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언급했듯이, 약 10년간의 모색을 통해 벅-모스가 도달한 통찰의 핵심은 지난 세기 동쪽과 서쪽을 지배했던 두 체제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공통 기획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체제를 “공통의 기획의 서로 다른 부분들”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벅-모스가 이제껏 (주로 벤야민을 통해) 고찰해온 근대성의 주요한 매개변수들, 이를테면 기계, 대중, 영화, 무엇보다 ‘충격’과 ‘마비’ 같은 키워드들을 더 이상 하나가 아닌 두 개의 유형으로 ‘몽타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해당 개념들은 자본주의적 근대 뿐 아니라 공산주의의 그것에도 공히 확인되는 바, 비록 미국의 ‘충격’과 소비에트의 ‘충격’이 완전히 동일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그것들은 공통의 ‘기원’과 ‘모순’을 공유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비에트 건설의 경험과 그것이 낳은 스탈린주의의 양상은 이제 더 이상 “전체주의”의 딱지를 붙인 극단적 변종이나 예외상태로 간주될 수 없다. 근대성의 조건은 동서를 가리지 않는 바, 10년 전 두브로브니크에서 (동쪽 참여자들 본인에 의해 고수되었던) 동구 경험의 특수성 따위는 더 이상 견지될 수 없다. 소비에트가 공통의 ‘기원’과 ‘모순’을 공유하는 상대항(counterpart)으로 인식될 때 비로소 그 두 세계의 공존과 파국이 갖는 의미가 해명될 가능성이 도출된다.
“정치적 프레임”이라는 제목을 단 『꿈의 세계와 파국』 1장에서 벅-모스는 근대정치에 관한 두 가지 비전의 공통적 기원과 차별적 성격을 개괄하면서, 그 두 가지 세계 비전을 경쟁적인 “주권의 원-형태(ur-form of sovereignty)”로 제시한다. 이 주장의 정치적 근거는 “대중 주권과 적의 이미지”인데, 주로 벤야민(“폭력비판”)과 칼 슈미트에 기댄 그녀의 분석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버전의 대중 주권에 내재한 ‘동일한’ 모순을 탐색한다. 그 모순의 요체는 근대주권이 “초법적(super-legal)인, 혹은 어쩌면 법 이전의(pre-legal) 차원에서 성립하는 정당성의 모습, 보다 엄밀히 말해 폭력적인 권력의 야생지대(wild zone)를 그 자신의 핵심부에 지니고 있다”[각주:1]는 점에 있다. 이러한 궁극적인 정당성의 원천이란 결국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힘에 놓여 있는바, “주권의 행위, 곧 집단을 존재하도록 만드는 행위”란 “적을 식별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프랑스 혁명의 이중적 유산(주권자로서의 인민에 의한 “혁명적 테러의 원형”과 민주적 국민국가의 “군사적 침략의 원형”)을 공히 계승한 이 두 가지 세계 비전은 중대한 차이점 또한 지닌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각각의 “정치적 상상계”가 ‘공간’과 ‘시간’이라는 상이한 범주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민족국가의 정치적 상상계에서 절대적 우위를 점하는 것이 공간이라면, 계급투쟁의 사회주의적 모델의 핵심은 시간이다. 자본주의 열강에게 세계가 영토와 국경으로 이루어진 무장한 체스판이었다면, 볼셰비키에게 모든 분쟁은 장기적 역사 운동의 통시적 에피소드로 간주되었다. 마찬가지 논리에서 철의 장막이 서방에게 소비에트의 위협을 차단하는 ‘물리적(지리적) 장벽’으로 작동했다면, 동구에게 그것은 초기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경제적, 사회적 왜곡에 오염되지 않은 채로 역사 속에서 발전할 수 있도록 보호해주는 ‘시간적 보루’에 해당했다.
그런가하면, 민족국가 모델에서 부자와 빈자가 똑같이 스스로를 ‘미국인’이나 ‘프랑스인’으로 느낀다면, 계급적 소속이 민족성을 초월하는 사회주의 모델에서는 민족이 ‘시간화’됨으로써 역사적으로 일시적인 형태로 간주된다. 또한 두 상상계의 경관 내에서 주권 권력의 위치 또한 달라지는데, 전자의 상상계 속에서 민족이나 시민성이 자연스럽게 ‘국가’와 하나로 합쳐진다면, 후자에서 계급전쟁을 수행할 합법적 주권체는 시간 속에 위치해 있는 역사적 ‘전위’, 곧 ‘당’에게 주어진다.
