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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라는 역사 이미지를 구성하는 시간

 

 

길혜민(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

 

 

 

  보임의 다른 표현인 재현은 보이지 않는 것을 재현할 수 있을까. 재현은 시각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면서도 이외의 다양한 계기를 통하여 대상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일본군위안부는 영화로 시각을 주된 통로로 삼아 관객에게 재현될 수 있지만, 소설의 문자적 표현을 통해서도 재현이 가능하다. 시각뿐만 아니라 목소리를 통해서도 재현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며,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논문도 재현물 중에 하나다. 그런 점에서 재현은 무언가가 존재함을 알리는 방식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존재, 향기도 그림자도 없는 유령은 재현이 가능한 존재일까?

 

 

 

(사진가 안세홍이 찍은 중국에 남겨인 일본군'위안부')

 

 

  김숨의 소설 한 명[각주:1]을 짧게 설명하자면 일본군위안부피해자가 단 1명만이 남아있는 시간을 상상하며 만들어진 작품이다. 가상적인 시간 속의 서울, 재개발 대상 지역이 주된 공간이다. 주민 대부분이 떠난 재개발 지역에서 살아가는 할머니는 일본군위안부피해자로 자신의 생존사실을 신고 및 등록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 어느 날, 1명의 마지막 위안부 피해자가 생사의 기로에 있다는 뉴스를 본 그녀는 지금 여기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기 위해, 재개발 지역 바깥으로 나가는 첫 시도를 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몰이해와 실수로, 피해자들께 누가 되는 부분이 소설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객관적인 진실, 사실에 근거하여 소설가적 상상력을 자제하면서[각주:2] 써내려간 이 작품은 일본군위안부생존자들의 증언을 한 줄, 한 마디씩 쌓아 만들어 낸 증언의 태피스트리이다. 작가의 여러 겹에 걸친 자기 검열과 재현의 윤리에 대한 고민이 정확히 보이는 이 작품은 살아남은 자들의 언어이면서도 동시에 살아남지 못한 이들의 증언이기도 하다. 극악한 수용 생활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언어를 다룬 조르조 아감벤의 책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은 증언이 어떤 아포리아를 안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무젤만’, ‘이슬람교도’, ‘고르곤이들은 겨우 사람으로 식별할 수 있지만 사람이 할 수 없는 무참한 경험 속에서 인간의 맨 밑바닥을 가리키는 존재들이다. “‘이슬람교도는 삶과 죽음의 한계인 것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나아가 인간성과 비인간성 사이의 문턱을 표시[각주:3]하는 존재다. 이들은 주변 환경에 반응을 할 수 없을 만큼 굶주림과 더러움에 방치된 채로 학대당하는 이들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지 못한 이슬람교도들은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에게 겨우 재현될 수 있다. 인간의 맨 밑바닥은 이슬람교도들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사실은 증언이 불가능하고 봄의 불가능성에 있지만 말이다. 그것, 인간의 밑바닥이라는 것을 본 사람은 이슬람교도들이며 인간이 비인간인 상황에 처했다는 동시적 조건은 경험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감벤의 이야기이다. 그런 존재와 비존재의 동시성 속에서 증언이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살아남은 자의 증언은 죽음을 포함하며 죽은 자들의 언어를 번역하고 이끌어오며 때로는 심연을 길어내려는 고투가 함께 한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재현물)

 

 

 

