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현대시 읽기>를
시작하며
- 겐리흐 삽기르의 시집 『목소리들』(1958-1962) -
이 종 현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지난 11월 17-18일, 모스크바의 러시아국립인문대학교에서 ‘삽기롭스키예
치테니야’라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직역하면 ‘삽기르 독회’ 정도가 될 텐데,
1928년 11월 20일에 태어난 러시아 시인
겐리흐 베니아미노비치 삽기르(Генрих Вениаминович Сапгир, 1928-1999)를
기리며 매년 이맘때쯤 여는 심포지엄이었습니다. 창피하지만 저는 ‘삽기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았습니다. 한국에서 공부할 때도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심포지엄에는 생전에 삽기르를 알던 할머니, 할아버지
문인들이 와서 그의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고 그의 시로 만든 노래를 틀기도 했습니다. 삽기르의 법정상속인인
외손자 사샤도 참석했습니다. 매년 심포지엄을 주최하고 삽기르의 시집을 편집해 내기도 했던 유리 오를리츠키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삽기르는 모스크바의 신촌쯤 되는 노보슬라보츠카야 지하철역(위치도 신촌, 이름도 신촌입니다) 근처에 어마어마하게 크고
비싼 아파트에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동화, 동시는 물론
어린이를 위한 희곡도 매우 많이 썼습니다. 소련에 있는 모든 어린이 극장들이 그의 희곡을 공연할 때마다
그에게 돈을 지불해 그는 소련 시절에도 부유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자란 외손자 사샤는
그 큰 집에 살면서 외할아버지의 책들을 처분하고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
현대시를 읽고 글을 써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무엇보다도 막막했습니다. 저는 소설 <닥터 지바고>를
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서정시를 중심으로 시 이론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소련에서 나올 수 없었던 <닥터 지바고>가
1957년 밀라노에서 이탈리아어로 출간되고 파스테르나크는 1960년에 죽었기 때문에 제가
주로 읽는 시들은 1960년 이전에 나온 것들입니다. 1900년대
초반, 한 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며 보랏빛 시를 쓰던 상징주의자들, 알쏭달쏭한 상징들이 지겹다며 명징한 시어를 쓰자던 아크메이스트들, 둘
다 구시대의 유물을 반복하고 있다며 새 시대의 새로운 시를 주장했던 아방가르디스트들, 프롤레타리아가
주인이 되는 시를 써야 한다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인들을 주로 읽습니다. 파스테르나크가 살면서 활동했던
시기가 대략 이 6-70년에 이르기 때문에 저는 그의 시들을 표본으로 삼아 당시 서정시가 역사적으로, 이론적으로 어떻게 변화했는지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1960년 이후의 시들은 정말 모릅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이오시프 브로드스키만 좀 읽어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던
차에 그다지 어감이 살갑지 않은 ‘삽기르’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고 궁금하여 그의 시집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마침 주로 활동했던 시기가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라 제가 읽어보지 않은 시들을 찾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소련 시대에 시를 공식적으로 출판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삼이즈다트’라는 자가 출판 형태로 시집을 내서 서점에서는 그의
초기 시집들을 구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선집에 수록된 시들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선집 두 권과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까지 출간된 시집 몇 권의 피디에프 파일은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쓴 시들을 묶은 첫 시집 『목소리들』은 총 58편이라고 하는데 선집들은 대략 30편 정도만 담고 있습니다. 제가 읽은 이 30편들 중에서 재미있다고 생각한 시들, 앞으로 러시아 현대시를 읽으면서
고민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지점들을 보여주는 시들을 추려서 번역해 보았습니다.