하지만 이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모델을 공히 아우르는 본질적인 공통성이 양 편 모두에 내재하는데, 대중의 이름으로 통치하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두 가지 세계 비전의 공통적인 맹점은, 주권 권력이 법 위에 존재하는 지대(“권력의 야생지대”)를 품고 있다는 것, 폭력적 권력의 이 야생적 영역이 근대 주권의 핵심 자체에 ‘내재’한다는 사실이다.
책의 이어지는 장들은 서쪽과 동쪽으로 갈린 이 민주주의의 꿈의 세계가 서로 놀랄 만큼 닮아 있을 뿐만 아니라 얼마간 직접적인 상호연관성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데 바쳐져 있다. 기술부문과 관련된 기계화와 산업화를 다룬 2-3장에서 제시되는 다채로운 유사성의 몽타주는 생산 분야에서의 직접적 거래에까지 이른다.[각주:2] 대중문화를 다룬 4장에서 소비에트 궁전 꼭대기에 세워진 레닌 동상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매달린 킹콩의 이미지와 나란히 제시된다.[각주:3]
그녀가 역사적 사실, 이론적 사변, 그리고 시각적 이미지들로부터 구축해낸 이와 같은 일련의 몽타주 성좌 시리즈는 물론 그 자체만으로 대단히 흥미롭다. 하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그러니까 벅-모스가 이 책을 출간한 지 이미 사반세기가 흐른 오늘의 관점에서 무엇보다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대목은 따로 있다. 바로 냉전의 종식에 관한 벅-모스의 역사적 평가다. 두 세계가 적대적으로 공존하는 상황의 끝, 그녀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대중 유토피아의 소멸(Passing of Mass Utopia)”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결과 우리가 맞이하게 된 ‘포스트’ 냉전 세계의 결정적인 특징은 무엇인가?
주목할 것은 벅-모스가 냉전의 종식을 그것을 구성했던 “두 세계의 공통적 패배”로 간주하는 대목이다. 그녀에 따르면, 국민주권과 혁명주권, 각자의 방식으로 구성된 대중 유토피아를 가졌던 미국 자본주의와 소비에트 공산주의라는 두 개의 꿈의 세계는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공히 패배했다.
이 책은 대중의 꿈의 세계들이 소멸하는 시기에 그 세계들과 담판을 지으려는 하나의 시도다. 이 책의 출발점은 냉전의 종식이다. 이 사건의 엄청난 중요성은 그것이 어떤 정치적 효과를 가졌는지가 아니라, 역사적 지도 위의 이 근본적 변화가 양쪽 진영 모두에서 세계에 대한 개념 전체를 산산이 부숴버렸다는 사실에 있다고 이 책은 주장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 사건은 20세기의 끝을 표시했다.[각주:4]
20세기의 끝, 세계에 대한 개념 전체를 산산이 부숴버렸다고 표현된 냉전 종식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으로 냉전의 조건에서(만) 가능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장 단순하고 근본적인 의미에서, 냉전의 상대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다른 세계를 향한 꿈”을 지탱하는 근거가 되었다. 벅-모스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 영혼의 단언으로서 정치적으로 매우 귀중하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알았던 세상이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을 만든다.”[각주:5]
당연히 이는 저 편의 세계가 꿈의 완벽한 실현체라는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벅-모스는 “우리는 각자의 희망이 상대편에 의해 어떤 식으로도 완벽하게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다른 체계가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은 우리들로 하여금 꿈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증거였다.” 이를테면 그 꿈은 “자신이 속한 체계의 내적 논리를 터무니없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도록 하는 체계 바깥의 어떤 ‘정상적인 것’, 주어진 것들의 상태가 자연적이거나 필연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역사가 여전히 인간 자유의 공간으로 상상될 수 있게 만드는, 인간 존재의 어떤 다른 어떤 사회 조직”[각주:6]에 의해 지탱된다.
