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기획: ‘유물론적 연극론’에 대한 번역을 시작하며.
이찬선 | 알튀세르 번역집단
새롭게 시작하는 웹진 인-무브En-Movement는 그것의 하위 카테고리로서 “알튀세르를 번역하자”라는 꼭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지면에는 그것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알튀세르에 관련된 텍스트들에 대한 번역문들이 게재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알튀세르가 직접 작성했던 원전들과 더불어, 그 원전들에 대한 연구자들의 이차 논문들 또한 포함됩니다. 이 텍스트들은 현재 대학원에서 알튀세르를 직·간접적으로 공부하고 있는 젊은 연구생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알튀세르 번역 집단에 의해 번역되어 연재될 예정입니다.
“알튀세르를 번역하자”라는 제목은 이러한 번역-지면을 기획한 의도를 간접적으로 드러내주는 일종의 슬로건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알튀세르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이 제목이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하여 출판한 1965년의 저서 『『자본』을 읽자』를 패러디한 것임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해에 출판된 『맑스를 위하여』의 제목 또한 마찬가지로, 이러한 일종의 이론적 슬로건은 알튀세르의 철학적 작업들이 언제나 특정한 정세와 결부되어 있는 개입으로 실천되었다는 점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세 속으로의 개입이야말로 알튀세르 철학의 핵심적인 독특성을 구성합니다. 왜냐하면, 알튀세르의 개인적인 삶이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처럼, 언제나 어떤 문제이든 단순하게 다른 무엇으로 환원시키기를 완강하게 거부하면서 그것들을 복잡하게 사고하고자 노력했고 그것에 강제됐던, 그리하여 어떤 일관된 흐름으로 포착하기 참으로 어려운 알튀세르의 복잡한 이론적 여정 속에서, 그나마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관성이 바로 이러한 정세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개입이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 그것은 ‘철학’으로 하여금 특정한 정세에 의해 강제되고, 그 정세로의 개입의 효과로서만 존재하도록 그것의 이론적 체계를 유한하게 열어놓고자 했던 알튀세르의 모순적인 일관성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적 슬로건을 패러디하여 삼은 “알튀세르를 번역하자”라는 제목이 함축하고 있는 일종의 수행성은 일차적으로는 알튀세르의 그것과 동일한 층위에 놓여있지는 않습니다. 정확하게, 이 제목은 그저 “알튀세르와 관련된 여러 텍스트들을 지금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하여 내놓자”라는 기본적인 구호와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기획은 매우 소박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획은 여러 이유로 알튀세르 이론에 관심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적, 시간적, 경제적 등등의 여러 현실적 제약들로 인해 그것을 직접적으로 읽을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알튀세르를 읽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제안은 동시에 막중한 의무들을 동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지면에 게재될 글들은 ‘번역문’이며, 무엇보다도 역자들에 의해 선택된 텍스트들이기 때문입니다. 역자의 입장에서, 이는 단순히 번역이 가지는 학문적 중요성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여러 부담들을 역자들이 충실하고 온전하게 감당해야만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서만 연원하는 의무는 아닙니다. 이는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 자신들의 것이 아닌 글들을 그 글들이 쓰여진 장소와는 전혀 다른 장소로 정해지지 않은 수신자들에게 발송한다는 일종의 우발적인 내기에서 연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역으로 독자의 입장에서 이 의무는, 이 텍스트들에 대해 우선적으로 ‘강제된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역자에 의해 선택된 텍스트들을 읽지 않기를 선택할 수 있는 ‘독자’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독자에게는 특정한 주제를 중심으로 텍스트들을 선별하여 해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알튀세르 이론의 일면을 재구성하고자 시도할 역자의 이론적 실천을 진지하게 고려해야만 한다는 의무가 부과됩니다.
그런데 이때의 의무란 역자의 이론적 실천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개입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비판적인 개입만이 텍스트들에 대한 강제된 선택으로부터 의식적 선택으로의 회고적인 이동을 막을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비판적 개입의 효과들을 텍스트들에 되돌려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비로소 “알튀세르를 번역하자”의 수행성을 알튀세르가 겨냥했던 이론의 수행성과 동일한 층위에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분명하게, “알튀세르를 번역하자”라는 슬로건은 잘 알려지지 않은 알튀세르의 어떤 이론적 측면들을 소개하고 그것을 통해 어떤 교육학적인 매개 역할을 하자는 의도가 아니라, 비판적인 효과들을 생산해내는 ‘알튀세르적인 이론적 실천’의 일환으로서 알튀세르를 번역하자는 의도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상 하에서 첫 번째로 선정된 주제는 알튀세르의 ‘유물론적 연극론’입니다.
유물론적 연극론이라는 주제는 알튀세르에 어느 정도 친숙한 독자에게도 매우 낯선 주제일 것입니다. 사실상 알튀세르의 고유한 연극론의 존재 여부 자체가 매우 논쟁적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알튀세르는 연극 일반을 자신의 독자적인 이론적 대상으로 삼지 않았을 뿐더러, 그것을 유물론적 연극으로 특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이 주제에 관해 남긴 텍스트가 매우 적기 때문입니다.
