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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미시정치: 맑스와 현재 이전의 역사』 서문(2/2)

"현재와 같은 시간은 없다"

 

제이슨 리드

번역: 이승준(연구공간L)

 

 

(계속)

 

일례로 알튀세르의 가장 도발적인 철학적 개념인혹은 내재적 인과성”—이 개념으로부터중층결정및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에 대한 그의 후기 연구가 뒤따라 나온다은 오늘날 자본주의의 발전을 도표화하는 역사적 분기점의 수준에, 그리고 맑스 문헌의내재성과 모순적 논리를 다루는 후기 연구를 열어젖히는 철학적 분기점의 수준에 위치시킬 수 있다.[1] 알튀세르는 『자본 』이 그가 구조적 혹은 내재적 인과성이라 부르는 인과성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주장했다. 원인과 결과의 분리이 분리는 늘 결과를 그 기저에 깔려있는 본질의 단순한 외관으로 정립한다와는 다르게, 내재적 인과성은 자신의 결과 바깥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원인을 정립하며, 이는 모든 결과가 동등하며, 또한 동시에 원인이라고 말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따라서 이것은, 결과들이 구조 바깥에 있지 않으며, 구조가 자신의 특징을 각인하기 위해 도달하는 미리 존재하는 대상요소공간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와는 달리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구조가 그 결과들에 내재하고,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결과들에 내재하는 원인이라는 것이며, 구조의 전체 실존이 그 결과들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요컨대 구조는 그것의 독특한 요소들의 특정한 결합에 불과하며, 그 결과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2]

 

이러한 인과성 이론은 생산양식에 관한 가장 공식적인맑스주의적관념에 깔려있는 가장 경직된 몇 가지 위계를 파괴한다. 만일 원인이든 결과이든 모든 것이 내재적이라면, 상부구조나 의식의 관념 및 생산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갈등으로부터 나오거나 그러한 갈등을 반영하는 단순한 결과로 이해하는 일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것들도 역시 원인들로, 즉 특수한 경제나 생산양식의 재생산 및 해체의 구성조건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른 문화나 신념 체계에 의해 변형 및 변경되는 순수하고 단순한 경제란 없다. 즉 항상 이미 특수한 주체성 생산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약화되는 생산양식만이 존재한다. 내재적 인과성은 결국 주체성 자체의 물질성에 대한, 생산양식과 나란히(그리고 생산양식 내부에) 존재하는예속/주체화 양식의 물질성에 대한 재검토를 수반한다. 내재적 인과성과 전통적인 맑스주의 도식의 차이에 대한 극단적 사례를 제공하는 도발적 정식화 안에서 발리바르가 말했듯이,

 

심지어 나는 그러한 도식이 어떻게 이상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지를 우리가 기술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역사성의 보완물 또는 대리보충처럼 작동하는토대상부구조의 합이 아니라, 양립 불가능한 동시에 분리 불가능한 설명의 두토대들또는 두 결정들의 결합, 예속/주체화 양식생산양식(또는 더 일반적으로 말해, 이데올로기적 양식과 일반화된 경제적 양식)의 결합일 것이다. 대립적인 의미에서이긴 하지만 이 두 양식 모두 물질적이다. 주체화의 물질성과 생산의 물질성이라는 이 상이한 의미를 명명하기 위해 전통적인 용어인 상상계실재계가 스스로를 제안한다. 만일 모든 역사적 정세 내에서 상상계의 결과들이 실재계를 통해서만 그리고 실재계에 의해서만 나타날 수 있으며, 실재계의 결과들이 상상계를 통해서만 그리고 상상계에 의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한다면, 우리는 그 용어들을 채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역사에 대한 구조적인 인과 법칙은 다른 현장을 통한 그리고 다른 현장에 의한 우회이다. 맑스를 패러디해 경제는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자기 자신의 역사를 갖지 않는다고 말하자. 왜냐하면 이 둘 각각은 자기 자신의 결과의 작용인인 상대방을 통해서만 자신의 역사를 갖기 때문이다.[3]

 

