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쯤 지워진 비문
- 예브게니 크로피브니츠키와 리아노조보 그룹 -
이 종 현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작년 말 우연히 삽기르 학술대회에 들렀다가 삽기르의 시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에 나온 친구 홀린의 시도 읽어 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둘의 스승이었던 예브게니 레오니도비치 크로피브니츠키(Евгений Леонидович Кропивницкий, 1893-1979)의 시를 읽기에 이르렀습니다. 보통 러시아 현대시를 읽을 때는 1990년대 한국에 번역되었던 예브게니 옙투셴코,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벨라 아흐마둘리나 등을 큰 줄기로 삼습니다. 실제로 러시아인들도 이 시인들을 잘 알고 이들의 시를 참 좋아합니다. 삽기르, 홀린, 크로피브니츠키는 요즘 러시아 사람들한테도 생소한 시인들입니다. 시를 좋아하는 수학 선생님인 러시아 친구에게 홀린의 시집을 보여주었더니 술이 오른 친구는 이게 무슨 시냐며 땅에 침을 뱉으려 했습니다. 웹진 인-무브의 워크숍을 시작하면서 아무런 순서 없이 시들을 읽게 되다보니 정신이 사나워지는 듯해 삽기르, 홀린, 크로피브니츠키 등이 활동했던 모임인 리아노조보 그룹에 대해서 조사해 보았습니다.
리아노조보 그룹. 오른쪽에서 네 번째 하이데거를 닮은 사람이 예브게니 크로피브니츠키.
우리를 묶어 주는 것은 부자유다
이 그룹은 선언문이나 뚜렷한 예술적 지향점도 없이 이렇게 저렇게 생겨났습니다. 삽기르는 1944년 ‘예술교육의 집’에서 미술서클을 이끌던 예브게니 크로피브니츠키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쩌다보니 삽기르는 모스크바 교외 사뵬롭스카야 철도의 돌고프루드나야 역 근처 리아노조보 마을에 있는 크로피브니츠키의 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의 친구 홀린도 크로피브니츠키의 집에 들락날락 하였고 1956년에는 예브게니 크로피브니츠키의 아들 레프가 수용소에서 돌아왔습니다. 훗날 개념주의 예술가가 되는 프세볼로트 네크라소프도 예브게니 크로피브니츠키의 사위인 화가 오스카르 라빈을 통해 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1961년에는 이미 나름대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던 얀 사투놉스키가, 1967년에는 하리코프에서 온 에두아르트 리모노프가 모임에 들어왔습니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일요일마다 그림 전시회가 열렸고, 각자 창작한 시를 읽기도 하고 서로의 작품에 대해 비평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리아노조보 그룹’이라는 이름은 참가자들이 직접 지은 것이 아닙니다. 1963년 당시 당 서기장이던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모스크바 마네쉬에서 열린 전시회에 방문했는데, 여기에 작품을 출품했던 크로피브니츠키는 ‘형식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고 화가협회에서 제명당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크로피브니츠키와 어울리던 젊은 예술가들은 당국의 의심을 사게 되었고 KGB가 이들을 통틀어 ‘리아노조보 그룹’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공식적으로 작품을 출판하려면 작가협회나 화가협회에 소속되어야 했지만 이들은 그 어떤 협회에 가입할 수 없었고 따라서 비공식적인 장에서 작품을 ‘삼이즈다트(самиздат)’라는 자가 출판의 형식으로 발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가이기도 했던 크로피브니츠키가 어떻게 책을 직접 만들었는지 삽기르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30년대 중반부터, 내가 기억하기에, 예브게니 크로피브니츠키는 진짜 삼이즈다트를 했다. 그는 자연과 사물을 보고 쓴 따끈따끈한 시들을 화가처럼 공책들에 적으며 고쳤고, 이 공책들을 제본으로 묶어서 색칠을 하거나 색색의 천을 대어 표지를 만들었다. [...] 그 작은 책들을 우리,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중 몇 권을 보관하고 있다. [...] 예브게니 레오니도비치는 그녀[밀리트리사: 역시 리아노조보 모임에 드나들던 예술가다 – 이종현]의 시를 정서해서 파란 바탕에 은빛 줄무늬가 있는 천으로 장정해 주었다. 내가 쓴 시들은 묶어서 새빨간 불꽃색으로 색칠해 주었다. [...] 타자기로 정서한 자기 책들을 그가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나는 기억한다. 총 네 부였지만, 이것도 이미 나름 발행부수라 할 수 있었고 대단한 성과였다. 시인은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에야 비로소 첫 자작 시집을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미소 짓기 슬프다』로 파리의 출판사 <제 3의 물결>에서 나온 것이었다.
