 거기에 누군가 속는 사람이 있다는 전제하에, 정말로 ‘그것을 믿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진행된다. …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관객은 의심이 많다고 믿어지기 때문에, 마노니는 ‘그걸 믿는 사람이 누구야?’라고 질문한다. … 물론 이 쉽게 믿는 사람은 우리 자신의 또 다른 부분이다.
메츠는 여기서 모순되는 두 관념(notion)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는 인간 정신의 능력 강조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적 페티시즘 개념을 사용한다. 영화는, 특히 산업적 영화, 아니 더욱 특별하게 세계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처음으로 지배했던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 영화는 상품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러한 생산양식 속에서 영화들은 상품이며 또한 상품들을 전시한다. 그리하여 서로 다른 물신 형식이 영화 스크린 위의 한 지점으로 모여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집중점은 스타 여배우라는, 프로이트의 페티시 개념에서 어머니의 신체라는 자리를 상기시키며 여성성의 완벽하고 늘씬하게 빠진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그런 성애화된 형식 속에서 특징적으로 물질화된다.
영화의 그 기술적 탁월함에서 영화의 페티시적 대상을 이해하는 메츠와는 달리, 페미니즘 영화 이론은 영화의 성적 자극을 영화의 물신화된 신뢰성을 성공적으로 지탱시켜주는 가장 주요한 요소라고 주장해왔다. 또한 가장 분명한 버팀목으로서 여성성은 물신의 경제에 의지하고 있다. 영화의 페티시즘은 또한 마르크스로, ‘상품 물신의 미학’에 대한 숙고로 우릴 이끌어준다. 그 자체로 상품인 대중 영화는 볼거리로서 상품과 스크린 위 볼거리로서 여성 형상 사이에 가교를 놓을 수 있다. 결국 이는 생산자가 아닌 상품의 소비자로서 여성이라는 버팀목(bridging) 기능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가교들(bridges)’의 연쇄는 이내 형식적으로 유사한 구조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될 이미지 속에서 현실화된 상동관계들에 관한 하나의 위상학, 혹은 공간적 매핑을 시사한다. 내포, 공명, 의미들은 이를테면 겉보기에는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물에서 사물로 흘러갈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부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형식적 구조는 사회적 곤란함의 서로 다른 지점들을 이어주며 하나의 방어기제로서(as a defence) ‘광경(sight)’에 투자하게 만드는 하나의 도관(導管)을 만들어낸다.
다양한 영화들이 있다는 것, 서로 다른 생산 관계와 다양한 사회적 환상적 체계에 기반해 있는 영화들이 있음을 강조하는 일은 중요하다. 또한 할리우드 영화의 매혹이 자기 자신의 깨어지기 쉬운 효과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까지 강조를 연장해 나가는 일도 역시. [영화] 기계 그 자체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신뢰성을 망가뜨리게 될지도 모를 기록과 영사의 과정을 감추려 시도한다. 예를 들어 텍스트 바깥에서 스타가 나타나는 일은 가장 화려하게 나타나는 순간에도 시스템 속 긴장을 만들어낸다. 그러한 투사장치(projector)가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마치 강아지 토토가 위대한 마법사에게 그러듯이, 그러한 광경은 탈신성화의 욕보임에 고통받게 될 지도 모른다.
