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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무브 Project/정치적 수사학

이준석의 미래를 거부한다면

by 인-무브 2026. 4. 7.

이준석의 미래를 거부한다면

- 이준석. 2023. 『이준석의 거부할 수 없는 미래』. 21세기북스.

 

현우식(서교인문사회연구실)

 

 

들어가며

 

2011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에게 발탁되어 정치에 입문한 이후 이준석의 정치에는 늘 부정적인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각종 의혹이 불거지고 선거에서 낙선할 때면, ‘얼마 가지 않을 것’이라는 조롱 섞인 예상이 뒤따랐다. 정치적인 성공을 거둘 때조차도, 그의 언행은 갈라치기와 혐오 정치의 전형으로 여겨지며 많은 비난을 받았다. 현재도 상황은 다르지 않은 듯하다. 다가오는 지방선거에서 광역지방단체장 선거에 도전하기보다는 부정선거 음모론자들과의 싸움에 골몰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종종 냉소의 대상이 되곤 한다. 어차피 저러다 (국민의힘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평가의 이면에는 그가 21세기 이후 가장 정치적으로 ‘성공’한 청년 정치인이라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2021년 이준석은 국민의힘 당대표로 당선되며 헌정사상 첫 30대 제1야당 대표가 되었다. 2024년 총선에서는 개혁신당 후보로 경기 화성을에 출마하여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이듬해에는 21대 대통령 선거에 만 40세의 나이로 출마하여 8.34%의 표를 얻으며 3위로 선거를 완주했다. 출구조사에 따르면 20대 남성의 37.2%, 30대 남성의 25.8%가 이준석 후보를 뽑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준석의 정치는 2030세대 남성이라는 분명한 사회적 기반을 갖추고 있으며, 단지 일시적인 ‘이준석 현상(신드롬)’이라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이미 고착화된 정치적 현실이 되었다. 여전히 그는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 중 한명이다.

 

그런 그가 2023년 『거부할 수 없는 미래』라는 자서전을 펴낸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에서 그는 故 박세일 교수와 김종인 전 장관의 뒤를 이어 탄탄한 철학적 기반을 갖춘 “이데올로그가 되어보고 싶은 욕심”(9)을 숨기지 않는다. 이 책은 그가 성접대 의혹에 대한 증거인멸교사 혐의로 국민의힘 중앙윤리위원회로부터 1년 6개월 당원권 정지를 받고 당대표에서 쫓겨난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정치적 재기에 대한 야망과 그가 그리는 정치적 청사진에 대한 내용이 가득 담겨 있다. 2019년 발표된 『공정한 경쟁』이 젠더, 청년정치 등 개별 이슈와 정책에 대한 그의 정치적 입장을 담은 인터뷰집이었다면, 이 책에서 그는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포괄적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글은 이준석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거나, 그의 행보를 냉소하는 시선과 거리를 두면서,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이준석의 정치와 그에 수반된 복합적인 수사학적 전략을 ‘비판적’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주식회사 대한민국 

 

“나는 이번 책 『거부할 수 없는 미래』를 통해서 대한민국의 현시대를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각각의 증권 앱 속 주식이 나타내는 주권(share certificate) 이상으로 소중한 주권(popular sovereignty)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아울러 우리 앞에, 여러 가지 상황에 있어 거부할 수 있는 미래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14)

 

 

책은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주주인 시민들의 안녕을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준석은 한국어에서 주권(株券, Share certificate)과 주권(主權, Sovereignty)이 동음이의어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주식회사는 소유한 주식(주권)의 비율만큼 의결권을 행사하고 기업이 벌어들인 수익 역시 소유한 주식의 비율만큼 돌려받는다. 반면 민주공화국에서는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주권을 갖는다. 저자는 “대한민국의 모든 시민이 민주공화국 안에서 평등하고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14)고 단언한다. 물론 이는 형식적인 규정이며, 실제로 사회 안에서는 힘이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다는 것을 그가 모를 리는 없다. 다만 이러한 규정은 오늘날 2030세대에게 익숙한 개인화된 투자자 정체성을 시민적 정체성으로 전이시키는 데 활용된다. 정치공동체의 공적 이익을 둘러싼 정치 참여의 문제가 내가 가진 주권(주식)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정치인(경영인)의 전횡을 감시하는 합리적 투자 행위로 재정의되는 것이다.

