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적 무기나 전기 자극을 사용하여 지역 사회를 음악적으로 단결시키고 역사를 리믹스하면서 모네의 작품은 단절되지 않은 역사의 연쇄를 보여주는 동시에,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우리 아프리카의 과거를 재구축하자는 아프리카 미래주의의 또 다른 목표를 재현한다. 그러나 잉글리쉬와 킴, 그리고 토비아스 C. 반 빈 등 모네의 작업을 연구하는 몇몇 학자들은 모네가 어떤 식으로든 대서양 흑인 정체성의 경계를 초월했다고 본다. 반 빈은 사이보그 신디 메이웨더가 대서양 흑인 정체성의 다른 버전에선 끈질기게 출몰하곤 하는 억압의 역사로부터 얼마간 자유로운 흑인성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고 주장한다.
(메이웨더는) 너무나 자주 게토 리얼리즘의 폭력과 자본주의적 화려함으로 제한되거나, 노예제 이후에도 이어지는 종속성의 여파에 국한되거나, 혹은 민권운동 시대로부터 아직 남아있는 영향, 즉 노예 해방령 이후 기나긴 세기의 걸쳐 아프리카계 미국인 주체는 계몽 주체로 인식될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주장 속에 갇히곤 하는, 아프로디아스포릭 패러다임으로부터 탈출구를 마련해준다.
반 빈은 아프리카 미래주의 학자 쿠도 에션의 “음악을 통해 당신은 대부분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인류의 지위에 신세를 입은 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1960년대에 계몽주의적 인간으로 평가받기 위해 여전히 항의해야 했고 여전히 폭동을 일으켜야 했다.”라는 주장을 인용한다. 그리고 반 빈은 모네와 같은 아프리카 미래주의자는 계몽 주체로서의 인간의 개념을 발전시키는 데 더 이상 관심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의 개념이, 전부 버려야 할 정도로 과도하게 백인으로 규정된 나머지 결국 포스트휴먼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반 빈은 외계인이라는 아프리카 미래주의의 은유를 통해 우리는 지구의 역사에서 떨어져나와 “지구가 아닌 우주와 타임라인과 정체성을 탐험”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정체성을 완전히 버리고 외계인이 될 것을 주장하는 선 라야말로 분명 이러한 접근일 것이다. 외계인의 정체성에 대한 선 라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양과 작품은 흑인 역사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실제로 명백히 고대 이집트의 인류 역사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선 라의 ‘우주 흑인 신화’는 역사적 순간을 혼합하고, 여전히 과거에 뿌리를 내린 채로 미래를 바라보면서 “블루스 음악과 노예제를 거쳐 5천 년 전에 시작된 이집트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흑인 역사 연속체의 일부”를 그려내려는 아프리카 미래주의 충동의 또 다른 사례이다. 선 라의 1974년 영화 <Space Is the Place>도 마찬가지로 이집트의 이미지와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의 참고사항을 한 데 엮어 끊어지지 않는 역사적 연결을 만드는 동시에 흑인성을 위한 우주 공간의 장소를 내다보았다. 이는 반 빈이 흑인성으로부터 탈출한 것과는 결이 다른 아프리카 미래주의의 비전이다. 오히려 아프리카 미래주의는 “100년 전의 신비평학자나 미래학자들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디지털 문화를 택한다. 이 작품들은 흑인 공동체의 역사에 바탕을 둔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문화를 연구하며 그들과의 모든 연결을 끊어버리려 하기 보다는 새로운 방향을 그려낸다.”고 제안하는 알론드라 넬슨의 이해와 더 밀접하게 통한다. 뮤직비디오에서 이따금씩 선 라의 작품을 인용하곤 하는 모네도 마찬가지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와 정체성을 수용한다. 그는 이러한 순간들을 샘플링하여 리믹스한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서로 다른 여러 순간과 운동, 정체성을 통합하여 자기 자신을 스스로 규정할 기회뿐 아니라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혁명을 보여준다. 이러한 연결의 한 가지 예를 “Q.U.E.E.N” 뮤직비디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대 이집트에 대한 언급은 주로 바둘라 오브롱가타의 클레오파트라 스타일 가발 및 화장에 시각적으로 표지되어 있지만, “내 왕관은 네페르티티 여왕처럼 너무 무거워/ 내 피라미드를 돌려줘/ 나는 캔자스시티를 해방시키려 하고 있어.”라는 노래 가사에서도 나타난다. 이 가사뿐 아니라 “나는 젊은 해리엇 터브먼처럼 계속 사람들을 이끌고 있어”와 같은 Q.U.E.E.N의 다른 구절은 고대 이집트의 역사와 현대 미국의 노예 탈출, 그리고 생명을 존중받는 인간으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최근의 투쟁까지를 모두 관통하며 통합하는 독특한 테마를 창조해낸다. 모네가 선 라와 달라지는 점은 이 역사를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다. 미시 엘레엇과 로린 힐 등 다른 힙합 및 네오소울 예술가들이 자기 자신을 “독립적이고 강인하며 자립적이고 자기 자신의 욕망을 가지고 있고 자기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다”고 묘사할 때 함께 언급되었던 에리카 바두와 작업을 함께하면서, 모네는 모든 것을 관통하여 끌어낸 이 테마로 아프리카와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에 등장하는 여러 여성 지도자를 통합한다.