따라서 내재적 인과성에서이데올로기의 물질성에 대한 알튀세르의 후기 연구의 전조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또한 오늘날의 포스트-구조주의 안에서 내재성 문제와 주체성 생산에 대한 후기 연구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 내재적 인과성이유물론은 사물의 생산을 초과하고, 관념관계욕망의 생산 및 생산성을 포함한다는 엄격한 유물론적 관념에 기초를 둔다면, 그것과 필연적 상관관계가 있는 주장은물질은 여러 가지 의미로 논의된다는 점이다.[4] 주체성의 물질성은 생산의 물질성, 기계의 물질성, 권력관계의 물질성과 같은 의미로 얘기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이러한 차이는 역사적으로 정적이지 않다. 내재적 인과성은 사회의 다양한 차원의 물질성이나 유효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내재적 인과성 개념을 주체성 생산의 문제로 확장하는 것은 그 개념에 대한 알튀세르의 발전을 넘어서는 것을 수반한다. 하지만 이러한알튀세르를 넘어서기는 동시에 다음 두 방향으로 작동한다. 알튀세르가 영향을 미친 사람들(특히 발리바르가 있으며, 또한 그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도 있다)에 대한 검토를 경유하는 방향과, 그와 동시에 범죄 현장으로 되돌아가기, 즉 맑스의 원본으로 되돌아가는 방향이 그것이다. 내가 다음 장에서 논증하겠지만, 자본주의 이전과 자본주의 사이에 그어놓은 맑스의 시대구분을 재해석하는 것은 가능하며, 또한 주체성의유효성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관점에서 자본의 형식적 포섭과 완전한 포섭 혹은 실재적 포섭에 대한 맑스의 구분을 재해석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자본주의 이전의 생산양식에서 생산활동은 특수한 생활형태와 특수한 주체성 구조의 재생산에 종속된다. 맑스가 주장하듯이, 고대 세계에서 생산의 새로운 발전은시민을 생산 및 재생산하려는 요구에 종속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생산은 더 이상 믿음욕망전통의 모든 특수한 구조의 재생산에 속박되지 않는다. 잘 알려진대로 맑스가 『공산당 선언 』에서 자본과 함께견고한 모든 것이 대기 속에 녹아 버린다라고 썼듯이, 이전 생산양식의 모든 전통과 신비화는 금전 연쇄에 의해, 즉 모든 것이 가격을 갖는다는 사실에 의해 파괴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그 자체로추상적인 주체적 잠재력”, 즉 훈육과 협력을 통해 발전해야 하면서 동시에 훈육과 다양한 예속/주체화 기술을 통해 포함해야만 하는모든 작업을 행할 수 있는 능력에 기반을 둔다. 뒤에서 다루겠지만, 적어도 이 일반적인 도식은 맑스가형식적 포섭이라고 불렀던 것, 즉 기존의 사회적기술적 구조에 임금을 부과함으로써 가능해진 가장 초기적인 자본주의 형태에 있어서는 참이다. 실재적 포섭 또는 맑스가 때때로특유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해, 주체성은 재생산되지 않고, 직접적으로 생산적이 되는데, 이는 추상적 잠재성의 형태에서가 아니라, 지식욕망정동의 형태에서 그렇다. 바로 이 맑스의 개념이 적어도 현재의 몇몇 문제를 여는 데에는 가장 가까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나의 논점은 그에 뒤이은 연구의 완전한 요약을 제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주체성이 생산양식에 내재한다는 점이 최종적으로 진술되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상이한 생산양식 내에서 주체성과 생산이 맺는 차등적 관계에 대한 검토를 열어젖히는 문제임을 지시하는 데에 있다.

 

 

발리바르의 말에 따르면 주체화 양식과 생산양식이 맺는 관계에 대한 차등적 분석은 사회에 대한 기능주의적 인식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단지 자본이나 다른 생산양식이 무한한 자기 생산 행위에서 필요로 하는 종류의 주체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관점이 비관적인 시대에서 훨씬 더 대중적인 것이 된 관점에서는 모든 차이, 모든 적대가 체계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오히려 그러한 인식, 즉 주체성을 결과이자 원인으로 동시에 재인식하는 것은 결과와 원인의 비동일성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5] 내가 다음 장들에서 논의하겠지만, 주체성 생산은 항상 특유한 것의 요구, 즉 이 경우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요구를 초과하면서도 동시에 미달한다. 내재적 인과성이라는 관념 자체에 함축된, 생산양식의 다양한 결과들을 원인으로 재인식하는 것은 기능주의의 관념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폭발시켜 모든 생산 방식의 역사성과 우연성에 대한 다양한 검토를 가능하게 한다.

