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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시간의 시학횔덜린과 만델시탐 #2

 

아르테미 마군

번역 이 종 현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II. 무위의 작업[각주:1]

 

1797년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시 Die Muße, 무위를 쓴다.


Friedrich Hölderlin

Die Muße[각주:2]

 

Sorglos schlummert die Brust und es ruhn die strengen Gedanken.

Auf die Wiese geh' ich hinaus, wo das Gras aus der Wurzel

Frisch, wie die Quelle mir keimt, wo die liebliche Lippe der Blume

Mir sich öffnet und stum mit süßem Othem mich anhaucht,

Und an tausend Zweigen des Hains, wie an brennenden Kerzen

Mir das Flämchen des Lebens glänzt, die rötliche Blüthe,

Wo im sonnigen Quell die zufriednen Fische sich regen,

Wo die Schwalbe das Nest mit den thörigen Jungen umflattert,

Und die Schmetterlinge sich freun, und die Bienen da wandl' ich

Mitten in ihrer Lust; ich steh im friedlichen Felde

Wie ein liebender Ulmbaum da, und wie Reben und Trauben

Schlingen sich rund um mich die süßen Spiele des Lebens.


Oder schau ich hinauf zum Berge, der mit Gewölken

Sich die Scheitel umkränzt und die düstern Loken im Winde

Schüttelt, und wenn er mich trägt auf seiner kräftigen Schulter,

Wenn die leichtere Luft mir alle Sinne bezaubert

Und das unendliche Thal, wie eine farbige Wolke

Unter mir liegt, da werd' ich zum Adler, und ledig des Bodens

Wechselt mein Leben im All der Natur wie Nomaden den Wohnort

Und nun führt mich der Pfad zurück ins Leben der Menschen,

Fernher dämmert die Stadt, wie eine eherne Rüstung

Gegen die Macht des Gewittergotts und der Menschen geschmiedet

Majestatisch herauf, und ringsum ruhen die Dörfchen;

Und die Dächer umhüllt, vom Abendlichte geröthet

Freundlich der häußliche Rauch; es ruhn die sorglich umzäunten

Gärten, es schlummert der Pflug auf den gesonderten Feldern.


Aber ins Mondlicht steigen herauf die zerbrochenen Säulen

Und die Tempeltoren, die einst der Furchtbare traf, der geheime

Geist der Unruh, der in der Brust der Erd' und der Menschen

Zürnet und gährt, der Unbezwungne, der alte Erobrer,

Der die Städte, wie Lämmer, zerreißt, der einst den Olympus

Stürmte, der in den Bergen sich regt, und Flammen herauswirft,

Der die Wälder entwurzelt und durch den Ozean durchfährt

Und die Schiffe zerschlägt und doch in der ewigen Ordnung

Niemals irre dich macht, auf der Tafel deiner Gesetze

Keine Sylbe verwischt, der auch dein Sohn, o Natur, ist,

Mit dem Geiste der Ruh' aus einem Schoose geboren.


Hab ich zu Hauße dann, wo die Bäum das Fenster umsäuseln

Und die Luft mit dem Lichte mir spielt, von menschlichem Leben

Ein unsterbliches Blatt zu gutem Ende gelesen

Leben! Leben der Welt! du liegst wie ein heiliger W

Sprech ich dann, und es nehme die Axt, wer will, dich zu ebnen,

Glücklich wohn ich in dir.

 

1797


프리드리히 횔덜린

 

무위

 

가슴은 태평스레 졸고 엄격한 상념은 고요하다.

나는 초원으로 나간다, 샘물처럼 싱싱한 풀이

내게 자라나는 곳, 한 송이 꽃이 사랑스러운 입술을

내게 벌리며 달콤한 숨결로 나를 말없이 감싸는 곳,

촛대에서 타오르는 삶의 불꽃이 나를 밝혀주듯

수천의 밤나무 가지에 불그레한 꽃들이 피어나는 곳,

햇살 드리운 샘물에 부족함 모르는 물고기들이 군림하는 곳,

멋모르는 새끼들이 짹짹 거리는 둥지에 제비가 날아오르고,

나비며 꿀벌이며 기쁨에 겨워하는 그곳, 그들의 환희 가운데 내가 거닌다.

고요한 들판에 사랑에 취한 느릅나무처럼 서 있는 나를, 포도넝쿨 포도송이 마냥

삶의 달콤한 놀이가 나를 휘감는다.