당시 리아노조보 마을에는 아파트처럼 공간을 분리한 바라크들이 많았습니다. 바라크는 군인들이나 노동자들이 사는 임시 막사로 아무렇게나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전 바라크가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제가 사는 동네에도 여기저기 건축현장 옆에 컨테이너 숙소들이 많이 보입니다. 크로피브니츠키와 그의 부인, 그들의 딸 발렌티나, 그녀의 남편 오스카르 라빈 역시 그런 바라크에 살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들은 바라크와 관련된 시들을 많이 썼고, 홀린은 「바라크 서정시」 연작으로 언더그라운드에서 명성을 얻기도 했습니다. 잡지 『오고뇩』 1956년 3월 4일자에는 바라크 시인들을 풍자하는 세르게이 시베초프(С.А. Швецов, 1903-1969)의 시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급진주의자
그는 칭찬을 미처 기다리지 못했다 / 선구자로 유명해지지도 못했다. / 천편일률적인 도안들을 따라 / 자기 건물을 세우기라도 하지. // 과도함과 혹독히 싸우며 / 그는 너무 멀리 가시어 버렸다. / 로코코 스타일과 바로코 스타일을 / 바라코코 스타일로 바꾸시었다.
가운데가 『오고뇩』지에 실린 시베초프의 풍자시와 보리스 예피모프의 삽화.
리아노조보 그룹에 대해 소개하는 글을 쓴 베레니카 베스니나는 바라크를 소재로 삼는다는 점 외에도 구체적이고 간결한 시어, 아이러니, 그로테스크 등을 이 시인들의 특징으로 삼습니다만, 저는 딱히 이들의 시를 몇 가지로 추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그룹에서 바라크라는 장소가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실이 있긴 합니다. 1965년 오스카르 라빈과 발렌티나 크로피브니츠카야가 모스크바 시내의 아파트로 이사 가는 바람에 ‘리아노조보 그룹’은 사실상 해체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들의 우정 어린 교류는 계속되었다고 하니 바라크가 없다고 해서 예술을 못 하는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참가자 중 한 사람인 프세볼로트 네크라소프는 리아노조보 그룹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를 묶어 주는 것은 오직 부자유다. 다른 경우였다면 우리는 서로 적이 되었을 정도로 우리는 예술에 대한 너무도 다른 이해, 다른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다.”
반쯤 지워진 비문
크로피브니츠키의 시집들은 제대로 출간된 적이 손에 꼽힐 정도인데 그것도 구하기 어렵습니다. 2004년 거의 결정판에 가깝게 736편의 시를 모은 선집이 출간되었는데, 절판 된 지 오래입니다. 헌책 구하는 사이트에서 한 권을 구할 수 있긴 하지만 10,000루블, 우리 돈으로 20만 원정도 주어야 살 수 있습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검색해 보았더니 책이 있긴 하지만 독자는 접근할 수 없는 서가에 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여기저기에 돌아다니는 크로피브니츠키의 시들을 모아서 읽어보았습니다. 그 중에서 시 「반쯤 지워진 비문」이 가장 눈에 띄었습니다.
ПОЛУСТЕРТАЯ ЭПИТАФИЯ Здесь похоронен... (временно — Кладбище ликвидируют.) Во цвете лет... Безвременно... (Тут, видимо, датируют.) (И дальше крупно) — ОВ (Должно быть, Иванов.)
1947 |
반쯤 지워진 비문 여기 묻히었다... (당분간 - 공동묘지를 철거함.) 한창의 나이에... 때 이른... (여기, 아마도, 날짜가 있던 듯.) (이하 큰 글씨로) - 오프 (이바노프였던 모양이야.)
