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인-무브

 

서교연 행사에 종종 참석해 주시는, 연구실의 '친구' 김수환 선생님께서 아주 흥미로운 글을 보내 주셨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기 직전의 때에, 미국의 학자 수전 벅-모스와 소련의 철학자들이 만나 공동으로 진행했던 '두브로브니크 강좌' 이야기입니다. 러시아(그리고 소련)에는 스탈린, 푸틴,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벤야민과 알튀세르를 읽고 서구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새로운 사유를 전개했던 철학자들, 발레리 포도로가, 옐레나 페트롭스카야, 미하일 리클린 등이 있었습니다. 김수환 선생님의 지성사적 '추리소설'을 통해 러시아-소비에트의 지적 유산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길 바랍니다. 이 글은 학술지 『노어노문학』 제36권 제1호에 수록되었습니다. 웹진 인-무브는 이 글에 김수환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풍부한 이미지 자료를 추가해 더욱 많은 분들이 읽을 수 있도록 총 3회에 걸쳐 새로이 공개합니다. - 인-무브 편집팀

 

두브로브니크 강좌(1990)와 수전 벅-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

연대에 이르지 못한 우정에 관하여 1

 

 

김수환 | 한국외대

 

 

혁명적으로 사유하는 자에게는 각각의 역사적 순간의 독특한 혁명적 기회는 정치적 상황으로부터 확인된다. 하지만 그에게 그 기회는 그 순간이 지닌 힘, 그때까지 닫혀있던 과거의 어떤 특정한 방을 열고 들어갈 힘을 통해서 그에 못지않게 확인된다. 이 방에 들어서는 일은 정치적 행동과 엄밀하게 합치한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서는 일을 통해 정치적 행동은, 제아무리 파괴적일지언정, 메시아적 행동으로 입증된다. -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각주:1]

 

I. 들어가며: 우연한 만남

 

미국의 저명한 정치철학자이자 지성사 연구자인 수전 벅-모스는 2021년에 러시아과학아카데미에서 발행하는 학술지 인간Chelovek에 논문 한 편을 발표했다. 1년 전 사망한 러시아 철학자 발레리 포도로가 추모 특집호를 위해 쓴 그 글의 제목은 발레리 포도로가에 대하여: 우리 우정의 세월을 되돌아보며...”였다[각주:2]. 이 글에서 그녀는 자신의 학문적 여정에서 중대한 분기점을 이루었던 30여 년 전의 우연한 만남을 회고하면서 그 만남의 의미와 자취에 대해 숙고한다.

 

 

 

그 우연한 만남은 19875월에 일어났다. -모스는 발터 벤야민에 관한 두툼한 연구서(Susan Buck-Morss, The Dialectics of Seeing: Walter Benjamin and the Arcades Project (Cambridge: MIT Press, 1989);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04)의 집필을 막 끝낸 참이었는데, 마침 물리학자 남편이 모스크바 란다우 연구소로부터 강연초청을 받게 되자 정확히 60년 전인 1927년에 벤야민이 방문했던 사회주의 수도에 직접 방문하는 일이 무척이나 적절하게 생각되었다.

 

 

 

개인 자격으로 남편의 출장에 동행한 그녀는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된지 두 달 가량 지난 모스크바에 입국했고, 레닌 대로에 자리한 러시아과학아카데미(학술원) 호텔에 짐을 풀었다. 도착 이틀 째, 그녀는 란다우 연구소 소속 수학자 가족의 인맥을 통해 시내의 한 연구소를 방문하게 되었고, 마침 그곳에 있던 젊은 연구원 그룹을 소개받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벅-모스는 이 그룹이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내의 세미나 조직이며, 세미나의 리더가 아도르노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을 뿐 아니라 당시 소비에트 내에서는 구할 수 없었던 자신의 책(Susan Buck-Morss, The Origin of Negative Dialectics: Theodor W. Adorno, Walter Benjamin, and the Frankfurt Institute, New York: The Free Press, 1977)을 이미 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젊은 연구자들은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로 자유롭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고, 키에르케고르, 니체, 후설, 하이데거, 프로이트뿐만 아니라 바르트, 아도르노, 벤야민, 푸코를 주제로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다. 차분한 카리스마로 그들 모두를 이끌고 있는 40대 초반의 한 인물, 발레리 포도로가와의 우정의 여정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교류는 포도로가가 세상을 떠난 2020년까지 30년 넘게 지속되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이 두 사람 간의 특별한 우정의 연대기를 소개하려고 하는데, 다만 그것이 동서 진영 출신의 두 명의 학자간의 사적인 만남보다 더 큰 어떤 것으로 조명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를테면,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 혹은 그저 ‘2세계라고 불렸던 상대편이 존재했던 시절에, 일군의 지식인들이 세계를 월경하며 만들어낸 모종의 공통성에 관한 이야기라면 어떨까? 혹은 역사가 기회를 부여했으나 결국 그것을 부여잡지 못한 채 놓쳐버린 이야기, 그렇기에 연대에까지 이르지 못한 우정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실현될 수도 있었으나 끝내 실현되지 못한 그 사건의 한복판, 불발된 가능성의 중심에 두브로브니크 강좌프로젝트가 놓여있다.