 

내가 높은 곳을 바라볼 때면, 정수리에 구름 왕관을 쓰고

새카만 곱슬머리 바람에 휘날리는 산을 바라볼 때면,

힘센 산이 두 어깨에 나를 태우고

가벼운 공기가 내 모든 감각에 마법을 걸고

색색의 구름처럼 끝없는 골짜기가 내 발밑에 드러누울 때면,

나는 독수리가 되고, 대지에서 풀려나 자유로운

나의 삶은 유목민처럼 자연의 모든 것[각주:3] 안에서 거주할 장소를 바꾸고,

오솔길은 나를 다시 인간들의 삶으로 데려가는데,

우레의 신과 인간들의 위력에도 끄떡없도록 잘 벼린

황동 갑옷 같은 도시가 저 멀리 황혼처럼 장엄히 빛난다.

도시를 둘러싼 마을들이 고요하고,

저녁 빛살에 붉어진 밥 짓는 연기는 우정을 담아 지붕을 밝히고,

살뜰히도 울타리를 친 정원들은 말이 없고,

띄엄띄엄 누운 들판에 쟁기도 졸고 있다.

 

그러나 달이 빛나면 겁박을 일삼는 자, 비밀스러운 불안의 정령이

그 옛날 무너뜨렸던 사원들의 기둥과 대문이 높이 떠오른다,

불안의 정령은 대지와 인간들의 가슴에서 격노하고 날뛰는,

패배를 모르는 고대의 정복자,

도시들을 어린양처럼 찢고, 올림포스를 습격하여

산들 위에 군림하고 불을 뿜어낸다,

숲을 통째로 뿌리 뽑고 대양을 헤엄쳐 배들을 난파시킨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대를 영원한 질서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고

그대의 법에서 한 음절도 지우지 않을 것이니

그는 그대의 아들, 자연이여, 평안의 정령과 함께 한 배에서 난 아들.

 

시간이 흘러 나무들이 열주(列柱)처럼 창문을 에워싸고

나를 위해 바람과 빛이 노니는 집에서 나는

인간의 삶이라는 불멸의 잎사귀를 끝까지 읽었다:

! 세계의 삶이여! 너는 성스러운 W처럼 누워있구나.

시간이 흘러 나는 말한다, 너를 곧게 펴려고 도끼를 쥐는 자 가만 놔두어라,

나는 네 안에 행복하게 거하니.

 

1797

 

(번역 A. 마군)[각주:4]


프리드리히 횔덜린(1770-1843)


이 시의 서술은 무위의 휴지(休止)가 시적 자아에게 제공하는 무사태평함과 평안함을 묘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샘물(Quelle)처럼 뿌리에서부터(aus dem Wurzel) 자라나는 풀의 형상, 열려있지만 말이 없는 꽃의 입술의 형상은 시의 초반부터 이 시의 철학적 야심을 분명히 드러내 준다. “삶의 달콤한 놀이”(süßen Spiele des Lebens)라는 구절은 칸트의 세 번째 비판과 실러의 미적 교육론을 가리키는데, 이들을 따라 횔덜린은 무위에서는 개방성과 자유의 공간을, 평온과 침묵에서는 인간 활동의 원천과 언어 그 자체의 목소리를 찾는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평온은 방랑으로 넘어간다. 시적 자아는 처음에는 그저 자연의 환희 가운데를 거닐지만, 나중에는 분지에서 산으로 이르는 원을 그리고 다시 분지로 돌아오는데 그곳에서 도시를 발견한다. 동시에 이것은 분지의 정주 생활과 산의 유목 생활 사이의 원이기도 하다. 이때, ‘무위는 영원한 운동이 되는데, 여기에도 일정한 경계가 있다. 순환, 그것은 무엇과 무엇의 사이에서영원히 운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운동은 운동 내부에서의 정착의 가능성, 운동 안에서의 삶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적 자아는 독수리가 되어 대지로부터 떨어져 나오고, 그의 삶은 유목민처럼 자연의 모든 것 안에서 거주할 장소를 바꾼다” (“Wechselt mein Leben im All der Natur wie Nomaden den Wohnort”).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바뀌는 장소는 여전히 하나의 장소로 남고, 대지를 완전히 버리는 운동은 자연 혹은 언어의 고요한 모든 것 안에 용해될 것을 약속하는데, Adler(독수리)라는 단어의 문자들도 All der안에서 유목한다는 점이 이를 나타낸다.