반 빈의 관점이 외계인이나 사이보그로 ‘탈출구’를 제공해주긴 하지만, 모네는 아프리카와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을 연결하며,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인간성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이 유구하게 지속되고 있을 뿐 아니라 점점 더 디지털화 되어가는 혁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청중들에게 생존과 사랑을 위한 사이보그 신디 메이웨더의 투쟁에 동일시하기를 요청하지만, 그렇다고 사회 정의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인간이라는 개념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이보그는 단순히 그의 의식이 기계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만으로 과거의 여러 세대가 겪어왔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과학 소설의 다른 등장인물과 마찬가지로, 그는 사이보그를 사용하여 억압이 어떻게 작용하고, 특히 인간성을 부정하는 행위가 억압에 어떻게 이용되는지를 밝힌다. 실제로 20세기 민권운동은 근본적으로 흑인성이 인간성의 한 범주라고 주장하고 미국의 다른 인간/시민에게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를 확보하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모네 또한 인류의 정의를 확장하여 역사적으로 그 정의에서 배제되어왔던 사람들을 포함해야 한다고 요청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교도소 수감자의 인간성은 이 비디오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또 하나의 질문이다. 분명히 인권 침해에 해당하는 상황에서, ‘시간여행자’ 반군은 관람객을 위해 전시된 채로 무기한 수감되어야 한다. 두 명의 젊은 흑인 여성이 기술을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사용하여 이 수감자들을 풀어주는 장면에서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이 점차 기술적으로 고도화되는 측면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 수감자들의 반란이 그들을 비인간적으로 만들었고, 그들은 그저 전시되어 있는 가공물로 전락하여 있었다. 이 수감자들을 풀어주면서, 인간이라는 용어, 그리고 뱅크스가 언급했던 대로 “기술 및 기술적 시스템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몇 가지 중요한 주장이 이루어진다. 첫 번째는 수감자의 인권에 관한 문제이다. 이는 인종차별적 치안 활동 및 정책으로 인해 미국 교도소 시스템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과잉 대표되고 있기 때문에 특히 관련이 깊다. 두 번째는 반기술적 흑인성과 기술 세계에서 여성에게 주어지는 역할에 대한 도전이다. 이 비디오에서 젊은 흑인 여성은 고도로 기술적인 환경에서 여성적인 관람객이라는 수동적 역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관람객을 위해 만들어진 장면 속에서 적극적인 참여자가 된다. 완다랜드 혁명가들을 감옥에서 구해내기 위해, 그들은 금니가 박힌 장식용 해골을 레코드 플레이어로 변형시키며 ‘흑인의 비밀스러운 기술’이나 디트로이트 테크노의 선구자인 후안 앳긴스, 데릭 메이, 케빈 손더슨의 음악에서 발견되는 ‘신화와 기술의 결합’을 창조하는 데 참여하는 역할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것이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기술적 연관의 내러티브 안에 흑인성과 흑인 여성을 배치하는 디지털 그리오의 작업이다.
