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러시아문학사에서 ‘끝의 포에마’, 러시아어로 하자면 ‘Поэма конца’라는 제목을 가진 작품은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20세기 초반 러시아 미래주의자였던 바실리스크 그네도프의 「끝의 포에마」인데, 열다섯 편의 ‘포에마’로 구성된 연작 「예술에 죽음을」의 마지막에 나오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열네 편의 ‘포에마’에는 글이 거의 없습니다. 있어도 우리가 알 수 없는 말들만 있습니다. 열다섯 번째 포에마인 <끝의 포에마>에는 제목만 있고 백지입니다. 그네도프는 이 연작을 무대에서 낭송했다고 하는데요, 당시 이를 본 블라디미르 퍄스트는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마지막 포에마에는 말이 없었다. 오직 팔의 제스처 하나만 있었다. 그네도프는 머리 위로 손을 빠르게 들어 올리더니 홱 아래로 그었고 그 다음에는 오른쪽 옆구리로 그었다.”[각주:1]그네도프는 이런 식으로 예술의 종말을 고한 것입니다. 직접 따라해 보실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살펴볼 츠베타예바의 작품 역시 제목이 ‘끝의 포에마’입니다. 츠베타예바는 작품 제목에 ‘포에마’라는 말을 넣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장르 상 포에마로 분류되는 작품들 중에는 ‘포에마’가 제목에 쓰인 경우가 많습니다. 산의 포에마, 끝의 포에마, 계단의 포에마, 공기의 포에마 등등.
역자후기에도 적었지만 ‘포에마’라는 말은 우리말로 번역하기 참 애매합니다. 영어로는 보통 narrative poem, epic poem이라고 옮기고, 독일어로는 Epos (cf. Epik(서사문학)의 한 갈래)라고 옮깁니다. 이 영어와 독일어를 우리말로 옮기면 ‘서사시’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말로 ‘서사시’라고 하면 민족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민족서사시나 영웅서사시, 또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아>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포에마’와 ‘서사시’를 구분합니다. 러시아 민속문학에서 영웅서사시에 해당하는 것은 ‘빌리나(былина)’라고 하고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 같은 작품들은 ‘에포페야(эпопея)’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츠베타예바의 이 작품을 가리켜 ‘서사시’라고 한다면, 그래서 제목을 ‘끝의 서사시’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작품과 관련하여 어쩔 수 없이 영웅서사시와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저는 이 작품의 장르를 가리켜 ‘포에마’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포에마’의 어원이 그리스어로 ‘창작물’을 뜻하는 poiema이므로 제목은 가장 중립적인 <끝의 시>라고 옮겼습니다.
‘포에마’를 ‘서사시’라고 부르면 발생하는 문제가 또 있습니다. 19세기 초반에는 역사적 이야기를 운문으로 서술하는 ‘포에마’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 슈젯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서정적 측면이 훨씬 강한 ‘포에마’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츠베타예바의 이 작품입니다. 츠베타예바의 작품에 슈젯은 있지만 극도로 단순화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어느 날 갑자기 이별을 하게 되고 연애할 때 함께 있었던 장소를 다녀봅니다. 내러티브, 즉 서사의 핵심이 되는 사건은 단 하나, 곧 이별입니다. 시적 화자는 열 네 편의 시 각각에서 이별이라는 사건을 다양한 방식으로 대합니다. 운율과 어조도 계속 변합니다. 어떤 시는 풍자시 같기도 하고, 어떤 시는 슬픔을 토로하는 비가(elegy) 같기도 하고, 어떤 시는 집시풍의 노래 같기도 합니다. 러시아의 문학이론가 미하일 바흐친은 서사의 핵심으로 ‘증인이자 판관’으로서의 서술자를 꼽습니다. 서술자는 자신이 목격하거나 알고 있는 사건들에 거리를 두고 그것들을 묶어서 에피소드들을 만듭니다. 거기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끝의 시>에서 화자는 이별이라는 사건에 대해 거리를 두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화자에게 닥친 일이며 그것을 겪어내는 것 자체, 그 과정에서 화자가 드러내는 몸짓과 목소리가 곧 「끝의 시」의 열 네 편의 시들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1인칭시점의 소설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1인칭시점의 소설에서도 결국 서술자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전달하고 그것과 거리를 두며 반추해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푸시킨의 「집시들」, 레르몬토프의 「악마」와 같은 19세기 초반의 낭만주의 포에마들과 츠베타예바의 「끝의 시」는 어떤 연관을 갖는 것일까요? 