1. 반복
ГОЛОСА Вон там убили человека, Вон там убили человека, Вон там убили человека, Внизу – убили человека. Пойдем, посмотрим на него. Пойдем, посмотрим на него. Пойдем, посмотрим на него. Пойдем. Посмотрим на него. Мертвец – и вид, как есть мертвецкий. Да он же спит, он пьян мертвецки! Да, не мертвец, а вид мертвецкий... Какой мертвец, он пьян мертвецки – В блевотине валяется... В блевотине валяется... В блевотине валяется... ........................................... Берись за руки и за ноги, Берись за руки и за ноги, Берись за руки и за ноги, Берись за руки и за ноги И выноси его на двор. Вытаскивай его на двор. Вытряхивай его на двор! Вышвыривай его на двор! – И затворяй входные двери. Плотнее закрывайте двери! Живее замыкайте двери! На все замки закройте двери! Что он – кричит или молчит? Что он – кричит или молчит? Что он – кричит или молчит? Что он? – кричит или молчит?.. |
목소리들
저기 - 사람을 죽였다, 저기 - 사람을 죽였다, 저기 - 사람을 죽였다, 저 아래 - 사람을 죽였다.
어서 가, 그를 보자. 어서 가, 그를 보자. 어서 가, 그를 보자. 가자. 그를 보자.
죽었다 - 죽은 이의 모습이다, 아니 자고 있군, 죽도록 퍼 마셨군! 그래, 죽은 이가 아니라, 죽은 이의 모습이군... 죽기는 무슨, 죽도록 퍼 마셨군 -
토사물에 뒹굴고 있어... 토사물에 뒹굴고 있어... 토사물에 뒹굴고 있어... ..................................................
팔과 다리를 잡어라, 팔과 다리를 잡어라, 팔과 다리를 잡어라, 팔과 다리를 잡아서
마당으로 그를 들어내라, 마당으로 그를 끌어내라, 마당으로 그를 털어내라! 마당으로 그를 내팽개쳐라! -
그리고 입구의 문을 닫아라. 더욱 꼭꼭 문을 닫아라! 활기차게 문을 닫아걸어라! 모든 자물쇠를 걸어 문을 잠가라!
어떤가 - 그는 고함치는가 조용한가? 어떤가 - 그는 고함치는가 조용한가? 어떤가 - 그는 고함치는가 조용한가? 어떤가? - 그는 고함치는가 조용한가?.. |
실제로 이 시가 같은 이름의 시집의 가장 처음에 배치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두 권의 선집 모두 이 시를 가장 먼저 선보입니다. 저는 파일을
열어보고 우선 매우 기뻤습니다. 시행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어와
시행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제가 그만큼 사전에서 단어를 덜 찾아도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반복이
많은 시는 읽는 사람을 홀리게 합니다. 같은 말을 반복해서 주문을 거는 것처럼 말입니다. 게다가 반복이 많은 시들이 으레 중간 중간 변주를 주듯 이 시 역시 갑자기 조금씩 바뀝니다. 주로 각 연의 4행에서 그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차이와 반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차이 나는 반복? 같은 방법으로 변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방법 자체에도 변화를 줍니다.
갑자기 쉼표에서 마침표로 바뀐다든지, 접두사는 같지만 어간은 다른 동사들을 넣는다든지. 다만 왜 꼭 각 연의 4행에만 변화를 주었을까 궁금합니다. 한 연이 4행인 시에서 최초의 3행은
반복적 리듬감을 형성하기 위한 최소 요건인 것일까요? 사실 이 시에서 사전을 찾아본 단어는 하나입니다. 바로 ‘토사물’을 뜻하는 ‘블레보티나(блевотина)’입니다. 그리고 이 토사물이 가장 저의 눈길을 끕니다. 마지막 행에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점, 점, 점을 늘어놓아 ‘토하고 있는데 힘들어, 말해 뭐해...’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아니면 토사물의 알갱이들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일까요?