 

존재의 가장 덧없고 찰나의 차원들과 주체성을 구성하는 욕망과 신념들이 생산에서의 변형의 물질적 조건이라는 사실에 대한 일반적 재인식이 그 자체 자본 자체의 변형, 즉 지식욕망섹슈얼리티의 상품화에 의해 야기된다. 이 두 진영 사이에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대립은 알튀세르의 저작과 그의 서클의 저작들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들 저작에서 횡단되는 역사를 배제하는 경우에만 존재한다.[6] 누군가가 1960년대 알튀세르의 내재적 인과성에 관한 저술을 기점으로 이러한 지성적 역사를 이어가고자 한다면, 지난 세기말 내내 대륙철학과 포스트-구조주의를 통해 이어져 온 내재성 문제의 역사를 추적하는 것이 가능하다.[7] 욕망이 모든 사회적 관계에 내재한다는 점에 관한 들뢰즈가타리의 공식, 또는 권력이 주체성과 지식에 내재한다는 점에 관한 푸코의 주장은 알튀세르의 지적 유산을 계승할 뿐만 아니라 또한 마찬가지로 동일한 문제를, 즉 프레드릭 제임슨이 주장했듯이 초월성, 본성, 무의식의 저 최후의 저장고가 철저하게 상품화되고 착취되었을 때의 사유의 저항을 계승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8]

 

더욱이 전자의 저자들이 전통적 맑스주의의 노동 착취에 대한 연구를 거부하는 것은 생산의 확장적 의미, 즉 욕망의 생산이나 권력관계의 생산성을 재정의하는 형태를 띤다. 여기에는 다차원적인 인간 존재의생산성과 물질성에 대한 탐구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인간학적 상수로서의 생산 관념이나 노동 관념에 대한 비판이 있다.[9] 인간학적이고 도구적인 노동도식에 대한 거부, 즉 도구를 이용해 대상을 다루는 주체에 대한 거부는 역사적으로서비스지식에 기반한 경제의 등장과 일치하는데, 이러한 경제에서 노동은 주체성에 의한 주체성(취향욕망개념)의 생산을 포함하면서 확장되었다. 지성사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중첩은 우연한 일치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지성사의 구축에는 큰 관심이 없다. 오히려 나는 내가 앞서 소개했던 이론적 난관을 극복하는 맑스의 생산양식 개념 혹은 문제와 관련해 알튀세르푸코들뢰즈가타리의 작업이 어떤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

 