 

두브로브니크 강좌는 199010월에 벅-모스와 포도로가의 공동 기획으로 (당시 유고연방 일원이던 현재의 크로아티아에 자리한) 두브로브니크 인터유니버시티 센터에서 개최된 2주간의 특별 세미나를 가리킨다. 강좌를 준비하던 8개월 동안 그들은 만날 때마다 두브로브니크로!”라고 건배사를 했다. 준비 팀에 곧 두 명의 기획자가 합류했는데, 한 명은 소피아 예술연구소 소속 젊은 불가리아인 러체자르 보야지예프였고, 다른 한 명은 2년 전에 이미 모스크바에서 포도로가 그룹과 조우한 바 있는 프레드릭 제임슨이었다.

 

블라디슬라프 토도로프, 볼프강 프리츠 하우크, 헬레나 코자키에비츠, 페테르 마센 등 동서 유럽(불가리아, 독일, 폴란드, 덴마크) 출신 참가자들 이외에도 조지아 태생으로 포도로가 그룹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철학자 메랍 마마르다슈빌리, 2년 전 스탈린의 종합예술을 출간해 학계에 논란을 일으켰던 보리스 그로이스, 그리고 몇 달 전 슬로베니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한 슬라보예 지젝이 발표자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권력과 문화의 근대적 문제들이라는 포괄적 명제를 내걸고 동구와 서구의 학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근대의 기획을 재평가할 것을 목표로 하는 국제 공동 프로젝트. 본래 수년에 걸쳐 장기적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던 이 야심찬 프로젝트는, 그러나 그 첫 발에 해당하는 두브로브니크 10월 강좌를 끝으로 영원히 막을 내렸다. 훗날 강좌 참여자들이 반복적으로 회고했듯이 당시 참석자 중 그 누구도 불과 6개월 후 유고내전이 발발해 그곳이 사실상 폐허가 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물론 1년 후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리라는 것도. 만일 이런 역사의 격변이 없었더라면 강좌는 지속될 수 있었을까?

 

위: 1990년 당시 두브로브니크

 

 

대답은 부정적이다. 문제는 동쪽과 서쪽 세계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들이 만난 이 역사적 사건이 이미 그 첫 자리에서부터 심각한 한계와 균열을 노출했다는데 있다.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라도 두브로브니크의 기억을 되짚어보는 일은 역사의 격변기를 함께한 개인들의 사적 추억을 떠올리는 것에 머물 수 없다. 그것은 지난 세기의 끝자락에서, 어쩌면 유일무이하게 주어졌을지도 모를 희망의 자리를 대면하는 일이며, 동시에 그것의 쓰라린 실패의 현장을 곱씹는 일이기도하기 때문이다.

 

나는 앞서 언급한 벅-모스의 회상기를 따라가면서, 30여 년 전 잠시나마 열렸다 이내 닫혀버린 과거의 작은 문을 열어보고자 한다. 지금껏 닫힌 채 잠겨있던 그 과거의 방(chamber of the past)”에 다시 진입하는 일은 언젠가 벤야민이 말했던 대로 엄격한 의미에서의 정치적 행동과 합치될 수 있을까? 벤야민에게 과거를 역사적으로 언급한다는 것은 위험의 순간에 역사적 주체에게 예기치 않게 떠오르는 과거의 이미지를 재빨리 붙잡는 것, “어떤 과거의 것과 더불어 그 자신의 시대가 그 안에 진입하는 성좌를 붙잡는것을 뜻한다. 벤야민의 목표는 일련의 과거의 파편들이 현재의 특정 순간들과 함께 구성하는 비판적 성좌를 찾아내는 것, 그럼으로써 그 성좌가 역사가 앞에 불타오르는 순간적 이미지로 현현하게 만드는 것이다.