 

무위의 휴지는 순수한 매개, 순수한 이행, 즉 그 무엇에도 매여 있지 않은 유예상태로서의 자유에 대한 꿈을 일으킨다. 단편 소멸 중에 있는 형성(Das Werden im Vergehen)에서 횔덜린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라는 역설적 상태, 모순적인 이행(Übergang이라는 단어는 상승과 잉여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에 대해 쓴다. 이러한 모순적인 이행은 새로운 것과 지나간 것 사이의 파열과 대조를 드러내고 재결합하기[각주:5] 라는 목적을 지닌다. 여기서 횔덜린은 이행의 질료(Materie des Übergang)”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우리는 동일한 모티프들을 시 무위에서도 발견한다. 무위는 시인에게 이미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을 반영케 하고 지나간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회고적 이행을 상연케 하며, 시간이 이동하는 문턱으로 돌아가게 한다. 바로 여기에서 언어의 물질화, 아직 생겨나지 않은 의미의 지점으로의 회귀가 일어난다(우리는 동일한 모티프들을 만델시탐의 시학에서도 마주칠 것이다).

 

모든 말들의 실천은 여타 활동들을 붙들고 유예하는것을 추구한다. 평안과 운동 사이의 파열, 침묵과 말 사이의 파열을 걸어 잠그는 것이다. 서정시는 그 연속적인 절단의 리듬과 함께 이 말의 과제를 상연하면서 승화시킨다. 이 과제 덕분에 서정시는 혁명, 즉 휴지를 지속시키고 견뎌내는 시도, 운동 내부에 정착하려는 시도와 가까운 것이 된다. 이 과제는 헤겔의 표현에 따르자면 모든 지체(肢體)”(음보? 문자? - A.M.)이 완전히 용해되어 순수하고 단순한 평안[각주:6]을 형성하는 일종의 바쿠스적인 무아지경을 개시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때 시간들의 사슬은 일시적으로 멈추고 시간의 대문에 벌어진 틈새(раствор)[각주:7]로 무용하게/축제처럼 용해(растворение)된 삶을 흘려 넣는다. 아니 나는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휴지는 절대적 가동성 안에 머무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러한 안정은 도달될 수 없는 것으로 밝혀지는데, 무엇보다도 결코 움직이지 않는 대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 토대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ledig des Bodens”)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가함은 지금까지 숨어 있던 불안의 정령”(Geist der Unruh)을 깨운다. 불안의 정령, 즉 분열의 정령은 자신이 지나간 곳에 폐허, 무너진 기둥들, 그리고 놀랍게도 사원의 대문(Tempeltore)을 남기는데, 이 사원의 대문은 시간의 대문’(Temporeltore)과 매우 유사하다. 이 정령은 돌과 나무뿐만 아니라 언어의 질료로도 작업한다. 나무뿐만 아니라 단어도 뿌리째 뽑아내거나, 뿌리를 뽑아내어 버린다(entwurzelt). Der die Wälder entwurzelt”, “Der in den Bergen sich regt”.[각주:8] 이로써 전치와 분할이 아니라 생략과 절단이 중요해진다. 운동은 모든 연속성, 매개하는 운동의 동일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남겨지는 절대적 부정성의 원천을 전제로 한다. 운동의 잔여물은 화석처럼 굳어진 것으로 보이는 장소에서도 살아남고, 운동은 아무리 평안으로부터 벗어나려 해도 자신이 있는 곳으로부터 결코 멀리 가지 못한다. 여기에 모순은 없다. 잔여물을 없애고자 정수(淨水) 작업을 아무리 여러 방향으로 한다 해도 언제나 잔여물이 존재한다. 이 잔여물은 바로 고착과 중단의 행위 그 자체다. 이러한 행위는 스스로의 한계를 정하고 스스로 그 한계를 넘어가 자기 자신을 전복시킨다. 이때, 자기 반복의 잠재적 무한성, 그리고 이미 발생한 중지로부터 전개되는 제동의 히스테릭이 보장된다.

 

동일한 작업을 다른 측면에서 묘사해 볼 수도 있다. 무위의 공간에서 온전히 자기 자신을 떠맡게 된 인간은 자신이 지닌 자유의 한계를 시험하고, 자신이 정말 자유로운지 확인한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놀이에 고유한 폭력과 파괴적 특성이 비롯된다. 무위와 놀이는 인간의 가장 위험한 상태인데, 왜냐하면 여기에서 인간은 근본들을 찾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인간은 종종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그 근본까지 지워버리기도 한다.