내재적 인과성 개념은 겉보기에 상반되는 연구방식들 간의 일반적 연속성(이 연속성은 내가 여기에서 제시하는 것보다 분명히 훨씬 더 복잡하고 골치아프다)을 도입하지 않는다. 알튀세르는 내재적 인과성 개념을 생산하기 위해 맑스가 정치경제학 문헌들과 대결하면서 쓴 그의 고유한 저작들에 대한 특수한 독해전략을 적용해야만 한다. 맑스는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의 주장과 논쟁하면서 단순히 오류를 교정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맑스는 그 대신 정치경제학의 무의식적인 이론적 전제인 인간학과 역사철학을 비판적으로 파헤쳤다. 알튀세르는 특정한 텍스트의 진술되지 않은 전제나 한계를 읽는 이러한 독해방식을 징후적 독해”(lecture symptomale)로 명명했다. 그는 이 방법을 주로 맑스의 고유한 저작인 『자본 』에 적용했는데, 『자본』은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경제학 저작으로, 따라서 완전히 철학 바깥에 있으면서 내재적 인과성을 사회적 관계의 접합 개념으로 생산한다고 간주되었다. 징후적 독해는 고유한 맑스 사상의 진술되지 않은 전제 및 문제설정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내재적 인과성 개념을 생산한다. 맑스는 내재적 인과성 개념이나 용어에 접근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본 』을 구성하는 노동의 인간학에서 노동일 투쟁에 대한 역사적 문서들에 이르는 다양한 철학적 진술의 노선과 구체적 탐구의 노선 사이에서 글을 썼다.맑스 사상의 전반적인 #절합(articulation)에 초점을 맞추면서 알튀세르는 (발리바르랑시에르마슈레이 등의 동조자들과 함께) 맑스주의의 역사를 구성했던 지적으로 더 빈곤한 몇몇 해석 전략『공산당 선언 』과 같은 문헌들에 실린 강조된 한 두 문장을 전체 체계를 위한해법으로 인용하는 전략과 명시적으로 단절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알튀세르(그리고 발리바르)가 후기 저작에서 맑스 저작의논리에 주의를 기울여 그 안에서 작동하는 다양한 철학적정치적역사적 긴급성 간의 긴장에 대한 탐구로 확장했다는 점이다. 알튀세르의 초기 저작들이 소비에트 맑스주의와 서구 맑스주의의 일탈에 맞서 맑스 사상의 통일성을 구축하려고 시도했던 반면, 후기의 전략은 이러한 이른바 일탈(경제주의인간주의”)이 맑스의 고유한 저작에 의해 생산된 가능성들이었음을 인식하려 했다. 맑스 저작의 전반적인 논리나 접합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처음에는 내재적 인과성 개념을 생산했고, 이후에는 맑스 저작의 다양한 논리들 및 그 논리들 안에서의 긴장을 인식할 가능성을 생산한다. 이것은 반드시 어떤 한계지움이 아니며, 또한 이론적 겸손의 영구적 몸짓에 불과한 조건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혁신적일 수 있는 맑스 독해의 조건이다. 즉 정통 교리의 부재는 (교리의) 재생산적 독해보다는 (개념문제질문의) 생산적인 독해를 가능하게 한다. 일단 명확한 해석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또한 진정한 맑스주의적 혈통을 확립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가 빠지게 되면, 현재의 요구에 비춰 개념을 생산하기 위해 맑스를 읽는 것이 가능해진다.

 

트론티, 네그리, 비르노, 마리아로사 달라코스타 등의 자율주의적 맑스주의(혹은 오페라이스모) 또한 이 책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와 같은 이른바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와 마찬가지로, 자율주의적 맑스주의는 맑스의 문헌에 대한 새로운 해석학적존재론적 관점을 제시하는데, 그래서 그러한 관점은 구조주의적 맑스주의처럼 사물의 생산으로 이해된 토대와, 주체성이나 의식의 생산으로 이해된 상부구조 간의 분리를 풀어내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러한 대칭성을 확장해 현재의 지적 역사 내에서 간과된 이행의 지점으로서계보학적입장을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맑스주의가 자율주의적 맑스주의를 완전히 간과했기 때문인데, 유일하게 중요한 예외는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트론티와 네그리로부터 [이론적 근거를] 끌어낸 들뢰즈와 가타리이다.[10]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에게서 해석학적인 것과 존재론적인 것, 또는 물질성에 대한 해석 전략과 근본적 재정의 사이의 수렴점이 내재적 인과성이었던 반면, 트론티와 네그리에게서는 유사한 수렴점이자율주의적 가설로 명명되었다. 기본적으로 자율주의적 가설로 진술된 것이란 저항, 즉 노동계급의 저항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변형 및 발전에 선행하고 그것을 예시한다는 주장이다.[11]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혁명적인 것, 자본의 생산양식의 기술적사회적 차원을 변형하는 것, 세계를 뒤덮으려고 이동하는 것은 자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자본은 주체적인 노동력과의 적대적 대치에 의해 스스로를 변화 및 변형하도록 강제된다.