 

30여 년 전 두브로브니크를 둘러싼 기억의 파편들을 재구성하려는 이런 시도가 벤야민이 말한 결정(結晶)화된 단자(單子monad)”의 순간으로 떠오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다만 과거 기억의 파편들 위로 현재의 위험이 겹쳐 그려지는 그 성좌를 통해 우리가 지금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 세계는 30년 전의 그것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기대해본다. 혹은 최소한 그것은 벅-모스가 글에서 후렴구처럼 반복하는 문장, “만일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다면 우리는 좀 더 잘 할 수 있을까?”를 내 식으로 곱씹어보려는 시도일수 있을 것이다.

 

 

II. 두브로브니크 강좌: 역사적 조우와 파국적 균열

 

2-1. in medias res: 공통성의 기반

 

말 그대로 우발적 충돌collision”처럼 다가온 이 만남이 벅-모스에게 안긴 최초의 충격은 오랫동안 고립의 상태에 놓여있을 거라 막연히 짐작했던 냉전의 상대편에게 느낀 깜짝 놀랄만한 친숙함이었다. 아무런 공식적 직함이나 소속 없이, “다공적개방성의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세미나 그룹에 섞여 들어갔던 그 경험을 두고 그녀는 우리는 지적인 방어 없이, 일종의 인지적 충격과 함께 중간(in medias res)에서 만났습니다.”[각주:3]라고 회고했다. 여기서 인메디아스레스라는 표현은 그것의 중의적 함의로 인해 특별히 흥미롭다. 이 표현은 도입부 없이 곧장 핵심이 되는 중심부로 진입한다는 일반적 의미와 더불어 그런 시작을 가능케 만든, 이미 공유된 어떤 공통성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미학이 그들을 묶어주는 공통분모가 될 거라는 벅-모스의 예상은 첫 대면의 순간부터 여지없이 깨어졌다. 포도로가와 그의 동료들은 당대 유럽철학으로부터 고립되어 있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보다 더 강하게 그것을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모스가 모스크바 삼인조라고 표현했던) 다른 두 명의 인물에 대한 부가적 설명이 필요하다.

 

모스크바 3인조: 리클린(좌), 포도로가(가운데), 페트롭스카야(우)

 

 

연구소에서의 첫 만남 이후 포도로가는 자기 집으로 벅-모스를 초대했는데, 저녁식사 자리에서 그녀는 포도로가의 오랜 동료이자 친구인 미하일 리클린(Mikhail Ryklin)을 소개받게 된다. 만나자마자 리클린은 유창한 독일어로 발터 벤야민의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 관한 강의를 시작했는데, 곧 그가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에 완전히 정통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모스가 회상하길, “미하일 리클린은 솔직하고 수다스러우며, 4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그가 니체적인 블랙유머로 받아 넘기길 즐겼던 다양한 이론적 전통들에 관한 지식 면에서 매우 인상적인 인물이었다.”[각주:4]

 

 

 

언급할 필요가 있는 다른 한 명은 포도로가와 리클린보다 어린 연배의 여성 연구자 옐레나 페트롭스카야(Elena Petrovskaia). -모스에 따르면, “그들의 집단적 의사소통이 학문적 엄밀성의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배경에는 말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전달할 수 있었던 그녀의 완벽한 영어가 놓여 있었다. 소비에트 외무부 차관의 딸이었던 페트롭스카야는 어린 시절 뉴욕에 있는 유엔 영어 학교를 다녔는데, 서구식 물질주의에 감명 받지 못한 채로 모스크바로 되돌아온 후 냉전의 양편에 거주했던 경험을 통해 동서 양쪽의 가치들을 모두 수용하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였다.[각주:5]

 

페트롭스카야와 철학 저널 『푸른 소파』

 

 

당연히 여기서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냉전의 장벽 너머에서 살아갔던 소비에트의 젊은 연구자들이 어떻게 근현대 유럽 사상의 흐름에 그토록 정통할 수 있었을까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된 시사적인 언급을 포도로가 사단의 가까운 동료로서 짧은 시기 모스크바에서 함께 활동하기도 했던 미하일 얌폴스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각주:6]