 

저자는 “유권자 하나하나가 철저하게 본인의 이해관계를 살피고, 철학적 배경과 맞는 정치집단 그리고 정치인을 합리적으로 따져서 선택하는 문화가 하루속히 자리 잡는 것이 중요하다”(19)고 이야기하면서 이를 정치에 대한 합리적 접근이라고 부른다. 시민들은 오너 일가의 전횡을 감시하듯 기득권 정치 엘리트의 전횡을 감시하고, 빨간색과 파란색 캔들 차트 막대기의 오르내림을 분석하면서 시민으로서 자신들의 ‘주주가치’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은유를 통해 저자는 자신을 시민들의 주권을 대변하려는 전문 경영인이자 개미 주주들의 편에 선 개혁가로 위치시킨다.

 

비슷한 맥락에서 정치는 스포츠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는 “대한민국 정치판의 특성은 프로야구가 돌아가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16). 일정한 수준의 지역 연고를 기반으로 한 거대 양당의 고정 지지층이 있고, 스타 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는 주요 정치인들의 인기에 따라 지지층이 유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당과 정치인은 스포츠팀, 스포츠 스타를 선택하는 관점으로만 이해하고 평가하면 곤란하다. 오히려 저자는 자신의 주주가치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지역주의적인 편견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전라도 출신의 사람들이 기아 타이거즈의 우승을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기아자동차가 광주에 주 생산공장을 두고 있다는 이유로 전라도에서 현대자동차를 배척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최선의 합리적 선택을 하는 것이다.

 

정치와 스포츠 시장, 정치와 주식시장에 대한 유비를 통해 저자는 정치를 시장화하고, 시장을 정치화한다. 정치는 나의 주주가치를 높이는 게임이며, 시민들은 자신의 주주가치를 높이기 위해 더 똑똑하고 합리적인 ‘투자자’가 되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민주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갈등과 투쟁의 문제는 대부분 주주가치 실현에 방해가 되는 투자 리스크로 여겨지며, 제거해야 할 문제로 여겨진다. 만약 정치적 갈등과 투쟁이 필요하다면 오직 그러한 리스크를 제거하기 위한 투쟁만이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저자는 이러한 변화를 ‘거부할 수 없는 미래’라고 명명하면서 자신이 그리는 미래를 거부할 수 없는 역사적 필연성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는 이러한 미래가 저절로 올 것이라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다. 이미 변화는 시작되고 있고, 대한민국이라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투쟁은 다가오는 미래를 거부하는 자와 그러한 미래를 받아들이는 자 사이에서 전개될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저자의 입장은 후자에 서 있다.

 

정치의 문명화

 

이제는 이준석의 정치가 그리는 구체적인 방향을 가늠할 차례다. 나는 이를 정치의 문명화라고 부르고자 한다. 저자는 먼저 보수정치의 문명화를 이야기한다. 이는 그가 보수정당 내에서 어떻게 정치적 경계를 긋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저자는 보수가 위기에 처한 이유가 영웅 서사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박근혜의 당선과 탄핵은 보수 진영의 영웅 서사가 얼마나 취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사회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불안한 시기에 영웅 서사는 분명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저자는 21세기 한국과 같이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된(!) 시기에는 영웅 서사의 효과는 줄어들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선진국 반열에 오른 국가의 위상에 걸맞은 합리적인 보수 정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수 진영은 여전히 ‘비문명’적인 정치와 절연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북풍’을 노리고, 종교 세력과 안보 단체, 극우 유튜버, ‘아스팔트 우파’와 손을 잡으면서 다가오는 미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는 2010년 지방선거에서 북한이 천안함 폭침을 일으키고, 선거운동이 시작되는 날 그것이 북한 어뢰의 소행이었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음에도 선거에 패배했다는 점을 짚는다. 보수가 패배하는 이유는 “극단화의 과정, 즉 일반 대중이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집단과의 연대, 그리고 공포 마케팅에 의존했기 때문이다”(83).

