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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잃어버리기 (2/2)

 Losing Face

 

그레고리 플랙스만 & 엘레나 옥스만

번역: 정경담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영화이론 세미나팀




3. Framing the face 얼굴 구성하기

 

얼굴은 무엇 때문에 특별한 중요성을 갖게 되었는가? 얼굴은 타자 개념의 구성요소로서 기능하지만, 우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개념이자 문제로서 의존해야만 한다. 타자의 공포에 질린 얼굴을 다시 생각해 보자. 그 공포의 근원이 보이지 않고 있다 할지라도, ‘얼굴은 공포를 표현하고, 나아가 원인에 대한 의혹을 생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포를 생산한다. 우리는 표현의 실제 이미지와 장 바깥에 남아있는 가능세계(외화면hors champs)와 동시적으로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장하는 것처럼, 가능한 것은 감각되고 감각 가능한 것이며 느껴지고 표현되는 것으로서의 얼굴에 각인되는 것이기에, 그만큼 실재적인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얼굴의 문제틀을 시네마와 분열분석의 영역에서 발전시킨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얼굴은 가능성(가능한 것)의 표현임과 동시에 규정의 지도를 그리게 될 표면이며, 표현의 함축하는implicating 힘이자 이것의 떠오르는 의미작용 -다른 어떤 것으로서의 전개explication-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네마와 분열분석이 (야누스의) 얼굴이 갖는 문제틀의 두 축이라고까지 규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유의 표현(정동-이미지)에서부터 사유의 정치학(안면성)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우리의 목적을 위해, 우리는 시네마에서 시작해야 한다. 시네마는 타자 일반, 그리고 특히 얼굴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독특한 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들뢰즈가 언제나 어떤 철학적 문제들은 시네마에서 답을 찾도록 나를 밀어붙인다고 공언해왔음을 안다. 하지만 이는 오로지 얼굴의 문제에 있어서만 특수하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들뢰즈, 2006: 285) 들뢰즈와 가타리가 타자에 대해 묘사한 것을 보자. “고요하고 평화로운 세계의 어떤 순간이 있다. 갑자기 공포에 질린 얼굴이 어디에선가 불현듯 나타난다” (1994: 17) 여기에서 타자의 개념은 일종의 사건이나 시나리오에 따라 조형된다. 타자 개념은 일종의 미쟝센에 따라 자신의 구성요소들(텅 빈 공간, 떠오르는 얼굴, 가능세계)을 설정하고, 이는 우리가 고수했을지 모르는 개념을 개념 그 자체와 불가분하게끔 수행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는 프레이밍[cadrage]에 따라 타자를 파악해야 한다. 프레이밍에 의해 공간 이미지가, 공간이미지에 의해 씬이 세팅되고, 그로 인해 드라마나 역동성이 설정된다. 마치 카메라가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의 한가운데에 (처음부터) 위치해온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어떤 구조도, 참조점도, ‘화면 밖의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공포에 질린 얼굴이 떠오른다는 경고도 찾을 수 없다. 