 

나는 1974년, 그러니까 러시아의 영화예술연구소에 일자리를 얻게 되면서부터 전문적으로 영화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당시 다시 새롭게 문을 열고 연구원들을 각 개별 분과로 배치해야만 했던 연구소장은 내가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알고 정보 분과에 ‘집어넣었다’(외국어를 몰랐던 동료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이론 분과에 소속되었다). 그와 같은 인력배치는 아마도 가장 합리적인 것처럼 여겨진 듯하다. 외국어를 아는 정보 분과의 연구원들은 이론 분과의 동료 연구원들을 위해서 텍스트를 번역해야만 했다. 내 관심 분야가 구조주의와 기호학이었기 때문에 연구소에 취직하자마자 영화에 관한 새로운 기호학적 문헌(메츠, 바르트, 파졸리니 등등)을 번역하기 시작했다(이것들은 비공개의 ‘특별보관용’ 선집들에 수록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차츰 서방 영화기호학의 ‘전문가’가 되었다.[각주:7]

 

 

 

얌폴스키에게 업무로 주어진 번역도서의 양과 범위는 점점 더 늘어났고, 소비에트가 해체되었을 때 그는 러시아 내에서 동시대 서구 이론서를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깊게 읽은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국가가 운영하는 핵심 연구기관의 자기 책상에 앉은 채로 서구 사상과 이론의 (숨겨진) 전문가가 만들어지는 역설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것이 연구소 하나에 국한된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 냉전기 소비에트 시스템 전체에 만연했던 특별한 역설적 메커니즘의 부분적 사례에 해당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알렉세이 유르착에 따르면, “후기사회주의시기 소비에트의 내적 동학은 (억압적) 권력과 (창조적) 자유 사이의 상호연동을 그 특징으로 한다. 국가 시스템 내에서 일탈의 시공간을 여는 탈영토화작업, 유르착이 말하는 수행적performative 역설은 공식 이데올로기의 외부가 아니라 그것의 반복적인 수행한가운데서 이루어지는 바, 소비에트 인민들이 발명한 수많은 사소한 책략들의 배후에서 어김없이 발견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공식 담론 그 자체다. 문제는 소비에트 국가 시스템이 모순적인 방침과 정책을 계속해서 견지했다는데 있는데, 이를테면 나쁜 세계시민주의를 비판하면서 좋은 국제주의를 장려하고, 해외 라디오 방송을 차단하면서 단파 라디오를 적극 보급하는 식이다. 이런 역설적 상황은 콤소몰 간부로서 일터에서 반부르주아적 연설문을 작성하는 동시에 서구 록 밴드들에 관한 해외 기사를 번역했던 안드레이의 사례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안드레이는 개인문서고에 두 유형의 텍스트들을 “1982”라고 표시한 하나의 서류첩에 함께 보관하고 있었다.”[각주:8]

 

 

 

소비에트 시스템이 그 내부에 서구적인 것을 일종의 반-테제로서 포함하는 이런 상황은 후기사회주의 시기를 경험한 당사자들이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바다. 가령 소비에트인에게 부여된 원칙적인 요구는 소비에트식 사고가 아니라 소비에트적이면서 동시에 반소비에트적인 사고, 곧 총체적인 사유였다는 보리스 그로이스의 지적 또한 이에 해당한다. 그에 따르면, 브레즈네프 시기 최초의 반체제 인사들이 소비에트 연방에 관한 진실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기 시작했을 때 많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사상가들이 크게 당황했던 이유는 이런 말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누구나 알고 있던, 너무나 일면적이고 비변증법적이었던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각주:9]

 

그런가 하면, 후기사회주의 시기를 대표하는 예술가 일리야 카바코프는 한 인터뷰에서 소비에트의 독특한 국제주의에 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소비에트는 소비에트 인민이 전 세계의 모든 문화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구 문화의 엄청난 양의 자료를 소비에트 내에 허용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나치즘에서처럼 울타리를 치고 차단했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지요. 소비에트에서는 박물관에서 서양미술을 전시하고 음악원에서 서양음악을 연주했습니다. 루나차르스키, 고리키, 지노비예프 덕분에 도서관에는 서양 문학의 최고 번역본이 가득했지요. 타향의 해외 문화는 항상 존재했습니다. 미술선생님은 우리에게 넌 이미 18살이고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데, 라파엘은 네 나이에 이미 마돈나를 그렸다고 말씀하시곤 했죠. 제가 태어난 곳은 본능적으로 서구와 연결돼 있었기에 저기여기를 말할 때 항상 두 개의 의자에 앉아있게 됩니다.”[각주:10]