 

완전한 중지, 그러나 순수한 운동 안에서의 중지라는 기획은 단어들이 지닌 정주 생활과도 같은 연속성을 파괴할 것을 요구한다. 단어들은 내뱉어지고(проговариваются)[각주:9] 문자들은 침묵한다. 그뿐만 아니라 문자들의 단조로운 존재방식은 공중에 걸려 자리를 바꾸는 원자들의 사슬을 통해 진정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수신지와 수신자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연속적인 휴지를 약속한다. 따라서 죽은 문자들이 최후에 지니는 물질성은 의미의 영역과 독자(讀者)가 지닌 행위의 의지가 둔감한 기호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고 해방되는 것, 정신물질로부터 분리되고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리라.[각주:10] 그러나 잔여적인 물질성과 이러한 독자 행위의 비자율성은 바로 로켓이 날아가며 각 단()을 내던지듯 단어들을 문자들로 분열시키고 이동 중에 그 문자들을 내던지는 불안에 있다


A. 레오노프, A. 소콜로프 <로켓 2단의 분리>, 1978, 엽서그림, 모스크바.


 어느 순간에 이르자 횔덜린은 불안의 정령이 자연의 법들이 적힌 판에서 한 음절도”(keine Sylbe verwischt) 지우지 않고 단지 이미 존재하는 요소들을 뒤섞고 흐트러뜨린다는 데서 위안을 찾는다. Sylbe라는 단어는 의 은유로 가득한 이 시에서 라틴어 silva를 가리키는데, 이 단어는 그리스어 hyle[각주:11]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인 독자는 아마도 숲-질료에서 바람이 불면 말하기 시작하는 원자적인 알파벳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리라. 그런데 음절들은 문자들로 나뉘고, 문자들도 대체적으로 말하자면 분절될 수 있다. 휴지는 죽음을 향한 갈망의 역동성과 유사한 중지와 분열의 무한한 활동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활동은 갑자기 중단되어야 하며, 휴지는 휴지 안에 붙들리려는 시도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여기서 추구되는 휴지는 실패를 통해 확립되는데, 왜냐하면 휴지의 갑작스러운(갑작스러워야만 하는) 중단은 현실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무한성을 반쯤 내뱉은 말에서야 표시하기 때문이다. 잉여와 결핍은 잠재적 무한성을 가리키면서 삶과 텍스트 안에서 무위의 공간을 활짝 열어젖힌다.

 

횔덜린은 다음과 같이 쓴다. “! 세계의 삶이여! 너는 성스러운 W처럼 누워있구나. / 시간이 흘러 나는 말한다, 너를 올곧게 펴려고 도끼를 쥐는 자 가만 놔두어라,”

 

음절은 사라지고, 음절로부터 문자가 떨어져 나와 부화한다. 여기서 대문자는 미처 다 말하지 못한 이름의 제목이다. 단어를 곧게 펴는 것은 단어를 참수하는 것, ‘Leben에서 ebnen[각주:12]을 꺼내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이름은 참수 당했지만, 그로부터 폐허로서의 대문자가 남게 된다. 이 대문자는 평평하게 하는 것의 한계이고 참수 당한 질료의 비석이다. 언어-명명은 언어-비유, 즉 요소들과 그 요소들의 관계들이 이루는 체계로서의 언어에 대립된다.

  

진정한 무위는 지독히도 견딜 수 없는 것이지만 예기치 못한 중단(무위의 작업), 즉 미끄러지는 순간으로서는 가능하다. 예기치 못한 중단 이후에는 중단된 작업 또는 말(речь)이 다시 계속된다(직접 발화에 삽입된 시간이 흘러 나는 말한다”(Sprech ich dann)라는 구절을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각주:13] 문자 W, 오메가는 끝에 대해 내뱉어진다(проговаривается)’. 그러나 불안한 휴지는 이 공식적경계 너머로도 철썩거리며 흘러간다. ‘을 의미한다는 것은 모순적이며 그것에 의해 웅장하게 선언된 침묵을 깨뜨린다.