1947 |
‘비문(epitaph)’은 서양 시에서 하나의 장르입니다. 실제로 묘비에 새기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문학작품으로 창작되어 시집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제목도 대부분 ‘비문’이라고 붙입니다. 묘비의 주인은 시인 자신이기도 하고 2인칭의 누군가이기도 한데 죽음을 슬퍼하고 훌륭했거나 아름다웠던 생애를 돌아보기 위한 것이지요. 그런데 크로피브니츠키는 특정인의 비문을 작성한 것이 아니라 그가 전혀 몰랐던 사람의 비문에 반쯤 남은 내용을 가져옵니다. ‘이바노프’는 한국의 ‘홍길동’처럼 아무개의 대명사입니다. 보통 사람의 비문이 지나가던 이를 붙잡아 세워 읽어보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로마의 비문에 자주 나오는 다음 문구가 떠오릅니다. “낯선 이여, 잠시 멈춰 여기 적힌 것을 읽어보세요.“(hospes resiste et pa[rite]r scriptum perlig[e])
비문의 화자가 불러 세우는 바람에 글귀를 읽어보게 된 시적 화자는 괄호 속에 주변상황과 자신의 반응을 채워 넣습니다. 그래서 이 시에는 형식상 화자가 둘입니다. 물론 시를 쓴 것은 크로피브니츠키이지만 비문에서 죽은 이를 애도하는 화자가 있고, 비문의 한 글자 한 글자에 반응하는 시적 화자가 있습니다. 그는 비문의 남은 글자들에 각운을 맞추어 줍니다.(‘때 이른(베즈브레멘노)’ - ‘당분간(브레멘노)’, ‘오프 – 이바노프’) ‘때 이른’ 죽음에 왜 ‘당분간’이라는 말이 짝을 이루는 것일까요? ‘때 이른’은 ‘~이 없는’을 뜻하는 ‘베스’와 ‘당분간’을 뜻하는 ‘브레멘노’가 결합된 말입니다. ‘브레멘노’는 ‘시간’을 뜻하는 ‘브레먀’에서 온 말이니 사실 이 각운은 시간의 ‘존재’와 ‘비존재’를 대립시킵니다.
지상의 안락
시간의 존재, 즉 지속되는 삶과 시간의 비존재, 즉 죽음 사이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무엇이 있을까요? 크로피브니츠키는 다음의 시들에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는 듯합니다.
ЗЕМНОЙ УЮТ Уюта нет, Покоя нет. - А.Блок Граждане, располагайтесь Поуютнее вот тут! Ведь недаром люди прут, Чтоб создать себе уют. Граждане, располагайтесь, Всем уютным запасайтесь, Заводите то да сё; Всем полезным занимайтесь — Всем, наверно, нужно всё. Нужен дом. Эй, стройте дом! Комфортабельный притом. Нужны платья и костюмы, Нужен даже патефон, Нестерпимо нужен он. В головах роятся думы: Телевизор бы купить, Без него нет силы жить. Нужны вещи для уюта, Для уюта и красы: На руку надеть часы, Золотые вставить зубы, Краскою покрасить губы, На ноги надеть капрон И купить себе бостон. Граждане, располагайтесь По хозяйски там и тут! Эх, хорош земной уют! Хороши земные вещи: Керосинки, лампы, клещи. Надо всё. Надо всё. Всё всем надо. Всё всем надо. Надо то и надо сё, До безумия, до мата! Граждане, располагайтесь: Умершему нужен гроб: Жил да был, а смерть вдруг — хлоп! Вот погост, располагайтесь. Может быть, и вправду тут Обретете вы уют?.. Но, увы! — кладбищ нехватка — Ликвидирован погост: На кладбище, ан, помост — Танцевальная площадка, И идет на ней присядка... Ну, а это что за хвост? — Это хлебная палатка! 