그저 사막과도 같은 직사각형의 공간 속을 배회할 뿐이다. 프레임은 갑자기 우리가 보는 것에 대한 고정점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타자의 이미지로 채워진다. 타자의 얼굴은 프레임을 포획하지만, 이는 또한 프레임 바깥(hors cadre)’(에 있는 무언가)에 사로잡힌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제나 얼굴을 두 개의 면으로 묘사했으며, 이는 우리가 보는 것과 그것의 특징, 그리고 그들이 보는 것과 그 특징들 사이에서 재생될 수 있는 것을 분배한다. 프레임 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얼굴은 공포의 무리constellation 속에서 그것의 특징들을 모으고, 마찬가지로 오프-스크린과의 관계 속에서 이미지를 구성한다. 얼굴이 결국 표현하게 될, 공포스러운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이미지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네마 1>에서 들뢰즈는 얼굴을 클로즈업이나 정동-이미지로 정의한다. 말하자면, ‘그 자체로 표현된 것으로 간주되는 힘이나 특질’(들뢰즈, 2001: 87)인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들뢰즈가 가타리와 따로 또 같이 수행한 정동 분석은 용어의 가장 기본적인 정의를 제공한 앙리 베르그손으로부터 이끌어낸 것들과 단단히 결부되어 있다. 정동은 감각 신경 위에서 나타나는 운동적 경향이다’(들뢰즈, 2001: 87). 그러나 얼굴은 정동과 그 정동의 감각적 이미지가 가리 잡는 장소이다(들뢰즈, 1986: 5). 얼굴은 감정들과 감도들에 영향을 받는다. 들뢰즈가 얼굴의 상대적인 부동성과 그것의 수용 기관들이라 부른 것을 고려하면, 얼굴은 자신 위에 덧씌워진 것 이상을 할 수 없다(The face is subject to emotions and intensities that, given what Deleuze calls its ‘relative immobility and its receptive organs’, it can do no better than wear on its face). (들뢰즈, 2001: 66) 얼굴은 실질적으로virtually 무기력하기 때문에 힘의 잠재적 이미지를 구체화시킬 수 있는 능력, 즉 영향을 받을 능력, ‘신체의 나머지 부분에 종종 파묻힌 채로 남아 있는 운동들을 미세한 표현의 운동으로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들뢰즈, 2001: 66) 아주 작은 운동들의 계열이나 진동은 얼굴을 가로질러 지나간다. 멍한 눈동자, 주름진 눈썹, 아마도 공포의 암시일 헐떡임. 얼굴의 가독성은 정동들 속에 있다. 정동들은 이 수용적 표면 위를 가로지르면서, 마치 빠르게 다른 것들로 용해되는 것처럼, 표정들로 용해된다. 얼굴이 표현된 것이라면, 정동의 횡단은, 마치 체셔 고양이의 미소처럼 얼굴/용모fearures라는 단단한 풍경을 벗어나는 표정으로서 얼굴의 표면 위에서 뛰노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언제나 얼굴의 분석에 있어 시네마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시네마가 클로즈업을 가지고 신체로부터 얼굴을 떼어내므로, 시네마는 얼굴을 탈영토화하는 독특한 힘 혹은 능력을 전용하기 때문이다. 프레임이 이미지를 더 큰 환경으로부터 빼앗아 오는 방식으로 일종의 탈영토화를 구성하기 때문에, 들뢰즈는 모든 시네마틱 이미지를 정동-이미지로 구체화된 탈영토화의 매우 특별한 종류라고 주장한다. (들뢰즈, 2001: 96) 지각-이미지와 운동-이미지가 운동을 지각의 대상이나 주체의 행위로 번역하는 반면, 정동-이미지는 순수한 질을 불러 일으킨다. ‘운동이 표현의 움직임이 되기 위해서 번역되기를 그치게 하는 것은 분명히 정동이다. , 움직이지 않는 요소를 자극하는 단순한 경향의 질인 것이다.’ (들뢰즈, 2001: 66) 지각의 대상으로도 주체의 행동으로도 변환되지 않기 때문에, 정동-이미지는 지각과 행동 사이의 시냅스를 연다. 수용된 운동과 완수된 운동 사이의 번역은 단락된다. 그 결과 정동은 운동경향(motor-tendency)으로 외재화되지 못하고 흡수되고 뒤얽힌다. 따라서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시네마에서 얼굴은 하나의 망설임, 즉 어펙트가 되며, ‘아직 보이지 않은 것, 또는 아직도 규정되지 않은 것과 관련하여 어떤 표현 속으로 스스로를 지연시키는 정동적인 강도가 될 수 있다. ‘얼굴은 안주름implicated의 강도 영역을 설정한다. 행위나 지각으로 연장extended되기보다는 얼굴 그 자체로 여겨지는 순수한 질로서 진동한다는 것이다. (들뢰즈, 1994: 260을 보라.)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타자의 첫 번째 개념 얼굴 일차성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 <시네마 1>에서, ‘일차성 그 자체로서의 그것이다 이는 감각, 느낌, 생각이 아니라, 가능한 감각, 느낌, 생각의 질이다.” 그래서 일차성은 가능성의 범주이다. 이는 가능성에 적절한 일관성을 부여하고 완수된 상태로 만드는 반면, 가능한 것을 현동화하지 않고 표현한다. (들뢰즈, 2001: 98) 만약 타자가 첫 번째 개념이라면, 그것은 정동적인 영역, 즉 얼굴이 현동화의 문제와 무관하게, 무엇보다도 그 자체로서 여겨지는 질이나 역량이 위치한 일차성의 전거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타자가 철학을 시작한다면, 이는 가능성의 역량이 그러했듯이, 일차성이 사유의 특정한 무력함impower’을 표현함에 있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능세계의 표현으로서 타자를 다시 상기해야 한다. 또한 타자는 언어로 스스로를 표현할 때 특정한 사람’, ‘로서 현동화된다. 표현하는 것the expressing 발화나 말로 나는 공포에 질렸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 말들이 진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충분히 (이른바) 가능성으로 주어지는 현실이다. 이는 언어적 지표로서의 가 지니는 유일한 의미이다.’ (들뢰즈&가타리, 1994: 17) 그래서, 만약 타자의 얼굴이 그것이 표현하는 가능세계를 함축하고 있다면, 이는 또한 누군가의 얼굴로서 이를 규정하는 개체화 기능의 지대이기도 하다. 우리는 얼굴의 일면이 표현을 향해 있고 나머지 면이 현동화를 향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오직 시네마에서만 명확하게 입증되는 이중의 존재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시네마에서 우리가 보는 얼굴은 정동이 행위로 바뀌는 감각-운동 도식 내에서 규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들뢰즈는 시네마에서 행동-이미지의 영역이 얼굴로 하여금 주체적인 차원을 갖게 하는 습관과 재인의 자리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얼굴의 특질이나 힘이 표현된 것으로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만큼, 그 특질이나 힘들은 또한 사물의 상태로 구현되고 현동화된 것으로서도 존재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실제로 정동의 순수한 질과 정동-이미지가 행동-이미지를 야기할 때 일어나는 것을 나란히 놓으면서, 그 결과로 질은 대상의 질이 되고, 힘은 행위나 정념이, 정동은 감각, 감정sentiment, 정서emotion, 심지어는 사람의 충동이 되며, ‘얼굴에서 사람의 성격이나 가면으로 현동화시킬 수 있다. (들뢰즈, 2001: 97)