젊은 여성이 수감자를 풀어주기 위해 기술을 사용한 것은 또한 아프리카 미래주의 행동을 반영하고 있으며,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이 매스미디어가 무장도 하지 않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자경단이나 경찰의 손에 죽는 사건이 계속 늘어나는 것을 보도하지 않는 상황을 우회하기 위해 트위터를 사용한 것과도 닮아있다. 쿠도 에션은 1960년대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어떻게까지 해야 했는지 –온전히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단순히 저항하는 정도가 아니라 폭동을 일으켜야 했다-를 약간 의심하는 듯했지만,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여전히 우리가 저항하고, 나아가 최근에는 폭동을 일으키기까지 해야 했음을 보여주었다. 온전히 인간성을 인정받기 위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투쟁의 중심에 있는 인권에 대한 문제제기 및 기술의 사용은 결국 모네에게 인간이라는 용어는 가망 없는 목표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모네가 인간이라는 범주에 문제를 제기하긴 하지만, 반역사적인 미래를 얻기 위해 그저 과거를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통합하려는 그의 시도는, 그가 인간성을 버리고 떠나려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디지털 그리오로서, 그는 이러한 연결점을 만들면서, 아프리카인의 디아스포라 경험에 대해 알론드라 넬슨이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그것에 짓눌리지 않고,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완전히 변형된” 것이라고 주장했던 바를 이루어낸다. 과거와의 연관성을 유지하려는 이러한 욕망은 모네의 “Q.U.E.E.N” 뮤직비디오에서 다양한 역사적 순간을 통해 혁명을 추적하는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혁명의 레토릭은 가사, 시각요소, 그리고 그 외 20세기 중반의 민권운동의 여러 표지를 통해 전달된다. 이 기간은 노래의 랩 부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경과 모네가 입은 제임스 본드 스타일 수트뿐 아니라, 백댄서들의 헤어 및 메이크업 스타일을 통해 뮤직비디오에 시각적으로 표지되어 있다. “나는 할 수 있고 하고자 하기 때문에 행진한다”와 같은 가사는 이렇게 과거 소환을 동반하는 근미래에도 운동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청중들에게 모네가 “당신은 전기 양떼가 되겠습니까, 전기 여성이 되겠습니까? 당신은 잠을 자겠습니까 설교를 하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처럼 우리는 그가 주로 여자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그 노래는 우리가 완다랜드의 ‘음악적 혁명’을 계속 진행시키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요청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일련의 이분법에서 전기 양은 혁명적이며 강인한 전기 여성과, 잠은 설교와 병치된다. ‘설교’를 촉구하는 이 구절은 1950~60년대 민권 운동에서 흑인 교회가 한 역할을 떠올리게 하는 한편,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침례교 전통 안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교회 내 여성의 역할의 문제를 지적하기도 한다. “우리는 극복하리라We Shall Overcome”과 같은 노래를 통해 음악이 당대의 역사적 순간에 정치 운동의 열쇠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Q.U.E.E.N” 뮤직비디오의 ‘음악적 무기 프로그램’은 지하 혁명을 이끌어내는 주된 도구이며, 이는 인종과 젠더를 동시에 모두 다루는 혁명이 된다.