11 августа 1955 | 지상의 안락 안락은 없다. 평안은 없다. - A. 블록 시민들이여, 여기 안락하게들 자리 잡으시오! 안락을 도모하려고 괜히들 부산떠는 게 아니라오. 시민들, 자리 잡으시오, 모든 안락한 것을 구비하시오, 여기 저기 꾸며 보시오: 모든 이로운 일에 종사하시오 - 모두에게는 모든 것이 필요하니. 집이 필요합니다. 자, 집을 지으시오! 그것도 아주 편안한 집을. 드레스와 정장도 필요하고, 축음기도 필요하다오, 정말이지 끔찍이도 필요하다오. 머릿속에는 생각이 꿈틀댄다오: 텔레비전을 사야겠군, 그것 없인 힘이 안 나. 안락을 위해서는 물건들이 필요하다오, 안락과 아름다움을 위하여: 손목에는 시계를 차고, 금니를 박아 넣고, 물감으로 입술도 물들이고, 발에는 카프론 양말을 신고 보스턴도 사야지요. 시민들, 자리 잡으시오 여기저기 안락한 가정! 좋구나, 지상의 안락! 좋구나, 지상의 물건들: 케로신, 램프, 뻰찌. 모두 필요하지. 모두 필요해. 모두에게 모든 것이 필요하지. 모두에게 모든 것이 필요해. 이것도 필요, 저것도 필요, 미치고 팔짝 뛰다 쌍욕이 나오겠군! 시민들, 자리 잡으시오: 망자에겐 관이 필요하다오: 옛날 옛적 살았는데, 어이쿠 갑자기 죽음이! 여기 묘지가 있으니, 자리 잡으시오. 아마도, 정말로 여기서도 안락하시겠지요?... 이를 어쩌나! - 묏자리가 부족하다오 - 묘지를 철거 했다오: 묘지엔 널빤지 그러니까 - 무도장이 있어서 무릎을 굽혔다 폴짝 뛰어오른다오... 엥, 그런데 이게 무슨 꼬리람? - 아하, 빵가게구나!
1955년 8월 11일 |
시적 화자는 이렇게 온갖 수선을 떨면서 이것저것 긁어모읍니다. 러시아 민속무용하면 쉽게 떠오르는, 다리를 굽혔다 뛰어오르는 춤을 추어 죽음을 희화화하기도 합니다. 에피그라프로 쓰인 러시아 상징주의 시인 알렉산드르 블록의 시구에서는 안락도, 평안도 없다고 하지만 시에서는 온갖 안락을 병적으로 추구합니다. 안락한(?!) 모스크바의 아파트에 사는 시민들에게 더 ‘안락’, ‘안락’하라고 종용합니다. 그래서 이 시가 ‘잘 살아보세’를 노래하는 소시민들에 대해 다소 풍자적인 느낌을 준다면 다음 시는 바라크에 사는 사람들의 ‘안빈낙도’를 보여줍니다.
*** Там ужасы вращений В звездах свод неба весь Здесь водка, угощенье – И нам уютней здесь. |
*** 거기는 빙빙 돌고 무서워 천상의 궁륭에는 별들이 여기는 보드카, 맛있는 안주 - 우리는 여기가 더 좋아. |
보드카는 리아노조보 그룹의 시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사물인 것 같습니다. 텔레비전을 갖추고 사는 안락한 시민의 삶에 샴페인이나 와인이 어울린다면 바라크에는 보드카가 어울리기 때문일까요? 제가 일부러 그런 시를 고르려고 해서 고른 것이 아니라 정말 보드카가 여기저기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술을 마시다 어떤 일이 벌어날지 알면서도 계속 술을 마시는 것을 노래하는 시도 있습니다.
ЗАРОК «Вино мстит пьянице» - Леонардо да Винчи. Дал зарок. Потеха это. Дал зарок. Пошел в пивную. Дал зарок. Пропал отпетый. Не вступить на жизнь благую. Согласуясь с неким роком, Мы приводим пьяниц к смерти: Мы смеемся над зароком. Алкогольные мы черти.
1952 |
맹세 “술은 술꾼에게 복수한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 맹세했다. 위안이 된다. 맹세했다. 맥줏집에 갔다. 맹세했다. 망할 놈이 사라졌다. 복된 삶에 발 들이지 말 것. 모종의 운명에 동의하며, 우리는 술꾼을 죽음으로 이끈다: 우리는 맹세를 비웃는다. 우리 알코올 악마들.
