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부 지도 그리기
교차성, 정체성의 정치, 그리고 유색인 여성에 대한 폭력
킴벌리 크랜쇼
쏠(페미니즘 번역 모임) 옮김
Ⅱ. 정치적 교차성
정치적 교차성 개념은 유색인종 여성이 최소 두 개의 종속 집단 내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준다. 이 종속 집단들은 빈번하게 서로 상충하는 정치적 안건을 제시한다. 이렇게 때로 서로 대립하기도 하는 두 집단 사이에 존재하는 개인의 정치적 에너지를 분할해야 한다는 요구는 유색인종 남성과 백인 여성이 좀처럼 마주할 일이 없는 그런 교차적 무력화[역량박탈]의 차원에 다름 아니다. 사실 그들[유색인종 남성과 백인 여성]의 인종적이면서 젠더화된 종별적인 경험은 비록 그것이 교차되어 있다 할지라도 종종 집단 전체의 이해를 제한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예를 들어 특정 젠더의-남성- 유색인이 경험한 인종차별이 반인종차별 전략의 매개 변수를 결정하는 경향이 있고, 특정 인종의-백인- 여성이 경험한 성차별이 여성 운동의 기반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단순하게 두 담론이 인종 또는 가부장제라는 “추가적인(additional)” 사안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유색인종 여성을 무시한다는 게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이 담론들이 종종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차원 전체를 분명하게 하는 각각의 작업에서조차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색인종 여성은 유색인종 남성이 경험하는 것과 항상 같지만은 않은 식의 인종차별을 겪고, 백인 여성의 경험과 항상 평행하지는 않는 식의 성차별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반인종차별과 페미니즘은 심지어 그 [담론의] 용어들 자체에서도 한계가 있다.
인종과 젠더의 교차성을 다루는 반인종주의와 페미니즘 담론이 실패하면서 발생한 가장 문제적인 정치적 결과 중 하나는 “유색인종”과 “여성”의 이익 각각이 향상될 때까지, 하나의 분석이 보통 은연중에 다른 것의 타당성을 부정한다는 사실이다. 페미니즘이 인종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지 않았다는 것은 페미니즘 운동의 전략이 유색인종의 종속을 복제하고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반인종주의가 가부장제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하기를 실패했다는 것은 반인종차별주의가 여성의 종속을 재생산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호적인 묵인은 유색인종 여성에게 특히 어려운 정치적 딜레마를 안겨준다. 둘 중 어느 분석을 차용해도 우리[유색인종 여성]가 종속되는 근본적인 차원을 부정하게 되고 유색인종 여성을 더 크게 세력화 할 수 있는 정치적 담론의 발전은 불가능해진다.
A. 가정폭력[아내폭행]의 정치화
이 논문을 위해 정보를 모으는 과정에서 내가 겪었던 일들을 보면, 교차성 문제를 무시하거나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는 정치적 전략으로 인해 유색인종 여성들의 정치적 관심사는 잘 알려지지 않고, 때로는 [정치활동이] 저해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구역별 가정폭력[아내폭행] 중재 비율을 나타내는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의 통계자료를 검토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통계자료가 로스앤젤레스의 인종 분리 [미국에서의 인종분리는 일상생활 면에서 소위 말하는 인종그룹별로 나뉘는 것을 말한다_역자주] 정도를 고려해 볼 때 인종 그룹별 체포건수의 대략적인 그림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은 자료를 제공하지 않았다. 경찰국 대리인은 통계자료를 공개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를 경찰국 내외에 있는 가정폭력[아내폭행] 활동가들의 우려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소수자 공동체 내의 가정폭력[아내폭행] 정도를 반영하는 통계자료는 가정폭력[아내폭행]을 심각한 문제로 다룰 수 있게 되기까지 들였던 장기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기 위해 선별적으로 해석되고 공론화될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내가 전해들은 얘기에 따르면 활동가들은 가정폭력[아내폭행]을 문제로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통계자료가 ‘이 문제는 소수집단의 문제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필요가 없다’고 일축해버릴 수 있는 여지를 남기게 될 지도 모를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정보제공자는 또한 다양한 소수자 공동체의 대표들이 이러한 통계자료가 공개되는 것에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명백히 그 자료가 부당하게 흑인과 갈색인종[brown people-북아프리카, 북동아프리카, 서아시아,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원주민과 같은 다양한 인구를 포함하는 일련의 가설적 인종 그룹_역자주] 공동체들을 대단히 폭력적으로 묘사하고, 이것이 잠재적으로 고정관념을 강화하게 될 것에 대해 걱정했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강압적인 경찰의 진압 및 다른 차별적 관행을 정당화 하려는 시도에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불안감은 익숙하면서 근거가 없지 않은 전제에 기반하고 있다. 특정 소수자 공동체-특히 흑인 남성-는 이미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이라는 고정관념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몇몇은 운동(political action)의 목표를 가정폭력[아내폭행]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흑인 공동체에 대한 고정관념을 더 공고히 하고 공동체에 대한 부정적인 믿음과 싸워나가려는 노력을 약화시키는 데만 일조할 까봐 걱정한다.