2. 점과 침묵
ВОЙНА БУДУЩЕГО Взрыв! ... ............................................... ........................................... ......... ...... ................................ ....................... ........................... ......... ....... ... ...... .... ... ... .................... ..................... ................... ............... ............ ......................................... ......................... Жив!?! | 미래의 전쟁 폭발! ... ............................................... ........................................... ......... ...... ................................ ....................... ........................... ......... ....... ... ...... .... ... ... .................... ..................... ................... ............... ............ ......................................... ......................... 살았나!?!
|
시집 파일의 스크롤을 조금 더 내려 보면 점, 점, 점이 더 많이 나옵니다. 말 그대로 점, 점, 점이 폭발 합니다. 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폭발!’이 일어나면 당연히
아수라장이 되니 말이 소용없는 것을 묘사한 걸까요? 아니면 그 아수라장이 되는 것들을 일일이 말로 설명하기
힘들어 점을 늘어놓은 것일까요? 도대체 점의 개수는 왜 달라질까요? 저는
이 시를 옮겨 적으면서 점의 개수를 파일과 똑같이 맞추느라 힘들었습니다. 점의 개수를 한참 세고 있다
보면 ‘살았나!?!’라고 묻습니다. ‘폭발’과 ‘살았나’ 사이를 침묵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는 전언으로
보아야 할지 고민됩니다. 사실 이 점, 점, 점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라는 19세기 초반의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에도 나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라는 시로 유명한 시인이지요. 그의 시 <가을>(1933)의
마지막 연은 다음과 같이 끝납니다.
Плывет. Куда ж нам плыть?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떠간다. 우리는 어디로 떠갈 것인가?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소련의 저명한 기호학자 유리 로트만은 이 갑작스러운 점, 점, 점을 ‘마이너스-기법’의 하나로 설명합니다. 예상되는 시의 형식적 리듬감을 방해하여 독자의
지각을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을 삽기르의 시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요? 19세기 초반의 점, 점, 점과 ‘미래의 전쟁’을 이야기하는 20세기
중반의 점, 점, 점은 다르게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요? 역시 사전을 찾지 않게 해주어서 고마운 시이지만 어떻게 하면 독해가 폭발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고민하게
하는 시이기도 합니다.
3. 이야기와 드라마
“ОБЕЗЬЯН” "На что жалуетесь, гражданка? Была она баба бойкая, а тут будто язык отнялся. Стоит, плачет – ничего сказать не может. "Дай ей новую квартиру и десять тысяч от моего имени." (Из народного фольклора) Вышла замуж. Муж, как муж. Ночью баба Разглядела его, по совести сказать, слабо. Утром смотрит: весь в шерсти. Муж-то, господи прости, Настоящий обезьян. А прикинулся брюнетом, чтобы значит, Скрыть изъян. Обезьян кричит и скачет, Кривоног и волосат. Молодая чуть не плачет. Обратилась в суд. Говорят: нет повода... Случай атавизма... Лучше примиритесь... Не дают развода! Дивные дела! – Двух мартышек родила. Отец монтажник – верхолаз На колокольню Ивана Великого от радости залез И там на высоте, На золотом кресте Трое суток продержался, вися на своем хвосте. Дали ему премию – Приз: Чайный сервиз. Жена чего ни пожелает, выполняется любой ее каприз!
