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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의 사회재생산과 이데올로기: 리즈 보겔과 주디스 버틀러의 알튀세르 읽기(2015)_세 번째

<젠더 스터디 박사 및 교수 강연 시리즈>, 2015년 12월 1

 

앤드루 라이더

번역: 단감 /페미니즘 번역모임

 

버틀러: 이데올로기와 젠더화된 주체

억압된 집단이 사회적 정체성을 부여받는 방식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버틀러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이론에 주목했다. 알튀세르에 관한 버틀러의 1997년 저작들(에세이 「단지 문화적인과 저서 『권력의 정신적 삶』, 『혐오발언』)에서 그는 알튀세르의 광기와 범죄에 대한 자전적 사항을 분석한 것(1997b, 113) 외에 그의 연구 중 다른 요소는 그저 간단히 언급만 한 뒤, 호명 이론만을 집중적으로 참고한다. 「단지 문화적인에서 버틀러는 성소수자들의 투쟁이 자본주의 자체를 붕괴시킨다는 자신의 주장을 알튀세르의 논지로 뒷받침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너무 즉각적이고 성급하다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실제로 버틀러와의 논쟁에서 낸시 프레이저는 그의 접근이 조야한 기능주의라고 지적했다.

나는 이성애 부르주아 가정은 자본주의에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변형하면 자본 축적에 방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요지의 이러한 기능주의적 접근은 사실 알튀세르를 오독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보겔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사회적 하위 체계에 대한 알튀세르의 초기 연구를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자본이 재생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사회 구성체를 전유하는 방식에 대해 보다 섬세한 분석을 발전시켰다. 알튀세르는 맑시즘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회적 총체성을 간파할 수 있다고 썼다.

 

(사회적 총체성은) 복잡하지만 특정한 형태로 구성된다. 이는 독특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상태로 공존하는 단계 혹은 심급이라고 불리는 것을 담고 있는 구조화된 총체의 통합체이다. 사회적 총체성은 특정한 편향에 따라 서로 절합되며, 경제적 단계 혹은 심급에 의해 최종 심급에서 결정된다. (알튀세르, 발리바르, 『자본론을 읽는다』 1970, 97)

 

프레이저는 맑스주의 이론이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사회적 변화 속에서도 자본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균열을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주변화된 섹슈얼리티에 대한 변혁적 인식을 구축하기 위한 투쟁은 분명히 가치가 있지만, 그렇다고 게이 및 레즈비언 문화 혹은 다른 퀴어 영역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자본의 특권과 본질적으로 갈등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자본이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다른 방식을 찾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 보겔의 견해와 대체로 비슷하다. 가령 이민자가 유입되면 출산 활동의 필요가 감소하며, 돌봄 노동 역시 공공 기관의 사회적 지원이나 임금 노동에 위탁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프레이저 역시 사회적 총체성 안에 다양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반드시 단 하나의 통일된 원칙으로 지배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 알튀세르의 의견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프레이저도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의 역할을 명시적으로 언급한다.[각주:1]

「단지 문화적인에서 드러난 버틀러의 성급한 주장은 성소수자들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동화되고 그것을 갱생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무시하는 논의로 이어진다. 실제로 캐빈 플로이드는 이 에세이가 맑시즘과 퀴어 이론 사이에 분열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2009, 2). 특히 정서적 삶과 생산 관계를 즉각적으로 연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버틀러는 사실상 알튀세르보다는 이탈리아 자율주의자인 레오폴디나 포르뚜나띠에 훨씬 근접하지만[각주:2], 포르뚜나띠도 자본이 성적 행위의 변화를 가볍게 수용하면서 이를 재배치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게다가 버틀러는 알튀세르의 이론에서 계급투쟁의 개념을 감춰버렸다. 『재생산에 대하여』 부록에서 알튀세르는 자신의 접근은 기능주의와 다르며 국가 장치가 모든 사회적 경험을 단순히 결정한다는 주장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여전히 그의 이론은 계급투쟁을 가장 우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218). 끊임없이 이어지는 저항과 투쟁으로 인해 누군가가 계속 평정을 유지해줘야 하는 상태가 아니라면,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도 전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220). 버틀러가 국가에 의한 개인화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였음에도, 그의 관점에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안에서 벌어지는 투쟁의 조건에 대한 진정한 설명은 찾아보기 힘들다. 1990년대의 연구에서 그는 노동계급의 단결 개념을 성소수자와의 연대라는 정치적인 목표로 대체하면서, 이 연대는 반드시 확산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이 시기에 그는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를 옹호하며 이 입장을 분명히 밝힌다)(269).[각주:3] 이는 지난 15년간의 버틀러의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이 시기에 그는 리사 더건의 동성애규범성(homonormativity)’ 혹은 자스비르 푸아르의 동성애 애국주의(homonationalism)’ 개념과 비슷하게 그가 게이 자유지상주의(gay libertarianism)’라고 지칭한 경향의 확산을 지적하고 비판한다.[각주:4] 최근 연구에서 그는 이러한 게이 자유지상주의에 반대하여 퀴어 무정부주의를 개념화할 의무를 지게 된다.