그렇다면, 30여 년 전 두브로브니크에서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곳에서 동서의 학자들이 각자의 과거가 만들어낸 꿈의 세계를 향한 비판에 착수했을 때 그들이 실제로 경험했던 것은 “각 측이 서로 상대편에게 품었던 꿈의 소멸”이었다. 다시 말해 ‘차이’가 사라졌을 때 가장 먼저 위협받게 되는 것은 ‘비판적 사고’의 전제조건 그 자체였던 것이다. “차이의 가능성은, 과학과 달리, 무엇인지를 증명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 비판적 사고의 전제 조건이다. 이 가능성은 우리의 세계가 함께 합쳐짐으로써 위협 받았다.”[각주:7]
이와 관련해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는 대목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벅-모스가 대중유토피아의 꿈에 부여하는 각별한 의미다. 그녀에 따르면, 20세기를 수놓은 “집단적인 꿈(collective dream)”은 개인이 밤에 꾸는 꿈과 다르다. 후자가 “사회질서에 의해 좌절되어 퇴행적인 어린 시절의 모습들로 밀려난 욕망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전자는 “산업적으로 생산된 물건들과 건설된 주변 환경들에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욕망을 부여하면서 자연적인 세계를 변형시켰던 하나의 어마어마한 물리적 힘”이었다.[각주:8] 개개인이 꾸는 (프로이트식) 꿈은 백일몽의 환상으로 끝나게 마련이지만, 집단이 함께 꾸는 (벤야민식) 꿈은 현재를 뒤바꾸는 혁명적 역량으로 전화될 수 있다. 벅-모스는 후자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거두지 않는다.
두 번째는 대중유토피아의 소멸, 즉 냉전의 종식과 관련해 벅-모스가 두브로브니크의 경험을 재기술하는 대목이다. 그 시절 관심 대상과 언어의 불일치, 더 나쁘게는 냉전적 스테레오타입의 재탕으로 받아들여졌던 각 측의 (고집스런) 입장은 이제 다음과 같이 다르게 기술된다.
비(非)사회주의 서구의 존재는 동구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사회적 삶에 정상성이 있을 수 있다는 꿈을 유지하도록 했다. 비자본주의 동구의 존재는 서구의 상대편[비판적 지식인들]이 서구 자본주의 체계가 근대적 생산의 유일하게 가능한 형태가 아니라는 꿈을 유지하도록 했다 (...) 소비에트가 자신들의 근대적 공포가 절대적으로 독특하며 서구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희망의 표현이었다. 현존하는 사회주의가 단지 모더니즘의 한 변종일 뿐이라면 다른 변종으로의 몰락은 가장 염세주의적인 결론으로 이끌 뿐이다.[각주:9]
그 시절 다분히 민족주의적인 스탠스로 다가왔던, 자국 경험의 특수성에 관한 동구의 주장은 이제 다른 세계, 다른 체제의 존재 가능성을 향한 그들의 절실한 “희망의 표현”으로 재해석된다. 그녀의 이런 달라진 평가는 한 사람의 비판적 지성이 자신이 겪은 역사적 교착상황을 끈질기게 곱씹은 결과 내놓은 지적 답변이라는 점에서 각별히 시사적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그녀가 10년 만에 기어코 이 책을 내도록 만든 주된 동인이 무엇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녀의 의도는 일차적으로 “승리를 거둔 이들과 이들이 물리친 이들이 공유하던 신념이 얼마나 많은지를 조명”함으로써 이른바 자본주의식 승자의 서사에 맞서려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 시대의 그릇된 ‘합의’ 하나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지적 투쟁의 성격을 띤다. 지난 세기의 다른 역사, 실패한 사회주의의 역사를 묵살해도 된다는 거대한 실질적 합의가 그것이다.
역사의 기차에 몸을 싣고 있는 우리가 비상 브레이크에 손을 댈 때 우리에게 가용한 힘은 과거로부터 온 힘 뿐이다. 우리의 노력 없이는 잊혀져버릴 과거 말이다. 특히 우리가 잊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한 그런 과거 사실 중 하나는 문화적 항복의 과정이 명백히 무해하게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것은 오로지 지적인 트렌드에 발맞추길 원하는 것, 시장에서 경쟁하길 원하는 것, 유행 속에 머물길 원하는 것의 문제다. 우리 시대에 이것은 20세기의 다른 역사, 그러니까 사회주의의 “실패한” 역사를 묵살하는 거대한 실질적 함의를 지닌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진보에 관한 신화의 새로운 버전, 그러니까 역사에서 “패배한” 동구 지역 사람들이 서구의 승리한 새로운 야만인들에게 가르칠게 아무것도 없다는, 그릇된 가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각주:10]
비상브레이크를 누를 힘이 오직 과거에서 온 것뿐이라는 그녀의 진단은, 물론 보기에 따라선 암울하게 들릴 뿐이다. 벅-모스는 역사의 ‘실패’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녀가 말하길, “역사는 우리를 망쳐놓았다. 그 어떤 새로운 연대기도 이 사실을 지우진 못할 것이다. 역사의 ‘배신’은 너무나 심오해서 거기에다 ‘포스트’ 세기(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꽂아놓는 것만으로는 용서될 수가 없다. 사회적 유토피아, 역사적 진보, 그리고 모두를 위한 물질적 풍요라는 모더니티의 꿈들이 산산조각 나버린 것은 진정한 비극이다.”[각주:11]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버려질) 목욕물과 (꺼내야 할) 아이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벅-모스가 구출하길 원하는 것은 지난 세기 모더니티 권력의 실패한 구조가 아니라 그 안에 함께 담겨있던 유토피아적 희망이다. 그녀는 “꿈의 상실과 꿈의 실현의 상실을 혼동”하지 말 것을 경고하면서 이렇게 적는다.