 

공포 대신 그가 제안하는 것은 정치적 효용감이다. 문명화된 정치는 이념 논쟁에 갇혀 있을 것이 아니라, 시민들에게 정치적 효용감을 제공해야 한다. 그는 “정당도 마찬가지로 정치 효용감이라는 서비스를 팔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한다”(52)고 말하기도 한다. 그가 이 책에서 제안하고자 하는 인테리어 끼워팔기 반대 정책(인테리어를 제하고 골조만 분양하는 것을 법제화), 출발자금 취업 후 상환제, 택시 탄력요금제, 화물과 배달의 자동화(로봇화), 싱가포르식 군 복무 제도 등의 정책 패키지와 2030세대와 6070세대의 연합을 강조하는 ‘세대포위론’은 모두 정치적 효용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정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저자가 왜 계속해서 부정선거 음모론자들과 싸우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가 보기에 부정선거론자들의 주장은 ‘주장을 위한 주장’이며 비문명적인 정치이다. 부정선거론자들의 주장처럼 사전투표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검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부정선거 담론에서는 이런 것들이 빠져 있고, 선거에 졌기 때문에 막무가내로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되풀이된다. 이는 보수정치가 여전히 공포를 조장하는 비문명적인 음모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저자는 진보정치 일각의 비문명적인 관행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출근길 투쟁을 비판하는 자신의 관점을 약자 혐오라고 비판하거나, 행위자의 약자성을 무기로 반박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세 사람이 모여서 이것이 호랑이라고 하면 호랑이가 되는 삼인성호 식 혐오 낙인”(129)이라고 반박한다. 그는 “전장연이 하는 시위의 방식은 반문명적이다”라는 자신의 주장은 장애인을 싸잡아 비판하는 것이 아니며, 전장연이 하는 시위라는 구체적인 행동을 ‘외과 수술적으로’ 도려내어 비판할 뿐이라고 말한다.

 

나는 여기서 이준석의 정치가 자신을 공격하는 세력을 혐오 세력으로 규정하는 혐오 정치라는 순환적인 규정을 내리기보다, 그가 왜 이런 방식의 사회적 투쟁을 비문명이라고 규정하는지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보고 싶다. 그는 대표적인 혐오 발언의 예로 “저 사람은 전라도 출신이라 뒤통수를 잘 친다”라는 지역 비하 발언을 들면서 “우리 사회 대부분의 교양인은 이제 그런 발언을 하는 것이 결코 본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입 밖에 잘 내지 않는다”(132)고 이야기한다. 그는 혐오 발언은 문명화된 국가에서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될 것으로 믿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진’ 국가들에서 오늘날 혐오 발언과 극우 정치가 득세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할 때, 이는 매우 순진한 이야기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의 언행이 혐오인지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그의 정치는 혐오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오직 가상으로 설립된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상에 논리적으로 기대고 있을 뿐이다. 장애인들이 처한 구조적인 불평등, 비장애인 중심의 정책과 인프라 설계, 정치 참여의 개방성 문제와 시위 방식의 문제를 분리하고 후자만을 개선하면 된다는 그의 주장에는 결국 이런 방식의 시위가 용납되면 “대형 사회적 참사의 실종자 가족이나 유가족들도 이러한 방법론에 의존하게 될 수 있다”(126)는 또 하나의 공포 마케팅이 존재한다. 문제의 원인에는 무관심한 채, 합리적이고 합법적으로 해결하면 될 것 아니냐는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문명화된 정치에 대한 그의 자신감은 몇몇 사안들에 대한 전향적인 태도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는 보수는 어떤 주제라도 자신 있게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진보진영에서 꺼내는 차별금지법논의를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차별금지법을 도마에 올리고 법의 모순점에 대한 논의를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이미 한국과 북한이 여러 면에서 경쟁이 어려울 정도로 격차가 벌어져 있는 상황에서 북한방송을 국내에 자유롭게 개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북한 콘텐츠의 개방이 체제경쟁에 불리하게 작용하거나 종북 세력이 자라나게 할 것이라는 것은 기우이며 오히려 젊은 세대가 그들만의 방식으로 북한에 대한 집단적 관점을 형성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이 그 정치적 자유를 제안하지 않았으면 한다”(254)는 그의 말에서는 문명국가 대한민국에 대한 저자의 자부심이 어느 정도인지 느낄 수 있다. 