 

그러나 후기 사회주의를 특징짓는 이런 역설적인 ()체제 상황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1980년대 후반 소비에트 지식인들 사이에서 서구 서적의 지하유통은 이미 드문 경우가 아니었다. 가족의 외국여행 특권을 오직 한 가지 목적에 이용했던 페트롭스카야는 어떤 서구학자라도 부러워할만한 최신의 서구 서적 컬렉션을 모스크바 동료들 사이에 퍼트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동구와 서구 학자의 중간에서의만남은 결코 신기한 예외 같은 것이 아니었다고 말해야 한다. 다만 염두에 둘 것은 서구 사상과의 접촉 자체는 개혁 개방 조치 훨씬 이전부터, 냉전기 국가 정책 내부에서 이미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1987년 모스크바에서의 첫 만남 이후, 바야흐로 물꼬가 트인 동서교류는 마치 봇물이 터진 것처럼 숨 가쁘게 이어졌다. 19881월과 4월 벅-모스가 따낸 맥아더 재단의 지원을 통해 철학연구소와 코넬 대학으로의 상호방문이 이루어졌고, 그 해 10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제임슨은 (벅모스의 강권으로) 포도로가를 만났다.[각주:11]

 

이듬해 4월 하버마스가 철학연구소를 공식 방문했으며, 이는 198910하이데거 탄생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개최로 이어졌다.[footnote]-모스는 옵저버 자격으로 참여했는데, 하이데거의 저작을 편집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헤르만과 하이데거의 전 제자였던 안츠, 튀빙겐의 비토리오 회슬레 등이 참여했고, 리처드 로티, 오토 푀겔러, 장-뤽 낭시의 발표문은 저자들 없이 낭독되었다.[/footnote] 한 달 뒤인 11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이듬해인 19901월 벅-모스는 소비에트-프랑스-미국 국제심포지엄 공동 여성 의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장 뤽 낭시와 함께 해체주의 워크숍에 참여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포도로가와 낭시 부부

 

 

그리고 마침내 그해 4월 자크 데리다의 모스크바 방문이 성사되었다.

1990년 모스크바 철학연구소에서 리클린이 찍은 데리다의 사진

 

 

그는 모스크바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소비에트의 정신분석학 전통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정신분석가 아내를 동반했는데, 포도로가 그룹이 공식적으로 데리다 부부를 접대했다. 포도로가의 초청으로 철학연구소를 방문했던 데리다는 이후 모스크바 대학에서 공개 강연을 했는데, 스탈린 사망 기념일 기간에 이루어진 이 강연은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의 가장 중요한 지적 사건(스캔들) 중 하나였다. 많은 연구자들은 바로 이 강연이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아이디어가 처음 데리다에게 떠오른 계기였다는데 의견이 일치한다.[각주:12]

 

 

 

이후 벅-모스와 포도로가 양측의 모든 관심은 10월로 예정된 두브로브니크 강좌를 향해 조준되었다. 동유럽 체제가 급속도로 해체되면서 역사의 성좌가 시시각각으로 변화되는 상황 속에서 애초 염두에 두었던 강좌 명인 냉전 담론 해체하기는 이미 부적절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럼에도 1970년대에 마르쿠제가 출범시키고 하버마스가 이어받은, 한 해전에 악셀 호네트가 주관했던 이 강좌, 지난 수십 년간 동서 유럽 학자들의 만남의 장이라는 특별한 역할을 수행해 온 바로 이 장소에서, 이제껏 이어져 온 교류협력의 결실이 그 절정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건 전혀 허황된 기대가 아니었다.

 

두브로브니크 세미나와 관련된 공식기록물은 현재 전혀 남아있지 않다. -모스와 포도로가는 당시 발표되었던 텍스트들을 출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각주:13] 오늘날 두브로브니크는 오로지 참석자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바, 이는 역사적 사건에 신화적 아우라를 보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1998년 모스크바에서 미하일 리클린과 나눈 대담에서 벅-모스는 당시의 특별한 분위를 이렇게 회상한다.