 

거주한다는 것은 휴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직 휴지부에서만, 고의적인 침묵(умолчание)[각주:14]의 그을린 대지에서만 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침묵(молчание)은 밖으로 끄집어낼 수 없으므로 거주한다는 것은 거상의 작업/거상의 무위로 이어진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이 장엄하게 외친다. “나는 네 안에 행복하게 거하니”(Glücklich wohn’ ich in dir). 이때, “거한다(wohn’)”[각주:15]라는 단어는 시행의 중간에서 끊긴다. 중단의 계기는 휴지 안에 붙들리려는 새로운 시도들을 지탱하고 모든 휴식이 그러하듯 에너지를 충전한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다음 구절에서 나타나는 생략 역시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요정들과 마찬가지로 인형들에게도 굳건한 대지가 필요한데, 그것은 오직 대지와 접촉하여 순간적인 제동을 통해 사지(四肢)가 힘을 얻어 새로이 날아갈 수 있기 위해서다.”[각주:16]

 

한편으로, 명명되지 못한 단어로부터 남겨진 문자는 시 파트모스에서 나온 “der feste Buchstab”, 굳건한 문자이다. 개별적으로 굳건히 서 있으면서 고유의 의미를 갖지 않는 굳건한 문자는 시간의 순수성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적용되는 지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문자는 문자 다음에 이어지는 단어로부터 남겨진 비어있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비극의 의미(1799)라는 짧은 단편에서 언급되는 상징=0”, 즉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아주 하찮은 상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징은 모든 자연의 비밀스러운 태초의 근본을 나타낼[각주:17] 수 있다. 이 정식화에 대한 횔덜린의 주해는 문자와 같은 물질적이지만 무의미한 기호를 설명하는데 상당히 적합하기는 하지만, “상징=0”이라는 표현 자체는 훨씬 급진적이다. 이 표현에 따르면, 상징은 자신의 자리에서 대개 부재한다.[각주:18] 0의 상징 또는 횔덜린이 오이디푸스에 붙이는 주석에서 부르듯, 비어있는 운송수단, 내용 없는 비유는 순수한 단어”, 즉 시간 그 자체의 변전, 언어 그 자체의 목소리로의 매개된 접근을 개시한다.[각주:19]

 

찢겨진 단어의 문자와 침묵은 그런 식으로 시간의 독립성으로의 접근 금지, 그리고 (바로 그 금지를 통한) 시간의 독립성과의 접촉이라는 이중적 효과를 만들어 낸다. 안티고네에 붙이는 주석에서는 동시대 시인들의 과제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den Geist der Zeit <...> festhalten und fühlen”, 즉 첫째, 법으로서의 시간의 정신을 정립할 것, 둘째, 시간의 정신을 감각할 것.

 

침묵은 생산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바로 절단의 순간, 침묵 안에서는 말 그 자체, “순수한 단어”, 단어 그 자체로서의 이념이 말하고 들리기 때문이다. 횔덜린은 창작 후기에 쓴 찬가 Friedensfeier(평화의 축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이 찬가는 Die Muße의 주요 모티프들을 이어 받고 있다(축제와 끔찍한 것 사이의 연관, 평안과 부정의 노동 사이의 연관).

 

Schicksalgesez ist, daß Alle sich erfahren,

Daß, wenn die Stille kehrt, auch eine Sprache sei.

저마다 아는 숙명의 법이란 그러한 것이니

정적의 변전 안에 말이 있도다. 


침묵 안에 실현되는 급변은 자기 자신과 진실을 인식할 가능성을 제공한다(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에서 그렇듯).

 

0이 나타날 때면 언제나 그러하듯, 여기서도 어떤 부정의 값, 즉 비어 있는 장소에 상상을 채워 넣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W는 그 외관에도 불구하고 어떤 음절, 즉 바로 그 음절(Sylbe)을 숨기고 있다. 그 음절은 횔덜린의 시가 보여주듯 흔적 없이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꼭 그러리라는 법은 없지만) WWort, 단어라는 단어의 폐허일 것이다. 이 폐허의 침묵은 그 유명한 포도주잔의 비어있음처럼[각주:20] 오직 탐침에 의해서만, ‘Ort’(‘장소’)를 시험 삼아 음절/단어로 채워보는 것에 의해서만 인지될 수 있고 확인될 수 있다.[각주:21]

 

단어 혹은 거주의 언어에서 거부된 것. 거주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거부, 즉 공명하는 침묵 안에서만 가능한데, 오직 억제되지 않는 순간에만 그렇다. 시는 비어있는 거주의 장소가 아니라 장소로부터의 비어있음, 즉 이미 장소가 공제 또는 삭제되어 있는 비어있음이다. 이러한 비어 있음은 장소의 비어있음보다 더 크고 단어의 충만함보다 더 크다. 시의 근본적 작용은 보충하는 것과 축소하는 것이다. 아마도 W는 시에서 언급된 Wohnort”, 거주의 장소를 숨기고 있는 것이리라. 이때, 이 거주의 장소는 이미 장소를 상실한 것이 아니라, 이 장소에 필적하는 장소의 부재, ‘Ohnort’를 상실한 셈이 된다


1694년에 러시아에서 출간된 독본. 러시아어에서도 오메가가 쓰였지만 1708년 표트르 대제가 시행한 알파벳 개혁에서 오메가는 러시아어 철자에서 제외되었다.