1952 |
보드카와 안주만이 ‘복된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잔병치레라는 성가신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어로 쓰인 구체적 병명들을 보면 이것들이 정말 ‘잔병’인가 싶습니다.
ХВОРЬ Гриппы и ангины, И туберкулез; Ноют ноги, спины; Боль костей, желез! Сифилис постылый!! Неужели рак?! Господи помилуй, Менингит никак!!
29 декабря 1951 |
잔병 독감 그리고 편도선염, 그리고 결핵: 다리고 등이고 쑤신다: 오장육부가 아프다! 역겨운 매독!! 혹시 암인가?! 아이고 주여, 뇌수막염은 안 됩니다!!
1951년 12월 29일 |
시 「지상의 안락」에서처럼 야단법석을 떨어야 안락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안락이고 평안일까요? 아니면 바라크에서 살며 소박하게 보드카와 맛있는 안주를 먹지만 온갖 병에 걸리는 것이 안락이고 평안일까요? 어쩌면 블록의 시구처럼 ‘안락은 없다, 평안은 없다’가 정답일지도 모릅니다.
사부작사부작 일을 해라
시 「반쯤 지워진 비문」의 주요 각운이 가리켰던 시간의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보다 진지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시도 있습니다. 다음 시에서는 이 둘의 간격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 Летим в пространство на Земле, Как сукиновы дети. Гигантский шар летит во тьме Кромешной в бездны эти. Куда летим, зачем летим, Не ведаем, не знаем, Летим - и все! Пусть не хотим, А все летим. Но чаем, Что долетим мы наконец К какому-то пределу И будет все-таки конец Тому, что так летело. — И уничтожится во прах Неведомая греза — Ведь эта жуть, весь этот страх, Всей нашей плоти слезы. |
*** 우리는 지상의 어떤 공간으로 날아간다, 암캐의 자식들처럼. 거대한 구(球)는 절망적인 어둠에 갇혀 이 심연으로 날아간다. 어디로 날아가는지, 왜 날아가는지, 우리는 모른다, 알지 못한다, 날아간다 – 그게 다다! 원치 않아도, 날아간다. 그런데 아마도 우리는 마침내 어떤 경계까지 날아갈 것인데 그렇게 날아갔던 것에는 어쨌든 끝이 있을 것이다. 알 수 없는 백일몽은 - 먼지가 되어 절멸할 것이다. 소름 돋는다, 정말 무서운 일이다, 우리 모든 육(肉)의 눈물. |
지금까지 읽은 시들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죽음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영혼’, ‘정신’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물질적인 것들이 삶을 채우고 있습니다. 또, 이 물질적인 것들의 본질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전혀 없습니다. 단지 삶의 시간이 존재한 순간부터 그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순간까지의 공간을 물질과 육체가 채우고 있습니다. 인간은 왜 그 사이를 날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날아갑니다. 그는 일단 세상에 내던져져 있으며 몸을 갖고 있기에 그 몸을 유지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합니다. 텔레비전이든 보드카든. 삶이라는 공간을 날아가는 동안 떠오르는 생각들, 꿈들은 ‘백일몽’이므로 육체가 먼지로 사라지면 함께 없어집니다.
앞의 시들에서는 물질과 몸들을 나열하며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소시민들의 태도를 비꼬기도 하고 일부러 ‘못’ 사는 것을 예찬했던 시인은 이 시에서 ‘육체의 눈물’이라는 표현으로 ‘허무한듸’의 감정을 한 번 내비칩니다. ‘육체’와 ‘눈물’은 통상적이지 않은 조합으로 보입니다. 피, 땀, 눈물, 오줌처럼 생명기관으인 육체에서 나오는 액체로 쓰이지 않는 이상 눈물은 내적 감정의 폭발로 여겨집니다. 영화 제목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처럼 눈물은 상처받기 쉬운 인간 내면의 비유로 흔히 쓰입니다. 그런데 ‘정신’ 또는 ‘영혼’에 반대되는 ‘육(肉)’을 뜻하는 단어 ‘플로치’와 함께 쓰인 ‘눈물’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인생의 허무함과 어쩔 수 없이 받은 몸의 존재를 결합하는 시는 또 있습니다. 특별한 제목이 없는 ‘육행육연시’입니다. (번호가 달린 단어가 각 연에서 어떻게 배치되는지 규칙을 찾아보세요.)