Что ж, был бы муж, как муж хорош, И с обезьяной проживешь. | “원숭이들의” “시민여성동지, 무엇을 불평하십니까? 그녀는 약삭빠른 여편네였는데, 혀가 굳은 모양이더라고요. 서서 울기만 하고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녀에게 새 아파트와 1만 루블을 내 이름으로 주어라.” (어느 민담에서) 일단 시집을 갔어. 남편이란 거기서 거기니까. 밤에 여자가 남편을 훑어보긴 했는데, 솔직히, 대충 봤대. 근데 아침에 보니까, 온몸이 털인 거야. 세상에, 남편이 말이지, 진짜 원숭이였던 거야. 근데 털이 검은 사람 흉내를 내더래, 그러니까, 자기 흠집을 숨기려고 말이지. 원숭이는 소리 지르고 뛰어 다니고, 다리는 굽고 털은 북슬북슬. 젊은 여자는 아주 울 판이었지. 그래서 법원에 갔어. 그런데 사유가 안 된다는 거야... 격세유전의 경우라나... 잘 화해하고 사시오... 이혼을 안 시켜주는 거야! 신기한 일이지! - 도깨비 같은 원숭이 두 마리를 낳아줬어. 고충빌딩에서 기계를 설치하는 아비는 기쁜 나머지 이반 대제의 종루에 기어 올라갔고 그 높은 데서, 황금 십자가에 꼬리를 걸고 사흘 밤을 매달려 있더라고. 그한테 상여금을 줬어 - 부상으로 찻잔 세트도 주고. 아내가 뭘 원하기만 하면, 온갖 변덕도 다 들어주었지!
그러니까, 남편이 누구든, 좋은 남편이기만 하면, 원숭이랑도 살 수 있다 이 말씀이야. |
<목소리들>처럼
말을 반복하고 <미래의 전쟁>처럼 말을 안 해서
사전검색의 수고를 덜어주는 시들이 있는가 하면 말을 너무 많이 하는 시들도 있습니다. 제목에 왜 따옴표가
붙었는지 모를 시 <“원숭이들의”>와 <초연>이 그렇습니다. 두
시는 내러티브가 있는 산문처럼 설정된 상황을 먼저 자세하게 제시합니다. 특히 <“원숭이들의”>의 경우에는 내러티브의 고전적인 도식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습니다. 젊은 여자가 시집을 갔는데 알고 보니 남편이 진짜 원숭이더라, 도저히 못 살겠어 이혼하려고 했지만 이혼을 못 하고 결국 자식새끼를 낳고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복이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더라. 게다가 이야기에서
도출할 수 있는 교훈까지 전해줍니다.
ПРЕМЬЕРА Начинается премьера – Драма Шекспира, Мольера И Назыма Хикмета. Героиня Джульетта, Дочь короля Лира, Любит слесаря Ахмета. Ахмет не любит Джульетту. Ахмет встречает Анюту... В эту самую минуту Побелела, как стена, Крикнула: "Боюсь отца!" Публика накалена. Режиссер волнуется. Дело близится к развязке. Вот Джульетта в черной маске... Отравлена Анюта! Ахмет ее за это... Зарезана Джульетта, Король казнит Ахмета. Не выдержали нервы – Режиссер схватил рапиру, Бросился на сцену. – Варвар! Одним ударом Покончил с Лиром. Сам Охвачен пафосом – Продолжает монолог Оскорбленного отца. (Публика беснуется.) Вдруг Провалился в люк. (Публика неистовствует.) Справедливость торжествует. И хохочут фурии В храме бутафории И визжат эринии У трамвайной линии. | 초연(初演) 초연을 시작한다 - 셰익스피어, 몰리에르, 나즴 히크메트의 드라마. 여주인공 줄리에트, 리어왕의 딸이 철물공 아흐메트를 사랑한다. 아흐메트는 줄리에트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흐메트는 아뉴타를 만나고 있다... 바로 이때 그녀는 벽처럼 하얗게 질려 외친다: “아버지가 무서워!” 객석이 달아오른다. 연출이 흥분한다. 사태는 대단원을 향해 가고. 검은 가면을 쓴 줄리에트가... 아뉴타가 독살되었다! 아흐메트는 그래서 그녀를... 줄리에트는 칼 맞아 죽었고, 왕은 아흐메트를 처형한다. 신경이 견딜 수 없어서 - 연출은 장검을 움켜쥐고, 무대로 뛰어들었다. - 야만인! 일격에 리어를 끝장내었다. 그 자신 격정에 휩싸여 모욕당한 아버지의 모놀로그를 계속한다. (객석이 격분한다.) 갑자기 그가 맨홀로 사라졌다. (객석이 광란한다.) 정의는 승리한다. 소도구의 사원에서 푸리에스가 깔깔거린다 트람바이 기다리는 줄에서 에리뉘에스가 끽끽거린다. |
<초연>의 경우에는
기존의 희곡 내용을 비틀고 절정의 순간에 내러티브의 바깥에 있던 연출이 뛰어들어 스스로 내러티브의 일부가 됩니다.