 

만일 그때 발표한 논문들을 묶어서 책으로 냈더라면 그 책이 그곳을 지배하던 특별했던 분위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었을지 나는 확신할 수 없어요. 당신 말대로 그때 그곳의 분위기는 정말 각별했지요. 산책, 달빛 어린 강가에서의 수영, 다양한 사람들이 한 방에 모여 앉아 토론하던 무게감이랄까..... 모든 것이 저마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각주:14]

 

두브로브니크를 둘러싼 이런 특별한 느낌은 그것의 위태로운 일시성, 두 번 다시 반복되지 못할 일회성을 그 배경으로 한다. -모스는 참여자 중 그 누구도 당시 벌어지던 사태에 관한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으며, 당대적 사건의 독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아마 그때 세미나에 참석했던 유고슬라비아 학생들 중에는 자기 나라에서 곧 전쟁이 터질 것을 예감한 친구들도 있었을 거예요. 반면 우리들은 전쟁의 위협을 그다지 심각하게 고려하지 못했죠.”[각주:15]

 

지난 2009년에 해체와 파괴. 현대철학자들과의 대담(미하일 리클린, 최진석 옮김, 그린비)이라는 제목으로 국역된 리클린의 책은 전적으로 두브로브니크 세미나가 만들어낸 결과물에 해당한다. -모스를 포함해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대담자는 세미나의 직접적인 참여자이거나 혹은 최소한 해당 시기에 포도로가 사단과 관련을 맺었던 인물들이다. 유일한 예외라면 프레드릭 제임슨인데, 어떤 점에서 이 누락마저도 시사적이다

 

 

그러나 한치 앞의 사태를 예견하지 못했던 그들의 무능과는 별개로, 해당 시기를 특징짓는 고도의 예측불가능성과, 잠재적 가능성으로 포화된 비결정적 성격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 벤야민이 두 번째로 모스크바를 방문한다면 그 적기가 언제라고 보느냐는 리클린의 흥미로운 질문에 벅-모스는 이렇게 답한다. “그건 아마도 1989년에서 1991년 사이가 아닐까요? (...)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시기에는 시민사회의 활력 같은 게 여러 가지 형태로 잔존해 (...) 이상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소비에트-러시아적인 창조 정신이 흘러넘치고 있었지요.”[각주:16] 그러니까 벅-모스가 목도했던 소비에트의 저 마지막 시기, 말하자면 60년 전 벤야민의 모스크바 방문이 그랬듯 비결정적 가능성으로 충만했던 끝에서 두 번째 세계에 해당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그들의 만남은 끝에서 두 번째 세계중간에서이루어졌던 것이다.[각주:17]

 

 

 

하지만 그들을 인메디아스레스에서 만날 수 있게 해준 공통성의 기반에도 불구하고 막상 시작된 프로그램은 거의 파국이라 부를만한 심각한 어긋남과 균열을 노출했다. 꿈의 세계와 파국의 마지막 쳅터 전체를 할애해 벅-모스가 되짚고 있는 이 균열의 지점이 각별히 의미심장한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어긋남이란 결국 상대에 대한 누적된 선입견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자신의 은닉된 본질을 고스란히 되비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실패를 반추하는 그 자리가 그들이 누구였는지를 넘어 우리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되묻는 반성의 계기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 2편에서 계속!