나는 버틀러가 알튀세르를 기능주의적으로 오독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논의 중 보겔과 프레이저가 간과한 부분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보겔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 대한 알튀세르의 논의를 무시했다. 아마도 가족을 불확정적인 것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자신의 지향과 달리 알튀세르는 가족 구조를 구체화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견해를 통해 알튀세르는 심리적 자기 인식의 양상을 포함하여 개인이 자본주의 국가의 지배를 받게 되는 방식에 대한 설득력 있는 묘사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각주:5] 이러한 측면을 놓치면서 보겔의 접근은 매우 형식적이거나 뼈대만 앙상한 형태가 되었으며, 그 결과 독자들도 서로 다른 사회 재생산 체제가 각각 어떻게 특정한 개인화 양식을 만들어 내고 그것에 의존하는지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데올로기적 실천에 대한 알튀세르의 이론을 통하면 여기에 필요한 관점을 얻을 수 있다.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알튀세르의 성과를 발전시켰다는 점이 버틀러의 탁월함 중 하나이다. 이를 통해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구성되는 동시에 총체적인 방식으로 실천되는 양상을 엄격히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과 사회 재생산의 질문에 대한 보겔의 다양한 해결책 간의 협력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분석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 가족을 노동자를 개인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로 보는 알튀세르-버틀러 이론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가정의 재생산 능력의 다변화에 대한 보겔의 인식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1. Nancy Fraser, Fortunes of Feminism: From State-Managed Capitalism to Neoliberal 11 Crisis, London: Verso, 2013, 179. 심지어 프레이저는 알튀세르의 이론과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악셀 호네트와 훨씬 더 가깝다고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본문으로]
  2. 달라 코스타와 마찬가지로 포르뚜나띠는 상품 생산에 완전히 포섭된 상태의 가사 노동을 살피기 위해 마리오 트론티의 ‘사회적 공장’이라는 아이디어에 호소했다. 포르뚜나띠, The Arcane of Reproduction: Housework, Prostitution, Labor and Capital. Trans. Hilary Creek. Brooklyn: Autonomedia, 1995를 보라. [본문으로]
  3. 알튀세르를 참조하여, 라클라우와 무페는 생산 양식의 결정적 역할을 부정하고 대신 서로 다른 투쟁의 다원성을 가정하는 포스트 맑스주의의 독특한 변주를 이뤄냈다. 라클라우와 무페 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 Towards a Radical Democratic Politics. London: Verso, 2001을 보라. 버틀러는 버틀러, 라클라우, 지젝, 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 Contemporary Dialogues on the Left. London: Verso, 2011에서 라클라우와 논쟁한 바 있다. [본문으로]
  4. 버틀러, 해커트, “On Anarchism: An Interview with Judith Butler.” In Anarchism and Sexuality: Ethics, Relationships and Power. Ed. J. Heckert and R. Cleminson. London: Routledge, 2011, 푸아르, Terrorist Assemblages: Homonationalism in Queer Times.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7, 더건, The Twilight of Equality?: Neoliberalism, Cultural Politics, and the Attack on Democracy. Boston: Beacon Press, 2003을 보라. [본문으로]
  5. 버틀러는 이것을 The Psychic Life of Power: Theories in Subjection, 1997B, 106~131에서 거의 완전히 발전시켰다. 알튀세르의 제자 중 하나인 피에르 마셰리는 확장적 연구를 집필하여 이 접근에 응답했다(피에르 마셰리, “Judith Butler and the Althusserian Theory of Subjection.” Trans. Stephanie Bundy. Décalages 1:2, 201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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