러시아의 문학이론가 나탄 타마르첸코는 주인공이 두 시간의 충돌 가운데 있고, 주체는 동시에 두 세계의 특성을 지니며 갈등하는 것을 ‘포에마’라는 장르의 핵심으로 봅니다.[각주:2]푸시킨의 「집시들」에서 주인공 알레코는 갑갑한 문명의 세계와 자유로운 집시의 세계 사이에 걸쳐 있고, 둘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레르몬토프의 「악마」에서도 주인공 악마는 온전한 악이 되지 못하고 인간을 사랑하며 갈등합니다. 즉, 포에마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느냐보다 이러한 두 세계, 두 시간의 충돌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츠베타예바의 작품에서도 두 세계, 두 시간의 충돌이 보입니다. 이별 전의 세계와 이별 후의 세계, 즉, 끝 이전의 세계와 끝 이후의 세계가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츠베타예바의 포에마는 푸시킨과 레르몬토프의 포에마에 비해 서사적인 측면이 약하고 서정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포에마라는 장르의 핵심만큼은 간직하고 있는 셈입니다.
「끝의 시」의 장르를 살펴보았으니 이번에는 시의 리듬과 시의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첫째, 「끝의 시」의 율격은 매우 다양합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율격은 강약격, 약강격 같은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5음보 약강격으로 쓰였습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한 행에 약강격 음보가 다섯 개 있으므로 5음보 약강격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끝의 시」에서 예를 가져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잃을 것이
없다.끝에 끝!
난 쓰다듬고¯쓰다듬어¯
얼굴을 쓰다듬어. (223쪽)
nEt propAzhi (1010)
mnE. KonEts kontsU! (10101)
glAzhu―glAzhu―(1010)
glAzhu po litsU. (10101)
라틴 알파벳으로 음차해 보겠습니다. 강세가 있는 모음은 대문자로 표시했고 보기 편하도록 강세는 1, 강세 아닌 모음은 0으로 도식을 만들어보았습니다. 홀수 행은 2음보 강약격으로, 짝수행은 3음보 강약격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에서 포에마는 4음보 약강격으로 쓰입니다. 푸시킨의 「집시들」과 레르몬토프의 「악마」의 대부분의 행들도 이 율격으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끝의 시」에는 아주 다양한 율격들이 쓰였습니다. 러시아의 어문학자 뱌체슬라프 이바노프는 「끝의 시」가 총 열 가지 율격들로 쓰였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각주:3]그만큼 열네 편의 시들의 리듬은 서로 독립적입니다. 이 문제는 러시아어를 알아야 자세히 살펴볼 수 있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이 작품의 율격이 다양한 만큼 저 역시도 우리말의 리듬을 시마다 다양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는 점은 밝혀두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시에는 율격과 각운이 없다보니 츠베타예바의 리듬을 그대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리듬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저는 러시아 시 리듬 연구의 대가이신 유리 오를리츠키 선생님의 세미나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분께서 츠베타예바의 시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대시와 하이픈이 시의 율격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이픈이나 대시는 음절로 세지 않기 때문에 강약격이냐 약강격이냐는 결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소리 내어 읽을 때, 대시가 있는 곳에서 우리는 한 번 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번역할 때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Оди―накового
моря―рыбы!Взмах:
...Мертвой раковиной
Губы на губах.