 

그러한 적대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변형하는 방식에 대한 가장 분명한 사례는 노동일을 둘러싼 투쟁 및 그에 뒤따른 입법에 대한 맑스의 기록이다. (이에 대해서는 2장에서 논의할 것이다.) 공장이라는 공간에 노동자 집단을 모아놓는 것은 협력의 네트워크를 한데 모으는데, 그것은 비록 자본을 위해 일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효과로 환원될 수는 없다, 이러한협력적 주체성은 노동일의 길이에 맞서 투쟁하는 일에 자신의 힘과 에너지를 쏟는다. 그에 뒤이은 단축된 노동일의 입법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재조직화로 이어진다. 즉 그것은 외연적 착취체제에서 내포적 착취체제로의 이행이며, 노동은 기계의 이용 등을 통해 더 짧은 시간 동안 더 생산적이 된다. 이러한 사례이 사례는 내 생각에 맑스의 저항사상의 상당부분을 실례로 보여주고 활성화시킨다에서 중요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나 이성의 간지가 아닌, 적대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구성이 맺는 관계에 있다. 단축된 노동일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속도와 노동구조의 변형을 수반하는 작업장의 기술적 변형과 같은 문제를 둘러싸고 새로운 갈등 및 새로운 적대를 가능하게 한다. 네그리가 말했듯이, “모든 새로운 구조의 구성은 적대의 구성이다.”[12]

 

자율주의적 가설은 전통적으로 계급투쟁을 통해 지시된 것을,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구성하는 적대를 확대하고 심화시킨다. 그것은 때때로 단순한 은유전투의 장 위에 고정된 두 거대한 계급가 될 위험이 있는 것을, 서로 맞물려 있는 저항과 착취의 전술에 대한 구체적 분석으로 전환시킨다. 이러한 전술은미시적규모의 공장과 작업장에 위치지어지는데, 공장과 작업장에서는 다양한 기술과 기법이 거기에 모인 몸정신을노동력이라 불리는 계산 가능한 상품으로 전환시키는데 사용된다. 따라서 자본의적대적차원에 대한 인식과 푸코의 권력 분석 간에는 결정적인 비교점이 있다. 권력에 초점을 두는 분석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 간의 현재의 대립(이는 맑스와 막스 베버 혹은 맑스와 프리드리히 니체 간의 오랜 갈등을 다시 현재라는 무대에 세우는 것으로 이해된다)은 세계 자체에 불가피하게 새겨진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오늘날의 편견과 구별의 부산물임을 드러낸다. 동시에 자본의 적대적 구성에 대한 인식은 단지 공장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즉 자본이 공장의 벽을 넘어 사회적 공간 전체를 포괄하는 쪽으로 확장되는 시대에 위험한 물신이 될 위험이 있는 장소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자율주의적 가설에 따르면 자본의 변형, 새로운 공간과 기술로의 자본의 확장은 이전의 갈등의 결과이자 대체이다. 현대적인 최첨단의 생산과정은 과거에 벌어진 투쟁의 흔적을 숨기면서 유지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이러한 투쟁들에 의해 변형되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변화함에 따라 갈등의 바로 그 조건도 변화한다. 따라서 내가 다음 장에서 논의하겠지만, 자율주의적 가설은 구식이 된 계급투쟁의 도식을 오늘날의 21세기 자본의 네트워크와 관계로 확장하고 변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노동일 투쟁의 사례에서와 같이, 오늘날의 이러한 투쟁은 점점 더 주체성에 대한 논쟁을, 즉 지식욕망노동관계가 어떻게 활용되거나 착취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을 수반한다. 내가 마지막 장에서 주장하겠지만, 오늘날자본에 맞서는적대는 종종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의 사회적 활동인 지식욕망소통의 수탈과 착취를 둘러싸고 틀지어진다.

 

자율주의적 가설이 맑스주의라는 공식 명칭 하에서 쓰여진 것자본주의를 타도하려는 (과장되어) 진술된 의도에도 불구하고 확산되는 자본 권력의 이미지를 거의 마조히즘적으로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는 담론의 많은 부분과 화해하기가 아주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이러한 관점을 발굴하는 것이 비판적인 독해 전략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맑스가시초축적”(자본주의 이전의 사회관계를 파괴하는 데 필요한 폭력), 노동일의 길이를 둘러싼 투쟁, 기계와의 갈등 등에 할애한 그러한 구절들에서 적대의 형상과 힘을 추출할 수 있는 일종의 징후적 독해를 필요로 한다. 맑스 저작의 소수자적 논리를 구성하는 이러한 구절들에는 노동계급의 투쟁성, 맑스가 때때로산 노동이라 부른 것의 요구와 욕망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의 조건이자 한계로 기능하는 방식에 대한 분석이 있다. (이러한 징후적 독해는 『 자본』의 완성된 부분을 넘어서 『요강』에 수록된 주석과 초고, 즉 산 노동력의 파괴적인 힘에 더 주의를 기울이는 초고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내재적 인과성과 마찬가지로, 자율주의적 가설은 자본주의의 형성과 발전의 적대적이고 중층결정된 역사성을 폭로함으로써 자본주의가 하나의 경제처럼, 즉 사회의자연법칙으로 기능하는 자기충족적인 일련의 시장 관계처럼 기능한다는 바로 그 관념에 도전한다.

