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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 브레히트와 맑스에 대하여(1968) - 세번째


 

이종현 옮김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알튀세르 번역집단



브레히트가 말하는 자리이동의 모든 효과들은 이 근본적 자리이동의 효과들입니다. 저는 그 효과들을 열거해 보겠습니다.

 

1. 우선 관객들의 머릿속에 있는 연극의 이데올로기와 관련하여 연극을 자리이동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연극은 연극이라는 것, 단지 연극일 뿐이지 삶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합니다. 무대는 관객들 앞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무대이지 결코 객석의 연장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객석과 무대 사이에는 공백과 거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바로 무대 위에서 이 거리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으로부터 무대장식, 조명, 소품, 의상, 공연프로그램, 광고판, 노래(songs) 등에 관련된 모든 기술적 개혁들이 비롯됩니다. 신비화된 공모관계인 관객들과 공연 사이의 공모관계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여기에서 어떤 물리적 자리이동이 관건이 됩니다. 이 물리적 자리이동은 연극과 관객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보게 만듭니다. 바로 연극은 삶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만듭니다.

 

2. 그러고 나서 작품의 전통적 개념과 관련하여 작품(pièce)이라는 개념을 자리이동 해야 합니다. 작품의 새로운 개념은 바로 브레히트가 서사적 스타일을 말하면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연출가라는 개념과 관련되고, 당연히 작품이 쓰일 때에는 작가라는 개념과도 관련됩니다. 그러나 연출가라는 개념이 무엇보다도 결정적입니다. 훌륭한 작품을 잘못 연출할 수도 있고(예를 들면 국립민중극장이 공연한 <억척 어멈>[각주:1]) 덜 훌륭한 작품을 뛰어나게 연출할 수도 있습니다.(예를 들면 <우리들의 밀라노>[각주:2]) 이러한 자리이동은 우선 작품을 탈중심화하는 데 그 본질이 있습니다. , 이러한 자리이동은 작품이 자발적(spontanée) 재현의 형태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관객은 작품을 통해 삶, 갈등, 드라마와 그 해결을 자발적으로 재현합니다. 매우 상징적인 하나의 사례를 들면서 또, 작품은 자신의 중심을 자신 안이 아니라 바깥에 두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 자리이동을 요약해 볼 수 있겠습니다. 아니면 주인공들은 작품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또는 모든 것이 현존/현전하고 집약되는 주요 장면, 즉 고전적 갈등이 드러나는 주요 장면이 작품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예를 들면, 갈릴레오에서 나타난 브레히트의 천재성은 재판의 주요 장면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도르를 참고하시오.[각주:3]) 모두들 갈릴레오의 재판장면을 보기를 기대합니다. 모두들 갈릴레오가 지구에 관한 역사적인 문장을 말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브레히트는 재판을 보여주지 않고 갈릴레오는 이 역사적인 문장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 결과 작품의 중심은 작품 안이 아니라 바깥에 있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도 결코 이 중심을 보지 못합니다.

 

3. 마지막으로 관객들과 배우들이 연기에 대해 갖는 관념과 관련하여 배우들의 연기를 자리이동 해야 합니다. 모두들 브레히트의 위대한 기술적 혁신을 알고 있습니다. 배우는 바로 배우 자신을 대면하여 거리를 지녀야 한다, 즉 배우는 배우의 이데올로기에 대면하여 스스로 자리이동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사람들은 브레히트의 이러한 혁신을 순전히 기술적인 것으로만 파악하려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브레히트는 배우의 연기 기술을 변화시켰습니다. 하지만 이 기술은 더욱 거대한 변화의 일부이고, 연극적 실천의 전체가 겪은 변화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이 연기 기술의 변화를 연극적 실천 전체의 나머지로부터 분리시킨다면, 이 연기 기술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모두들 브레히트의 기술들을 응용합니다. 브레히트가 연극적 실천에서 이룩한 혁명을 단순히 기술적 방법의 혁명으로 환원하는 것은 브레히트의 혁명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실천이란 기술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이 모든 자리이동들의 결과는 연극과 관객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생산합니다. 이것은 자리이동된 관계입니다. 브레히트는 이 자리이동의 효과를 V-효과[각주:4]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효과는 관객 안에서 일어나던 동일시가 끝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관객은 무대가 그에게 보게 하는 것과 자신을 동일화하기를 멈추어야 합니다. 관객은 비판적 위치에 자리 잡아야 하고 직접 무언가에 찬성 또는 반대표를 던지고 판단하고 투표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작품은 그를 위해 아무 것도 결정해 주지 않습니다. 작품은 기성복이 아닙니다. 작품은 어떤 옷이 아닙니다. 관객은 작품의 옷감으로 자신에게 알맞은 옷을 직접 재단해야 합니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작품이 그에게 제공하는 옷감 조각들로 옷을 재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작품 안에는 기성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거기에 주인공들은 없습니다.