한
바다의―생선들!몰아쳐 오르면:
...죽은 조개가 되어
입술을 덮치는 입술.(224, 225쪽)
원문의 단어와 대시를 살린다면 “한 / 바다의―생선들!”이 아니라 “같-은 / 바다의―생선들!”이 되어야 합니다. 편집자 선생님께서도 여기에 대시가 빠져있다고 지적해 주셨는데요, 원문 첫 행의 리듬이 균질하지 않습니다. 러시아어 소리 나는 대로 원문을 읽어보자면 ‘아디―나꺼버버’로 대시 이전이 짧고 뒤가 깁니다. 그런데 ‘같―은’이라고 하면 대시의 앞과 뒤가 균질해져버립니다. 그래서 차라리 단어를 1음절짜리인 ‘한’으로 바꾸었고, 한 글자로 끝나며 행갈이 때문에 잠시 멈추어야 하는 첫 행의 리듬이 다소 막막하게 들리길 바랐습니다. 독자 여러분들께서는 어떻게 느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리듬에 대한 이야기도 어느 정도 했으니 이번에는 「끝의 시」의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시의 사상이라는 말 자체가 참 우습습니다. 시는 철학처럼 하나의 체계된 사상으로 정렬될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이 작품에서 가장 머릿속에 남는 구절, 곱씹어 보며 그 의미를 되짚어보아야 할 구절을 하나 떠올려본다면 아무래도 다음일 듯합니다. “모든 세계 중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이 세계에선 / 시인이 유대인이다!” 역자후기에도 썼듯이 파울 첼란은 1963년에 나온 시집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Die Niemandsrose)』에 수록된 시 「타루사에서 온 책과 함께(Und mit dem Buch aus Tarussa)」에 이 구절의 러시아어 원문을 제사로 붙였습니다. “Все поэты жиды / (Marina Zwetajewa)” 이 제사를 직역해 보면 “모든 시인은 유대인이다”인데요, 첼란은 ‘모든’이라는 말을 넣어서 버림받은 시인들 사이의 연대감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에드몽 자베스의 1963년 시집 『질문의 책 제 1권(Le Livre des questions, t. I)』에도 유대주의와 글쓰기의 연관성이 언급됩니다. “책으로부터 태어난 한 종족...”, “유대인이 되는 어려움, 그것은 글을 쓰는 어려움이나 똑같다. 유대주의나 글쓰기나 똑같이 기다림이요, 희망이요, 마모이기에.”[각주:4]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 수록된 에세이 「에드몽 자베스와 책의 문제」에서 “본질을 향해 가는 일종의 말없는 이동에 의해 유대족의 상황은 시인의 상황이 된다.”[각주:5]라고 말합니다. 저는 아직 자베스가 말하는 유대인과 시인의 공통점을 츠베타예바의 생각과 자세히 비교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마도 자베스의 『질문의 책』을 꼼꼼히 읽어봐야 접근할 수 있는 문제이겠지요. 읻다에서 출간된 자베스의 『예상 밖의 전복의 서』(최성웅 옮김, 2017)를 참고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세 시인의 비슷한 발언들에 대한 숙고는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두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앞으로 더 고민해 볼 문제입니다. 「끝의 시」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츠베타예바가 죽기 직전에 쓴 시 두 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호박 목걸이, 사전, 등불
시선집의 마지막에 실린 두 편의 시는 사실 시간 순서상 바뀌어져 있습니다. 273쪽의 “첫 줄을 되풀이한다...”는 1941년 3월 6일에, 279쪽의 “호박 목걸이...”는 같은 해 2월에 쓴 것입니다. 일곱 권짜리 전집에 따르면 “첫 줄을 되풀이한다...”는 츠베타예바가 생전 마지막으로 쓴 시이고 “호박 목걸이...”는 바로 그 직전에 쓴 시입니다. 두 시 모두 츠베타예바의 ‘백조의 노래’인 셈입니다. 그런데 저는 “호박 목걸이...”를 마지막에 배치했습니다. 시의 길이나 여운이 책의 마지막에 더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시선집에 수록된 순서대로 츠베타예바가 마지막으로 쓴 시부터 읽어보겠습니다.
***
Я стол накрыл на шестерых…
Всё повторяю первый стих
И всё переправляю слово:
—≪Я стол накрыл на шестерых≫…
Ты одного забыл—седьмого.
Невесело вам вшестером.
На лицах—дождевые струи…
Как мог ты за таким столом
Седьмого позабыть—седьмую…
Невесело твоим гостям,
Бездействует графин хрустальный.
Печально—им, печален—сам,
Непозванная—всех печальней.