 

 

4. Persona non grata 환영받지 못하는 자

 

이제 우리는 마침내 타자의 개념에서부터 정동-이미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좇아온 경로가 들뢰즈와 가타리의 분열분석 기획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특정하게 이는, 들뢰즈가 정동-이미지에 대해 쓴 글에서 읽어낼 수 있다. 여기에서 들뢰즈는 문제를 현대인의 얼굴이 야기하는, 즉 주체적이고 의미작용하는 얼굴들에 대한 규정으로 한정하고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만 한다. 행동-이미지를 통해 비로소 얼굴은 자신이 속해있는 사람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고 말이다. 실제로 들뢰즈는 얼굴의 세 가지 인격화 기능을 다음과 같이 특정하고 있다. ‘개체화’(개별의 인물을 구별하거나 특징지음), ‘사회화(사회적 역할을 나타냄), ‘관계적이거나 소통하는 것(두 사람 간의 소통 뿐만 아니라 개별 인물이 그의 특징과 역할 사이에서 내적 합의를 이루는 것도 보장함)’. (들뢰즈, 2001: 99)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들의 분열분석 기획에서 얼굴의 이러한 기능들을 정밀하게 고려한다. 여기에서 얼굴들의 정동적 풍경이 갖는 위험들과 가능성들은 각각 정치학과 관행으로 유용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제나 개념들에는 역사가 있다고 말해왔지만, 이 점에 대한 우리 논의의 골조 내에서는 이를 비록 서로 관련되어 있긴 하지만[albeit related] 두 개의 구별된 의미들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우리를 철학에서 시네마로, 그리고 지금은 분열분석으로 데려왔다. 둘째로, 달리 생각해 보았을 때 타자의 전거로 주의를 돌리고 있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얼굴 그 자체가 역사를 갖는다고 선언한 것은 분명한 분열분석의 맥락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태초의 사회를 생각해 보자고 쓰고, 이어 얼굴을 통해 작동하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태초의 기호학은 비-의미화이고, 비주체적이며, 본질적으로 집단적, 다성적, 물질적인데다 매우 다양한 형식과 질료로 작동한다. (들뢰즈&가타리, 1987: 175) 실제로 우리는 현대 서구 문화가 얼굴에 부과하는 중요함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이 생각 자체를 조직하고 규율하는 기준으로서의 주체성 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조직화, 혹은 안면성을 특수한 힘의 배치에 입각하여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얼굴을 효과적으로 생산하는 추상 기계의 선들에 따라 정의한다. ‘얼굴이 선존재하던 주체나 기표를 추정하지 않는다면, 이는 바로 얼굴이 추상기계에 의존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이다.’ (들뢰즈&가타리, 1987: 180) 차라리, 표현의 추상기계가 의미화하는 주체성이나 의미화하는 이중단성화biunivocalization와 주체적인 이항대립화binarization’로서의 얼굴을 생산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들뢰즈&가타리, 1987: 179)

 

역사적으로 혹은 인식론적으로, 얼굴은 추상기계가 유기체의 지층에서부터 혼합된 기호학의 지층까지, 머리에 대한 절대적 탈영토화를 수행할 때 생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얼굴이 유기체로부터 탈영토화됨에 따라 기표화와 주체화의 지층들로 재영토화되는 표현의 질료가 된다고 설명한다. (1987: 181) 반면, 의미작용으로서의 기표화는 타자another와 관계하는 기초적인 얼굴을 구성한다. 이는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어른이거나 아이이거나, 지배자이거나 피지배층이거나, “x이거나 y”에 적용된다. 또 한편으로 주체화는 예외적인 것조차 그 자신의 격자에 끼워맞추기도 한다. (‘아하!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라면, 틀림없이 복장도착자일거야.’) (1987: 177) 이러한 이유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얼굴이 생산되었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생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당신은 얼굴을 갖는 것이 아니라 얼굴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다.” (1987: 177) 얼굴들은 분할할 수 없는 것individual이 아니라, ‘빈도 또는 개연성의 지대들을 규정한다.’ (1987: 168) 얼굴들은 영속적인 재코드화에 예속된다. 그에 따라 얼굴은 가독성의 장 내에 규정되며, 이는 분석의 과정에 놓인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측면에서 얼굴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의 얼굴은 단순히 행복하거나 슬픈 것, 평온함이나 분노로서가 아닌, 코드화를 위한 역량의 전거이다. 하지만 시네마로 다시 한 번 돌아감으로써, 우리는 이 수수께끼같은 표면(‘-’)의 의미를 훌륭하게 재영토화 해낼 수 있다.

 