알튀세르가 생전에 직접 공간한 텍스트들 중에서 유물론적 연극론에 관한 것은 『맑스를 위하여』에 수록된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유물론적 연극에 대한 노트)」가 유일하며, 사후에 공간된 텍스트라고 해봐야, 『철학·정치 저작집 2권(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II)』에 수록되어 있는 「브레히트와 맑스에 대하여」와 「파올로 그라씨에게 보내는 편지(1968년 3월 6일)」가 전부입니다. 이 텍스트들 모두는 밀라노의 ‘피콜로 극단’과 그 극단의 연출가 ‘조르지오 스트렐러(Giorgio Strehler)’의 연극 작품 활동을 배경으로 하여 작성된 것들입니다.
따라서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유물론적 연극론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의 분석 대상은 특이한 몇몇의 연극 작품들과 브레히트와 같은 위대한 극작가로 한정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알튀세르의 이론적 체계 내에서 매우 제한된 자리, 즉 부차적인 위상만을 점할 뿐이라는 평가가 일견 타당해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앞서 열거된 텍스트들을 실제로 읽다보면 그 속에는 이러한 평가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독특성들이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텍스트들은 특정한 연극 작품 및 작업을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분석은 연극적 실천의 실재 작동 지평이, 연극 자체가 그것의 하나의 종별적인 실천이기도 한, 예술의 지평으로 한정될 수 없음을 드러냅니다. 다르게 말해서, 이는 연극적 ‘상연’의 지평이 알튀세르 고유의 ‘전체(tout)’로 확장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알튀세르는 『『자본』을 읽자』에 수록된 「『자본』의 대상」 말미에서, 사회적 전체의 실존 양태를 ‘저자 없는 연극(un théâtre sans auteur)’의 독특한 무대연출이라는 은유로 설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알튀세르는 여러 글들에서 ‘사회적 전체’, ‘역사’와 같은 가장 거시적인 이론적 대상을 연극적 무대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적 전체, 역사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어떤 연극이 상연되는 것으로 은유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은유들의 이론적 위상은 그 자체로 문제적입니다. 즉 엄밀하게 말해서 그것들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수사학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론도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비판의 요소들(éléments d’auto-critique)」에서 알튀세르가 “사람들은 철학에서 은유들 하에서만 사유한다”라고 말했다는 것도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선은 이 문제를 유보하는 한에서, 연극적 상연이라는 일련의 은유화 속에서 핵심적으로 드러나는 논점은, 모든 연극의 상연은 그것의 필수적인 조건으로서 주체가 자신이 속해있는 전체와 맺는 어떤 상상적 관계의 상연, 즉 어떤 이데올로기의 상연을 구조적으로 함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전체의 연극적 상연이라는 은유는 언제나 전체 속에서 그것을 조건으로 하여 작동되는 이데올로기의 작용/공연(jeu)이라는 은유를 내포합니다. 그리고 알튀세르의 고유한 개념들인 ‘과잉결정(surdétermination)’과 ‘구조적 인과성(causalité structurale)’의 정의들을 쫓아 이를 말한다면, 연극적 상연에서 상연되는 것은 구조적 인과성을 따르는 전체 내에서의 이데올로기라는 심급의 과잉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알튀세르의 핵심적 개념들이 연극적 상연이라는 은유 속에 배치될 수 있다면, 그리고 ‘유물론적인 연극’에 관한 텍스트들에서 이러한 연극적 상연의 구조적인 원리가 설명된다면, 그의 이론적 체계 내에서 ‘유물론적인 연극론’은 부차적인 위상이 아니라, 정반대로 중심적인 위상을 점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들은 사실 1996년 프랑스에서의 『맑스를 위하여』의 재판에 맞춰 에티엔 발리바르가 새롭게 작성하여 붙인 「서문(Avant-propos pour la réédition de 1996)」의 암시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다음과 같은 언급들을 나름대로 다시금 취한 것이기도 합니다.
“구조에 대한 이러한 개념화는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 (유물론적 연극에 대한 노트)」에서 제시되는 것처럼, 주체적/주관적(subjectif) 시간들의 거리두기(distanciation)의 구조 또는 분리(dissociation)의 구조라는 관점에서 비범하게 소묘되고 있는“의식”이라는 인간학적인 범주에 대한 비판을 자신의 대응물로 지니고 있다. 이 논문은 이 책 전체의 이론적이고 기하학적인 진정한 중심이지만, 누구도 이를 그 자체로 읽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 책에서 이 논문은 “도둑맞은 편지”처럼 나타난다. 아마도 이는 이 논문이 미학에 관한, 연극에 관한 논문이라는 암묵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렇게 언급 한 뒤에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논의를 진전시키지는 않습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인, 2015년에 그는 「알튀세르의 극작법과 이데올로기 비판(Althusser’s Dramaturgy and the Critique of Ideology)」이라는 글에서, 당시에 그는 약간은 무턱대고 그러한 주장을 했으나, 그 이후 여러 동료 학자들(Banu Bargu, Marc-Vincent Howlett, Warren Montag, Guillaume Sibertin-Blanc)의 탁월한 분석과 주석들 덕분에 그러한 주장이 비로소 근거들을 갖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다소간에 발리바르의 암시적인 언급으로 촉발된 이 문제에 대한 여러 연구자들의 이론적 작업들의 흐름을 쫓아가보려고 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연재될 번역문들의 리스트에는 바로 위에서 말해진 연구자들의 논문들이 모두 포함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논문들의 번역문들을 연재하기에 앞서, 유물론적 연극에 관련된 알튀세르의 텍스트들을 먼저 번역하여 연재할 것입니다.