  김숨의 소설은 일본군위안부의 증언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보임의 불가능성에 해당하는 고르곤의 얼굴을 재현하려고 했다. 20만 명의 여성이 일본군위안부가 되었으며, “20만 명 중에 2만 명열 명 중 한 명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통계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 조차 셈해지지 않은 존재가 있었을 것이며, 김학순, 길원옥, 김복동, 이용수와 같이 자신의 생존을 알릴 수 없었던 존재가 있었다. 이들의 언어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이들의 얼굴을 지나가고 있는 세월의 선은 어떤 방향을 향했는가. 이러한 상상 속에서 소설은 기워진 것이다. 아직 우리와 관계 맺지 못한 존재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는 전제 하에 이들의 응시와 침묵에 대해 응답하려는 이와 같은 작업은 이전에도 시도된 적이 있었다. 종군위안부[각주:4] 는 여성주의적 구술사 작업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샤먼인 아키코와 그녀의 딸 베카의 서사가 교차한다. 아키코 일본군위안부였던 시절 마주했던 위안부로 죽은 여성들의 말을 세상으로 전달하는 것으로 일종의 장례를 치러주고자 하는 것이 소설의 내용이다. 살아있는 자의 주변을 맴도는 유령과 같은 언어를 기입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이 두 작품은 여성주의적 윤리에 입각하여 생존자와 피해자인 위안부를 재현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가해자-제국-남성의 시선이 아니기에 일본군위안부를 다루는 탈식민주의적 민족주의가 주장하는 정치적 올바름에서 벗어난 서사라는 점에서 이 두 작품은 비교적 다양한 담론이 비평에 등장하게 한다. 이 담론들의 경합의 장이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연구와 운동이 만들어 낸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여성주의적 구술사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증언록을 차례로 읽어보면 발간될 때마다 증언에 대한 접근 방식이 청자의 윤리를 만들어내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숨의 소설이 ‘L의 운동화를 다루듯이 증언을 다뤘던 것도 피해자의 관점에서 구성된 말하기가 여러 방식으로 가공될 수 있음을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일본군위안부를 재현하기란 까다롭고 때로는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대사관 앞에 소녀상이 놓이면서 발생한 사건들은 재현물이 가진 정치적인 역량을 보여준다. 일본군위안부를 어린 소녀이자 순결함으로 표상한다며 피해와 가해의 역사를 손쉽게 화해의 모드로 전환하려는 어떤 이의 해석을 시작으로 소녀상의 이미지는 담론이 개입할 수 있는 시간적인 것임이 드러났다. 방해·협박·회유에도 불구하고 일본 대사관 앞에 소녀상이 여전히 있을 때,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세계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2015년의 불가역적 합의가 만든 화해치유재단이 2018년 해산되기까지 생존자는 국경을 넘나들며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시간은 1990년대에 시작한 책임감 있는 사과와 보상을 요구한 운동을 한 번에 역행하는 순간을 되돌리려는 노력이었다. 필자는 그것이 소녀상이라는 재현물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역사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억압받은 존재의 역사를 고민해왔던 발터 벤야민에게 있어서 역사 이미지란 지금 여기’, “현재가 스스로를 그 이미지 안에서 의도된 것으로 인식하지 않을 경우 그 현재와 더불어 사라지려 하는 과거의 복원할 수 없는 이미지[각주:5]이다. 승자의 역사기술이 참고하지 않았음에도 지금과 관계하는 짓밟힌 이들이 알리는 비상사태(예외상태)’현재임을 알게 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역사의 이미지이다. 과거에 짓밟힌 자가 누구이며 지금 그 과거의 이미지를 스치게 하는 사건은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것으로 역사 이미지는 지금 여기의 수준을 알릴 수 있다. 논의의 수준, 공감의 수준, 표현의 수준, 담론의 수준 등을 말이다. 일본군위안부의 재현물이 제출될 때 공론장은 이미지와 함께 유동했음을 목도하며 우리는 일본군위안부재현이 역사 이미지로 존재함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 <귀향>이 제작되는 과정에서 모인 선의의 손길과 인간의 고통에 대한 공감 등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제작 계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개봉한 이후 담론장 안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을 이미지화 한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각주:6] 이 재현물 안에는 지금 여기와 과거가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적 구술사가 이룩한 성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기의 증언과 여성의 고통을 가해자의 시선으로 재현하려는 포르노그라피적 관습이 동시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과거 여성들이 겪은 고통의 의미를 지금 여기에서 잃어버리지 않으면서도 이 재현물이 유발할 수 있는 젠더연구에 대한 퇴행적 효과를 기각하기 위해 비평은 논쟁을 감내해야 했다. 국가가 지키지 못한 소녀들에 대한 가부장제의 연민이 청산되지 않은, 식민지 남성성의 수준이 이해하는 일본군위안부의 표상으로 돌아가지 않아야하기 때문이다. 이 수준을 견제하려는 페미니즘 연구와 비평은 이미 그런 한계를 뛰어 넘은지 오래다. 이처럼 담론들과 서로 다른 시간대의 진리가 상충할 수 있기에 이미지는 멈춰있지 않는다.

 

 

 

 

 

 

  끌려간 소녀는 소녀상으로 남아있는가. 소녀상은 끌려가고 나약한 이미지인가. 제국과 가부장제의 피해자로 소녀상이 멈춰있는가. 염려와 달리 재현물의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역사의 이미지라고 한다면 재현물은 만들어지는 동시에 의미가 변화해가는 것이다. 때문에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재현은 충분하지 않은 애도임을 알리기도 한다. 대상을 상실한 자의 말하기(또는 재현하기)는 그것은 외부에 있는 대상인 상실된 자를 우리의 내면으로 끌고 들어와 앓게 되는 우울증적 증상이다. 젠더, 역사, 재현 등의 담론에 맞물리면서 애도에 충실하려는 노력은 단순하지 않은 그 복잡한 윤리 속에서 일본군위안부라는 역사 이미지는 흔들리는 동시에 강해지고 있다.

 

[* 본 원고는  2018년 12월, 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348호 문화면("지금 여기서 재현을 비평한다는 것" 시리즈)에 게재되었음을 알립니다]

 

  1. 김숨, 『한 명』, 현대문학, 2016. [본문으로]
  2. 김숨, 「소설가의 자리에서, 소설의 방식으로……」, 『문학동네』통권 88호, 2016 가을, 231쪽. [본문으로]
  3. 조르조 아감벤, 정문영 옮김,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새물결, 2012, 82-83쪽. [본문으로]
  4. 노라 옥자 켈러, 박은미 옮김, 『종군위안부』, 밀알, 1997. [본문으로]
  5.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수집가이자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폭력비판을 위하여|초현실주의 외』, 도서출판 길, 2017년 5판 참고. [본문으로]
  6. 권은선, 「‘용납할 수 없는 것’을 이미지화 한다는 것의 의미: 영화 <귀향>의 성/폭력 재현을 중심으로」, 『여성학논집』제34집 1호, 2017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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