 

시험이라는 이름의 공정한 경쟁

 

“누군가가 내게, 고른 기회를 확대하겠다는 생각을 구체화해서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가 질문한다면 단언컨대 상계동 20평대 아파트에 사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왔던 이준석이 다시 태어나도 정당의 대표가 될 수 있고 그 이상을 꿈꿀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답할 것이다. 물론 이준석이라는 개인이 전당대회를 통해 정치적 성취를 이루는 과정은 여러 가지 운과 노력, 그리고 특혜의 조합이었다. 운과 특혜의 요소를 배제하고도 이 자리에 꿈꾸는 누군가가 다시 올 수 있다면 그 사회는 공정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사회와 세상은 거부할 수 없는 미래다.”(47)

 

 

그렇다면 이준석이 그리는 문명화된 정치의 핵심 가치는 무엇일까. 저자는 합리적인 보수의 가치와 미래의 지향점을 ‘공정한 경쟁’이며 공정한 경쟁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이라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그는 공정의 형식적 구성요건이 ‘꿈꿀 수 있는가’의 문제라고 말한다. 이는 현실적인 난이도와 관계없이 누구나 가장 높은 곳에 도전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지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저자는 헌법이나 법률이 보장해주는 꿈꿀 권리를 넘어서 실질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그 꿈을 향해 달려 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공정사회를 위한 우리의 과제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상계동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제1야당의 대표가 되었던 자신의 서사는 정치적 경험과 연륜 없이도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로 활용된다.

 

저자는 자신의 정치적 성공에서 운과 특혜의 요소가 작용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공정한 사회란 운과 특혜의 요소를 배제하더라도 누구나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라고 말한다. 이로써 서울과학고와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20대의 나이에 비상대책위원으로 파격적으로 발탁되는 등 정치적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던 자신의 ‘과거’보다는 어떻게 구태한 정치문화를 바꾸고 정치참여에 있어 공정한 기회를 확대할 것인가 하는 ‘미래’의 문제에 집중하게 한다. 자신의 기득권적 배경보다는 온갖 구습에 기대어 왔던 구태한 정치문화와 싸워왔던 자신의 정치적 여정을 부각하는 저자의 수사는 자신을 시스템의 수혜자가 아닌 시스템의 설계자로 격상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저자의 관점에서 ‘할당제’로 대표되는 청년과 여성에 대한 시혜적 조치는 공정한 경쟁을 촉발하기보다는 청년과 여성을 시혜적인 대상으로 낙인찍는 결과로 이어진다. 정치 분야에서 다양성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청년이나 여성과 같은 인위적인 기준을 따르기보다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를 포함한 모든 구성원들이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는 30대 당 대표가 출현했으며 4명의 선출직 최고위원 중 3명이 여성으로 당선된 국민의힘 2021년 전당대회를 사례로 들면서 조직선거와 돈 선거 관행을 없애고 경쟁의 공정한 기준을 세우면 결과적으로 할당제 등이 목표로 하는 정치의 다양성이 확대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청년이나 여성이 정치 영역에 진입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이들이 조직이 없거나 돈이 없어서 기회를 박탈당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들이 대변할 수 있는 사회적 위치와 삶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비례대표제 역시 저자는 실력이 없거나 결격 사유가 있는 인물들이 정치 영역에 들어오는 은밀한 통로로 묘사하지만, 의회가 사회의 모습을 닮을 수 있도록 다양한 집단과 계층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한 제도이다. 이를 단지 시혜적 할당이라고 볼 수는 없다. 

 