‘초연’의 상황이라는 전체 내러티브가 있고 그 안에 리어왕의 딸 줄리에트의 내러티브가 있습니다. 연출은 두 개의 내러티브를 넘나들며 그 경계를 흐리게 하더니 갑자기 맨홀로 쏙 빠져나갑니다. 남는 것은 ‘정의는 승리한다’라는
왜 들어갔는지 알 수 없는 말, 연극에 사용된 소도구들, 푸리에스, 에리뉘에스 등입니다. ‘푸리에스’와 ‘에리뉘에스’는 사실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신화에서 복수의 여신들을 ‘에리뉘에스’라고 부르는데, 로마 신화에서는 ‘푸리에스’라고 부릅니다. 심오한 의미가 있을 것도 같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각운을 맞추기 위해 넣은 것으로 보입니다. 소도구를
뜻하는 ‘부타포리(бутафории)’와 ‘푸리(фурии)’(푸리에스의 러시아어 표기), 줄을 뜻하는 ‘리니(линии)’와 ‘에리니(эринии)’(에리뉘에스의 러시아어 표기). 신나게 내러티브를 교란시키더니 결국 남는 것은 말뿐인 공허한 교훈들, 재미있는
말소리들입니다. 보통 내러티브와 밀접하지 않다고 여겨져 온 장르인 시에 들어간 내러티브는 소설의 것과
같은 역할을 할까요? 현대 소설 역시 고전적인 내러티브에서 많이 벗어난다고들 하는데, 이러한 새로운 변종 내러티브들과 현대시의 내러티브는 어떻게 다를까요?
4. 자기반영성
ДВА ПОЭТА На дороге Волочится воловья шкура. В овраге Лежит ободранная туша, Ноги кверху задраны, На осине голова. Глазеет бритая сова. К реке идет Сапгир и Холин. Смеется филин Над простофилями. Овечья шкура удаляется, Под ней лопатки Выделяются, Четыре палки Передвигаются. Поэт Холин заявил: "У меня возникло подозрение, Что это – обман зрения". Но по мнению Сапгира, Эта шкура Не собачья, Это человечья Кожа, из которой шьют перчатки, На пятки ставят заплатки, Вьют спирали На электроплитки; Пергамент, на котором Вырубают правила морали Топором!............... А корову все же ободрали Несмотря на прописи морали. Хохочет Холин, Хохочет филин, Хохочет эхо Бычья шкура лопается от смеха. И в лесу становится тихо. | 두 시인 길가에 수소 가죽이 질질 끌린다. 골짜기에는 너덜너덜한 짐승의 몸뚱이가 누워있는데, 위로 치켜 뻗은 다리, 머리는 사시나무 위에. 면도한 부엉이가 말똥말똥 쳐다본다. 삽기르와 홀린이 강가로 간다. 올빼미가 얼간이들을 비웃는다. 양의 가죽을 벗기자, 그 아래 어깨뼈가 드러나고, 막대기 네 개가 자리를 바꾼다. 시인 홀린이 공표한다: “나는 심히 의심스럽다, 이것은 시각의 기만이다.“ 하지만 삽기르의 의견에 따르면, 이 가죽은 개의 것이 아니라, 이것은 인간의 피부인데, 그것으로 장갑을 만들기도 하고, 발뒤꿈치에 덧대기도 하고, 전기난로에다 나선형으로 감기도 한다; 도끼로
도덕의 법칙을 도려내는 양피지인 것이다!............... 도덕의 밑그림이 있음에도 어쨌든 암소의 가죽을 벗겨낸 것이다. 홀린이 깔깔 웃는다, 올빼미가 깔깔 웃는다, 메아리가 깔깔 웃는다 수소의 가죽은 웃다가 터져버린다. 숲이 조용해진다. |
리어왕을 일격에 베어버린 연출은 맨홀로 빠져 나가고 ‘시에 대한 시’가 나타납니다. 시 <두
시인>에서는 삽기르 본인과 그의 친구 이고르 세르게예비치 홀린(Игороь
Сергеевич Холин)이 나타납니다. 길바닥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가죽이 질질
끌리며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 가죽은 뒤에 나오는 양의 가죽인지 암소의 가죽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서 벗겨낸 이 가죽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기 위해 시인들이 나타납니다.