장소는 누락된다. 그러나 장소를 명명하는 것은 오직 고의적인 침묵, 즉 장소에 말이 굳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때, 침묵 그 자체는 (아마도) ‘장소를 말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인간은 저항하는 (그렇기 때문에 자족적인) 물질을 중지시키고, 채우고, 보충하려고 애쓸 때, 순간적으로 - 자기 안에서 - 장소를 찾아낸다. 그의 시도가 실패할 때 세계의 비어있음이라는 효과, 무위로 방향을 돌리게 되는 노동의 헛됨이라는 효과가 발생한다.

 

문자 W에서 독자는 헤겔적인 의미에서의 Selbständigkeit, 즉 사물의 독립성[각주:22], 분할가능성의 한계로서 스스로 서 있는 문자에 말 그대로 접촉하게 된다. 이 고독한 시간의 대문은 결코 통과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바로 이 통과불가능성 때문에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개체적으로 알아보게 된다(카프카의 소송에 나오는 우화 법 앞에서의 대문처럼 말이다. 이 우화를 듣는 주인공의 이름은 문자 K로만 이루어져 있다).

 

사건의 물질이 지니는 중간성, 이행성은 오직 그 물질의 (자기)파괴를 통해서만 도달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행성은 물질의 부재를 의미하는 경계적인 문자-폐허의 통과불가능성과 이행불가능성으로 변전한다. 경계는 비어있는 갓길을 요구한다. 그러나 갓길이 비어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리고 이 갓길에 비어있음이 설비를 갖춰 재현되기 위해서 경계석 비석은 아닐까? - 이 서 있다.

 

장소는 거주의 가능성일 뿐 아니라 언어적 의미의 바탕이기도 하다. 문자와 음소는 통사적 위치뿐만 아니라 계사 체계에서 차지하는 위치 덕분에 무언가를 의미할 수 있다. 문자들을 제 자리에서 뜯어내는 불안의 정령이 활동한 결과,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문자는 의미를 구성하는 이웃관계 바깥에 위치하게 되고 (‘장소라는 단어에서) 채워지지 않은 장소가 남는다. 하나의 문자에서 다른 장소로 이행하는 것, 그리고 무언가에 이름을 주며 서로 얽혀있는 암시들의 놀이는 두 체계의 분리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문자에서 말없는 재료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언어에서도 말없는 형식적-위치적 층위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명명의 관계들로부터 분리되지 않으며 그 무엇에도 억제되지 않은 채 자신에 대해 내뱉어진다. 그렇게 자신의 비어있음을 채운다.[각주:23]

 

이 시의 정치적 수신지는 명확하다.[각주:24]도끼”, 그리고 참수되어 곧게 펴진삶은 각각 1793년에 집행된 루이 16세의 처형과 정치적 평등의 이상을 가리킨다. 헤겔과 미슐레에서부터 시작하여 르포르와 퓌레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혁명에 대한 분석들에서 종종 지적되듯, 혁명적 공포정치는 비어 있는 권력의 장소를 유지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장소를 차지하는 자는 정의상 찬탈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보았듯 비어있음을 유지하는 것은 운동의 순수성, 고유한 비본질성, 그리고 당연히 규정되지 않은 평등(평평함)을 얻기 위한 투쟁과 분리될 수 없다. 횔덜린에 따르면, 비어있음의 탐색은 바로 자기재생산하는 분할과 참수의 과정이고, 휴지의 탐색은 자기의 경계들을 한데 합치고 중단시키려는 순환과정, 경계를 가로지르는 극복될 수 없는 작업이다. 왕의 처형에 대한 두 번째 연설에서 생-쥐스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혁명이 완료되었고 더 이상 폭군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시민들이여, 폭정은 바람에 휘었다가 다시 펴지는 갈대와 같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루이 16]의 정치는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남아있거나, 또는 모든 당파들과 함께 한꺼번에 걸음을 내딛습니다.”[각주:25] 매개하는 연속성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그 시작 지점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그 시작 지점은 제자리에 서서 다른 모든 것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거나 달이 나그네를 따라가듯 그 역시 자리를 이동한다. 따라서 시작 지점은 이행이 생겨나는 근원으로서의 시작 지점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단어는 문자들로부터 점차적으로 형성되고 나면 문자적 의미에서부터 떨어져 나와야 하는 의미의 운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어는 아무 것도 그 어느 곳으로 운반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단어는 이미 그 최초의 명명하는 문자를 통해 주어지고 결코 문자보다 멀리 가지 않기 때문이다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의 처형>. 동판에 유화, 카르나발레 박물관, 파리.