СЕКСТИНЫ Молчи, чтоб не нажить беды, Таись и бережно скрывайся; Не рыпайся туды-сюды, Не ерепенься и не лайся, Верши по малости труды И помаленьку майся, майся. Уж раз родился, стало — майся: Какой еще искать беды? — Известно, жизнь: труды, труды, Трудись и бережно скрывайся. Не поддавайся, но не лайся, Гляди туды, смотри сюды. Хотя глядишь туды-сюды, Да проку что? — сказали: майся, Все ерунда, — так вот, не лайся. Прожить бы только без беды, А чуть беда - скорей скрывайся. Но памятуй: нужны труды. Труды и есть они труды: Пошел туды, пришел сюды. Вот, от работы не скрывайся. Кормиться хочешь, стало — майся, Поменьше было бы беды, Потише было бы — не лайся. Есть — лают зло, а ты не лайся И знай себе свои труды: Труды - труды, труды - сюды; Прожить возможно ль без беды? А посему трудись и майся... И помаленечку скрывайся. Все сгинет — ну и ты скрывайся И на судьбу свою не лайся: Ты маялся? Так вот, отмайся, Заканчивай свои труды, В могилу меть — туды, туды, Туды, где больше нет беды.
1948 | 육행육연시 (1)불행을 안 당하려면 침묵하라, 몸을 감추고 꼭꼭 (2)숨어라; (3)여기 저기 끼어들지 말고, 고집부리지 말고 (4)욕하지 말라, 조금씩 할 (5)일을 마쳐라 사부작사부작 (6)일을 해라, 일을 해라. 일단 태어나긴 했으니 – 일을 해라: 더 무슨 불행을 찾는가? 다들 알고 있다, 인생은 일, 일이다, 일을 하고 꼭꼭 숨어라 다 내주지 말고 욕하지 말라, 여기 보고 저기 보라. 여기 저기 들여다보아도, 이득 날 것이 있는가? - 말했잖나: 일을 해라, 다 헛것이다, 원래 그런 거니, 욕하지 말라. 불행 당하지 않고 한평생 살면 그만, 불행이 조금 나타나려 하면 – 얼른 숨어라, 하지만 기억하라, 일은 해야 한다,
일이다, 그래 일이다: 여기 들락 저기 들락. 그래, 일에서 숨지 말라. 먹고 살려면, 그래, 일을 해라, 불행을 조금 덜 당하려면, 조금 더 조용히 해라 – 욕하지 말라. 그래, 사람들이 욕을 해도 너는 욕하지 말라 네가 할 일을 알라: 일은 – 여기도 있고, 일은 – 저기도 있다 불행 당하지 않고 사는 게 가능한가? 그러니 일 하고 또 일 해라... 그리고 살짝 숨어라. 다 사라진다 – 그러니 너도 숨어라 자기 운명을 욕하지 말라 너는 일을 했느냐? 그럼, 일을 하지 말라, 자기 일을 끝내고, 거기, 거기, 그래 무덤을 겨냥해라, 거기 불행이 없는 곳.