또 하나의 어려움은 실력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이다. 누구든 실력만 있다면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기준이 필요할까. 저자의 구체적인 대안은 정치 영역에 ‘시험’의 방법론을 도입하는 것이다. 저자는 당대표 시절 PPAT(People Power Aptitude Test)라고 부르는 공직후보 기초자격시험을 도입했다. 이는 공천에 있어 출마자들의 역량을 점수화해 평가하는 방식이다. 2022년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비례대표 기초의원, 광역의원에 출마하고자 하는 사람은 각각 60점과 70점 이상을 받아야 후보가 될 자격이 부여되었다. 나아가 그는 이 시험이 지방의원에 대한 공직수행평가로 확장적으로 적용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당 대변인을 토론배틀로 선발하는 방식 역시 토론 역량을 점수화해 당직자 채용에 반영하겠다는 의도에서 기획되었다. PPAT가 수준 낮은 토론자들을 거르는 방식으로 작동했다면, 토론배틀은 정치적 경험과 연륜 없이도 누구나 토론역량 하나만으로도 대변인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공천과 당직자 채용이라는 제한된 분야에서 시험과 경쟁의 도입은 인맥이나 연줄 중심의 인사 관행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지향하는 운과 특혜의 요소를 배제하고도 누구나 꿈을 꿀 수 있는 공정사회라는 비전에 비하면 시험의 방법론은 매우 제한된 해법에 불과하다. 그는 정치권의 구습을 비판하는 데는 거침이 없지만, 기존의 관행과 달리 어떻게 공정한 기회를 확대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략한 제안만을 내놓고 있다. 그가 비판하는 정치 엘리트들 역시 대부분 과거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어서 유명 대학에 진학했거나, 고시를 통과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정치문화를 저해하는 문제의 원인이라면, 이들의 정치참여를 사회적으로 정당화해왔던 시험이라는 잣대도 다시 들여다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전반적으로 저자가 말하는 정치 영역에서의 ‘공정한 경쟁’이란 당에 대한 헌신이나 연줄과 같은 비합리적인 요인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실력만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정치문화를 확립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실력은 운과 특혜로부터 독립적인 각자가 갖고 있는 고유한 역량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실력이 과연 운과 특혜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는지, 또는 시험이 실력을 측정하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모호하게 남아 있다. 이런 모호함 속에서 저자는 과거의 구태한 정치문화와 능력주의적인 미래의 정치문화를 대비시키면서 미래를 다시 한번 거부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낸다. 

 

나가며: 이준석의 미래를 거부한다면

 

이준석의 정치는 종종 진보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이들에게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의 언행이 갈등을 증폭시키고 사회적 약자에게 미치는 해악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은 정당한 분노와 도덕적 비판만으로는 이준석과 다른 새로운 미래를 그려낼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이 글의 제목이 ‘이준석의 미래를 거부한다’는 단호한 선언이 아닌, ‘이준석의 미래를 거부한다면’이라는 가정으로 시작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당신이 이준석의 미래를 거부한다면, 단지 이준석을 싫어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이준석이 설계한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청사진은 분명 매혹적이다. 그것은 낡고 비합리적인 구습을 청산하고, 합리와 실력이라는 세련된 문명의 언어로 정치를 혁신하자고 유혹한다. 하지만 그가 약속한 ‘거부할 수 없는 미래’는 새로운 문명으로 향하는 좁은 우주선과 같다. 거기에 탑승할 수 있는 주권자는 오직 스마트한 투자자의 감각을 갖추고, 시험을 통과할 실력을 증명한 유능한 개인뿐이다. 그가 설계한 세계에는 ‘실패한 주주’를 위한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정치를 시장의 논리에 넘겨주고 시민을 투자자로 전락시키는 순간, 우리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은 공정한 탈락이라는 이름으로 영구화된다. 수익률을 내지 못하는 이들의 고통은 비효율로 치부되고, 낙오된 자들의 목소리는 실력 부족이라는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된다.

 

한편으로 그의 미래가 마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보이는 이유는, 슬프게도 우리가 정치를 이야기할 다른 언어들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준석의 정치는 이제 한국 사회의 고착화된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현실이 곧 당위일 수는 없다. 그가 그어놓은 문명의 경계 밖에서, 주식회사 대한민국에서 배제된 정치를 다시 재활성화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가 선포한 미래를 거부할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이준석의 논리를 조목조목 비판하는 것보다는 그가 그리는 세계의 청사진을 넓게 그려내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우리는 이제 한 명의 정치인이 아니라, 그의 문법을 체화한 채 등장할 수많은 ‘이준석 키즈’들, 그리고 그 정치가 파생시킬 무수한 변종과 마주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만약 우리가 그가 선포한 차가운 능력주의의 미래를 진심으로 거부하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그가 말하는 미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차근차근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저러다 말 것’이라는 냉소와 ‘꼴 보기 싫다’는 비난을 넘어서 그와 다시 맞설 미래에 대한 적극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이 글은 대안정치공간 모색에서도 공동 게재됩니다. 관련 글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mosaek.kr/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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