 권력의 비어있는 장소, 또는 비어있는 기표는 그 장소를 채우는데 실패한 시도, 상징과 그 의미 사이의 불일치, 한마디로 말해 패러디를 의미한다.[각주:26]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장소를 비워내려는 시도는 충만함의 효과, 즉 마치 본질적이지 않은 듯한 기표의 신체적 본질성을 감각하고 생산하려는 시도이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에도 바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데, 왕이 체포되자 사람들은 그의 사생활, 일상생활의 습관 등에 대단한 관심을 가졌다.[각주:27] 횔덜린의 시에서 단어라는 단어의 첫 문자로부터 떨어져 나오듯, 왕의 머리로부터 그의 숭고한 신체가 분리되었던 것이다. 왕의 처형 덕분에 프랑스 혁명은 절대적 권력의 바이러스이자 흔적, 기표를 비워내려는 시도의 실패, 그러나 개선가를 부르는 실패로서 역사에 남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단어들은 이처럼 끝까지 지속되지 못한 휴지에 이름을 준다. 아니면 간단히 말해 왕관처럼 생긴 대문자 W는 이 휴지에 왕관을 씌워준다. 그러나 이름은 여기서 앞으로 계속될 것의 약속과 인용의 가능성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하지 않고, 역사적 순간은 memento보다 더 적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완결되지 않은 행위에 대한 기억은 어떤 충동, 새로운 역사의 순간을 구성한다.