두 시인의 의견은 다르지만 결국 모두가 웃겨 죽겠다는 듯 깔깔 거리고 논의의 대상인 가죽 역시 웃다가 터집니다. 시인들이 논의하는 것이니 아마도 가죽은 시 혹은 시에 관련된 무엇으로 보입니다. 삽기르와 홀린은 시를 폭파하려고 시를 쓰는 것일까요?
ПОЭТ и МУЗЫ Собралась компания – Литобъединение. Поэт на стол залез. Вокруг расселись 9 муз: Кроме музы Музыки – Муза Физики, Муза Математики, Муза Электроники, Муза Кибернетики, Муза Бионики, Муза Космической войны, Муза Общей тишины И девушка по имени Муза. – Стихотворение "Завихрение". Винт Винтообразно Ввинчивается...” Фса, фсса, ффссса! Музы: – Мало пафоса. Поэт: – Продолжать дальше? Музы: – Продолжайте. Больше Фальши. Поэт: – Винт завинчен до отказа. Тормоза. Рванул Реваноль. Боль! Моя голова! Не крутите слева направо! Крац. Крец. Свинтил ее подлец! Зараза! Конец... Девушка по имени Муза: – Прекрасное стихотворение! Поэт: – А ваше мнение? – Вздо-о-ор! Гласит античный хор. Поэт превращается в белку, Прыгает на книжную полку. Говорит об ощущении, О том, Что современность – это фантом... Музы выражают свое возмущение. Поэт: – Нет, Никогда я не был дилетантом! | 시인과 뮤즈 일동이 모였다 - 문학협회. 시인이 책상에 기어들어 앉았다. 그를 둘러싸고 9명의 뮤즈가 앉았다: 음악의 뮤즈 말고도 - 물리학의 뮤즈, 수학의 뮤즈, 전자공학의 뮤즈, 인공지능학의 뮤즈, 생명공학의 뮤즈, 우주 전쟁의 뮤즈, 모두의 정적의 뮤즈 그리고 뮤즈라는 이름의 아가씨. - 시의 제목은 “소용돌이”입니다. 나사가 나사의 모양으로 돌아 들어간다... ” 짝, 짝, 짝짝! 뮤즈들: - 파토스가 부족하오. 시인: - 더 읊어 볼까요? 뮤즈들: - 계속해 보시오. 거짓부렁을 더 늘어보시오. 시인: - 나사는 안 조여질 정도로 조여졌다. 브레이크. 리바놀이 솟구쳤다. 아야! 내 머리! 오른쪽으로 돌리지 마세요! 크라츠. 크레츠. 개놈이 머리의 나사를 풀었어! 전염 될 거야! 끝장이야... 뮤즈라는 이름의 아가씨: - 멋진 시로군요! 시인: -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 개-소-리! 고대의 합창단이 노래한다. 시인은 다람쥐로 변해서 책장으로 폴짝 뛰어 오른다. 느낀 바를 말한다, 그러니까 현대란 – 환영(幻影)이라는 것... 뮤즈들이 당혹감을 표한다. 시인: - 아니오, 나는 결코 딜레탕트였던 적이 없습니다! |
한편, <시인과 뮤즈>라는
전형적인 제목의 시에서는 시인 자신이 판단과 품평의 대상이 됩니다. 그를 가운데 두고 갑론을박하는 이들은
전통적으로 시인의 귀에 시를 노래해 주던 뮤즈들입니다. 삽기르는 이과 학문들에 무슨 원한이 있는지 뮤즈들에게
각각 공학과 자연과학의 대표자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전 이 시의 설정은 재미있지만 뭔가