1970년대 동안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모더니즘 미학은 할리우드의 환영의 신뢰성에 도전하기 위해 연합했었다. 물신은 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은 반(anti)-할리우드 대항(counter)-영화와 정신분석학에 영향을 받은 반-할리우드 페미니즘 영화 이론의 정치적 미학에 있어 핵심적인 개념이었다. 이것들이 데이비드 노먼 로도윅(D. N. Rodowick)이 ‘정치적 모더니즘(political modernism)’이라 부른 운동 이면에 존재하는 관념이었다. 이 운동에 포함되었던 서로 다른 가닥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고 <스크린>, 에딘버러 영화제, 페미니스트 아방가르드, 구조주의적/유물론적 영화에서 이루어질 대화의 근간을 만들어 내었다. 반-물신주의(anti-fetishism)는 마치 포트망토(portmanteau) 가방처럼 논의의 서로 다른 가닥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축귀(逐鬼) 하고자 했다 : 영화에 고유한 물질성을 거부하고 불신의 유예에는 반대하지 않는 영화의 관습적 투자, 여성 신체를 거세당한 것으로 (잘못) 인지하는 것에 맞서는 정신적 방어 과정, 조각나버린, 그리하여 완벽하게 빛나는 표면 속 이미지에 의해 다시 구성된 여성성,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노동 과정들의 말소, 영화와 영화 상영 과정을 둘러싼 기계장치를 지워버리는 에로틱한 매혹을 전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화려함. 이 모든 것들은 서로 교차할 수 있다. 특히 기계적이고 대중적이며, 성애화되어 있지만 검열당한 상업적 영화를 문제시하는 미학적 아방가르드의 정치학에서. 더 나아가 숨겨진 문화적 생산 과정들을 가시화하려 하는 미학은 유비관계에 의해, 혹은 더 낫게는 상동관계에 의해 자본주의적 상품 생산의 삐까뻔쩍함 의해 은폐되어 있는 노동력을 가리킬 수 있다. 브레히트의 영향력은 정신분석학, 모더니즘 기호학, 그리고 알튀세르가 재해석한 마르크스주의를 만났다. 이 시기의 이론과 실천 모두는 영화 매체의 탈물신화를 갈망했었다. 이는 기계 시대가 막을 내리는 순간에 매달려있었던 안건이었다.
70년대 영화 이론은 정치적이고 논쟁적이었다. 70년대 영화 이론은 이러한 정신으로 총체적 믿음의 체계로서 작동하는, 지식과 믿음의 평형을 유지하는 능력이 지출되는 곳에서 작동하는, 그러한 영화적 환영을 논쟁에 부쳤다. 그리하여 물신 개념은 부인의 궁극적 의미를 생각하지 않으면서 언급되었었다. 아마 이러한 혼동은 70년대 동안 환영에 대한 할리우드의 투자가 더 혼란스럽게도 사실주의 논쟁과 혼합되어버렸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영화의 사실주의적 전통은 엔터테인먼트와 (섹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게 아닌) 에로틱한 볼거리, 그리고 환영의 유약성에 관한 일반적인 형식인 스타 시스템에 의해 특징지어지지 않는다. 사실주의는 고도의 영화 상품화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는 일을 대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영화가 그려내고자 하는 사회구성체와 그 재현 사이의 간극을 닫으려 하는 영화의 사실주의 열망은 구성된 것이라는 이미지의 본성과 무엇보다도 기호의 복잡성들을 강조하는 오늘날 논의들의 분명한 희생자가 되어버렸다. 모더니즘 미학은 기호의 물질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작업만을 지향했던 것이 아니었다. 지시체(reference) 그 자체의 가능성과 ‘실제 세계’를 지시하는 일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과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론 모두에게 공격당했다.
물론 미적 전략으로서 사실주의를 거부하는 일과 여성 이미지에 대한 페미니즘의 비판 사이에는 공통의 이해관계가 존재한다. 페미니즘 미학에서 기호와 지시체 사이의 간극을 개념화했던 이론들은 해방의 원천이었다. 기호학과 정신분석학 이론은 이러한 개념적 해방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떠맡고 있었다. 단지 의미에 내재하는 간극을 열어젖히는 것뿐만 아니라, 스크린 위에 주어지는 기표를 분명한 사회적 세계 속 기의로부터 분리시키는 전치의 언어를 해독하는 이론을 제공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페미니즘 정신분석 이론에서 이미지는 자신이 지시하는 것과의 닮음이 필연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시한다. 이미지는 기표의 전치 과정을 통하여 그것을 만들어낸 사회적 환상의 취약한 혹은 고도로 격양된 영역들을 지시한다.