Невесело и несветло.
Ах! не едите и не пьете.
—Как мог ты позабыть число?
Как мог ты ошибиться в счете?
Как мог, как смел ты не понять,
Что шестеро (два брата, третий—
Ты сам—с женой, отец и мать)
Есть семеро—раз я́на свете!
Ты стол накрыл на шестерых,
Но шестерыми мир не вымер.
Чем пугалом среди живых—
Быть призраком хочу—с твоими,
(Своими)…
Робкая как вор,
О—ни душине задевая!—
За непоставленный прибор
Сажусь незваная, седьмая.
Раз!—опрокинула стакан!
И всё, что жаждало пролиться,—
Вся соль из глаз, вся кровь из ран—
Со скатерти—на половицы.
И—гроба нет! Разлуки—нет!
Стол расколдован, дом разбужен.
Как смерть—на свадебный обед,
Я—жизнь, пришедшая на ужин.
…Никто: не брат, не сын, не муж,
Не друг—и всё же укоряю:
—Ты, стол накрывший на шесть—душ,
Меня не посадивший—с краю.
6 марта 1941
***
나는 여섯 사람을 위해 상을 차렸다…
첫 줄을 되풀이한다,
단어도 고쳐본다:
— “나는 여섯 사람을 위해 상을 차렸다”…
너는 한 사람을 잊었다 — 일곱 번째 사람.
여섯이서는 즐겁지가 않다.
얼굴들마다 — 흐르는 빗줄기…
어떻게 너는 그런 식탁에 앉아
일곱 번째 사람을 잊었는지 — 일곱 번째 그 여자…
너의 손님들은 즐겁지가 않다,
목이 긴 크리스털 술병도 소용없다.
그들도 — 슬프고, 너도 — 슬프고,
초대받지 못한 그 여자가 — 제일 슬프다.
즐겁지 않고 밝지도 않다.
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시라.
— 어떻게 너는 숫자 하나를 잊었는가?
어떻게 너는 셈을 잘못할 수 있는가?
어떻게 너는, 감히 알지 못하였는가,
여섯은 곧 (형제 둘, 세 번째는 —
너 자신— 아내, 아버지, 어머니)
일곱이라는 것을 — 바로 내가 세상에 있는데!
너는 여섯 사람을 위한 상을 차렸지만,
세계는 여섯 사람으로 끝나지 않는다.
산 사람들 가운데 허수아비가 아니라 —
허깨비가 되고 싶다 — 너의 사람들과 함께,
(나의 사람들과 함께)…
도둑처럼 수줍은 나는,
오 — 한 사람도 건드리지 않으면서! —
차리지 않은 식기구 한 벌 앞에
초대받지 않은 일곱 번째 여자로 앉는다.
자! — 잔을 엎었다!
쏟아지기를 갈망하던 모든 것, —
눈에서 쏟아지는 소금, 상처에서 흐르는 피 —
식탁보에서 — 마룻바닥으로.
관(棺)도 — 없다! 이별도 — 없다!
식탁은 마법에서 풀려나고 집은 잠에서 깬다.
죽음이 — 결혼 피로연에 찾아들 듯,
나는 — 저녁 식탁에 도착한 삶.
…아무도: 형제도, 아들도, 남편도,
친구도 아닌 — 나는 책망한다:
— 여섯 — 영혼을 위해 상을 차린 너,
모서리에조차 — 나를 앉히지 않은 너.
1941년 3월 6일
시선집의 역주에도 달았듯이 “첫 줄을 되풀이한다...”의 제사는 아르세니 타르콥스키의 시 “여섯 사람을 위한 상이 차려졌다...”의 첫 줄을 가져온 것입니다. 아르세니 타르콥스키는 <솔라리스>, <거울>, <희생> 등으로 유명한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아버지입니다. 시인 아르세니 타르콥스키는 모스크바로 돌아온 츠베타예바와 우정 어린 관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다음은 타르콥스키의 시 “여섯 사람을 위한 상이 차려졌다...”를 읽어보시지요.
아들인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왼쪽)와 아버지인 시인 아르세니 타르콥스키(오른쪽)
***
Меловой да соляной
Твой Славянск родной,
Надоело быть одной ―
Посиди со мной...