모네의 혁명적 레토릭과 이미지는 또한 흑인 권력 운동의 예술 측면으로, 대략 1965년~75까지 이어지며 흑인의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을 기리고 서구 문화의 미학을 거부했던 흑인 예술 운동과도 공명한다. 애디슨 게일 주니어, 에터리지 나이트, 래리 닐과 같은 시인, 극작가 및 비평가들은 흑인의 작품과 경험을 필터링해 온 백인 렌즈를 거부하는 ‘흑인 미학’을 발전시켜야 했던 이 시기에 글을 썼다. 닐은 이 미학을 “흑인이 자신의 말로 세계를 규정”할 수 있게 하는 “별도의 상징주의, 신화, 비평, 도상학”이라고 묘사한다. 동시에 이것은 “백인적인 것의 파괴, 백인적인 생각과 세상을 바라보는 백인적 방식의 파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수사와 마찬가지로, 모네의 음악과 비디오는 권력 체계를 해체하기 위해 백인계 미국문화 및 서구문화 전반에 전쟁을 선포한다. 이는 앞서 언급했던 관람객에게 미래의 풍경을 소개하는 보이스오버와 같이 “Q.U.E.E.N” 뮤직비디오의 몇 가지 주요 순간을 통해 추적해 올라갈 수 있다. 시간 위원회 박물관을 대변하는 이 보이스오버는 영국 억양을 쓴다. 클래식 음악과 함께 관람객에게 전시회를 소개하는 이 목소리는 서구 문화적 미학을 상징하며 “악명 높은 리더…와 위험한 공모자”의 위험을 가둬두도록 설계된 틀로 작용한다. 모네의 그룹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궁극적으로 위반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미학이다. 박물관은 서구 문화적 미학만이 이 제한된 공간의 경계 내에서 모네의 예술을 감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백인의 틀로 모네를 해석하려는 시도는 그가 만들어낸 것의 모든 힘을 방해하고 그를 제한하며 가둬놓는다. 서구 문화적 미학은 본질적으로 결점이 있고 생명력이 없다는 래리 닐의 비평과 마찬가지로, 모네는 이 생명력 없음을 그와 그의 밴드 멤버이자 동료 혁명가를 가둬놓은 ‘가사상태’ 형태로 바꿔놓는다. 그의 가사는 ‘괴물’이라는 낙인과 그가 백인 미학의 지시를 따를 능력이 없거나 욕망이 없다고 해서 그를 문화적으로 열등하다고 치부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은 우리가 지금 너희들의 규칙을 전부 어기고 있다는 이유로 우리를 더럽다고 하지.” 모네는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이 미학을 다음 가사와 같이 한층 더 비판한다. “그들은 이런 식이지. 오 그들에게 케이크를 먹으라고 해/ 하지만 우리는 치킨 윙을 먹고 그들을 향해 뼈를 땅바닥에 던질 거야.” 백인 이성애중심 서구 문화가 여왕의 자질을 유럽 왕족의 렌즈를 통해, 이 경우에는 “케이크를 먹으라고 해”라는 문구로 인용되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역사를 통해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모네는 여왕 자질의 리믹스 버전을 내세우며 이러한 문화적 틀을 거부한다. ‘여왕’이라는 단어에 담긴 군주제 인물의 예비 리더십과 같은 수동적 요소는 군주제와 그것이 등장하게 된 문화적 틀을 완전히 거부하는 적극적인 저항 의제로 변형된다. 서구 문화적 미학을 거부하는 동시에, 그는 케이크보다는 치킨 윙을 먹는 흑인 정체성을 주장하고 ‘그들을 향해 뼈를 땅바닥에 던지’면서 박물관이라는 틀로 그에게 부과된 공간을 무시한다. 더불어 땅바닥에 뼈를 던지는 행동은 중앙 및 남부 아프리카의 역술 행위 ‘뼈 읽기’와 서구 이성의 경계를 벗어났다고 표지되는 지식 생산 체계인 현대 대서양 흑인의 후두를 떠오르게 한다. “내 왕관은 네페르티티 여왕처럼 너무 무거워/ 내 피라미드를 돌려줘/ 나는 캔자스시티를 해방시키려 하고 있어.”라는 가사는 그가 자신을 마리 앙투아네트로 위치시키려 하는 유럽의 틀을 거부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대신 모네는 자신을 네페르티티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아프리카의 흑인인 강력한 여성상의 역할을 취하면서, 모네는 백인 페미니즘 내의 제한 없는 특권 속에 담겨있던 서구 문화 미학을 거부하는 흑인 페미니스트 지위를 받아들인다. 백인 미학의 거부는 모네가 “Q.U.E.E.N.”에서 흑인 권력 운동을 인용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바둘라 오브롱가타로 등장하는 에리카 바두의 곁을 지키고 서있는 흑인 남성의 존재는 블랙 팬더를 연상시킨다. 남자들은 정장을 입고 베레모와 선글라스를 쓴 차림으로 도전적이고 강인한 몸짓으로 팔짱을 끼고 다리를 넓게 벌린 자세로 가능한 한 공간을 많이 차지한 채 서 있다. 