소련 체제에서 억압받는 시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심히 의심됩니다. 그 시대에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제가 시인이라도 시를 알음알음 자가 출판해서 돌려봐야 한다면 원한이 생길 듯합니다. 하지만 시가 시인과
시에 대해 성찰한다는 것, 즉 시의 자기반영성이 아무리 현대시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소련 체제에서 한풀이 말고 어떤 식으로 다르게 나타났을지 궁금합니다. 다람쥐로 변한 이 시의
시인은 ‘현대란 – 환영이라는 것...’, ‘아니오. 나는 결코 딜레탕트였던 적이 없습니다!’라는 대사를 내뱉으며 철의 뮤즈들 앞에서 비장하게 바들바들 떨고 있는 듯합니다.
5. 번역
그런데 <시인과 뮤즈>를
번역하면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시인이 읊는 시를 어떻게 옮길 것인가 입니다. 이 글에 번역된 모든 시들에는 재미있는 각운들과 소리들이 반복됩니다. 우리말로
이것을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시의 내용과 시행의 길이만 최대한 옮겨볼 수밖에 없습니다. ‘리바놀이
솟구쳤다.’라는 문장의 러시아어 발음을 옮기자면 ‘르바눌
레바놀(Рванул / Реваноль.)’인데 정말 이 소리를 옮길 수가 없습니다. 또, ‘크라츠(Крац)’, ‘크레츠(Крец)’는 러시아어에 없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단어입니다. 이
단어들은 개놈을 뜻하는 ‘포들레츠(подлец)’, 끝장을
뜻하는 ‘코네츠(конец)’와의 각운을 이루기 위해서 들어간
것일까요? 구글에서 크라츠를 검색 해보면, 동독의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이자 소련 의학아카데미 외국인회원이었던 헬무트 크라츠가 나옵니다. 크레츠는 전문용어 사전에
따르면, 금으로 제품을 만들 때 발생하는 금가루로 독일어에서 온 단어라고 합니다. 이러한 범상치 않은 뜻들을 대입해서 시를 읽어볼 수도 있겠습니다. 유명
산부인과 의사 크라츠가 태아의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리려 하자 소독약 리바놀이 터져 나왔고 나사의 머리, 그러니까
태아의 머리를 거칠게 푼 나머지 금가루가 휘날렸다. (쓰면서 생각하다보니 이렇게 읽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БУКЕТ Науму Олеву - Кто там? - Это я. Привет. Ноль пришел ко мне с букетом Замороженных цыплят. Меня смущают птицы, У птиц такие лица! - Одевайся поскорее, Прошвырнемся по “Бродвею”. - Предлагая голый веник, Говорит мой ученик. Что ж, пошли - Два еврея; Я и Ноль, Я и моя зубная боль, Я и 88! Любопытные глядят, Что такоке мы несем? Букет? Цыплят? Девушки, глядите: Это - Цыплята, Размышляющие о конце света, Цыплята, Размышляющие о конце света, Цыплята С грустными глазами, Которые носили Талес, Которые плясали Фрейлехс, Которых убивали В гетто. Цыплячьи детские скелеты... Так и гуляем: Я и Ноль, Я и моя зубная боль, Я - и красавец-тунеядец С останками нелепых птиц. | 꽃다발 나움 올레프에게 - 거기 누구지? - 나야. 