Стол накрыт на шестерых,
Розы да хрусталь,
А среди гостей моих
Горе да печаль.
И со мною мой отец,
И со мною брат.
Час проходит. Наконец
У дверей стучат.
Как двенадцать лет назад,
Холодна рука
И немодные шумят
Синие шелка.
И вино звенит из тьмы,
И поет стекло:
“Как тебя любили мы,
Сколько лет прошло!”
Улыбнестя мне отец,
Брат нальет вина,
Даст мне руку без колец,
Скажет мне она:
―Каблучки мои в пыли,
Выцвела коса,
И поют из-под земли
Наши голоса.
1940
***
석회가루 소금기 날리는
그리운 너의 슬라뱐스크,
홀로 있는 것이 지쳤을 테니 ―
나와 함께 앉자...
여섯 사람을 위해 상이 차려졌다,
장미며 크리스탈이며,
나의 손님들 가운데
비애와 애수.
나와 나의 아버지,
그리고 나와 형.
한 시간이 넘어간다. 마침내
문을 두드린다.
십이 년 전 그대로
손이 차갑다
유행지난 푸른 비단옷이
사각거린다.
어둠 속에 포도주가 쟁그랑거리고
유리창도 노래한다:
“우리는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세월은 또 얼마나 흘렀는지!”
아버지는 내게 미소 지을 테고,
형은 포도주를 따라줄 테고,
반지 끼지 않은 손을 내게 내밀며
그녀는 말할 것이다:
―구두 굽이 먼지투성이야,
곱게 땋은 머리도 색이 바랬어,
그러나 땅 밑에서 노래하는
우리 목소리.
1940
그런데 제가 나눠 드린 타르콥스키의 시의 첫 구절과 츠베타예바가 가져온 제사에서 차이를 발견하셨는지요?
네, 바로 츠베타예바가 타르콥스키의 시를 잘못 인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타르콥스키는 츠베타예바에게 이 시를 직접 낭송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츠베타예바는 타르콥스키가 들려준 시를 자기 방식대로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때, 츠베타예바의 착각 때문에 두 시는 큰 차이를 보입니다.
츠베타예바
Я стол
накрыл на шестерых… (jastOl | nakrYl | na she | sterYkh |)
01 01 00 01 (4음보 약강격)
“나는 여섯
사람을 위해 상을 차렸다…”
타르콥스키
Стол накрыт
на шестерых, (stOlna | krYtna | she ster | Ykh)
10 10 00 1 (4음보 강약격)
“여섯 사람을 위해 상이 차려졌다,”
첫째, 타르콥스키의 시는 4음보 또는 3음보 강약격으로 쓰였는데 츠베타예바는 그의 싯구를 4음보 약강격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시 전체는 4음보 약강격이 되었지요. 4음보 약강격은 푸시킨 이래 러시아 시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운율입니다. 러시아어에서는 단어의 강세가 보통 두 번째 음절 이후에 있다 보니 약강격은 러시아어의 특성에 가장 걸맞은 율격이 되었지요. 아마 이런 까닭에 츠베타예바가 타르콥스키의 시를 자연스럽게 4음보 약강격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습니다.
둘째, 츠베타예바는 왜 하필 ‘나’라는 단어를 집어넣었을까요? 타르콥스키의 시를 읽어보면 누가 상을 차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영어의 they, 불어의 on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어에서는 동사 3인칭 복수형을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여섯 사람을 위해 상을 차려놓았다”가 됩니다. 왜 츠베타예바가 굳이 ‘나’라는 단어를 집어넣었는지는 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이 시의 수신자인 타르콥스키를 구체적으로 가리키려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 시의 전면에 드러나는 ‘세계에 없는 나’, 또는 ‘세계가 놓친 나’에 대한 의식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정답은 없지만 타르콥스키의 시와 비교해서 읽어 보면 이 시는 여러 가지 의문들을 낳습니다.