 

 

그러나 뒤에서 논의하겠지만, 두 가지 해석 전략 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 차이를 거칠게 기술하면, 내재적 인과성이 궁극적으로 생산양식 자체가 주체성 생산에, 즉 맑스의 용어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필요조건을자명한 자연법칙으로 간주하는 주체의 생산에 의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 자율주의적 가설은 주체성인 산노동의 거대한 생산력을, 자본주의에서 엄청난 부의 생산의 기저를 이루면서 그러한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상정한다. 이 두 가지 상이한 전략은 두 가지 다른 의미의 소유격과 관련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편으로 알튀세르에서 나온 사유의 노선은 주체성이 어떻게 자본다양한 전략이데올로기기술에 의해 생산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다른 한편으로 트론티와 네그리를 통해 확장된 사유의 전통은 자본의 기저를 이루는 주체성엄청난 생산력에 초점을 맞춘다. 비관주의와 낙관주의에 상응하는 상이한 두 가지 이론적 관점으로서 이 두 관점을 양자택일적으로 대립시키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맑스의 문헌에 대한 비판적 독해를 통해 이 둘을 추적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다. 오로지 이러한 독해를 통해서만, 세계가 엄청난 노동력이 노동력은 물건의 부를 생산할 뿐만이 아니라, 또한 살아 있는 세계를 구성하는 지식정동욕망도 생산한다에 의해 만들어지고 변형되는 것이 더욱더 분명해지는 현재의 정세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기에는 생산력에 대한 자본의 지배는 더욱더 견고해지는 것 같다. 현재를 특징짓는 것처럼 보이는예속화주체화의 이러한 모순적 동일성을 사유하고 그에 관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전략 및 관점을 결합하는 필요하다.

 

여기 이 서문에서 나의 논점은 우선 다음 장에서 탐구될 맑스알튀세르네그리트론티푸코들뢰즈 등등 간의 다양한 교차가 단지 일종의 이론적 절충주의의 부산물이 아니라는 점, 오히려 이 다양한 관점들을 연결하는 강력한 철학적 기저흐름과 갈등이 있다는 점을 증명하는 데 있다. 이러한 개념적 기저흐름이 현재를 이해하는 데 이용되는 오늘날의 범주와 지적인 편법에 의해 빛을 잃었다는 점은 그런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한 교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교차가 현재를 철학적으로 파악하려는 모든 시도에 있어, 즉 주체성 생산에 있어 본질적이라고 내가 주장하는 문제를 지적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의 기저에 깔린 지적 역사 및 궤적의 희미한 개요를 개괄함과 동시에, 내가 현재의 대립을 가르는 일종의 지적인대항-역사를 단순히 생산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내가 여기서 발전시키고 있는 문제와 가설, 즉 생산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가 주체성 생산이 아니라면 비판적으로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맑스에 접근하기 위한, 오늘날 대부분의 철학(통상이론이라고 불리는 것)의 기저에 깔린 정치적철학적 긴급성을 이해하기 위한, 그래서 현재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해석전략으로서 그것의 고유한 장점으로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즉 주체성의 생산은 그것의사용가치에 따라, 현재에 개방할 가능성에 관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끝)



각주

 

[1] Antonio Negri, “Notes on the Evolution of the Thought of the Later Althusser”, trans. Olga Vasile. In Postmodern Materialism and the Future of Marxist Theory, edit. Antonio Callari and David F. Ruccio, Hanover, N.H.: Wesleyan University Press, 1996, p. 58.