블랙 팬더가 검은 옷으로 무장했다면 이들은 온통 흰색 옷을 입었는데, 이는 붙잡혀서 안전한 그들을 호기심 많은 구경꾼인 관람객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박물관의 렌즈를 통해 그들의 현실이 무대화되고 필터링되는 방식을 나타낸다. 그들은 말 그대로 화이트워싱 되었다. 그러나 모네는 서구 문화적 미학을 비판하면서도, 흑인 문화 운동이나 흑인 권력 운동을 전적으로 재생산하지 않는다. 이러한 운동이 시작된 이래 수십 년간 미셸 월러스, 셰릴 클라크, 바바라 스미스, 벨 훅스 드와이트 맥브라이드와 같은 페미니스트가 지적해왔던 바와 같이, 그들은 심각한 성차별과 동성애 혐오를 띠고 있었다. 예를 들어 월러스는 ‘흑인 사나이’의 신화라는 용어를 통해 흑인 남성성 묘사에 담긴 성차별을 지적했다. “우리에게 몇 번이고 거듭하여 그려진 그림은 그의 여자와 자신의 적인 백인 남자 간의 불경한 동맹 속에서 끊임없는 희생자이자 어린애인 남자였다. 이는 감정적인 해석이지만, 자신이 흑인 여성을 억압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엎드려 있는 여성들을 밟으며 앞서 나가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당대의 흑인 남자에 의해 사용되어 왔다.” 모네는 이렇게 흑인 남성을 억압하는 백인 남성성의 공모자로 흑인 여성을 등장시키는 레토릭을 거부한다. 그의 노래와 뮤직비디오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힘을 합쳐 억압과 싸우는 대안적 미래 운동을 구축한다. 모네의 “퀸 프로젝트Project Q.U.E.E.N”는 여성이 자신의 ‘왕’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자신이 혁명을 이끄는 운동이다. 이 프로젝트는 여왕이 ‘되고 싶다’고 노래하는 모네 개인이 아니라, 자신을 인종적, 성적, 젠더적 해방을 목표로 하고 있는 조직인 완다랜드의 지도자라고 명명하는 방식으로 표지된다. 바둘라 오브롱가타로서 에리카 바두가 등장하는 모습이 보여주듯, 그의 조직에서는 여성이 분명히 권위 있는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모네의 규칙은 하나의 위계조직에는 한 명의 지도자가 있는 방식의 젠더화된 질서를 단순히 반전시키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박물관의 큐레이터가 그에게 입혀두었을 차림으로 모네가 처음 깨어났을 때, 그는 군 지도자의 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그가 완다랜드의 다른 멤버들과 함께 춤을 출 때에는, 다른 여성 가수 및 댄서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순간이 있다. 똑같은 복장으로 표지된 모네는 이 뮤직비디오에서 혼자만 Q.U.E.E.N.이 아니다. 그의 운동은 위계적이지 않은 구조의 순간들과 함께 한다. 퀴어들이 인간성을 부정당하는 방식을 비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네의 작품은 흑인 권력 운동과 흑인 예술 운동의 동성애 혐오는 물론 아프리카계 당시 미국인 공동체에서 통용되던 혐오적 표현과도 맞서 싸웠던 흑인 페미니스트 계보에 합류한다. 흑인 권력 운동의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를 “민족 학살적 실천 … 아이를 낳지 않고 … 해방을 위한 새로운 전사가 태어나지 못하는” 행위라고 보았지만, 셰릴 클라크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동성애를 위협으로 해석하는 관점은 “가정, 관계, 섹스에서 인간의 유일한 기능은 후손을 만드는 것”으로 가정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많은 흑인 게이와 레즈비언이 아이를 키우고 있으며 자신의 가정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클라크는 또한 그들이 고수하는 섹스는 ‘죄악’이라는 기독교 근본주의적 관점이 동성애 혐오를 지속시키는 데 기여해 왔다고 언급한다. “그들은 우리가 지금 너희들의 규칙을 전부 어기고 있다는 이유로 우리를 더럽다고 하지.”와 같은 가사로, 모네도 클라크와 마찬가지로 부적절한 혹은 ‘더러운’ 섹슈얼리티라는 개념을 비판한다. 동성애 혐오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이봐 형제, 네가 악마로부터 내 영혼을 구해줄 수 있어?”