1948 |
‘육행육연시(sestina)’는 쓰기 매우 까다롭고 어려운 형식이라고 합니다. 6행 6연과 3행 마지막 연으로 구성되는데 각 연의 매 행 마지막이 6개의 주제어로 끝납니다. 번역에서는 이를 살릴 수 없었지만 원문을 보면 1연의 경우 매 행이 ‘(1) 불행(베듸) - (2) 숨어라(스크릐바이샤) - (3) 여기(슈듸) - (4) 욕하지 말라(네 라이샤) - (5) 일(트루듸) - (6) 일해라(마이샤)’로 끝납니다. 2연에서는 매 행이 ‘(1) 일해라 - (2) 불행 - (3) 일 - (4) 숨어라 - (5) 욕하지 말라 - (6) 여기’로 끝납니다. 이런 식으로 바로 앞 연 매 행의 끝 단어들을 다음 연 매 행 끝에서는 ‘6-1-5-2-4-3’의 순서로 배치해야 합니다. 그래서 3연의 매 행은 ‘(1) 여기 - (2) 일해라 - (3) 욕하지 말라 - (4) 불행 - (5) 숨어라 - (6) 일’로 끝나야 합니다. 이렇게 앞 연의 주제어들을 순서만 바꾸어서 계속 반복하다보면 주문과 같은 효과가 일어납니다. 새로운 연에서 새로운 내용을 시작할 것 같지만 결국에는 이 여섯 개의 단어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이 여섯 개의 단어를 이용해 문장을 만들어 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여기는 불행하니 욕하지 말고 숨어서 일, 일을 해라.’ 소련 공식문학의 기조였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따른다면, ‘여기’, 지상에서 공개적인 ‘노동’을 통해 인간의 유한적 조건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공식적으로 직업이 없는 사람에게는 '무위도식자 증명서'가 발급되었습니다. 이 증명서를 발급 받으면 일정 기간 안에 반드시 구직을 해야 합니다.) 크로피브니츠키의 시는 이것을 뒤틉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노동이 아니라 혼자 숨어서 무엇이 됐든 사부작사부작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몸을 지니고 살아야 하는 삶에서 그나마 불행을 최대한 피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됩니다. 어차피 죽는다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굶게 되고 극심한 배고픔이라는 큰 불행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주제를 압축하는 반쪽짜리 연이 없습니다. 대신 6연에서 형식을 살짝 비틉니다. 앞 연의 주제어를 6-1-5-2-4-3으로 받지 않고 6-1-5-2-3-4로 받습니다. 그래서 규칙상 ‘불행’이 올 자리에 ‘여기’에 대립되는 ‘저기’가 오고, ‘여기’가 올 자리에 ‘불행’이 옵니다. 이로써 ‘저기’, 즉 죽음에는 ‘불행’이 없을 거라고, ‘여기’에는 ‘불행’만 있을 뿐이라는 주제를 만들어 냅니다. 또, 죽음이 지배적인 6연에서 ‘일해라(마이샤)’가 올 자리에는 ‘일을 하지 말라(오트마이샤)’가 옵니다. 죽으면 일을 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몸이 있어야 일을 하는데 몸이 없으니 일을 할 수가 없겠지요.
지상 모든 육(育)의 기관
СЕЛЕДКА Засолили жирную селедку — Это разумеет всяк, кто пьян. Хорошо, что выдумали водку... Господи, нелеп сей балаган! Если бред все, если жизнь вся тайна, Если смерть подстерегает нас; Если мы до глупости случайны — Кроме водки, что еще у нас? А любовь! О, как она всевластна! — Этот трепет похоти слепой, Эта жуть, что так волшебно — ясна Для рабов мятущихся толпой. А поэту? — Некуда деваться: Он орган всей плоти мировой. Так ему ль в пивной не напиваться, И ужель он пьяницам не свой? В те поры, когда изнемогаешь От любви - постылой маяты — Господи, ты пьянку оправдаешь, Господи, и страсть оценешь ты. Колбаса да жирная селедка Государству каждому барыш. Вот лафа, что выдумали водку! Пьяницы, кажите трезвым шиш!
1950 |
정어리 통통한 정어리를 소금에 절였네 - 술에 취한다면 누구나 절일 줄 알지. 보드카를 만들어 낸 건 참 훌륭해... 주여, 이 바라크는 못 쓰겠습니다! 모든 게 헛소리라면, 삶은 전부 비밀이라면, 죽음이 매복하고 우리를 기다린다면, 우리가 멍청하게도 우연이라면 - 보드카 말고 뭐가 있겠어? 아 사랑! 오, 사랑은 얼마나 전능하신지! - 이 눈먼 욕정의 떨림, 이 소름끼치는 일은 떼로 달려드는 노예들에게 마술처럼 선명한 것. 시인은? - 그는 숨을 곳이 없다. 그는 지상 모든 육(肉)의 기관이니까. 그라고 술집에서 진탕 못 마시겠나, 그야말로 술꾼들의 친구 아니겠나? 사랑 – 그 역겨운 헛짓 – 때문에 시들어가고 있을 때면 주여, 당신은 이 술판이 옳다 해주시겠죠, 주여, 당신은 이 열정을 높이 사주시겠죠. 소시지 그리고 통통한 정어리는 모든 국가에게 남는 장사라네. 보드카를 만들어 낸 건 알아 줘야 해! 술꾼들아, 멀쩡한 사람들에게 엿을 먹이라!