 

[2] Louis Althusser, “The Object of Capital”, in Louis Althusser and Étienne Balibar, Reading Capital, trans. Ben Brewster. London: New Left Books, 1970, pp. 188-189. [한글본] 루이 알튀세르, 에티엔 발리바르, 『자본론을 읽는다』, 김진엽 옮김, 두레, 1991, 239-240.

 

[3] Étienne Balibar, “The Infinite Contradiction”, trans. Jean-Marc Poisson with Jacques Lezra, In Depositions: Althusser, Balibar, Macherey, and the Labor of Reading, Yale French Studies 88, 1995, p. 160. [한글본] 에티엔 발리바르, 「무한한 모순」, 배세진 옮김, 『문화과학』, 2018년 봄호, 통권 93, 문화과학사, 2018, 361-362.

 

[4] 알튀세르에 따르면, “물론 하나의 장치와 이 장치의 실천활동 안에서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존재는 포석이나 소총의 물질적 존재와 동일한 양상을 띠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로 취급될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물질은 여러 의미로 논의되며’, 더 정확히 말해 그것은 여러 상이한 양상들로 존재하며, 그 양태 모두는 최종 심급에서물리적물질에 뿌리내린다.” 이에 대해서는 Althusser, “Ideology and Ideological State Apparatuses: Notes Towards an Investigation”, trans. Ben Brewster, In Lenin and Philosophy, New York: Monthly Review, p. 166([한글본] 루이 알뛰세, 󰡔레닌과 철학󰡕, 이진수 옮김, 백의, 1997, 160), Althusser, Sur la reproduction, p. 299([한글본] 알튀세르,

『재생산에 대하여』, 388-389)를 보라.

 

[5] 발리바르는 구조주의에 대한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정의를 제공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조건에서 구조주의를 이해한다. 즉 우리는 구조주의를 집합들이나 총체성들을 구성하는 조합적인 도식이나 위계적인 도식으로서가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서로 다른 동일성들의 문제설정, 기능성들의 표상 내에서 원인들의 이중적 기입과 이 원인들의 생산성의 초과에 대한 분석,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에게 있어 사건들의 비동시대성의 무한한 토픽으로 이해한다.” 이에 대해서는 Balibar, “The Infinite Contradiction”, p. 161을 보라. [한글본] 발리바르, 「무한한 모순」, 365.

 

[6] Antonio Negri, “The Specter’s Smile”, trans. Patricia Dailey and Costantino Costantini. In Ghostly Demarcations: A Symposium on Jacques Derrida’s Specters of Marx, edited by Michael Sprinker, New York: Verso, 1999, p. 5. [한글본] 안토니오 네그리, 「유령의 미소」, 자크 데리다 외, 『마르크스주의와 해체: 불가능한 만남? 』, 진태원한형식 옮김, , 2009, 27-29.

 

[7]  질 들뢰즈는 알튀세르푸코와 자신의 푸코에 관한 책에서의 작업 간의 직접적인 궤적, 즉 바뤼흐 스피노자의 부재한 이름을 채우는 궤적을 제시한다. 들뢰즈는 권력에 관한 푸코의 진술을 내재적 인과성의 문제에 대한 일반적 역사, 즉 맑스에 대한 알튀세르의 스피노자적 해석을 포함하는 역사 내에 위치시킨다. 내재성에 대한 들뢰즈의 이해는 여러 가지 면에서 내재적 인과성에 대한 알튀세르의 이해를 보완하는데, 각각의 경우 그것은 정체성이 아니라 내재적 인과성 안에 내재하는 차이를 재인식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내재적 원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재적 원인은 자신의 결과 안에서 현실화되고 통합되며 구별되는 원인이다. 혹은 오히려 내재적 원인은 자신의 결과에 의해 현실화되고 통합되고 구별된다. 그러한 방식에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추상적 기계와 구체적 배치 사이에 상관관계 혹은 상호적 전제가 있다. (푸코는 구체적 배치에 대해메커니즘“[장치]이라는 명칭을 남겨두었다.) 만약 결과들이 어떤 것을 현실화하면, 이는 힘들 간의 관계 혹은 권력관계가 자신들의 유체적 물질과 자신들의 분산적 기능에 형태를 부여할 수 있는 거시적 전체에 들어가지 않는 한에서 가상실효적잠재적불안정적소멸적분자적이기 때문이며 또한 단지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정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화 역시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국지적이나 이후 전면적이 되거나 전면적이 되는 경향을 지니면서, 힘들 간의 정렬, 힘들을 동질화하고 총괄하는 관계가 되는 하나의 통합 혹은 점진적 통합의 집합이다.” Gilles Deleuze, Foucault, Trans. Sean Hand.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8. p. 37. [한글본] 질 들뢰즈, 『푸코』, 허경 옮김, 동문선, 2003, 66.