츠베타예바의 이 시는 당장 공개되지 않고 그녀가 죽은 뒤 사십년이 흘러 1982년 잡지 <네바>(4호)에 실렸습니다. 타르콥스키는 잡지에 발표된 이 시를 보고 “이것은 나에게 마치 무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같았다(Для меня это было как голос из гроба)”[각주:6]라고 회상합니다. 타르콥스키가 괜히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의 시의 마지막 구절 “그래도 땅 밑에서 노래 부르는 / 우리 목소리”와 매우 유사한 발언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츠베타예바가 1913년에 쓴 시 “나와 닮은 그대가...”의 마지막 구절과도 유사합니다. “햇살이 그대를 비추네요! / 금빛 먼지를 뒤집어썼군요... / 지하에서 울리는 내 목소리 / 부디 겁내지 말아요.”[각주:7]마치 노인이 된 타르콥스키가 자신의 시를 보고 “무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같다고 겁먹을 것을 츠베타예바가 예언이라도 한 듯합니다. 물론 그녀가 타르콥스키의 발언을 예언했을 리 없겠지만 츠베타예바와 타르콥스키의 시적 대화를 보면 어디까지가 시이고 어디까지가 삶인지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아니면 두 시인 모두 삶의 텍스트에 시의 텍스트를 삽입한 것일 수도 있구요.
시선집의 마지막에 수록된 시는 짧으니 러시아어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얀타리(янтарь)’ - ‘슬라바리(словарь)’ - ‘파나리(фонарь)’라는 각운을 주의 깊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
Пора снимать янтарь,
Пора менять словарь,
Пора гасить фонарь
Наддверный…
Февраль I941
***
호박 목걸이를 벗을 때가 되었다,
사전을 바꿀 때가 되었다,
등불을 끌 때가 되었다
저기 문 위에…
1941년 2월
이 짧고 단순한 시에서 사실 저는 한 가지 난관에 봉착했었습니다. ‘호박’을 뜻하는 ‘얀타리’라는 단어 때문이지요. 저에게 ‘얀타리’라는 단어는 개인적으로 두 가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는 페테르부르크 근교 차르스코예 셀로에 예카테리나 여제가 세운 궁전에 있는 그 유명한 ‘호박방(янтарная комната)’입니다. 다른 하나는 모스크바에서 제가 다니는 대학교 앞에 있는 카페 주인이 숙취로 고생하는 저에게 약국에 가서 사 먹어보라고 했던 ‘호박산(янтарная кислота)’입니다. 아무튼 이 시의 첫 구절에는 ‘호박’이라는 단어 밖에 없습니다. ‘호박을 벗을 때가 되었다’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고민 끝에 ‘호박 목걸이’라고 옮겼습니다. 그런데 사실 ‘호박 반지’일 수도 있고, ‘호박 팔찌’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츠베타예바의 이 마지막 사진을 보고 ‘호박 목걸이’라고 옮겼습니다. 어쩌면 제가 너무 시를 시인의 삶에 끼워 맞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나는 당신이 좋아졌어요”
상투적인 말이지만 이렇게 츠베타예바의 시는 우리에게 질문들을 남겨둡니다. 그녀는 다소 시끄럽고 수다스러운 것 같지만 호박 목걸이인지, 호박 반지인지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츠베타예바의 시를 적극적으로 쪼개고 이어 붙여서, 즉 찢고 재봉질 하여서 우리의 츠베타예바를 만들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와 관련해 마지막으로 노래 하나만 더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러시아의 록가수 젬피라가 츠베타예바의 시 「안나 아흐마토바에게」의 마지막 연만 가져와 가사와 곡을 쓴 노래 <나는 당신이 좋아졌어요>입니다.
국립러시아문학사박물관의 인스타그램 계정(@literarymuseum)에 올라온 아흐마토바의 사진. 러시아 작가들이 한달 동안 자가격리를 했다면 어땠을지 상상하며 사진들을 모아서 만든 플래시몹 #QuarantineChallenge 중에서
안나 아흐마토바라는 시인은 이렇게 생겼구요, 츠베타예바와는 참 다른 포즈를 보여주고 있지요. 이 사진은 러시아의 문학박물관 인스타그램이 코로나 사태 때문에 온 국민이 자가격리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려고 만든 것입니다. 자가격리 1일차부터 28일차까지의 변화를 아흐마토바의 사진들로 재구성해 본 것이지요. 그럼, 젬피라의 노래를 들으시면서 젬피라의 가사와 츠베타예바의 시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Анне Ахматовой (Цветаева)
Узкий, нерусский стан —
Над фолиантами.