의미를 불안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 아래에서 지시의 문제는 길을 잃는다. 그와 동시에 페미니즘에서 기호학과 정신분석 이론의 영향은 포스트모던 미학의 광범위한 영향력 및 의미의 불안정성과 의미의 무한한 지연이 주는 쾌락에 부합하게 된다. 역사가 담론의 구성이라는 결정적인 지점을 만들어내는 와중에 포스트모던 이론은 표상의 체계들을 사회적 생산의 장소와 다시 연관시키는 일을 곤란하게 만들어버렸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이러한 문제를 요약하고 다시금 공식화한다 :
부재 원인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강조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도 불구하고 알튀세르의 주장이 정전화된 공식처럼 인용될 때 간과되곤 하는 점은 그가 역사는 하나의 텍스트에 불과하며 ‘지시대상(referent)’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유행하는 결론을 결코 이끌어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수정된 정식화를 제안하고자 한다. 즉 역사는 텍스트가 아니며, 지배적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서사도 아니지만, 부재 원인으로서, 텍스트의 형식을 통해서가 아니면 우리에게 접근 불가능하며, 역사와 실재에 대한 접근은 반드시 선행하는 텍스트화, 정치적 무의식 속에서의 서사화를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의 지시(reference)에 대한 거부는 아마도 ‘포스트-산업’ 경제 형성체라 불리는 오늘날의 변화의 징후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포스트 모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시대에 문화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 사이의 지속적인 연결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로 되돌아가는 게 필요할지도 모른다. 사실주의 미학이 기계시대와 산업 자본주의 경제와 특정적인 형식적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은 결국 새로운 경제와 금융 구조들의 반영일 수 있다. 이러한 각도에서 지시의 문제는 이미지와 미학이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학 그 자체로 우리를 되돌려보내주는 것이다.
제1세계에서 산업 자본주의가 보여줬던 위기의 징후들처럼, 금융 자본주의는 번창하고 있고 한 단계 더 진보된 자본가는 화폐 없이 화폐를 만들어낼 수 있고 노동 계급의 노동력에 의해 생산된 가치 없이 잉여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경제를 장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환투기가 노동력 착취보다 더 높은 이윤을 거두게 해주는 이 진보한 자본주의 경제에서 산업자본에 대한 금융자본의 승리는 경제적 관계 속에서 준거(reference, 準據)의 문제를 제기하게 만든다. 화폐, 다른 무엇 보다 더 가치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그것은 또한 이제 상품들이나 상품 생산 그 무엇도 필연적으로 재현하지 않는 교환 과정 속으로 포섭되어버린다.
오늘날 미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은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문화에서 지시성의 상실이 그 자체로 경제 구조의 변화와 전환을 초래한다고, 즉 의사소통이 생산보다 상위에 서게 되는 고유한 자본주의의 도래를 알리고 있다고 논의가 진행된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패권을 유지하는 정치 경제적 권력의 불균형과 가치를 발생시키는 노동 계급의 노동력 둘 모두에 의존하고 있었던 산업 시대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진화했었다. 20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산업 경제학과 금융 경제학은 마르크스가 분석했던 산업과 금융 구조들이 지난 세기가 경과하는 동안 새롭게 변형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통해 분석될 수 있다. 전자 미디어의 시대가 영화적 기계장치를 대체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표상 체계들의 정치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중요성은 엔터테인먼트와 커뮤니케이션 산업의 성장과 함께 더욱 증가하였다. 이 산업들은 단지 동시대 자본주의에서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중요성을 지니게 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준거의 약화와 볼거리는 산업의 확장과 그들의 호소에 있어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 이론들이 정치적 경제적 현실성들의 베일을 벗기는 데에 치중하였던 동안, 정신분석학과 기호학의 영향력은 질문 속으로 ‘실재(Real)’를 현실적으로 접합해낼 가능성을 제기했다. 분석될 수 있는 모든 것은 담론과 표상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이고 미학적인 전환이 그 자체로 자본주의적 기술과 경제학의 물질적 현실을 포함하는 변화와 발전을 반영하고 있음 또한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자유롭게 부유하는 기표 그 자체는 경제적 토대에서의 변화들의 기표이기도 할 것이다. 사회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을 포괄하며 결정하는 권력이 경제적인 것에 있음을 밝히는 마르크스주의의 원칙들은 그 어느 때보다 유의미하다. 마르크스 자신이 결코 예견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진화하고 뒤틀린 자본주의라 할지라도 말이다. 역사가 표상들 바깥에서 구성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러한 표상들은 그 자체로 징후들이다. 그것들은 궁극적이거나 고정된 의미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정신분석학적으로 해독해 내어야 할 어떤 사회적 곤경의 지점들에 관한 단서를 제공한다. … 때로는 궁극적으로 약호의 완결된 의미(sense)를 거의 만들어내지 않을지라도.