시네마가 안면성의 첫 사건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이미 이 우발성의 패러다임적 순간과 이러한 우발성의 매체로서 시네마를 지적해 왔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있어 클로즈-업은 안면성의 추상기계에 상당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문자 그대로의 영화적 클로즈-업이 그 대상이 무엇이든 (시계이든, 칼이든, 손이든 간에) 언제나 안면화되는 반면, ‘얼굴 그 자체는 클로즈-업된, ‘-영화avant le cinema’라고 말했다. ‘얼굴 본성상 그것의 생기없는 흰 표면, 빛나는 검은 구멍, 공허함과 지루함을 가지고 있는 클로즈-이다. (1987: 171) ‘얼굴이 정치학을 함축하고 있는 한,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 성패가 얼굴의 완전한 해체에 달려있는 정치학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물론 이 정치학을 얼굴 이전의 시간에 대한 휴머니즘적 향수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이는 원시인들의 전-의미적이고 전-주체적인 기호학으로 회귀하자는 문제가 아니다. (1987: 188)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장했듯이, 여기에는 비인간적인 것만이 있다. 인간은 오직 비인간성들로만 만들어진다. 하지만 매우 다른 본성과 속도를 가진 아주 다른 어떤 것이 있다. 실제로, ‘얼굴이 바로 인간 속의 비인간 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운명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얼굴을 탈출하고, ‘얼굴과 안면화를 해체하고, 감지할 수 없는 은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는 동물성으로 회귀하는 것도 아니고, 머리the head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다. 매우 영적이고 특별한 동물-되기, 그리고 벽을 넘고 검은 구멍을 빠져 나오는 이상하고 진실한 생성들로써, 안면성의 속성들 자체는 마침내 얼굴의 조직화를 피하도록 만든다. 그 안면성의 속성들은 경계를 넘어 뻗어나가는 주근깨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 자기 자신을 바라보거나 또는 의미화하는/의미작용적/기표작용적signifying 주체들 사이의 그 음울한 맞대면을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횡단하는 눈들 등이다.” (1987: 171)

 

만약 얼굴이 정치학에 포획되거나 사로잡힌다면, 얼굴의 정치학은 이 규정들을 해체하는 프로젝트를 구성할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의미작용과 비-주체적인 것, 그리고 얼굴 없음의 영역까지 탈주선을 확장시킴으로써, ‘인간의 얼굴로 돌아가는 대신 얼굴이 지각불가능한 것 되기의 장소가 될 수 있는 완전히 다른 절차를 주장하게 된다. (1987: 187)

 

가타리와 함께한 연구에 앞서, 들뢰즈는 얼굴이 규정된 것이 되기는 커녕 다시 한 번 가능세계들을 열어젖힌다면, 창조적 철학과 창조적 정치학 모두의 기반이 그것이 인위적이라 할지라도, 특별한 경험의 조건 내에서 추구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들뢰즈, 1994: 260) 그러나 분열분석의 맥락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인위적 조건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얼굴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술의 모든 자원들을 필요로 한다고 설명한다. (1987: 187) 우리는 클로즈-업이 어떻게 안면성의 추상기계-‘얼굴이 사람의 성격이나 가면이 되게 하는-를 생산하는지 본 적이 있다. (들뢰즈, 2001: 97) 그러나 이제 우리는 시네마의 보다 더 급진적인 힘을 파악하는 지점에 도달했다. 정동-이미지는 얼굴을 규정적 배경에서 추상화하며 이례적으로 지속되는 정동적 특이성들을 표현하고, 얼굴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그 결과 정동-이미지는 얼굴을 가로지르는 우발적인 힘을 향유한다. ‘얼굴을 그것의 기표화와 주체화로부터 떼어놓음으로써 자신의 추상기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시네마는 얼굴이 하나의 정체성으로 전락해버리는 과정을 겪지 못하도록 하고, 대신 순수한 질로 진동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얼굴을 잃어버리게 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시네마는 일종의 지속의 전망/가능성prospect를 제공하는데, 그것을 통해 정동은 [단지] 운동, 행동, 규정에 선행하는 것이기를 멈추고, ‘모든 현실화로 환원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하는 것이 된다(들뢰즈, 2001: 106).