라는 가사에서 모네가 ‘형제’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교회를 한층 더 비판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앞서는 모네가 백인 문화적 미학과 그가 드러내는 ‘위험’을 가둬두려는 욕망 비판했다면, 이제 그의 가사는 자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흑인 대중에게 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녀가 레깅스 입은 모습”을 좋아하고 “난 메리를 바라보는 걸 좋아해”라고 보다 분명히 외치면서 ‘괴물’이라는 자신의 지위에 문제를 제기하는 모네의 후렴은 동성애 혐오에 대한 비판에 기반하고 있다. 자신이 “당신네 천국에 갈 만큼 착할까?”라고 물으며 모네는 일부 아프리카계 미국인 기독교 사상에 등장하는 동성애 혐오를 표나게 비판하는 한편, 게이 레즈비언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와 공헌을 간과하는 획일적인 ‘흑인 공동체’의 구성을 비판하는 맥브라이드의 의견에 공명한다. 역사를 ‘리믹스’하면서 모네는 앞서 언급한 “Many Moons” 등 이전 곡에서부터 다뤄왔던 퀴어 욕망의 주제를 계속 이어간다. 안드로이드인 신디 메이웨더와 인간 연인의 관계를 통해 표현했던 비이성애규범적 사랑이 이제는 모네가 메리의 몸에 대한 욕망을 표현하면서 또 다른 퀴어 관계가 되었다. 흑인 예술 운동의 비판적 주장 중 어떤 부분에는 동조하면서도 보다 문제적 측면은 답습하지 않으면서, 모네는 엘드리지 클리버, 프랜시스 크레스 웰싱 및 그 외 흑인 권력 운동 및 흑인 예술 운동의 인물들이 사용하던 동성애 혐오적 수사와 같이 낡은 목소리는 지우고, 스미스, 훅스, 맥브라이드 문화 비평가의 관점을 더하는 디지털 그리오로서의 작업을 선보였고, 그 메시지 안에서 그들의 생각에 고도의 플랫폼을 마련해주었다. 잉글리쉬와 킴은 모네의 리믹스가 자신의 여성적이자 페미니스트적 비판을 도입하여 선 라, 조지 클린턴, 팔리아먼트의 ‘언컷uncut’ 펑크 혹은 순전히 남성적 펑크에 대한 응답으로 ‘펑크 컷’을 재현한다고 언급했다. 모네는 이러한 가수들에게서 영감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음악 및 음악과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고 지원하는 기기 모두의 영역에서 혁신을 이뤄낸다.
아티스트와 상표, 양성성과 보그 잡지, 안드로이드와 인간, 자본(유산자)와 노동자(무산자), 테크노컬처와 라이브 공연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하면서, 모네는 조지 클린턴, 피-펑크와 그들의 언컷 펑크보다 한층 더 페미니즘적일 뿐 아니라 훨씬 고의적으로 상업적이고 자기 의식적으로 융합된 소리 및 페르소나를 창조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내러티브 –미래적인 또 다른 자아, 공간, 시간 여행, 젠더 놀이로 완성되는- 가 그 시대의 예술가 집단이었던 클린턴과 피-펑크에게 엄청나게 기대고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이렇게 리믹스하고, 오직 당신에게 필요한 것만 취하고 더 이상 쓸모없는 것은 버리려는 충동은 “원칙canon을 만드는 자, 경험을 전달하는 자”인 디지털 그리오의 작업이다. 디지털 그리오의 작업이 모네가 해왔던 것처럼 시간적 위치 사이를 자유롭게 통과하며 본질적으로 세대를 연결하는 것이지만, 모네는 특정한 하나의 세대나 미래의 어느 특정 세대의 비전에 묶여있지 않다. 그는 자신만의 원칙canon을 만들어 다양한 시대의 비전과 목표를 ‘묶어낼’ 수 있고, 흑인성에 대한 자신만의 비전과 해방을 위한 목표를 규정할 수 있다. 알렉산더 G. 웨헬리이는 『포노그래피: 아프리카-근대성에서의 음향적 그루브Phonographies: Sonic Grooves in Afro-Modernity』에서 랄프 엘리슨, W.E.B 두보이스를 비롯한 당대 디제이들의 작업에서 드러난 시간의 사용과 음향의 물리적 특성을 연구하며 이러한 혼합이 어떻게 가능한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엘리슨의 작품에서 역사가 한 가지 그루브의 형식으로 나타난다면, 두보이스 및 디제이들의 믹싱 전략은 서로 경쟁하며 보완하는 여러 비트를 그들의 긴장을 세련되게 승화하지 않으면서도 요란하게 한데 모으는 방법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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