역사의 실패로부터 자기-아이러니적인 거리를 취하는 대신에 더도 덜도 아니고 다만 이 시간을 공유하고 있을 뿐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더니티가 만들어낸 희망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그 폐허를 더 가까이 불러들여 그 무너진 돌무더기를 헤쳐 지나가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들이 그저 사라져버리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유토피아적 희망들이 역사를 잘못되게 만들었다고 믿을 이유가 없으며 역사를 추동시킨 권력 남용의 증거들에 근거해 그 반대를 믿을 증거는 도처에 있다[Ibid, 68 (94)].
지난 세기가 목도했던 “세계 대전과 대중 테러, 폭력적 노동 착취” 따위의 악몽 같은 권력의 조합들과 “양립”할 수 있었던 “대중 유토피아라는 꿈의 세계”를 그 양립을 이유로 폐기처분해버리는 일은 “전혀 존재해본 적이 없는 총체성을 과거에 부여”(Ibid)하는 오류에 해당한다. 파국으로, 종종 악몽으로 귀결된 결과들은 “유토피아적 희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꿈으로 표현되었던 그 희망의 이름으로 비판해야한다.”[각주:12]
반면에 충전된 에너지를 품고 있는 과거의 이미지들은 여전히 중요한데, 그 이유는 “과거의 파편들이 우리의 현재적 근심거리와 병치될 때 어쩌면 우리 시대의 안락함에 도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될 수도 있”[Ibid 68 (94)]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이제 그 꿈의 세계들이 (과거의 거대한 지정학적 경계들과는 별 관련이 없는) 수많은 주변적 시공간들, 이를테면, “여백, 경계 교차점, 문화의 교차로, 전자적 공간”속에서 새롭게 생겨나고 공유되는 다채로운 모습을 추적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규모와 효력에 관계없이, 전 세계에 걸쳐 일어나는 동시대의 저항과 연대의 움직임을 기록하는 일, 그리고 버려지고 탈각된 과거 이미지들을 통해 역사에 관한 공인된 내러티브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그것의 “다공성”을 드러내고 확장하는 일, 『꿈의 세계와 파국』 이후 벅-모스가 걸어간 학문적 이력은 정확히 이 두 가지 방향을 따르고 있다.
Revolution Today (2019)가 전 세계의 현재적 꿈의 세계를 추적하는 전자의 사례라면, 이슬람 테러리즘, 헤겔의 역사주의, 급기야 역사 원년의 문제를 각각 다룬 3권의 저서 Thinking Past Terror: Islamism and Critical Theory on the Left (2003)[Updated Edition(2006)], Hegel, Haiti, and Universal History (2009) [헤겔, 아이티, 보편사』, 문학동네, 2012], Year 1: A Philosophical Recounting (2021)는 공히 역사의 합의된 내러티브, 즉 과거 역사에 부여된 거짓된 총체성을 문제시하는 후자의 방향을 따른다.
III. 이미지 vs 텍스트: 우정/연대
1990년에 벅-모스와 포도로가를 합류시켰던 공통의 진입로는 이미지와 신체였다. 지적으로 그들은 “이미지의 차원”에서 만났던 바, “개념이 아닌 감각적(sensory) 경험이 철학하기의 효과적인 진입로라는 확신”을 공유했다. 벅-모스의 입장이 이른바 “사고의 매개체로서의 이미지”라는 벤야민의 노선을 잇는 것이었다면, 메랍 마마르다슈빌리로 소급되는 포도로가의 입장은 “이미지 속에 구현된 의식의 정동적 경험”에 집중되었다.