Шаль из турецких стран
Пала, как мантия.
Вас передашь одной
Ломаной чёрной линией.
Холод — в весельи, зной —
В Вашем унынии.
Вся Ваша жизнь — озноб,
И завершится — чем она?
Облачный — тёмен — лоб
Юного демона.
Каждого из земных
Вам заиграть — безделица!
И безоружный стих
В сердце нам целится.
В утренний сонный час,
— Кажется, четверть пятого, —
Я полюбила Вас,
Анна Ахматова.
11 февраля 1915
안나 아흐마토바에게 (츠베타예바)
커다란 책들 위로 드리운 —
좁다란, 러시아사람 아닌 몸매.
터키말을 쓰는 나라에서 왔을,
망토처럼 흘러내린 숄.
오직 끊어진 검은 선(線)만이
당신을 그려낼 테죠.
추위는 — 즐거움 안에, 더위는 —
당신의 우울 안에.
당신의 삶은 온통 — 오한,
어떻게 끝나게 될까요 — 당신의 삶?
구름 같은 — 이마가 — 어둡습니다
젊은 악마의 이마.
땅에 사는 모든 이를
당신은 가지고 놀겠지요 — 심심풀이!
그렇게 무기도 없는 시가
우리의 심장을 겨눕니다.
잠에 취한 아침의 이 시간,
— 네 시 십오 분일 텐데, —
나는 당신이 좋아졌어요,
안나 아흐마토바.
1915년 2월 11일
“Я полюбила Вас” (Земфира)
Медленно верно газ
Плыл по уставшей комнате
Не задевая глаз
Тех, что вы вряд ли вспомните
Бился неровно пульс
Мысли казались голыми
Из пистолета грусть
Целилась прямо в голову
Строчки летели вниз
Матом ругались дворники
Я выбирала жизнь
Стоя на подоконнике
В утренний сонный час
Час, когда все растаяло
Я полюбила вас
Марина Цветаева
“나는 당신이 좋아졌어요” (젬피라)
가스는 천천히 빈틈없이
흘렀다, 녹초가 된 방을 따라
당신은 기억 못할 사람들의
눈동자를 스치지 않으면서
맥박이 고르지 않았다
생각은 텅 빈 것 같았다
권총은 슬픔을 곧장
머리에 겨누었다
끄적거린 것이 아래로 떨어졌고
청소부들은 욕하며 싸웠고
나는 창가에 서서
살까 죽을까 고르고 있었다.
잠에 취한 아침의 이 시간
모든 것이 녹아내린 이 시간
나는 당신이 좋아졌어요
마리나 츠베타에바
어떠셨나요? 제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으시고 여러분도 부디 젬피라처럼 말하게 되셨길 바랍니다. “나는 당신이 좋아졌어요, 마리나 츠베타예바(Я полюбил Вас, Марина Цветаева)”. 감사합니다.
Пяст В. Встречи: Россия в мемуарах / Сост., вступ. ст., науч. подгот. текста, коммент. Р. Тименчика. М.: Новое литературное обозрение, 1997.С. 56. [본문으로]
Тамарченко Н.Д. ПОЭМА // Поэтика: слов. актуал. терминов и понятий/гл. науч. ред. Н. Д. Тамарченко. М.: Издательство Кулагиной; Intrada, 2008. C. 180. [본문으로]
Иванов Вяч.Вс. Метр и ритм в “Поэме конца“ М. Цветаевой // Иванов Вяч.Вс. Избранные труды по семиотике и истории культуры. Т.3: Сравнительное литературоведение. Всемирная литература. Стиховедение / Ин-т мировой культуры МГУ. М.: Языки славянской культуры, 2004. С. 652-657. [본문으로]
자크 데리다, 「에드몽 자베스와 책의 문제」, 『글쓰기와 차이』, 남수인 옮김, 동문선, 2001, 107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