한때는 어떤 부정적인 이데올로기적 내포의미들을 실어나르는 것이었던 물신이 다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다. 프로이트가 페티시즘의 특징으로 여겼던 부인의 구조는 정신분석학과 기호학 이론의 문제틀을 버리지 않고도 지시의 곤경을 재형성할 수 있는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정신분석 이론은 페티시적 부인과 무의식의 언어 속 전치의 과정을 구분하고 있다. 양자의 경우 모두에서 기호와 지시체 사이의 연결은 사라지지만, 부인 개념은 지시체가 전치되는 동안에도 지시체에 관한 질문을 함축하고 있을 수 있다. 부인과 억압을 구분하는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은 지점을 지적한다 :
자아가 동일한 인생 시기에 자주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외부 세계의 요구에 대해 자신을 방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이 방어는 현실의 이러한 요구에 대한 지식을 주는 지각의 부인(disavowal)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부인은 아주 자주 일어나며, 페티시증자에게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부인을 연구할 때마다 그것은 절반의 조처,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불완전한 시도임이 입증된다. 부인은 언제나 인정에 의해 보충된다. 언제나 두 개의 반대되고 서로 독립된 태도가 형성되는데, 이로써 자아의 분할이라는 사실이 발생한다. 결과는 다시금 둘 중 어느 것이 더 큰 [물리적] 강도를 갖느냐에 달려 있다.
‘페티시증자가 아니더라도’ 발생하기는 하지만, 부인의 정신적 과정은 프로이트가 페티시즘에 관해 논의할 때 가장 먼저 정교하게 구성된다. 부인은 자신의 구조 한에 원인과 효과 모두를 담아낸다. 페티시는 정신적 고통의 장소를 징후적으로 알리는 붉은 깃발처럼 자신의 고유한 트라우마적 역사를 알려준다. 정신분석학적 영화이론은 대중문화가 유사하게 징후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거대한 스크린에 집합적 환상과 불안, 공포와 다른 효과들이 영사될 수 있는 것처럼, 그것[정신분석학적 영화이론]은 문화의 맹목점에 관해 말하고 사회적 트라우마의 질료를 왜곡과 방어기제와 변형을 통해 분명하게 만드는 형식들을 찾아낸다. 다나 폴란(Dana Polan)은 다음과 같이 쓴다 :
대중문화는 포스트모던 문화의 한 종류가 되었다. 사회적 의미의 안정성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되는 일 없이) 어떤 거대하고 극적인 쇼 속으로, 원인과 효과의 분리 속으로, 도구들의 매혹에 빠져버리는 와중으로, 의미 충만한 결말들에 수반되는 무관심 속으로 융해되어버린다. 이러한 볼거리는 어떤 풍부하게 보기(rich sight)의 약속을 만들어낸다 : 개개의 물신화된 사물들을 보는 것이 아닌, 본다는 것 그 자체가 풍부함(richness)인 보기, 폭넓은 경험의 지반을 이루는 것으로서의 보기.
이러한 ‘풍부하게 보기’의 미학은 원인과 증상 사이의 부서지기 쉬운 연결 고리를 지워버린다. 전치의 과정은 미적 쾌락을, 지시체를 마주하여 방어기제로서 행위하는 것이 아닌, 지시체를 숨기는 데에 따르는 형식적 즐거움을 그 동력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만 같다. 오늘날 ‘풍요로운 보기’ 미학의 탁월함은 대중문화에 작동중인 부인의 구조 바깥에서 전개되어 왔다. 무엇보다 부인은 원인과 효과 사이의 가느다란 연결 고리를 유지한다. 기표들의 시각적 과잉과 전치에 대한 투여가 원인과 효과 사이의 관계를 은폐하라는 요구를 은폐하게 만들 수 있는 굉장히 강력한 직조물을 만들어내는 동안에 말이다. 다시 말해 부인의 미학은 지시체의 문제로부터 의미를 굉장히 멀리 이동시키는 전치에 관한 형식적 근거를 수월하게 제공할 수 있다. 또한 사회적 고통의 장소이자 부인 과정이 발생하는 장소인 맹목점들은 [전치되어] 나아가는 와중에 사라져버린다. 그리하여 이제 산업적 생산 과정의 부인은 산업 생산 그 자체의 붕괴를 숨겨버린다.