주지하듯이, “나는 할 말이 없고 다만 보여주기만 할 뿐이다”라는 입장, 『파사젠베르크』에서 벤야민이 건져 올린 이 주장은 이후 벅-모스의 작업의 결정적인 방법론이 되었다. 한편, 마마르다슈빌리의 ‘의식의 현상학’ 강의는 젊은 시절 포도로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1970년대에 모스크바 영화학교에 재직하면서 감독과 배우, 철학자와 이론가로 성장할 미래의 한 세대를 키워내 “영화인들의 철학자”라는 특별한 칭호를 얻은 마마르다슈빌리는 두브로브니크 세미나가 끝난 지 1년 만에 갑작스런 사고로 사망했다. 세미나 참여자들에게 이는 마치 한 시대의 파국을 상징하는 사건처럼 받아들여졌다. 벅-모스는 인터뷰를 비롯한 여러 지면에서 이 카리스마적 인물에 대한 회고적 상념을 밝힌 바 있다.
흥미로운 점은 시각적 형태를 통한 철학적 물음이라는 공통의 전제와 방법을 공유했던 두 사람이 이후 정반대의 방향을 따라 움직여 갔다는 사실이다. 역설적이게도 벅-모스와의 만남 이후 포도로가는 점차 신체와 이미지의 현상학을 떠나 ‘언어’ 텍스트의 해부학 쪽으로 더 깊게 나아갔다. 그는 이제 이미지가 아닌 텍스트를 느끼는 법, “텍스트에 귀를 대고 언어가 전달하는 리듬과 소리에 귀를 기울여 시간과 공간의 환경 및 그 안에서 드러나는 지각의 차원을 감지”[각주:13]하는 방법을 정련하기 시작했다. 몸, 위치, 제스처, 색, 빛 등 텍스트의 촉각적 특성에 주의를 기울이는 포도로가의 독특한 미메시스 읽기의 방법론(“분석인류학”)이 그렇게 탄생했다.
이에 대한 벅-모스의 진단은 포도로가와 본인의 차이, 어쩌면 그에 대한 완곡한 비판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벅-모스는 “사유재산의 소유권을 벗어나 거리와 시간을 뛰어넘어 무분별하게 이동하면서 경험을 공유할 수 있게 만드는 이미지의 역량,” 즉 “이미지의 사회적 중요성”[각주:14]에 감탄했던 자신과 달리, 포도로가는 “이미지 인식기법을 완전히 독창적인 문학읽기 방식으로 전환하는 과제에 몰두”했다고 지적하면서, 이렇게 적는다.
발레리 포도로가는 내가 아는 가장 명석하고 도전적인 사상가였다 (...) 그는 온화하고 유머러스하며 친절했다. 하지만 그는 또한 강력했는데, 자신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운 협력자들을 위해 그가 중시하는 개인주의를 옹호할 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강경했다. 그러므로 그의 특별한 프로젝트에 대한 깊은 감사를 담은 이 글을, 철학하기의 개인성을 향한 그의 주장(...)에 대한 비판으로 끝낸다 해도 그와 그의 유령들은 나를 용서할 것이다. 아마도 포도로가는 매개된 형태로 자신을 표현하는 집단적 주체로서의 대중을 너무 빨리 포기했을 것이다.[각주:15]
집단적 주체로서의 대중에 대한 이른 포기. 벅-모스가 보기에 실현된 혁명 ‘이후(post)’를 살아야만 했던 포도로가는 이미지의 중요성과 더불어 그와 연관된 대중의 역량 및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너무 빨리 내려놓았다. 본인의 학문적 여정의 출발점이었던 아도르노가 그랬듯이, 포도로가는 유일하게 가능한 철학적 주체로 오직 ‘개인’만을 지목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결코 집단적이고 보편적인 과제가 될 수 없으며, 결코 반복될 수 없는 개인적 사유 경험의 경계 안에 존재한다. 개인주의적인 서구 지식인 벅-모스가 끊임없이 ‘집단적’ 경험을 지향한다면, 집단주의적 삶의 양식을 체화한 동구 지식인 포도로가는 어떻게든 ‘개인적’ 주체성을 지켜내고자 분투한다. 여기서 우리가 또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이미 주어진 것과는) 다른 세계, 다른 실존을 향한 역설적인 추구다.