 

<시네마 2>에서 들뢰즈는 클로즈-업이 실제로 개체화를 유예한다고 썼다. 하지만 그와 가타리는 애통해하기는 커녕 이 우발성을 얼굴의 실천과 정치학의 근간으로 여기며 기뻐한다. 개체화를 유예함으로써,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개체적인 것으로부터 정동을 해방시킴으로써, 우리는 얼굴이 규정되는 것, 즉 의미화와 주체화에 관계된 힘의 네트워크를 소멸시키는 절차를 시작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지점을 추적해온 얼굴의 궤도 끝에서, 아마도 우리는 얼굴이 단지 개념의 거점(타자 복합체)나 정동(클로즈-)과 정치(얼굴성)의 거점만이 아니라 얼굴이 이 모든 영역(철학, 시네마, 분열분석)을 향유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소는 각 영역이 차례차례 돌아오는 문제의 거점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사례에서, 우리는 얼굴이 단지 가능세계만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불가능한 것 되기의 가능성 역시 갖고 있다고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는 매우 여러 측면과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어떻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울 수 있을까?’ 만약 이 질문에 얼굴이 정답을 제공한다면, 이는 얼굴이 익명-되기의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얼굴은 정체성을 버림으로써 그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그것을 가로지르고 개체화로부터 우리를 고갈시키는 정동은 일종의 특이성-느낌, 감각, 강도-을 획득한다. 이 과정에 대해 들뢰즈가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로부터 가져와 설명한 일화가 있는데, 이것으로 결론을 지어볼 수 있겠다. 영화 <페르소나>가 주인공인 엘리자벳(리브 울만)과 간호사 알마(비비 앤더슨)를 사로잡는 일종의 집단 정신분열증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라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엘리자벳은 유명한 배우로, 그가 공연하던 연극 엘렉트라를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되며, 이후 세 달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 간호사 알마는 처음에는 그녀가 회복하고 있던 요양소에서, 그 다음에는 해변의 별장에서 엘리자벳을 간병하도록 배정된다. 이 겉보기에는 고립된 지역에서 두 사람은 이상한 이중-전치를 겪게 되며, 각 인물은 그들 자신으로부터 붕 뜬 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떠내려간다. 누가 배우인가? 두 사람 다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안면성의 추상기계는 얼굴을 기획하지만, 영화적 기계는 다른 기획, 혹은 분열분석의 기획을 실현한다. 바로 얼굴을 버리는 것이다. 들뢰즈는 기억해야 할 것은 배우 자신이 클로즈-업 된 자신을 식별하지 못한다는 것 뿐이라고 쓴다. (베르만에 따르면, “우리가 영화를 편집하는 동안, 그걸 본 리브는 비비를 좀 봐, 끔찍해!’ 라고 말했다. 비비가 대답했다. ‘아니, 이건 내가 아니라 너야”) (들뢰즈, 1986: 103) 실제로 베리만은 두 얼굴을 통해 추상기계를 만들었지만, 의도적으로 플랑세캉스를 클로즈-업으로 바꾸게 되면서 필름은 궁극적으로 두 얼굴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이 영화의 서사는 영사기가 섹스와 고문에 대한 이미지 조각으로 된 필름을 뿜어내는 초현실적인 이미지 시퀀스, 즉 이상한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병실의 불편한 침대에서 깡마른 소년이 일어나, 마침내 그 앞의 벽에 놓인 거대한 스크린으로 돌아선다. 스크린에는 얼굴의 거대한 클로즈업이 영사된다. 그것은 처음에는 엘리자벳의 클로즈업이고, 천천히 알마의 클로즈업으로 디졸브되었다가 또 역으로 디졸브된다. 소년이 얼굴을 마주하는 동안 얼굴은 두 극 사이에서 도플러 효과를 일으킨다. 그의 등은 카메라를 등지고 있고, 그의 어색한 신체가 밝은 표면에 맞서 어둠 속에 프레임된다. 의미화 작용과 주체성이 부재한 흰 벽과 검은 구멍인 것이다. 소년은 부드럽고 수줍게 그의 손 그림자를 움직여 얼굴을 가로지른다. 잡을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는 것처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직관할 수는 있는 것처럼 말이다. <페르소나>에서, 베리만은 그가 오직 영화만이 발견할 수 있는 무언의 비밀을 접했다’(Vermiye, 123)고 말한 적이 있지만, 시네마만큼이나 분열분석에 속해 있는 이러한 비밀들은 얼굴에서부터 시작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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