생산 과정의 가시성 혹은 비가시성은 영화 이론 논쟁에서 결정적인 장소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모델을 확장시키자면, 영화계의 디트로이트인 할리우드가 자신의 생산 역학을 지워버린 장소 근방에서 자신의 특징적인 스타일을 진화시키는 일은 논리적이라 할 것이다. 하나의 상품으로서 할리우드 영화는 또한 자기발생적인 매혹의 사물로서 시장에 나타났으며, 장르의 축일이 지속되는 와중에도 스타들과 스튜디오 시스템과 쉬이 밝혀낼 수 있는 그 어떤 감독의 날인도 지워버린다. 그렇게 영화의 볼거리라는 속성은 스크린 위의 아름답게 광택이 나는 표면으로 융합된다. 생산 과정을 전면화하려는 브레히트적 관심이나 스크린의 마술적인 광택을 ‘탈신성화’하려는 정치적인 욕망을 예고했던 베르토프의 형식주의는 놀랄만한 것이 못 된다. 또한 1960-70년대 아방가르드의 미학은 장인과 같은 작가의 가시적 현전과 영화가 의존하고 있는 기계적 과정을 스스로 알리는 일 주변에서 조직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이미지가 발생하는 기계적 과정 너머에, 그보다 상위에 있는 의미 생산의 체계이자, 기꺼이 믿음을 유지하면서 지식을 유예하는 정신을 가지고 유희하는 특별한 능력과 함께하는 의미 생산 체계이다. 생산 과정은 이미지를 낳으며, 이미지의 구성은 매혹을 낳는다. 페미니즘 영화 이론은 영화가, 그곳에서만은 아니지만, 여성 이미지에서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페티시적 사물을 발견한다고 주장해왔다. 성(sexuality)의 기표로서 에로틱한 여성성 이미지는 다시 한번 가교 기능을 수행한다.
영화의 페티시즘에 관한 프로이트적 분석이 영화이론에서 아주 긴 역사를 가지며, 이러한 주장의 한 갈래는 이곳에서의 논의에 특히 유의미하다. 스크린 위의 여성 이미지는 어느 정도는 다시 한번 구조적 상동관계의 결과로서 특수하게 극적인 강렬함을 성취한다. 정교하게 구성되었고, 고도로 인공적이고, 잘 차려입혀졌고, 메이크업을 받은 외모로 무비 스타의 ‘표면’이 포장되어 있는 것처럼, 그녀의 표면은 영화 자체에 맞서는 화려함을, 눈을 사로잡아 영화가 생산되는 역학으로부터 주의를 돌려놓는 매혹을 제공한다. 이 깨지기 쉬운 껍데기는 상처가 있는 지점에 가면을 씌우고 아름다움으로 결여를 뒤덮는다는 점에서 페티시 그 자체의 환등상적 공간을 공유한다. 가령 호러영화 장르에서 아름다운 뱀파이어가 태곳적의 점액질 물체로 분해되는 장면에서는 그것[호러 장르]의 이항 대립이 폭로될 수도 있는 균열이 발생한다. 혹은 필름 누아르에서 여주인공의 아름다움이 지닌 세속적인 권력이 그녀의 파괴적이고 거세하는 힘들을 가리고 있을 때도 그렇다. 정신분석 이론은 이러한 현상들에 관하여 공간적 매핑을 할 수 있고 위상학을 쓸 수 있는 두 가지 해석을 제공한다. 그중 하나는 프로이트가 다음과 같이 묘사하는 친밀한 두려움(the uncanny, [der unheimlich])이다 : ‘전혀 새롭거나 생경한 것이 없는 현실인데도 무언가 낯설고 정신 속에서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졌으나 억압 과정을 거치는 등 소외되어왔던 것.’ 여기서 그는 주체가 이전에 살았던 집, 자궁을 연관시킨다. 바바라 크리드(Barbara Creed)가 지적하는 것처럼, 이러한 친밀한 두려움의 공간은 또 다른 친숙하고도 두려움을 주는 집으로 우리를 이끈다. 크리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이 집에는 유령이, 혹은 개인을 어린 시절 아마도 어머니와 관계를 맺었던 태아 시절로 되돌려놓는 어떤 기억의 흔적이 떠돌고 있다.’