  1. 벤야민 발터. 『발터 벤야민 선집 5: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초현실주의 외』, 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08, 332쪽. [본문으로]
  2. Susan Buck-Morss, “On Valery Podoroga: Reflecting on the Years of Our Friendship... [О Валерии Подороге: Размышляя о годах нашей дружбы…],” ЧЕЛОВЕК[The Human Being], Vol. 32, 5, (2021), pp. 29-49. 이후로 Buck-Morss 2021로 표기. [본문으로]
  3. Buck-Morss 2021: 31. [본문으로]
  4. Susan Buck-Morss, Dreamworld and Catastrophe: the passing of mass utopia in East and West, Cambridge/Massachusetts/London: The MIT Press, 2000, p. 218; 수잔 벅모스, 꿈의 세계와 파국, 윤일성, 김주영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2008, 261. 한국어본의 번역문제로 이후 괄호 안에 국역본 쪽수를 명기하되, 인용 및 번역은 모두 원본에서 직접 하기로 한다. [본문으로]
  5. Ibid, 218(261). 페트롭스카야는 서구 국가로의 이주를 택하는 대신 포도로가와 함께 러시아에 남았다. 이미지 및 시각문화 분야의 뛰어난 저작들을 발표해 2011년에 안드레이 벨르이 상을 수상했다. 특히 그녀가 2002년에 창간한 저널 푸른소파Синий диван』는 동시대 서구 철학과 이론을 러시아에 전파하는 독보적인 통로 역할을 맡으면서 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 지식장에서 각별한 역할을 수행했다. [본문으로]
  6. 얌폴스키는 1991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에 자리를 잡은 이후 포도로가, 리클린 등과 함께 모스크바 철학자 그룹을 결성했다. 얼마 후 이 그룹의 주도로 아드 마르기넴(Ad Marginem)”이라는 출판사가 설립되는데, 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 인문학 장에서 아주 특별한 역할을 수행했던 이 출판사의 명칭은 얌폴스키가 고안한 것이다. [본문으로]
  7. 미하일 얌폴스키,『영화와 의미의 탐구』 1권, 김수환 외 옮김, 나남, 2017, 320쪽. [본문으로]
  8. 알렉세이 유르착,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김수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9, 414. [본문으로]
  9. 보리스 그로이스, 코뮤니스트 후기, 김수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7, 93. [본문으로]
  10. https://daily.afisha.ru/archive/vozduh/art/ilya-kabakov-hudozhnik/ [본문으로]
  11. 프레드릭 제임슨은 1991년에 학술지 South Atlantic Quarterly페레스트로이카 특집호(Vol. 90, Issue 2)를 편집했는데, 플라토노프에 관한 포도로가의 글과 나란히 예브게니 도브렌코, 미하일 옙슈테인 등의 논문이 게재되었다. 도브렌코와 옙슈테인은 이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각각 사회주의 리얼리즘러시아포스트모더니즘분야의 권위자가 되었다. 3년 후 출간된 제임슨의 책 The Seeds of Time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4)에서 플라토노프의 작품세계는 그의 유토피아 논의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는데, 거기서 포도로가의 영향은 명백하게 드러난다. [본문으로]
  12. Jacques Derrida, Specters of Marx: The State of the Debt, the Work of Mourning, and the New International, trans. Peggy Kamuf, intro. Bernd Magnus and Stephen Cullenberg, New York: Routledge, 1994. 이 방문 경험은 “Back from Moscow, in the USSR”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낳았는데, 리클린이 편집한 책 모스크바의 자크 데리다: 여행의 해체 Jacques Derrida v Moskve: Dekonstruktsiia pyteshestviia(Moscow: RIK "Kul'tura," 1993)에 처음 러시아어로 실린 후에 영어로 번역되었다(Jacques Derrida, "Back from Moscow, in the USSR," trans. Mary Quaintaire, ed. Peggy Kamuf, in Mark Poster, ed., Politics, Theory, and Contemporary Cultur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3), pp. 197-235. [본문으로]
  13. 이 결정의 정확한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벅-모스가 1994년에 발표한 “The Cinema Screen as Prosthesis of Perception. Historical Account”에서 수차례 포도로가와 페트롭스키야의 언급을 직접 인용하면서 각주에 두브로브니크(1990, 10) 발표문(듀크 대학출판부 근간)”이라고 명시해놓은 것으로 보아 최소한 출간 계획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14. 수잔 벅-모스, “유토피아를 위한 장소는 언제나 존재한다: 수잔 벅-모스와의 대담,” 『해체와 파괴. 현대철학자들과의 대담』, 미하일 리클린, 최진석 옮김, 그린비, 330쪽. [본문으로]
  15. 앞의 책, 305. “세미나의 참가자들은 그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했어요. 심지어 다른 이들보다는 더 예민하게 직감했어야할 슬라보예 지젝마저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죠.” 306쪽. [본문으로]
  16. 앞의 책, 309쪽. [본문으로]
  17. 보편적인 기존 독트린들 간의 틈새에서 인식되기만을 기다리는 이름 없는 가능성들”(역사: 끝에서 두 번째 세계,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12, 232)이 살아 숨 쉬고 있는 문지방의 시간, 곧 역사의 대기실풍경을 가리키는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이 용어를 빌려 나는 1927년 벤야민의 모스크바 방문을 다시 읽어보려 시도한 바 있다. 김수환, 혁명의 넝마주이.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와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문학과지성사, 202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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