  1. 이 횔덜린의 시의 독해는 1997년 토마스 셰스타크 교수가 진행한 횔덜린에 대한 짧은 세미나에서 탄생했다. 세미나에 참가한 동료들(샤이 긴즈부르크, 마누엘라 아힐레스, 울리히 플라스)의 의견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본문으로]
  2. 텍스트는 프랑크푸르트판 횔덜린 작품집에서 인용한다.(위를 보라.) [본문으로]
  3. [역주] 원문에서 대문자로 표시된 단어는 번역에서 진하게 표시한다. [본문으로]
  4. E. 사돕스키의 번역(「여가」)과 비교해 보라. Гельдерлин Ф. Сочинения / Пер. с нем. М.: ИХЛ, 1965. С. 88-90. [본문으로]
  5. Hölderlin F. Werke, Briefe, Dokumente. S. 540-543. 횔덜린의 시 “Andenken”에 대한 주석에서(Heidegger V. Gesamtausgabe. Fr. a. M.: Vittorio Klostermann, 1982. Bd. 52) 마르틴 하이데거는 위대한 시인의 창작에서 축제의 모티프가 하는 역할에 대해서 정확하게 지적한다. 하이데거는 축제의 모티프와 이행, Übergang의 테마의 연관성을 잉여와 과잉의 의미에서 포착한다. Übergang이 Überfluß, 잉여와 친연성을 지닌다는 것은 실러도 「미적 교육에 대한 편지」에서 언급한 바 있다. (Schiller F. Briefe über die ästhetische Erziehung des Menschen. 편지 27. P. 358).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하이데거가 무위의 부정적 측면들을 무시하고 축제의 날들에 직접적인 소여로서 개시되는 초월적 독특성을 논할 때, 그에게 동의할 수 없다. 하이데거가 횔덜린을 신학화하고 숭고하게 만들면서 보다 산문적인 시 「무위」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본문으로]
  6. Гегель Г.В.Ф. Феноменология духа. С. 25. (Предисловие; пер. Г. Шпета, с имзенениями) [본문으로]
  7. [역주] 마군은 여기서 동시에 ‘용해액’과 ‘틈새’를 뜻하는 단어 ‘라스트보르(раствор)’로 언어유희를 한다. 즉, 바쿠스의 무아지경에서 삶이 ‘용해’될 때, 비로소 연속적인 시간에 ‘틈새’가 생기고 삶은 여기에 틈입할 수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8. [역주] “숲을 뿌리째 뽑는 자”, “산에서 요동치는 자”. 마군은 ‘der’, ‘erg’, ‘reg’ 등의 음절이 이러저러한 단어들로 이동한다는 것을 가리켜 단어의 뿌리를 뽑는다고 말한다. [본문으로]
  9. [역주] 노어 ‘проговариваться’라는 동사는 1) 말해서는 안 될 것을 무심코 내뱉는 것, 2) 또박또박 소리 내어 말하는 것 등을 뜻한다. 말하는 주체가 단어에 미치는 영향력이 적다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 ‘내뱉어진다’라고 번역한다. [본문으로]
  10. 횔덜린은 『휘페리온』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우리는 마른 나무 조각이나 부싯돌에서 졸고 있는 불과 같다; 우리는 몸부림치며 매순간 좁은 감옥에서 나갈 출구를 찾는다. 그러나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의 순간은 수백 년 투쟁해온 우리에게 상을 안겨주며 오리라, 신적인 것이 족쇄를 끊어 낼 때, 죽은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불꽃이 잿더미 위에서 승리하며 날아오를 때, 오호라, [오호라, 승리는 오직 짧은 순간에만 주어지기 때문에 - A.M.] 우리의 해방된 정신이 고통과 노예상태를 잊고 개선가를 부르며 태양의 궁전으로 복귀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에.” (Гельдерлин Ф. Сочинения / Пер. с нем. М.: ИХЛ, 1965. С. 328). [본문으로]
  11. [역주] silva는 라틴어로 ‘숲’을 뜻하고, hyle는 그리스어로 ‘질료’를 뜻한다. [본문으로]
  12. [역주] 독어로 Leben은 ‘삶’을 뜻하는 명사이고, ‘ebnen’은 ‘평평하게 하다’를 뜻하는 동사이다. [본문으로]
  13. 뒤에서 분석할 만델시탐의 시에서도 마지막에서 두 번째 구절이 침묵으로 끝난다. (“광인은 물을 마시며 정신을 차리고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이 구절 다음에는 시를 종결하는, 가장 핵심적인 구절이 이어진다. [본문으로]
  14. [역주] 우리말에서는 따로 구분하지 않지만 노어 명사 ‘умолчание’는 ‘말을 하다가 중단하는 것, 고의로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뜻하고, ‘молчание’는 일반적인 침묵을 뜻한다. [본문으로]
  15. [역주] 1인칭 동사 변화의 올바른 형태는 ‘wohne’이다. [본문으로]
  16. Клейст Г. фон. Избранные сочинения. М., 1977. С. 515. [본문으로]
  17. Hölderlin F. Werke, Briefe, Dokumente. S. 535. [본문으로]
  18. 횔덜린이 번역한 「폭군 오이디푸스」를 참고하라. “wo findet man / die zeichenlose Spur der alten Schuld” - “해묵은 죄의 표시 없는 흔적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Hölderlin F. Werke, Briefe, Dokumente. S. 571). [본문으로]
  19. Ibid. S. 571. [본문으로]
  20. 하이데거의 연설 「사물」(1950)을 보라. Хайдеггер М. Время и бытие / Пер. с нем. М.: Республика, 1993. С. 316-326. [본문으로]
  21. 이 두 단어의 표현형적인 연관성은 안겔루스 질레지우스의 「방황하는 천사」에서 이미 포착된 바 있다. [본문으로]
  22. Гегель Г.В.Ф. Феноменология духа. IV A 3. С. 103. [본문으로]
  23. 따라서 모든 이름은 일종의 나라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돌발성과 독립성은 이름 주변에 비어있는 후광을 만들고, 이 후광은 부재하는 맥락을 가리키며 일련의 단어들을 흐트러뜨린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이름은 휴지부다. [본문으로]
  24. 횔덜린의 정치관과 프랑스 혁명에 대한 그의 우호적 태도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Bertaux P. Hölderlin und die Französische Revolution. Fr. am M.: Suhrkamp, 1969. [본문으로]
  25. Saint-Just L.-A. Oeuvres choisies. P.: Gallimard, 1968. P. 100, 94. 다음의 정확하지 않은 번역과 비교해 보라. Сент-Жюст Л.-А. Речи. Трактаты. СПб.: Наука, 1995. С. 32-33. [본문으로]
  26.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맑스는 혁명에 패러디로서의 의미를 부여한다. [본문으로]
  27.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Žižek S.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N.Y.; L.: Verso, 1991. P. 253-25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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