이 설명은 어떻게 유색인종 여성이 반인종주의와 페미니즘의 전략적인 침묵에 의해 지워질 수 있는가를 날카롭게 보여준다. 두 집단의 정치적 우선순위는 유색인종 공동체 내의 가정폭력[아내폭행]문제를 직면할 수 있는 정보들을 숨기는 방식으로 규정되었다.
1. 가정폭력[아내폭행]과 반인종차별 정치
유색인종 공동체 내에서 가정폭력[아내폭행]을 정치화 하려는 흐름을 저지하려는 노력은 보통 공동체를 온전하게 유지하려는 시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관점 절합(切合, articulation)은 다른 형태들을 취하게 된다.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이 유색인종 공동체 내에서 설 자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의 쟁점은 내부적으로 분열을 초래하고, 유색인종 공동체의 맥락 속에 그들과 상관없을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한 백인 여성 문제가 유입됨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가장 극단적인 레토릭은 젠더 폭력이 공동체 내부의 문제라는 점, 그리고 그것[젠더 폭력]이 공동체의 문제 그 자체인 젠더 종속을 정치화하는 모든 시도의 특징이 된다는 점도 거부한다. 샤하라 자드 알리(Shahrazad Ali)는 논란이 많은 그녀의 책 『흑인 여성을 이해하려는 흑인 남성을 위한 가이드북(The Blackman’s Guide to Understanding the Blackwoman)』에서 이 같은 입장을 취했다. 이 귀에 거슬리는 반페미니즘적 글에서, 알리는 가정폭력[아내폭행]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해방 사이의 긍정적 상관관계를 도출해 낸다. 알리는 흑인 공동체 내부의 악화되어 가는 상황을 흑인 여성의 불복종과 이 여성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 한 흑인 남성들의 탓으로 돌린다. 알리는 흑인 남성에게 흑인 여성들이 “무례”하다면 체벌을 가하도록 충고하기까지 한다. 그녀는 흑인 남성들에게 “그들의” 여자들을 훈육하는데 있어 온건함이 필요하다고 주의를 주면서, 흑인 남성이 인종차별에 의해 분열된 흑인 여성을 넘어서는 권위를 재탈환하기 위해서는 가끔은 육체적 힘에 의지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알리의 전제는 가부장제가 흑인 공동체에 이롭고 필요하다면 강압적인 방법을 통해 강화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통제 의지에 수반되는 폭력은 피해자인 흑인 여성에게뿐만 아니라 흑인 공동체 전체에 파괴적이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폭력에 대한 의지는 그런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위험한 행동양식을 확립시킨다. 그리고 수많은 다른 무시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영향을 미친다. 거의 40퍼센트에 가까운 노숙인 여성들과 아이들이 가정에서의 폭력에서 달아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살인죄로 수감된 11살부터 20살 사이의 어린 남성의 63퍼센트가 어머니를 학대하는 배우자를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집단 폭력, 살인, 그리고 다른 형태의 흑인에 대한 흑인의 범죄(Black-on-Balck crime)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정치권 내에서 갈수록 더 많이 논의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젠더와 권력에 대한 가부장적 생각은 가정 폭력[아내폭행]을 흑인이 흑인에게 저지르는 범죄에 대한 잇따른 주목할만한 사건으로서 인식하지 못 하게 한다.
흑인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 하려는 알리의 노력 같은 것은 참으로 극단적이다. 더 보편적인 문제는 공동체의 정치적 혹은 문화적 관심사가 가정 폭력[아내폭행]에 대한 모든 대중적 인식을 불가능하게 하는 방식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미국 백인 가정에서 가내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정도에 합의를 이루어냈다고 추정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은 왜 비백인 공동체 내부에서는 가정폭력 문제가 억압될까?’라는 또 다른 차원을 덧붙이는 사례임에 틀림없다. 흔히 유색인들은 왜곡된 대중적 인식을 강화할지도 모르는 문제를 회피하거나 단일 공동체 내의 문제를 인정하고 제기하는 것 사이에서 그들의 이익을 따져보아야 한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이 억압의 대가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왜냐하면 애초에 문제를 의논하는 것의 실패가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계속)