안녕. 영(零)이 나에게 다가왔다 냉동 병아리 꽃다발을 들고. 새들은 나를 당황시킨다, 새들은 그런 얼굴을 가졌다! - 어서 옷 입어, “브로드웨이”를 어슬렁거려 보자구. - 헐벗은 자작나무 가지를 내밀며, 나의 학생이 말한다. 자, 그럼 출발 - 유대인 두 명: 나와 영, 나와 나의 치통, 나와 88!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쳐다본다, 우리가 무엇을 들고 가는지? 꽃다발? 병아리들? 아가씨들, 여기를 보세요: 이건 - 병아리들이랍니다. 세계의 끝을 사유하는 병아리들, 세계의 끝을 사유하는 병아리들, 슬픈 눈을 가진 병아리들, 탈레스를 두르고 다녔던 병아리들, 프레이렉스(FREYLEKHS)를 추던 병아리들, 게토에서 죽어가던 병아리들. 병아리들의 어린 두개골... 우리는 그렇게 건들거린다: 나와 영, 나와 나의 치통, 나 – 그리고 우스꽝스런 새들의 시체를 든 잘생긴 무위도식자. |
크라츠, 크레츠는 어차피 러시아어에서도 낯선 단어이니 소리 그대로
옮겨도 무방할 듯합니다. 문제는 <꽃다발>에서 커집니다. 이 시는 소련의 시인, 작사가, 갤러리 운영자였던 나움 올레프(Наум Олев)에게 바치는 시입니다. 삽기르의 친구로 보입니다. 그의 이름과 성에서 앞글자만 따면 ‘놀(Ноль)’이 되는데 이게 바로 시에서 러시아어로는 대문자, 제 번역에서는
진한 글씨체로 표시한 숫자 ‘영’, 제로입니다. 아마 올레프의 별명이 ‘놀’이었나
봅니다. 그걸로 말장난을 하는 것 같은데 우리말 ‘영’으로 옮기면 뭔가 무(無)의
차원을 가리키는 듯해서 무시무시해 집니다. 어차피 시에 유대인 모티프나 세계의 끝이 나와서 분위기가
무겁기는 하지만요. 그렇다면 ‘놀’이라고 옮기고 각주에 ‘놀’은
러시아어로 숫자 0을 가리킨다고 적어야 할까요?
6. 시와 도덕
지금까지는 시의 언어적, 문학적 요소들을 보았습니다. 이것들과는 전혀 다른 문제가 저를 또 걸고넘어집니다. 시 <꽃다발>에서 유대인, 탈레스, 프레이렉스, 게토가 매우 걸립니다.
탈레스(탈리트tallit, 탈리스tallis라고도 한답니다)는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머리에 쓰는 천이라고
하고, 프레이렉스(freylekhs)는 유튜브를 검색해 보니
유대인들의 구슬픈 음악 장르로 보입니다. 삽기르의 이름이 유대인스러워서 검색해 보니 유대교 문화를 잘
알긴 했지만 스스로를 유대인으로 여기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 시에서 유대인 학살을 연상시키는 시어들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시에서 연상되는 도덕적, 윤리적 문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두 시인>에서는 도덕의
법칙들을 미지의 가죽에서 오려내기도 했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도덕에 불만족스러웠는지 새로 도덕의 양피지를
도려냈습니다. 그리고 인간 혹은 양 혹은 암소 혹은 수소의 가죽은 웃다가 터져버렸습니다. 시는 도덕의 대안이지만 결국 웃다가 터져버리는 것일까요?
삽기르의 첫 시집에서 몇 편을 골라 읽어보고 궁금한 것들을 열거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이런 문제들을 중심으로 러시아 현대시들을 읽어 보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삽기르의 다른 시집들도 구해지는 대로 읽을 수 있겠습니다. 다음번에는 삽기르와 가죽에 대해 토론하던
이고르 홀린의 시집을 구해 읽어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