연재될 번역문들의 리스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Louis Althusser, “Sur Brecht et Marx(1968)”, 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II, Stock/IMEC, 1997, pp.541-558.
Louis Althusser, “Lettre à Paolo Grassi(6 mars 1968)”, 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II, Stock/IMEC, 1997, pp.535-539.
Marc-Vincent Howlett, “Le théâtre n’est-il pour Althusser qu’un ‘risque fictif’?”, in collectif, Lire Althusser aujourd’hui, L’Harmattan, 1997, pp.115-138.
Warren Montag, “First encounters: art against ideology”(1장 1절); “Towards a theory of the materiality of art”(1장 2절), Louis Althusser, Palgrave Macmillan, 2003, pp.16-49.
Guillaume Sibertin-Blanc et Armelle Talbot, “Pour un théâtre matérialiste” archives du Groupe de recherches matérialiste, 5 janvier 2008.
Guillaume Sibertin-Blanc, “De la théorie du théâtre à la scène de la théorie: Réflexions sur “‘Le Piccolo’: Bertolazzi et Brecht” d’Althusser”, Le moment philosophique des années 1960 en France, PUF, 2011. pp.255–272.
Banu Bargu, “In the Theater of Politics: Althusser’s Aleatory Materialism and Aesthetics”, diacritics 40.3, 2012, pp.86–111.
Étienne Balibar, “Althusser’s Dramaturgy and the Critique of Ideology”, differences 26.3, 2015, pp.1–22.
Judith Butler, “Theatrical Machines”, differences 26.3, 2015, pp.23–42.
Warren Montag, “Althusser’s Authorless Theater”, differences 26.3, 2015, pp.43–53.
Banu Bargu, “Althusser’s Materialist Theater: Ideology and Its Aporias”, differences 26.3, 2015, pp.81–106.
Laurent de Sutter, “Louis Althusser et la scène du procès”, déclages, 2.1, 2016.
이 리스트는 어느 정도는 잠정적인 것이지만, 하나의 글도 빠지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할 것이며 역자들과의 상의 하에 몇 개의 글들이 추가될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밝혀둡니다. 번역문들은 이 리스트의 순서대로 매주 목요일에 각 텍스트의 분량에 따라 한 텍스트당 짧으면 1주, 길면 3주에 걸쳐 연재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웹상으로도 접근할 수 있는 원문들은 그 URL을 해당 번역문의 연재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당부의 말을 전하면서 글을 줄일까 합니다. 번역문들의 리스트에는 알튀세르의 유물론적 연극론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논문인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 (유물론적 연극에 대한 노트)」가 빠져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논문이 수록되어 있는 『맑스를 위하여』가 국내에 이미 번역되어 있으며, 특히나 오랫동안 알튀세르를 연구해 오신 서관모 선생님께서 새롭게 번역하신 판본이 올해 초에 출판되었기 때문입니다 (서관모 역, 『마르크스를 위하여』, 후마니타스, 2017.). 사실 앞으로 번역될 모든 텍스트들은 이 논문을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이 글이야말로 이번 기획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이기 때문에 꼭 이 논문의 일독을 권합니다.
또한 이 논문 및 유물론적 연극론을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국내 연구자분들의 연구 작업들 또한 앞으로 논의될 내용들과 쟁점들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일독을 권합니다 (최원, 『라캉 또는 알튀세르』 4장 1절: ‘이데올로기적 반역’이라는 질문, 난장, 2016, pp.333-351.; 최정우, 「미학으로 (재)생산되지 않는 미학: 알튀세르 예술론의 어떤 (불)가능성」, 『알튀세르 효과』, 진태원 엮음, 그린비, 2011, pp.177-219.; 강경덕, 「이데올로기와 예술: 스피노자 또는 브레히트」, 마르크스주의 연구(9권 3호), 2012, pp.214-237.).
연재가 시작되기 전에, 바로 앞서 언급된 알튀세르의 논문과 그에 관련된 국내 연구자분들의 글들이 여러분께 많은 지적 자극과 호기심들 그리고 이론적 고민들과 함께 “알튀세르를 번역하자”에 대한 기대감 또한 안겨줄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첫 번째 연재 때 다시 뵐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2017년 6월 1일
알튀세르 번역집단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