두 번째 정신적 현상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비체 개념, 즉 어린 아이가 자신감(self-sufficiency)과 주관성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어머니의 신체에 투사하는 혐오에 관한 것이다. 이것들은 정신적 취약성의 지점이며, 거세 불안에 부가되는 것이자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여성의 아름다움이라는 겉껍질이 친숙한 두려움을 주는 어머니의 신체, 즉 비체를 드러내기 위해 붕괴될 때, 그것은 마치 페티시가 스스로 실패하게되는 것과 같다. 구조의 이중성은 오직 잔여물로서만 연결되어 있는 이미지들과 관념들이 마치 자동문처럼 그 사이의 간극을 메우게끔 만들기 위한 전치작업들을 가능하게 만든다. 환등상적 공간의 지형은 의미 속에서 발생하는 전환을 위한 도관처럼 작동한다. 페미니즘 영화 이론이 스크린과 시장 사이의 가교라고 최근까지 분석해왔던 것은 이러한 표면의 성, 그러니까 여성 몸에 관한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 불안을 전치한 성이다. 시장은 또한 아주 탁월한 소비자로서 여성이 그녀 고유의 성적인 표면을 가부장제가 의지하고 있는 여성적인 것에 관한 금지들에 맞서 입게 되는 물신적 방어구로 만들어내기 위해 상품들을 소비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페티시의 원천인 신체는 어머니의 신체, 친밀한 두려움을 주는 태곳적 어머니의 몸이다. 마르크스에게 물신숭배의 원천은 가치로서 노동자의 노동의 말소이다. 양자는 상품 문화에서 말할 수 없는 것, 재현될 수 없는 것이 된다 : 어머니의 몸의 억압, 가치의 원천으로서 노동력의 억압. 이 두 가지 테마는 제각기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 물신/페티시 개념 속으로 번져나갔다. 이들은 (이미지 속에서) 성차와 가치의 구조를 은폐한다. 즉 그들 스스로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상품의 성애화된 스펙타클과 여성적인 것의 에로틱한 스펙타클을 연결하는 전치과정 및 지형을 통하여 그들은 서로 강화된다. 이 두 물신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데, 서로 다른 기입(inscription)의 문제가 그것이다. 하지만 둘 모두 스튜디오 시스템 하의 할리우드 영화에 핵심적이며 그 안에서 접합된다. 과잉 기입된 기표와 기표가 기입되지 않은 것을 한 데 묶어버리는 논리가 그곳에 있다. ‘풍부하게 보기’를, 스펙타클을 강요하는 일은 질문이나 호기심으로부터 주의를 돌려버리게 만든다.
하지만 ‘페티시즘의 미학’은 프로이트 모델에서는 부인의 구조(‘잘 알고 있어, 하지만...’)로부터 나오는데, 이는 보여진 것과 지식으로 분출되는 위협 사이에서의 진자운동을 만들어낸다. 위험과 위기는 또한 신나는 것이다. 서사적 층위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식적으로 할리우드 영화는 ‘정치적 모더니즘’이라고 잘 알려진 것보다는 지식과 믿음 사이의 진자운동의 활용을 더 많이 만들어낸다. 이 시스템은 자의식을 자신의 매력으로 지어냄으로 만들어졌다. 그 스스로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눈속임 효과는 포스트모던 미학의 핵심이다. 자기참조, 상호텍스트적 지시, 직접 말 걸기, 궁궁극적으로 지각을 불안정화시켜 쾌락을 얻을 수 있는 방식에 관한 흥미 등등. 할리우드 영화에서 부인의 미학을 되돌아보는 일은 여전히 상징적 질서 속에 있는 정치적 억압과 계급과 여성의 블랙홀을 재접합하는 시도이다. 하지만 또한 사회적 상상계(the social Imaginary) 속에서 원인과 효과 사이의 관계를 재고하는 일은 점차 탈구되어가는 표상과 역사적 사건 사이의 관계를 점차 되돌리는 일이기도 하다. 볼거리는 오늘날 자본주의적 커뮤니케이션 체계 속에서 급격히 확산된다. 그와 동시에 전쟁, 기아, 빈곤, 질명, 인종주의 등의 형태를 띤 (인간 사유의 비합리적인 부분이라는 끈덕지게 지속되는 징후가 어느 때보다 증가하고 있는) 역사적 현실은 동시대 이론이 못 본 척 할 수 없는 긴급함으로 분석을 요구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