 

[8] Fredric Jame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1991, p. ix. [한글본] 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 임경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2, 8.

 

[9] 맑스에 대한 푸코의 비판조차도생산개념의 확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종종 이름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심적인 프로이트-맑스주의적 적을 향해 가한 논쟁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역설적이거나 심지어 무의미한 일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성의 역사』에서 푸코는 근대의 섹슈얼리티 역사가 생산의 요구에 의해 지배된다는 가정, 즉 노동계급의 몸을 생산적으로 만들기 위해 성을 억압했다는 바로 그 가정을 비판한다. 이런 점에서 푸코는 모든 문화적정치적 현상이 경제적 생산의 관점에서 이해 가능해질 수 있다는 가정을 비판한다. 그러나 푸코의 비판은 권력이 이미 주어진 것(노동력이나 욕망)만을 빼거나 제한하거나 소외시킬 수 있다는 관념에 대한 비판으로 더 정확히 기술될 수 있다. 권력은 주체성세계존재를 억압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한다. 이 생산은 엄밀한 경제적 명칭뿐만이 아니라 도구성이나 목적론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생산 또는 권력의 생산성은 의도로 환원될 수 없는 결과를 생산하는 전략들의 우연하고 적대적인 상호작용에 열려 있다. 푸코는 자신의 철학적 역사에서 범죄자와 변태와 같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대한 주체적 형상을 지속적으로 제시하는데, 이 형상은 특정한 권력관계에 의해 생산되면서도 역으로 그에 맞서 투쟁하면서 새로운 관계를 생산한다. 푸코에게 있어서 생산은 주체의 속성이 아니라 주체성을 생산하면서 동시에 주체성에 의해 생산되는 갈등적 과정이다. 이러한 생산의 존재론 및 역사성은 자연적이라고 가정될 모든 것에 맞서는 데 동원되는데, 그래서 노동이나 욕망은인간의 구체적인 본질로 가정될 수 없다. 푸코는 경제적 생산에 대한 맑스주의의 주장을, 그에 수반하는 인간에 의한 인간 생산이라는 인류학으로 대체하면서, 생산개념을 권력의 갈등적이고 우연한 생산성을 포함하도록 확장한다.

 

[10] 두 권으로 이루어진 들뢰즈가타리의 『자본주의와 분열증』은 맑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간에 그어진 그러한 분리로 사유하는 것에 대한 중요한 예외로 남아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맑스주의적 문제설정 일반뿐만이 아니라 맑스의 생산양식 개념과 노동(또는 산 노동) 개념에 대한 해석과 복잡한 관계를 유지한다. 들뢰즈는 네그리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제 생각에 펠릭스 가타리와 저는 서로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둘 다 맑스주의자일 것입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모든 정치철학이 자본주의 및 자본주의가 발전시킨 방식을 분석하는 쪽으로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Gilles Deleuze, Negotiations: 1972–1990, Trans. Martin Joughin, New York: Columbia, 1995, p. 171를 보라. [한글본] 질 들뢰즈, 『대담 1972-1990, 김종호 옮김, 솔출판사, 1994, 190.

 

[11] 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Empir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0, pp. 260-280. [한글본] 마이클 하트, 안토니오 네그리, 『제국』, 윤수종 옮김, 이학사, 2001, 346-369.

 

[12] Antonio Negri, Marx Beyond Marx: Lessons on the Grundrisse, Transl. Harry Cleaver, Ryan Cleaver and Maurizio Viano, New York: Autonomedia, 1991, p. 56. [한글본] 안토니오 네그리, 『맑스를 넘어선 맑스』, 윤수종 옮김, 새길, 1994,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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