1950 |
또 다시 보드카입니다. 사부작사부작 일을 했으니 마셔야지요. 원래 보드카는 러시아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14세기에 서구에서 러시아에 약용을 목적으로 증류한 알코올을 들여왔는데 당시에는 ‘aqua vitae’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그전까지 러시아 사람들은 꿀을 발효시켜 만든 꿀술과 맥주만 마셨습니다. 제네바 상인들을 통해 흑해로 이 알코올이 들어오자 급속도로 사람들 사이에 퍼졌고, 이를 틈타 당국은 보드카에 세금을 물려 주요 국고 수입원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생명의 물’을 맛본 러시아 사람들은 엉터리 영어로 유럽 사람들에게 보드카를 달라고 했답니다. “기미 드렌키 오코비텐.(Give me drink aqua viate)”
보드카와 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안주인 정어리는 크로피브니츠키가 살던 시대에도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었나 봅니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주세가 어떻게 부과되었는지 정말 궁금해지네요.) 그런데 그것보다도 시인은 ‘지상 모든 육의 기관이니까’라는 구절이 머리에 남습니다. 1932년 10월 26일 스탈린은 막심 고리키의 집에서 소비에트 작가들과 만나 예술가는 “인간 영혼의 엔지니어”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예술은 인민들이 올바른 당의 이데올로기를 따를 수 있도록 지도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지요. 딱히 크로피브니츠키가 스탈린의 입장을 비판하려고 ‘지상 모든 육의 기관’이라는 표현을 쓴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엔지니어와 기관(organ), 영혼과 육의 간극은 상당히 커 보입니다. 기꺼이 노동하여 지상의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하는 영혼을 만들겠다는 것과 어차피 육으로 태어나 춥고 배곯지 않아야 하니 움직여야 하는 존재자들의 기관이 되겠다는 것은 대립되는 입장은 아니더라도 매우 큰 차이를 가져올 듯합니다.
리아노조보 그룹의 리더가 하시는 말씀이니 새겨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그룹의 다른 시인들의 시에서 이러한 입장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다음번에는 누굴 먼저 읽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리아노조보 그룹에 참여했던 시인들 중에서 얀 사투놉스키나 에두아르트 리모노프의 시를 읽어 보겠습니다. 앞으로 한 몇 달 간은 리아노조보 그룹의 시를 더 읽고 다른 문학운동들을 조사해 보려고 합니다.
PS. 번역한 게 아까워 덧붙입니다.
*** Полночь. Шумно. Тротуар. Пьянка. Ругань. Драка. Праздник. Хрипы. Вопли. Безобразник Едет в Ригу. Тротуар Весь в движении. Угар В головах шумит, проказник. Полночь. Шумно. Тротуар. Пьянка. Ругань. Драка. Праздник. |
*** 한밤. 시끄러. 보도블럭. 술판. 쌍욕. 쌈박질. 명절. 코 고는 소리. 비명. 깡패가 리가에 간다. 보도는 붐빈다. 탄내가 머릿속에 울린다, 까불기는. 한밤. 시끄러. 보도블럭. 술판. 쌍욕. 쌈박질. 명절. |
СОВЕТ ПОЭТАМ Длинные стихи Читать трудно И нудно. Пишите короткие стихи. В них меньше вздора И прочесть их можно скоро.
1965 |
시인에게 보내는 충고 시가 길면 읽기 어렵고 지겹습니다. 시는 짧게 쓰세요. 그래야 헛소리가 적고 금방 읽힌 답니다.
196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