벅-모스는 이런 강경한 개인주의의 원천으로 포도로가의 독서체험에서 비롯된 일종의 사적 유토피아로서의 “내적 자유”를 들고 있다. “포도로가의 극단적인 개인주의는 그의 어린 시절을 장식한 소비에트 시절의 결과다. 그는 대학원생 시절에 제한된 용도의 도서관에 소장된 모든 서양철학 서적에 접근할 수 있었고 그 서적들을 읽는 것이 거의 마약이 되었다고 말했다.(...) 이 ‘지식의 향연’, 사적인 ‘내적’ 독서와 사고의 자유는 [그에게] 일종의 유토피아였다”.[각주:16]
하지만 개인과 집단, 언어와 세계의 관계를 바라보는 포도로가의 견해를 과연 (일반적 의미에서의) 개인주의로 소급시킬 수 있을지에 관해서는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필시 이 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30여 년 전 두브로브니크에서 가장 격렬한 파국적 순간을 만들었던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작품 세계를 (그의 시각을 경유해)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는 일일 것이다.
두브로브니크 세미나에서 제임슨은 플라토노프의 소설 『구덩이Kotlovan』에 대한 집단토론을 제안했는데, 포도로가는 원문으로 읽지 않고는 이 텍스트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당연히 그의 이런 ‘배제적 해석학’은 서구 참여자들에게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파국적 충돌은 극에 달했다.
벅-모스는 스탈린의 급격한 산업화 프로그램을 특징짓는 ‘자연의 기계화’에 관한 물리적 경험이 다름 아닌 플라토노프의 ‘언어’ 속에 고스란히 ‘흡수’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당시에는 다만 지나친 민족주의적 편향처럼 보였던 포도로가의 주장에 담긴 전제를 훗날 자신 또한 인정하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플라토노프 독해의 문제는 곧 영역본이 출간될 포도로가의 주저 『미메시스』 2권에서도 한 쳅터가 할애되는데, 플라토노프를 중심에 둔 동서의 비교(가령, 제임슨 vs 포도로가)는 극도로 흥미로운 (차후의)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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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살펴봤듯이, 1987년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진 두 지식인의 우연한 만남은 향후 그들의 지적 행보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새겨 놓았고, 소비에트 해체 이후 펼쳐진 국제관계의 온갖 정치적 부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계는 변함없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1990년 10월 두브로브니크에서와 같은 전면적인 교류와 소통의 시도는 이후 다시는 반복되지 못했다. 오늘날 그것은 모종의 트라우마적 경험으로 남아 몇몇 당사자들의 회고와 성찰 속에서 겨우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벅-모스의 에세이의 마지막 문단이 어째서 그토록 쓸쓸한 정조를 동반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017년 혁명 100주년에 포도로가의 자택을 방문해 고인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일을 떠올리면서, 벅-모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의 거실 테이블에 앉아 엘레나 페트롭스카야의 통역을 받는 그 시간은 거의 40년 전 그때처럼 따뜻하고 친숙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동지나 연인도 아니고, 파트너나 인생의 협력자도 아니었던 우리는, 그날 그가 말했듯이, 친구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우정은 인생의 모든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각주:17]
만일 우리가 마지막에 덧붙여진 저 한 줄에 공감할 수 있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우정은 인생의 모든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그녀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면, 그것은 사적인 우정의 기억이 어쩔 수 없이 환기하는 지난 세기의 여운 때문일 것이다. 끝내 연대에까지 이르지 못한 우정, 그것이 주는 쓸쓸한 여운 말이다.
스탈린이 마그니토고르스크 철강단지 건설을 포함한 제1차 5개년 계획 실현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미국 재무부 장관 앤드류 멜론을 통해 약 700만 달러에 이르는 에르미타주 소장 미술품을 비밀리에 거래한 것을 말한다. 거래품 목록에는 얀 반 에이크, 렘브란트, 보티첼리, 푸생, 루벤스, 티치아노, 벨라스케스의 작품들, 그리고 170만 달러를 지불한 라파엘의 알바 마돈나 등이 포함되었다. 원서 뒤표지에 인용된 토니 우드의 서평은 바로 이 비밀거래를 제목으로 붙였다. Tony Wood, "MELLON IN MAGNITOGORSK," New Left Review 8, Mar/Apr, 2001, pp. 158-164. [본문으로]
보임은 1930년대 스탈린이 기획한 궁극의 건물인 ‘소비에트 궁전’과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를 각각 복원적restorative 노스탤지어와 성찰적reflective 노스탤지어의 상징으로 보고 상세히 분석한 바 있다. 스베틀라나 보임, 『오프모던의 건축』, 김수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42-46쪽과 옮긴이 해설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