 

저는 맑스의 철학적 혁명도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 드리기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맑스의 철학적 혁명은 이중의 목적을 지닌 철학 안에서 자리이동들을 부추기는 데 있습니다. 이중의 목적은 첫째, 철학적 신비화의 효과들을 실천적으로 폐기하는 것이고, 둘째, 맑스주의의 철학적 실천에 감화 받은 이들이 원인에 대한 완전한 인식 속에서 결정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비슷해 보인다 하더라도 연극은 철학이 아니고, 연극의 재료는 철학의 재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연극은 예술이고, 철학은 이론입니다.

 

브레히트는 이 지점에서 한계에 도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연극이 정치와 과학을 보여주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연극은 연극으로 남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연극은 종별적인(spécifique)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브레히트는 어떤 점에서 연극이 종별적인 무엇이 되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무엇이 연극으로 하여금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연극이게 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레히트는 우리에게 몇 가지 실정적인 암시들을 줍니다. 예를 들어, 그는 연극은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방식으로 배우들의 행동을 통해 무언가를 보여주고 관객으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연극의 고유함은 바로 보여주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연극은 즐겁게 해주어야(divertir)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연극의 고유함은 관객을 즐겁게 해주면서 중요한 무언가를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여주면서 동시에 즐겁게 할 수 있을까요? 즐거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 점에 대해 브레히트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설명을 합니다. 그는 보여주는 것과 알게 하는 것(과학)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브레히트에게는 Aufklärer[각주:5]다운 측면이 있습니다. 가령 과학적 시대의 연극이라는 주제가 그렇습니다.) 그는 즐거움을 하나의 기쁨(joie), 즉 무언가를 이해하는 기쁨, 세계의 변혁에 참여할 수 있다고 느끼는 데서 오는 기쁨, 변혁의 기쁨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는 세계의 변혁과 관객의 변혁, 근대의 과학과 연극이 관객에게 보라고 준 객관적 인식을 직접적인 관계로 두고 단락하는(en court-circuit)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난점들에 부닥칩니다. 브레히트도 직접 그 근본적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연극의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과학도 아니고, 삶도 아니며 관객을 당황시키고 그의 기대를 저버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실망이 어떻게 동시에 기쁨이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연극이 반드시 마련해야 하는 즐거움과 이러한 기쁨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브레히트의 이론적 설명들은 불만족스럽습니다. 하지만 브레히트의 모든 것이 그의 이론적 설명에 있다고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실천은 이론적 설명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제 논의를 풀어나가기 위해 브레히트와 스트렐러의 실천에 보충이 될 만한 몇몇 이론적 설명들을 다시 가져와 보겠습니다.

 

우선 저는 브레히트가 직접 답변한 바 있는 간단한 질문 하나를 제기해 보겠습니다. 연극적 재현(représentation)의 재료는 무엇이며, 연극적 재현이 관객과 배우의 측면에서 동시에 발생할 수 있게 하는 재료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연극이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연극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관객과 무대 사이에 무언가가 일어나야 합니다. 연극적 의사소통이 일어날 수 있게 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며 바로 그것의 위에서 연극적 실천이 실행됩니다. 브레히트는 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의견과 행동이다. 우리의 맑스주의 이론적 용어로 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연극의 재료는 이데올로기적인 것(l'idéologique)이다.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관념들이나 관념들의 체계일 뿐인 것이 아니라 그람시가 훌륭하게 파악했듯 관념들이자 동시에 행동인 것들,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행동들 안에 있는 관념들입니다. 관객들이 극장에 올 때, 그들은 머리와 몸 안에 관념들과 행동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대 위에서는 그들에게 관념들과 행동들, 행동들 속의 관념들을 보여줍니다. 그들에게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관객은 그들이 머리와 몸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을 무대 위에서 보기 위해 극장에 옵니다. 바로 이것이 연극의 존재를 승인합니다. 틀리지 않은 오래된 정식을 다시 취해보자면, 연극 속에서 관객이 보러 오는 것은 바로 그 자신입니다. 연극은 관객들이 자신들의 머리와 몸 안에 있는 것을 보러 오는 거울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인지(reconnaissance)하기 위해 극장에 옵니다. 바로 이것이 정말 본질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인지의 기능을 하기 때문입니다.(인식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 증거를 우리는 어떤 등장인물이 만들어내는 연극적 재현(représentation) 앞에서 일어나는 대중의 자발적 반응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관객은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실하다." 마치 초상화 앞에서 일어나는 재-인지와 같은 표현입니다. "이건 정말 그를 닮았는데!" 관객은 언제나 연극의 끝에서 "바로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극장에 옵니다. 그는 자신이 재-인지될 때, 자신이 재-인지되고 있다고 확신할 때, 만족스러워합니다. 첫 번째 만족입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재-인지의 쾌락(plaisir)이 정말 흥미로운 것이 되려면, 어떤 도전을 해야 하고 어떤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해 잘 확인하기 위해 극장을 찾을 때, 자신에 대한 훌륭한 재-인지는 자신에 대해 완벽하게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약간은 의심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의심을 인정하지 않지만, 이러한 의심은 우리가 기대하는 쾌락의 일부를 구성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연극은 마침내 이 도전, 이 위험, 이 의심을 해소하기 위하여, 이 도전과 함께, 이 위험과 함께, 이 의심과 함께 작동(jouant)해야만 진정으로 쾌락을 만들어 냅니다. 공포, 의심, 도전들과 함께 작동하면서 연극은 우리가 조용히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큰소리로 대놓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이것이 관객에게 이중의 쾌락을 제공합니다. 우선 그는 웃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겁먹고 의심하는 사람은 언제나 타인들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그는 만족스러워 합니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끝에 가서는 언제나 모든 것이 어떻게든 제자리에 정돈되고 쾌락은 그가 모면한 위험들로 인해 증폭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우리는 자신을 재-인지하고 말합니다. 정말 진실하도다. 이 말은 우리 자신이 재-인지되고 정당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객은 극장에 올 때,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입니다. 그 규칙은 바로 관객에게 그의 관념들과 행동들이 그 어떤 위험도 직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연극은 그 관념들과 행동들을 "연기한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연극은 카타르시스입니다. 그리고 프로이트가 말했듯 예술은 허구적 승리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허구적 승리는 허구적 위험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연극 안에서 관객은 불과 함께 노는 것을 보는 즐거움을 스스로에게 제공합니다. 그 목적은 불은 없다는 것, 혹은 불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타인들에게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자신에게는 불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왜 연극이 관객을 즐겁게 하는지 알려면 매우 독특한 종류의 쾌락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 쾌락은 바로 위험하지 않은 불과 함께 노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의 이중적 계약조건과 함께 하는 쾌락입니다. 1. 불은 무대 위에 있고 연극의 작품은 언제나 불을 끄기 때문에 불은 위험하지 않다. 2. 불이 있을 때, 그 불은 언제나 이웃에게 있다.

 

여기서 이웃들, 즉 관객에 대해 한 마디 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관객은 이웃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연극과 영화의 차이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이야기되어 왔습니다. 영화와 다르게 연극의 공연은 객석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극장에서는 사회의 다양한 계급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계급들이 다 같이 있든 아니면 다수 혹은 소수의 대표자들로 있든 말입니다. 비싸거나 싼 다양한 등급의 좌석들, 막간극들, 대화들이 함께 있는 극장의 객석은 사회적 계급들과 그 차이들이 재생산되는 작은 사회입니다. 낮은 계급의 사람들은 높은 계급의 사람들을 보러 옵니다. 높은 계급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본다는 것을 압니다. 연극의 객석에서 사람들은 서로서로를 바라봅니다. 그들은 서로를 이중적으로 봅니다. 우선 객석에서 서로를 보고 그 다음 무대 위의 자신을 봅니다. 무대 위에서 불을 지니고 있는 이웃들은 우연하게도 객석에도 있습니다. 객석에서 높은 계급의 사람들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던 낮은 계급의 사람들은 불이 높은 계급의 사람들에게 있는 장면에서는 그들을 두고 비웃거나, 아니면 높은 계급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과 의식의 위기들을 극복하는 장면에서는 그들이 위대하다고 인정합니다.[각주:6]




  1. [편주] 브레히트의 <억척 어멈>은 1951년 장 빌라르(Jean Vilar)의 연출로 국립인민극장(TNP: Théatre National Populaire)에서 공연되었다. [본문으로]
  2. [편주] 「‘피콜로’,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유물론적 연극에 대한 노트)」를 참고하시오. [본문으로]
  3. [편주] 베르나르 도르(Bernard Dort)의 「<갈릴레오>와 삯마차의 마부」(“Galilée et le cocher de fiacre”,Théatre public. Essais de critique, Paris, Seuil, 1967, pp. 188-196)를 가리키는 듯하다. [본문으로]
  4. [편주] 「생소화효과 또는 V.효과(Verfremdungseffekt)」: 브레히트, 『연극에 대한 글들』, 148쪽 [본문으로]
  5. [역주] (독) 계몽주의자 [본문으로]
  6. [편주] 텍스트는 명백히 미완성인 채로 여기서 멈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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